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금
운청평은 자신을 망산으로 '초대'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 산에 오르게 된다. 도중에 그는 막막해하는 한 여인을 도와 바둑판에 빠진 그녀의 낭군을 구해준다. 그렇게 그는, 그 바둑판이 이 국면을 타개할 인연을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형, 아직이야?
조급해 말거라, 생각 좀 해보게.
벌써 한참 동안 생각만 하고 있었잖아. 저번에도 그렇고, 저저번에도 그랬어. 누구한테 속고 있는 거 아니야?
이렇게나 자주 찾아왔는데, 형이 다른 사람과 대국하는 걸 본 적이 없어.
잘못된 거는 아니야. 난 그저…… 다음 수를 생각하고 있을 뿐.
한 수 이후 상대의 대응, 그리고 그 후의 변화까지도 모두 생각해야 돼.
사람 참 성가시게 하네…… 일단 지금 하던 대국을 끝낸 다음에, 형이랑 대국했던 사람한테 가르쳐 달라고 하면 안 돼?
그냥 바둑이잖아. 진다고 무슨 큰일이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나는 질 수 없어.
이 대국을 두던 사람은 내게 약속했다. 내가 이기면 소원을 하나 들어주겠다고.
소원? 진짜야?
하아, 아쉽지만 나는 이렇게 막 배배 꼬여있는 건 잘 못해. 나한테는 몸 쓰는 게 더 쉬울걸……
해도 곧 질 것 같으니, 난 이만 집에 돌아가야겠어. 집에 정리해야 할 것도 잔뜩 있고.
안녕!
참, 우리 만난 지도 꽤 됐는데, 여태까지 형 이름이 뭔지 몰랐네?
성은 난, 이름은 가. 난초 난에, 옳을 가.
그럼 내 이름은 기억하고 있겠지?
낙근이었나?
맞아!
그럼 이제 간다. 맞다, 엄마 말로는 우리 집이 당분간은 다른 곳으로 이사 간다고 했는데, 나중에 돌아오면 꼭 다시 찾아올게.
안녕!
발걸음 소리는 점점 멀어졌고, 땅거미도 어느새 바둑판에 내려앉았다. 달빛은 바둑돌을 비췄고, 비와 눈이 돌의자를 씻어내렸다.
난가는 백돌을 집어 한 수를 두려다가, 잠깐 주춤하더니 다시 거둬들였다. 한참을 고민하던 그는 결국 돌을 통에 돌려놓았다.
벌써 10번째 사국이다. 그는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또 한 번의 계산, 이번에야말로 그는 승리의 묘수를 생각해 내겠다고 다짐했다.
……
운청평 씨, 길 안내는 여기까지입니다.
그분이 산 위에서 저를 기다린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그렇습니다. 그분은 이 산 위에 계시지요. 하지만 제 임무는 당신을 이 산길까지 모시는 거였습니다.
여기서 산으로 오르는 길은 하나뿐이고, 길이 험하지도 않습니다. 주변의 숲도 정리해 놨으니, 맹수가 나타나는 일도 없을 겁니다.
이 길을 따라 쭉 올라가시면 됩니다. 나머지는 모두 준비되어 있습니다.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는데, 더 이상 캐묻는 건 실례가 되겠군요……
그럼, 이만.
안녕히 가세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대체 산으로 오르는 길이 어디 있다는 건지……
바닥에 낙엽이 두껍게 쌓여 있는 걸 보니, 오랫동안 이 산에 오른 사람이 없는 것 같은데.
게다가 짐승들이 다니는 길조차 없으니……
아무래도 현지인에게 물어보는 게 좋겠네.
저기……
안녕하십니까, 무슨 일이신가요?
말씀 좀 여쭙겠습니다. 혹시 저의 낭군님을 못 보셨는지요?
나이는 젊고, 머리는 갈색이며, 꼬리 끝은 하얀색입니다. 얇은 겉옷에 흙색 바지, 가죽 신발을 신고 있어요.
그런 사람은…… 보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런가요…… 시간을 뺏어서 죄송합니다……
잠깐만요!
당신은 여기 현지 분이시죠? 저도 여쭙고 싶은 게 있는데, 이 근처에 혹시 산에 오르는 길이 있습니까?
산에 오르시려고요? 그렇다면 길을 잘못 찾으셨네요.
산에 오르는 길은 마을 반대편에 있어요. 여기는 뒷산인데, 길이 험하고 위험해서 마을 사람들이 이쪽으로는 거의 오르지 않아요.
