ZT-9환상곡 '해답'
에벤홀츠는 마침내 본인의 운명을 마주하게 되고, 예상을 뛰어넘는 답을 얻게 된다. 한편, 아르투리아는 위치킹에게 마음속에 있는 이상적인 미래에 대한 답을 구한다.
프란츠, 호흡을 가다듬어라. 오리지늄 주사위가 가루가 될 거다.
그 주사위의 옛 주인, 빌레펠트는 에덴헤르 주 희대의 캐스터였다.
과거 그는 주사위 몇 개만으로 가울의 중앙 계곡에서 폭풍과 천둥을 부리며 코르시카 1세 휘하의 가장 견고한 기함을 정확히 격침했고, 순식간에 적진을 초토화했다.
사황 전쟁……
그렇다. 가슴이 설렐 정도로 아름다운 승리였지. 가울은 온전한 깃발 하나조차 남지 않았고, 패주의 비명과 승리의 함성이 끊임없이 이어져 마치 이중주처럼 성대했다.
유감스럽게도 빌레펠트는 그 후의 링고네스 공략전에서 전사했다. 그에 대한 애도이자 포상으로 나는 주사위 몇 개를 간직했고.
캐스터의 의지가 겨울의 풀처럼 바람에 나부낀다면, 어찌 폭풍과 천둥을 부릴 수 있겠나?
……
에벤홀츠는 침묵했다. 위치킹의 말투는 아주 평온했고, 심지어…… 온화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느낌은 집에서 골동품을 훔치는 아이를 우연히 발견하고, 저지한 김에 그 골동품의 유래를 설명해 주는 것 같았다.
프란츠, 떠난 지 얼마나 됐지?
……떠나?
이미 쇠약해진 금빛 선율은 밀실 안에서 출구를 찾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과 위치킹은 함께 문밖에 서 있었는데, 두 사람의 눈앞에는 가파르고 검붉은 계단이 이어져 있었다.
여기는…… 우르티카 영지의 백작 탑이군.
비세하임 사건 이후 많은 일이 벌어졌고, 에벤홀츠는 떠난 지 1년이 넘었다. 그러나 이곳만큼은 절대 잊을 수가 없었다.
이 계단이 싫은가?
피처럼 붉은 카펫, 나선 뿔 무늬가 새겨진 티끌 하나 없는 난간.
하루가 멀다고 수도에서 찾아와 눈빛을 교환하는 전달자, 그리고 때마침 구석에 서 있는 하인까지……
미안하지만, 좋아할 수가 없네.
그렇구나.
네 나이 때, 나는 한밤중에 깨어나 이 계단을 지나 당시의 가정 교사를 깨우러 간 적이 있었다.
위치킹은 한발 한발 계단을 올랐고, 발소리는 어둡고 긴 복도 멀리까지 울려 퍼졌다. 벽에 달린 석등은 차례대로 켜지며 고탑의 주인을 위해 발밑의 길을 비춰주었다.
석등은 정교한 술식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여황이 보낸 선생님은 자기 앞에서 애써 무능한 척했기에, 에벤홀츠는 심야에 아무도 없는 복도를 찾아가 몰래 연습한 적이 많았다.
에벤홀츠는 자기도 모르게 위치킹을 따라갔다. 순간, 그는 상대가 아직도 이 고탑에 살고 있고, 단지 한밤중에 볼일이 있어 다른 문 앞으로 찾아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짧은 뿔의 엘라피아가 방문을 열었지만, 나는 들어가지 않고 입구에 서서 질문만 했다.
3개월에 걸쳐, 나는 이 오래된 고탑에 소장된 634권의 악보를 모두 훑어보았다. 모두 명성이 자자한 음악가와 대단한 캐스터들의 작품이었지.
나는 모든 선율을, 심지어는 불완전하거나 연주할 수 없는 것마저도 전부 분해했다.
라이타니엔이 자랑스러워하는 이 예술에, 천 년이란 시간 동안 '우아함'과 '조화'가 축적된 이 아름다움에는 왜 경직되고 굳은 음표만 흐르고 있는 것일까?
……
나는 입구의 이 조각상을 전술판으로 향후 백 년간의 정세를 빠르게 추론해 봤다.
