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7옭매듭의 양 끝
크라운슬레이어는 동력층을 통해 카토르가 구에 잠입하고, 소냐에게서 통신 장비를 얻는다. 또한, 한 정체불명의 인사가 크라운슬레이어에게 암호를 보내오고, 암호를 해석하던 굼은 상대가 자신의 아버지임을 알게 된다. 한편, 소냐는 최후의 반격을 결심한다.
너, 따라오고 싶으면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해.
알겠어?
알겠어! 헤헤……
왜 웃어?
류드밀라 언니는 진짜 든든해.
그런 판단은 쉽게 내리지 마.
둘이 언제 그렇게 친해졌어? 크라운슬레이어가 우르수스 사무소 사람들이랑 잘 지낼 생각이 없는 것 같아서 걱정했는데, 괜한 걱정이었네.
……얘는 달라. 로도스 아일랜드 식당에서 진작 만났던 사이거든.
어? 그래서야? 식당에서……
아! 우르수스 음식이랑 시라쿠사 음식 둘 다 잘하던 그 빨간 머리 언니였구나!
……
이제 잡담은 그만. 내 오리지늄 아츠로 몸을 숨길 수 있으니까, 여기서 나가서 바로 지마를 찾으러 갈게. 로사가 보고서에 남긴 좌표가 정확하다면 반드시 찾을 수 있어.
흠, 로사가 보고서에서 언급했지만 봉쇄 구역 안 상황이 복잡해서 지마가 거점을 옮겼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어. 일단 가서 봐, 안 되겠으면 바로 돌아오고.
알았어.
왜 우리는 같이 못가?
카토르가 구가 봉쇄된 이후, 파블로비치 쪽에서 동력층 통로까지 관리하기 시작했어. 녀석들 눈에 안 띄고 같이 들어가는 건 무리야. 너희는 여기서 기다려.
여기는 카토르가 구 밖이고, 여기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다 나를 알아. 혹시 순찰 나온 사람을 보거든 내 이름을 대. 류드밀라 일리니치나.
알겠어. 그래도 최대한 아무한테도 안 들키는 게 좋겠지. 잘 숨어 있다가 네가 오면 나올게.
지마 언니 만나면 다친 데는 없는지, 살은 안 빠졌는지 꼭 살펴봐 줘……
알겠어, 최대한 그렇게 할게.
……
순찰하는 사람이 없네? 보고서 내용이랑 다른데.
앞에 있는 게 소냐 캠프인가.
……내가 마트베이를 찾아가는 게 싫으면 안 갈게. 그리고 혼자 있고 싶다면, 방해하지 않을게.
그냥 이야기할 사람이 필요하거나 뭔가 상의할 게 생기면, 내 이름 크게 불러. 알겠지?
나 여기 있으니까, 혼자 다 짊어지지 마.
……
……뭐야……
로잘린……
소리치지 마, 나야.
어?
도움이 필요하면 찾아오라며?
그래서 왔어.
응, 이 통신 장비라면 문제없겠네.
……그러니까, 이미 나가려고 준비하고 있었구나. 성벽 안의 놈들은 벌써 처리했고.
그래서 오는 길에 순찰하는 녀석을 볼 수 없었던 건가.
성벽 안에 있던 놈들은 없어졌지만, 성벽 위에는 아직 있어. 앞으로도 치열하게 싸워야 할 거야.
다들 준비는 됐어?
그렇다고 생각해야지. 하나씩 찾아다니면서 의견을 들을 시간도, 여유도 없어. 그래도 다들 훈련을 포기하지 않았으니, 그 자체로 이미 의사를 표시한 거겠지.
너나 여기 있는 사람들을 의심하는 게 아니야. 내가 밖에서 들은 소식을 토대로 보면, 너희가 봉쇄 구역 안에서 이렇게 뭉쳐서 살아남은 것부터가 이미 기적에 가까워.
밖에서는 뭐라고 하고 있는데?
이곳은 파블로비치 폐하의 독립 왕국이라고 하더라고. 게다가 그 녀석은 이 안에 있는 모든 생명의 목숨줄을 쥐고 있다고 하더군.
