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W-ST-1짙은 먹구름
로켄은 감옥에서 나오고 퍼디낸드가 돌아온다. 오올헤약과 뮤엘시스는 다시금 맞붙게 되고, 켈시가 가담하며 하늘에서 유성이 떨어진다. 곧 트리마운츠에 비가 내린다.
“천년만년이 흐른 뒤, 인간이 뭇별의 곁을 거닐게 되는 때가 온다면, 사람들은 필시 그녀의 이름을 칭송하리라.”
소녀는 그루터기에 앉아 흥얼거리며 구름의 모양을 관찰하고 있었다. 어머니가 부르자 소녀는 그제야 폴짝거리며 뛰어갔다.
곧 시작할 저공비행은 부모님에게 매우 익숙한 일이었다. 그게 아니면 소녀를 데려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고글을 쓰고 안전띠를 매자 엔진의 굉음과 함께 비행체는 활주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얼굴을 스쳐 가는 바람은 점점 거세졌고, 겁에 질린 소녀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뒤이어, 몸이 가벼워지고 속이 뒤집히는 듯한 느낌이 목구멍까지 차오르자, 잔뜩 겁이 난 소녀는 어머니의 품에 꽉 안겼다.
다행히 그 느낌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비행체가 안정감을 되찾자 소녀도 차츰 긴장을 풀었다.
그래도 아직 두 눈은 뜰 수 없었다……
어머니가 가볍게 소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제야 소녀는 용기를 내어 눈을 뜨고 주위를 바라보았다.
줄곧 살아온 도시가 이렇게도 낯설고 신기할 수가 없었다. 평소 뚫고 지나갈 수조차 없었던 인파마저도 벌레처럼 작아 보였다.
어머니가 위를 가리키자 소녀는 고개를 들었다.
그 하늘은, 너무나도 밝았다.
1099년, 컬럼비아, 맥스 컬럼비아 특별구 교외,
연방 이동감옥
선생님,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군요.
네? 딱히 문제는 없는데요.
아니요. 제 눈에는 다 보입니다. 과음에 폭식에 불면증까지. 이 답답한 감옥에서 정상적인 생활을 할 리가 없잖습니까?
……하, 그렇긴 하죠.
하하, 악의는 없었습니다.
아무래도 요양을 떠나시는 게 좋겠네요. 시에스타에는 가 보셨습니까? 미노스는요?
농담도 심하시군요.
농담 같은 게 아니라, 선생님을 초대하려는 겁니다. 심심풀이한다 생각하고 하나 골라 보세요.
……미노스요.
미노스라…… 거리에는 특유의 과일 향이 상쾌한 바람을 타고 벽을 스쳐 지나가죠. 더 중요한 건, 미노스 미인들의 내면으로부터 나오는 우아한 기품이 당신을 돌아가고 싶지 않게 만들 겁니다……
네, 네. 당신이 얼마나 호사스러운 생활을 하는지는 잘 알겠군요. 참으로 부럽긴 합니다만……
아니요, 제 말은 제가 다 준비해뒀다는 겁니다. '당신을 위해서요'.
……그게 무슨 말이죠?
당신의 병은 좋은 환경에서만 나을 수 있습니다. 절 위해 여러모로 애써주셨으니 당연히 제가 잘 대접해야죠.
몇 달만 지내면 암울한 마음이 싹 사라질 겁니다. 미노스의 장인처럼 몸도 좋아질 테고, 게다가 아름다운 만남도 가질 수……
……저스틴 피츠로이 씨, 다시 말하지만 전 아프지 않습니다. 그러니 농담은 그만하세요.
그냥 저스틴이라고 불러주세요.
그래요…… 저스틴 씨. 라인 랩은 비즈니스과 사람들도 의술에 뛰어납니까?
아니요, 전 하나도 모릅니다. 그런 복잡하고 효과도 즉시 나타나지 않는 것에 누가 관심이 있겠어요?
그런데 왜……
본인이 대체 어떤 병을 얻은 건지, 그리고 누가 이런 병을 옮긴 건지 궁금하시겠죠.