이베리아는 바다와 동맹을 맺을 것이고, 빅토리아의 강철 기사는 증기를 내뿜을 것이며, 진흙과 피투성이의 신발은 타향의 땅을 밟을 것이고, 가울의 아이리스는 아인발트의 깊은 숲에 만개할 것이다……
하지만 라이타니엔은 어떨 것 같나. 라이타니엔의 뿔과 이빨은 이미 빠져 버릴 정도로 쇠약해졌다. 가장 먼저 시라쿠사, 그다음은 슈투름란트…… 이끼와 좀이 고탑 구석구석을 가득 메울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자네는 어떻게 못 본 척할 수 있었나?”
“아니, 왜 모르고 있었는가?”
그 엘라피아는 잠이 덜 깬 상태였지만, 그자가 미처 닦아내지 못한 눈곱보다 더 가증스러웠던 건 그자의 오랜 침묵과 애써 감추려는 공포와 공허함이었다.
그자는 우르티카에서, 심지어 아인발트 전체에서도 가장 박식한 사람이었거늘, 단 하나의 질문도 대답하지 못했다.
그래서 너는 그 사람을 고탑에서 내쫓은 건가? 그의 가문은 그 때문에 몰락했어…… 나도 이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지.
너는, 너무나도 횡포해!
만약에, 내가 너였다면……
그 가식적인 하인들이 지하실에 숨어 몰래 술을 마신 순간부터, 그자들이 다시는 물 한 방울도 마시지 못하게 하고 목이 조금씩 찢어지는 고통을 느끼면서 죽음에 이르게 했을 것이다.
나를 쓰레기로 키우려고 했던 그 선생이 내게 오리지늄 아츠를 대충 시연했을 때, 나는 위력이 열 배, 심지어 백 배 더 강한 오리지늄 아츠로 그자의 가슴을 관통했을 것이다.
그자의 겁에 질린 표정은 조각상으로 굳히기에 아주 완벽했지.
고작 선율로 나를 조종하려는 어리석은 신하들은 오히려 내가 조종해 줬을 것이고, 그 황금색과 검은색 쌍둥이의 노골적인 갈등을 나는 충분히 이용했을 것이다……
……괜한 분풀이나 하고, 아무 이유도 없이 사람 목숨을 빼앗아버리는 주제에. 이런 악행이 네 입에서 이토록 하찮게 나올 줄이야.
'위치킹'.
계단이 존재하는 의미는 자신을 더 높은 곳으로 올려보내기 위해서다.
나도 발밑의 이 계단이 싫다. 왜냐하면 너무 짧으니까. 우르티카 백작 탑은 너무 낮고 시야가 너무 협소하다.
프란츠, 네가 이 고탑을 감옥이라 생각한다면, 너는 어떻게 그 감옥을 벗어날 것이냐?
너는 어떻게 적을 물리칠 것이냐?
그리고, 네 적은 누구냐?
……
당신은 너무 수치스러워요, 에벤홀츠.
너는 정말 가증스러워, 에벤홀츠.
당신은 참으로 불쌍해요, 에벤홀츠.
저자들이냐?
아니, 당연히 아니지.
그렇다면, '위치킹'인가?
그가 평생 너를 괴롭힌 악몽이냐?
악몽?
점점 비어가는 방 안에서 백발의 소년은 떨리는 손을 꽉 쥐어 무릎에 올려놓고는, '하늘은 맑고 푸르며'로 시작하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첼로 소리는 끝없이 펼쳐진 초원에 울려 퍼졌고, 피아노 소리는 냇물이 되어 흘렀다. 모든 피로를 씻어낸 덕분에 소년은 먼 길을 걸을 수 있었고, 에벤홀츠의 밤도 더 이상 무겁지 않았다……
에벤홀츠는 자주 이런 꿈을 꾸었다.
꿈은 원래 짧다. 그럼에도 만약 아름다웠던 과거와 엇갈려야 한다면, 그는 차라리 영원히 잠들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너 같은 건 꿈에서 본 적도 없어.
기억인가?
기억?
《위치킹 탑의 전복》, 《금빛 달의 승리: 쌍둥이 탑 초장》……
전국 각지 극장에서 분기마다 반드시 상연하는 지정 레퍼토리다. 이것들의 주제는 대개 비슷하다. 그리고 폭군의 고향인 우르티카 영지에서는 관련 레퍼토리가 배로 상연된다.
그리고 우르티카 백작으로서 그는 어떤 공연에도 결석하면 안 된다고 강요받았다.
몇 번이고 그는 무대 아래에서 위치킹이 정의의 이중주 속에서 멸망하는 걸 봐야만 했고, 또 가장 먼저 일어나 손뼉을 쳐야만 했다.
