TA-7양끊음
백을 집은 자에게 현혹된 춘은 “먼저 커다란 악을 없앤 후, 원흉을 제거하라.”라는 지시를 듣고, 지에가 왕을 대신해 죽게끔 부추기게 된다. 그리고 지에는 떠나기 전, 서도를 쥔에게 맡긴다.
982년
뭐야? 칼 하나 만드는데 실수를 하다니, 손이 굳었나?
대장장이는 의아해하며 머리를 긁적이고는, 다시 창고에서 쇳덩이 하나를 꺼내 왔다.
……올해 가을은 너무 습하네.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차.
느낌이 뭔가 이상한데……
……!
뭐야…… 어떻게 이런 일이?!
쉐이가…… 깨어나려는 거야?
(걱정하며) 히익……?
평온했던 그림에 누군가 공연히 성난 구름 한 획을 그려 넣었다.
천둥이 요란하게 울렸고, 하얀 화폭 위에 짙은 먹 자국이 남겨졌다.
순식간에 기괴하고 흉측한 얼굴의 묵량들이 그림 속에 수도 없이 많이 생겨났다. 그것들은 사방팔방으로 흩어져 그림 속 아름다운 경치를 칠흑 같은 먹빛으로 덮어버렸다.
이건…… 내 그림이 아니야……
저리…… 꺼져!
숴 선생님,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저희를 따라 조용한 곳에서 잠시 쉬시지요.
더 꾸물거렸다가는 병부에 부임 보고를 올릴 시간은 놓칠 것 같네.
폐하께서 지금 백조에 사정이 생겼으니, 일단 들어오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어째서지?
저건…… 쉐이 능묘?
왕…… 무슨 짓을 한 거냐……
심장 박동이 한 차례 어긋났다. 그게 아니라면, 일순간에 심장이 2번 뛴 거였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이동도시가 갑자기 출발하면서 생긴 진동이었을까?
혹시 그것도 아니라면……
툭.
대리인의 손에 들린 책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둘째 오빠?!
지에, 지에!
……무슨 일이야?
……이걸 봐!
왕 오빠의…… 탄핵서? 누가 준 거야?
누군가가 이걸 사세대로 보냈어. 감정 대인은 어쩔 수 없이 폐하께 보고해야 했고. 지금 금위군이 곧 천경각으로 올 거라는 소식이 돌고 있어!
결국……
……결국!
왔군.
네놈…… 어째서 깨어 있는 거냐?
아니…… 아냐, 네 기척은 그것과 거의 비슷하지만, 넌 비어있는 껍데기 같은 모습으로 나타났을 뿐……
그 껍데기 같은 모습 역시 너 자신의 모습이다.
어쨌든, 넌 아직 꿈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나는 깨어 있다…… 몇백 년 전, 네가 내 꿈속에 뛰어들었을 때 깼지.
허세 부리지 마라…… 만약 네가 정말로 깨어난 거라면, 내가 어떻게 여기에 서 있을 수 있지?
넌 꿈에서 기지개를 켜고 있을 뿐, 깨어났다는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아직 자고 있는 몽유병 환자 주제에, 본인이 '깨어났다'라고 자처하는 건가?
하하, 몽유병? 꿈속을 떠도는 중이라고 해두지.
하지만 네 형제자매들과 하찮은 인간 사이의 싸움, 그리고 나를 대신하려는 네 허점투성이 계획이 눈에 뻔히 보이는구나.
사라질 운명을 피하기 위해 인류와 동족이 되려 하다니. 어떻게 그런 하찮고 변덕스럽기 짝이 없는 생물이 되려 하는 거지?
안타깝군…… 안타까워서 웃음이 날 지경이다!
잊지 마라…… 너를 무찌르고 천 년 동안 너를 가둔 게, 바로 그 하찮은 생물이었다.
깨어 있다 한들 그게 무슨 소용이지? 넌 실체 없는 환상에 불과할 뿐이다……
너를 죽이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런가?
