ZT-3연습곡 '기우'
에벤홀츠는 레싱이라는 청년에게 고탑으로 납치당했고, 납치범들이 비밀 의식을 통해 에벤홀츠 몸 안에 있는 '속세의 음'으로 위치킹의 '기원의 뿔'을 소환하려 한다는 걸 알게 된다. 한편, 화가의 집에서 사건을 조사하고 있던 비비아나와 조율사는 위치킹의 잔당에게 습격을 받게 된다.
등장 오퍼레이터: 비비아나, 에벤홀츠, 레싱, 이그제큐터 디 엑스 포에데레, 베이스라인
방금 정신을 잃었을 때 무슨 소리가 들렸는데……
네가 검을 가는 소리였나.
너를 데려오는 길에 더러운 게 묻었거든.
그 칼이 날카롭길 바라지.
내 목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단단할지도 모르니까.
단단할지 아닐지 말로 해서는 몰라.
훗…… 여긴 고탑 위인가?
내가 있는 한 넌 못 뛰어내려. 목숨은 하나뿐인데, 자꾸 난리 치면 진짜 죽을 수도 있어.
꼭 나를 구해주고 싶은 것처럼 말하는군.
내 의도와는 상관없어. 그냥 책임일 뿐이지.
너도 마찬가지야, 백작. 너에게도 책임이 있어. 라이타니엔에 돌아오기로 한 이상, 이제는 애처럼 자꾸 도망만 치지 마.
네 고용주가 잊었나 본데, 우르티카 백작은 이미 죽었어.
우르티카 영지는 아직 존재해.
넌 여전히 우르티카 가문의 유일한 후손이고.
그런 거……
도망친다고 문제가 사라지는 건 아니야.
이 세상에 부모를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은 없어. 그 점은 누구나 똑같지.
자기변명인가, 잔당 씨? 그 사악한 노친네의 추종자가 되고, 킬러 노릇을 하는 것, 이 모든 게…… 어쩔 수 없다는 건가?
아니, 난 그저 지금의 자유를 어떻게 얻었는지 망각하지 말라고 자신을 일깨워 주는 것뿐이야.
뭐?
네가 말한 그 사악한 노친네, 즉 위치킹이 예전에 우르티카의 이름으로 우리 일족의 운명을 바꿔놓았어.
그리고 지금 내가 하는 모든 건 단지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야. 그리고 비슷한 처지를 가진 수많은 사람들이 어렵게 얻어낸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고.
설마…… 위치킹에게 감사하다는 건가?!
난 사실을 말했을 뿐이야.
……'사실'.
그럼, 위치킹 때문에 많은 피를 흘리고, 그의 잔당에게 유린당하고 짓밟힌 무고한 사람들은 뭐지?
그 사실이 네게 도움이 된다고 해서, 네가 다른 사람이 받은 고통을 무시해도 된다는 건가?!
위치킹은 죽었어. 그 옳고 그름과 공과에 열중하는 건 역사학자나 정치가, 그리고 한가한 인간뿐이지.
난 전사다. 전사는 지금의 싸움과 다음에 있을 싸움만 생각하지.
만약 위치킹이 정말로 무언가를 남겼다면, 그 유산이 좋은지 나쁜지를 판단하는 건 위치킹 본인이 아니라, 그걸 사용하는 사람들이야.
그게 바로 후계자가 고려해야 할 일이고.
그런 눈빛으로 보지 마!
상처가 또 벌어졌어.
신경 꺼, 위치킹 잔당의 관심은 역겨우니까!
백작……
닥쳐!
에벤홀츠.
위치킹과 관련된 사실을 직시하지 않으려는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해?
……
그런 얘기까지 할 필요는 없다, 레싱.
……돌아왔네.
술식은 다 준비됐나?
술식……?
잘 들어라, 우르티카 가문의 애송이, 네 머릿속에 있는 그건 아주 유용하게 쓰일지도 모른다.
자, 한번 보여줘 봐라……
윽!
라이타니엔 사람들은 영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지만, 선율 자체는 아주 잘 보존했군.