거리의 조각상.
화집의 삽화.
……
자신은 수많은 '위치킹'을 만났었다.
그들의 나선 뿔은 하나같이 괴이한 빛을 띠고 있었고, 심지어 그 목소리에는 사람을 현혹하는 사악한 아츠가 들어 있어 묘한 떨림마저 띠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쉽게 화를 냈고 잔인했으며, 날카로운 송곳니로 피를 빨아들였다. 그리고 가면 아래의 표정은 사납고 흉포했다.
어느 하나도, 그 어떤 모습도 지금 눈앞의 이 인물과 일치하지 않았다.
평범한 자들은 야망을 장식해야 하고, 욕망을 분출해야 하며, 원한을 해소해야 한다.
그리고 너, 프란츠.
운명을 가린 그림자가 클수록 네 실패의 근거도 더해진다.
너희들은 원인 규명을 좋아하고, 너희들은 모두 '위치킹'을 상상하고 있다.
상상?
그 잔혹한 법령, 공포의 실험, 난무하는 전쟁, 너 때문에 일어난 온갖 고난, 수많은 무고한 희생, 이 모든 것들이 너와의 관계가 단지…… 상상이라고?
우리는 지금 네 얘기를 하고 있다, 프란츠. 너는 단 한 번도 네가 말한 그 고난을 겪은 자들을 대표한 적이 없다.
……
갑자기 두통이 찾아왔다. 그 통증은 머릿속에서 속세의 음이 요동쳤던 그 모든 밤과 똑같았다.
그 밤마다 에벤홀츠는 필사적으로 플루트를 움켜쥐는 수밖에 없었다. 만약 죽게 된다면 최후의 힘을 다해서라도 눈앞의 녀석을 저주하겠다고…… 그렇게 차츰 정신이 들 때까지.
하지만 속세의 음은 이미 사라지고 없는데 왜 통증은 여전히 그림자처럼 따라다닐까?
에벤홀츠는 자신의 충혈된 눈을 볼 수 없었지만, 시야에 들오는 그 핏빛의 그물은 갈수록 무거워졌다.
고통은 모든 기억을 어지럽혔고 모든 감정을 찢어 버렸다. 마치 모든 것이 머릿속을 빠져나와 형태가 있는 사물이 되려는 것처럼.
악몽. 기억. 상상.
길다고 할 수 없는 네 인생을 되돌아보라.
자신을 끈질기게 괴롭혔던 그 이름을, 지워 버릴 수 없는 그 낙인을 무수히 저주했을 때……
너는 공허와 거울을 마주할 수밖에 없던 게 아닌가?
……
……!
위치킹은 이미 죽었어.
네가 태어나기 훨씬 전에, 23년 전 그날 밤에. 그 죽음은 틀림없는 사실이야.
죽은 인간을 적으로 생각하는 건 아무런 의미도 없어.
어린 시절의 그 끔찍한 실험, 평생 떨쳐낼 수 없는 그 고통, 소위 '대리인'이나 '시종'의 차가운 시선과 비웃음, 타인의 비난과 질책…… 설마 아직도 그것들을 마음에 담고 있는 건가?
아니. 너는 분명 알고 있을 거야. 내가 잃은 것에 비하면 이딴 건 보잘 것도 없어.
맞아, 너는 전혀 신경 쓰지도 않지. 너는 확실히 그 사람에 대한 약속을 이행하고 있어. 너는 모든 걸 짊어진 채 긴긴밤을 걸을 준비가 되어 있어.
다만 에벤홀츠, 그렇게 오래 지났는데 왜 너는 여전히 고통받고 있는 걸까?
난……
벌을 받는다고 해방되는 게 아니야.
왜 너는 항상 마지막 순간에 남에게 보호받는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지?
왜 너는 계속 자신 때문에 비롯된 희생을 털어버리지 못하지?
왜 너는 늘 자신의 벌에 빠져 진정으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지?
앞에 더 소중한 부탁, 더 큰 희생, 더 깊은 유감과 더 긴 고통이 있을까 봐?
너는 의심하지 않을 수 없고, 두려워하지 않을 수도 없어.
그렇다면 에벤홀츠, 네 적은 도대체 누구지?
하지만 에벤홀츠, 빛을 향해 나아가지 않는다면, 우리는 영원히 그 밤에서 벗어날 수 없어요.
