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R-8보금자리
고든은 구스타브를 제압한다. 파크의 사람들은 섹터의 방향을 돌려 컬럼비아에서 도망치려고 한다. 한편, 내스티는 양모가 이곳에 온 이유를 알게 되고, 양모를 '나무'에서 구출하고자 그녀의 집념을 꼬집어 말한다.
상황 보고해.
부유층의 모든 캡슐을 폭파망에 연결했습니다. 하층부의 인원들은 광장에 있는 사람들을 대피시키는 중입니다.
지금 전시회를 향한 사람들의 열기가 뜨거워서 시간이 좀 더 필요하겠지만, 계획에 차질이 생기진 않을 겁니다.
'프로펠러 파라다이스'가 특별구와 연결되기만 하면, 부유층 전체를 폭파할 수 있습니다.
라인 랩 쪽 움직임은?
현재 관련 인원 23명을 체포했고, 10여 명은 부유 플랫폼에서 흩어져 도망 다니고 있습니다.
현재 고지 8곳을 이미 점령했습니다만, 이들은 전시 구역과 케이블카 승강장 사이만 왔다 갔다 하고 있습니다. 일반 점검 도구 외에 라인 랩에서 만든 특수 장비는 소지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대로 숨바꼭질만 하겠다?
계속 지켜보고 있어. 메이랜더의 세부 계획도 모르고, 연락 수단도 없는 상태야. 막판에 반격하려 해도 소용없을 거야.
네.
케이블카 승강장 대기 구역에서 밖을 바라보니, 맥스 특별구의 모습이 점차 선명해졌다. 컬럼비아의 가장 번화한 이동도시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파크에 진입한 뒤로, 특수요원들은 단 한 번도 이곳의 모습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맑은 시야 덕분에, 부유층의 기묘하고 정교한 시설들이 온통 살아 숨 쉬는 듯 보였다.
부유 캡슐은 마치 수생 생물처럼 유유히 떠다녔고, 부유 플랜터 유닛은 질서정연하게 각종 소형 플랫폼 사이에 배치되어 에너지 공급망 형성해, 부유층 전체를 지탱하고 있었다……
잠깐…… 방금 라인 랩 사람들이 어디에 나타났다고 했지?
전시 구역과 케이블카 승강장입니다.
정확한 위치를 보여줘.
이동 동선을 통합해 보면, 라인 랩의 그 '나무' 플랫폼에 갈 수는 없어, 그렇다고 다른 회사의 부유 캡슐로 갈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설마 애초부터 자기들의 구역을 되찾으려던 게 아니었나?!
하지만 라인 랩이 됐든, 그 테스터들이나 회사 대표가 됐든, 다들 그냥 우왕좌왕하고 있는 것뿐인데……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거지?
특수요원은 가까이에 있는 플랜터 유닛을 흘끗 쳐다보았다. 눈에 띄지 않는 라인 랩의 구조물이 조용히 그곳에 있었다.
특수요원은 그제야 작은 장치의 가장자리에 있는 충돌 방지등이 대낮에도 아주 밝게 빛나고 있었다는 것과, 꽤 오랫동안 불규칙적으로 깜빡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정찰 요원 말로는, 라인 랩 사람들이 모두 시야에서 사라졌다고 합니다!
아니야, 사라진 게 아니야!
다들 같은 곳으로 이동했어…… 녀석들의 행동에는 규칙이 있었어!
다들 잘 들어. 길에 보이는 모든 플랜터 유닛을 파괴해! 라인 랩의 그 장치는 그냥 장식품이 아니다! 놈들이 그걸 통신 장치로 쓰고 있어!
전시 구역과 케이블카 승강장 사이의 모든 길목을 차단하고, 우리와 숨바꼭질하는 모든 놈들을 모조리 찾아내 그들의 목적지를 밝혀내라!
대체 뭘 하려는 건지……
펀 씨, 아까부터 계속 창밖만 보고 계시네요.
너 반드시 이겨야 할 이유가 있다고 했잖아.
네, 맞습니다.
나도 지금 내기를 하는 중이야.
당신의 태도와 조금 전의 자유 낙하로, 파크에서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대충 짐작이 갑니다.
당신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저와 함께 이런 위험을 무릅쓰진 않겠죠.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제게는 당신과 거래할 만한 게 없습니다. 딱 하나 있다면……
음……
설마 '럭키 치스티비스트'를 원하시나요?
그렇다고도 할 수 있지.
내가 원하는 건 고든 타넨이 너에게 판 금지품이야.
연설 준비는 안 하고 스튜디오에 와서 날 귀찮게 하는 거야? 낯짝 참 두껍네, 고든 장관.
나랑 틀어진 모든 사람들이 협력의 가능성을 거절했다면, 나는 아마 지금까지 살아남지 못했을 거야.
협력? 그건 무리야.
메이랜더가 내가 이 업계에 들어온 이후 저지른 온갖 위법 기록을 긁어모았어. 물론, 나도 내 남은 인생을 콩밥 품평이나 하면서 살고 싶진 않아.
너는 얌전히 있을 사람이 아니야. 게다가, 내가 제안할 협력은 바로 메이랜더와 관련이 있어.
이곳은 파크의 동향을 살피기에 가장 좋은 곳이야. 오클리는 한창 들떠 있어서 눈치채지 못했다 쳐도, 네가 그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지.
굳이 말하자면……
부유층의 생방송 화면이 너무 자주 전환돼. 설비 테스트라는 말은 핑계인 것 같고. 광장에 처음 보는 테스터들만 최소 10명이 있는데, 구경보다는 순찰하는 쪽에 더 가까워 보여.
마치 위험이 곧 닥칠 걸 미리 알고 있는 것처럼.
또 나를 속여 음모에 가담시킬 생각이야?
이 파크는 곧 예정된 사고를 당할 거다. 이건 사실이야. 구스타브가 '프로펠러 파라다이스'를 천만 컬럼비아인들의 농담거리로 만드는 걸 내가 두고 볼 수 없다는 것 또한 사실이고.
10초 줄게. 할지 말지, 결정해.
성공 확률은?
10%.
네가 할만한 내기는 아닌 것 같은데.
상대가 그 교활한 여우라면, 난 무조건 걸 수밖에 없어.
성공 가능성이 희박한 계획이라…… 재밌네, 계획을 말해봐.
최대한 많은 사람들을 설득해 부유층으로 돌아가게 한 다음, 이 목록에 있는 오리지늄 제품과 아츠 유닛을 회수해.
이게…… 전부 네가 거래한 금지품이야?
이것들의 잠재력은 전시품의 심장 역할에 그치지 않아.
너 설마……
파크를 통째로 데리고, 도망치는 거야.
구스타브와 메이랜더는 처음부터 이 전시회를 제대로 진행할 생각이 없었구나, 개막식은 그냥 겉치레였어.
부유층에 곧 2번째 추락이 찾아올 거야. 그리고 하루에 기적이 2번씩이나 일어나는 일은 없겠지.
'럭키 치스티비스트'를 다시 운영할 자본은 없는 건가……
그건 파크 내에 있는 대부분의 신생 과학기술 기업들도 마찬가지야.