대리인은 방금 지나온 복도를 돌아봤지만, 돌아갈 길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그러면 어째서 넌 두려워하고 있지?
아주 어렵게 나와 만날 기회를 얻은 것일 텐데. 만약 네게 두려움이 없었다면 넌 진즉 달려들어 나를 산산이 조각냈겠지……
불쌍하고…… 미련하구나.
……까불지 마라.
하하하하하하!
나와 목숨을 건 싸움을 할 생각 아니었던가?
덤벼라. 네가 가장 잘하는 것으로 겨루도록 하지.
허공에서 갑자기 바둑판 하나가 나타났다. 익숙한 균열 하나가 눈에 띄었다.
정체불명의 상대는 다짜고짜 고대의 바둑 규칙에 따라 백돌을 먼저 잡았다.
첫 번째 돌이 정중앙에 놓였다.
첫수, 천원.
……감히 나를 얕잡아보다니.
얕잡아본 건지 아닌지는 끝나봐야 알겠지.
자…… 이제 네 차례다.
……!
바둑꾼은 흑돌을 잡고 맞섰다. 가로세로 19줄을 가로지르는 이 게임은 그에게 너무 익숙한 것이었고, 오랫동안 패배의 쓴맛을 보지 못한 상태였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상대는 그의 모든 수, 모든 생각, 매 순간의 심경까지도 꿰뚫어 보는 듯했다.
분명 상대가 한 수 접어준 국면이었지만, 도무지 우위를 점할 수가 없었다.
말도 안 돼……
뭐가 말도 안 된다는 거지?
설마 네가 곰곰이 생각해 낸 기법, 하찮은 책략들이 내게는 아무런 비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아직도 깨닫지 못한 것인가?
왜냐하면, 나는 바로 너이기 때문이다.
……?!
하하, 벌써 기권할 생각인가? 이렇게 빨리 흥을 깨게 둘 수는 없다.
넌 반드시 이 대국을 끝마쳐야 한다.
……뜻대로 해주지.
바둑꾼은 이를 악물고 다시 바둑돌을 집었다.
한 수를 둘 때마다 그는 두통에 몸부림쳤고, 다시 한 수를 둘 때마다 그의 영혼은 갉아 먹혔다.
백여 수가 오간 후, 대국은 드디어 끝이 났다. 결국, 흑은 반집 차로 아슬아슬하게 승리했다.
하지만 바둑꾼의 숨은 거의 끊어지기 직전이었다.
(약한 숨소리)
……네 패배다.
네 오만함은 언제나 한결같았지……
하하…… 하하하하하하!
이 장난에 불과한 대국이 효력이 있고 없음은 차치하더라도, 나와 나 사이에 존재하는 대국이 겨우 이것 하나뿐이라고 생각했나?
……?
좋다. 이 '왕'이라는 이름의 대국은 네 승리로 쳐주마. 하지만, 전체를 놓고 보면 이 대국이 얼마나 하찮은 것이었는지 넌 짐작할 수 있나?
몇 걸음 물러나서 보고, 멀리 물러나서 봐라. 네가 심혈을 기울여 둔 그 묘수에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왕은 엉겁결에 몸을 일으켜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겨우 몇 걸음 떨어졌을 뿐인데, 이상하게도 바둑판이 작은 덩어리로 쪼그라들었다.
제아무리 거센 풍랑을 일으킨다 한들, 이 대국은 12분의 1에 불과한 것이다.
네 흑돌은 이 한구석에서만 이리저리 움직였을 뿐이고, 이것만으로는 이 구석의 사활도 결정할 수 없다. 근데 어찌 감히 내게 돌을 던지고 패배를 인정하라고 하는 것이냐!
왕은 마지막 기력을 짜내어 겨우 정신을 가다듬었다……
바둑판에는 19개가 아닌 수백 개의 선이 가로세로로 교차하고 있었다. 조금 전 사력을 다해 한 수 앞서 나갔던 그 대국은, 이 광활한 바둑판 위에서 한없이 작아 보일 뿐이었다.