귀족 양반들도 진작 신경 끊었어. 어차피 이 구역은 이제 곧 썩은 살점처럼 도려낼 곳이니까. 권력자들도 똑같고.
쳇.
우르수스는 항상 이렇지…… 언제나 이런 식이었어. 근데 버려지는 쪽은 항상 살려고 발버둥 치잖아.
예전에 아미야가 너랑 너무 많이 접촉하지 말라고 해서 몰랐는데, 넌 생각보다 감성적인 녀석이구나.
……감성의 문제가 아니야……
표현 방식을 바꾸지. 오는 길에 모닥불 주변에서 누군가 우는 소릴 들었어. 근데, 달래주는 사람은 웃고 있더군. 팔에는 붕대가 감겨 있었고, 몸은 진흙 바닥에 쌓인 눈처럼 더러웠어.
다른 사람은 대화를 나누고 있고, 어떤 사람은 따뜻한 물이 담긴 컵을 쥐고 있었어. 또 다른 사람은 불에 뭔가를 구워 먹고 있었지.
이런 곳에서, 그렇게 많은 일을 겪었는데도 특별히 괴로워 보이지 않았어. 오히려 내일을 기대하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어.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지만, 가슴속에는 희망이 가득했어. 예전에도 그런 광경과 그런 표정을 본 적이 있어. 그건……
……
자세히 봐줘서 고마워.
근데 물자가 부족한 건 맞아. 언제나 오늘이 마지막 날일 수 있지. 네 앞에 놓인 그 차도 마지막 잔일 수 있으니, 안 마실 거면 나 줘.
크라운슬레이어는 말없이 마시라고 손짓했다.
지친 기색이 역력한 청년은 인사치레 없이 스테인리스 컵을 들고 이미 여러 번 우려내 색이 맑아질 대로 맑아진 차를 단숨에 들이켰다.
……전할 상황은 다 전했어. 가기 전에 더 알고 싶은 거 있어?
가기 전에 내가 더 도와줄 수 있는 게 있을까?
음…… 좀 멍청한 질문일 수도 있는데.
네 오리지늄 아츠를 이용해서 이 애들을 네가 왔던 곳으로 다 내보내 줄 수는 없을까……
동력층 통로는 엄청 좁아. 밤새 왔다 갔다 하면 몇십 명은 데려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너희는 몇백 명이잖아…… 더 큰 문제는 통로로 가는 길이 하나뿐이라는 거야.
이 정도 규모면 놈들이 눈치챌 수밖에 없어. 엄폐물이 없는 곳에 노출된 학생들에게 가해지는 공격은 내 오리지늄 아츠로도……
……그냥 내가 헛소리 했다고 생각해. 하아, 그렇게 간단할 리가 없지.
그거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게 있을까?
같이 도망치지 않겠냐고 물어볼 줄 알았는데.
안 물어봐. 어차피 안 갈 거잖아.
하긴.
……
……
사실 한 가지 부탁이 있어. 아까 동력층을 통해 들어왔다고 했지? 그럼 아래쪽을 잘 알겠네……
……
참 운도 없어, 그렇지?
어쩌다 같이 갇혀 들어온 모양이네. 딱 봐도 여기 사람들하고 얽힐 만한 부류는 아닌 것 같은데.
아…… 맞아. 어처구니없는 사고였어.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친구들을 추모하고 있었어.
미안. 정말 슬퍼 보이는데, 방해가 된 건 아니었으면 좋겠어.
아, 상관없어. 이런저런 일들에 방해받는 거야 워낙 익숙하니까.
사양하지 말고 앉아서 불이라도 좀 쬐어. 배고프면 여기 구운 감자라도 좀 먹고…… 이름이 뭐야?
류드밀라…… 친구들을 나를 크라운슬레이어라고 불러.
……
……멋진 코드네임이네.
거물을 암살해 본 적 있어?
아쉽지만 직접 죽여본 적은 없어. 하지만, '폭군'이라든가 리더라든가 하는 사람들은 꽤 많이 봤지.
첫 번째 사람은 우르수스에서 만난 여자였어.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 손꼽을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었지. 리더 자질도 충분했고, 아주 강했어.