“파크를 통째로 데리고, 도망치는 거야.”……
이건 '프로펠러 파라다이스'를 보전하고, 하층에 있는 사람들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야.
파크는 황무지에서 7일째 운행하고 있고, 연료도 얼마 남지 않았어. 섹터도 이미 보호 모드로 전환됐고. 기초 동력 모듈만으로는 방향을 바꿀 순 없어.
하지만 '럭키 치스티비스트'가 거래한 아츠 유닛은 그냥 에너지 전환을 위한 안정기일 뿐이에요. 섹터 방향을 바꿀 만큼의 동력은 제공하지 못할 텐데?
맞아.
하지만 고든이 밀수한 아츠 유닛과 오리지늄 제품은 그거 하나만 있는 게 아니니까.
그러니까, 모든 아츠 장치 금지품을 회수하고, 이 위기 상황에서 새로운 동력 모듈을 만들어 섹터의 방향을 틀겠다고요?
방향을 트는 게 아니라, 유턴이야.
유턴이라니…… 펀 씨, 지금 본인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알고 있나요? 그쪽은 국경이라고요!
해외여행 절차는 확실히 복잡하긴 하지.
그건 반역이나 다름없잖아요!
싫어요, 전 감옥에 못 가요. '럭키 치스티비스트'를 생방송에 내보내야 해요. 북노스빌에 있는 아내가 볼 수 있게……
고객 제일의 원칙 때문에 미리 알려주는 건데, 우리의 계획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럭키 치스티비스트'는 생방송에 출현하지 않을 거야.
설마……
미안하지만, 설령 너를 설득하지 못한다 해도 나는 반드시 부품을 가져갈 거야. 시간이 얼마 없어.
애초에 우리는 이 부유 캡슐을 떠날 수 없어요……
중앙 잠금장치를 열어준 사람이 있어.
네?
창밖에 떠 있는 부유 플랜터 유닛이 보여? 충돌 방지등이 3번 연속 깜빡였어. 저건 구조 신호야. 등불이 5초 동안 켜졌다가, 현재의 신호를 반복하지.
그리고 이제…… 3, 4, 5…… 7번 깜빡였어.
목록에 있는 다른 부품들은 전부 회수된 모양이야. 이제 다들 7번 부유 플랫폼으로 모이면 돼. 잠깐……
……충돌 방지등이 꺼졌어?
꺼지다니요? 그건 또 무슨 뜻이죠?
메이랜더가 우리의 움직임을 눈치챘어, 위험해.
……
애스펜, 나랑 같이 가. 안 그러면 내가 기절시켜서라도 끌고 갈 거야.
우리 같은 사람들에겐 애초에 선택권 같은 게 없었잖아. 안 그래?
앉게.
……
구스타브는 7년 동안이나 자신과 맞선 사브라를 바라보았다. 상대가 의자에 앉아 쭈뼛거리는 모습이 꼭 은박지에 싸인 감자 같았다.
구스타브는 이런 젊은 관료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분노를 품고 있고, 나대길 좋아하며, 규칙은 자신을 옭아맨다고 생각해 모든 것에 불만을 품는다……
하지만 그들은 결국 똑같은 의자에 앉게 된다. 젊음이라는 등뼈가 의자 등받이에 교정되고 나면 그들도 정식으로 컬럼비아 상류사회의 일원이 된다.
마치 고든 타넨처럼.
좋아, 메이랜더의 계획이 성공하면 스튜디오는 화면을 공중 레스토랑으로 전환할 걸세. 실수하지 말도록.
평소에 잘난 체하던 태도는 버려. 말투는 간절하고 비통해야 하고. 자네가 직접 세운 파크이니 감정을 잡는 건 어렵지 않겠지.
자네의 그 슬픈 표정은 컬럼비아 주요 신문 1면을 장식할 텐데, 최대한 그럴듯하게 보여야지. 안 그래?
……
그 장난감 괴물은 그만 보고.
나도 알아. 자네도 내스티처럼 '프로펠러 파라다이스'의 또 다른 죄인이 되고 싶진 않겠지.
하지만 어쩌겠는가? 자네가 즉흥적으로 조립한 장식품이 자네를 변호해 줄 리가 없잖아.
그래서, 제가 지금 고든 타넨의 '피고인석'에 앉아 있는 겁니까?
그래.
연설문대로 사죄하고 나면, 저도 국장님과 함께 국방부에 들어갈 수 있는 겁니까?
내 말만 잘 들으면, 자넨 탄탄대로를 걷게 될 거야.
하지만 그런 건 별로 흥미가 없는데.
뭐라고?
이 의자, 내가 앉기에는 너무 너무 불편하니까.
……생방송 카운트 다운 시작합니다. 공중 레스토랑, 스탠바이……
생방송? 지금?
그럴 리가…. 부유층엔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는데, 메이랜더가 실수한 건가?
대체 누가 스튜디오를 통제하고 있는 거냐!
셋, 둘, 하나!
054, 지금이다.
네!
뭐야?
으윽!
생방송 화면이 공중 레스토랑으로 전환된 순간, 우주 린수 054는 무방비 상태였던 구스타브를 덮쳐 그를 제압했다.
레스토랑 내부의 스크린이 순식간에 밝아졌고, 구스타브는 거기서 고통과 공포에 질린 자신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
그는 지금 이 순간, 자신의 얼굴이 파크의 모든 화면에 송출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머릿속에는 몇 가지 대비책들이 스쳐 지나갔지만, 메이랜더의 계획이 이미 최종 단계에 진입한 뒤였고, 그에게는 정신을 딴 곳에 팔 여유가 없었다. 인원을 소집하는 데 쓰는 통신기는 어느새 우주 린수에 의해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고든은 스트레칭하듯 목과 손목을 쭉 펴더니, '피고인석'을 발로 차버리고는 옆에 있는 소파에 몸을 기대었다.
아, 역시 이게 편하다니까……
어이, 당신의 그 슬픈 표정은 컬럼비아 주요 신문 1면을 장식할 텐데, 최대한 그럴듯하게 보여야지. 안 그래?
자네……
왜? “'하늘 열풍'에 휩쓸려 만든 사소한 취미”에 당할 줄은 생각도 못했나 봐?
당신은 관리국의 공신이었고, 지금은 국방부의 재임용을 받으려 하고 있지. 젊었을 땐 컬럼비아를 위해 규칙을 만들고, 은퇴 후에도 '나라에 충성을 다하겠다'니……
이야, 정말 대단하군. 시간이 오래 지났는데도 당신은 모든 적의 반항 수단이 규칙을 이용한, 그런 똑똑한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나?
하지만 이 고든 타넨은 규칙을 무시하는 건달에다, 이상도 포부도 없는 쓰레기라고. 혹시 잊었나?
하긴, 그럴 만도 하지. 054의 정체도 못 알아챘으니까. 심지어 음성 모듈은 만지지도 않았는데……
안녕하세요, 주류, 담배, 아츠 유닛 및 오리지늄 제품 관리국 지부입니다. 처리 현황 조회는 1번, 안전사고 신고는 2번, 상담원 연결은 0번……
……관리국 자동 응답기?
말했잖아, 우주 린수는 부자들의 시가가 아니라고. 나도 이 녀석이 내가 만든 규칙을 따른다고 우쭐해 하진 않아.
