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7질주
놀란 버든비스트 떼가 목장에서 제1신전으로 폭주하며 종횡무진 내달렸고, 담소를 나누던 이들과 작별을 고하던 이들을 차례차례 흩어버린다.
등장 오퍼레이터: 티티, 팔라스, 퍼퓨머 더 디스틸트, 퍼퓨머, 바르카리스
라이타니엔에서 재배된 꼬리풀은 홑잎이야, 겹잎이야?
글쎄.
붉은 당아욱의 정제법 중, 정신적 피로 완화에 가장 효능이 뛰어난 방법은 뭐지?
몰라.
그러면 네가 심은 이 보로니아는……
난 삽질만 도운 거야, 언니. 그걸 왜 심는지, 어떻게 심는지는 전혀 몰라.
리디아, 이건 다 네가 봐야 할 시험의 내용이야.
영웅 플로라를 숭배하는 아토풀루 가문은 대대로 조향, 약초 재배, 재배 품종 육성 등 식물과 관련된 일을 해왔어.
가문의 어른들은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사업을 정말 중요하게 생각하셔. 몇 년 후에 너도 전통에 따라 가문 후계자 선발식에 참가해야 하니, 잘 기억해 둬야 해.
아토풀루의 후계자가 언니뿐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도 있어?
스테로스 백부님은 누군가를 만날 때마다 자신의 가장 자랑스러운 딸 이야기를 하곤 하지. 상대의 손을 잡고 “레나가 바로 아토풀루 가문의 플로라다”고 할 기세던걸.
리디아, 아버지가 널 불공평하게 대하시는 건 맞지만……
부모님을 일찍 여읜 날 거두어주신 것만으로도 백부님은 이미 엄청난 자비를 베푸신 거야. 그리고 언니도 알다시피, 난 화초에 관심이 없잖아.
하아, 그렇지만 아버지가 다음 주에 테스트가 있다고 하셨잖아. 통과하지 못하면 또 벌을 받을 텐데……
스테로스 백부님의 수첩을 몰래 봤는데, 타임의 수확량이 기대에 미치지 못했더라고. 긴급 상황에 대비해야 하니까, 믿을만한 공급원을 확보하러 한동안 코리니아에 가 계실 것 같아.
코리니아에 가신다고? 그런 말 하신 적은 없는데……
레나, 또 정원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구나…… 멀리 다녀올 데가 있어서 나갈 참이다. 일주일 후면 돌아올 테니, 몸조심하고 리디아도 잘 돌봐줘.
와……
언니가 식물 감별과 조향에 뛰어난 것처럼, 나도 잘하는 게 있거든. 그렇지?
후우…… 후우…… 누구 없나요? 여기요!
무슨 *미노스 욕설* 전통이야! 아토풀루 가문은 왜 굳이 이렇게 후미진 데를 찾아서 후계자 선발식을 하는 거야?
희귀 식물을 채집한 후보자가 영웅 플로라에게 가장 인정받을 수 있다고? 헛소리!
여기 사람이 다쳤어요. 의사 좀 불러줘요…… 급성 감염 억제제도 부탁해요!
……리디아, 너 목 다 쉬었어…… 안 그래도 나를 업고 있어서 많이 힘들 텐데. 내려줘……
언니가 정말 내 부담을 덜어주고 싶다면, 그 더럽게 무거운 풀이나 버려. 그게 없어도 언니는 아토풀루의 후계자야. 적어도 내 마음속에는, 언니보다 더 적합한 사람이 없어.
확실히, 이제 나한테는 의미가 없어진 물건이네.
감염자는 아토풀루 가문의 플로라가 될 수 없어. 아버지께서 받아들이지 않으실 거야. 돌아가면 나는 아테누스를 떠나야 하겠지.
만약 그 사람이 자기 친딸도 버릴 수 있는 사람이라면, 언니는 그런 쓰레기에게 인정받을 필요 없어.
하지만 가문에는 믿을 만한 후계자가 필요해.