끝이 거의 보이지 않는 바둑판의 끝에는 은하수처럼 광활하게 펼쳐진 백돌의 진이 있었고, 그곳에는 침투할 틈조차 보이지 않았다. 마치 쉐이가 천 년 가까이 품고 있었던 경멸과 분노처럼.
네놈…… 처음부터 이걸 노렸나……
물론이다.
네가 수백 년 전 내 의식을 엿보았을 때부터, 이 계획은 내 무수한 꿈속에서 형체를 갖추어 왔다.
아마 백을 집은 자가 있을 것이다. 네가 인지하지도 못한 사이에 네 주변에 그물을 짤 사람이지.
네가 한 일은 그가 대신 기록할 것이고, 네가 끝내지 못한 일은 그가 대신할 것이며, 네가 하지 않은 일은 그가 너와 똑같은 얼굴을 한 채, 홀로 해낼 것이다.
그는 먼저 너희가 인간을 믿을 수 없게 만들 것이고, 인간이 너희를 의심하게 만들 것이다. 그렇게 너희는 어쩔 수 없이 이곳에 돌아올 것이다…… 너희를 수백 년간 죽지 않게 지켜줬던 근원지로.
우리의 삶이 너와 무슨 상관이지?
내가 죽지 않으면 너희는 염국의 가장 끔찍한 선택지 중 하나로 여겨지겠지. 나의 의식으로 돌아가 대사냥 위에 세워진 모든 것을 완전히 파괴하는 것 말이다.
하지만, 너희가 죽지 않는다면 나는 이 족쇄를 벗어 던질 수 있을 만큼 충분한 힘을 되찾을 수 없다.
우리는 생사로 얽혀 있다. 화해의 가능성 따위 존재하지 않지…… 그런데 너는 아직 인간과 화해하려는 망상을 하고 있는 건가?
한때 그들의 신이 될 뻔했던 나를 용납하지 못하는 염국이, 어찌 나를 대신한 너를 용납할 거라 생각하지?
네겐 이제 바둑돌을 집을 자격조차 없다…… 나는 네 목숨을 거둔 다음, 네 '형제자매'의 목숨까지 거둘 것이다.
섭리에 따라, 사라지거라……
진룡이…… 둘째 오빠를 홀로 쉐이 능묘에 보냈어요.
진룡이라면, 아마 오빠가 제게 말할 시간도 주지 않았겠죠.
……
오빠는 누군가에게 먼저 해를 입히는 사람이 아니에요.
물론 말주변도 없고, 승패에 목숨을 거는 사람이긴 하지만, 득실에 개의치 않아 하는 사람이고…… 가장 영리하지만, 가장 바보 같은 사람이에요.
오빠는 온갖 음모나 간사한 수단,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볼 수는 있지만, 가장 간단한 것에 서투른 사람이에요…… 주변 사람들에게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알리는 간단한 일조차 못하는 사람이죠.
그리고 사세대랑…… 당신이 가장 두려워하던 대리인은 항상 저였잖아요?
……?!
저도 알고 있어요. 아니, 당신에게 분명 이야기할 거라는 사실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요.
사실, 당신이 말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어요……
전 세월이 지날수록 힘을 더 능숙하게 다룰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어째서인지, 최근에는 저 자신이 점점 저답지 않게 변해가는 느낌이 들더군요……
몇 년 전부터 기억이 흐릿해지고 있다는 게 느껴졌고, 최근 몇 년간은 제 마음속의 온갖 감정들마저 모호해지는 것 같았어요.
어쩌면……
춘, 실례일지도 모르겠지만, 물어보고 싶은 게 하나 있어요.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어떤 기분이 들었나요?
엘프는 짙은 검은 머리칼 아래 감춰진 귀 끝을 가늘게 떨었다.
왜 그런 질문을 하지?