7년 전의 어느 깊은 밤, 나는 오래 앉으면 엉덩이가 아픈 의자에 앉아 첫 번째 경위서를 쓰면서, 그만둬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어.
그때 054의 자동 응답기가 울렸고, 특이한 잡음이 들렸지. 어디에 문제가 있는지 알아내기 위해 나는 머리를 쥐어짰어.
그 뒤로, 나는 내 손을 거쳐 간 모든 아츠 유닛과 오리지늄 제품을 연구했어. 054에게 자율적으로 행동하고, 응답하고,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을 주려고.
그 수백 장의 경위서를 내가 굴복했다는 증명이라고 생각해도 상관없어. 하지만 054는 이 고든 타넨이 관리국에서 보낸 7년이라는 시간의 결정체다!
황당하군. 발명이나 하려고 관료 사회의 온갖 처세술을 익히지는 않을 텐데!
자네가 협상하는 모습이나 남을 위협하는 모습을 내가 못 봤을 거라고 생각하나? 오만하고, 허영심 많고, 야심이 가득하지…… 내 사람 보는 눈은 틀린 적이 없어.
지금도 자네 말투에서 내가 연설할 때의 모습을 볼 수 있어.
……나는 내가 한 번도 잘못을 저지른 적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어쩌면 당신에게서 배운 나쁜 버릇을 평생 고칠 수 없을지도 몰라. 기분은 더럽긴 한데, 잘못은 아니니까.
나의 유일한 잘못이라면, 내가 스스로 거래를 '밀수'라 정의하고, 은연중에 이미 굳어버린 불합리한 규칙을 받아들였다는 거야.
어리석은 녀석. 아직도 이 판의 이해관계를 깨닫지 못하고 있구나……
잘 들어, 노친네!
당신이 아무리 그럴듯한 이유를 대도, 이 '프로펠러 파라다이스'는 전쟁의 온상이 되어서는 안 돼.
동력 엔진과 고에너지 아츠 유닛을 이용하면, 확실히 무기를 만들 수 있겠지. 하지만 지금 이놈들이 지탱하고 있는 건 사람들의 하늘 생활에 대한 동경이야.
특별구와 연결되기 전까지, 나는 여전히 '프로펠러 파라다이스'의 장관이자, 아직은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는 이 낙원의 창설자야……
이곳을 괴멸하게 할지 도망가게 할지는, 내가 결정해.
054, 구스타브 몸에 있는 권한 패스를 가져와.
네.
소용없다, 중앙 통제실은 이미 봉쇄됐어. 내 권한 패스가 있다 해도 이 섹터를 멈출 수는 없다. 파크와 특별구의 연결도 막을 수 없지.
내가 멈춘다고 했나?
그게 무슨……
말했잖아, '도망'이라고.
전임 관리국 국장은 은퇴 후에도 높은 보안 등급의 권한 패스를 말소하지 않고, 그걸 이용해 멋대로 컬럼비아 국경의 이동도시 식별 코드 감시 시스템을 차단……
재미있지?
자네 정말…… 이 유치하고 쓸모없는 '어린이 공원' 때문에 나라를 배신하는 중죄를 저지르려는 건가?
하하하, 자네 말이 맞아. 확실히 자네는 내게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어.
한가지 짚어주자면, 파크의 연료가 곧 바닥나. 자네는 섹터의 주행 시스템을 통제할 수 없고, 충분한 에너지도 없어.
내가 개조한 로봇에 제압당해 바닥에 엎드려 꿈쩍도 못 하고 있으면서도, 습관처럼 내가 발명가라는 사실을 잊었네 보네.
내가 부탁한 걸 제 시간에 가져다줬으면 좋겠는데.
'프로펠러 파라다이스' 사이언스 파크, 7번 부유 플랫폼
로터리 엔진의 굉음이 이토록 또렷했던 적은 없었다.
하늘은 맑았고, 지나치게 반질반질한 자가 세척 인공 구름 생성기와 높이 떠 있는 구름이 기묘한 광경을 이루고 있었지만, 부유 플랫폼의 사람들은 그 광경에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근 50명의 사이언스 파크 경비원과 메이랜더 특수요원들이 각 통로와 플렉스 와이어가 연결된 부분을 지키며, 몸과 무기로 넘을 수 없는 경계선을 만들었다.
발밑의 복고풍 흑백 타일은 마치 체스판처럼, 길이 10미터에 달하는 야외 통로를 경계로 양측을 갈라놓았다.
특수요원들은 좁은 통로 건너편의 서브 플랫폼을 예의주시했다. 시야에서 사라졌던 라인 랩 직원들과 테스터들이 그곳에 모이고 있었다.
7번 플랫폼…… 분석이 맞았어, 숨어있던 무리가 다 여기에 모였다.
우리 쪽 배치는 끝났다. 그런데 상대 쪽 인원이 생각보다 많아.
스튜디오에 심어둔 우리 인원이 제압당했어, 전에 받은 데이터는 신뢰할 수 없다.
현재 가능한 인원을 모두 대동한 상태야.
수적 우위는 아무 의미 없어, 경계를 강화해라. 저들은 파크의 신식 무기와 통로에 대해 아주 잘 알지만, 우린 그렇지 않아.
파크가 특별구와 곧 연결된다. 그 누구도 경계선을 넘지 못하게 해야 해.
……필요하다면 무력을 써도 좋다. 문제가 생기면 내가 책임진다.
알겠다.
정예 소대가 6팀이라니……
저희 인원도 적진 않지만, 저쪽은……
작전을 몇 차례 수행했던 터라 다들 체력이 바닥났을 테니,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도 이해가 가요.
젤레나, 모두에게 전해요. 체력을 다한 사람은 핵심 부품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아무 부유 장치나 들고 서브 플랫폼을 지키기만 하라고요.
……상대가 신제품의 정보를 몰라서 경계할 거라고 생각하나요?
효과가 있길 바랄 뿐이에요.
휴우…… 다행히 딱 맞춰 왔네.
지금 이런 상황인데도 정말 이쪽으로 가시게요?
맞아, 여기가 공중 레스토랑으로 가는 유일한 통로야.
내 낙하 장비를 매, 애스펜. 이제부턴 아주 위험할 거야.
그럼 당신은요?
나?
펀은 메이랜더 특수요원이 세운 봉쇄선을 바라보며 마치 반가운 상대를 만나기라도 한 듯, 평소에는 잘 보이지 않는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촬영용 드론은 30분 전에 이미 7번 플랫폼에서 철수했고, 여기서 곧 벌어질 모든 일은 스튜디오의 관심을 받지 못할 것이다.
정면충돌은 불가피했고, 지연은 양측 모두에게 악수임을 모두가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의 움직임을 주시하며 묵묵히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 신호를 기다리는 다른 여행단이 있어.
노란색과 검은색으로 된 줄무늬 깃발이 불쑥 솟아오른 가운데, 한 필라인 소녀가 확성기를 치켜들고 군중 속에서 뛰쳐나왔다.
내가 신분을 도용해 '프로펠러 파라다이스'에 들어온 첫날, 어느 친절한 안내원이 내게 말했어. “하늘이 더 이상 금지구역이 아니라면, 이 파크에 사람들의 발걸음을 막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라고.