주위를 둘러보세요. 그리고 한 번 생각해 보세요……
당신의 상사, 혹은 매몰차기만 하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판사, 그리고 은퇴했음에도 당신을 아니꼽게 바라보는 전 교도소장까지……
원래라면 당신은 퇴역하고 모두의 주목을 받는 개척 영웅이 되어, 아무리 못해도 정부의 보조금을 받으며 이동도시의 별장에서 걱정 없이 삶을 즐겼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떻죠?
저, 저를 뒷조사한 겁니까?
이건 대증요법이라고 합니다. 제가 봤을 땐……
……당신의 병세는 많이 심각합니다.
……
그리고 제가 당신을 위해 드릴 수 있는 처방은 휴가, 별장, 맛 좋은 술과 아름다운 미인, 그리고 절대적인 보안 서비스라는 거죠.
이…… 이해가 안 되네요. 당신은 오늘 그 녀석을 데리러 온 거 아닌가요?
여기까지 순조롭게 온 걸 보면 라인 랩에서 이미 윗선과 얘기를 다 끝냈다는 건데……
굳이 저를 지금 매수한다고 무슨 이득이 있습니까?
그전에 먼저 대답해 보시죠. 선생님은 자신의 운명을 본인 손에 쥐고 싶지 않나요?
하, 누군들 안 그러겠습니까?
그렇죠. 그래서 선생님은 불행하지만, 또 운이 좋다는 겁니다. 적어도 자신을 막은 장애물과 곤경이 뭔지 알고 있으니까요. 선생님은 줄곧 누군가의 밑에서 일하며 무시당해서 여기까지 좌천됐죠.
또한, 선생님이 그토록 원하는 프러포즈도 이번 일정으로 미뤄지게 됐잖아요, 맞죠? 하아, 미노스의 평원이라면 프러포즈 성공률이 얼마나 더 높아질까요.
아…… 그렇죠…… 하하.
제가 뭘 하면 됩니까? 저스틴 씨.
아주 간단합니다. 감옥의 '특별 절차'에 관한 모든 정보를 라인 랩에 팔아주세요. 제가 정신이 아찔해질 만한 가격을 제시하겠습니다.
그…… 그건 어렵지 않지만……
누군가 당신에게 죄를 물을까 걱정입니까? 그래서 선수 치는 게 유리하다는 겁니다.
솔직히, 당신 위에 있는 그 노친네는 욕심이 너무 많아요. 오늘 일을 성사하려고 제가 예산을 2배나 썼단 말이죠…… 그런데도 그 인간들은 점점 더 거만해지니, 그냥 둘 순 없죠.
게다가 그 멍청이들은 절대 자기 처지를 직시하지 않습니다. 본인들이 무슨 우르수스나 라이타니엔의 귀족이라도 된다고 생각하는 걸까요? 후훗.
저는 당신처럼 실속 있는 사람을 더 좋아합니다. 라인 랩도 당신을 더 마음에 들어 하죠.
그러니까, 당신은 이번 일로 상당한 부를 얻게 될 겁니다. 그리고 저와 함께 그 늙은 고집쟁이들을 싹 다 감옥에 처넣어 쓸쓸한 여생을 보내게 하자는 거죠.
얼마나 멋진 일입니까?
저더러 배신하라는 겁니까……?!
저는…… 아, 잠시만요.
누구지, 이 진지한 타이밍에. 음, 은행 메일? 갚을 건 다 갚았는데……
허억!
……저스틴 씨, 이 돈은 뭐죠?
제가 말씀 안 드렸나요? 하하,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전 의사가 되기는 글렀군요. 이건 당신의 첫 번째 치료 과정입니다.
이렇게나 많이……
당신의 병에 대한 특효약은 바로…… '권력과 부'입니다.
효과는 백 프로 장담합니다…… 라인 랩의 이름으로.
……알겠습니다.
저스틴 씨,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그럼요, 저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궁금한 게 있습니다만, 라인 랩은 모두 당신 같은 사람들입니까?
