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2쌓여가는 재액
일행들은 마침내 복귀하고, 켈시는 모두에게 뱀파이어 생귀나르가 소환한 것은 가장 오래된 '오리지늄'이라는 사실을 전한다. 에블라나는 탈룰라를 발견하지만, 탈룰라는 그녀의 제안을 거절한다. 테레시아는 비행선 위에서 최후의 결전을 준비한다.
등장 오퍼레이터: 첸, 켈시, 아미야, 외드레르, 시즈, 백파이프, 델핀, W, 로고스, 이네스, Mon3tr
내가 왜 널 도와야 하지, 살카즈?
넌 네가 날 구했다고 생각하는 건가? 어차피 난 죽지도 않았고, 내가 죽든 살든 이 몸뚱아리는 이미 내가 버린 물건이나 마찬가지다.
게다가 애초에 날 죽인 것도 살카즈 아니었던가?
당신은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역사들을 목격했나?
내가 경험한 모든 것.
소문에 따르면 당신은 사람들을 위해 진실을 파헤치거나, 어떤 징조에 관한 실마리를 제공했다고 하더군.
너희 같은 미약한 생물들이 제멋대로 내 떠도는 파동을 환각으로 여기고, 또 제멋대로 그 안에서 허우적거리더니, 이젠 그걸 내 탓으로 돌리는 건가?
그 미치광이들에 의해 분열된 이후로…… 아, 일부분은 어떤 타천사가 지니고 있지. 차라리 내가 보고들은 것이 더 재미있을지도 모르겠군.
오히려 그 소위 말하는…… 중후한 역사나 심오한 주제가 나한텐 더 지루한 이야기일 테니까.
지루하다라…… 당신 말이 맞아.
이 대지에서 역사는 언제나 반복되니까. 역사를 돌아본다는 건 곧 미래를 바라본다는 것과 같다.
그래, 그래서 나도 예언가가 되었잖은가! 내가 한평생을 살면서…… 아, 그러니까 내가 아직 같은 생을 사는 것이라면, 나도 내가 이런 신분을 가지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그렇다면…… 당신은 '새로운 결론'을 기대하는 것인가?
내가 얼마나 살아왔다고 생각하는 거지, 애송이?
지금 너희가 이 꼴이 되어버린 이상, 새로운 결론 같은 건 없다.
그러나 지금 이 늙어빠진 해골 위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진 것도 분명하다. 살카즈의 왕관을 쓴 토끼와 남성 밴시가 내 머리 위에서 뱀파이어를 상대로 싸우고 있다.
물론 너와 그 그림자를 조종하는 양도 있고.
신기하냐고? 조금은.
하지만 너흰 이길 수 없다.
꽤나 확신하는군.
우리도 당신이 봤왔던, 그 반복되는 역사의 일부인 것인가?
이 땅에는 원래부터 반란군이 끊이지 않았지만, 늘 같은 틀에 갇혀 버리고 말았지.
게다가 난 그 뱀파이어의 수법을 안다. 그 당시 내 가죽을 벗겨버린 게 바로 그 녀석이거든.
내기 하나 하지 않겠나, 베헤모스?
당신이 봤던 그 이상한 사람들…… 그러니까 토끼, 양, 밴시, 살카즈가 한때 당신을 사냥했던 뱀파이어를 무찌를 거다.
나한테 호감이라도 사려는 거냐? 나 대신 복수라도 하면 내가 너를 다르게 볼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그런데 무얼 걸고 하는 내기지?
만약 이긴다면 우리를 도와, 우리가 있었던 장소로 다시 돌려보내 줘.
너희가 진다면?
……그럼, 어차피 우린 전부 죽고 없을 거야.
밑천이 없는 장사군, 꼬마야.
내기에 응하도록 하지.
……확실히 당신은 인간을 가까이 하는군.
아니, 이건 너희가 어떤 일을 벌이든, 내가 일으키는 작은 물결에 불과하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또한 눈 깜빡할 사이에 다시 평온을 되찾게 되겠지.
눈꺼풀을 살짝 들어올리는 정도라면 큰 힘이 드는 것도 아니니까.
너희는 확실히 이겼다, 아주 작은 한 걸음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 내기가 끝나기엔 아직 멀었다.
과연 너희가 정말로 놈을 이길 수 있을까? 그 뱀파이어가 상징하는 원한과 살육, 피비린내를?
내기의 범위를 조금 더 늘려보는 건 어떨까?
내가 너희를 데리고 가주도록 하겠다.
그런 뒤 반복되는 역사 속에서 너흴 기다리고 있겠다.
……
- 간 지 얼마나 됐어?
3시간 14분이다.
- 걱정되네.
- ……
- 뱀파이어 생귀나르도 피를 흘리면 죽는 거겠지?
모두를 믿어라.
우리는 모두를 믿는 수밖에 없어.
우리의 전투 임무도 이제 끝이네.
……손해가 작진 않아. 확실히 이곳의 부대는 훈련이 잘 되어 있네.
대부분의 살카즈들은 죽을 때까지 싸우기로 결심했지만, 일부는 결국 항복을 선택했어.
- 그 살카즈들은 W의 용병대에 넘겨도 괜찮아.
- ……
- 그 사람들을 처형할 거야?
아니, 그럴 생각은 없어.
넌 내가 스스로 결정을 내리길 바라는 모양이네.
확실히 나도 그러고 싶고, 부대 내 다른 사람들도 같은 의견이야.
하지만 나도 그자들을 그렇게 쉽게 죽게 할 생각은 없어.
지금처럼 전쟁을 하는 도중에 심판을 내리는 건 꽤나 힘든 일일지도 몰라.
지금 무기를 내려놓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살카즈들의 손에 얼마나 많은 피가 묻어 있는지 알아내는 건 어려운 일이야.
우리도 그들처럼 행동했었더라면, 결국 우리도 그들과 다를 바가 없겠지만.
비나 씨, 살카즈들의 전쟁 범죄 행위에 대해선 내가 조사하고 싶어.
……
나도 정보 분야에선 전문적인 경력이 있거든. 어떻게하면 입을 열게 할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어.
네가 무얼 걱정하고 있는 건진 알아, 나도……
아니, 난 걱정 같은 거 안 해.