……
리디아, 기억해. 이 식물은 지치목, 지치과, 꽃마리아과 물망초속……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레나 언니, 이제 그만해. 나는 그런 거 알지도 못하고, 알고 싶지도 않아!
내 말 끝까지 들어줘.
이 품종은 테라 전역에서 희귀한 편은 아니지만, 지금까지의 자료에 따르면 늪 근처에서만 자라고, 미노스에서는 단 한 번도 발견된 적 없어.
얘를 봤을 때 네가 떠올랐어.
가족의 전통을 싫어하고, 식물과 약초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가장 아토풀루답지 않은 아토풀루…… 하지만 나는 네가 관찰과 소통에 능하다는 걸 알아. 너는 훌륭한 후계자가 될 거야.
그건 언니 자리야. 난 싫어……
내기할까? 우리 어릴 때처럼.
이 희귀 식물을 잠시 맡아줘. 가문의 장로님들이 내 병에 대해 아무 말씀도 안 하시면, 앞으로 다시는 네게 그 '따분한' 정원에 가자고 하지 않을게.
하지만 아버지가 내 상처를 보고 혐오감을 보이시면…… 이 '더럽게 무거운 풀'을 네가 찾았다고 말해.
안심해, 리디아. 후계자가 되면, 더 이상 아무도 너를 괴롭히지 못할 거야. 우리 아버지도.
너라면 아토풀루를 더 좋게 만들 수 있을 거야, 난 그렇게 믿어.
……
리디아……
왜 이 공공 정원에서 만나자고 한 거야? 우리 사이에 과거 회상이나 할 필요는 없을 텐데?
할 말 있으면 빨리해. 아직 처리할 일이 많으니까.
문화재 교환식이 곧 시작돼. 원활한 행사 진행을 위해 참석자 명단도 체크해야 하고……
그리고 아테누스 시민들을 향해, 크산토스와 리케이온은 미노스의 문화재를 훔치고 훼손한 혐의로 반역죄가 선고됐다고 발표해야지, 안 그래?
……
조향사에서 의사로 전업한 것도 모자라서, 이제 변호사까지 하게?
지금은 양국이 수교하는 중요한 시기야. 시정감독관으로서, 난 일시적인 변덕으로 일어난 황당한 절도 사건이 모든 걸 망치게 둘 수 없어.
100년 동안 이어진 전쟁도 미노스를 망가뜨리지 못했어. 네가 신경 쓰는 게 대체 아테누스 시민들의 이익이야, 아니면 네 시정감독관 타이틀이야?
진부한 도덕적 선택지네……
물론 시정감독관 타이틀이지.
로도스 아일랜드 제약회사가 어떻게 이렇게 짧은 시간에 아테누스에 들어와서 사무소를 설립할 수 있었다고 생각해?
고서만 들고 있는 제사장, 혼란스러운 의사당, 번거로운 투표 의식…… 이런 '전통 절차'들은 언니의 신청서를 1년 후로 미뤄버릴 뿐이야.
그리고 케레세이라 제1신전…… “옛 법을 따른다”라고? 웃기는 소리.
그 사르곤 아가씨가 마무리 작업에 참여해 현대적이고 효율적인 프로젝트 관리법으로 검수 작업을 추진하지 않았다면, 오늘 문화재 교환식이 거기서 열릴 수나 있었을까?
……
그래서 너는 멋대로 모든 걸 저울질해서 결론을 내리겠다는 거야? 그 저울 위에 올려진 게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이라는 사실은 안중에도 없이?
그렇다면, '사람' 때문에 모든 것을 양보하는 게 언니가 따르는 원칙이야?
나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기 전에 최선을 다해 해결책을 찾을 거야. 험난한 길에서 계속 나아갈 수 있도록, 내 동료와 파트너가 도와줄 거거든. 그리고 네가 말한 원칙은 말이지……
나는 의사야, 리디아. 그게 내가 하는 모든 일의 근간이야.
……
발밑의 토양이 미세하게 떨리고, 대형 동물의 울음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수십 마리의 버든비스트가 울부짖으며 울타리와 긴 의자를 뛰어넘어, 공공 정원을 아랑곳하지 않은 채 거칠게 돌진해 들어왔다.