하지만 그 여자의 이상은 너무 멀었고, 수단은 너무 이상적이었어. 그래서 결국 실패했지. 어쩌면 그 여자를 폭군이라 부르는 건 공정하지 않을지도 몰라. 그냥 실패한 사람이었을 뿐이니까.
두 번째 사람은 시라쿠사에서 만난 여자야. 처음 만났을 땐 리더라고 말하기조차 애매한 수준이었지. 참 좋은 사람이었는데, 운도 정말 없는 사람이었어.
그렇게 수많은 우연이 그 사람을 리더로 만들었는데, 책임의 중요성을 깨닫기도 전에 권력의 맛을 알아버린 거야. 그 사람이 잘못된 길로 갈까 봐 걱정됐지만, 계속 함께 갈 순 없었어.
정말 다양한 경험을 했구나. 부럽네. 나는 디에티 그라이퍼부르크 밖으로는 나가보지 못했는데.
세 번째 사람은 전부터 이름과 행적을 들어보기만 했던 사람이야.
그리고, 이제야 직접 만나게 되었어.
……
누가 너를 보냈지? 위트의 수하 같지는 않은데.
추측하지 마. 나는 너한테 관심 없으니까.
오랜만에 우르수스에 돌아왔더니 이런 황당한 일을 다 보네. 지금쯤 의회는 너를 조용히 빼낼 방법을 찾느라 골머리를 앓고 있겠지.
그럴지도, 어쩌면 내가 여기서 소리 소문 없이 죽어주길 바라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고.
모르겠어. 여기에 있든, 황궁에 있든, 사실 별로 다를 게 없는 것 같아.
너는 도대체 어떻게 했길래 백성들한테도 미움받고, 잘난 귀족들한테도 외면받는 거야?
네가 진짜 무언가를 바꾸려 하면, 제 밥그릇을 뺏기게 된 자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반대하기 마련이야. 네가 무슨 결정을 하든 사사건건 발목을 잡지.
관두자…… 말해봐야 네가 뭘 알겠어.
이해가 안 되는 건 사실이야. 나라를 다스리는 것에 온 정성을 쏟고 있다는 말처럼 들리는데, 왜 우르수스는 지금 이 모양 이 꼴이 된 거지?
아, 디에티 그라이퍼부르크에서 한 번도 안 나가봤다고 했던가? 그렇다면 나가봐야 해. 네 통치 아래에 있는 우르수스가 지금 얼마나 끔찍한 지옥인지 직접 네 눈으로 봐.
그만해!!
네가 나를 비난할 필요는 없어…… 내가 지금 우르수스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모를 거라고 생각하지 마. 나도 이 모든 걸 바꾸고 싶다고.
내가 얼마나 많은 시도를 했는지 넌 몰라, 아무도 모르지. 그 누구도 나를 진심으로 지지하지 않는데, 대체 나더러 뭘 어쩌라고!
그래서? 잘못은 다 남이 했고, 너는 고결하고 선량한 황제라는 거야?
너는 네가 어떤 책임을 지고 있는지조차 모르면서, 고통받고 있는 국민이 너를 가엽게 여겨주길 바랐어?
네 말이 맞아. 나는 정말 형편없는 황제야…… 그럼 너는 뭘 망설이지?
지금 당장 나를 죽여. 나를 죽여서 내가 죽기를 바라는 귀족들의 뜻을 이뤄주고, 내게 불만을 품은 평민들의 속을 시원하게라도 해줘.
그리고 축하해. 넌 더 이상 *우르수스 욕설* 별명이나 달고 다니는 꼬맹이가 아니라, 진짜 크라운슬레이어가 될 테니까.
제발 *우르수스 욕설* 멍청하게 굴지 마!!
널 죽이는 건 일도 아니야. 근데 그게 무슨 소용이지? 표도르라는 이름이 정말 그렇게까지 중요하다고 생각해? 천만에!
우르수스에서는 세 살배기 어린애도 위대한 황제 폐하께서 겨우 열 살의 나이에 대반란을 평정했다는 걸 알아. 하지만 그 보좌에 앉은 놈이 이런 등신인 줄 누가 상상이나 하겠어?