그럼 너한테 맡길게.
……응.
우리가 흘린 피 한 방울도 헛되게 두지 않을게.
베헤모스가 돌아오고 있다, 전투 준비.
Mon3tr, 대기해라.
아직 돌아오는 것이 누구인지 알 수 없으니까.
거대한 해골이 마침내 다시 떠올랐다.
전투의 흔적들은 마치 시간의 파도에 휩쓸려 모두 씻겨진 듯, 그것은 여느 때와 다를 것 없이 그저 그곳을 맴돌고 있을 뿐이었다.
Mon3tr!
야, 나 좀 내려 줘. 너 이……
쳇, 그 할망구가 깨어난 모양이네. 이젠 뒷배가 생겼다 이거야?
이건 내 마지막 수류탄이다, 받아라, 이 괴물!
(분노하듯) 크르르르르!
……Mon3tr, 그 여자를 내려줘.
재수도 없네, 진짜.
하아, 무사히 돌아온 기념으로 축포라도 하나 터뜨릴 생각이었는데……
갑자기 이 뼈다귀가 멈추는가 싶더니, 처음 본 것이 하필이면 그 망할 할망구 얼굴이라니.
W. 네가 여기서 얼마나 많은 구조를 폭파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우리가 이걸 점령한 다음에는 네가 부숴버린 걸 전부 고쳐야 한다는 거 잊지 마.
부순 사람이 고치는 거야.
뭐? 내가 이걸 어떻게 고쳐?
켈시, 박사.
베헤모스의 해골은 우리가 빼앗았고, 지휘관인 울술라를 포로로 붙잡았다.
해골에 주둔 중이던 다른 병사들은 전멸했고.
……
당신이 바로 그 켈시 훈작이야?
얘기 많이 들었어.
넌 흉터의 상점 사람이군.
……저 멀리 빅토리아에 있었던 사람이 카즈델에 대해서 모르는 게 없네.
아무래도 그 늙은이가 했던 말이 맞는 모양이야.
이곳의 일이 정리되고 나면, 나도 널 통해서 네가 말한 그 '늙은이'들과 이야기를 나눠 볼 생각이다.
현재 카즈델을 지키고 있는 건 바로 그들이지. 게다가 리치는 이미 카즈델을 관리하고 있는 군사위원회의 멤버와 접촉한 상태다.
그들도 얼마 가지 않아 선택을 내리게 되겠지.
- 아미야랑 로고스는?
박사님!
- 아미야.
왜소한 카우투스 소녀가 당신의 품속으로 안겨 온다.
- 어서 와.
- ……
- 온몸이 피범벅이잖아, 다쳤어?
전 괜찮아요. 이 피는…… 뱀파이어의 피예요.
아미야.
그 반지…… 힘을 사용했구나.
네.
아미야, 손 보여 줘.
아미야 손에 있었던 반지 하나가 부서져, 조각 하나 남지 않았다.
이건…… 그 사람을 상대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어요.
……감정과 기억의 운용에 대해서 점점 익숙해지고 있구나.
- 아미야, 너 예전엔 반지의 힘을 해방했다가 의식을 잃은 적도 있었잖아.
- 켈시, 아미야의 몸도 한번 검사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아니요, 박사님, 걱정하지 마세요.
전 그저…… 조금 지쳤을 뿐이에요.
예전처럼 오른손 검지의 반지가 부서졌군. 괜찮다, 그저 힘을 너무 썼을 뿐이니까.
또 분노 때문에 타올랐었구나.
제가…… 분노를 했던 걸까요?
저도 제가 엄청 화를 낼 거라고 생각했어요. 뱀파이어 생귀나르, 그자는 너무 많은 이들을 해쳤으니까요.
하지만 제가 그때 느꼈던 감정은 분노 뿐만이 아니었어요.
전…… 슬픔도 느꼈어요.
슬픔.
켈시는 언제나 슬픔을 감추던 그 분홍빛 눈동자를 순간 떠올렸다.
켈시는 잠시 멈칫하더니, 다시 아미야의 손가락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이 반지들은 원래 네가 마왕의 힘과 그에 동반되어 밀려오는 감정에 적응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거야.
여기 다른 반지 하나에도 금이 가고 말았네.
어쩌면…… 우린 앞으로도 계속 이런 상처들을 지켜볼 수밖에 없을지도 몰라.
켈시 선생님, 걱정마세요. 제가 누굴 상대했든, 또 앞으로 누구를 상대하게 되든……
전 상대보다 먼저 쓰러지지 않을 테니까요.
뱀파이어 생귀나르는 미지의 땅으로 추락했다.
그의 왕정은 아직 모두 사라지지 않았지만, 위협은 완전히 제거되었다.
하지만 우린 그 저주의 강림을 막지는 못했다.
런디니움 방향이었는데……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자경단은 이 물자 보급선을 차단하면 전쟁도 끝날 거라고 생각했었지.
하지만 지금 상황에 변화가 생겼다. 이 '전쟁'은 이제 어떤 일이 있어도 그리 오래가지 못할 거야.
우린 가능한 한 빠르게 그곳으로 가야 해. 이 해골은 어쩌면 우리의 새로운 거점이 되어 줄 수도 있을 거야. 혹은, 뜻밖의 교통수단이 되어 줄 수도 있고.
……기대하는 것보단 더 유용했으면 좋겠군.
결전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어.
네. 살카즈가 다음 재앙의 원흉이 되어서는 안 돼요.
그리고……
켈시 선생님. 뱀파이어가 집착하고 기대하고 있는 그것, 그가 언급했던 저주는 바로 '오리지늄'을 가리키는 말이었어요.
……그래.
고대의 카즈델은 그 어떤 문명보다도 먼저 '오리지늄'에 접촉했었지.
그건 재앙의 유적 같은 것도 아니었고, 암석층에 묵묵히 쌓여 있는 광물 같은 것도 아니었어. 그건 단지 고대의 '오리지늄'이었을 뿐.
그것으로 인해 가장 오래된 주술, 가장 오래된…… 감염자가 탄생되었지.
