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ST-11메인 마스트
스펙터와 옛이야기를 나누던 중 울피아누스의 움직임을 감지한 아마이아, 헌터와 선장이 시본을 죽이기 전에 무언가를 해야 한다.
저희가 처음에 어떻게 만났는지 기억나나요? 로렌티나?
하얀 눈과도 같은 백사장 위에 상처투성이가 된 몸으로, 마치 잠자는 숲속의 미녀처럼 암초 위에 누워있었죠.
그렇게 멀리까지 해류에 휩쓸렸는데, 마지막에 깨워준 건 겨우 냄새나는 육지 사람이었다니, 차라리 계속 잠들어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럴 리가요? 제 기억으로는 처음 만났을 때, 서로에 대한 인상이 괜찮았던 거 같은데요?
그건 부정하지 않아. 아니면 퀸투스처럼, 머리부터 발끝까지 이미 여러 부분으로 나누어졌겠지.
아쉽군, 살비엔토에 있을 때는 왜 오늘 같은 상태가 아니었을까? 그랬다면, 그 사람과 옛이야기를 더 많이 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지.
……
아마이아는 여전히 우아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닿는 곳마다 명흔이 생겨나고 있었다.
하지만, 로렌티나는 아마이아를 전혀 안중에 두지 않았다.
그녀는 무엇을 보고 있지?
……잘 회복하신 것 같군요.
다 네 덕분이지. 다른 한 명은? 잘 지내?
글쎄요, 어쩌면, 퀸투스처럼 헌터의 손에 죽었을지도 모르죠.
……어느 헌터 말이야?
그냥 해본 소리예요.
오리지늄 아츠겠네. 확실히, 육지에서 헌터들한테 위협될 만한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건 아마도 '아츠'라는 것이겠지.
그런데, 넌 아츠로 싸우는 것에는 능한 것 같지 않아. 너무 불쌍하지 않아?
로렌티나, 왜 당신의 의식이 맑아졌다, 흐려졌다 하는지? 몸 안에 그 정도 농도의 정제 액화 오리지늄을 주입했는데도, 어떻게 여전히 버틸 수 있는지 생각해 본 적 없나요?
내가 건강한 편이라 그렇겠지?
저와 댄스 수업에 대해서도 얘기를 나눈 적이 있었죠.
……하아, 열받네. 내가 떠올리기도 전에, 네가 가르쳐 줄 줄이야.
좋아, 댄스 수업. 그리고? 내가 또 뭐라 했지, 아마이아?
말 돌리지 마세요, 로렌티나.
아니면, 자신이 어떻게 '정신이 들었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다는 얘기인가요?
……
당신한테 많은 실험을 했었어요, 잠자는 숲속의 미녀.
그동안 섬 주민들의 지식을 통해서만 바다를 알 수 있었던 저희의 앞에 그렇게나 완벽한 생물이 놓여 있었던 거죠.
저희의 수단은 원시적이고 오래된 것들이에요. 교회라는 허울을 걸쳤어도, 저희가 육지 생물로서의 허점을 감출 수는 없었죠……
……바다를 품었던 사례는 극히 드문 데다, 새로운 생명 형태 또한 불안정했죠.
당신이 깨어나서 한바탕 소동을 일으킨 후, 저와 처음 나눴던 대화가 기억나나요?
“에기르는 어떻게 해냈나요?”라고 제가 물었었죠.
아마이아가 스펙터의 공격을 피했다.
그녀는 자신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황금빛 홀이 반사한 빛에 그녀의 피부는 조금 창백하게 보였다.
대량의 액화 오리지늄이 당신의…… 이곳에.
보통 사람의 척수액을 그 정도 농도의 액화 오리지늄으로 교체하면, 적어도 '정신을 잃는' 정도로 끝날 리가 없죠.
흐음……
……너희들한테 감사해야 하겠는걸, 어찌 됐든, 너희 때문에 다른 삶을 경험하게 되었으니까.
그거 알아? 너희들이 숭배하는 저 바다의 쓰레기들 때문에, 얼마나 많은 에기르인들의 운명이 바뀌었는지 말이야.
……당신은 뭐가 되려 했었나요? 오페라 배우? 극작가?
아니, 그럴 리가. 당연히 아니지.
난 조각가가 되고 싶었어. 선생님도 나에게 소질이 있다고 말해줬었거든.
아주 어렸을 적, 내가 사는 도시에는 눈처럼 새하얗고, 커다란 조각상 하나가 있었지.
시본의 침입으로 무너졌나요?