그리고 밤은 애초에 의미가 없고요.
……밤은 애초에 의미가 없는 건가.
훌륭하구나, 프란츠.
너는 네 적을 이겼다. 자신을 가둔 고탑에서 벗어났다.
위치킹이 손을 흔들자, 금빛 선율은 드디어 해방된 듯 문밖으로 쏟아져 나와, 마치 무해한 반딧불처럼 역사의 강에서 조용히 빠져나갔다.
그것들은 천천히 에벤홀츠의 곁을 지나며 옷과 머리카락을 스쳤다. 그 감촉은 너무나도 부드러웠다.
그 감촉은 마치…… 위치킹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것 같았다. 에벤홀츠는 갑자기 이 상황이 너무 웃겼다.
풉……
……
에벤홀츠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하하하! 내가 온갖 고생 끝에 이 '기원의 뿔'에 왔는데, 결국은 위치킹 폐하에게…… 칭찬을 받은 건가?
에벤홀츠는 자신이 본 것을 비웃었고, 자신의 낭패스러움을 비웃었다. 지난 19년 동안 그는 한 번도 이렇게 크게 웃은 적이 없었다.
설령 다음 순간에 분노의 천둥이 자신의 추태를 벌한다 해도, 두통이 다시 자신을 심연으로 끌고 들어간다 해도, 아니, 자신을 가루로 만들어 버린다 해도 그는 이렇게 웃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끝없는 나선계단, 우르티카의 고탑, 심지어 위치킹까지 모든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고, 눈앞에는 텅 빈 옥좌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에벤홀츠는 갑자기 입을 다물고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렇게 넋이 나간 듯 옥좌 앞에 서서 그 진실하지 않은 감촉이 완전히 사라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
충분히 구경했겠군, 산크타.
……
그의 웃음소리에서 저는 낙담과…… 해방을 느꼈습니다.
'등장인물'은 드디어 자신이 경험한 모든 걸 직시할 수 있게 됐고, 그게 대본이든 인생이든 중요하지 않게 됐어요.
만약 새로운 목표를 찾을 수 있다면, 그는 절대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너는?
심지어 너는 프레몬트보다도 먼저, 최초로 내 '파빌리온'에 들어온 인물이다.
(라이타니엔어) '파빌리온'…… 궁전.
율리아 씨한테 감사해야죠. 덕분에 그 모습을 엿볼 수 있었으니.
당신은 라이타니엔이 자랑스러워하는 모든 걸 이곳에 재현했죠. 천 년의 역사를 이은 고탑, 오랜 세월 동안 축적된 지식과 예술, 그리고 힘. 시간에 따라 사라질 일은 영원히 없겠네요.
여긴 확실히 가장 독특한 궁전이고, 인간의 힘으로는 절대 미치지 못하는 광대한 공정이긴 하죠.
……
사실 저는 더 오래전부터 추측하고 있었어요.
군인, 화가, 학자, 조율사까지…… 저는 직접 '위치킹의 죽음'을 목격한 모든 사람을 만났어요.
그날 밤은 그들의 인생에서 가장 깊은 낙인이 되었죠. 그들은 그 사건에 말려들어 시대와 자아의 깊은 딜레마에 빠졌고요.
그들을 통해 저는 당신이 속세에 남긴 마지막 선율을 복원했습니다.
시끄럽고 난해하며 현실의 음악 이론으론 도저히 해독할 수 없었어요…… 그 선율은 당신의 신도들이 기대하는 유산을 가리키는 선율이 절대 아닙니다.
……그것들은 원래 이 세상을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니니까요.
라이타니엔 사람들이 고생 끝에 수집한 다양한 여음은 눈앞의 이 궁전의 벽돌에 불과하고, 당신이 남긴 또 다른 소모품에 불과하죠.
그것들은 언젠가는 사람들에게 주워질 것이다. 하지만 그것의 올바른 용도는 누가 알고 있겠나?
명예, 영욕, 부, 개인, 가족, 계급…… 이런 천박한 '모티브'가 대지의 모든 악장을 관통하고 있다.
음악에 포함된 의미는 언제나 이렇게 협소하지.
……
하지만 산크타, 너는 그 어리석은 신하들과는 다르다. 너는 이른바 신성한 도시에서 왔고, 라이타니엔의 과거와 미래에도 관심이 없다.
너는 리치도 아니고, 프레몬트와 길을 달리해 그동안 황역의 존재 자체도 몰랐을 것이다.
