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10의례 광장
이베리아의 눈에 도착한 카르멘과 켈시는 전사한 영웅을 발견하고, 헌납물을 받은 시본은 노랫소리로 평온함을 되살린다. 항쟁은 실패의 심연으로 빠져들어 가고 있고, 결전은 눈앞에 다가온다.
등장 오퍼레이터: 스펙터, 울피아누스, 켈시, 스카디, 글래디아, Mon3tr, 스펙터 디 언체인드, 아이린, 루멘
……
이베리아의 눈…… 지난번에 이곳에 상륙한 이후로, 시간이 아주 많이 흘렀군.
무수히 많은 징벌군의 전사들이 이곳에서 희생되었네. 시본은 결국 우리의 방어선을 무너뜨렸고, 무수히 많은 엔지니어가 등대 안에서 억울하게 죽어갔지.
최후의 배가 삼켜지기 전에 우린 철수했네. 살아남는 사람은 열 명 중 한 명 정도 꼴이었지.
하지만, 지금. 보게나.
등불일세!
오랜만에 카르멘의 목소리가 약간 흔들렸다.
켈시는 말없이 멀리 있는 암초의 중앙을 바라봤다. 거대한 등대가 하늘을 훤하게 비춰, 마치 대낮 같았다.
배가 안 보이네.
좋은 징조네. 그건 원하는 걸 찾았다는 뜻이지.
나아가세. 등불이 꺼지지 않은 한,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네.
(문을 둘러싼 채 꿈틀대는 사르륵 소리)
……Mon3tr.
(크르르르)
문 주위를 정리해. 안으로 들어가겠다.
……
불의 온도.
이 시테러들은 문 앞에 모여, 빙빙 돌며, 배회하고 있었다.
카르멘의 시선이 먼 곳을 향한다. 그는 시커멓게 그을린 이 끔찍한 괴물들의 시체가 길가에 널브러져 바람에 흩날리고 있는 걸 발견했다.
시테러는 두려움을 모르는군.
하지만 저 녀석들은 이익을 추구하고 해로운 건 피하는 방법을 알아. 본능적으로 어떻게 신중하게 사냥해야 할지를 아는 거지.
……놈들은 두려워하고 있네. 설령 이 생물들이 국가가 무엇인지 모르고, 율법과 도덕은 더더욱 경멸한다 할지라도 말이지.
저놈들은 이베리아의 대재판관을 두려워하고, 우리가 세운 문명 위의 모든 것을 두려워하고 있네.
다리오!
……
켈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보았다. 형광빛을 발산하는 지면 위에 기묘한 고리가 형성되어 있었다.
시커멓게 그을린 시체가 산처럼 쌓여있고, 수천수만 동포의 죽음은 시테러에게 완전히 새로운 습성을 만들어 냈다……
……저 탑에 접근해서는 안 된다.
미약한 불씨는 아직도 타오르고 있다. 그것은 본디 커다란 불꽃이었다.
시테러가 파도처럼 죽어나기 전에는, 이곳에 불이 붙을 물질이 전혀 없었을 것이다.
화염의 중심에는 한 사람이 서 있었다. 그의 한 손에는 등불을 들고, 다른 손에는 검을 쥔 채, 젊은 시절 보초를 서는 훈련을 받았을 때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
……
다리오, 잘 해주었네.
편히 잠들도록.
다리오가 든 등불은 마치 카르멘의 작별 인사에 대답하는 듯, 더 많은 시테러를 화염 속으로 집어삼켰다. 활활 타오르는 불길이 이미 숨을 거둔 대재판관을 감쌌다.
이미 흐릿해진 그의 두 눈은 여전히 먼 곳을 보고 있었다.
마치 조각상처럼 서 있는 다리오의 앞에서, 카르멘은 오랫동안 침묵했다.
켈시는 카르멘의 애도를 방해하지 않았다. 다만, 이곳에는 헌터의 흔적이 많지 않다는 점이 눈에 들어왔다.
대재판관 단 혼자서, 죽는 그 순간까지 끊임없이 시테러와 사투를 벌인 것이다.