짐승 떼는 넓은 정원의 잔디를 짓밟으며 멀리 우뚝 솟은 건물을 향해 달려 나갔다. 마치 자신들이 가야 할 곳을 정확히 알고 있는 듯한 기세였다.
축제와도 같은 그 분주한 질주 속에서, 어린 버든비스트 한 마리가 곁의 풍경에 시선을 빼앗겼다.
그 온순하고 호기심 어린 눈에는 진지한 표정을 한 두 인간의 모습이 비쳤다. 하지만 어린 짐승은 이내 흥미를 잃고, 흩날리는 꽃잎만을 남긴 채 무리를 뒤쫓아갔다.
진하고 풍성한 풀꽃의 향기가 두 명의 아토풀루를 감싸 안았다.
그 뛰어난 후각과 어린 시절부터 받은 훈련 덕분에, 그녀들은 짓밟혀 상처 입은 꽃의 종류를 쉽게 가려낼 수 있었다. 하지만 정작 서로의 본심만은 꿰뚫어 볼 수 없었다.
우리는 서로를 설득할 수 없어. 어릴 때부터 그랬지.
하지만 레나 아토풀루, 계속 묻고 싶었던 게 있어……
언니는 왜 늘 그렇게 '위대'한 건데?
리디아……?
모든 아토풀루가 미워하는 아이에게 멋대로 다가가고, 멋대로 자신이 사랑하는 정원으로 안내하고, 아이는 관심도 없는 식물 지식을 멋대로 가르쳐 주고……
멋대로 가문의 상속권을 결정하는 식물을 건네주고, 그 아이가 가문을 더 좋게 변화시켜 줄 거라고 멋대로 생각하고, 또 멋대로 혼자서 아테누스를 떠났잖아……
언니는 내가 뭘 잘하는지 관심도 없고, 내가 아직 아토풀루에 남아 있는 게 책임이나 후계자 자리 때문이 아니라는 걸 생각해 본 적도 없지……
난 그 정원을 싫어한 적 없어, 언니.
하지만 너는 그걸 보존하지 않고, 몰락한 가문의 손에서 가져와 공공시설로 만들었잖아.
그게 바로 우리의 근본적인 차이야, 안 그래?
설령 똑같이 아토풀루라는 성을 증오할지라도, 언니는 늘 무언가를 그리워하고 그것을 되찾으려 해. 하지만 나는 뒤돌아보지 않아.
언니가 나한테 만나자고 한 이유를 알아. 체포된 두 죄수를 위해 나를 붙잡아 둘 시간을 벌어야 했거나, 다른 의도가 있어서겠지.
정식으로 가문의 후계자가 되고, 그걸 포기하는 데 꼬박 2년이라는 시간이 걸렸어. 난 이제야 비로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시작했거든……
하지만 언니 말대로, 그동안 나를 괴롭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이 십여 분 동안 '제 발로 그물에 걸려준' 건, 내가 주는 마지막 선물이라고 생각해.
레나 언니, 난 이제 언니에게 빚진 거 없어.
……
알겠어.
잿빛 머리의 불포는 천천히 멀어져 가는 레나의 뒷모습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한때는 두 사람이 다시 만날 날을 몰래 그려보기도 했고, 그녀가 아테누스로 돌아온 뒤로는 언젠가 찾아올 이별의 순간을 막연히 떠올려 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처럼, 이토록 선명하게 두 사람의 궤적이 정말로, 그리고 완전히 갈라져 버렸음을 통감한 적은 없었다.
이제 리디아 눈앞에 있는 사람은 그저 로도스 아일랜드의 오퍼레이터일 뿐이었다. 늘 다정하게, 때로는 고집스러울 정도로 식물에 대한 지식을 가르치던 그 정 많던 '레나 언니'는 더 이상 그곳에 없었다.
언니는 이미 자신만의 이상과 뜻을 품고, 스스로 머물 곳을 찾아냈다. 그곳은 아토풀루 가문과도, 그리고 리디아 자신과도 아무런 관련이 없는 세계였다.