전시 구역에서 지하 실험실까지 돌아다니며, 나는 모든 기괴한 발명품과 발명품이 가진 복잡한 철학을 기억하고, 수십만 자에 달하는 해설문을 외웠어.
지금도 나는 하늘을 나는 토스터가 어느 회사의 제품인지, 몇 세대 모델인지까지도 말할 수 있어.
난 그 발명품들을 요란하게 칭찬할 수 있지만, 솔직히 말해 재미있다고 느껴지지는 않아…… 부유 섹터가 떠오르는 건 죽음의 황무지에서 보는 일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니까.
그러다가 문득, 아빠가 끊임없이 내게 반복했던 “이야기는 언제나 해설보다 재미있다”고 한 말이 무슨 뜻인지 깨달았어.
1인 가이드가 되고 몇 년 동안, 낙심한 일들이 정말 많았어.
눈에 보이는 게 진실이라는 말이 틀린 거는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과장된 묘사나 스쳐 지나가는 아이디어, 그리고 아직 실현되지 않은 꿈을 폄하해.
나는 예전처럼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들에 함부로 '불가능'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이웃들과 함께 내 가족을 비웃는 그런 사람으로 다시 돌아가지 싶지 않아……
아빠가 돌아가신 그날에야, 나는 아빠가 한 말의 뜻을 진심으로 깨달았어.
그래서, '프로펠러 파라다이스'에 정말 해설자가 필요하다면, 나는 수많은 컬럼비아인에게 내가 이 파크에서 만난 사람들과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
라이스 부쉬.
어…… 엉?
벙커힐 시티의 구두장, 가장 큰 꿈은 쌍둥이 달에 발을 디뎌 신발 자국과 밑창의 로고를 남겨, 사람들이 천체 망원경으로 자기 가게의 이름을 볼 수 있게 하는 거지.
하늘이 가장 큰 간판이니까……
오윈 프레데릭스
……나야.
철물점 주인, 제2의 고리형 실험실에 있는 나사를 조여보고 싶다고 했어. 미래에 우주로 이주하게 되면, 그 경험을 내세워 가족들을 위해 자리 하나를 얻고 싶다고 했지.
미리 대비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애스펜……
제가 직접 말하겠습니다.
애스펜, 잡화점 점장이고, 북노스빌 출신입니다.
사기를 당했고, 고리대금업자게에 돈을 빌린 후, 가족들이 빚쟁이에게 시달리지 않게 하려고 아내와 이혼하고 고향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럭키 치스티비스트'라는 상호는 저와 제 아내가 함께 지었습니다. 하지만 아내와 벌써 2년이나 연락하지 못했습니다.
고향을 떠나기 전, 아내가 제 걱정을 정말 많이 했습니다. 저는 반드시 '럭키 치스티비스트'라는 이름을 TV에 나오게 해서 잘 지내고 있다는 걸 보여주겠다고 약속했죠.
이제 저는 전시회가 거짓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캡슐이 전부 추락한다고 해도, '럭키 치스티비스트' 상표를 단 빨간 풍선만큼은 아내가 볼 수 있게 하고 싶어요.
애스펜, 그리고 모두들.
우리가 원하는 게 현실에서 온 것이든, 공상이든, 맹목적인 것이든, 미신이든, 모두 메이랜더와 구스타브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해.
달려라, 뛰어라, 날아라!
우리를 이해하려 하지 않고, 멋대로 우리를 막아버리고 바꾸려 하는 모든 것을 뛰어넘어, 우리 스스로 파크의 방향을 결정하는 거야!
펀은 선두의 파울비스트처럼 힘차고 우렁차게 외쳤고, 사람들은 그 뒤를 따르며 메이랜더 특수요원의 봉쇄선을 향해 주저 없이 돌진했다.
공중에서, 사람들이 사방에서 회수해 온 금지품을 실은 수많은 전시품들이, 서로 밀치고 압박하며 쟁탈하는 인파를 넘어 하늘 끝으로 날아올랐다.
황당무계했지만, 자유로웠다.
후우…… 드디어 빠져나왔어. 모두 고생했어, 조금만 더 버티자.
음, 금지된 핵심 부품 총 34개, 맞아…… 외형도 멀쩡해 보이네. 전시품의 낙하 모듈이 꽤 의지가 되네.
이 물건들을 고든한테 전달하기만 하면 내 임무도 끝나. 그쪽도 순조로웠으면 좋겠는데.
그럼 이제……
그 물건 내려놔.
그리고 돌아서.
너, 너는 구스타브가 데려온 그 과학 고문? 네가 왜 여기……
……
창밖에서는 특별구 정부 청사의 첨탑과 컬럼비아의 국기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고든은 생방송 화면의 왼쪽 아래를 바라보았다. 위치를 나타내는 지도상의 빨간 점이 점점 특별구 섹터 표식을 향해 가까워지고 있었다.
계획대로였다면 그들은 10여 분 전에 이미 목록에 있는 장치들을 공중 레스토랑으로 보내와야 했다.
고든은 문쪽을 쳐다보지 않으려고 애썼다. 자신이 초조함을 드러내면 구스타브는 분명 바로 알아차릴 것이니까.
……
계획이 생각보다 순조롭지 않은가 보군?
당신이야말로 생각보다 침착하군.
모험을 무릅쓰는 건 나쁜 게 아니야. 다만, 자네에겐 모험을 평가할 능력이 부족하다는 거지.
자네는 무모한 계획에 대비책을 채 마련하지 못했어. 지금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면, 자네들은 엄청난 대가를 치르게 되겠지.
그렇다면, 당신의 대비책은 뭐지?
자신감을 되찾는 건 좋은 일이지만, 자신의 경쟁상대가 누군지 잊어선 안 돼. 내가 말했지, 우쭐대다가 치명적인 실수를 하게 될 거라고.
그게 무슨 뜻이지……
……
늦었군.
시간이 조금 걸렸습니다.
당신의 과학 고문……
이 친구는 그냥 과학 고문이 아니야. 나도 내 계획을 위해 보험 하나는 들어둬야 했거든.
시커멓고 커다란 몸집의 쿠란타가 느긋하게 고든을 향해 다가갔다. 그는 방호재로 차단된 오리지늄 제품 34개가 든 무거운 상자를 가뿐하게 들고 있었다.
그는 상자를 고든에게 건넸다.
당신이 부탁했던 물건입니다.
고생했어.
……!
지금 뭐 하는 거야?
난 당신의 제자야. 당신이 마지막 비장의 카드로 무엇을 선택할지 정도는 당연히 알고 있다고.
경쟁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상대, 문무를 겸비한 과학 고문, 청문회와 계획의 순조로운 진행을 지켜주는 외부인.
안타깝게도, 사람을 잘못 본 거 같네.
……
석화된 시본의 촉수로 만든 턴테이블? 이건 그냥 장식품입니까, 아니면 확실히 특정 기능을 대체하는 겁니까?
아, 그건……
시본의 발성 기관을 이용해 레코드의 음을 자동으로 조율한 거군요……
가장자리에 움푹 들어간 곳을 보니, 제작자가 시본이 음악에 맞춰 생체 구조를 조절하는지도 테스트해 본 것 같군요. 나쁘지 않은 발상이군요.