네 행보가 표도르라는 이름에 영예롭기라도 했나? 넌 네 책임이 뭔지도 모르면서 네가 세상에서 제일 억울한 사람이라도 되는 양 불평이나 해대고 있어.
너는 그저 주변의 가식적인 환호에 둘러싸여 살아왔을 뿐이야. 몸만 컸지 속은 그냥 어린애에 불과하다고.
*우르수스 욕설*……
정말로 네 눈앞에서 죽은 사람 때문에 슬프긴 해? 이런 비극, 아니 이보다 수십, 수백 배는 더 끔찍한 일들이 우르수스 전역에서 매 순간 일어나고 있어. 정말 슬픔이란 것을 느끼고 있긴 해?
네가 정말로 사람들을 구하고 싶다면, 네 자리로 돌아가서 올바른 법안에 서명하고 그 고귀한 도장을 그 위에 찍어.
그게 그렇게 힘들어? 진짜 문제는 네게 그럴 의지가 있느냐는 거야. 애초에 '올바른' 게 뭔지 알기는 해?
……
너한테 앉아서 불이나 쬐라고 한 게 내 일생일대의 실수네.
무례하게 구는 건 질색이지만, 꼭 내 성질을 돋우는 놈들이 있다는 말이지.
그것 참 영광이네, 황제 폐하.
부디 그 관대함이 더 많은 백성에게 닿길 바라지.
……어디로 가는 거지?
너랑은 상관없어.
걱정하지 마. 여기 처박혀서 소꿉놀이나 계속하겠다고 한다면 말리지 않을 테니까.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 거야.
마지막으로 딱 한 마디만 하지……
네 말대로 정말 변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면, 지금처럼 밤마다 황궁에만 불이 훤히 켜져 있지는 않았겠지. 우르수스 전역의 양초를 싹싹 긁어모아도 디에티 그라이퍼부르크조차 제대로 못 밝히는 상황이니까.
……
크라운슬레이어가 떠나자, 밤바람이 거세게 불어와 표도르 앞에 있는 마지막 불씨를 꺼뜨렸다.
사방이 순식간에 어두워졌고, 적막만이 감도는 차가운 밤에 황제와 방랑자만이 남겨졌다.
숨어있지 말고 나와라, 다 알고 있으니까.
폐하.
……여기까지 쫓아온 게 전혀 뜻밖이라고 생각되지 않는군.
폐하와 위트 의장님의 뜻을 받들어, 폐하의 실종 소식이 더 확산되지 않도록 조치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숨어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위트는 카토르가 구 일을 어떻게 처리할 셈이지?
그것은 저희가 알 수 있는 범위 내의 일이 아닙니다.
의장님과 대화를 나누고 싶으시다면, 부디 지금 저희와 함께 환궁해 주십시오.
환궁? 아무도 모르게 차에 실어 가서 나를 다시 그 숨 막히는 옥좌에 처박아둘 속셈이겠지.
분명히 말해두는데,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폐하, 폐하께서 놓인 상황을 제대로 파악해 주십시오.
선황에 비하면 폐하께서는 아직 너무 어리고, 또 지나치게 제멋대로이십니다.
*우르수스 욕설*! 다시는 나를 일찌감치 죽어서 해골이 된 사람이랑 비교하지 마라, 이 빌어먹을 자식들! 당장 꺼져!
나는 돌아가지 않는다. 내게도 해야 할 일이 있다. 나는 우르수스의 체면이나 차려주는 꼭두각시가 아니란 말이다.
가서 위트에게 전해라. 나를 여기서 끌어내고 싶다면, 직접 와서 나를 모셔 가라고!
왜 여기 없지……
이쪽이야!
순찰 중인 노동자들을 만난 거야?
커다란 칼을 차고, 몽둥이를 들고 있는데, 경찰처럼 입은 사람들까지 노동자라고 한다면야……
파블로비치 놈들하고 마주친 거야? 근데 여긴 카토르가 구가 아닌데, 그럴 리가……
노동자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우리를 숨겨줬어. 그런데 다들 바쁜지 금방 가버리는 바람에 뭘 더 묻진 못했어.
지마 언니는? 지마 언니 봤어? 레토 언니는 어때?