……왜냐면, 왕 오빠에게 아직 살 방법이 남아있거든요.
왕을 구하러 갈 생각이야?!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 저와 오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제가 오빠 대신 죽는 것뿐이에요.
그래서 당신이나 저 같은 생명체에게 가족의 죽음이 도대체 어떤 의미인지 알고 싶었어요.
그런데 어째서 그걸 나한테 묻는 거지? 어째서 남의 상처를 들쑤시는……
순간, 춘은 지에가 어째서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했는지 깨달았다.
지에는 본인을 대신해, 왕을 대신해 묻고 있었던 것이었다.
만약 가족의 죽음이 기나긴 삶 속에서 만나게 될 작은 슬픔에 불과하다면, 지에는 스스로 목숨을 바쳐 그 찰나의 슬픔을 왕에게 남기고, 형제자매들의 가슴속 남은 상처, 가끔은 아릴지도 모를 상처로 남는 것을 선택하면 된다.
하지만, 만약 가족의 죽음이 장생자에게도 가슴이 찢어질 만큼 고통스러운 것이라면, 지에는 견디기 힘든 괴로움을 본인이 짊어지고, 살아남은 자로서 중책을 짊어진 채 계속 인간 세상에 머물며, 쉐이를 멸하는 책무를 끝까지 수행하면 될 것이다.
이것은 영겁의 세월을 살아가는 생명이 처음으로 맞이하는 혈육과의 영원한 이별이었다.
붓끝으로 수없이 많은 애환을 써온 그녀였지만, 지에는 이 판단을 내릴 실마리조차 찾을 수 없었다.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자신뿐이었다.
……
그냥 사실대로만 말하면 되는 것이다.
솔직히 말해 영겁의 시간을 살아왔다 한들, 가족을 잃어버린 고통은 너무 극심하기에 지금까지도 낫지 않았다고.
죽은 사람은 해방되고, 살아남은 사람은 고통에 사로잡힌다는 말은 증명할 필요도 없는 사실이라고.
만약 지에가 진정으로 왕을 생각하고 있다면, 왕을 이 세상에서 해방시키고, 지에 본인이 인간 세상에 남아 앞으로의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고 말하면 된다. 왕의 죽음은 본인이 자초한 것이니, 지에 본인은 이곳에 남아야 한다고, 그것이 본래 있어야 할 모습이라고 말하면 된다.
지에는 신중하기에, 쉐이를 제거한다는 책무를 이행하더라도 왕처럼 선을 넘지도 않을 것이고, 사세대로 들어간 익명의 제보에 의해 진룡의 분노를 사는 일도 없을 것이라고 말하면 된다.
하지만……
먼저 거대한 악을 없앤 후, 원흉을 제거하라.
천경각과 태사각이 힘을 합쳐도 통제가 안 된다고 하던데, 어찌해야 좋겠소?
장래에 염국의 역사가 혼란에 빠지게 생겼는데, 그 죄를 어찌 감당하겠소?
태사각을 폐지하고 염국 문자를 수정하니, 따르지 않을 자 없었다.
백성의 생계를 조사하다가 거짓이 있는 자들은 모두 이름을 지우고 변방으로 유배시켰다. 그 과정에서 죽은 자가 수천에 달했다.
혼란스러운 기억들이 뒤엉켜 지촉인의 심장을 세게 움켜쥐었다.
그녀는 위화감을 느꼈다. 심지어 그 말을 했던 사람들에게 얼굴이 없었다는 것까지 희미하게 기억났다.
뭔가 잘못된 게 틀림없었다. 전부 거짓이었고, 지어낸 것이었다. 이건 분명 지촉인과 대리인의 사이를 이간질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에의 힘이 강해지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지에는 쉐이 그 자체보다도 더 강력하고, 더 무서운 힘이 될 것이다.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지에를 도와야 한다. 염국에 책임을 다해야 한다……
두 갈래로 얽힌 의지가 그녀의 가슴속에서 요동쳤다. 하나는 춘 본인의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얼굴 없는 이들의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대리인 하나가 모든 역사를 장악하는 것을 원치 않는 염국의 것이기도 했다.