만약 뱀파이어가 이 사실에 대해 알고 있다면, 이 오리지늄이 힘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생각하여 집착하는 것이라면……
……아마 앞으로의 싸움은 런디니움이라는 도시 하나로 끝날 문제가 아니게 되겠지.
……다시 돌아왔구나.
런디니움에.
그래, 수많은 일들을 겪고…… 결국 여기 빅토리아의 수도에 다시 돌아오게 됐어.
살카즈와 대공의 군대에 둘러싸여서 경계가 삼엄하다는 점은 조금 아쉽지만.
가드, 지금 바로……
……
……
퍼시벌, 지금 광석병 증세가 악화된 대원들이 조금 있는 걸로 아는데, 전체적으로 검진 한 번만 더 해 줘.
비전투 인원들은 이 숲에서 대기하게 하고. 퍼시벌, 넌 저들을 잘 보살피고 있어, 연락은 수시로 하고.
……정말로 런디니움에 가려는 거야?
이 전쟁의 결과와 상관 없이, 감염자는 런디니움 주변에서 쉽게 찾을 수 있을 거야.
짧은 시간 안에 살카즈인지 빅토리아인인지, 군인인지, 귀족, 농부, 노동자, 상인인지 구별해내는 건 불가능해.
어쩌면 평화의 시대가 다시 도래한다거나, 다시 한번 알력을 겪지 않는 한, 저들은 평생 깨닫지 못할지도 몰라.
이건 내가 가드에게 있었던 일을 보고…… 다시 한번 느끼게 된 거야.
……
하지만 괜찮아.
우린 이 땅의 감염자들에게 우리가 다시 깃발을 들어올렸음을 알리기 위해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거니까.
더 중요한 건 우리가 들고 있는 깃발이 무엇인지 알게 하는 거야.
그들이 언젠가 다시 포로가 되었을 때, 그들이 이 땅의 정의를 위해 다시 싸워야 하는 순간이 왔다는 걸 깨달았을 때, 사람들은 우리의 깃발을 떠올리게 될 거야.
하지만 어떻게?
각자 할 일을 해야지. 이건 하루 아침에 될 일이 아니잖아.
병을 제거하는 임무라면 다른 사람한테 맡기겠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더 이상 억압이 당연시되지 않도록 하는 거야. 그걸 위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바로 직접적인 힘과 표현이겠지.
적어도 빅토리아에서 우리는……
……나인.
저기 언덕 쪽에 불빛이 보여. 적어도 200미터는 되는 것 같아.
그런데 불빛의 색이 이상해.
……퍼시벌.
전방의 정찰대가 통신을 안 보낸 지 얼마나 됐는지 알 수 있을까?
응? 잠깐……
……확실히 예정 시간을 넘기긴 했네. 하지만 이러는 게 처음도 아니고, 애초에 그 통신 장비도 주워 온 거라 상태가 안 좋았잖아.
레드한테 물어볼게……
탈룰라는 그 불빛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이유도 없고, 징조도 없지만, 일종의 강렬한 직감이 느껴졌다.
그녀는 불빛 속에서 죽음의 냄새를 맡았다.
전하께서 직접 이곳에 행차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리 대단한 일도 아니고, 그저 나약한 감염자 무장 단체에 지나지 않습니다. 궁지에 몰리니 저항하기 위해 뭉친 불쌍한 자들일 뿐이지요.
……훗. 그자들 중에 살아남은 드라코가 한 명 있다고 해도?
그녀라면 확인되는 대로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널 질책하고 있는 게 아니야.
음…… 정찰병이 목표를 발견한 건가?
네, 정보와 일치합니다.
그런데 죄송합니다만, 이렇게 신경 쓸 필요가 있는 것입니까?
비록 그녀가 정말 붉은 용의 핏줄일지라도…… 그녀의 '신분'은 그저 전하의 주장에 조금 불리한 요소 정도일 뿐입니다.
하지만 그 정보가 사실이라면, 지금 그녀의 또다른 신분은 '감염자'입니다.
그렇다면 그녀는 전하에게……
감염자라.
드라코 감염자라면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람이 한 명 더 있잖아?
……
내 여동생도 얼마 가지 않아 내 곁으로 다시 돌아오게 될 거야.
그저 우리 사이의 토양에 영양을 공급하기 위해 불필요한 변수를 제거하는 거라고 생각해.
그런 거라면……
저게 드라코인가.
후훗…… 가족 이외의 드라코와 접촉하는 건 처음이야.
……
너흰 여기서 기다려.
내가 직접 간다.
앗……
조심해.
……고마워.
이 늪은 움직이기가 정말 불편하네.
그러게.
보급도 부족하고, 배도 채우거나, 제대로 된 치료조차 받지 못하고 있어.
부축해 줄까?
아, 아니, 괜찮아.
난 우르수스에서 여기까지 왔다고. 이 정도 쯤이야.
……
탈룰라는 걷는 속도를 늦추었다.
부대는 그녀를 따라 관목과 갈대를 헤치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부스럭대는 소리는 침묵보다도 조용했다.
왜 그래?
나인.
이 속박…… 풀어 줄 수 있을까? 그리고 네 아츠도.
너도 네가 오리지늄 아츠를 사용해선 안 된다는 거 잘 알고 있잖아. 이건 네 족쇄야.
네가 '영웅 탈룰라'가 되는 건, 빅토리아의 동포들 앞에서만이야.
난 영웅 따위가 아니야.
난 그저, 더 이상 누군가가 나 때문에……
말이 채 끝나지도 않은 그 순간.
죽음의 불길이 늪 깊은 곳에서부터 타올라, 길 잃은 부대를 포위했다.
무, 무슨 일이지?!
이 불길은 대체 뭐야?!
전원 경계!
저건……
말을 채 끝나기도 전, 불길한 어두운 보라색이 나인의 몸에 기어올랐고, 순식간에 그녀를 죽음 속으로 빠져들게 했다.
차가운 죽음의 불꽃이 모든 걸 집어삼킨다.
……'리유니온', 감염자.
또 자신의 운명에 저항하는 불쌍한 사람들이네. 정말 강인하고, 강력하고, 아름다워.
하지만 자신이 또 다른 음모에 휘말렸다는 사실은 전혀 모르고 있어. 드라코와 아슬란, 붉은 용과 사자라니.