쯧쯧, 가끔은 의심된다니까. 놈들이 헤르쿤프트쇼른의 잠꼬대까지 다 녹음한 건 아닌지……
녀석이 가정 교사에게 욕설을 퍼부을 때 한 비유들이 그립구나.
그…… 그 노친네 얘기를 하는 건가? 둘이 무슨 사이지?
노친네? 자기 집안 어른을 그렇게 부르다니? 라이타니엔 사람들은 예의범절을 가장 중요시하는 게 아니었나? 애송이, 다른 건 몰라도 이 점 하나만은 꽤 닮았군.
난 그놈과 조금도, 추호도, 털끝만큼도 닮지 않았어!
갓난아이처럼 고래고래 소리 지르지 마라. 목소리가 높다고 누가 들어주는 것도 아니니까.
정 소리 지르고 싶다면 유용한 거라도 외치도록. 입으로 낼 수 있는 특별한 술식이 있는데, 내가 가르쳐 줄까?
위치킹의 하수인 따위가, 내 스승이 될 자격이 있다 생각하나?!
아츠 구체? 레싱, 저번에 네가 당한 게 이거였나?
내 실수였어.
내가 누누이 말했을 텐데. 무기만 다루는 건 소용없다고. 아츠에 대한 감지 능력을 더 키워라! 어리석은 것 같으니라고, 어디 가서 내 밑에 있었다는 말은 꺼내지도 마라!
그런 적 없어.
……
그리고 너, 아주 형편없지는 않구나. 아츠 유닛 없이도 이 정도면 나쁘진 않아.
하지만 에너지를 구동하는 방식이 서툴기 짝이 없군. 그렇게도 자폭이 하고 싶은 것이냐? 누가 감염 증세를 이용하라고 그러더냐? 고탑의 그 얼치기들이?
이건 다 위치킹의……
얼빠진 놈들 같으니라고. 헤르쿤프트쇼른의 광기만 배웠지, 녀석의 능력은 배우지 못했어.
윽…… 컥!
훨씬 좋아졌군, 애송이. 가만히 있으면 모두가 더 안전해질 거다.
레싱, 방어 술식을 검사해 봐.
게르하르트 선생님도 오고 계셔. 도착한 뒤에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여황의 목소리와 게사츠슈베이터의 주의를 끌기 전에 속전속결로 처리해야 하니까.
좋아. 게르하르트가 도움은 안 되겠지만, 더 배우게 하는 것도 좋지.
'기원의 뿔'이여……
훗, 이게 얼마 만이었더라?
카를 슈미트 거리.
거긴 왜 또 가는 건데요? 한물간 예술가들이 모여 있는 거리일 뿐이잖아요. 여러 번 조사해 봤어요.
로리스 보르딘은 사고가 나기 전에 신고 전화를 받았습니다.
신고자는 루카스라는 나이 든 남작으로, 카를 슈미트 거리에 살고 있습니다. 전화에서 들은 바로는, 최근에 거리의 소란 때문에 헌병대를 여러 번 찾았다고 합니다.
그 노귀족들은 원래 그래요. 별거 아닌 일로도 호들갑 떠니까. 고탑에 살 자격도 없으면서 지상 사람들을 하인처럼 부려 먹으려고 하죠.
그러니까 그건 신경 안 써도 됩니다.
로리스 보르딘의 행동으로 보면 그곳에 조사할 만한 단서가 남아있을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아니…… 제 말을 듣기는 한 거예요? 보르딘 씨가 전화를 받고 거기 갔다고 해서, 그곳이 꼭 조사할 만한 곳이라 할 순 없어요.
보르딘 씨가 헌병대 대장이긴 하지만, 그래 봤자 자작밖에 안 돼요. 게다가 혈통도 없는 외지인인데.
20여 년 전에 세운 공로가 있다고 해도, 츠빌링슈튀르메처럼 고탑이 즐비한 곳에서는 대귀족의 시종에 불과하다고요.
그 남작을 상대한 건, 가치 있는 단서 때문이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에요.
상술한 정보는 임무 목표와 연관성이 적습니다.
아니, 그냥 가 버리면 어떡해요! 적어도 옆에 있는 사람에게 상의…… 저기요, 잠깐만요!
음?