전사는 이미 힘을 다했지만, 시테러들은 여전히 그를 두려워하고 있다. 그의 불은 꺼지지 않았으며, 등불은 어두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재판관은 자신을 일종의 현상으로 만들었다. 그는 목숨을 걸고 이베리아의 눈의 순결을 지켜냈다.
한참 후에, 카르멘은 고개를 들었다.
켈시는 이제야 비로소 눈앞의 고령의 노인에게서 세월의 흔적을 엿볼 수 있었다. 재판소에서는 각종 수단을 써서 그의 생명을 연장했지만, 이 순간만큼 그 눈 속의 피로를 감출 수가 없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켈시를 보았다. 그리고 화염 속에 사라져 가는 다리오를 보고 또 보았다.
다리오는 나의 가장 훌륭한 학생이었네, 켈시.
우리에겐 이 전사의 죽음을 애도할 시간이 3분 정도 있어. 불꽃이 꺼지면, 시테러는 더 이상 소굴의 장애물이 없으니 벌 떼처럼 몰려들 거야.
게다가 그 소녀는 아직 보지 못했어. 적어도 다리오의 제자는 아직 살아 있겠지.
이곳에 더 강한 시본은 없나?
아직까지는 없어.
두려워할 정도의 숫자는 아니군.
단지 '지금은 없을 뿐'이야
우린 한 번에 끝낼 방법을 찾아야 해. 이베리아의 눈은 브레오간이 만들었고, 그것은 에기르와 연락이 닿는 단말기가 될 수 있을 거야.
전제조건은 그들이 그 배를 찾았다는 것이겠지…… 잠깐.
누가 이베리아의 눈을 재가동한 건가? 에기르인과 다리오는 모두 초행이었을 텐데……
……위에 있나 보네.
하아…… 어떻게든 여기까지……
하아…… 하아…… 제, 제어기는 무사해……
으윽, 숨넘어가겠네……
(호기심을 표하는 듯) 크르르르
으아아~
다, 당신은……
……인정할게. 넌 확실히 우리 상상을 초월했어.
혼자서 이베리아의 눈을 재가동시키고, 적어도 30%의 기능은 사용할 수 있게 만들었어.
그것도 너 혼자. 이런 상황에서.
다……당신은 엘리시움 씨의 그…… 앗!
재, 재판관님은요?! 그분은 아래쪽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었어요. 저, 전 그분한테 감히 다가갈 수도, 도와드릴 수도 없었어요. 그래서, 이곳에서 메인 컨트롤을 지키고 있을 수밖에……
다리오는 희생되었네.
뭐라고요……
하지만 다리오의 희생이 무의미하다 볼 수는 없네. 신념을 지키기 위한 희생은 곧 개체 존속의 증명이니.
재판소의 재판관으로서, 그리고 이베리아 수호자의 신분으로 용감히 싸우다 죽었네. 다리오가 원하는 이상적인 자신은 영원히 이베리아의 해안에 남아 있을 거라네.
적어도, 에기르인이여. 그대는 다리오가 희생한 의미를 지켜주었네. 지금까지 버티면서 포기하지 않아 주었지.
아주 잘해주었네.
……대, 대재판관님…… 그분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도 못했지만…… 그래도…… 흑…… 흑흑……
그럼, 그란파로는요…… 우리 집은 어떻게 됐나요?
……평소라면, 시민의 질문에 하나하나 대답하지 않았겠지.
하지만 지금은…… 자네에게 거짓말하고 싶지 않네. 그란파로는 곧 징벌군의 관할이 되겠지. 시민들은 통일된 단속을 받게 될 것이고, 전방 초소를 세우기 위해 전력을 다할 것이네.
그리고…… 티아고는 죽었네. 이교도의 손에 말이지.
……!
어, 어떻게?! 티아고 아저씨가……?!
티아고는 일찍부터 심해 신도의 존재를 알고 있었지만, 못 본 척 외면했네. 그로 인해 징벌군의 계획에 차질이 생겼고, 우리가 지원하는 데 걸리는 시간도 늘어났지.
만약 도망쳤더라도, 그냥 내버려 두지는 않았을 걸세.
……
조르디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피로와 무감각을 느꼈다. 이전부터 줄곧 팽팽했던 줄이 갑자기 끊어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티아고 아저씨가…… 왜?
……Mon3tr, 입구를 지켜라.