아니, 그건 너무 식상하지.
무너지는 모습까지는 못 봤어. 바로 다른 동네로 이사 갔거든.
하지만, 그 조각상은 줄곧 내 머릿속에서 맴돌았고, 난 그것의 모습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어. 그리고…… 너희들 덕분에, 그 그림자 속의 흑백 조각상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지 이해할 수 있었어.
'기도' 말이야.
만약 에기르에서만 계속 공부했다면, 이 단어에 담긴 더 깊은 의미는 영원히 몰랐을 거야.
……
시간 끌 필요 없어. 네 아츠가 감지 능력과 관련돼 있다는 걸 처음 보는 것도 아니니까.
하하, 그러고 보니, 로도스 아일랜드에서 이상한 사람을 많이도 만났네. 실례한 적도 있었던 것 같고…… 됐어, 그분들이라면 날 용서하겠지.
함선을 말하는 건가요?
이곳보다 훨씬 더 좋은 함선이야.
그럼, 이제 네가 애지중지하는 시테러도 모두 죽었고, 명흔도 이 말도 안 되는 홀을 부식시키는 것 외엔 아무 소용이 없는 듯한데, 다음에는 어떻게 할 생각이지?
……
유서 쓰는 거라도 도와줄까? 진짜 에기르 문자는 굉장히 아름답거든.
……후훗.
그럼, 로렌티나.
아마이아가 스펙터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가녀린 손바닥은 명흔에 싸여, 마치 형광색 드레스 장갑 같았다.
스펙터는 거절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여전히 무기를 쥔 채, 한 손으로 아마이아를 잡고 황금빛 홀 안을 사뿐사뿐 거닐었다.
사실 어렸을 때는 춤을 그리 잘 추는 편이 아니었어. 그 뒤로 대장님이 몇 번 가르쳐준 적이 있었지. 대장님의 스텝이 너보다는 능숙한걸.
당신은 자신의 광석병을 무엇이 억제하고 있는지 알고 있을 거예요. 바다를 가까이할수록 그 병마에서 깨어나기 더욱 쉬운 이유도 알고 있을 테지요.
다른 헌터, 특히 글래디아는 진즉에 알아챘을 거예요. 다만 이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겠죠. 단순하지만 잔인한 사실 말이에요.
내가 고향에 돌아와서, 여기 풍경을 보고 추억이 되살아난 게 아닐까?
하하…… 로렌티나, 스스로를 비웃을 줄도 아시네요?
고향에 돌아왔다…… 맞아요. 바다로 돌아왔으니, 고향에 돌아온 거죠.
이 모든 건, 당신의 몸에 그들의 피가 흐르고 있기 때문이지요.
……
당신 몸 안의 시본이 차지하고 있는 부분이 오리지늄을 억제하고, 그 시본인 부분이 있기 때문에 바다로 돌아오게 되면 의식을 찾을 수 있게 되는 거겠죠.
그렇다면, 의식이 돌아온 당신은, 지금의 당신은 과연 시본인가요, 아니면 어비설 헌터스인가요?
……스텝에 집중해.
고마워요.
내가 흔들릴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지? 살비엔토에 있을 때처럼, 스카디도 말 잘하는 어떤 쓰레기한테 한바탕 설교를 당했었지.
흔들리지 않는다고요? 자신의 힘, 이성 그리고 영혼까지 모두 적에게서 온 것임을 알고 있을 텐데요, 이러한 진실 앞에서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아직 이야기 안 끝났어. 내가 왜 조각상을 좋아하는지 알아?
왜죠?
그건, 조각하고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스펙터가 스텝을 멈추었다.
아마이아는 순간 흠칫 놀랐다. 스펙터는 아마이아의 손을 놓고 무기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순간, 그녀의 표정은 어린아이와도 같이 밝았다.
……우린 죽은 물건의 형체 속에서 의미를 만들어, 그것을 무의미한 허무 속으로부터 해방시켜주지.
마치 내 사랑스러운 운명처럼 말이야.
이 쓰레기들은 베어도 끝이 없네, 쳇.
어떡해, 이러다가는 따라잡지 못하겠어! 녀석이 어디로 갔지?
몸을 다쳤으니 바다로 돌아갔을 거야. 우리라고 항상 물이 없는 곳에서 놈들을 사냥하는 건 아니야.
하지만…… 으윽!
시테러들이 선체를 뚫었어?! '스툴티페라 나비스'의 선체는 고속 전함의 함포로도 뚫지 못할 텐데!
수십 년의 시간이 있었으니, 부서져도 이상할 건 없지.