……
이 금색 손뼈는 어디서 난 겁니까?
벽에 있는 건 사……
선반 위의 심하게 풍식된 금색 손뼈와 한 쌍이군요. 그렇죠?
관절에 사용된 부품과 손뼈의 마모 정도를 보니, 사르곤 서부 사막에서 발굴되었겠군요.
……
어, 이 암호가 새겨진 특이한 형태의 단검은 꽤 낯이 익네요. 이건……
'이것들은' 원래 한 쌍이야!
사미의 한 제사장에게서 단검을 받아올 때, 제사장 말로는 연인 한 쌍이 피로 죽음의 저주를 걸어 만든 무기랬어. 주술로 움직이는 아주 날카로운 칼이라고……
아, 저도 알고 있어요. 나머지 하나는 제 심장에 꽂혀 있었거든요.
지금은 무뎌져서 전만큼 날카롭지는 않지만, 지팡이를 깎기에는 딱 좋습니다.
……
과학 고문 씨, 앞서 구스타브 앞에서 무례하게 굴었던 점 진심으로 사과하지. 내게 얼마든지 화를 내도 좋아.
다만, 내겐 시간이 많지 않아. 당신을 부른 건 정말로 볼일이 있어서 그래.
만약, 조금 전 그 턴테이블의 구조 일부를 떼어내, 금속 손뼈의 감지 모듈과 결합한다면, 새로운 음성 내비게이션 모델을 만들 수 있을 겁니다.
주술로 구동되는 칼날은 소모율이 극히 낮은 바늘로 쓸 수 있고, 림 빌리턴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고에너지 오리지늄 내연기관은 컬럼비아 표준보다 30배 높은 동력을 뽑아낼 수 있을 겁니다.
여기에 빅토리아에서 이미 단종된 에너지 전환 안정기와 컬럼비아 황무지에서 볼 수 있었던 주술 급류 초점까지 더해진다면……
이동 섹터 동력층에 필요한 1차 핵심 장치를 하나 조립할 수 있겠네요.
……
내가 뭘 하려는지 알고 있었어?
단 하나의 장치만으로 섹터 전체의 동력원을 바꾸는 건 상당히 위험하지만, 불가능한 건 아니죠.
당신은 구스타브의 사람이 아니었어? 당신 정체가 뭐야?
당신에겐 시간이 별로 없지 않나요?
중요한 건, 제가 뭘 하면 되냐는 겁니다.
고든은 수집실 한가운데에 서 있는 쿠란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상대는 고든의 모든 소장품을 알아보았고, 그의 생각을 꿰뚫었으며, 자신의 경험을 자연스럽게 털어놓기까지 했다. 마치 죽음을 뒤쫓으며 많은 곳을 다녀온 사람처럼……
고든은 이 쿠란타가 마치 자신의 생각이라는 궁전 안에서 느긋하게 산책하는, 무지한 듯 또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국왕 같았다.
사브라 꼬리 끝의 가시들이 다시 한번 곤두서더니 요란하게 떨리고 있었다.
이번에는 경계가 아닌, 승리의 확신 때문이었다.
동력 장치의 안정성은 어떻지?
3일밖에 못 버팁니다. 연료가 부족하면 길어봤자 하루 반이죠.
충분해.
정말 컬럼비아 밖으로 나갈 생각은 아니죠?
내가 사적인 복수심 때문에 모두의 앞날을 내던질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아?
당신은 사람들이 그렇게 오해하길 바라는 것뿐이죠. 그래야만 더 많은 사람을 보호할 수 있으니까요.
그런가?
하지만 반역은 중죄입니다.
훗, 당신이 내 파일을 봤어야 했는데. 내가 짊어진 죄명은 충분히 무거워.
자, 물건을 중앙 통제실로 옮기는 거나 도와줘.
파울비스트의 날개, 버든비스트의 뿔, 맹글러비스트의 이빨, 샌드비스트의 가죽, 그리고 백비스트 피…… 만약 34가지 생물로부터 일부씩을 떼어 조합한다면 어떻게 될까?
날카롭고, 괴이하고, 혼란스럽고, 위험하고, 악의로 가득 차 있다…… 자신이 조립한 동력 장치를 바라보는 고든의 머릿속엔 온통 그런 생각뿐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미칠 듯이 흥분했다.
섹터의 기존 동력 시스템을 끄고 장치를 연결했습니다.
이제 당신이 '프로펠러 파라다이스'가 어디로 갈지 정하면 됩니다.
……
발령장을 받던 날, 나는 맹세했어.
이 '프로펠러 파라다이스'에 있는 모든 새 발명품이 불꽃을 피울 수 있게 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맹세했지.
아무리 터무니없는 아이디어라고 해도 나는 진짜로 만들어주고 싶었어. 다시는 사람들이 내가 관리국에서 겪었던 것처럼, 타인이 만든 규칙 속에서 자신의 무능함을 억지로 인정해야 하는 고통을 겪지 않았으면 했어.
지금도 내 역할은 똑같아. 다른 게 있다면, 그냥 이 파크의 엔진에 불을 붙여, 파크를 아무것도 없는 황야로 도망치게 하는 것뿐이지만.
고든은 동력장치의 괴상하게 생긴 레버를 잡고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자, '프로펠러 파라다이스', 특별구와 작별이다.
장관님, 7번 부유 플랫폼 쪽에서 펀이라는 녀석이 파크 사람들을 데리고……
……감시카메라에서 보았습니다.
공중 레스토랑 쪽에서는 구스타브가 고든에게 당한 것 같습니다.
라인 랩의 장치나무를 감시하던 동료 쪽에서 온 소식인데, 내스티가 봉쇄를 돌파했다고 합니다. 저희 요원들이 쫓으려 했지만 살카즈 주술로 추정되는 힘에 가로막혔다고 합니다.
베일라……
우선은 인력을 동원해 상황부터 통제하세요. 라인 랩 쪽은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빅 래리, 올드 켈리, 리틀 모! 우리 옛 친구를 데리러 갈 시간입니다…… 죽기 직전에 미쳐버린 밴시를 처리하는 일은 상당히 까다로울 겁니다.
머시, 당신은 여기 남아도 되고, 다른 동료들을 도와줘도 됩니다.
……
아니요, 조금만 더 있다 가세요, 선배님.
……
아니, 셋 모두……
틴맨은 레버넌트 친구들의 대답을 듣지 못했다.
올드 켈리는 능숙하게 지팡이를 휘두르며 즉흥 탭댄스를 췄고, 빅 래리는 머시아의 머리 위에 엎드려 눈물을 글썽였다. 그가 뭘 떠올렸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리고 리틀 모는……
입에서 기합소리가 나왔다. 틴맨은 분명 똑똑히 들었다……
그는 마치 자신이 카즈델로 돌아온 듯했다. 그는 자신을 용광로에 처넣으려는 엘더 레버넌트 향해 리볼버를 꺼내 들고 탄창을 한 번에 쏟아부었다.
다리가 좀 저리고, 머리도 살짝 어지럽군요……
외골격을 너무 오래 관리하지 않아서 그런가요?