(신나게 맞장구치며) 크르르르르
……'스툴티페라 나비스'가 마지막으로 나타난 위치를 확인할 수 있나?
……
켈시.
그리 멀지 않아. 게다가 가장 최근의 기록은 48시간 내로 보이네.
뭐라……?
지금까지 계속 신호를 보내온 건가?
브레오간이 이베리아 왕족을 도와 등대와 함대를 구축한 것은, 고향과 다시 연락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이베리아의 눈도 그렇고, '스툴티페라 나비스'의 어느 은밀한 구석에서 발견된 발신장치도 모두 고스란히 에기르의 기술을 사용하고 있어.
물론, 이 모든 것은, 시본이 그 배를 파괴하지 않았거나, 그곳을 소굴로 삼았다는 전제하에서지.
카르멘은 조용히 빛이 뻗어나가는 방향을 따라, 수평선 너머를 바라봤다.
육안으로는 '스툴티페라 나비스'의 방향을 가늠할 수 없다. 바다는 몹시도 넓어, '그리 멀지 않다'는 표현은 육지에서도 말도 안 되는 소리라 할 수 있다.
처음으로 피곤한 모습을 보인 성도는 다시 한번 나이에 걸맞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의 입술은 살짝 떨리는듯했고 수많은 생각이 뇌리를 맴도는 것처럼 보였다.
……알폰소…… 가르시아…… 투레…… 줄리아……
그대들은 아직 거기에 있는가?
……대장과 글래디아가, 바닷속으로 쫓아갔어.
도우러 가야 해.
아뇨, 여기에 있는 게 나아요. 해류가 불안정하고, 시본의 냄새가 섞여 있죠. 한 마리만 있는 게 아닐 수 있어요.
……
뭔가 못 들었나요, 스카디?
아니…… 아무것도.
그래요.
내 배를 무슨 꼴로 만든 거냐!!
네놈, 에기르인, 네놈들은 어떻게 들어온 거지?
이곳의 열쇠는 나만 갖고 있었다. 그 밥버러지가 죽고 나서, 열쇠를 바다에 버려버렸거늘! 벌써 50여 년 전 일이다!
만약 여기가 운송 도구인 이 배의 동력 시설이 있는 곳이라면, 이곳을 잠근다는 건 곧 희망을 포기하겠다는 것 아닌가?
그 밥버러지는 마지막 엔지니어였다. 그 녀석이 죽고 나면, 더 이상 이 배를 고칠 수 있는 사람은 없었지.
게다가 그때는…… '시본'에 둘러싸여 꼼짝할 수도 없었지. 내 배에 동요하는 선원 따위는 필요 없다.
내 질문에나 답해라, 네놈들은 이곳에서 무엇을 찾은 거냐?!
브레오간을 찾았어. 대장이 그 사람이 남긴 단서를 쫓아 이베리아까지 쫓았고, 지금은 이곳까지 와있지.
네놈들…… 배를 만든 그 사람이랑 아는 사이란 말이냐?
아니요, 별 기억은 없어요. 난 '기술'쪽이니까요. 예술도 일종의 기술이죠.
그렇다고, 그리 이상할 것도 없죠. 에기르로 돌아가고 싶으면 당연히 에기르인의 단서를 따라 찾는 것이……
……이건 뭐죠?
하, 추잡한 녀석들, 브레오간의 개인 물품까지 뒤지다니…… 에기르는 상대방의 사생활을 존중하지 않는 게 전통인 거냐?
……
뭐라고 적혀 있어?
브레오간의 육지 견문 기록이라고 쓰여 있네요. 일종의 유람기인가 보네요.
제2대대장이 이걸 찾고 있었던 거야?
글쎄요, 본인한테 직접 물어보지 그래요?
……그건 일부일 뿐이에요.
성과도 없이 돌아온 거냐, 흥.
놈을 놓쳤다.
정보가 하나 더 있다. 우리가 추적을 포기한 이유는, 근처에 다른 시본의 흔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멀리서부터 냄새를 따라 이곳으로 향했다. 놈들의 무리가 울부짖고 있지.
나는 이대로 한바탕해도 상관없지만, 그전에 이 배의 문제부터 해결해야 하겠지.
너희는 아직도 나의 이베리아를 노리고 있는 것이냐?