……하지만, 저들은 이 배를 가두어 뒀을 뿐, 침몰시키진 않았어…… 왜 그랬을까?
그 문제는 나중에 생각해 보자. 예전에 그들이 어떤 기적을 만들어냈든 간에, 지금 우리가 방법을 대지 않으면, 이 배는 정말 침몰하게 생겼다고!
방법이…… 있긴 하지.
적들을 얼른 처리한다면, 이 시테러들도 소굴로 돌아갈 거야.
정말 그렇게 간단할까?!
해봐야 알겠지.
놈이 위로 올라가고 있어, 속도가 아주 빨라…… 곧 바다로 돌아갈 것 같아!
하지만…… 시테러, 으윽, 저것들이 곧 이 복도 전체를 막을 것 같아!
……너 아직 뛸 수 있겠어?
왜?
지붕은 이미 명흔에 의해 부식되었어. 아주 취약하지.
가까운 길로 가자.
……크으……
왔군, 사냥감.
……넌 혈육을 포식하고, 동족을 포식했다.
넌, 많이 포식했다.
그러지 않으면, 굶주릴 수밖에 없었겠지?
포식은, 잘못되지 않았다. 음식은, 많이 있다.
너, 나를 포식하려는 건가? 너, 나를 원하는 건가?
멀리 떨어진 정보, 전달할 수 없다. 혈족, 언어를 모른다. 공기를 진동시키고, 소리를 내서, 규칙을 찾아, 언어를 배운다.
그게 바로 내가 에기르인을 싫어하는 이유다. 괴물이 배운 말들조차 에기르의 말이지.
네가 말을 할 줄 안다고 해도, 난 너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을 것이다. 쓰레기 놈아.
……그럼, 넌 나를 포식하고, 난 너를 포식한다.
식사 시간, 너무 길어졌다. 끝내야 한다.
……속도가 빨라졌군, 꼬맹이. 그 긴 세월 동안, 네가 자라는 모습을 지켜봐 왔다.
자신이 포식자라 착각하는 건가?! 넌 내가 기른 가축에 불과하다!
알폰소의 칼날이 시본의 몸통을 베었고, 시본이 이빨로 알폰소의 팔에 상처를 냈다.
피가 공중으로 튀며, 공기가 가속된다. 시본의 동작이 빨라지고 있다.
흥, 내 마지막 예복을 망가뜨리다니. 네놈의 가죽을 벗겨내 주마.
크오오오오!
……여기다!
이샤……
끄르륵…… 이샤-믈라, 너흴, 포식한다.
……닥쳐.
사냥감을 죽이는데, 쓸데없는 말은 필요 없어. 이건 우리의 임무야.
……
……저 녀석을 막아! 바다에 뛰어들려고 해!
어딜 가는 거냐!?
시본의 속도가 더 빨라졌다. 원래 있던 자리에 잔상이 보일 정도로 빨랐다.
시본이 뛰어오르는 순간, 갑판의 반대편에서 나타났다. 시본은 거의 착지하지 않고, 바다로 곧장 날아갔다.
하지만, 시본보다 속도가 더 빠른 것이 있었다.
검은 그림자는 그것이 바다로 돌아가려는 길을 막아냈고, 그대로 갑판 위로 내리쳤다. 빛이 부족한 그 환경에서 무언가가 갑판에 도장을 찍자, 배 전체가 크게 흔들렸다.
……하아…… 하악……
휴우, 본질적으로 너도 퀸투스와 같은 부류 맞지? 그렇지 않고서야, 이 정도의 상처만 입을 리 없어. 몸이 반쯤은 날아갔어야 했겠지.
그럼 이제……
……잠깐, 뭐지? 이 냄새는……
눈치채셨네요. 물론, 그가 더 이상 자신을 숨기지 않는다는 건, 그가 증명하고자 하는 걸 이미 증명했고, 그가 말하고자 하는 걸 이미 다 말했다는 뜻이죠.
하아……그라면 이해해 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만……
……뭘 이해한다는 거지?
만약 이 냄새가 정말로 그자의 주인 냄새이지, 이미 시본으로 변한 다른 무언가의 냄새가 아니라면, 그자한테 당신을 이해하게 하는 걸 포기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내 기억으로는, 너희들의 천박한 식견과 도덕관으로 판단했을 때 '신뢰할 수 있는' 에기르인들은 모두 가장 개성이 넘치는 사람들이었지.