그때, 아무런 근거도 없는 확신 하나가 리디아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설령 앞으로도 레나가 아테누스에 머물며 감염자 의료 체계를 세우기 위해 분주히 뛰어다니고, 시정감독관 사무실과 계속해서 업무적인 관계를 맺어간다 할지라도…….
'그녀'와 마주하는 것은, 사실상 이번이 마지막이 되리라는 것을.
후우…… 후우…… 여기 숨으면 그 버든비스트들을 피할 수 있을 거야.
선생님이랑 떨어졌어……
방금 제1신전 쪽으로 가시는 걸 본 것 같아. 카산드라 님에게 작별 인사를 하러 갔을 거야. 이따가 합류하면 되니까, 걱정하지 마.
그런데 왜 거리에 버든비스트들이 날뛰고 있는 거지? 너, 시정감독관의 서기관이잖아? 가서 살펴봐야 하는 거 아니야?
치안관이 쫓아갔으니까 금방 해결되겠지.
그리고 나와는 이제 상관없는 일이야……
나 그만뒀어.
나랑 선생님을 탈옥시키기 위해서야? 그럴 필요 없어. 우리는……
알아서 도망칠 거라고?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괜찮아, 어차피 진작 그만두고 싶었으니까.
……
리케이온, 앞으로는 무슨 계획이야?
무슨 뜻인지 모르겠는데.
시치미 떼지 마. 너 고전극 연기 수업에서 단 한 번도 합격 못 받았던 주제에, 어디서 연기질이야?
그때 너 광석병에 걸려서 제사장 학원에 자퇴 신청서 낼 때랑, 소름 돋을 정도로 똑같은 표정이야.
그건 변론대회 전날이었어. 우리는 평소처럼 목장에 가서 활쏘기 연습을 했지.
활 솜씨는 네가 나보다 훨씬 좋았지만, 인정하기가 싫더라고. 그래서 일부러 네 활을 끝까지 당겨서 화살을 멀리 보내버렸어. 네가 사고를 당한 것도, 화살을 찾다가 그런 거였고……
너를 업고 산에서 내려오다 우연히 크산토스 님을 만났지. 그분이 최고의 광석병 의사에게 연락하고 배로 우리를 데려다 줬지만, 그래도 너는 감염을 피하지 못했어.
그 일 때문에 우리는 등록해둔 일곱 번째 변론대회를 놓쳤어. 그전까지 3대 3으로 비긴 상황이었는데 말이야.
정말 이런 상황에서 그 얘기를 해야 해?
테로스 신전 안이든, 취객이 주먹을 휘두르는 길거리든, 미노스인이 언제부터 변론 장소를 가렸다고 그래?
처음에 나는 네가 하루 이틀 의기소침하고 괜찮아질 줄 알았어. 다음 해에는 너와 함께 대회에 참가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결국 너는 그렇게 도망쳤지.
리케이온, 이렇게나 긴 세월이 지났는데도 우린 아직 승부를 가리지 못했어. 마지막 변론을, 슬슬 돌려받고 싶은데.
……
변론 주제는?
감염자는 영웅이 될 수 있는가, 에 대해서.
헤카데모스!
이 주제는 적절하지 않아.
왜, 이 주제는 네가 나보다 더 잘 알지 않아?
“광석병은 영웅의 기개를 꺾는다.” 우리가 어릴 때부터 듣고 자란 말이지. 아무리 똑똑한 아이가 반박하더라도, 노인들은 각양각색의 영웅 전설을 증거로 제시했어.
미노스의 영웅이 광석병을 앓았다는 내용의 서사시는 한 편도 없고, 신전에 오리지늄 결정이 새겨진 영웅 조각상은 단 하나도 없지.
그렇기 때문에…… 영웅을 꿈꿨던 너는 규칙이 네 발목을 잡기 전에 먼저 제사장이 될 기회를 포기한 거야……
너의 모든 행동이 이 변론 주제에 대한 너의 생각을 대표하지 않아?
