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7대답해
피스트의 도움으로 로도스 아일랜드 일행은 전장에서 철수한다. 시즈는 마침내 국검 '왕의 숨결'을 손에 넣지만, 알레데일이 갑자기 그와 대립한다.
박사! 아미야를 데리고 얼른 여기를 떠나야 해!
- ......
저건 테레시스야…… 샤이닝 혼자서도 오래 버틸 수 없다고!
드론……
와이어를 꽉 잡아, 박사. 최대한 멀리까지 갈게!
후우…… 하…… 콜록콜록……
여차하면 내가 쟤네를 막으면 돼.
나도 싸우고 싶지 않아.
하지만…… 테레시아는 나를 다락방에서 세상 밖으로 끌어내 왔고, 아미야와 켈시가 이 일의 책임이 얼마나 막중한지 알려줬어.
어쨌든…… 나도 뱀파이어니까.
너희를 위해서라면, 난……
클로저 씨, 이쪽을 봐봐!
어?
간다, 박사…… 와이어는 단단히 묶었어. 손을 줘봐!
장검이 바닥을 내리찍자 빛이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모두가 시간이 멈추는 그 찰나의 순간을 느낄 수 있었다.
……고해신부의 주술인가.
전하!
켈시 훈작이……
켈시의 이번 목숨도 끝을 향해 가고 있다.
로도스 아일랜드가 그 카우투스도 구출해 갔습니다. 뱀파이어 생귀나르는 지금 밴시와 아스카론을 추격하고 있습니다.
테레시아 쪽 상황은 어떻지?
방금 신호를 받았습니다, 전하.
준비는 이미 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래.
섭정왕은 고개를 들어 먹구름에 가려진 하늘과 멀리 위치한 방벽을 바라봤다.
방벽 너머야말로 살카즈의 진정한 전장이었다.
그럼, 시작해야겠군.
……준비 다 됐어?
딱히 준비할 것도 없어.
그러게, 드디어 여기까지 왔네.
비나, 나는……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지켜봐야 해.
시커먼 건물이 지하 공간의 끝에서 침묵하고 있었으며, 그 안에는 정교하고 복잡한 구조물이 배치되어 있었다.
여러 세대를 걸쳐 빅토리아의 가장 걸출한 두뇌들이 이곳에 모였고, 그들은 심혈을 기울여 이 모든 것을 만들어냈다.
단지, 그 검을 안치하기 위해서.
그 검을 손에 쥐고 재앙을 가를 수 있는 영웅은 극히 드물 것이다. 지금 이제 인류의 지혜로 폭풍을 막는다는 이 방패를 펼칠 때가 왔다.
이러한 구조, 나아가 이 건물 자체가 이것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목소리가 또 다시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더 이상 간절하지도, 날카롭지도 않고, 훈계나 선동의 의도도 없었다.
이에 그녀는 뭔가 지친 듯한 하지만 평온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 그녀는 이곳에 온 적이 있었다. 기억이 형성되기 훨씬 전에 누군가가 의해 끌려온 적이 있었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그녀는 자신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손에 무엇을 쥐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검은 방 한가운데 수직으로 꽂혀 있었다. 지키는 사람도 없고, 지킬 것도 없다는 것처럼, 또 마치 건물 속의 작은 장식품처럼 그냥 평범하게 꽂혀 있었다.
왕의 숨결.
천 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면서 여러 번 주조되었지만, 그것은 항상 그곳에 있었다.
시즈가 손을 뻗었다.
산산조각이 난 환영들이 공간에 가득 채워졌고, 이내 꿈틀거리며 공명했다.
알렉산드리나. 알렉산드리나 비나 빅토리아. 그들은 그녀의 귓가에서 그녀의 이름과 성을 되뇌었다.
시즈의 손이 검에 닿았다.
과거의 기억 단편들이 그녀의 몸을 관통했고, 굉음이 시즈의 뇌리 깊은 곳을 스치고 지나갔다.
시즈는 문득 깨달았다.
그 광경들, 그 목소리의 근원이 자기 자신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것은 그녀 자신의 망설임, 곤혹, 후회와 그리움이었다.
그것은 그녀가 망각했던, 혹은 일부러 잊어버린 것이었다.
커다란 손이 그녀를 들어 올렸다. 런디니움이 그녀 밑에서부터 일어나 그녀를 태우고 빅토리아의 땅을 가로질렀다.
그것은 그녀와 그녀의 동료들이 함께 걸었던 땅이었다.
무수한 목소리가 한데 뒤섞였다.
빅토리아, 빅토리아.
이게 바로 빅토리아다.
이곳이 바로 그녀의 빅토리아다.
“비나, 비나.”
귓가에서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잇따라 들려왔다.
……
시즈는 눈을 떴다. 더 이상의 환각도, 감정의 파도도 없었다. 단지 그녀의 손에는 빅토리아 왕권을 상징하는 왕의 숨결이 쥐어져 있을 뿐이었다.
그것은 전설처럼 특별하지도, 크지도 않았으며 화려한 장식조차 없었다.