오직 이 배만이 저희를 에기르로 돌아가게 해줄 수 있고, 또 이 배가 있어야만 에기르의 도시와 연락을 취할 수 있으니까요.
수리는, 브레오간의 기술에 대해 수박 겉핥기식으로 아는 이베리아인보다 제가 낫겠죠.
전 이 기회를 포기할 수 없어요. 설령 무력을 사용할지라도요.
……
……
4대2라? 흐음.
(경계하듯) 크오오오오!
3대3이다.
……대장?!
그렇게 서두르지 마라, 글래디아.
내가 한 말을 잊지 마라.
……그건 우리가 에기르로 돌아가는 걸 포기하는 이유가 될 수 없어요.
넌 에기르가 지금 어떤 모습인지 모르겠지. 내가 말해주겠다.
소굴과 서식지가 위협받지 않는 한, 시본은 절대 도시를 먼저 공격하지 않는다. 모든 학살과 파괴의 배후에는 타락한 에기르 인의 조력이 있었지.
그들은 우리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우리와의 연락도 끊겼지. 우리의 몸에는 시본의 피가 흐르고 있다.
이 생물들과 대항하며 보냈던 긴긴 세월 동안, 지금이 보기 드문 좋은 기회인 것이지.
그 타락자들이 저 쓰레기들과 무관하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설령 내버려 둔다 해도, 시본의 영토는 무질서한 확장을 계속하다, 결국엔 온 바다를 삼키게 되겠죠.
그건 또 다른 문제다.
그리고 이 두 문제는 네가 고향에 돌아가 군대를 재정비한 뒤, 다시 출정한다고 해도 쉽게 해결될 문제가 아니지.
문제를 해결하려면 사고방식을 바꿀 필요가 있다.
그래서 당신은 저 하등 생물들에게 귀를 기울이고, 놈들과 같이 행동하며 손을 잡았다는 거군요.
시본은 우리가 동족이라고 말하지만, 우리는 놈들에 대해 잘 모른다. 놈들에 대한 정보가 아직 부족하지.
나는 내가 본 것조차 이해할 수 없다. 놈들의 신에 대한 답을 얻기 전엔, 뭘 하든 헛수고일 뿐이다.
대장, 그게 무슨 뜻이야?!
대장…… 대장과 시본이…… 끝까지 우리 편일 거라고 어떻게 보증할 수 있지? 어째서……
시본한테서 뭔가를 얻어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헌터들은 결국 모두 실종되었어요.
물론, 당신이 저보다 더 잘 알고 있겠지만요.
놈들의 속삭임…… 공명…… 놈들은 대장의 생각과는 무관하게 머릿속으로 파고들어 온다고!
……스카디.
이것도…… 다른 문제다. 자세한 건, 글래디아에게서 듣도록.
선장, 저들을 배에서 내려다오.
바라던 바다, 에기르인……
……유감이네요.
……
침묵과 정적이 흐른다. 오랜 이별 끝에, 헌터는 결국 이상적인 재회를 하지 못한 것 같다.
무언가가 스카디와 스펙터의 가슴속에서 꿈틀거린다. 일등 항해사는 망설이고 있다. 상처가 난 부위가 여전히 은은하게 아파온다.
일촉즉발의 형세다.
조용하다.
너무 조용하다.
잠깐만, 어떻게 이럴 수가? 파도 소리, 바람 소리, 시본에 의해 부서진 선체가 삐걱거리는 소리……
모두 멀어져 간다.
헌터들……!
배, 배가, 움직이고 있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 옛 이베리아인…… 배는 이미 몇 년째……
아냐! 틀림없어! 무언가가 이 배를 밀고 있어, 게…… 게다가 분명 우리가 그 시본을 사냥할 때도, 계속 움직이고 있던 거야……
그리고…… 조금 전부터……
주변이 이상할 정도로 조용해졌어.
쉬익……
동족들이, 모이고 있다. 상자를 짊어지고, 멀어져 간다.
쫓아라…… 쫓아간다. 폭풍의 끝을 찾아내겠다.
(순순히 고개를 젓는다)
파도가 물러가고 있다.