너희는 머나먼 우르수스에서 일어나 붉은 용의 후손의 인도에 따라 여기까지 오게 되었구나.
결국 파멸을 불러오게 되었지만.
'탈룰라 아르토리우스'. 드라코, 넌 어떤 사람일까?
만약 정말로 네게 내 관심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면, 넌 이 죽음에서도 걸어나올 수 있겠지.
……
휘날리는 불꽃은 죽음을 의미하는 듯했고, 마른 나뭇가지와 갈대는 재가 되어 휘날렸다.
……그러나 꽃은 여전히 피어 있었다.
꽃이 죽음을 거부하고 있다.
……꽃?
이런 곳에…… 불타지 않는 꽃이 존재한다고?
나인.
……난 괜찮아.
이건 특수한 불꽃이야.
그래.
저 여자의 목표는 바로 나야. 내가 해결할게.
……
아직 전투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이 많아.
네가 저 사람들을 지켜야 해.
……네 사슬을 잡고 있는 건 리유니온이야.
아직 넌 심판을 받지 못했어. 그러니까 죽지 마.
죽음의 불길이 갈라졌다.
아니. 그녀의 죽음은 가냘픈 풀과 꽃에 가로막혔고, 분노의 불길에 의해 타올랐다.
불이 불을 태우기 시작했다.
감염자들은 그녀의 앞에서 등을 돌렸다.
그녀는 살면서 이처럼 무시를 당해 본 적이 없었다.
……
하지만 그 즉시 에블라나는 정신을 차렸다.
이 탈룰라라는 드라코는 단 한순간도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뜨거운 불길이 죽음의 불꽃을 물어뜯고 있다.
감정이 감정을 물어뜯고 있다.
탈룰라가 에블라나를 물어뜯고 있다.
이 순간, 헛된 선혈이 낭자하고 있었다.
에블라나가 웃음을 터뜨렸다.
탈룰라 아르토리우스, 에드워드의 딸, 빅토리아의 정당한 왕위 후계자.
이것이……
진정한 너구나.
우리 사이에는 아무런 연결고리도 없을텐데, 더블린의 드라코.
그걸 네가 결정하는 걸까?
네 자신을 봐, 붉은 용. 넌 이토록 강대하고, 힘이 넘치는 존재잖아.
그런데도 넌 붉은 용의 영광을 저 아슬란에게 넘겨주고, 놈들이 또다시 서쪽 회당의 레드카펫을 짓밟도록 내버려 둘 생각이야?
빅토리아는 드라코가 세운 국가야, 탈룰라.
……
왜 넌 계속 저항만 하는 거지?
난 네 불길에서 다른 사람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분노가 느껴져.
너도 갈망하고 있잖아? 갈망하지 않을 리가 없지!
……분노?
이대로 감염자들이랑 소꿉놀이나 하고 있을 생각이야? 어떻게 이렇게 편협할 수가 있지!
감염자? 그런 신분은 언급할 가치도 없어. 너라면 뛰어넘을 수 있어, 무시할 수 있어, 구할 수도 있다고.
지금 난 너한테 기회를 주는 거야, 탈룰라.
난 네가 감염자여도 상관 없어. 심지어 이 불쌍한 감염자 단체를 계속 운영한다고 해도 괜찮아.
……
네 불길에 난 감동했어, 탈룰라. 나와 함께라면 우리는 분명 원하는 모든 걸 이룰 수 있을 거야.
내 옆으로 와. 나한테 복종하면 타라가 네 편에 서게 될 거야.
우리의 대의는 별반 다를 게 없어. 너와 감염자들에겐 더 강렬한 결말이 필요해.
할 말은 그게 다인가?
……!
너……
드라코여.
네 눈에 비치는 건 욕망 뿐이야.
타라를 해방하거나, 빅토리아에 복수하거나, 네 사욕을 채우거나, 그도 아니면……
넌 네 스스로조차 자신의 끝없는 갈망이 대체 무엇인지 모르고 있어.
분노…… 네 말대로야. 나도 부정하진 않겠어.
그러니……
더 이상 다가오면, 내 불길이 널 집어삼킬 거야.
불.
분노.
평온한 분노.
평온한 분노가 그녀의 죽음의 끝에서 타오르고 있다.
……
난 드라코의 혈통에 대해선 관심 없어. 권력이나 국가도 마찬가지야.
너는……
네 그런 편협한 욕망과 생각으로 타라인들의 반란을 이끌고 있는 건가?
그렇다면 널 여기서 죽이는 게 더 좋겠어.
……
……확실히 아깝긴 하네.
혈통도, 권력이나 나라에도 관심이 없다니.
역사의 귀결, 허구의 왕관, 선동된 반란. 네 말이 맞아.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해? 설마 내가 단순히 여기에 심취해 있는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너는 분명 나에게 가장 큰 힘이 되어줄 수 있을 거야. 비록 다른 신하들은 나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내가 다른 드라코를 모조리 죽이길 원하지만.
하지만 그들 중 내가 어떤 이유로 나라를 세우려는 건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너 자신은 알고 있고?
물론이지.
내 여동생이 날 대신해서 이루어 줄 거야.
……일을 전부 가족에게 떠넘기지 마, 드라코.
사람을 함부로 죽인 것도 너고, 생명을 모욕한 것도 너야.
죽음은 내 포로에 불과해.
이 세상엔 당연한 죽음도, 의미 없는 죽음도 없어.
모든 힘을 가진 자의 죽음은 의미가 있지.
그걸 네가 결정하겠다는 건가?
설마 너, 너의 그 예의나 상냥함, 자비로움, 나아가서 오만과 경멸조차도 전부 거짓임을 깨닫지 못한 건가?
네가 어떻게 말하든, 넌 단지 거짓된 폭군에 불과해.
죽음은 그저 네가 권세를 부리기 위한 도구일 뿐이야. 난 이미 진정한 폭군을 본 적이 있지.
리유니온의 앞에서 썩 꺼져.
……정말 시시한 대답이네.
하지만 답은 언제나 바뀔 수 있는 법이지. 이렇게 널 여기서 죽이는 것도 너무 아까워.