도발할 필요 없어. 이 주제라면 내가 질 수 없다는 걸, 너도 잘 알고 있잖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도 생각해 본 적 있고, 크산토스 선생님도 응원해 주셨어. 하지만 자신에게 미래가 없다는 걸 분명히 알게 되면, 어떤 일에도 몰두할 수 없다는 걸 그때 깨달았어.
정기적인 억제제 주사, 규칙적인 생활, 그리고 로도스 아일랜드의 새로운 치료법. 그런 것들이 어쩌면 환자를 가능한 한 오래 살 수 있게 해줄지도 몰라.
마치 살아 있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인 것처럼 말이야. 하지만 난 그걸로 만족할 수 없고, 그런 생각이 날 부끄럽게 해.
헤카데모스, 광석병이 정말 두려운 이유는 신체적 고통 때문이 아니라, 모든 꿈과 이상에 결코 되돌릴 수 없는 기한이 정해지기 때문이야.
광석병이 영웅의 기개를 꺾지 못한다 해도, 감염자가 제사장이 될 수 있다 해도, 과거의 내가 영웅이 될 수 있다고 해도……
지금의 나는 불가능해. 알겠어?!
알겠어.
안타깝게도 마지막 변론은…… 내 승리다.
누가 이 변론이 끝났다고 했지?
엉?
네가 네 태도를 행동으로 보여줬으니, 나도 그렇게 해야지. 리케이온, 내가 널 미노스의 영웅으로 만들어 줄게.
너…… 너 지금 무슨 소릴 하는지는 알아?
그거 말고는 너를 이길 방법이 없잖아?
너는 크산토스 님에게 감화되고 다른 감염자들의 업적에 감동하기도 하지만, 속으로는 아직도 영웅의 기개가 감염과 무관하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아 해.
그렇다면, 가장 직접적인 방법은 너를 '영웅'으로 만드는 거겠지.
아무튼 일도 그만뒀으니, 앞으로 네가 가는 데는 다 따라갈 거야. 그리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네가 살아서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더 중요한 일에 참여할 수 있게 할 거야.
대체 무슨 꿍꿍이야? 이건 무슨 새로운 벌칙 게임 같은 건가? 설령 그렇다고 쳐도, 이게 너한테 무슨 이득이 있다고 그래?
너도 알다시피, 나는 어렸을 때부터 향상심 같은 거 없었고, 어른이 돼서도 정시퇴근하면서 노력 같은 건 절대 하지 않았지. '영웅'은 내 인생에서 너무 동떨어져 있어서. 동경은 해도 되고 싶지는 않았어.
하지만, 난 너를 모두가 인정하는 진짜 영웅으로 만들겠어. 그 대가로 내가 바라는 '이득'은 오직 하나……
우리의 마지막 변론에서 너를 이기는 거.
……미친놈.
칭찬 고마워. 어쨌든 동의한 모양이네.
아, 그런데 네 병은 이미 말기니까, 나한테 너무 불리하겠네…… 너 정말 눈도 잘 안 보이고 머리도 혼미해지기 시작한 거야?
무슨 헛소리야? 나는 경증 감염이거든. 그런 심각한 증상이 있을 리가 없잖아.
경증? 하지만 너는 계속 약 타러 로도스 아일랜드 사무소에 갔고, 레나 씨한테 방문 진료도 받았잖아. 게다가 정박 표지가 잘 안 보여서 주방을 들이받은 거 아니었어?
오해야. 위중한 건…… 크산토스 선생님이셔.
크산토스 님이?
헤카데모스, 우리는 처음부터 계획 같은 거 없었어.
선생님이 날 데리고 탈옥하신 건 그저 자신에게 아직 여력이 있을 때,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싶으셨기 때문이야.
그걸 위해서라면 목숨을 잃게 된다 해도, 전혀 후회 없다는 말이겠지.
여기까지 오는 모험을 하면 안 됐어요, 크산토스 씨. 사람들이 이미 신전으로 모여들기 시작했어요. 올 때는 사람들의 눈을 피할 수 있을지 몰라도, 떠나기는 정말 어려울 거예요. 어서 가세요.