곧 고요해질 것이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군. 몇 년이나 계속되던 파도 소리가, 어째서……
모든 상황이, 그날과 똑같아……
(고통스럽게 몸을 낮춘다)
가르시아! 으윽…… 손이, 떨리는군…… 젠장. 사냥만 아니었어도, 이미 잘라냈을 것을.
에기르인,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글래디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자신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비늘, 그리고 체내의 그녀한테 속하지 않는 부분이 무언가와 공명하고 있다.
시본의 냄새…… 바다의 냄새가 모두 사라졌군요. 바깥이 너무 조용해요.
설마, 어떻게?
하아…… 무슨 일이지? 왜 이렇게 답답한……
……잠깐.
너희 무슨 소리 못 들었나? 이건 뭐지?
뭔가……
“바다는 전에 없던 평온함에 빠져들고, 해안에는 이상이 생겼다. 거센 썰물과 불규칙한 파도가 재난의 도래를 알리고 있다.”
“모든 소리가 잠잠해졌다. 파도가 해안을 치는 소리에서부터 도시의 시계탑 소리, 모든 소리가 사라지고 있다.”
사람들의 말소리마저 사라질 때까지.
바람 소리마저도 조용해질 때까지.
고요함은 조용히 다가왔다.
이럴 리가 없어. 재판소의 기록과 같아.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건…… 새로운 고요함인가?!
……
상어, 어디로 가는 거죠?
위에 가서 상황을 살펴보려고요.
나도 가겠다.
나도 갈게……
아니, 스카디.
너와 글래디아는 이곳에 남아있어라.
……
……스카디.
왜?
글래디아 곁에 있어라. 그리고 이걸 기억해라.
너는 영원히 우리의 헌터다.
가자, 로렌티나.
스펙터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구름이 어느새 걷혔고, 이미 시간의 개념을 잃은 그녀는 하늘이 별로 가득한 것을 발견했다.
그녀에겐 그 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스펙터가 갑판 위에서 서성거리자, 아주 잠깐이긴 하지만 울피아누스가 걱정스러운 시선을 보내왔다.
……당신과 대장의 후각은 예민하죠. 주위에 시본의 존재가 느껴지나요?
아니, 현재 이곳은 육지와 별반 다르지 않다.
분명히 바다 위를 표류하고 있는데 말이야. 적응이 안 되는군.
나는 반대편으로 가겠다. 정말로 해류가 움직이는지 확인해야겠어.
……다시 만나요.
……별이 빛나는 하늘.
얼마 만일까, 이렇게 맑은 밤하늘의 별을 보는 게 말이야.
난 이미 많은 것을 잊고 있었어. 고향을 멀리 떠나, 사람들에게 이용당하고, 결국엔 내가 가장 증오하던 녀석이 내 목숨을 구해주고, 내 기억을 일깨워 줬어.
자신이 괴물이라는 걸 받아들이는 것은 사실 생각보다 복잡하지 않았어. 어쩌면 그 점이 나의 유일무이한 체현이기도 하니까.
단 하나, 내가 잊을 수 없는 게 있다면, 그건 바로 고향이겠지.
하지만, 난 돌아왔다고 할 수 있을까? 바다 위를 에기르라고 할 수 있을까? 이곳은 여전히 내 고향일까?
글래디아 대장이 말하지 않았다고, 내가 모르는 것은 아니야. 헌터들 사이에서의 갈등도 처음 생긴 게 아니고. 하지만 우리와 에기르는? 해안에 버려진 지 너무 오래야.
……또 몇 가지 일들이 생각나네.
어릴 적, 나도 부모님 그리고 조부모님들과 함께 오늘과 같이 바다 위의 별로 가득했던 하늘을 봤었지. 가장 아름다운 진주 결정 동굴도 비할 수 없을 만큼 예쁜 밤하늘 말이야.
그러고 보니, 헌터가 되어서도, 나는 고향을 떠나기를 반복했을 뿐, 어디에도 가질 못했어.
……하하, 집이 조금 그리워지려 하네.
이번에는 날 어디로 데려갈 생각이지, 아마이아?
별이 빛나는 아름다운 하늘 아래, 그 생물은 조용히 스펙터를 내려다보고 있다.
소리, 소리는 계속 들리지 않았다. 배가 파도를 가르고, 바닷바람이 세차게 분다. 모든 소리는 그것의 낮은 속삭임에 묻혔다.