'리유니온'이라, 그래, 방금 불이 붙지 않았던 그 꽃도 여느 꽃과 다름없이 사랑스러웠었지.
그럼, 만약 네가 복종하지 않을 시 더블린의 부대가 리유니온들을 전부 죽일 거라고 말한다면…… 어떡할래?
너……
우릴 적대할 거야?
네가 빅토리아를 떠나 우르수스에서 구차하게 살아가는 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난 느낄 수 있어.
네 강력하지만 무력하고, 깊지만 얕고, 분노와 후회로 가득 찬 불길 속에서 말이야.
……
나는……
그녀는 리유니온의 죄인이야.
너무 오만하게 굴지 않는 게 좋을 거다, 드라코.
이런, 아까 그 사랑스러운 꽃이네.
아직 네 부대가 멀리 가지도 못했는데, 넌 탈룰라를 정말 아끼는 모양이구나.
상관 없어. 리유니온이 강적을 한두 번 상대하는 것도 아니고.
더블린의 부대? 고속 전함을 몰고 오지 않은 게 네 실수야.
드론이 도착하기 전에 우리가 널 죽이겠어. 전력을 다해서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널 죽일 거야.
네 욕망과 야심은 아무래도 좋아. 지금은 너와 탈룰라의 붉은 용 이야기나 듣고 있을 기분이 아니야.
내가 아는 건, 네가 여기서 죽는다는 사실 하나 뿐이다.
반드시.
……
그런 눈으로 보지 마. 우린 서로, 일이 더 이상 커지는 걸 원하진 않잖아?
……그럼 이렇게 하자, 탈룰라. 또 한 명의 붉은 용의 후예여.
네가 날 거부하더라도, 네가 하는 일이 타라와 아무런 연관이 없다고 하더라도.
네 분노, 네 저항, 네 욕망과 대답의 종착점은…… 결국 나에게로 이어지게 돼 있어.
오늘 우리의 만남은 일종의 예언이라고 치자.
타라의 충성스러운 하인들이 곧 계속해서 이곳에 도착할 거야.
도망가, 리유니온. 빅토리아에 혼란을 가져오고, 우리에게 더 많은 기회를 만들어 줘.
다음에 만날 땐……
한 붉은 용이 다른 한 붉은 용을 물어 죽일 거야.
……
숨지 말고 나와.
해가 지면 이곳은 더 습해질 거야. 지금 주워온 장작으로는 불도 못 피워.
너…… 넌 누구야!
……감염자인가.
괜찮아, 나도 감염자야. 너흴 해코지할 생각은 없다.
……
그렇게 경계할 필요 없다. 나도 틀림없는 감염자니까.
너…… 너 빅토리아 사람 아니야?
염국인이다.
염국인이 왜 여기 있지?
……
장사하러. 그러다 이 전쟁에 휘말리게 됐지. 원래는 가족이랑 같이 도망칠 생각이었는데, 어쩌다 광석병에 걸려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버려졌고.
흥. 어디에도 감염자를 곱게 보는 동네는 없는데, 넌 운도 참 없군.
하지만 우리도 널 도와줄 순 없어.
그럴 것 같아 보였다.
불도 제대로 못 피우는 걸 보니, 오리지늄 아츠는 못 다루는 거겠지?
그렇다고 사냥을 할 줄 아는 것도 아닌 것 같으니, 너흰 얼마 못 살겠군.
감염자로서 군인에게 잡히든, 빅토리아 사람으로서 살카즈에게 잡히든, 결말은 다 좋지 않겠지?
그래서?
난 적어도 너희에게 불을 피워 줄 수는 있다.
자.
우와! 진짜로 불을 붙였잖아, 그것도 이렇게나 쉽게?
고맙다, 염국인. 정말 고마워.
넌? 우리에게 바라는 거 없어?
날도 어두워졌는데, 여기서 쉴 수 있을까?
내일 아침에 떠나도록 하지.
……넌 다른 나라에서 온 난민인데, 어떻게 그렇게 침착할 수 있는 거야?
게다가 네 검…… 얼핏 봐도 평범한 물건은 아닌 것 같은데.
……평범해 보이지 않는 물건이기 때문에 들고 다니는 거다. 염국에는 표국이라는 것이 있는데, 전달자와 비슷해.
난 신체 조건도 좋고, 산도 잘 타거든. 그래서 야외 생존은 나한테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야.
우릴 도와서 불을 피워줬으니까…… 그렇게 믿어줄게.
하아…… 살카즈한테 잡히지만 않으면 돼. 그게 군인한테 발견 당하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군인이라고 해도, 너한테 득 될 것 하나 없어.
지금 당장 먹을 것도 없는데, 그딴 소리가 무슨 소용이 있겠어?
리유니온 그 미친놈들…… 우릴 이런 꼴로 만들다니……
리유니온?
몰라? 아, 감염자가 된 지 얼마 안 됐다고 했구나.
……그래.
감염자 조직이야. 우린 리유니온이 우리의 구세주가 될 거라고 기대했는데.
싸우기라도 한 건가?
퉷.
사실 우리가 어떤 살카즈를 상대로 강도짓을 한 적이 있어. 그런데 그 녀석들은 우리가 감염자 '동포'를 해친다고 판단한 거야.
누가 살카즈랑 동포야? 놈들은 내 딸을 죽였다고!
내 딸이…… 내 딸…… 하아! 하!
……
그 조직에도 리더가 있었던 것 같은데……
'나인'.
그래, 맞아. 우릴 쫓아낸 게 바로 나인이야.
……
거기다 그 가드라고 불리는 간부도 있었는데, 죽었어.
……쳇, 뭐라도 구워먹고 싶네.
나도 지금 리유니온이 어떤 상황인지는 잘 모르겠어. 하지만 적어도 우리가 만났던 그 녀석들은 쓰레기 그 자체였지.
뭐? 하, 살카즈랑 손을 잡으라고? 다음에 또 그런 놈을 만나면 똑같이 때려 죽일 거야.
……
그리고 우리가 자주 들었던 그 우르수스 동토의 소문도 있었어.
……탈룰라였나?
……
'감염자들의 영웅'? 별 거 없어 보이더만.
계속 지켜보고 있었거든. 그 여자는 계속 나인의 뒤만 따라다니던데, 말도 몇 마디 안 하더라고.