네? 아니요…… 각양각색의 괴짜들이 많습니다. 뭐, 저도 괴짜를 싫어하지는 않지만요.
이를테면, 오늘 제가 찾아온 그 사람처럼요.
준비됐습니다. 들어가시죠.
아, 네. 이렇게 큰 공을 들인 덕에, 드디어 그 유명한 괴짜를 만나보게 되는군요.
아까 얘기는 잊지 마세요. 다음 달에 트리마운츠에서 파티를 열 건데, 부디 참석해 주시길 바랍니다…… 선생님은 제 귀빈이시니 초대장 따위는 필요 없습니다.
부모님 장례식 날, 소녀는 한가운데 서 있었고 주위에는 사람들이 분주히 오갔다.
그녀가 알기도 모르기도 하는 사람들이 부모님 사진 앞에서 조문했다.
과학 잡지 편집장, 정부 요원, 금융계의 전설 같은 창업자, 과학기술 회사 대표……
그들은 안타까워 했다. 과학계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었으나,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난 천재 발명가 부부를.
그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획기적인 공중 비행 수송 기술이 막 걸음마를 떼기 시작한 때에, 왜 굳이 '비행 한계 고도를 한층 더 초월' 한다는 의미 없는 일에 힘을 쏟았는지.
그들은 분통을 터뜨렸다. 라이트 부부를 믿었다가 현재는 웃음거리가 돼버린 정부의 계획과 수포가 된 거액의 투자에.
......
모든 조문객이 떠나고 홀로 부모님 묘지 앞에 남은 소녀는 고개를 들었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
그 하늘은, 무척이나 어두웠다.
눈 부신 빛이 눈을 찔렀다.
통로의 어둠을 뚫고 쏟아지는 뜬금없는 밝은 빛에 저스틴 피츠로이는 눈을 뜰 수가 없었다.
휘황찬란한 실험실, 트리마운츠의 실험실과 똑같았다.
두 걸음 앞으로 내디딘 저스틴의 눈길은 자신도 모르게 광택이 날 정도로 깨끗하게 닦은 장비에 사로잡혔다.
“단 한 사람의 특권을 위해서, 대체 돈을 얼마나 쓴 거지?”
빛이 닿지 않는 실험실 깊숙한 곳, 얼굴이 안 보이는 한 노인이 본인처럼 오래된 라디오를 듣고 있었다.
……하하. 여기가, 이런 곳이 감옥이라는 건가요?
*컬럼비아 비속어*, 크리스틴이 당신을 위해 여기다 단독 실험실을 차린 겁니까?
상당히 높은 평가를 받고 있나 보군요, 30번 죄수 씨.
자넨 그 연락원이 아니군. 하지만 그 얼굴은 본 적이 있네.
라인 랩의 주임인가?
심히 가슴 아프군요. 회사가 단시간에 이렇게 클 수 있었던 건, 제 몫도 작지 않을 텐데, 정작 크리스틴은 제 소개를 안 했나 보죠?
난 자네 같은 사람에게 관심 없네. 더군다나 난 병든 노인네일 뿐이거늘, 대체 무슨 일로 찾아온 거지?
……그렇게 말하면 섭섭하죠.
제가 당신의 파일을 읽어봤습니다만, 전에는 아주 대단한 사람이었더군요. 그 사건만 아니었……
쿨럭…… 쿨럭, 쿨럭……
미안하네. 과거 일엔 좀 예민해서.
이런…… 그런가요.
그런데 정말 궁금하네요. 크리스틴은 뭘 바라길래 당신한테 이렇게까지 신경을 쓰는 걸까요?
자네한테 말하지 않았다는 건…… 쿨럭…… 알 필요가 없다는 뜻이겠지.
아이고, 그럼요. 제가 당신 같은 괴짜 과학자들의 비아냥을 들은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요.
아무튼, 제 임무는 당신을 데려가는 겁니다. 크리스틴이 당신을 부르는 걸 보니 슬슬 다음 단계를 진행할 차례인가 보네요.
'생명 유지 계획' 말이죠.
……다 알고 있으면서, 참 능글맞군.