그렇다면, 너는 왜 여기까지 온 것이냐?
제가 여기까지 온 이유를 설명하기 전에, 한 가지 확인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지금의 당신은 그저 죽은 후에도 떨리는 한 가닥의 소리에 불과한, 주관적인 감정에 칠해진 덧없는 집합체이자 무수한 의식 조각 중의 하나인가요……
아니면 온전한 위치킹인가요?
저는 당신을 연주하고 싶었어요……
소리의 물리적인 규칙은 황역에서 실현될 수 없다.
하지만 내가 있는 곳은 황역의 규칙을 인정하지 않는다.
소리를 잃은 건 네 자신의 한계일 뿐, 파빌리온과는 무관하다.
……
음악은 너의 눈, 너의 귀, 너의 심장이자…… 너의 모든 것이다.
너는 모든 감각을 잃었다고 생각하지만, 갈망은 더욱 강렬하다. 너는 지루하지만, 또 흥미롭기도 한 알현자구나.
……
아르투리아는 손에 든 첼로를 내려놓고 위치킹을 바라보았다.
그가 보낸 일생과 아직도 마주하고 있는 모든 것, 그리고 그의 감정과 생각이 공간 전체에 메아리치며 모든 틈을 일일이 메우고 있었다. 이곳은 그가 직접 지은 궁궐이나 다름없었다.
그저 여기 들어와서 그가 본 것을 보았을 뿐이다.
아르투리아는 전에 리치의 기억 속에서 보았던 '검은색'이 떠올랐다.
끝없는 '검은색', 또는…… '혼돈'.
사람들이 이 단어에 대한 인식은 종종 그와 관련된 다양한 부정적인 감정에서 비롯된다. 불안, 무지, 슬픔, 초조, 공포……
그것이 실제로 가리키는 것은 통상적으로 형언하기 어려운 상태, 또는 확증할 수 없는 객체나 개념이다.
하지만 지금, 유독 이 단어만큼은 아르투리아 눈앞의 광경을 정확하게 설명해 주었다.
황폐. 실재가 파멸하는 땅.
물질세계의 뒷면, 벡터가 몰락하는 협각.
눈에 보이는 경계도 없고 구분할 수 있는 방향도 없다. 소리도, 빛도, 형태도, 색깔도……
서로 다른 차원의 사물이 뒤섞이고 쌓이고 퍼져나가 사악한 생명과 환경이 서로의 몸을 이룬다.
파멸, 오직 이것만이 이 환경에서의 유일한 생태계다.
그리고 '혼돈'이 위치킹의 궁전을 둘러싸고 있다. 마치 햇빛과 공기가…… 건드리기만 해도 터질 것 같은 기포를 둘러싼 것처럼.
위치킹의 탑은 궁전 정중앙에 있었고, 벽돌 틈에서 자란 이끼처럼 탑의 뿌리에서는 오리지늄 결정이 자라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이끼는 궁전 전체에 잔뜩 뒤덮여 있었고, 언뜻 불규칙해 보이는 고탑과 다른 건물들을 연결하며 어떠한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혼돈은 마치 안개처럼 가장 바깥쪽의 고탑들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그리고 안개가 걷히자 비엔 시계탑과 쇤브룬 탑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궁전은 눈에 보일 정도로 조금씩 비어갔다. 그러나 그 경계는 이미 정해진 규칙처럼 계속 거기에 존재했다.
나의 캐스터여, 나의 악사여! 이 천둥과 모래폭풍을 거부하지 마라. 예전에 가울의 전함을 파괴했듯이, 이 혼돈 또한 막아낼 수 있을 것이다!
천상과 재이가 합주에 더해질 것이고, 오리지늄은 새로운 맥락을 형성해 줄 것이다. 그대들의 몸과 의식은 악기, 부호와 선, 군진의 일부가 될 것이다!
갈라진 틈을 메우고 전선을 봉합하라!
황역은 이해할 수 없고, 데몬은 잡을 수 없다 하였는가? 무능함은 겁에서 비롯된 것이다. 분석한 모든 정보를 고탑으로 전송하라!
저항하고, 이해하고, 정복하라! '라이타니엔'의 이름으로!
우리 생명의 현을 울리게 하라! 그 현이 끊어질 때까지!
캐스터의 왕은 여전히 옥좌에 우뚝 서 있었고, 모든 고탑이 그의 지휘를 따랐다. 국가의 건설과 전쟁의 공방이 동시에 발생했다. 예전의 라이타니엔처럼.