(뒷산? 분명 큰길을 따라왔는데, 왜 뒷산이지?)
그렇습니까…… 정말 감사합니다.
하지만…… 안내해 준 분이 이쪽으로 가면 된다고 했으니, 분명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겁니다. 역시 이쪽으로 올라가 봐야겠네요.
그럼.
……
저기, 저도 함께 갈게요.
그건 또 어째서……?
산길이 위험합니다. 두 사람이라면 적어도 서로 도울 수는 있으니까요.
게다가…… 마을 안은 이미 다 찾아봤어요. 이 근처에서 찾지 않은 곳은 이 산뿐입니다. 만약 저의 낭군님이 아직도 여기 있다면, 아마도 이 산에 있겠죠.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당신을 어떻게 불러야 할까요?
……저는 백금이라고 합니다.
난가 형님, 다음 수는 아직도 생각해 내지 못한 거야?
급할 거 없어.
시간이 얼마나 많이 지났는데, 이젠 나도 바둑 둘 줄 안다고.
그러고 보니, 이건 '삼패' 아니야? 규칙에 따르면 무승부지?
무승부라니…… 무승부는 안 돼.
그 사람과 약속했어. 내가 이 대국에서 이겨야만 소원을 들어준다고……
안 돼, 어떻게든 이기는 법을 찾아야 해……
도대체 무슨 소원이길래, 이 대국을 꼭 이겨야 한다는 거야? 다른 방법으론 안 돼?
다른 방법이라…… 다른 방법이 있을 리 없어……
사별한 두 사람이…… 다시 만날 방법 같은 건……
이 패는…… 대체 어쩌다가 나온 건지……
금아, 이거면 되겠니?
정말 예뻐요! 낭군님은 손재주가 정말 좋으시네요.
전 낭군님께서 도자기 굽는 솜씨를 바둑돌 굽는 데만 쓰시는 줄 알았거든요.
하하……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직 많아. 네가 원하는 거, 좋아하는 거 모두 구워서 보여줄게.
나중에 우리가 정식으로 결혼하면, 이 도자기 병은 거실에서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두자.
“동쪽에 병을, 서쪽에 거울을 두면 평생 무탈하다”고 하던데…… 아직 거실엔 거울이 없네. 하지만 이래서야 시계를 둘 곳이 없겠군. 그래도 마을의 종이 아침저녁으로 한 번씩 울리니, 시계는 있는 셈 쳐야겠어.
나중에 이 도자기 병에 꽃을 꽂고, 거울로 너를 비추면……
그만하시고…… 집에 땔감이 부족하니, 아직 날이 저물지 않았을 때 얼른 뒷산에 가서 장작을 좀 해오세요.
그래, 잠시만 기다려. 내 금방 다녀올 테니.
예, 돌아오실 때쯤이면 저녁밥도 거의 다 됐을 거예요.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이 괴물들은 대체 어디서 나온 거야!?
금아……!!
이런 곳에…… 정말…… 길이 있었군요.
백 소저…… 손을 잡아드릴까요?
괜찮습니다.
저도 산에서 자란 사람입니다. 이런 길은 제게 아무것도 아니에요.
오히려 당신의 안색이 좋지 않아 보이는데, 잠시 쉬었다 갈까요?
그럼…… 잠시 쉬었다 가시죠.
후우…… 하아……
이런 끈질긴 모습, 꼭 제 낭군님이랑 닮았네요.
그럼 백 소저의 낭군도 진지한 분이겠네요.
예.
무엇을 하든 너무나도 끈질겨서, 아무도 그이를 설득할 수 없다니까요.
일을 이룰 때까지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못처럼 박힌 듯 꼼짝도 않는 사람이라서…… 화가 나기도 하지만, 또 안쓰러울 때도 있어요.
다행히 제 말은 그럭저럭 들어주는 편이라, 매번 제가 귀를 잡고 데려올 수 있었어요. 어릴 때부터 쭉 그랬어요.
그래도 마을에 있는 바둑 선생님께서는, 바둑만큼은 적성이라 하시더군요.
바둑을 몇 년만 배운다면 일류 기사, 심지어는 국수가 될지도 모른다고 했어요. 그렇게 되면 이 마을을 벗어나 더 먼 곳에 가볼 수도 있다고 하더군요.
낭군께서 바둑을 배우셨나요?
예…… 오랫동안 배웠어요.
문제는 너무나도 심취한 나머지, 다른 사람이 무슨 말을 해도 듣질 않았어요. 정말 끔찍했죠.