다른 건 몰라도, 크리스틴이 당신에게 오리지늄과 인체에 관한 연구를 시키고 있다는 건 저도 알고 있어요.
전문가는 아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라인 랩의 총괄은 절대 죽음을 두려워하는 겁쟁이가 아니라는 거죠. 고쳐야 할 질병에 걸리지도 않았고요.
그렇다면 생명 연장이 필요한 절박한 이유가 있을 겁니다…… 예를 들면, 어떤 극단적인 상황을 상정하고 있다던가 말이죠.
아주 똑똑하군 그래…… 그래서 크리스틴이 날 데려갈 사람으로 자네를 선택했나 보군.
하지만 일단 기다리게. 곧 부통령의 연설 시간이야.
연설? 정치가들 얘기 따위에도 흥미가 있으신가요?
아니, 오늘은 재미있는 하루가 될 거야. 서두르면 될 일도 안 돼.
아직 내 소개를 안 했군. 난……
로켄 윌리엄스.
존함은 익히 알고 있습니다. 저는 라인 랩 비즈니스과 주임 저스틴 피츠로이입니다. 과학 기술에 대해서는 하나도 모르는 문외한이죠.
저는 그저 역사를 목격하러 왔을 뿐입니다, 선생님.
존경하는 트리마운츠 시민 여러분, 저는 컬럼비아의 부통령 잭슨입니다.
오늘의 기자 회견 내용을 궁금해하는 분이 많을 겁니다. 그전에 여러분과 잠깐 대화를 나누고 싶군요.
여러분도 이런 느낌이 드시는지 모르겠지만…… 오늘날의 테라는, 우리가 살고 있는 나라와 지역에서 벌어지는 일에만 관심을 두기는 힘든 상황입니다……
나라와 나라 사이의 교류가 빈번해질수록 모순과 충돌이 더 격해지고, 이는 불가피한 사실이라는 걸 증명하는 일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세워진 지 수십 년밖에 되지 않은 컬럼비아가, 긴 역사를 가진 다른 여러 나라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바로 과학에 대한 탐구와 지식에 대한 욕구, 그리고 모든 컬럼비아인 핏속에 스며든 개척 정신입니다. 이건 저의 대답이고, 우리의 대답입니다.
이 두 가지를 '유지'하기 위해 우리는 기꺼이 대가를 치러왔습니다. 그게 어떤 대가일지라도.
잭슨이 지금 뭔 소리를 하는 거야?
곧 다음 부통령 선거잖아. 그동안 내보일 만한 업적이 없으니 초조한 거겠지.
그 어떤 대가도 치른다……
별로 매력적인 오프닝은 아닌데.
트리마운츠 이 과학의 도시에는 열 몇 개의 섹터가 있고……
수많은 연구 프로젝트가 긴박하게 진행되고 있으며, 수많은 '미래적인' 생활이 그곳에서 형성되고 발생하고 검증되고 있죠……
여러분 중에도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고 있다는 것에 전 정말 자부심을 느낍니다.
그리고 2주 후, 우리는 그중 가장 위대한 프로젝트의 성과를 발표할 것입니다.
그것은 장차 이 땅에 있는 나라와 나라 사이의 기존 구도를 바꿀 것이며, 우리가 이 땅에서 그 어떤 폭풍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도록 주도권을 잡아줄 겁니다.
이는 컬럼비아가 새 시대를 향해 내디디는 첫걸음이 될 겁니다.
……새 시대를 향한 첫걸음이라.
잭슨은 대학 시절부터 유명한 연설가이자 운동가였다고 들었는데…… 훗.
이번에 트리마운츠에서 기자 회견을 연 게 뭘 뜻하는지 자네도 알고 있겠지?
본론으로 들어가시죠, 블레이크 대령님.
군부는 저의 도움이 필요하고, 저도 군부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아주 합리적이죠.
도움이라…… 음, 그렇지.
그건 원래 런디니움의 그 빌어먹을 탑을 견제하기 위해 준비했던 것이었지. 군부에서 돈을 얼마나 퍼부었는지 아나?