그녀는 문득 자신이 사세대에 받아들여진 것이 행운이 아니라, 일찍부터 예정된 음모였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은 장생자이기에, 가장 통제하기 힘든 대리인을 감시하도록 보내진 것임을 잘 알기 때문이다.
자신은 역사를 아끼기에, 지에가 결국 어떤 괴물이 될 건지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자신에게는 갈 곳이 없기에, 배신이라는 선택은 본인이 염국에서 버림받게 만들 뿐이고, 어렵게 얻은 보금자리를 잃게 함을 잘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말 그런 것일까?
무거운 책임이 그녀를 숨 막히게 짓눌렀다. 더 이상 생각을 이어 나갈 수 없었다. 머릿속에는 오직 굉음만이 울려 퍼질 뿐이었다.
그녀는 염국에 책임을 다해야 했다. 지촉인으로서 책임을 다해야 했다. 그리고 우연히 지에가 가장 취약한 순간을 목격했다. 이제 원흉을 대신할 거대한 악을 만들어야 했다.
어쩌면 이것이 대리인에게도 더 나은 선택일지 모른다. 염국이 그들에게 무력을 동원할 명분 하나를 잃게 될 테니까……
어머니가……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나…… 나는……
딱히…… 별다른…… 느낌은 없었다.
사실 심장이 찢어질 것처럼 아팠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내 마음속에서 뭔가를 가져간 것처럼 가슴이 텅 비어버린 느낌이어서, 뭔가 자꾸 새로운 걸로 채우고 싶었을 뿐이야.
마치 가슴속에서 어머니와 연결된 부분이 억지로 뜯겨나가 피범벅이 된 것 같았다. 그리고 알고 있었다. 그 무엇으로도 이 독특한 형태의 상처를 메울 수 없다는 것을.
난 그저 어머니의 장례에서 한바탕 울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게 다야. 금방 울음을 그쳤으니까.
하염없이 울기만 했다. 어머니가 땅속에 묻히던 순간에는 더 나올 눈물조차 없었다. 그래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 우리는 앞으로 멀고 험난한 길을 가야 한다. 그리고 언젠가 새로운 사람을 만날 테니까, 그러면 잠시뿐인 슬픔을 달랠 수 있을 거다.
너무나도 기나긴 삶을 살고 있기에, 삶 속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매우 적다. 만약 그것을 잃는다면, 그 공허함은 영원히 낫지 않을 상처가 될 것이다.
이제 나에겐…… 네가 있고…… 다른 동료들도…… 있어. 그래서 어머니에 대한 건 이제 거의 떠오르지 않아.
잃어버린 가족은 꿈속에서 나타났다. 홀로 있을 때 나타났다.
어머니가 흥얼거리던 음악이 들리면, 가족을 잃었다는 고통은 일순간에 심장을 움켜쥐었다. 그 고통으로부터 도망칠 수는 없었다.
나는 지금…… 이렇게 너와 함께 있다는 게…… 사실……
……너무 행복해.
엘프는 거칠어진 숨을 몰아쉬며, 치밀어 오르는 구역질을 필사적으로 억누르면서 마지막 한마디를 마쳤다.
춘은 대리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춘은 두려웠다. 눈앞의 사람이 자신의 말에 현혹되어, 상실이라는 감정이 시간에 씻겨 내려가는 가벼운 것이라고 여기게 될까 봐 두려웠다.
눈앞의 사람이 자신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비열한 자신의 속내를 간파할까 봐 두려웠다. 자신을 멸시하고, 영원히 자신과 만나지 않을까 봐 두려웠다.
……그리고, 이런 말을 한 본인이 두려웠다.
알겠어요……
말해줘서 고마워요.
……당신은 정말 책임감 있는 지촉인이군요.