지마랑 레토, 그리고 걔들이 결집시킨 학생들이 봉쇄 구역에서 나올 준비를 하고 있어. 아마 조만간일 거야.
나온다고? 파블로비치가 풀어주기로 한 거야?
문을 열고 나오는 식의 '나온다'랑은 달라.
……어떻게 할 생각이래? 우리가 도울 일이 있을까?
나도 똑같이 물어봤어. 아무튼 이따가 동력층 당직 노동자를 만나서 얘기해 볼 생각이야.
우선 지마가 준 통신 장비부터 테스트해 봐야 해. 안 그러면 실직한 노동자들이 히터를 못 쓰게 될지도 몰라.
어디서 테스트해?
이쪽에는 안전 가옥이 없어서 좀 더 외진 곳을 찾아야 해.
여기라면 괜찮겠군.
장비가 꽤 무겁네, 내가 밑을 받쳐줄 테니 넌 헤드셋을 써.
고마워.
굼은? 굼은 뭘 할까?
주변 경계 좀 서줘. 무슨 기척이 느껴지면 바로 알려야 해.
응!
첫 번째 시도.
……
들려?
……
거기 누구 있어?
(작은 목소리로) 연결된 것 같긴 한데, 상대방 쪽에서 소리가 없어.
내 목소리 들려?
……
소리가 안 나네, 신호 문제는 아닌 것 같은데.
흔한 일이지, 조금 이따 다시 해보는 수밖에.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해? 근데, 우리 그냥……
어?
우리 그냥 먼저 지마 언니한테 가면 안 될까? 아니면 방금 말한 그 당직 노동자한테라도?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 도움이 된다면…… 돕고 싶어.
다른 데서도 연락을 계속 시도해 볼 수 있잖아?
카토르가 구는 통신이 차단된 상태라, 들어가면 통신 장비는 대부분 사용할 수 없게 돼.
그리고 아무리 봉쇄 구역 안으로 한정된 곳에서 일어난 작은 충돌이라고 해도, 아무런 준비도 없이 전투에 뛰어드는 건 너무 위험해.
로사가 준 보고서를 보면 일부 귀족들이 파블로비치에게 군수 물자를 지원했어. 지마 일행이 마주할 상대는 정규군 수준의 화력을 갖췄을지도 몰라.
……
굼은 안 무서워.
굼?
굼은 무섭지 않아! 지마 언니, 레토 언니랑 같이 싸우고 싶어! 적어도 굼이 나쁜 놈들이나 보이지 않는 화살들을 막아줄 수 있잖아!
도와주러 가고 싶어.
그게 네가 다른 사람들을 다치게 할지도 모른다는 뜻인데도?
……그래야만 한다면……
망설이고 있네, 굼. 너랑 지마는 군인이 아니야. 가능하다면 너희가 그런 전쟁은 영영 겪지 않았으면 해.
모두에게는 각자의 전장이 있는 법이야. 그 전장에는 우열도, 우선순위도 없어.
굼은…… 굼은……
굼, 내가 똑바로 말해줄게. 내가 지금 하는 일에는 수많은 사람의 목숨이 달려 있어. 그렇다면 넌 어떤 선택을 할 거야?
크라운슬레이어, 굳이 그렇게까지……
우리가 이곳을 떠나서 봉쇄 구역에 들어갔다가 디에티 그라이퍼부르크 주민들에게 전기를 공급하는 사람과 제때 연락하지 못하게 되면……
1주일만 지나도 오도예프 구 같은 곳에서는 얼어 죽은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일 거야.
하지만 네가 지마와 레토를 도우러 가지 않고 여기 남는다면, 그 친구들은 내일 눈먼 화살에 맞거나 포격을 당할지도 몰라…… 한마디로 위험에 빠지게 되겠지.
자, 너는 어느 쪽을 선택할래?
크라운슬레이어, 애한테 너무 잔인하잖아!
……잔인? 겨우 이 정도로?
자세한 사정을 굼에게 계속 숨기는 게 정말 굼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해? 선택할 기회조차 주지 않는 게 정말 책임을 다하는 거야?