하지만 지금, 크리스틴과 관련 기술자들이 전부 증발해 버렸어. 그것도 하룻밤 사이에.
그리고 그…… 기술 설명서에서 그 커다란 원을 뭐라고 했지? '초점 발생기'였나? 제기랄, 크리스틴은 대체 어떻게 그 큰 걸 통째로 숨긴 거지?
군부가 고속 군함으로 트리마운츠를 포위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아주 다행인 줄 알게.
그래서 제가 찾아왔잖습니까.
……크리스틴이 날 농락한 건 인정하지. 하지만 자네 같은 실패자가 문제를 해결해 줄 거라고 내가 어떻게 믿지?
컬럼비아에는 라인 랩과 견줄만한 회사가 수도 없이 많아. 우리가 무력으로 해결하고 나머지는 다른 사람들에게 맡기면 되니까……
……맞는 말씀입니다, 블레이크 대령님. 저는 확실히 실패했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바보는 아닙니다.
만약 군부에서 강경하게 나올 수 있었다면 진작에 그렇게 하셨겠죠. 당신들이 온화한 인도주의자였던 적이 없으니까요.
……
그리고 저, 에너지과…… '전 주임'의 도움이 있어야 당신들이 작전을 효율적으로 펼칠 수 있을 겁니다.
특히, 대령께서 '빠르고', '조용하게'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면요.
내가 왜 자네를 한 번 더 믿어야 하나?
아무것도 없는 실패자보다 더 통제하기 쉬운 게 있을까요?
……
훗, 자네가 스스로 '실패자'라고 얘기할 날이 올 줄은 몰랐네, 퍼디낸드. 왜 이렇게까지 집착하는 거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고, 모든 것을 계속 숨긴 끝에, 모두의 노력과 성과를 등한시하고 라인 랩 전체를 희생시키는 건 용납할 수 없습니다……
크리스틴에겐 그럴 자격이 없습니다. 물론, 다른 그 누구에게도요.
……좋아. 오늘 한 말 중에 가장 설득력 있군, 퍼디낸드.
트리마운츠, 라인 랩 총괄 사무실 앞, 복도
정말 기분 나쁜 느낌이야.
너무 조용해…… 공기는 싸늘하고, 불빛 톤도 너무 차가워. 앞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겠고.
사실 예전에도 그리 시끌벅적한 편은 아니었지…… 뭐, 다들 각자 프로젝트로 바빴으니까.
가끔 회의 후에 같이 밥을 먹거나 회식은 했지만, 좀처럼 얼굴도 못 보고…… 전부 연구에 너무 몰두해서, 책상이 덜컹거리면 고치지도 않고 자료들을 받쳐놓는 걸로 때울 정도였지.
하지만, 그런 느낌이 너무 그리워…… 그런 받아들여진 느낌, 뭔가를 할 수 있다는 느낌, 뭐라도 바꿀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당신도 그립지?
……크리스틴.
……
그 꼴 보기 싫은 꼬리 좀 질질 끌고 다니지 말아 줄래? 오늘은 청소할 계획 없으니까……
오올헤약.
어머, 여기서 자주 우는 모양이구나? 조금 더 잘 숨어 있을 걸 그랬나.
……
날 기다린 거야?
맞아.
그런데 왜 그렇게 떨어져 있는 거야?
조심해야 하니까. 부모를 찾지 못한 아이는 짜증을 잘 내거든.
게다가 넌 들어오자마자 분신을 만들었잖아?
……
기왕 들킨 김에, 그냥 익사시켜서 폐기된 기동 장갑에 넣어버려야겠네.
어머, 우리 엘프 뒤끝이 장난 아니네.
메이랜더의 특수요원이 대체 무슨 일로 여기까지 잠입했지?
잠입? 생각 좀 해 봐. 라인 랩 총괄의 사무실이 그렇게 쉽게 잠입할 수 있는 곳이야?
설마 총괄을 돕고 있었어? 무슨 거래를 한 거지? 너한테 뭘 시켰는데?