그것은 물속에 표류하듯 공중을 떠다녔다. 달빛과 별빛에 입을 맞추는 듯하였고, 바람에 나부끼는 촉수는 아름다워 보였다.
어디에도 가지 않는다, 로렌티나. 바다에는 끝이 없다 어디를 가도 마찬가지지.
그동안 계속해서 당신의 노래가 들려왔어, 아마이아
그것은 그 비늘 없는 동포, 리베리자, 이베리아인의 이름이다, 로렌티나.
내가 그 여자를 포식할 때, 그 여자는 시종 내 머리를 어루만지면서, 나한테 많은 말을 했다. 시간은 빙하의 먼지와도 같지. 나는 짧은 영원 속에서, 그 여자가 말하는 걸 들었다.
골격마저도 아주 작은 동포로 분해되면서, 그 여자는 입을 열 수 없게 될 때까지 나에게 충분한 영양분과 시간을 주었고, 모든 걸 가르쳐 줬다.
너희들, 언제부터 음식의 죽음을 추모하게 된 거야?
그녀의 요구에 따랐을 뿐이다. 이런 정서가 의미를 갖는 거라면, 시도해 봐도 좋다.
이샤-믈라는? 글래디아는? 그리고…… 울피아누스는?
너의 동포들은 바다로 돌아갈 준비를 끝마쳤나?
……내부적인 갈등이 좀 생겼어.
어째서? 고향이 바로 눈앞에 있다. 위매니가 바로 눈앞에 있다.
집이 그리운 것이구나, 로렌티나. 아마이아가 가르쳐 주었다. 만나본 모든 에기르인 중에 네가 에기르에 대한 마음이 제일 깊다고 말이야.
이리 와라.
나를 받아들여라. 내가 고향에 데려다주겠다.
나는, 살아있는 시본을 손으로 만져본 적이 없어. 죽은 모습을 더 선호하거든.
네가 무기물을 고정된 형태로 조각하는 걸 좋아하는 것처럼, 너의 그런 행동이 생존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고 해도?
너희는 '생존' 이외에 추구하는 게 없나 봐?
추구? 네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걸 추구하는 것처럼 말인가?
종족의 생존, 더 많은 생존, 위매니의 생존.
세상 만물은 본래 하나의 전체를 형성해야 하지. 생명은 이리 무질서해서는 안 된다.
시본이 갑판 위에 가볍게 내려앉았다.
스펙터는 웃고 있다.
자세가 우아한걸. 이것도 아마이아가 가르쳐 준 건가?
아마이아의 요구다. 자신을 가슴 깊이 새겨달라 부탁했다.
그러면 이제, 그 여자가 내게 진 빚은 네가 갚아 줘야겠네?
……아, 아마이아는 죽기 전에 너를 내게 맡겼다. 난 네 생명을 처리하겠다. 네 부탁도 들어주겠다.
아마이아는 네게 감사했다. 아마이아는 내가 널 도와야 한다고 말했다. 네 덕분에, 자신들의 사업이 한층 더 나아갈 수 있었다고 했다. 그들의 '과학', '이상'이 모두 빠른 발전을 이루었다.
난 너와 이샤-믈라에 관해 토론할 수도 있고, 너를 데리고 에기르로 돌아갈 수도 있다. 그리고 종족의 위치와 근황을 너한테 공유할 수도 있고, 너희 종족에서 어떤 이들이 우리한테 합류하려고 하는지도 알려줄 수 있다.
아마이아가 너를 꼭 도와주라고 나한테 부탁했다. 너를 도와줘야만, 네가 동포를 받아들이려고 할 테니까.
……훗.
그럼, 우선 먼저……
네 노래부터 멈춰 줘. 고향의 바람 소리를 듣고 싶거든.
알았다.
순식간에, 바람과 파도 소리가 스펙터의 귓가로 돌아왔다.
물보라가 갑판 위를 치는 소리가 전해지는 그 순간, 울피아누스의 거대한 칼날이 시본의 머리 위에 나타났다.
죽어라.
……?! 이걸 막아 내다니…… 으윽!
울피아누스!