하하하…… 저도 바둑판을 종횡하는 흑백의 오묘함이 사람을 빠져들게 만든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이 넓은 세상에 사람을 끌어당길 수 있는 것은 얼마든지 있겠죠. 때로는 하나의 생각 때문에 오랫동안 그 속에 빠져 방황하기도 하니까요.
낭군께서 집착하는 것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겁니다.
설마 저의 낭군님 편을 들어주시는 건가요?
사실 저도 느낀 바가 있는지라……
아…… 그나저나, 낭군께서 사라졌다고 했는데, 대체 언제 사라진 겁니까?
그게……
어느 날 저녁, 산에 장작을 패러 간 이후로 소식이 없어요……
이거 참 걱정스럽군요……
백 소저, 우리도 이만 출발하죠.
좀 더 쉬지 않아도 되겠어요? 보아하니 몸도 그리 튼튼하지 않아 보이고, 평소에 이렇게 험한 산길을 걸은 적도 적었던 것 같은데요.
제가 비록 무공은 모르지만, 호흡법 정도는 평소에도 수련하고 있습니다.
산길이 아직 머니, 저도 부지런히 움직이겠습니다.
저기 위에 정자가 있는 것 같으니, 거기 가서 다시 쉬시죠.
……
이 대국, 아직도 그대로네…… 이 한 수는 또 얼마나 오래 생각한 건지……
난가 형님, 대체 얼마나 오래 지났나?
글쎄다.
내 손자가 벌써 그때의 나만큼 자랐다고.
내가 형님 이야기를 들려주니까, 손자 녀석이 도저히 믿질 않더군. 이 세상에 바둑 한 수 때문에 평생을 생각하는 사람이 어디 있냐면서.
하아……
난가 형님, 백금 누님과 헤어진 게 언제인지는 기억하고 있는가?
기억 안 나.
마을에 사고가 난 이후, 나는 낙심해서 산속을 몇 달이나 헤매다가 여길 왔어, 그리 오래되진 않았겠지.
그게 언제인데?
잘 기억나질 않아.
그럼, 지금이 몇 년도인지는 알고 있나?
몰라……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이 대국을 끝내는 게 우선이야. 다른 건 나중에 해도 돼.
어휴……
음? 요즘 마을 사람들이 무슨 보물 때문에 난리도 아니라던데, 여기를 찾아오는 사람도 있네?
자네도 이 바둑을 보러 온 건가, 젊은이?
저희는 가는 길에 잠깐 쉬려고 왔습니다……
저희? 젊은이 혼자뿐이 아닌가?
혼자요? 방금 저랑 같이 올라온 아가씨가……
어디 갔지? 이상하네…… 분명 곁에 있었는데……
운청평이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그 여자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저 과묵한 소년만이 바둑판 앞에 떡하니 앉아 있었다.
이분은……?
……
말도 말게, 이분은 바둑에 빠져 헤어 나오질 못하고 있다네.
자네가 바둑을 안다면 좀 도와주게나.
이 국면은……
삼패. 이대로 계속해 봤자, 무승부밖에 되지 않아.
그런데 이 형님은 어떻게든 이기려고 한다네. 결국은, 스스로 자신을 가둬버리게 됐지.
나로서도 어떻게 할 수가 없군……
(바둑판을 관찰한다)
(생각에 잠긴다)
이런, 이런! 또 1명이 빠져들었네.
정말이지, 참……
무승부가 아니라, 승리를 원한다……
마음이 패에 사로잡혀 있는데, 과연 승부를 가릴 수 있을까?
이 아이…… 아직 목숨은 붙어있군……
하지만 상처가 이렇게 심하다니,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고통을 겪어야 할지……
어차피 이 몸으로는 무공을 연마할 수도 없는데, 천하의 무공을 전부 기록한들,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선생님, 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운청평 씨, 종사님의 결정에 한 번도 의문을 품은 적은 없었습니까?
아예 없는 건 아닙니다. 처음 이 일을 맡았을 때 원망도 했습니다. 저에게 매일 다른 사람이 무공을 연습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건, 저를 기둥에 묶어 놓고 눈앞에 진수성찬을 차린 거나 다름이 없으니까요.
보기만 하고, 냄새만 맡고, 정작 먹을 수 없는 그 괴로움은 가히 형언할 수가 없죠.
그런데 지금은 힘들어하는 기색이 조금도 없어 보이는군요.