아무리 관리를 안 해도, 이 머리는 녹슬지 않습니다.
오리지늄 아츠를 다루는 솜씨가 꽤 늘었나 보네요. 올드 켈리가 그 슬라이드 프로젝터를 몰수했는데도, 당신은 저 친구들을 기억의 소용돌이에 던져넣었군요.
아니면 그냥 우연인가요…… 저 셋이 너무 오래 살아서 쌓인 기억이 많다 보니 다루기가 오히려 쉬웠던 겁니까?
320배속으로 돌려도, 각자의 인생 영화를 단숨에 끝까지 재생할 순 없어요. 더군다나, 멈춰서 다시 봐야 할 장면도 얼마나 많은데요……
정말 죄송해요. 선배님.
저한텐 효과가 오래가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을 텐데요.
네, 분명 선배님은 곧 기억의 속박을 떨쳐버리시겠죠. 오올헤약 선배의 임무 보고서를 본 적이 있는데…… 선배님의 머리를 베어냈음에도 선배님을 완벽하게 통제하진 못했다고 적혀있었어요.
그래서 저도 최대한 시간을 끌어보는 수밖에 없어요. 적어도 선배님이 파크 사람들을 막으러 가는 걸 조금이라도 늦출 거예요.
당신은 아주 뛰어난 메이랜더 특수요원입니다, 머시.
당신은 임무 종료 후에 오리지늄 아츠 또는 다른 수단으로 당사자의 기억을 지우는 일을 담당해 왔습니다. 지금까지 너무 잘해왔어요.
하지만 이번은 그 상대와 타이밍을 잘못 고른 거 같군요.
……
아까 제게 제 성을 잊지 말라고 하셨죠…… 저는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어요.
그 저택에서 자란 '셀레네'라면 누구도 잊을 수 없을 거예요.
……재단의 전신인, 메이랜더 셀레네의 그 '보육원'이군요.
……우리의 '집'이죠. 적어도 어릴 때는 우리 모두 셀레네 씨를 진짜 할아버지로 생각했으니까요.
그에 관한 가장 인상 깊었던 일이 무엇인지 아시나요?
8살이 되던 해, 학교에서 돌아와 막 차에서 내리자마자, 원래라면 제 방에 있어야 할 인형이 정원 한가운데서 빙글빙글 돌며 잔디밭에 물을 뿌리고 있었어요.
그 인형은 제게 남은 하나뿐인, 친어머니와 관련된 물건이었어요. 저는 친어머니의 얼굴을 기억하진 못하지만, 어머니가 제게 인형을 꿰매 주실 때 손가락의 반지가 불빛 아래서 반짝였던 건 기억해요.
할아버지는 저와 한 마디 상의 없이 너무나도 당연하게 그 인형을 물뿌리개로 개조했어요. 꼭 그 인형이 그러려고 만들어진 것처럼.
저와 함께 자란 아이들 모두 비슷한 일을 겪었어요.
선배님은 할아버지의 가장 친한 친구니까 알고 계시겠죠. '연방의 아버지'의 인식 속에, 컬럼비아는 이제 갓 개척지에서 벗어나 이 대지에서 가장 젊은 나라가 된 곳이자, 새로운 것만 존재하는 곳이어야 했어요……
과거의 것들이 존재할 필요가 있다면, 그건 오로지 전진과 개척을 위해 사용될 뿐이었죠.
우리가 빅토리아의 이민자가 되었든, 가울의 난민이 되었든 상관없었어요. 우리의 생부와 생모가 파산자였든, 사형수였든 중요하지 않았죠.
할아버지는 우리가 컬럼비아의 자녀가 되길, '셀레네'가 되길 바랄 뿐이었어요. 그래야만 우리가 존재할 이유가 생기니까요.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저는 지금의 모든 걸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없어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겁니까?
선배님이 긴 세월 동안 겪은 것들이 제게는 영원히 상상할 수 없는 것들이에요. 하지만 메이랜더 재단도, 대통령님도, 부통령님도, 분명 더 많은 문제를 고려해야 했겠죠……
카시미어 기동 장갑의 분석 보고서를 봤어요. 그들은 가울 올드 가디언의 기술을 해체해 분석했고, 역대 기사의 뼈와 피를 이용해서 '전달물질'보다 더 뛰어난 효과를 만들어냈더군요.
저는 라이타니엔의 '아츠 작전 기초' 교재도 읽었어요. 10년 뒤면, 그들도 전시 상황에서 라테라노처럼 전 국민을 병력으로 동원하는 국가가 될 게 예상되더군요.
저는 메이랜더가 왜 컬럼비아가 뒤처졌다고 생각했는지 이해할 수 있고, 시기적절한 군비경쟁이 어떻게 컬럼비아를 '정상 궤도'로 되돌릴 수 있는지도 알고 있어요.
할아버지께서 저에게 여러 번 강조하신 기준으로 판단하자면, 국가 전체의 발전이라는 관점에서 이보다 더 가성비 좋은 계획이 없다는 건 분명해요.
전 그 '억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게 아니에요. 저더러 해결하라고 했다면 아마 저는 머릿속이 하얘져서 울음을 터뜨렸을 거예요.
그렇지만 선배님, 지금의 저는 그걸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없게 되었어요.
우리처럼 갈 곳 없는 고아들도 컬럼비아의 아이가 될 수 있다면……
딸을 찾으러 먼 길을 걸어온 어머니, 처자식이 고리대금 업체에게 빚 독촉을 당하게 하지 않기 위해 모든 걸 건 상인, 그리고 그저 살길을 찾으러 온 것뿐인 테스터들……
왜 그들이 컬럼비아의 미래를 위한 희생양이 되어야만 하나요?
선배님, 제 일은 사람들이 망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만약, 당신들이 약간의 대가를 지불해 컬럼비아를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게 하기로 결정한 거라면, 저는 선배님이 망각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저는 선배님이 그 대가 뒤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삶과 꿈이 있는지를 똑똑히 기억해줬으면 합니다.
그런 것들을 파괴하는 게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주세요.
……
……
내스티는 뒤엉킨 뿌리 사이에 박힌 어렴풋한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내스티의 오랜 지인이자, 어머니였다.
회백색의 뿌리줄기가 베일라의 두 다리를 대신하고 있었고, 비늘처럼 겹겹이 포개진 나무껍질이 베일라의 드레스와 피부를 타고 올라가며, 분간하기 어려운 얼굴을 모호하게 새겨넣었다.
은은한 빛을 내뿜는 나뭇진이 장막처럼 쏟아졌고, 베일라의 얼굴을 가렸다. 간청하는, 몸부림치는 수많은 손이 장막 속에서 뻗어 나와, 동아줄을 잡 듯 베일라의 목을 꽉 조였다.
사람도, '나무'도 너무 낯설었기에, 내스티는 전혀 알아볼 수 없었다.
내스티가 확신할 수 있는 건, 눈앞에 펼쳐진 모든 일이 자연적으로 발생한 게 아니라는 사실뿐이었다.
설마 자신을, 그 '나무'에 넣어버린 거야?