충분히 강한 일격이었다. 바닷속의 동포가 의식을 잃은 저 사람을 데려갈 거다. 소굴로 데려간 후 우린 시간을 들여 저 사람을 받아들일 거다.
이 떠다니는 상자는, 바다에 적응하지 못한 동포들을 받아들이는 데 사용하고 있다. 대부분은 죽고, 나머지는 종족과 함께하는 걸 거절하고 있지만.
그렇다면, 이 상자도 이젠 필요 없다.
스펙터는 시본의 동작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냥 길을 막고 있던 상자를 옆으로 치운 것처럼, 거대한 함포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몇 초간의 적막이 흐른 뒤, 아주 먼 곳의 거대한 물보라가 비로소 그 사라진 강철 조형물이 어디로 갔는지를 말해 주었다.
(놈이 어떻게 저렇게 큰 대포를 쪼갠 거지?! 꼬리인가?!)
이런……
스펙터는 제대로 보지 못했다.
울피아누스가 너무 쉽게 격퇴당해 충격을 받았는지, 아니면, 금속 대포의 절단된 소리에 주의력이 분산되어서인지, 스펙터는 쉽게 공격을 당했고, 중심을 잃은 채 갑판으로 내리쳐졌다.
그녀는 전혀 볼 수 없었다.
자, 바닷속으로 돌아가자.
포식해도 좋고, 교류를 해도 좋고, 진화해도 좋다. 우린 바닷속으로 돌아가는 거다.
거기 서!
이 배를 해체하고 싶은 것이냐?! 괴물아!
가르시아!!
크오오오오!!!!!
일등 항해사는 시본을 향해 돌진하였다.
하지만 그 우아한 몸짓에 닿기도 전에, 일등 항해사의 움직임이 갑자기 멈추었다.
동포, 이건 동포야.
내가 왜 동족을 공격해야 하지?
큭……!
비슷하면서도 달라. 넌 많은 동포를 포식했어. 더 많은 동포들이 굶주리고 있다. 넌 그들을 양육해야 한다.
영양분이 되어, 종족의 먹이가 되어라.
가르시아!!
내 일등 항해사한테 무슨 짓을 한 것이냐?!
……크윽!
콜록…… 빌어먹을!
……!
걱정하지 마라, 난 괜찮다, 콜록.
……
알폰소……
……뭐라고……?
아냐, 잠깐만, 뭐라고? 가르시아, 너……
알폰소.
오늘은…… 마지막으로…… 항해하는 날이야.
요 몇 년 동안…… 나는…… 자신을, 괴물이라 생각했어. 그게, 더 편했지.
알아. 내가 죽으면…… 당신은 혼자 남아…… 당신도 죽게 되겠지. 그런 비참한 죽음은…… 당신에게, 어울리지 않아.
오늘이, 마지막으로, 항해하는 날이야.
나…… 난, 이미 놈에게서, 친밀감이 느껴져.
그만둬! 그만둬라!
가르시아! 넌 아직 말할 수 있다! 그럼 넌 아직 의식이 있는 거다!
아니.
시간이, 됐어. 스툴티페라 나비스는, 곧 침몰할 거야. 형광빛 바다, 이미 배를 부식시키기 시작했어.
나는……
……난 이베리아인으로서 전사할 거야. 놈과 같은 종족이란 건 인정 못 해.
……
시본이 몸을 구부렸다.
그것은 이 이베리아의 가장 위대한 일등 항해사와 무척이나 닮아 있었다.
가르시아는 머리 위에서 반짝이는 왕관을 바로 썼다.
(이베리아어) 나의 사랑이…… 당신의 사명을…… 떠올리게 할 거야.
……
크오오오오!
넌 내게 저항하고 있는 게 아니다, 가르시아.
으아악!
넌 네 마음속의 위매니와 저항하는 것이다. 넌 지금 배 위에 있으면서도, 바다를 갈망하고 있지.
아…… 아아악!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다른 동포들을 위한, 영양분이 되어라. 아니라면, 동화를, 받아들여라.
일등 항해사의 몸에 구멍이 뚫리며, 피가 샘솟듯 치솟는다.
시본은 미끼를 던지듯, 가르시아를 바다에 던졌다.
그것은 침범할 수 없는 성상과도 같이, 여전히 고귀하게 서 있었다.