늘 뒤에 남겨져야만 하는 사람에게는 이런 제멋대로인 결정이야말로…… 진짜 잔인한 게 아닐까?
너……
……
굼, 어쩔래?
굼은……
……둘 다 할래. 안 될까?
하아……
……치지직……
지금은 언니를 돕고, 일이 끝나면 바로 지마 언니를 도우러 갈래!
……좋아.
바지선……
잠깐, 저쪽에서 소리가 들려.
어?
헤드셋 너머의 희미하고 흐릿하던 목소리가 점점 선명해졌다.
그것은 크라운슬레이어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부드럽고도 주저함이 섞인 남자의 목소리였다.
……눈의 소녀, 거대 린수……
처음 듣는 목소리야. 원래 연락하던 사람이 아니야.
……
게다가 이건 제대로 된 문장이 아니야.
뭐라고 하는데?
앞뒤 연결이 안 되는 단어들만 읊고 있어. 이상해.
백야.
얼음 여황.
백야, 얼음 여황, 몽상가, 토지, 괴물, 금 체르벤, 바지선, 새끼 파울비스트, 눈의 소녀, 거대 린수.
……다 아는 단어들이긴 한데, 조합하면 무슨 뜻이지?
여보세요? 내 말 들려? 좀 더 분명한 힌트를 줄 수 없나?
힌트……
넌 누구지?
누구지? 지금 나와 말하고 있는 건 누구지?
상대방의 목소리가 갑자기 커졌고, 동시에 마치 깨진 파편과도 같은 노이즈가 헤드셋 밖으로 새어 나왔다.
굼은 고개를 숙이고 크라운슬레이어가 방금 적은 단어들을 바라봤다. 심장이 점점 더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
백야, 얼음 여황, 몽상가, 토지, 괴물, 금 체르벤, 바지선, 새끼 파울비스트, 눈의 소녀, 거대 린수.
이것은 본 적이 있는 단어들이다. 굼은 속으로 크게 소리치며, 옷자락을 꽉 쥔 채 종이 위의 휘갈겨 쓴 글씨를 뚫어질 듯 바라봤다.
책을 들고 있던 손,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손, 익숙한 시계를 차고 있던 손…… 기억의 파편들이 그녀의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류드밀라 언니……
굼은 갈피를 못 잡는 크라운슬레이어에게 뜨거운 시선을 보냈다.
여보세요? 이건 나와 다른 사람의 전용 채널인데, 어떻게 알고 들어온 거야?
넌 누구……
류드밀라 언니!
응? 왜?
굼이 들어볼게.
이 단어들만 말했어, 다른 내용은 없었어.
굼이 들어볼게, 부탁이야.
너, 뭔가 알아낸 거야?
들으면 알 수 있을 것 같아.
……좋아, 네가 한번 들어봐.
크라운슬레이어는 헤드셋을 벗어 소녀에게 건네주었다.
소녀는 떨리는 두 손으로 헤드셋을 받아 들고 조심스럽게 머리에 썼다.
……금 체르벤, 바지선, 새끼 파울비스트, 눈의 소녀, 린수.
여보세요? 전부 기억했나? 이것들을 기억했나?
이것들을 전부 기억해! 반드시!
다시 한번 말한다. 백야, 얼음 여황, 몽상가, 토지……
……
익숙하면서도 낯선 목소리.
기기를 거치며 왜곡된 목소리.
라다가 평생 잊지 못할 목소리.
“한 사람에게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할까?”
이어폰에서 아빠 목소리가 들려!
“50헥타르? 1,000헥타르? 아니면 14,000헥타르?”
“아니, 아니야. 전부 아니란다.”
그럼 얼마나 필요한데?
우리 라다, 서두르지 말렴.
“아주 먼 길을 돌아온 이반은 일출 전에 출발지로 돌아왔단다. 하지만, 남은 기력을 모두 쓴 탓에 다시 일어설 수 없었지.”
분명 누가 도와주러 왔을 거야, 그치? 분명 그랬을 거야!
그럼, 당연하지.
“그의 끈기에 감동한 사람들은 그를 부축해 일으켰어. 시원한 물이랑 부드러운 빵도 먹여줬지.”