일단 저 가게에 들어가 계세요.
'슐츠 부인 명품 모자'? 저는 광륜이 있어서 모자를 거의 쓰지 않습니다.
그냥 좀 들어가세요.
……
안녕하세요, 잠깐 실례할게요.
안녕하세요.
음…… 분위기와 옷차림을 보니, 현지인 맞으시죠?
그렇다고 할 수 있죠.
그렇다면, 카를 슈미트 거리에 어떻게 가는지 알려주실 수 있나요?
음……
죄송합니다, 제가 여기 온 지 얼마 안 돼서…… 당신 같이 젊은 귀족은 고탑을 벗어나는 일이 별로 없겠죠? 아무래도 근처 주민에게 물어보는 게 좋겠네요.
그럴 필요 없어요. 길은 제가 잘 압니다. 이 길을 따라 쭉 가다가, 저기 네 번째 조각상이 있는 곳에서 왼쪽으로 돌면 멀리서도 그 거리가 보일 겁니다.
'멀리서도 보여요'?
모르세요? 카를 슈미트 거리, 일명 '금잔화 골목'이요.
금잔화……
대음악가 카를 슈미트가 거기 살았었거든요.
그 사람이 햇살 아래의 금잔화를 영감으로 여러 명곡을 썼어요. 그 뒤로부터 그 거리는 예술가들의 성지가 되었죠.
그렇군요.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네요. 책에선 읽은 적이 없는데.
그냥 일화일 뿐이에요. 츠빌링슈튀르메에는 그런 곳이 많아서 이야기라고 할 수도 없죠.
네, 알려 주셔서 고마워요.
참, 그러고 보니 아직 성인 모자를 쓸 나이는 아니지 않나요?
어,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서요.
사람을 기다…… 려요?
만약, 우리의 목적지가 같다면…… 함께 가는 건 어떤가요?
……호의는 감사합니다만.
여황의 선율이 저를 인도할 테니, 그거면 충분합니다.
그렇군요.
츠빌링슈튀르메를 뒤덮은 선율이 늘 지금처럼, 물과 구름처럼…… 평온하고 잔잔하게 흐르길 바랄게요.
……나와요.
아까 왜 그랬는지 설명해 주시죠.
방금 저분은 여황의 목소리예요.
좋은 사람인 것 같지만, 아쉽게도 우리는 갈 길이 달라서요.
비비아나, 늦었구나.
죄송해요, 뢰벤슈타인 씨. 거리에서 좀…… 특별한 사람을 만나서요.
덕분에 우리 말고도 이 사건을 몰래 조사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왠지 조금 슬퍼 보이네.
네. 그 밀정은 아직 아이였거든요.
게다가……
왜 갑자기 멈춘 거니?
듣고 있어요.
여황의 음악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어요.
츠빌링슈튀르메 전체가 여전히 아름다운 음악 소리에 푹 빠져 있어요.
하지만…… 서로 다른 의지의 연주가 정말로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요?
미하 볼프, 여황의 목소리를 두려워하는 걸 보니, 당신의 의뢰인은 설마 여황의 적인 겁니까?
거리에서 대놓고 물어도 될 말이 아니잖아요!
곧 골목에 들어갈 건데, 그럼 이따가 다시 물어보죠.
설마 제가 로리스 보르딘 씨를 죽인 사람과 한패인지 물어보려는 건가요? 그건 절대 아니에요.
보시다시피 저는 루포예요. 제가 태어난 곳은 시라쿠사와 인접해 있고요.
위치킹 통치 초기, 시라쿠사는 막 라이타니엔에서 독립했죠. 그런데 위치킹의 방식이라면, 그와 그 추종자들이 우리 일족을 어떻게 대했을 것 같아요?
저는 당신에 관해 물었지, 당신 일족의 역사를 물어본 게 아닙니다.
그게 뭐가 다르죠?
저는 당신이 본인의 의지에 따라 결정한다고 가정할 뿐입니다.
의지요? 저는 가문의 사명을 갖고 태어났어요. 그 단어는 저랑 아무런 관련도 없죠.