끝없는 혼돈 속에서 위치킹이야말로 유일하게 이해할 수 있는 질서였다.
당신의 적은 이토록 무섭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군요.
'라이타니엔', 이것이 당신의 죽음조차도 멸망시킬 수 없는, 일관되고 변함없는 당신이 이루어야 할 일인가요?
……
하지만 프레몬트 씨가 예측한 것처럼, 당신의 궁전은 지금 돌이킬 수 없는 붕괴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아쉽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만약 자신이 포악한 군주가 되지 않았다면, 정변을 일으킨 군대가 고탑에 진입하지 못했다면, 죽음이 황역에 대한 자신의 연구를 중단하지 않았다면……
당신에겐 혼돈에도 흔들리지 않도록 이 궁전을 충분히 보강할 시간이 있지 않았을까요?
당신은 의심이 들지 않나요? 만약 자신이 위치킹이 아니고, 라이타니엔의 정점에 서지도 않았다면……
당신은 일반인이 범접도 할 수 없는 아츠와 지혜를 장악해, 현실을 초월한 황역 속에서 자신만의 고탑을 세울 수 있지 않았을까요?
……
네 질문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산크타.
나는 망설이지도 의심하지도 않는다.
나는 악마도 두렵지 않고, 악마가 되는 것도 두렵지 않다.
그렇다면 위치킹 폐하, 저는 답을 구하러 왔습니다.
답을 구해? 나한테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아주 오랜만이다.
저는 당신에게, 익히 알려진 가장 강한 마음에 어떤 미래의 가능성을 구하고 싶습니다.
이상적인 미래를.
뭘 멍하니 서 있어? 충격이 너무 커서 머리가 잘못됐나?
……그러는 그쪽은?
오히려 반문을 하는군? 새끼 양아, 그 당돌함은 여전하구나.
당신도 그를 만났겠지? 이겼나?
……이겼냐고?
이 시궁창 같은 곳이라면, 그 녀석과 천 번을 싸우고 만 번은 다투고도 남지.
내가 어떻게 메아리를, 이미 죽은 자를 죽일 수 있겠나?
……그럼, 이만 가지.
간다고? 허허, 정말 그대로 떠날 건가? 얼마나 많은 고생 끝에 겨우 여기까지 왔고, 이 옥좌 앞에 도착했는데?
여기까지 왔어, 그리고 봤지.
옥좌는 비어 있었어.
……탑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이 괴상한, 일그러진, 곳곳에 위기가 도사리는 공간이…… 여전히 수많은 사람의 머리 위에 걸려 있어.
당신은 가장 강한 리치잖아. 그러니까 알려 줘. 이제 어떻게 해야 되지?
어떻게 해야…… 이 '기원의 탑'을 다시 무너뜨릴 수 있지?
……
방법은 단 하나…… 23년 전과 똑같은 방법뿐이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노을인가.
리젤로테, 또 여기 숨어 있네.
선제후의 사절들과 같이 있기 싫어서 말이야.
그들은 항상 우리 앞에서 대놓고 전후의 일에 대해 거침없이 말하잖아. 꼭 우리가 죽은 것처럼 말이지.
프레몬트도 말했듯이, 우리가 결전에서 살아남을 확률은 10분의 1도 안 돼.
우리가 태어난 그날부터, 실험 결과가 그 노친네들의 예상을 넘지 못한 적이 있었나?
헤르쿤프트쇼른과의 전투는 실험이 아니야. 기회는 딱 한 번뿐이고.
그렇다면 그 기회를 더더욱 놓치지 말아야지.
우리 몸에는 헤르쿤프트쇼른의 술식과 가울의 기술, 그리고 리치의 축복이 있잖아.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그 누구보다도 완벽하고 강해.
하지만 우리도 죽어. 그들이 우리를 불사의 무기로 만든 건 아니야.
그들은 우리에게 인간의 몸과 감정을 주었고, 그들처럼 태어나자마자 종점을 향해 달려가도록 만들었어.
즐거운 일이나 생각하자. 힐데가르트…… 우리가 정말 헤르쿤프트쇼른을 죽인다면, 넌 뭘 하고 싶어?
……
말 안 해도 알아. 너는 '자유'를 원해. 그동안 네가 검을 들었던 건, 전부 그 이유 때문이었으니.