뭐야…… 어떻게, 무슨 일이 발생한 거지?
어떻게 저렇게 쉽게……
……인간, 동포, 두 존재 사이의 살아 있는 생명체.
아마이아가 너희를 바로잡으라고 했다. 그래서 이렇게 한 것이다. 난 동포를 영접하고, 이샤-믈라를 영접한 것뿐이다.
동포의 생명을 보호한 거다. 그런 뒤에, 위매니로 돌아가는 것이다. '집'으로 말이지.
상어.
……
글래디아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이 작은 소리를 이미 뒤로 멀리했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등 뒤의 스카디와 전장으로 돌아온 스펙터는 역시 바로 반응해, 시본을 향해 무기를 휘둘렀다.
가장 빠른 글래디아가 속도를 늦췄더라면, 세 사람의 호흡은 더욱더 완벽했을 것이다…… 하지만 글래디아에게는 이미 그럴 여유가 없었다.
……
시본은 피했다. 아니, 앞으로 걸어갔을 뿐이다. 그것만으로도 공격을 피하기에는 충분했다.
그것은 그저 스카디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 중에, 너를 만나고 싶어 하는 동포가 많아. 이샤-믈라, 이샤-믈라.
……!
종족이 너를 기다려. 우리가 너를 기다려. 네가 답을 내놓길 바라.
……이 쓰레기가. 잘도 사람을 깔보는구나.
글래디아는 자신의 긴 창을 휘둘러 댔지만, 시본은 피하지 않았다. 몸에 구멍이 뚫렸고, 창이 깊숙이 꽂혔다.
……
효과가 없군…… 네 몸에 무슨 변화가 생긴 거지?
이제 곧, 더 많은 동포가, 그러길 원하는 동포가 내 수준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나날이 발전하고 있다. 글래디아, 우리는 곧 하나다. 넌 그중 가장 강한 하나이지.
……대장은?
바다로 던져졌어요. 상당히 아파 보였죠.
……
놈들의 신조차도 울피아누스를 소화하지 못했으니, 죽지는 않았을 겁니다.
몸에 변화가 생긴 것 같군요. 살비엔토의 그 두 쓰레기와는 완전히 달라요.
전 소드피쉬가 적을 무시하지 않고, 신중히 대한다는 얘기는 거의 들어본 적이 없어요. 스카디 씨, 제 기억이 아직 전부 회복된 게 아닌 건가요?
아니, 확실히 극히 드물긴 하지. 마찬가지로, 이런 시본은 과거에도 매우 드물었어. 어떤 사냥감이 헌터 세 명의 협공에도 멀쩡할 수 있겠어?
전 아직 제대로 공격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이렇게 가다간, 이 배도 더 이상 버티질 못할 거야. 저놈의 힘이 예전보다 더 강해졌어.
……방금 그 전투만으로, 이미 아래층에 불이 났다.
내 배와 가르시아를 이렇게 대하다니…… 네놈은 후회하게 될 거다, 괴물.
……
동포들, 더 많은 동포가 나를 부르고 있다. 내게 바다의 번영과 안녕을 지켜달라고 부탁하고 있다.
나를 막으면, 난 너희를 포식할 수밖에 없다. 너희한테 부탁한다. 종족한테 돌아와라.
저기, 아마이아.
……나를 그렇게 부르고 싶다면.
당연하지. 또 한 가지 일이 생각났어. 정말이지, 경전에 적어뒀어야 했는데……
뭐지?
그 여자는 내게 목숨을 빚졌거든. 네가 대신 갚아 주지 않겠어?
빚? 네가 종족으로 돌아오겠다면, 그렇게 하겠다.
그건 안 되지.
……
시본은 대답하지 않았다.
시본은 조용히 몸을 구부리고, 날카로운 발톱을 드러냈다.
순식간에 선체가 입은 엄청난 타격은 임계점에 다다랐고, 온 시야가 흔들렸다.
……분, 맞아, 너희의 시간관념에 대해, 아마이아가 말한 적이 있다.
10분.
이 네모난 상자는 동포들에게 둘러싸일 것이다. 그리고 '침몰'하게 되겠지.
사냥과 포식, 생존과 진화.
그것은 처음부터 주저한 적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