“정신을 차린 그가 본 건, 자기가 낮 동안 걸어온 길과 그린 표식들이었단다.”
“드넓은 땅의 넓이는, 전부 합쳐서……”
“이반에게 평생 필요한 땅은 길이 2미터, 너비 1.5미터, 그리고 높이 1.5미터였어.”
……
아빠……
……!
굼을 속였어.
……누구……
다 크고 나서 그 책을 다시 읽어봤어. 한 사람에게 평생 필요한 땅은 그 정도가 다라고 쓰여 있더라.
그건 관의 크기지? 맞지?
누구야?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라다야, 아빠!
라다……
라다?
그래, 라다야! 지금 어디야? 우리한테 뭘 말하고 싶은 건데?
전부 말해줘. 아빠 목소리를 좀 더 들려줘……
……동일한 채널에서 이번에 연락이 닿은 게 네 아버지라면, 전에는……
네 부모님, 혹시 같은 기관에서 근무하고 있어?
잘 몰라, 아마 그럴 것 같긴 한데……
……모든 걸 확실히 알게 될 날이 오겠지.
통신이 끊기기 전에 뭐 다른 말은 없었어? 그 단어 10개 말고 다른 건?
사실은 12개였어.
2개가 더 있었어?
응, 나머지 두 단어는 '석관'이랑 '위성도시'였어.
……
앞의 10개 단어는 각각 한 권의 책을 대표해. 모두 제목에 같은 단어가 들어간 동화야.
어릴 때 아빠가 읽어준 책들이기도 해.
내 생각이 맞다면, 네 아버지가 단순히 그 동화책들을 찾으라고 한 건 아닐 거야.
설명해 줬어.
앞의 단어 10개는 순서대로 책 열 권의 출판 번호 앞 두 자리, 나머지 단어 2개는 첫 글자라고 했어.
……숫자랑 문자 조합으로 22자리라, 표준 우르수스 군사 시설 식별 코드네. 어디에 있는 군사 시설인지는……
답은 뻔하지.
석관, 위성도시.
……듀나, 굼, 아직 늦지 않았다면 지금 바로 봉쇄 구역으로 출발하자.
응…… 아까 언니들이 했던 말, 곰곰이 생각해 봤어.
모두를 걱정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 하지만 도움이 되고 싶어. 봉쇄 구역 안에서 아는 친구들을 찾아서 몰래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볼게.
좋아, 그럼 크라운슬레이어……
나는 너희를 데려다주고 나서 다시 돌아와 지하에서 버티고 있는 노동자들에게 연락할 거야.
다들 그 '대단하신' 추밀관 나리를 만나고 싶어 하거든.
콜록…… 콜록......
지마?
……교관?!
너는 또 여기 어쩐 일이야? 자치단 애들은? 다들 무사해?
당연하지, 하지만 지금 제일 걱정해야 할 건 너야.
이 연기는 다 뭐야?
파블로비치 쪽 녀석이 캠프를 습격했어. 보복이라면서 불을 지르고 가더라고.
……정말 웃긴다니까. 내가 이곳에서 본 불꽃은 오히려 내 머릿속에서 남아 있던 그 장면을 없앴어. 체르노보그의 그것 말이야.
지마, 만약 체르노보그 때문에……
아니, 교관. 고마워……
친구랑 동료들이 위험에 빠져 있는데, 아직도 내 두려움을 마주할 걸 망설이고 있다면…… 그건 나답지 않아. 나는 생각보다 몸이 먼저 반응하는 사람인데 말이지.
게다가 여기에는 내 주먹만 있는 게 아니거든.
그 말은……
'단결'.
예전엔 혼자 앞장서서 돌격할 생각만 했어. 하지만 지금은…… 뒤에 친구들이 있고, 우리가 같은 곳을 향해 가고 있다는 걸 아는 이상…… 뭐든 해낼 수 있다는 확신이 들어.
그럼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야?
방화라는 비효율적인 방식을 썼다는 건, 파블로비치가 중화기를 다 잃었다는 걸 의미해.
녀석들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심어줬을 거라 생각했겠지만, 본인들의 약점만 드러낸 꼴이야…… 지금이 기회야.