?!
지촉인의 가슴을 막고 있던 혼탁함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곳에는 바람이 통하는 구멍이 남아 있었다.
그 구멍을 통과하는 바람은, 그녀의 목소리와 같은 소리를 냈다.
지에, 나는……
알고 있어요, 이건 당신에게 아주 잔인한 질문이겠죠. 근데, 저도 너무 심란해서 물어본 거예요.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니까, 묻든 묻지 않든 결국 같은 결정을 내릴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당신에게 물어보고 나서 정말 후회했어요.
당신은 똑똑하니까 분명 알고 있었을 거예요. 이건 제가 지촉인에게 죽어야 할 사람이 저인지, 왕 오빠인지를 정해달라는 질문이라는 것을요.
물어보면 안 되는 거였는데, 미안해요.
방금 당신은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한 게 아니에요, 제게 염국이 가진 의지의 일부를 전달했을 뿐이죠.
……
죽음이라는 모험…… 아마 그 누구에게도 참고할 수 있는 내용은 없겠죠. 홀로 마주하는 수밖에 없을 거예요.
자, 저번에 수정해달라고 한 지방지는 다 수정해서 책상 위에 뒀으니까, 시간 날 때 사세대로 보내주세요.
……지에!
춘은 그 자리에 서서 필사적으로 눈물을 삼켰다. 지금 이 순간, 자신이 소리 내어 우는 것조차 가식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가슴에 뚫린 구멍에서는 오직 자신에게만 들리는 울음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이어서 춘은 가슴속에서 비참함과 비애가 뒤섞인 글자를 꺼내어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 같은 말을 엮어냈다.
그러면…… 먼저 일어나도록 하지.
춘……
……부디, 건강히 지내요.
지에, 대체 무슨 일이야? 금위군이 천경각으로 오고 있어. 방금 내 지촉인이 막아대는 통에 나도 못 올 뻔……
……
……왕 오빠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거지?
둘째 언니라면 들을 수 있겠지.
그것의…… 심장 소리를.
결국 오빠가 쉐이 능묘에 들어간 거야?!
언제?
2시간 정도 된 것 같아.
……법도를 어긴 건 나중에 얘기하자. 지금 조정에서 우리를 배제하려고 하고 있어. 시간이 촉박한 상황이야, 어쩔 생각인데?
……가서 오빠를 도울 거야.
그럼 나도 같이 갈게.
안 돼.
왜?
이 일은 나와 오빠 둘이서 해결할 수 있어.
……확신해?
확신해.
오빠와 나는 계속 쉐이를 제거하는 일을 모의하고 있었어. 지금은 상황이 급해서 언니에게 자세히 설명할 시간이 없어.
언니가 가봤자 도움이 되진 않을 거야, 오히려 희생자만 늘어나겠지.
게다가, 언니에게 하나 부탁할 게 있어.
이 서도는 앞으로 언니가 보관해 줘.
둘째 언니의 권능이라면, 잘 보관할 수 있을 거야.
도대체 뭘 하려는 거야? 상황이 얼마나 안 좋길래?
……쉐이가 당장 깨어나지는 않을 거야. 이건 장담할 수 있어, 둘째 오빠도 나와 똑같이 말했을 거야.
그러면, 너희는……?
……누군가는 돌아오겠지.
둘 중 하나만 돌아온다는 얘기야?
……
나도 따라가야겠어.
언니, 안 돼.
정말 다른 뜻이 있는 건 아니야. 그냥 이 서도를…… 가장 공정하고 사심 없는 사람이 엄격하게 관리해 주길 바라서야.
만약 이게 불순한 마음을 품은 사람의 손에 들어간다면, 대리인의 죽음보다 훨씬 더 큰…… 재난을 초래하게 될 거야.
이걸 완전히 파괴하는 것도 생각해 봤는데, 그래도 보존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
지난날의 과오는 반드시 바로잡아야 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이 서도는 앞으로 우리 가족, 또는 염국에 도움이 될 거야.