감염자들 사이에 떠도는 소문 같은 건 원래부터 믿으면 안 돼. 어쩌면 나인이 우두머리일지도 몰라.
……하아. 지금 이 얘기를 해 봤자 뭐해. 염국인, 그쪽에 합류하고 싶어도 이젠 늦었어.
그 녀석들은 어디로 간 거야?
내가 어떻게 알아.
난 그때 저 녀석을 끌고 바로 거길 떠났었거든. 내 기억으론 여기서 십여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전달자 휴게소가 있었던 것 같아.
……그럼 일찍 쉬도록 하지.
내일 갈 길이 머니까.
……이상 없는 것 같아.
그런데 그거 들었어? 공작들이 드디어 만난 모양이던데?
윈더미어 공작 각하께서 돌아가셨으니, 다른 분들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겠지.
하아. 그분의 전설이라면 지금도 내 이동 단말기에 저장되어 있는데……
전설 같은 건 이제 아무런 쓸데도 없어.
그건 그렇고…… 너 혹시 우리가 체틀리를 인계받기 전에 누가 여길 지켰는지 알고 있어? 난 체틀리가 진작에 살카즈들한테 점령당한 줄 알고 있었거든.
어떤 떠돌이 부대였나? 어쩌면 여태까지 활동 중이라는 그 소문의 런디니움 시민 자경단일지도 몰라.
……대단한데. 현장에 제대로 된 장비라곤 전혀 없던데, 진짜 잘 버틴 모양이야.
그러게. 분명 경험이 풍부한 일당백들일 거야.
그렇겠지. 설마 갑자기 뭉쳐서 일어난 길거리 불량배나 밑바닥 노동자들이겠어?
척후병이 정보를 보내왔어.
장관님께서 생각하셨던 거랑 크게 다를 건 없네…… 애초에 예측하기가 힘들다는 거지.
하아, 텐트로 보내자. 여기선 봐도 몰라. 살카즈 녀석들의 군사 전술은 진짜 우리 상식 밖이라니까.
좋아.
……잠깐.
척후가 이상한 부대 식별 코드를 발견했다는데?
함께 보고할까?
……
'파라곤 부대'?
'파라곤 부대'라면 4국 전쟁의 그……
……
……이걸 어떻게 보고하지? 척후가 유령을 봤다고 보고해야 하나?
……'파라곤 부대'라.
혹시 관련해서 알고 있는 거 있나?
아니요…… 전 파이프 공작님 휘하 제4보병대…… 뭐, 그게 중요한 건 아니겠죠.
그래, 지굼 닌 감염자일 뿐이다. 낸 탈영병일 뿐이고……
하하, 우리 서름 참 기구한 운명이다야. 이렇게 체틀리 카운티에 와서 에레 더 숨어다녀야 한다니.
백파이프 씨…… 전 안 웃긴데요.
체틀리 카운티는 이미 군의 관할 아래에 있는데 저희도……
……하아.
닌 분명 이맘때 건초더미 위에 늡으면 얼마나 기분 좋은지 몰르겠지. 나도 고향의 군인 친구들이랑 파티하고 싶다야.
하지만 지금 난 함부루 모습을 드러내선 안 된다니. 군에서 탈영병은 정말 도마이 위의 파울비스트 취급이거든.
백파이프 씨는 좋은 분이잖아요, 분명 오해를 풀 수 있……
그 말은 일 년 전의 나한테 해 줘. 그때라면 믿을지도 모르겠다야.
'파라곤 부대'라……
……'파라곤 부대'라면 폭풍 돌격대의 전신 부대 아니나?
아직도 날 따라오는 건가?
윽.
그야 네가 강해 보이니까…… 심지어 우린 이틀 동안이나 밥을 못 먹었다고……
우린 모두 감염자잖아.
……조금만 더 동행하도록 하지.
산 하나만 더 지나면 너희가 말한 그 휴게소를 발견할 수도 있겠군.
어쩌면 이미 파괴되었을 가능성도…… 잠깐.
저, 저길 봐, 사람 아니야?
사람이다.
긴장하지 마. 무장한 인원은 적어 보이니까.
자, 잠깐만, 빅토리아인이야! 딱 보니 알겠어!
저 사람들 난민들 아니야? 호위병도 있잖아!
어떡하지?
살카즈를 만난 것보단 훨씬 낫지만, 우리는 감염자인데…… 혹시라도……
……
다른 감염자들은 이미 우릴 버렸어, 이렇게 굶어 죽는 것보단 낫겠지.
게, 게다가 이 전쟁으로 인해 감염되는 사람이 얼마나 더 많아지겠어? 아무리 그래도 설마 그 많은 감염자들을 죄다 포기하겠어?
그럴 리가 없어. 그래, 분명 그럴 거야.
내가 가 볼게.
어이!
……
저, 저 녀석 진짜로 저질렀어! 병사들이 공격하기라도 하면 어떡하지?
게다가 넌 그, 염국인인데…… 혹시라도……
……걱정할 필요는 없어 보이네.
봐. 즐겁게 대화하고 있잖아.
응?
그, 그러게. 손을 흔들고 있잖아. 내가 한번 가 볼게.
……
첸은 두 감염자들이 자신들의 동포와 어울리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경계하고, 말을 걸고, 대화를 나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가 그들의 어깨에 손을 올렸고, 즐거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첸은 오랫동안 한 자리에서 머물렀다.
이봐, 염국인!
내가 다 얘기해 뒀어, 너도 우리랑 같이……
어라, 어딜 갔지?
“살카즈 하나를 때려 죽였다고? 이야, 넌 우리 영웅이야!”
……
흥.
……드디어 내 초대를 받아줬군, 고도딘 공작.
보아하니 당신도 지금 상황이 여의치 않다는 걸 깨달은 모양이네.
네. 우리 신중하신 캐스터 공작조차 자신의 영지를 떠나 전선으로 직접 향하실 정도로 상황이 나쁘더군요.
빅토리아 대공작이 전장에서 죽다니…… 이런 일이 생긴 게 대체 얼마 만인지.
당신을 뒤에서 의심하는 동료 귀족들이 꽤 많습니다. 당신과 윈더미어 공작이 항상 대립해 왔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니까요.