이론만이라도 정진할 수 있다는 것을 위안으로 삼을 뿐입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제가 나름대로 깨달은 게 있다는 겁니다.
제가 좌 공자한테 최근에 꾼 꿈을 얘기한 적이 있나요?
아니요. 어디 한 번 들려주시죠.
어느 날 밤, 저는 평범한 전원생활로 돌아가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동안 기록하면서 익힌 무공으로 기운을 모아 밭일에 썼더니, 이리저리 밭을 갈고 김을 매도 기력이 절반 정도는 남더군요.
그리고 또 다른 날 밤에는 원수를 갚는 장렬한 꿈을 꾸었습니다. 선생님의 모습을 떠올리며, 기를 발하니 강물에 파도가 일어났고, 기를 거두니 호수처럼 잔잔해지더라고요. 그렇게 단번에 전설을 만들어냈고, 그대로 기력을 다해 죽었습니다.
이 두 꿈 지금의 운청평 씨와는 동떨어진 모습으로 보입니다만……
집념은 수렁과도 같아서, 그 속에 빠지면 제대로 볼 수 없는 게 당연하겠죠.
그렇게 고심 끝에 얻은 답은 하나뿐이더군요.
먼저 버리고, 다음에 바라보고, 마지막에 얻는 것입니다.
이 수는 여기에 둬야 합니다.
운청평은 백돌 하나를 집어 들고, 바둑판 위의 백여 수가 엇갈린 공방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태연하게 전혀 다른 곳에 놓았다.
흑이 그 기세를 타고 수많은 백돌을 차지했지만, 치열한 전개 끝에, 어찌 된 영문인지 판세는 오히려 백에게 더 유리해졌다.
자신이 하염없이 바라봤던 흑과 백의 돌들이 마치 물거품처럼 눈앞에서 사라져 가는 모습을, 난가는 그저 멍하니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국면이, 타개되었다.
아니…… 이런 수가 있었다니!
정말 고마워! 내가 아무리 생각해도 전혀 실마리가 보이질 않았는데, 네가 오자마자 바로 풀어버릴 줄이야. 진심으로 감탄했어!
과찬이십니다. 제가 바둑에 정통한 건 아니지만, 세상의 이치는 서로 통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버리는 게 있으면 얻는 것도 있다는 무도의 이치가 바둑에도 통할 거라 여겼죠. 그런데 이게 정말로 통할 줄은 몰랐습니다.
당신의 기력은 당연히 저보다 훨씬 뛰어나겠지만, 패의 승부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오히려 전체적인 해법을 간과했던 것입니다.
어찌 됐든, 이 대국이 마침내 해결됐구먼!
너는…… 낙근인가?
나는 낙근의 손자일세.
할아버지가 생전에 고향의 산에 바둑을 두는 괴짜가 있다는 얘기를 하도 많이 해서, 나도 여러 번 찾아왔다네. 나도 이젠 손자한테 이곳을 맡겨야 하나 싶었는데, 마침 이 젊은이가 와서 종지부를 찍어줄 줄이야.
그렇다면 이미……
족히 백여 년은 흘렀네. 이 마을도 많이 변했고.
그렇다면…… 금아와 헤어진 건 도대체 얼마나……
낭군님.
금아?!
예, 저예요……
낭군님…… 드디어 만났네요.
정말이었구나! 그 신선이 날 속인 게 아니었어! 정말 너를 만나게 됐어!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어서 집으로 돌아가자! 부모님께서 아직 기다리고 계실……
……
금아……? 왜…… 말이 없니……?
……
그런가…… 하하하…… 그런 거였구나……
나도…… 이미……
어찌 됐든, 너를, 다시 만나게 된 거네……
대국은 끝났고, 신선은 그의 약속을 지켰다.
그리하여 난가에게 더는 여한이 없었다.
……
백 소저……
아니야…… 당신은 이야기 속의 그 백 소저가 아니군요.
예, 낭군님을 만났는데 제게 더 이상 무슨 미련이 남아 있겠어요?
저 역시 그녀의 의관묘 앞에 놓인, 그의 눈물과 그리움에 젖은 종이돈일 뿐입니다.
그녀의 소원과 저의 운명은 모두 낭군님과의 재회에 달려 있었어요.
낭군님도 떠났으니, 저도 더는 머물 이유가 없네요.
다만, 두 분께서 제 마지막 청을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부디 낭군님의 무덤을 그분의 의관묘 옆에 세우고, 그곳에서 '저'를 태워주시길 바랍니다.