……그리고 언젠가, 이걸 필요로 하는 사람이 없어졌으면 좋겠어.
……
그런 표정 짓지 마, 언니.
어쩌면…… 오빠랑 같이 돌아올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함께 돌아오게 되면, 언니랑 같이 위가 해주는 밥을 먹으러 가고 싶어. 언니가 하는 노래도 듣고 싶고……
근데 만약에…… 정말 내가 못 돌아온다고 해도……
모두에겐…… 아직 가야 할 긴 여정이 남아있으니까……
……
하지만, 지에라고 한들 미련 없이 고개를 돌릴 수는 없었다.
지에는 책장에 빼곡히 꽂힌 삶과 죽음의 기록을 바라보았다. 그중엔 본인이 직접 남긴 것도 적지 않았다.
지에 본인도 이 일부가 되는 것일까?
타인의 눈에는 지루할 정도로 길었던 삶, 하지만 지에 본인에겐 너무나도 짧았던 삶, 과연 사람들은 이 삶을 어떻게 기록할까?
이 세상에 남겨진 형제자매들이 이 짧디짧은 내용을 읽게 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
하지만 지에는 알고 있다. 아마 자신은 기록되지 않을 것이다.
아마 형제자매 중 왕과 가장 많이 교류한 것은 본인일 것이다.
지에는 왕의 계획에 많은 지혜를 보탰고, 왕과 함께 쉐이 제거에 필요한 조건과 시기를 계산했다.
그리고, 지에는 지금 쉐이 능묘 안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더할 나위 없이 선명한 심장 소리가 모든 것을 말하고 있었다.
다른 방법이 없었다.
본인의 권능으로 그 이름을 지워버리는 수밖에……
……
어쨌든, 지에는 평범한 사람들보다 훨씬 더 오랜 시간을 이 세상에서 보냈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아니, 오히려 삶과 죽음이 있었기에 지에가, 지에의 형제자매가 매료되었던 삶의 방식이 존재했던 것이다.
하지만 만약, 죽음이 평범한 연기처럼 허무하게 사라지는 것에 불과하다면…… 어떻게 해야 진정으로 살았다고 할 수 있는 걸까?
석양이 실내로 쏟아져 들어와 셀 수 없이 많은 역사 기록에 내려앉았다. 마치 무심한 손길로 과거의 자취들을 훑어보는 듯했다.
겹겹이 쌓인 과거의 기록, 글자마다 스며든 피눈물…… 그 끝에서 마주한 것은 '아쉬움'이었다.
햇빛이……
……참 따뜻하네.
하지만, 지에는 햇빛이 들어오는 쪽으로 다가가지 않았다.
그렇게 지에는 방을 나섰다.
그리고 어둠이 드리운 능묘로 걸어 들어갔다.
……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왕은 그것이 쉐이가 자신의 기억 속에서 긁어모은 파편임을 직감했다. 또한 지난 120년 동안, 그가 단 한순간도 잊은 적 없는 광경이기도 했다.
숨이 끊어지기 직전의 바둑꾼은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바둑판 위의 백여 개 백돌은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왕의 가슴을 꿰뚫었다. 그리고 티 없이 맑은 순백의 빛이 천천히 그를 집어삼키려던 그때……
……한 줄기의 황금빛 광채가 그를 감싸 안았다.
……미안하다.
기다려…… 내가 돌아올 때까지.
네가…… 돌아올 때까지.
그것은 본디 자신이라면 절대 닿을 수 없는 꿈의 끝자락이었다.
하지만 꿈속의 사람은 그의 존재를 눈치챈 듯, 고개를 돌려 왕을 바라보았다.
지에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서 등 뒤에서 쏟아져 나온 빛의 격류는 지에를 감싸고, 삼켰고, 녹였다……
결국, 꿈을 통째로 휩쓸어 버렸고, 본래 모습이 드러나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