그래서 메이랜더 재단을 배신한 거야, 쿠쿨칸?
그렇게 궁금한 게 많으면 크리스틴에게 직접 물어보지 그래? 너희들은 꽤 친하니까, 분명 대답해 줄걸?
하긴…… 넌 이제 갈 곳도 없지. 그게 아니면 총괄 사무실에서 총괄을 찾을 리가 없잖아.
……
진짜 크리스틴이 보낸 거 맞아?
만약 내가 오고 싶어서 왔다면, 네가 더 슬퍼하려나?
지금 크리스틴은 널 신경 쓸 겨를이 없어.
겉과 속이 다르고 무심한 너한테 질렸을 수도 있고, 아니면 애초에 크리스틴의 계획에 네가 없었을 수도 있고. 멋대로 생각해……
그건 네가 결정할 게 아니야.
난 그저 호의로, 혹은 연민이라고 생각해도 좋으니까, 그냥 너한테 알려주러 온 거야. 그러니까 긴장할 필요 없어.
나보다 크리스틴을 더 잘 아는 것처럼 굴지 마. 너보다 내가 훨씬 더 많은 시간을 크리스틴과 함께 보냈거든.
글쎄, 크리스틴에 대해서는 잘 모를 수도 있겠지만, 지금 크리스틴이 뭘 하려는 건지는 너보다 잘 알아.
급한 사람일수록 아픈 꼴을 보기 마련이지. 더 이상 내 일을 방해하면……
다음엔 목숨을 받아 갈 거야.
……
짜증 나는 리베리가 사라졌다. 소파에 남은 물방울 자국만 제외하면, 아까의 싸움은 마치 없었던 것만 같았다.
문이 닫혔지만 뮤엘시스는 쫓아가지 않았다.
오올헤약의 말이 진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여기에 나타났다는 건 이미 많은 걸 설명해 주기에 충분했다.
뮤엘시스는 크리스틴에게 직접 물어봐야 했다. 오늘 여기에 온 목적도 그것이다. 물어볼 것은 산더미처럼 많았다.
……크리스틴.
아무런 대답이 없다. 텅 빈 사무실에 뮤엘시스의 목소리만 메아리쳤다. 그녀의 그림자는 벽에 의해 두 개로 갈라져, 마치 갈림길을 마주한 두 사람 같았다.
대체 언제부터, 어디서부터 이 모든 게 변했고, 또 그녀만 모르고 있었을까……
익숙했던 방과 익숙했던 복도가 지금은 너무나 낯설어졌다.
뮤엘시스는 이런 느낌이 너무 싫었다.
태어난 뒤 처음으로 자신이 혼자라는 걸 깨달았을 때처럼.
라인 랩이 설립된 날, 모든 사람들은 이 장차 위대해질 회사가 드디어 출발했다고 굳게 믿었다.
이러한 신념은 사람을 긴장하게 하고 사기를 북돋웠으며, 웃음을 감추지 못하게 하고 밤새 잠 못 이루게 했다.
뮤엘시스와 사리아는 테라스에서 다음 날 해가 떠오를 때까지 미래에 관해 얘기했다.
그때, 뮤엘시스는 사리아와 이 사람들, 그리고 라인 랩과 평생 함께할 줄 알았다.
……그러나 이건 허황된 생각이었다.
이익, 투쟁, 갈등과 같은 화제가 사무실 책상에 오를 때마다 뮤엘시스는 실소를 금치 못했다…… 도대체 무엇이 인간을 제한시킨 걸까?
그녀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 하늘은, 너무나도 볼품없었다.
트리마운츠 교외, 도시로부터 30km 떨어진 곳, 길가의 어느 가게
저기, 더블 치즈 핫도그 큰 걸로 4개 주세요.
알겠습니다, 잠시……
*컬럼비아 욕설*, 손님, 어쩌다 그렇게 된 겁니까?
어렸을 때 병에 걸렸는데 지금은 이 외골격이 있어야만 생활할 수 있어요. 놀라게 해서 미안합니다.
놀라요? 그럴 리가요, 너무 멋지군요!