이번 생에서는 함께 늙어 죽을 복이 없었지만, 다음 생에서는……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말을 마친 '백 소저'는 엎드려 절을 올렸다.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
바닥에는 바람에 흔들리는 종이돈 한 다발만 남겨져 있었다.
종이돈…… 방금 그 백 소저라는 사람은 '창괴'였나?
하아……
120년 전의 어느 날 밤, 무슨 까닭인지 이 마을에 갑자기 대량의 창괴가 몰려와 사람들을 덮쳤다네. 그야말로 끔찍한 재난이었지……
당시 그 난가라는 소년이 내 할아버지를 구해줬어.
그날 밤, 소년은 수많은 사람의 탈출을 도와줬지…… 하지만 정작 본인은 홍수처럼 몰려오던 창괴의 물살에 휩쓸렸고, 그 백금이라는 아가씨가 겨우 그를 빼냈지.
하지만 백금은…… 그날 밤에 죽고 말았어.
난가와 백금, 모두 선량한 분이었군요……
듣기로는, 창괴라는 건 사람의 집념 속에서 태어나고, 집념이 사라지면 다시 물건으로 돌아온다 하더군.
우리 집안에서 3대째 전해 내려오는 비밀도 마침내 결말을 맺었건만, 이 늙은이의 눈물은 왜 멈추질 못하는 걸까……
젊은이, 나는 이만 내려가야겠네. 백 누님의 당부는 이 늙은이가 잘 마무리 짓도록 하지. 그래야 나중에 할아버지를 뵐 면목도 생길 테니까.
자네는 어쩔 셈인가?
……
산 위에 저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서, 서둘러 가봐야 합니다.
허허, 지금 산 위에는 제법 떠들썩하다네. 대체 어떤 거물이 자네더러 일부러 뒷산으로 올라오라고 한 건지 모르겠군.
그럼 난 이만 가보겠네.
나중에 연이 닿으면 우리 집에 와서 차라도 한잔하게나.
낙 씨는 바닥의 물건을 조심스레 정리한 뒤, 대나무 광주리에 담아 비틀거리며 산을 내려갔다.
……
당신이 그 대국을 타개했습니까?
당신은 누구신지요?
자질구레한 일을 처리하는 반쪽짜리, 노동용 창괴 정도라고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당신은 큰…… 총웨 곁에서 기록을 담당하는 사람이었지요?
그렇다면 당신도 쉐이 대리인 중 한 분이겠네요.
이런 식으로 초대해서 미안하지만, 일단 올라가시죠. 산꼭대기에 당신을 기다리는 손님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저를 '초대'한 분이……?
맞습니다. 원래는 다른 일 때문이었는데…… 당신이 오는 길에 그 대국을 타개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큰 목소리로) 계략이 또 적중했군요. 기쁩니까, 바둑꾼?!
그 국면을 타개한 건 단순한 우연인데, 그게 누군가의 계략이었단 말입니까?
둘째 형은 이곳에 그 바둑판을 남기면서, 진정으로 지혜로운 사람만이 그 국면을 타개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굳이 이곳에 바둑판을 둔 건…… 형제자매들 중에 가장 '인간'에 가까운 존재는 큰형일 텐데, 그 제자를 이곳으로 이끌었다니…… 뭐, 그래도 엄청난 묘수라고 할만한 건 아니군요.
그럼, 올라갈까요.
바둑판은 꼭 챙기세요. 바둑도 끝났으니, 그건 이제 당신 겁니다.
예……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량, 외자입니다.
방금 량 선생님께서 오직 선생님의 제자만이 그 대국을 타개할 수 있다고 하셨지만, 저보다 먼저 바둑을 둔 사람이 있었습니다.
난가를 말하는 겁니까?
확실히 그자가 난가를 거기서 바둑을 둘 수 있도록 허락은 했습니다.
그 바둑은 패에 집착할수록 더욱 타개할 수 없는 것이었는데, 설마 그걸 알면서도 난가 씨를 허락한 건……
그분은 그저 세상을 농락하고 싶었던 건지, 아니면……
바둑을 보면 사람이 보이는 것처럼, 그분의 마음도 그 대국처럼 집요한 걸까요?
오, 아주 좋은 접근입니다. 아주, 좋아요.
(자신의 구조가 떨리는 것을 애써 억누른다)
나중에 그자를 만나면 꼭 면전에서 그 말을 다시 해줬으면 좋겠군요.
도착했습니다.
이자가 바로 당신을 만나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인연도 하늘의 뜻이겠지?
다시 만나서 반가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