그 고집스러운 윈더미어라면 런디니움에 들어가려는 당신의 작은 계획에 동조했을 리가 없겠죠.
……
하지만 전 당신이 한 일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확실히 당신은 윈더미어의 패배를 바랐겠지. 하지만…… 그녀가 죽은 지금, 당신은 오히려 더 곤란하게 되었어.
아, 우리 모두가 곤란하게 되었다고 하는 편이 더 좋을까요?
……지금 우리 젊으신 고도딘 공작께서 풍류에 빠져, 고도딘 가문의 지혜와 기민함을 잃어버렸다는 소문이 자자하더군.
우리나라는 아무래도 사람을 알아보는 능력조차 잃어버렸을 정도로 약해져 버린 모양이야.
알랑거리지 마시죠. 전 이것저것 신경 쓰고 싶지 않아서 그런 것 뿐입니다. 당신에 관한 일도 포함해서 말이죠.
하아, 어째서 이 전쟁은 우리에게 주어진 책임을 직시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걸까요? 저도 어쩔 수 없이 제 몸을 시대라는 테이블에 내던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제가 플레이어를 한 명 더 불렀습니다.
그 사람을 고속 전함에서 끌어내리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죠.
……
……
설마 웰링턴 공작이 직접 올 줄은 몰랐군.
난 시간이 많지 않다.
듣기로는 전장에서 꽤나 곤란을 겪고 있는 것 같던데, 나흐체러르 킹이라는 자가 상대하기 까다로운 모양이지?
……흥.
그저 살카즈일 뿐이야.
아무쪼록 몸조심하세요. 어찌 됐든 웰링턴 공작 당신은……
아직 네가 내 나이를 알려줘야 할 만큼 늙진 않았다.
전선의 교착 상태라면 금방 해결될 거다. 윈더미어의 패배가 전국 전체에 미친 영향은…… 상당히 미미한 수준이니까.
우린 곧 빼앗긴 전선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의 용맹한 진군 덕분에 여러 대공작들의 부대도 살카즈군과 접촉할 수 있었죠.
그것만으론 아직 부족해.
이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선, 우린 반드시 효과적인 공격 계획을 잘 세워 진행해야 한다. 제각각으로 방어선만 지켜서는 전쟁을 이길 수 없지.
이젠 반격을 해야 할 때야.
……같은 생각이야.
두 분의 의견이 일치하다니, 오래 살고 볼 일이네요.
살카즈들은 이미 런디니움을 점령했다고 공식적으로 선포했어. 이는 살카즈들이 더는 숨어다닐 필요가 없다는 걸 의미하지.
이건 우리에게 절대 좋은 소식이 아니야.
3일 후면 내 후속 부대가 집결할 거다.
이전 전투에서 약간의 손실은 입었지만, 웰링턴의 함선은 여전히 가장 먼저 폭풍 속으로 뛰어들 것이다.
……나도 함께하지. 파이프 공작과 노르망디 공작이라면 내가 책임지고 참여시킬게.
그 애버콘과 애시워스도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도는 알고 있을 거예요……
공작들이 고속 전함을 타고 런디니움의 성벽을 공격하다니, 정말 전대미문의 사건이군요.
흥, 이번이 마지막이었으면 좋겠군.
전군에 알려라, 이번 전쟁은 내가 지휘한다.
물론 그러시겠죠.
그럼 전선에서 처리해야 할 일이 아직 많아서, 이만 실례하지.
……이렇게 가 버리다니, 정말 바람 같은 사람이네요.
전 어렸을 때부터 '제국의 조종'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어요. 그런 그에게도 머리와 수염이 전부 새하얗게 변해버리는 날이 올 줄이야.
하아, 공작들의 군사적 동맹이라니. 예전 같으면 정말 경천동지할 대사건이지만, 지금 우리 모습을 보세요. 제대로 된 회의조차 없어요.
……
방금 그 사람이 하는 말씀을 듣자하니, 그 사람도 결국 지기 싫어하고 고집 센 늙은이가 되어버렸더군요.
캐스터 공작, 제가 싸움에 관해선 아는 것 하나 없긴 하지만, 웰링턴 공작의 상태를 보니 그를 완전히 신뢰할 수는 없을 것 같더군요……
캐스터 공작?
……그렇지, 신뢰.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단지 젊었을 적 일이 떠올랐을 뿐.
웰링턴…… 그는 지금 자신의 조급함과 불안함을 애써 감추고 있어. 심지어는 힘이 부치는 모습도 보이고 있지. 확실히 나이가 들긴 했으니까.
하지만 나를 속일 순 없어. 그는 거짓말을 하고 있어.
웰링턴 공작과 알고 지낸 지 꽤 되셨죠?
너무 오랫동안 알고 지냈지…… 심지어 그 당시 나는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 소녀였으니.
그럼 당신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그가 나흐체러르를 언급했을 때, 그 눈빛은 젊은 시절의 눈빛과 똑같았어.
마주한 게 적이든 아군이든, 그는 항상 사냥감을 찢고 그 피를 마시는 굶주린 맹수 같았지.
상대의 내장을 뜯어내고, 뼈까지 전부 씹어버리려고 하는.
사냥하고, 집어삼키고, 강해지고. 그는 한때 그런 전사였는데.
그 사람은 나이가 들어서도 식욕이 왕성하군요.
그럼 혹시 그를 알게 됐을 무렵, 웰링턴 공작의 뱃속으로 들어간 사람이 누군지 알고 계십니까?
이반 에브게네비치.
헤르쿤프트쇼른.
그리고 코르시카 1세.
……호오.
그 당시의 당신은 확실히…… 젊었군요.
캐스터 공작령의 귀족들 사이에서 일종의 불운의 상징으로 여겨지던 말이 있어.
“4국 전쟁 이후, 진정한 빅토리아 대공작은 단 한 명 뿐이다.”
그 후 우리는 60여 년 동안이나 그를 제한하고, 힘을 약화시키려고 했지. 민중은 평화 속에서 영웅을 잊었고, 귀족은 공포 속에서 조종을 배척했어.