추락…… 네가 돌아오는 길이 무너지고, 추락하는 걸 봤어. 내스티, 네가 집으로 오는 길을 반드시 확보해야 했어.
내 주문은 산산조각 난 그 길까지는 닿지 못해. 하지만 이 횃대나무의 뿌리라면 닿을 수 있어.
……내가 나무에 상처를 입히고 말았어.
(살카즈어) 해리하라!
내스티의 주문은 응답받지 못했다.
나무의 설계는 물론 밴시의 문법을 바탕으로 했어. 아직 결함이 많긴 하지만, 한 번도 내 주문을 거부한 적은 없었는데……
베일라를 둘러싼 나뭇가지는 여전히 소리 없이 뻗어가고 있었다. 그 가지들은 나부끼는 몸을 끌고, 조금씩 아주 조금씩 내스티 쪽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베일라, 멈춰…… 그래야 내가 당신의 상태를 분석할 수 있어.
내스티의 부탁도 응답받지 못했다.
베일라는 다급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질문만 하고 있었다.
협곡 밖에서는 무심과의 열매를 구할 수 없었을 텐데, 내스티…… 깃뿔은 어떻게 닦았니?
게다가, 주문을 알려주지도 않았는데 이젠 사용할 줄 아는 것 같구나.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도대체 어떻게……
그리고, 네 골필 말인데, 너의, 너의……
그건 중요하지 않아, 베일라. 내가 알고 싶은 건, 여기서, 당신한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야.
중요하지…… 않다고?
베일라는 돌연 침묵했다. 방금까지만 해도 뻗어 나오던 나뭇가지도 움직임을 멈췄다.
잠시 뒤, 나뭇가지들은 다른 쪽을 향해 뻗어가며, 베일라의 남은 몸을 집어삼켰다.
결합이…… 심해지고 있어?
이 횃대나무가 네 기억을 내게 나눠줬어. 네가 어딜 갔는지, 뭘 했는지……
이 나무가 내게 더 중요한 일을…… 더 많은 걸 알려줄 수 있을 거야.
나는 네가 리치의 도서관에서 잠도 안 자고 답을 찾는 모습을 봤어…… 눈이 나빠졌을 텐데, 그런데 그 고약한 프레몬트는 결국 널 쫓아냈더구나.
내가 알려줘야 했어. 너는 절대 미련한 아이가 아니라고, 그건 전부 나 때문이라고……
나는 네가 매일 깃뿔을 꽁꽁 감고 파울비스트의 털을 잔뜩 붙인 모습도 봤어. 산크타의 도시에 숨어 약간의 식량을 모으기 위해……
하지만 깃뿔은 그런 자극을 견디지 못해. 네 오른쪽 깃뿔이 더 자라지 않는 이유가 그것 때문이니?
네가 높은 철제 선반 위에서 자는 모습도 봤다. 나뭇잎 지붕도 없고, 그 위에 오두막을 짓지도 않았어…… 그냥 철판 하나만 걸쳐 두고 그렇게 자고 있더구나……
불편하지 않았니……? 어디 아프진 않았어?
내스티는 끝없이 이어지는 잔소리를 듣고 있었다. 비록 목소리는 일그러져 알아듣기 힘들었지만, 걱정 섞인 말투만큼은 너무나도 익숙했다.
베일라는 협곡에서도 이렇게 잔소리를 했다.
내스티는 문득 눈앞의 이 형체가 자신이 해결해야 할 난제도, 시급히 치료해야 할 환자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저 걱정이 많은 어머니일 뿐이었다. 그녀에게 필요한 건 이해받는 것이었다.
내스티는 천천히 손에 쥔 골필을 내려놓았다.
펀이 당신을 막 발견했을 때, 당신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말해줬어. 술식의 흔적, 총탄의 자국, 모래바람이 남긴 상처……
내가 걸어온 길을 당신도 모두 걸어왔네. 더 힘들고, 더 고통스럽게.
그러다 죽을 수도 있어…… 그대로 협곡에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나는 더 이상 협곡을 위해, 라케라말린과 아이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
당신은 충분히 많은 걸 했어. 당신이 모든 밴시를 위해 지어낸 그 거짓말들……
역시…… 그 거짓말로는 널 속일 수 없었구나.
당신을 따라 협곡으로 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난 이미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어.
……
그 거짓말을 나는 200년이나 지켜왔어. 그건 협곡 '집사'로서의 가장 큰 성취이자, 가장 큰 죄기도 해……
200년…… 그 전쟁을, 말하는 거야?
그래.
늙은 마왕은 너무 무능해서, 왕정은 물론이고 외부인조차 그를 꼭두각시로 이용해 살카즈를 통제하려고 했어.
애초에 액운의 해였어. 재앙이 그 땅을 갈아엎자마자, 연합군이 또 포화로 그 땅을 휩쓸었으니.
그 녹색 필라인이 지평선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뒤에는 엄청난 규모의 강철이 있었지. 어떤 게 증기 기사이고, 어떤 게 고탑 캐스터인지, 어떤 게 올드 가디언인지…… 구분할 수 없었어.
나는 그들이 언제부터 커다란 강철 함선과 불을 뿜는 대포를 갖게 되었는지 알지 못했어.
내가 기억하는 건, 산더미 같은 웬디고도 함선에 짓밟힐 때 그저 처량한 소리만 낼 뿐이었고, 우리 일족이 불타며 추락하는 모습은 마치 실이 끊어진 연 같았어.
그날 전장에 메아리치던 그 통곡의 울부짖음, 그건 아마 아무도 잊을 수 없을 거야.
……밴시의 울부짖음.
심지어 우리는 사람을 죽이고 있는지 장례를 치르고 있는지조차 구분할 수 없었어. 그저 애달프게 울고 소리칠 뿐, 제대로 된 엘레지 한 곡조차 끝까지 부르지 못했지.
연합군이 카즈델에서 철수했을 때, 우리 종족은 천 명도 채 남지 않았어. 그리고 그중 절반은 목소리를 잃었지.
……
태생적으로 밴시는 살카즈의 모든 전쟁에 참여해 왔지만, 그렇게 참혹한 사상자는…… 전대미문이었어.
나는 운 좋게 살아남았고, 그 피로 얼룩진 슬픔의 땅을 떠나 뭐라도 살아 있는 땅으로 도망쳤어.
협곡인가?
맞아, 협곡.
넓은 안개 호수가 협곡을 바깥세상과 자연스럽게 격리시켰고, 언제나 황금빛인 밀림은 계절을 붙들어 둔 듯했지. 협곡 전체가 마치…… 살카즈의 땅이 아닌 것처럼 고요했어.
살카즈의 것이 아니라고 정해진 건 아무것도 없어.
맞아…… 그때의 우리도 그렇게 믿었어. 나, 라케라말린, 그리고 막 왕관의 선택을 받은 전하까지도.
살카즈가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 수 있다고 믿었지.
나와 라케라말린은 남은 일족을 데리고 협곡으로 왔어, 안개 호수 근처에 부두를 세우고 밀림에 정원을 지었지.
우린 처음으로 밴시의 노래에 생명을 상징하는 부호를 써넣었고, 주문을 외워 나무에 탐스러운 과실을 맺게 했어. 그리고 넝쿨을 움직여 구불구불한 현수교를 놓았지.