너는 진작부터 우리를 사람 취급하지 않는 대귀족들을 견딜 수 없었지.
그러면 넌?
알고 있을 텐데. 너보다 나에 대해 더 잘 아는 사람이 또 있을까?
……곧 해가 질 거야.
곧, 모든 구름이…… 마지막 한 줄기의 금빛을 잃게 되겠지.
한시라도 빨리 '기원의 뿔'을 파괴해야 해.
포기한 거야?
네가 리치와 손잡은 건, 그걸 이용해서 헤르쿤프트쇼른의 마지막 힘을 얻기 위한 거 아니었어?
……통제 가능한 힘은 라이타니엔의 가장 날카로운 검이 될 것이다.
하지만 나와 프레몬트가 수많은 방법을 시도해 봤지만, 그 공간에 들어가진 못했다.
진짜 웃긴단 말이지. 결국 통로를 연 게…… 한 외부인일 줄이야.
그 동기가 무엇이든, 우리한테 오히려 기회를 준 셈이지.
나는 그 미지의 위협이 계속 라이타니엔 머리 위에 있는 걸 용납할 수 없다. 물론, 나도 그게 더 안전하고 은밀하게 강림하길 원했지만. 이렇게 된 이상 이제는 처리할 수밖에 없어.
결정을 내리셨다면 리치가 위치킹의 옥좌로 통하는 길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젊은 리치여, 계속 옆에 있던 것이냐?
라이타니엔의 '영원한 은총'이시여, 오해하지 마십시오. 저는 그저 별 볼 일 없는 일개 전달자일 뿐입니다. 저를 죽여봤자 바람에 흩날리는 한 가닥의 실밖에 얻을 수 없을 겁니다.
선생님에게서 소식이 도착했습니다. 현재 '기원의 뿔' 내부에 있다고 하네요.
당신과 '무자비한 권위'가 다시 힘을 합쳐 헤르쿤프트쇼른의 힘을 섬멸해야만 츠빌링슈튀르메를 뒤덮은 먹구름을 몰아낼 수 있습니다.
좋아.
그런데 선생님께서 '기원의 뿔'은 당신과 선생님이 예상했던 대로 매우 불안정하다고 합니다.
헤르쿤프트쇼른의 힘이 사라지면 이 공허 속의 탑도 무너질 겁니다. 현실과 황역 사이의 이 틈이 사라지면, 더 심각한 재난이 발생할지도 모릅니다.
물론, 결과적으로 당신들의 선택이 라이타니엔의 운명을 결정하겠지만요…… 언제나처럼 말이죠.
……정말 딱 한 가닥의 실이구나.
리치들은 항상 바람처럼 왔다가 사라져. 얄미울 정도로 자유롭다니까.
미하엘.
예.
방금 그 리치를 찾아라. 그리고 프레몬트가 키운 젊은이도.
전력을 다해 극장에 있는 사람들을 지켜라. 만약에……
만약이란 없습니다! 그리마흐트와 에비게그나데는 반드시 승리하고 돌아올 겁니다!
다시 한번 말해 봐라. 우리의 사명이 뭐지?
……라이타니엔의 모든 위협을 그 시작에서부터 잘라내는 것입니다!
그래. 게사츠슈베이터도 준비됐다. 명심해라, 네 튜브 소리가 곧 내 명령이다. 시간이 돼도 새로운 명령이 없다면 그들은 움직일 것이다.
그리마흐트……
가라.
……네!
리젤로테, 우리도 가자.
리치와 선제후는 늘 라이타니엔의 운명을 운운하지만, 그럼 우리의 운명은?
우리는 여기…… 라이타니엔의 가장 높은 두 탑에 20년 넘게 서 있었어.
라이타니엔은 정말 우리의 것일까? 아니면 우리는 아직도 검과 방패가 담긴, 라이타니엔의 운명을 짊어지기 위해 선택된 그릇일 뿐일까?
그건 눈앞의 문제를 해결하고 얘기하자.
……그 말은, 수도 없이 들었어.
우리의 연주는 여전히 호흡이 잘 맞아.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타고났어. 안 그래? 연주가 시작되면 우리는 서로에게 맞춰. 그게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고.
언제든 우리는 마음이 통하니까.
……맞아.
난 우리가 다시 한번 라이타니엔을 위해 승리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하지만…… 넌 언젠가는 나를 마주해야 하고, 대답해야 할 거야.
힐데가르트, 우리가 다시 헤르쿤프트쇼른을 죽이면, 넌 뭘 하고 싶어?