……작별 인사를 하러 왔어, 카산드라 씨. 앞으로 다시 보기 힘들 것 같아서.
중요한 건 얼굴 보고 작별 인사를 하는 게 아니라, 당신 내면의 평안함이에요. 고향으로 돌아가 보세요, 크산토스 씨.
옛 강줄기를 보러 가세요. 지금은 비록 메말랐을지라도, 고산의 눈이 녹아 다시 흐를 날이 올 수도 있고, 예상치 못한 새로운 물줄기가 땅을 풍요롭게 할지도 모르는 법입니다.
나는 엔미디온의 제사장이 우리 모두의 마음을 깊이 헤아려 준다는 걸 알아.
그리고 언제나 우리에게 거짓된 희망을 주지.
……당신이 갓 아테누스에 온 그 비 내리던 밤을 기억해요. 그날 당신은 이타코스의 피 묻은 옷을 들고 제 신전의 문을 열었죠.
그때 당신은 절망에 빠져 방황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를 전장으로 보낼 때 나누었던 약속을 제게 들려주셨죠. 또한, 훗날 델피 운하의 뱃사공이 되어, 그를 도시 너머의 신전까지 무사히 인도하는 자신의 모습을 꿈꿨다는 사실도 말입니다.
그것이야말로 희망의 불꽃입니다. 가냘프고 연약할지언정, 그것은 여전히 일렁이고 있지요. 그것은 제가 안겨준 거짓된 희망이 아니라, 당신의 마음속에 분명히 존재하고 있던 것입니다.
확실히…… 한때는 존재했었지.
지금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저는 예전에 당신이 일상 속에서 그것을 키워나가길 기대했지만, 당신은 그것을 거듭 되새기는 사이 서서히 다른 무언가로 바꾸어버리고 말았어요.
그러니 지금이라도 고향으로 돌아가면, 더 먼 옛날의 기억을 떠올릴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고향의 변함없는 바람 속에서 과거의 소리를 듣고, 상처를 치유받는 것이지요.
그럼 사르곤 놈들은?
당신이 걱정하는 교환식에 대해서라면, 신탁이 이미 준비를 마쳤습니다.
미노스의 리라 소리가 다시 울려 퍼지면 사람들은 조만간 하나로 뭉칠 것이고, 케레세이라도 모든 이방인을 몰아낼 것입니다.
……또 신탁인가.
사람의 마음을 위로하는 제사장, 당신에게 줄곧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어.
신탁이란 대체 무엇이지? 그것은 어째서 사람을 죽음으로 내몰 수 있는 건가?
……
그것은 신앙이자 믿는 힘이며, 천 년 동안 미노스인을 미노스인답게 만들어온 이유, 즉 영웅을 향한 동경의 결정체지요.
우리에게는 이방인들이 말하는 '신'은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영웅 한 분 한 분을 신으로서 숭배해 왔어요.
우리의 영웅 케레세이라를 보세요. 그녀 역시 과거에는 그저 평범한 사람에 불과했습니다.
신탁의 인도에 따라 그녀는 영웅담을 노래했고, 고난 속에 있던 미노스인을 하나로 모아 지금의 우리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신탁이란 사람들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진정한 염원이 형상화된 것이에요. 그것을 믿는다면, 신탁은 당신을 영웅으로 변화시키고 가야 할 길을 제시해 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타코스는 죽음을 바랐다는 건가?
9년 전, 이타코스 씨가 신전으로 저를 찾아왔었습니다. 피로 물든 강의 꿈을 꾸었다며, 그것이 신탁인지 아닌지를 물었지요.
저는 아니라 하고 싶었고, 이타코스 씨에게 가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결국 그러지 못했습니다.
신탁은 제 입을 통해 나오는 것이기에, 그것을 멈출 수도 바꿀 수도 없어요. 타인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소망을 부정할 권리는 제게 없으니까요.
그리고 이타코스 씨는……
이동도시 아테누스 건설 당시에 흘린 피와 눈물은 그의 일족의 혈맥 속에 대대로 응축되어 있었습니다. 우리가 함께 신전을 섬기던 나날조차 그것은 늘 그의 마음속에서 소용돌이치고 있었지요.