그렇게 밴시가 처음으로 한곳에 오랫동안 정착할 수 있게 됐어. 더 이상 부고를 전하는 길에서 밤을 이불 삼아 잠들지 않아도 됐지.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협곡 밖의 '증표'가 또다시 눈송이처럼 밀려들었어.
죽음을 알리는 '증표'인가?
……그래.
아무리 테레시아와 테레시스라고 해도 전쟁이 남긴 문제를 그렇게 빨리 해결할 수는 없었겠지.
맞아. 전쟁의 불씨가 꺼졌어도 죽음은 여전했어.
그때 우리가 심은 열매는 이제 막 첫 수확을 맞이했어. 말리고 보니 양이 아주 적었는데, 수백 명이 가장 추운 겨울 1달을 겨우 지낼 수 있는 양이었지.
하지만, 내 방에 쌓인 '증표'들은…… 뱀파이어가 마지막으로 응고시킨 혼탁한 핏빛 결정, 나흐체러르가 마지막으로 벗은 낡아빠진 수의, 디얄이 마지막으로 만든 장미 같은 심장……
그것들은 우리가 말린 과일보다 더 높이, 더 빠르게 쌓였어. 만약 그때 협곡을 나와 죽은 자들을 위한 장례를 치렀다면……
우린 원래의 길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을 거야. 그 변화의 계기는 수천만 동포의 목숨을 대가로 얻은 것인데.
그래서, 당신이 모든 밴시를 대신해 결정을 내렸군.
내가 결정했고, 내가 라케라말린을 설득했어.
그 이후로, 나는 협곡 밖에서 들어오는 모든 죽음을 알리는 '증표'를 가로챘어.
간혹 협곡을 떠나 홀로 동포의 장례를 치르러 가는 밴시도 있었지만, 난 그 수와 빈도를 교묘하게 잘 조절했지…… 그 때문에, 라케라말린이 협곡 밖에서 의심과 비난을 적지 않게 받았어.
그 시절 동안, 우리는 밴시가 정말 천성을 버리고 완전히 다른 삶을 살 수 있을 거라고 믿었어. 밴시가 할 수 있다면, 모든 살카즈도 그렇게 할 수 있을 거라고.
비록 그 대가가, '증표'의 주인 대부분이 인도를 받지 못하고, 영원히 살카즈의 영혼으로 돌아가지 못하더라도.
비록 그 대가가, 천성을 거스른 밴시가 죽기 직전 일생의 공허함에 잠식돼, 길고 고통스러운 망각을 겪게 되더라도 말이야.
그런 식으로 200년 정도를 보냈어.
너를 만나기 전까지, 내스티.
……그래서, 나는 떠나야만 했어.
달마다 당신이 모두에게 알렸던 죽음의 소식은 얼마나 됐지? 카즈델에서 하루에 죽어가는 인간이 그보다 더 많았을 텐데.
당신이 그들을 속일 수 있었는지는 몰라도, 난 처음부터 진실을 알고 있었어.
……라케라말린 말이 맞아. 너는 너무 영리한 아이였고, 더군다나 카즈델에서 자랐으니…… 내가 널 속일 수 있을 리가 없었지.
그럼에도 나는 네가 협곡에서 살길 바랐어.
내게 무시당했던 수천만의 영혼 중에 너의 생모가 있었기 때문도 아니었고…… 내가 그 염원을 제때 들어주지 못해, 네게 행복한 유년 시절을 빚졌기 때문도 아니었어.
그리고 이런 희망도 갖고 있기 때문이었어. 살카즈가 새로운 삶을 찾기 위해 만든 '협곡'이라는 쉼터가, 200년 동안의 운영 끝에 적어도 바깥에서 온 아이 하나쯤은 받아들일 수 있기를 바라는 희망.
나는 나의 거짓말을 제일 잘 꿰뚫어 볼 것 같은 그 아이를 내 딸로 삼았어.
하지만 당신은 결국 조심스럽게 나를 다른 밴시로부터 격리했지.
협곡에 건 기대가 결국은 뜻대로 되지 않았던 거지?
나는……
나는 평생 많은 잘못을 범했어, 내스티. 그중에서도 네가 떠난 건 내가 가장 마주하고 싶지 않은 잘못이야.
너는 항상 이해심이 많은 아이였어. 만약 내가 진작 너에게 모든 걸 털어놓았더라면…… 넌 분명 날 이해했을 거고, 날 도왔겠지.
그랬다면, 그날 너는……
아니, 그래도 나는 떠났을 거야.
나는 우리가 헤어진 그날을 기억하고 있어.
당신은 나를 불렀지만, 나는 돌아보지 않고 고개를 숙여 수면을 봤어.
그날의 안개 호수는 바람이 없었고, 배는 마치 종이를 자르는 칼처럼 수면을 갈랐지, 잔물결조차 일지 않았어. 그래서, 사실 나는 당신의 얼굴을 아주 똑똑히 볼 수 있었어.
내가 협곡을 떠나겠다고 했을 때, 당신은 눈물을 흘리면서도 길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어…… 워낙 작아서 당신도 눈치채지 못했을 거야.
마음속으로는 내가 떠나길 바랐던 거지?
그날의 이별은 만회하지 못한 아쉬움이 아니라, 당신과 나의 공모야.
……
베일라, 아직도 눈치채지 못했어?
당신에게 있어서, 나보단 그 협곡이 딸에 더 가까운 존재라는 것을.
당신이 그곳을 발견했고, 당신이 살카즈의 미래를 거기에 맡겼어. 200년 동안, 당신은 물과 배, 과일과 과자로 그곳을 장식했어.
시간이 지날수록 그곳이 더욱 소중해졌지.
당신은 나를 협곡으로 데려간 이유가 2가지라고 했어. 첫째, 협곡이 치른 대가를 보충하기 위해서. 둘째, 협곡이 당신이 기대하는 모습으로 성장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내가 떠난 건, 당신에겐 일종의 해방이었을 거야. 왜냐하면, 협곡을 지탱하던 그 나약한 거짓말을 들춰낼 인간이, 떠났으니까.
하지만 동시에 당신에겐 고통이기도 했을 거야. 왜냐하면, 200년이 지나도 협곡은 결국 당신이 원했던 것처럼 그 무거운 짐을 짊어지지 못했으니까.
너무나도 취약했기에, 카즈델에서 자란 아이 하나조차 받아들일 수 없었지. 그렇다면 모든 살카즈의 미래가 귀속될 보금자리가 되는 일은 더 이뤄질 수 없었을 테니까.
내스티, 그만……
베일라, 아직 구별할 수 있겠어?
당신은 협곡을 도망쳐 여기까지 왔이. 그리고 자신을 이 횃대나무처럼 생긴 '나무'에 결합했지…… 근데, 그게 과연 나를 위한 거일까, 아니면 당신을 위한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단지 어떤 억울함 때문일까?
베일라, 당신은 무엇으로부터 도망치고 있는 거지?
죽음? 실패? 아니면 곧 죽을 자신이 그 실패한 협곡에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사실?
알려줘, 나를 이해시켜줘. 그래야 내가 이 잘못된 결합을 끝낼 수 있으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