그래서 그가 지금은 지친 모습이 된 거야.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돼. 젊었을 때, 끝없이 이어진 전선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던 그가……
우르수스의 황제와 나란히 섰던 그가, 리치킹의 마법을 직접 목격했던 그가, 가장 위대한 군왕을 마주했고, 가장 거대한 현대 도시를 해체한 그가……
……어째서 이렇게 순순히 당하고만 있단 말인가?
흐음……
그 말씀은 우리가 수십 년 동안이나 힘을 숨겨왔으며, 어쩌면 지금도 빅토리아에서 가장 강력할지도 모르는 장군의 진면목을 드러내게 해야 한다는 겁니까?
하하, 웰링턴 공작을 초대한 건 당신이잖아. 당신도 그에게 아직 숨겨둔 패가 있다는 걸 잘 알 텐데.
갑자기 조금 떨리네요. 오늘은 창밖 바람이 참 큰 것 같습니다.
추운가? 감기 조심해, 고도딘 공작.
하하, 그럴 리가요, 걱정 마시죠.
모두가 말하듯, 저는 분명 먹는 것을 밝히고 게으르답니다. 군함보다는 제 사랑스러운 장원에서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하는 쪽을 즐기고요……
하지만 겨울만은 유독 좋더군요.
앗! 도착했다!
또 통신 설비랑 씨름하는 거야?
내가 벌써 몇 번이나 말했을 텐데, 클로저.
최근 순찰 경로는 런디니움의 도시 내 신호를 받을 정도로 깊지 않았다고.
하지만 나도 몇 번이나 얘기했잖아, 나는 로도스 아일랜드의 엔지니어…… 클로저라고!
봐봐, 이렇게 여러 번 개조하니까 이 로도스 아일랜드 전용 통신설비도 다른 채널의 신호를 받을 수 있게 됐잖아!
어디 보자……
“런디니움 자경단에서 알린다, *시끄러운 잡음*. 반복한다, 지휘관 클로비시아와 아직 떠나지 않은 자경단 전사들이 전투 중이다. 반복한다, 지원이 필요……”
클로비시아 지휘관! 역시 지휘관님과 다른 전사들이라면 무사할 줄 알았어!
어서 가서 이 소식을 모두에게 알려야겠어.
무사하다니 다행이네. 내 손에 있는 공구도 테스트가 끝났어.
잠깐만, 로도스 아일랜드 채널에서 온 메시지도 있어.
설마…… 블레이즈 쪽에 무슨 일이 난 건 아니겠지? 평범한 감염자들도 그렇게 많은데……
“*시끄러운 잡음* 빅토리아 런디니움으로 향하는 이함 신청이 승인되었습니다 *시끄러운 잡음*, 현지 사무소 오퍼레이터들은 맞이 준비에 착수해주십시요.”
“반복합니다, 맞이 준비에 착수해주십시요.”
책은 이렇게나 많은데 먹을 거라곤 풀쪼가리 하나도 없네.
먹을 게 없으면 책이 많아봤자 무슨 소용이야.
정말 여기에서 먹을 걸 찾을 수 있다고?
정 안 된다 싶으면 어디 집이라도 쳐들어가지 뭐.
반항하지 않을까?
전부 잡혀갔을걸.
흐아암~ 하아, 힘들다.
역시 옛날이 더 간단하고 좋았어.
휘두르고, 베고, 다시 휘둘러 다음 사람을 베고. 그럼 주머니가 두둑해지잖아.
지금은 이게 뭐야? 풀쪼가리 하나도 없이.
그런데 런디니움은 아직 빅토리아에 속한다고 봐야 하나?
그러니까 내 말은, 우리가 여길 완전히 점령했잖아. 그럼 여긴 살카즈의 새 도시로 쳐야 할까? 아니면 빅토리아일까?
알게 뭐야.
내가 아는 건, 요즘 날씨가 더 흐려졌다는 것 뿐이야. 저 빌딩의 꼭대기가…… 상당히 기괴해.
섭정왕께서 저기에 계시는데 걱정할 게 뭐가 있겠어.
혹시…… 이상한 소리 같은 거 못 들었어?
응? 못 들었는데.
이상하네……
거대한 모습이 그림자 속에서 떠오르고, 불처럼 타오르는 광선이 적막한 거리를 꿰뚫는다.
그것은 자신의 무거운 오른팔을 들어올리더니 힘껏 내리친다.
……
마치 환각이었다는 것처럼, 갑주는 또다시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저 투구에서 배어나오는 한 줄기의 미약한 불빛만이 그가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줄 뿐이었다.
……
그녀는 손을 뻗어 기사를 만지려 했지만, 갑주에 남은 열기에 놀라 물러났다.
갑주는 그저 침묵했다.
……
전하, 무엇을 보고 계십니까?
먹구름.
……더 샤드의 충전은 완료되었습니다. 고해신부들의 연구에 따르면, 오리지늄 반응을 통제할 수 있는 이러한 장치는 그 '오리지늄' 또한 조종할 수 있다고 합니다.
대공작들의 군대가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며칠 뒤면……
아니, 이곳의 먹구름 말고.
런디니움에 일어날 일은, 이제 더 이상 바꿀 수 없어.
……
맨프레드, 너는 카즈델에서 태어났다고 했지. 네 기억 속의 카즈델은 어떤 모습이었어?
제가 어릴 적에, 카즈델은 이미 전하에 의해 이동도시의 궤도 위로 옮겨졌습니다.
제 기억 속의 카즈델은…… 언제나 우중충한 곳이었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빅토리아보다도 끔찍한 날씨였습니다. 공기에선 항상 코를 찌르는 공장 매연의 냄새가 났지요.
너는 그곳을…… '고향'이라고 부를 수 있어?
……
예.
그렇구나.
나는 있지, 살카즈는 항상 먹구름 속을 거닌다고 생각했어.
우리는 그 먹구름을 베어 가르자고 맹세했지만……
그렇지만, 모든 것이 드러나고 나면……
그제서야 진정한 재앙이 뒤따라 찾아올 거야.
……우리가 과연 늦지 않을 수 있을까?
……
내가 바라보는 빛이, 그때에도 여전히 빛날 수 있기를.
내가 이미, 어둠 깊은 곳에 있을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