……
(울피아누스가 공격했어, 그럼, 이제 저 여자와 계속 엮이면 안 되겠군, 시간을 더 끌어도 의미가 없을 테니까.)
(사자를 찾아야겠어…… 그를…… 맞이해야 해.)
어머? 도망갈 생각이야? 우리 사이의 얘기는 아직 끝나지 않은 것 같은데?
다음에 또 봐요, 로렌티나.
다시 만날 수 있다면, 그때 다시 에기르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죠.
……
스카디는 눈을 깜빡이지 않았다.
스카디는 이런 동작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다. 심플하고, 직접적이고, 폭이 크다.
스카디는 로도스 아일랜드의 동료들이 내린 자신에 대한 평가가 생각났다. 당시 앞에 있는 이 두 사람을 처음 만났을 때, 자신이 내린 그들에 대한 평가도 생각났다.
하지만……
우린 모두 에기르가 인정한 사람들이지. 내 밑에서 너희들은 모두 폭력을 행사하는 천재여야 한다. 사냥의 유전자는 너희의 기량과 아주 잘 어울리지.
하지만 지금, 너는 퇴보했다. 스카디.
당신……
당신은……
놈은 아직 죽지 않았어요, 울피아누스. 스카디에게 설교하는 건 나중으로 미루시죠.
알고 있다.
다시 한번 더 배워라, 스카디. 예전처럼, 나는 단 한 번만 가르치겠다.
(귀청을 째는 듯한) 크르르르……
울피아누스가 무기를 휘둘렀다.
평범한 공격이었지만, 엄청난 속도였다. 시본이 피하려 했지만, 차마 피하지도 못할 정도로 빠른 속도 말이다.
뒤이어 들려오는 요란스러운 굉음은, 위력이 그만큼 강했다는 걸 말해준다.
시본이 한 번도 사용되지 않았던 포탑 위에 처참하게 부딪혔을 때, 그 몸통의 상당 부분이 사라졌다.
이렇게 말이다. 동작을 잘 봐라, 판단하고, 무기를 휘둘러 바로 급소를 찔러라.
놈들에겐 이렇게 해야 한다. 넌 예전보다 느려졌고, 예전보다 신중해졌다. 육지 생활이 너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나 보군.
……
저…… 저는 정말 몰랐어요…… 어떻게 살아남았죠?
죽은 줄 알았던…… 당신도 그렇고, 소드피쉬도 그렇고, 당신들은 어떻게 살아남은 거죠?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도 만날 수 있나요? 제1대는요? 제4대는요? 그들은……
내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내 기준으로 봤을 땐 비극이다. 다른 이들이 살아남았을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시본이 내게 말해줬지. 놈들의 소굴이니, 잘못 봤을 리는 없을 테다.
물론, 글래디아의 일관적인 태도로 봤을 때, 이것 또한 일종의 굴욕이기도 하지.
일단 저걸 처리하죠. 당신에 대한 일은 헌터들이 다 도착하면, 다시 결정하도록 하겠어요.
……
너흰, 이 메마른 부유물에서…… 이 배에서, 포식했다. 너흰 종족을 이탈했다.
죽음, 종족에게 무익하다. 너희의 죽음도, 종족에게 무익하다.
너흰……
크윽……!
쯧, 헌터들은 사냥감이 죽기 전에 교류를 하지 않는다. 이건 우리가 야전 훈련할 때 받은 첫 수업에 들은 내용이지.
왜 내가 자꾸 너희들이 벌려 놓은 난장판의 뒷수습을 해야 하지, 에기르인?
너희들이 원하는 게 뭐냐? 내 배에 또 무슨 짓을 한 거냐? 이베리아를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 빅토리아를 망치기까지 하고, 우르수스마저 괴물들로 가득하게 만들었지……
크오오오오!!!!!
쳇! 정말 끈질긴 놈이군!
크오오오오!
놈을 꿰뚫었어! 지금이야! 알폰소!
이거나 먹어라!
하아……
끄, 끝난 거야?
으악…… 내 손…… 감각이 없어……
……발밑을 조심하세요!
뭐야?
아직 죽지 않았어요!
……!
……(피에 목구멍이 막힌 소리) 꾸르륵 꾸르륵……
꾸르륵……
저 녀석이 갑판을 뚫었다. 제 발로 도마 위에 오를 셈인가? 맛도 없는 녀석이?
……아니, 아니다.
저걸 쫓아! 놈은 어쩔 수 없이 선창에 돌아온 게 아니야, 배 안에 아직 놈의 동족이 있어!
그 여자를 찾고 있는 거다!