아까 그 여황의 목소리도 마찬가지예요. 그분은 라이타니엔에서 태어나 카시미어에 갔다가, 또 카시미어에서 다시 라이타니엔으로 돌아왔어요. 그게 그분 스스로의 선택이었을까요?
꽤 복잡하군요. 이러면 적과 파트너를 구분하기 어려워집니다.
하…… 산크타 씨, 왜 라테라노만 낙원이라고 불리겠어요?
멈추십시오.
왜 그래요? 저 앞이 카를 슈미트 거리인데. 여황의 목소리도 그쪽으로 간 걸 보면 보르딘 씨가 정말 뭔가를 발견했을지도 몰라요.
골목이 전과 많이 달라졌습니다.
너무 조용하군요.
이게 다 시만 부인의 그림인가요?
그렇습니다.
대부분…… 《위치킹의 죽음》의 초안이네요.
저는 감히 건드릴 수 없고, 봐도 모르기에 원래 있던 그대로 뒀습니다.
시만 부인이 몇 년 전에 그린 그림은요?
몇 년 전 그림은…… 거의 없습니다. 부인께서는 늘 23년 전의 가을과 함께 열정이 끝나버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혹시 더 오래전의 작품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네, 보여주세요.
시만 부인의 옛 작품은 뭔가 섬세하고 색감이 밝으며 더 생동감 있네요.
프리다 시만은 붓으로 가장 진실한 감정을 기록하길 갈망했어. 기억력도 아주 좋았고 오리지늄 아츠도 잘 다뤄서,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모든 순간을 그렸지.
그 당시 위치킹의 고탑에서 처음 봤을 때의 프리다는 무척 젊었어.
그녀는 매우 발랄했고, 또 미노스인 특유의 호탕함도 있었지. 다른 라이타니엔 귀족 여인처럼 규율에 얽매이지 않았고.
아무래도 프리다의 붙임성 때문에, 다들 출신을 막론하고 그녀 곁에 모이는 걸 좋아했을 거야.
햇빛이 찬란한 오후면 프리다는 늘 친구들과 함께 이 골목에서 시회를 열곤 했어…… 맞다, 그러고 보니 네 부모도 자주 참여했지.
부모님이요? 두 분도 여기 계셨나요?
너한테 얘기 안 했나? 네 부모님은 이 도시에서 만난 거야.
그때 네 부친은 아직 선제후의 후계자가 아니었어. 슈투름란트에서 아인발트로 왔는데, 일을 보고 남는 시간에는 항상 금잔화 골목에서 여러 젊은이들과 어울렸지.
하루는 시만 부인이 개최한 시회에서 평민 출신의 젊은 아가씨가 용기를 내 본인이 쓴 시를 읽었어.
그게…… 어머니인가요?
저한테는 그런 걸 한 번도 말씀하신 적이 없었는데.
제 기억 속에서 어머니의 얼굴에는 늘 근심이 가득했어요……
루신다 드로스테는 상냥하고 수줍음 많은 착한 아가씨였고, 부드러우면서도 반짝이는 눈을 갖고 있었어. 루신다를 보고 있으면 마치…… 여름날 산들바람이 부는 호숫가가 떠올라.
이 골목에서 베르너는 루신다에게 첫눈에 반해버렸고, 심지어 폐하의 알현도 놓칠 뻔했지.
그때 브란트가 나서지 않았더라면, 호흐베르크 가문의 군대가 아인발트에 도착하기도 전에, 베르너는 아마 위치킹 탑 앞에 있는 조각상 중 하나가 됐을 거야.
그때는…… 여전히 위치킹의 시대였나요?
상상이 안 되지?
하지만, 그런 시대라도 어떤 부분에서는 이 그림에 그려진 것처럼…… 휘황찬란하기도 했어.
찬란한…… 금잔화군요.
이 그림은 아주 낯익어요. 꼭 어디서 본 것 같은 기억이 들어요.
어디였을까……
“비비아나.”
“미안하구나, 이 그림을 이젠 떼어내야 한단다.”
“엄마는 이제 없다. 이 방에 있는 것도 사람들이 전부 가져가겠지.”
“앞으로 너를 돌봐줄 사람도 없는데, 정말 걱정되는구나.”