그는 영혼의 분출구를 갈구했습니다. 아테누스 밖에서 자신이 일구고 지킬 수 있는 땅을 갈구했죠.
하지만 죽음은, 그 소망이 이루어질 때 피할 수 없는 대가였던 것입니다.
당신의 말이 진실일지도 모르지만, 역시 받아들일 순 없군.
알고 있어요. 고통은 당신의 혈관 속을 치닫고 있으며, 공허한 말로 그것을 잠재울 수는 없겠지요. 제가 무슨 말을 한들 당신을 진심으로 위로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래도 저는 당신이…… 하아.
당신이 아테누스에 오고 우리가 알게 된 지도 벌써 5년 정도 되었군요.
당신은 늘 강 위에 머물며 신전에는 결코 발을 들이지 않았고, 이타코스 씨의 무덤 앞을 제외하면 우리가 얼굴을 마주할 일은 거의 없었죠.
제사장의 가르침이나 인도 따윈, 내게 필요 없으니까.
하지만 저는 줄곧 당신을 지켜봤어요.
당신은 이타코스 씨의 친우이자, 그가 살았던 마지막 증거니까요. 당신이 평온하게 살아준다면 저 또한 조금이나마 위안을 얻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제사장의 입장을 떠난 저의 소박한 사심이었어요.
……
저는 당신이 점점 아테누스의 강에 적응해가고, 제자를 거두어 함께 살아가는 모습을 지켜봤어요.
리케이온 씨는 성실한 아이죠. 그 아이가 당신을 돌봐주고 있어 참 마음이 놓였어요.
공허한 말로는 부족하겠지만, 그런 일상의 소소한 부분들에서 당신이 위안을 얻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나요?
그것들이 당신이 처음에 아테누스에 품었던 상상과 겹쳐 보인 적은 없었나요? 적어도 상상했던 것보다 더 좋았던 일이 단 하나라도 있을 거잖습니까?
……그럴지도 모르겠군.
그렇다면 그것들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리고 과거를 되돌아보며, 더 소중한 무언가를 잊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보세요.
어찌 됐든, 이타코스 씨를 위해서라도…… 더 나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안 그래요?
……
……밖이…… 소란스럽군요.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시간이 늦었어요, 크산토스 씨. 사람들 눈을 피해 어서 자리를 뜨세요.
……
여기서…… 극장 관객석으로 어떻게 돌아가지…… 음…… 이 신전, 너무 크잖아……
그 이름 엄청 긴 코리니아의 제사장이 방금 “먼저 가보겠습니다”라고 했었나? 아니면 “잠시 다녀올게요”라고 했던가? 다시 돌아오려나……
어떡하지……
어? 무슨 소리지?
음메!!
에?
셀러리~~! 양파~~! 가지~~! 기다려!!
후…… 으으…… 목장에서 시내까지 쫓아왔는데…… 버든비스트 한 마리도 내 말을 안 듣네…… 너희…… 도대체 왜 그러는데…… 뭐 때문에 놀란 거야……
음메……
토마토! 끝에 남아서 날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우웃, 역시 네가 최고야. 그동안 예뻐해 준 보람이 있네.
후우, 조, 좀만 기다려 줘. 나 숨 좀 돌리고. 후우……
흥!
앗, 토마……
토마토! 뛰지 마, 같이 가!
음메……
안 돼. 도시엔 사람이 많으니까, 이렇게 날뛰면 위험하다고.
특히 케레세이라 신전에서 날뛰는 건 정말 예의 없는 짓이야.
음메.
그래, 그렇게 얌전히 있어야 착한 아이지.
……버든비스트들이…… 멈췄어. 버든비스트 머리 위에 손가락을 가볍게 얹었을 뿐인데, 성질머리 제일 나쁜 콜리플라워까지……
케레세이라의 리라는 새끼 버든비스트들도 이해할 수 있었다는 전설…… 난 그저 신화일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와아…… 정말 버든비스트랑 교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니!