……꾸르륵…… 꾸르륵……
(뭔가를 씹는 소리) …… 꾸르륵…… 켁켁……
……사자.
……비늘 없는, 동포구나.
상처, 아물지 않는다. 종족의 양분, 될 수 없다.
공격, 놈들이 한다. 공격은, 포식 때문이 아니다.
……
아마이아가 조용히 듣고만 있다.
스펙터가 그 가녀린 몸에 낸 상처에서는 여전히 피가 멈추지 않았다. 그 피는 시본이 흘린 피바다에 떨어져 그 속에 녹아들었다.
아마이아는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너도, 다쳤다.
나를, 포식해라.
동포, 살아남아라.
종족, 존속, 생존.
시본이 머리를 숙이고, 아마이아의 발치에서 무릎을 꿇었다.
시본은 눈을 감고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마이아는 여전히 조용히 듣고 있다.
헌신, 희생.
이러한 보답을 바라지 않는 이타적인 품성은, 사람들의 추앙을 받고, 미덕이라 불린다.
에기르, 전 직접 그 나라를 본 적은 없어요. 이베리아, 빅토리아, 우르수스, 심지어 이 세 개의 나라를 합친 것보다도 더 큰 그 나라를 말이죠.
에기르는 모두 합리주의자라고 들었어요. 그렇다면, 동포들의 합리성에 비하면, 얼마나 합리적일까요?
잘 들으세요, 사자.
희생은 숭고한 게 아닙니다. 헌신은 미덕이 아니죠.
……미덕……? 숭고……?
당신은 희생이란 무엇이고, 헌신이란 무엇인지 이해할 필요가 없어요. 평범한 사람들만, 시본이 사람과 비슷하게 변하는 게 일종의 진화라 생각할 테니깐요.
아뇨.
그건 더 많은 가능성을 위해 보여지는 포용일 뿐이에요.
우리가 동포를 위해 묵묵히 헌신하는 사람들을 칭찬하고 있다는 건, 더 많은 사람이 다른 선택을 했다는 걸 의미해요.
어린 글룸핀서도 동료가 적의 먹이가 되지 않도록 보호하는 판에, 우린 왜 이런 미덕을 반복해서 칭송해야 하죠?
사람들은 희소한 일만을 칭송하고, 도덕으로 이타성을 포장하며, 자신의 공리심을 변명하려 하고, 자신이 비스트보다 고귀한 줄 알죠.
얼마나 웃긴 자기변호인가요? 분명 국가와 종족 간의 벽이 이 땅을 찢어놓고 있는데 말이죠.
“생명은 결코 무질서한 것이 아니다.” 나의 사자여, 이게 바로 내가 육지를 떠나, 바다에서 구하려고 했던 마지막 답이에요.
……
시본이 눈을 감았다. 그는 아마이아가 한 말을 생각하고 있다. 동포가 한 말을 생각하고 있다.
시본은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동포는 이해가 필요 없다고 한다. 시본은 그 말에 따르기로 했다.
다음 순간, 시본은 비늘이 없는 손을 자신의 몸 위에 얹는 동포의 손길이 느껴졌다.
동포가 말한다.
“부탁드립니다.”
“절 잊지 마세요.”
“절 해방시켜 주세요”
“절 삼켜주세요.”
아마이아!
……
아니…… 여기에 아직 냄새가 남아 있는 걸 보니, 멀리 가지 못했을 거야.
그 녀석이 명흔에 부식된 벽을 뚫고 바다로 돌아갔어요.
그뿐만이 아닐 거다. 이곳에서 분명 무슨 일이 발생한 것 같다. 그 녀석의 핏자국이 사라졌군.
……너흰 여기에 있어라. 나 혼자 쫓아가 보지.
헌터가 어떻게 바다로 돌아가는 걸 무서워하겠어요? 그건 수치스러운 일이죠.
그럼 그 굴욕을 즐기도록 해라, 글래디아. 우린 신중하게 움직여야 한다. 나 혼자서도 충분해.
저도 가겠어요.
날 감시하려는 건가?
규율을 따르기 위해서예요.
마음대로 해. 하지만 너도 분명 느꼈을 거다.
더 많은 시본이 접근하고 있어. 여기는 해안과 가깝긴 하지만, 이미 바다 한가운데야.
……
……쉬익……
……곧, 도착한다…… 위대한 땅에.
곧.
폭풍이 하늘을 가른다. 곧, 거센 파도가 몰려올 것이다.
……
지켜보겠다. 여기서 기다리겠다.
거센 파도가 몰려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