모레 새벽, 파블로비치와 결판을 낼 거야.
네 도움이 필요해, 교관.
당연히 도와야지. 그런데 레토는 같이 있는 거 아니었어? 안 보이네.
습격을 받은 후, 레토를 보내서 동맹 쪽에 경고를 전하라고 했어. 겸사겸사 공격에 합류한다는 약속도 받아오라고 했고.
물론, 우릴 여전히 동맹으로 생각한다면 말이지……
나는 마트베이를 보았다. 그는 활활 타오르는 집 앞에 혼자 서 있었다.
우뚝 솟은 공장에 가려진 그 집은 내 기억보다 훨씬 작았다. 불길조차 활활 타오르는 공장 작업장의 불꽃에 가려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는 고개를 들고 불길 위에서 맴도는 짙은 연기, 부러진 들보, 허공에 흩날리는 수많은 책과 종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은 여느 때처럼 침착해 보였다.
하지만 그건 그의 집이었다. 그가 직접 못을 하나하나 박아 지은 집…… 언바운드의 거점이자 우리의 '집'이었다.
누구야! 대체 어떤 놈이야!
마트베이…… 놈들이……
*우르수스 욕설*! *우르수스 욕설*!
아, 우쿠시크.
그는 별다른 표정을 짓고 있지 않았다. 어쩌면 내 눈물이 시야를 가려서 제대로 보이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마트베이는 한숨을 쉬고는 무릎을 굽히고 앉아 내 눈물을 닦아주려 했다. 그의 얼굴 절반이 피로 얼룩져 있었지만, 정작 다친 곳이 어디인지는 찾을 수 없었다.
“엎질러진 치스티밀크 때문에 울지 마라.” 이 말, 기억해요?
하지만 치스티밀크는 엄청 비싸단 말이야! 난 새해에 딱 한 번밖에 못 마셨어!
……
항상 비싸지만은 않을 거예요.
안토샤, 너희에게 필요한 게 있다면……
아냐, 우리에게도 비축한 건 조금 있어. 너희랑 전리품도 나눴고.
캠프만 지키고 있는 건 너무 수동적이야…… 소냐가 모레 새벽에 공격하기로 했다고 전하래.
목표는 바로 저 성벽이야.
……
소냐에게 전해줘. 언바운드가 파블로비치 앞에 나타나지 않을 이유는 없다고.
우린 틈을 봐서 놈의 지휘부를 기습하기로 했어. 이건 우리가 일찍이 결정한 작전이야.
소냐랑 상의해 봐야겠네.
상의라면 마음껏 해. 하지만 나는 소냐 말대로 하지는 않을 거야. 이게 내 결론이야.
하지만 믿어줘……
우린 함께 싸우는 동료들을 절대 배신하지 않아.
명령에 따라 근위군 직속 부대를 봉쇄 구역 외곽에 나누어 배치했습니다. 지금 바로 폐하를 모시러 출발할까요?
아니, 조금 더 기다려.
하지만 근위병이 봉쇄 구역에 곧 더 큰 혼란이 있을 거라고……
그래서 더 기다려야 한다는 거야. 이번 기회에 방관자들의 음모를 낱낱이 파헤쳐야 해. 폐하의 행방이 공개되기 전에, 그리고 우리가 폐하를 무사히 궁으로 모셔 오기 전에……
진상을 알고 폐하를 해치려 드는 반역자들도, 폐하의 실종에 동요해 반군에게 빌붙으려던 기회주의자들도 행동을 더 서두르겠지.
우리가 할 일은 그 녀석들을 일망타진하는 거야.
하지만 그중에서 정신을 차리는 사람이 있다면요?
그렇다면, 돌아오신 폐하를 맞이하는 행렬에서 초조함과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익숙한 얼굴들을 볼 수 있기를 바라고 있어야겠지.
끊임없이 서로 눈치를 보고 떠보면서 대치하던 나날 동안, 폐하께서는 그들에게 충분히 많은 기회를 주셨어.
……우르수스의 병세가 깊어질 대로 깊어진 모양이군요.
맞아, 바샤. 환부를 도려내려는 우리의 조치가 너무 늦지 않았기만을 바랄 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