“곧 너를 데려갈 사람이 올 것이다.”
“착한 아가, 울지 말려무나. 바깥에 가면 새로운 친구도 많이 사귀게 되고, 엄마랑 아빠가 없어도 너를 사랑해 줄 사람이 있을 거란다.”
“그리고 금잔화도 직접 볼 수 있겠지.”
“이 그림처럼 찬란하게 피어있는지, 나 대신 봐줬으면 좋겠구나.”
……태양을 쫓는 꽃.
슈투름란트의 날씨는 맑을 때가 거의 없고, 고탑은 또 춥고 습해요. 아버지는 수도 없이 시도해 봤지만, 어떤 캐스터를 데려와도 방 안에 있는 화분에서 꽃을 키울 수 없었죠.
하지만 츠빌링슈튀르메의 이 골목에선, 곳곳에 피어있네요.
너무나도…… 포근해요.
비비아나, 어디 가?
……적인가?
이런, 비비아나!
들릴 듯 말 듯 한 연주 소리.
아득히 먼 곳에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또 귓가에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소리는 시간을 넘고 또 청중의 기억을 넘어, 서로 다른 공간을 하나로 이어 붙였다.
돌아가려는 거구나.
에른스트의 부상이 급격히 악화되고 있어. 쌍둥이가 최고의 치료사를 데려왔지만, 여전히 목숨을 살릴 방도가 없어.
그 말은, 당신이 새로운 슈투름란트 선제후가 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거네.
정말 생각지도 못했어. 이 도시에 막 왔을 땐, 나는 내가 시인이 될 줄 알았는데 말이야.
루신다는 어떻게 할 거야?
나야 물론 루신다가 함께하길 원하지만, 강요하지는 않을 거야. 루신다는 재능이 아주 뛰어나. 시만 부인 곁에 남는다면 훌륭한 화가가 될 수도 있어.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고 있잖아.
그래서 더욱 속일 수 없어.
이제 난 아무런 근심 걱정도 없는 호흐베르크 가문의 막내아들이 아니야. 앞으로의 내 인생은 슈투름란트와 호흐베르크 가문의 것이지, 내 것은 아니야.
영지의 백작들은 이미 나 대신 결혼 상대를 잔뜩 준비해 뒀겠지. 이제부터 죽기 살기로 싸울 테고.
설령 루신다가 나와 함께 간다고 해도, 난 아무것도 약속해 줄 수 있는 게 없어. 싸움에서 밀리면, 루신다는 평생 이 고탑에 갇혀 시녀로 살아야 할지도 몰라.
폐하는…… 위치킹은 죽었어. 라이타니엔을 내려다보던 유일한 고탑이 무너졌지. 우리가 운명에 농락당하는 날은 이제 끝난 줄 알았는데……
적어도 우리는 그 운명의 이름이 '위치킹'이 아니라는 걸 알았어.
한 번 더 시도해 보는 건 어때? 루신다를 데려가든지, 루신다를 위해 여기에 남든지.
마치 위치킹과 싸우던 그날 밤처럼 말이야. 나는 착하고 따뜻한 사람들에게 모두 좋은 결말이 있었으면 해.
연주 소리가 점점 뚜렷하게 들렸다.
조각상들의 연주와는 다르게, 이 소리에서는 생명을 느낄 수 있었다.
소리는 마치 친근한 손처럼 그녀를 이끌고 앞을 향해 뛰어, 계단을 내려가고 비바람으로부터 도망쳤다.
거의 다 왔다. 이 계단만 내려가면 바깥의 햇살을 껴안을 수 있다……
차가 도착했습니다.
루신다가 오지 않았어.
그녀를 찾아야 해.
다들 기다리고 있습니다.
위치킹은 죽었습니다. 쌍둥이와의 약속에 따라, 당신의 수하들은 반드시 영지로 돌아가야 합니다.
점심 전에 여기를 떠나셔야 합니다. 다른 선제후들도 각하의 반응을 살피고 있습니다.
슈투름란트의 안위가…… 아니, 라이타니엔의 안위가 당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브란트, 우리가 언제부터 이렇게 멀어졌지?