아…… 트리마운츠의 과학 기술 회사와 관련 있나요? 그렇다면 이상할 것도 없죠. 그 사람들은 하루가 멀다고 이상한 것들만 만들어 내니까요!
……뭐 비슷합니다.
아, 죄송해요. 제가 너무 예의 없게 굴었죠?
익숙합니다. 여기서 담배 한 대 피워도 될까요?
그 몸으로 담배도 피울 수 있어요? 대단한데요?
……후. 거리가 썰렁하네요. 여기는 평소에도 사람이 없나요?
오늘만 유난히 그렇네요. 며칠 전 부통령님이 방문했을 때는 차들이 천 미터나 밀려 있었어요.
오늘은 아마 날씨 때문일 거예요…… 자, 핫도그 나왔습니다. 아주 잘 드시네요. 어차피 오늘 손님도 없는데, 옆에 있는 의자에 앉으시죠.
고맙습니다.
'핫도그'라…… 컬럼비아의 패스트푸드는 갈수록 새로워지네.
……뭐, 나한테는 다 똑같지만.
그런데 왜 '핫도그'라고 부를까요? 혹시 페로와 연관이라도 있나요?
처음에는 볼리바르 이민자들이 이런 패스트푸드를 판매하려고, 화려한 복장을 한 페로 여자나 페로 남자에게, 카트를 밀고 기사 스포츠 경기장으로 가게 했어.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 '핫도그'가 컬럼비아어에서 패스트푸드의 속칭이 됐지.
오랜 시간이 흘러서라……
당신도 드실 겁니까? 제가 사죠.
됐어.
하아, 역시 세월은 피할 수가 없군요. 미각이 느껴졌을 때는 지금보다 몇십 배나 더 먹었었는데. 이것도 '오랜 시간이 흘러'서 그런 걸까요?
당신처럼 젊은 사람은 정말 부럽거든요.
……
지금 테라에는 이런 '오랜 시간이 흘러'서 생긴 게 얼마나 많습니까.
모든 게 다 그렇지.
……음, 일리가 있군요.
오랜만입니다, 켈시 훈작.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였죠?
전쟁이 끝나고 테레시아의 즉위식이 있던 그날. 카즈델을 그리워하는 대부분 살카즈들이 다 모였어. 너도 마찬가지였고.
지금의 넌, 뭐라고 불러야 하나?
틴맨이라고 부르세요. 동료들도 그렇게 부르고, 사람은 이름을 따라간다잖아요. 저한테는 별 의미가 없지만요.
메이랜더 재단의 대표라던데.
그렇습니다.
강력한 레버넌트 중 한 명이기도 하지.
정확히는 '과거에 강력했던 레버넌트'죠. 알다시피 티카즈는 이 땅의 모든 곳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컬럼비아 평원도 예외는 아니죠.
그것도 아니면, 제가 원한의 속삭임 때문에 편히 잠들지도 못해, 기꺼이 하늘을 나는 요새로 변해서라도 카즈델로 돌아가고 싶다고 해야 기분이 좀 나으실까요?
……아니. 그러니까 메이랜더 재단은 진작부터 로도스 아일랜드를 주의하고 있었다는 건가.
당신들이 컬럼비아의 시야에 들어온 게 처음은 아닐 건데요. 심지어 지난번 그 소소한 법률 분쟁 때도요…… 티카론토였나, 어디였죠?
아무튼, 로도스 아일랜드는 아주 젊은 조직입니다.
로도스 아일랜드가 일찍이 누구 것이었는지, 또 어떤 길을 가고 있는지는 너도 알고 있을 텐데.
하아, 그러니까 저도 그만두라고 설득하러 온 게 아닙니다. 우리 쪽 요원들의 정보에 따르면, 이번 일은 익숙한 사람들이 꽤 많이 연루되어 있더라고요. 그중에는 당신과 관계있는 사람도 있어요.
로도스 아일랜드가 이번 건에 관여한다 해도 저는 반대할 생각이 없습니다. 단, 메이랜더 재단의 생각을 먼저 들어보시라는 거죠.