네가 이렇게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라이타니엔에 가져다주고 싶은 미래는, 도대체 어떤 거야?
(날카로운 잡음)
……하, 점점 더 많아지네.
당신은 '여음'을 죽일 수 없어요. 그들은 이미 죽었으니까요. 게다가 다른 공간에서 계속 나오고 있죠.
쌍둥이가 '기원의 뿔'에 들어갈 거예요. 이제부터 공간의 흔들림은 더 심해질 거니까, 실로 '기원의 뿔'을 단단히 잡아 둬야 해요.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가 봐. 그건 리치만이 할 수 있는 일이잖아.
나도 할아버지와 에벤홀츠의 퇴로를 지켜야 해.
저 시커먼 것들을 막아야만…… 나머지 사람이 안전할 수 있고, '기원의 뿔'에 들어간 사람들이 무사히 돌아올 수 있어.
상처라도 꿰매 줄까요?
필요 없어. 통증은…… 의식을 유지하게 해주니까.
깜빡할 뻔했네요. 당신은 그 재능 덕분에 소음의 방해를 받지 않는 거였죠.
극장에 있는 다른 라이타니엔인들과는 달리…… 그들은 대부분 변조한 귈데네스게사츠에 이미 빠져버렸어요.
뭐, 차라리 다행이에요. 만약 그들이 사후의 땅에서 온 이 잡음을 들었으면 아마 정신이 무너졌을 테니까요.
게사츠슈베이터와 쌍둥이 여황이 최대한 선율을 엮어서 사람들의 마음을 유지하고 있을 거야.
여황이 연주를 멈추고 '기원의 뿔'에 들어가면 남는 건 게사츠슈베이터뿐이지.
그들의 아츠는 확실히 강하죠. 하지만 아츠는 아츠일 뿐, 공허의 혼돈에는 대항하기 어려울 거예요.
당신도 마찬가지고요, 레싱.
당신의 몸과 의지가 이대로 계속 소모돼선 안 돼요. 게다가 피마저 다 흘리고 말 거예요.
……결국 나는 불사의 리치가 아니라는 말이 하고 싶은 거야?
리치가 뭐 어때서요?
우리는 리치이기 때문에 혼돈이 절대적이라는 걸 잘 알고 있는 거예요. 마치 지식에는 끝이 없는 것처럼요.
그럼 우린…… 또 어떻게 해야 하는데?
자신의 하찮음과 무력함을 인정하고, 아무것도 안 하면서 더 강한 힘에 짓눌릴 때까지, 네가 말한 혼돈에 삼켜질 때까지 기다려야만 해?
난 그렇게 못해.
차라리 죽음의 권리를 내 손에 쥐고, 마지막 한 방울의 피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쓰러지는 게 낫지.
정말…… 고집스럽군요.
몇 년 전, 선생님이 당신을 헌병대로부터 구했을 때, 우리는 당신이 곧 죽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때는 그렇게 작고 말랐으며…… 나약했는데. 마치 실에 닿아도 금방 부서질 것처럼.
하지만 당신은 살아남았어요. 상처투성이인 몸으로, 선생님의 고약한 성격마저 닮아가면서요.
……고마워.
너희들 덕분에 내가 살아남은 거야. 마치…… 리치가 지난 세월 동안 라이타니엔을 도운 것처럼.
쌍둥이가 움직였어요. 저도 다른 리치한테 가야겠어요.
레싱, 내 엉뚱한 동생이여…… 바람 속에서 당신의 목소리를 귀담아들을게요.
제 실이 포착한 게 당신이 죽기 전의 탄식이 아니길 바랄게요.
(우렁찬 잡음)
이미 죽은 자는 아픔도 피로도 모른다.
그들은 끊임없이 현실과 혼돈의 틈에서 쏟아져 나와 살아생전에 냈던 마지막 울부짖음을 반복하고 있었다.
악장이 사라지고…… 남은 건 너희들의 소음뿐인가?
정말로, 귀에 거슬려.
레싱은 검을 휘감았던 천을 천천히 풀었다.
천은 귀를 막을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길었다.
하지만 레싱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랫동안의 괴로운 단련으로, 레싱은 모든 신경을 검날에 집중하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라이타니엔의 악장은 우리 모두의 손으로 다시 쓴다.
그전까지는…… 그냥 싸울 뿐이야.
승부나 생사 따위를 고민할 필요는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