너…… 대체 정체가 뭐야? 어떻게 버든비스트랑 대화할 수 있어? 나한테도 가르쳐줘!
대화? 입만 열면 되는 거잖아? 너도 할 수 있을 텐데……?
아니, 내 말은 어떻게 버든비스트가 네가 하는 말을 알아듣냐는 건데……
못 알아들을걸? 아마도.
멜리타 앞의 소녀가 콜리플라워의 이마에 놓인 손가락을 들어 올리자, 성난 버든비스트가 즉시 어깨를 낮추고 발굽을 디디며 뛰쳐나갈 준비를 했다.
그러자 소녀는 손가락을 다시 가져다 놓았다.
어라, 아직도 기운이 남아있네. 정말 대단해.
……
버든비스트 방목자야? 잠깐 기다려줘. 이 아이가 완전히 힘이 빠지면 분명 진정될 거야.
선두에 있는 아이가 진정되고 나면, 버든비스트 무리 전체가 차분해질 거야. 걱정하지 마.
그러니까…… 콜리플라워를 순전히 힘으로 눌렀다고……? 장정 네다섯이 같이 덤벼도 제압할 수 없을지 모르는 애를, 이렇게 혼자서, 손가락 하나로 가뿐하게……
음? 네 이름이 콜리플라워야? 귀엽다. 너랑 잘 어울리네.
우우움……
콜리플라워…… 콜리플라워 발굽 아래의 타일이 다 갈라졌어!
좋아. 이 정도면 되겠지.
소녀가 손을 놓자, 콜리플라워가 바닥에 무릎을 대고 엎어졌다.
뒤이어 소녀는 다시 한 마리 한 마리씩 머리를 눌러, 콜리플라워가 이끄는 짐승 떼를 진정시켰다.
마지막 한 마리네, 응?
뿔에 뭘 걸고 있는 거야?
우리의 귀빈, 존경하는 라케다이몬 제사장 시니스카 씨,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가지고 계신 리라는, 저에게 주시지요.
그게 바로 저희가 오매불망 기다리던, 제1신전의 것인, 케레세이라의 리라입니다.
티티! 겨우 찾았네요!
당신도 이 달리는 버든비스트들을 따라 신전까지 온 거예요? 목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어젯밤에…… 목장에서 나도 모르게…… 잠들었어. 나중에 갑자기 주변이 엄청 시끄러워져서 미오가 날 깨웠는데, 그제야 리라가 사라진 걸 알게 된 거야……
버든비스트들이 산 아래로 돌진하는 걸 어렴풋이 보고 곧장 여기까지 따라왔어. 버든비스트들이 리라를 광장에 가져온 거야?
맞아요…… 우리가 오래 기다려 온 기적이 일어났어요! 그건 진짜 케레세이라의 리라예요!
그러면 이제 제1신전의 영웅 제사 의식에 필요한 건, 연극만 남았는데…….
음, 그것도 문제없어요. 저는 관련 연극에 나오는 케레세이라의 대사를 전부 알고 있거든요. 연극만 확정되면, 나머지 배역을 캐스팅하는 것도 큰 문제는 아니에요……
팔라스, 그거 말인데, 제1신전 재건 공사의 마무리 작업 책임자로서, 의식에서 상연할 연극은 내가 정하고 싶어.
……왜 갑자기 그렇게 진지해진 거예요? 뭘 올리고 싶은데요?
《케레세이라와 이방인》.
그러니까…… 민감한 주제라 금지됐다가, 연극을 좋아하는 미노스인들이 이방인 역을 꺼려서 금지가 해제된 후에도 장기간 상영되지 않은 그 연극 말인가요……
맞아. 전통 의식에서 가장 자주 상연되던 그 고전 정극 말이야.
이방인 역은, 내가 맡을게.
……그렇게까지 자신을 욕보일 필요 없어요. 당신의 마음씨는 모두가 다 아니까요……
아니, 이건 욕보이는 게 아니야.
어젯밤 깨달았어. 이게 바로 지금 이곳에서, 사르곤인으로서 내가 마땅히 감당해야 할 책임이라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