그건 메이랜더의 '생각'이야, 아니면 '명령'이야?
뭐가 됐든 제 개인적으로는…… 이번만큼은 우리가 같은 편에 서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켈시 경.
알겠다.
저쪽에 있는 사람들은 일행인가요?
틴맨의 시선은 먹구름의 한쪽 끝을 향했다. 멀지 않은 곳에 새하얀 필라인과 불꽃과도 같은 사브라가 벤치에 앉아 있었다.
사브라 소녀는 잔뜩 신이 난 듯 뭐라고 계속 떠들고 있었지만, 옆에 있는 친구는 그저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소녀는 지난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이 왜 그 편지를 받았는지, 왜 이 나라에 돌아오게 됐는지 알 것 같기도 했지만, 자세히 알지는 못했다.
소녀는 그저 어떤 일은 언젠가 마주해야 한다는 것만 말고 있을 뿐이었다.
……음, 여기, 알 것 같은데. 그런데…… 메모는 안 했나 봐.
왜 써놓지 않았을까?
기억해내는 게…… 좋으려나?
당연하지. 뭘 물어봐도 모른다고 하니까, 곤란하잖아.
이프리트는, 기억나?
나? 나야…… 당연하지!
응?
여기는 컬럼비아야! 예전에 와봤어. 너도 와봤다고 들었어!
아…… 저 둘은 기억납니다…… 그렇군요.
운명의 장난이네요, 켈시 경. 그런데 저 아이들에게 정말 운명을 마주하게 할 겁니까?
……
그건 아이들의 선택이야. 난 참견할 권리가 없어.
켈시는 저 멀리 먹구름이 드리운 트리마운츠를 묵묵히 바라보았다.
우뚝 솟은 건물은 먹구름에 잠겨버렸고 도시의 밑부분은 논밭에 가려져 있었다.
틴맨도 함께 고개를 들었다.
하늘 위, 도시의 상공에, 이 대지의 상공에, 인류가 수천 년 동안 갈망했으나 도저히 닿을 수 없었던 그 높이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덩이가 마치 떨어지는 별처럼 하늘을 가르고 있었다.
이프리트, 이야기 들을래?
오늘 이야기는 사르곤의 한 아름다운 도시에서 일어난 거야……
백성들에게 존경받는 한 덕망 높은 국왕이 있었는데, 할아버지가 된 국왕은 종일 수심에 가득 차 마음의 평화를 찾을 수가 없었어.
국왕은 전력을 다해 도시를 다스렸지만, 정작 이곳에는 국왕의 흔적을 남길 만한 물건이 하나도 없었던 거야. 조각상은 무너지고 기록은 빛이 바래며 사람들은 너무 쉽게 잊어버리거든.
하지만 국왕은 자신의 일생을 상징할 수 있는, 오래도록 전해질 것을 간절히 바랐지.
그래서 국왕은 부인을 찾아가 함께 그런 보물을 찾기로 했어.
두 사람은 대지 곳곳을 누비며 수많은 황금, 젊음을 돌려주는 옷, 마음대로 종족을 바꿀 수 있는 마법 거울, 산을 가를 수 있는 보검, 비경으로 향하는 보물 지도를 찾았어.
하지만 이 모든 건 국왕이 원하는 게 아니었어. 너무 구체적이고 강렬한 욕망이 담겨 있어서 늙은 국왕은 본인의 일생을 대표할 수 없다고 생각했지.
그래서 마음이 아팠던 왕비는 한밤중에 별을 향해 남편의 소원을 이루게 해달라고 빌었어. 결국 왕비의 간절한 기도 때문인지 하늘에서 별 하나가 세상에 떨어졌지……
이프리트는 불타는 꼬리가 하늘을 가르는 걸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갑자기 사일런스가 예전에 들려준 수많은 이야기 중 하나가 떠올랐다.
별이 떨어진 곳에는 희망이 있는데, 별이 떨어지면 사람들의 갈등은 전부 사라지고 모두의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별이 정말 떨어질까? 하지만 생각할 겨를도 없이,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내 소원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