너는 늘 투구를 쓰고 있잖아, 이젠 네 눈도 바라볼 수가 없어. 가끔은 말하는 사람이 너인지 다른 게사츠슈베이터인지 구분이 안 되네.
제가 왔든 다른 게사츠슈베이터가 왔든, 차이는 없습니다.
라이타니엔은 더 이상 내란을 견딜 수 없습니다. 슈투름란트는 사람들에게 신망을 얻을 수 있는 선제후가 필요합니다.
너는 날 지키러 온 게 아니야, 그렇지?
그날 밤, 네가 에른스트와 아버지를 지키지 않은 것처럼 말이야.
……베르너, 기억하십니까? 게사츠슈베이터로 선발되어 특별 훈련을 받으러 가기 전, 저는 당신과 에른스트에게 남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너는 우리와 함께 자랐고, 이미 호흐베르크 가문에 충성을 다하겠다고 맹세했으니까. 아마 본인의 맹세를 깨기가 싫었던 거겠지.
하지만 당신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지켜야 하는 건 그 어떤 한 사람의 목숨이나 호흐베르크 가문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야.”
저는 이 말을 한순간이라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
알았어.
브란트, 우리는 정말 운명에 맞서 싸울 수 없는 걸까?
안 돼, 가지 마.
희망을 버리지 마.
적어도 이렇게 쉽게는……
선제후의 젊은 후계자는 이미 떠났지만, 비비아나는 함께 가려 하지 않았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가을날의 골목은 언제나 금빛으로 찬란했다. 비비아나의 어머니는 분명 골목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다만, 시간에 맞추지 못했을 뿐.
그녀는 달렸고, 그녀는 찾고 있었다.
햇살 아래에서, 금잔화는 마치 그녀의 부모가 그렸던 미래처럼 거리에 활짝 피어있었다.
비비아나는 어머니를, 아버지의 기억 속에 있는 그 뒷모습을 너무나도 붙잡고 싶었다.
그 뒷모습을 붙잡을 수만 있다면……
그녀는 아버지의 비극적인 일생과…… 그녀 자신도 되돌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해가 지나도, 이 금빛의 꽃송이는 도시의 희로애락을 가득 흡수해 여전히 찬란했지만……
밝게 빛났던 그 희망은 이미 23년 전에 영원히 남아 있었다.
어째서……
어째서 붙잡을 수 없지?
정말 운명은…… 거역할 수 없는 걸까?
비비아나! 조심해……!
비비아나가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연주 소리가 멈췄다.
주위를 둘러싼 선율은 제자리에 굳어버린 듯 가만히 있더니 순식간에 거센 에너지로 변했다.
짙은 구름 같은 아츠가 햇살을 가르며 비비아나를 향해 덮쳐왔다.
……
윽……!
괜찮아, 내가 있으니까.
이 첼로 소리는……
정신계 오리지늄 아츠야.
이 첼로 소리는 우리 각자가 가진 베르너에 대한 기억을 불러일으키고 있어.
어머니…… 아버지……
비비아나, 이리 와. 귀를 막아줄게.
두 분은…… 이미 안 계세요.
아무것도 바꿀 수 없어요……
듣지 마. 네가 상상 속에서 뭘 봤든, 그건 지금 일어나는 일이 아니야.
위치킹의 잔당이 이 골목에 숨어 있어. 우리가 올 걸 알고 있었어.
쳇…… 적이 너무 많아.
내 오리지늄 아츠로는 처리할 수 없으니, 어떻게든 도망칠 방법을……
갑자기 공중에서 또 다른 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떠한 선율 같았지만 그 선율에 노래를 넣을 수는 없었고, 종소리 같지만 멈추지 않았다.
소리는 어떠한 선고라도 하는 듯, 바로 마음속에서 요동쳤다.
보라색의 아츠 빛이 가장 눈 부신 석양처럼 구름의 방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거리를 가득 내리비췄다.
이 선율은…… 게사츠슈베이터?
브란트, 너야?
……베르너의 딸을 데리고 집안으로 숨어.
……
그리고 너희들, 잔당 놈들.
쓰레기통에서 주운 그 더러운 것으로……
……감히 츠빌링슈튀르메를 어지럽힐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