그저 평범한 검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비나, 드디어 왕의 숨결을 손에 쥐었구나.
생각했던 것보다…… 가벼운데.
가자, 이제 집으로 돌아가자.
우리……
시즈는 친구들과 함께 이 검의 온도를 느끼고자 몸을 돌리려고 했다.
……뒤돌아보지 마.
하지만 목소리와 함께 더 차가운 칼날이 그녀의 허리춤에 닿았다.
……알레데일.
뒤돌아보지 마! 부탁이야, 뒤돌아보지 마.
……그 검을 줘.
……
알렉산드리나 전하, 미안해, 정말…… 정말 미안해.
나는……
……
나는 이렇게 할 수밖에 없어.
알레데일의 목소리는 조용하고 차분했지만, 뭔가 엄청난 슬픔이 묻어 있는 것만 같았다.
시즈는 문득 모건이 장난삼아 쓴 아직 몇 장 안 되는 '회고록'이 떠올랐다.
문장은 간단했고 사용한 어휘도 고급스럽지 않았다.
이야기는 멋대로 각색된 전투에서 시작되었다. 이야기의 시작은 전투가 끝나자 모두 거점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시작했고, 이야기 속 알레데일은 모두를 위해 크림 스튜를 만들어 줬었다.
이 이야기를 보며 그녀는 속으로 살며시 웃었었다. 알레데일이 실제로 모두를 위해 스튜를 끓여준 적은 있었다. 그러나 회고록에서 생략된 부분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맛이 별로였다는 것이다.
시즈!
윽……!
……꼼짝 마.
너도…… 너희들 모두……
기사 아가씨, 널 해치고 싶은 생각은 없어.
하지만 나는 예전에 진 신세를 갚아야 해서.
우리 임무는 이 알레데일 씨를 도와 왕의 안식처에서 이 검을 가져가는 거야.
이번 일만 끝나면 나도 은퇴할 수 있어.
……너무 매력적인 보수였거든.
……
용병, 방금까지도 우린 배신당해 죽은 영웅을 함께 애도했잖아.
너라면 이해할 줄 알았는데.
결국 너도 놈들과 다를 게 없구나.
한순간이라도 너를 믿으려 했던 내가…… 너무 부끄럽다.
꼬마 아가씨, 조금 전에도 우린 '사는 게 힘들다'라는 얘기를 했잖아.
미안하지만, 나도 우리가 모두 살아남길 원해. 아니, 우리 모두 살아남도록 최선을 다할 거야.
우린 다 똑같아, 모두…… 동료에게 벼랑 끝으로 내몰린 사람들이야.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번에 우리의 길은 달랐을 뿐이지.
알레데일……
알렉산드리나 전하.
당신의 안전을 위해 왕의 숨결을 넘겨줘.
……
이 방법밖에는 없는 거야?
내가 당신의 신뢰를 저버렸으니, 나도 할 말이 없어.
나를 훈계하든, 책망하든, 때려눕히든 다 받아들일게.
하지만, 난 반드시 이 검을 가져가야 해.
이건 내가 런디니움에서 짊어져야 할…… '사명'이니까.
……네가 말했잖아, 왕의 숨결은 폭풍으로부터 런디니움을 지킬 수 있다고.
나도 런디니움을 나락으로 빠뜨리고 싶진 않아. 안심해, 이 검이 절대 살카즈의 손에 넘어가는 일은 없을 거야.
그렇다면, 대공작들의 협상 카드인가.
……
알레데일, 네 배후에 있는 사람은 왕의 숨결을 이용해 다른 공작들을 자기 진영으로 끌어들이고 위협하려는 거야.
그 사람은 진정으로 빅토리아를 지키려는 게 아니라고.
하지만 우리, 우리의 힘은 한정돼 있지만, 적어도 우리는 언제 발발할지 모르는 이 전쟁을 막으려 하고 있어.
피해를 보고, 모욕당한 사람들과 함께.
나도 잘 알아.
나도 그 여자의 목적을 알아. 하지만, 그건 나랑 상관없어.
나는 그저 내가 관심 있는 일, 내가 해낼 수 있는 일을…… 책임지고 할 뿐이야.
그럼 자경단은?
넌 클로비시아와 함께 자경단을 창립했고, 명예를 걸고 자경단을 지켜왔잖아.
내게 명예 따위는 없어.
목숨 걸고 지켜왔는데도?
만약 네가 이대로 떠난다면, 난 자경단 전사들한테 뭐라고 말해야 하지?
……클로비시아가 알아서 잘 처리할 거야.
난 그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신경 쓸 겨를이 없어.
……
알레데일, 너는 네가 해낼 수 있는 일에만 관심 있다고 했잖아.
너는 네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너무 하찮게 여기는 거 아니야?
그것들을 언젠가는 잃게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너라면 그걸 아직도 가지려고 할까?
모두가 믿고 존경했던 것이 위장에 불과했다는 걸 알게 되면, 과연 자신을 드러낼 수 있을까?
걷고 있는 길이 애초에 여기까지밖에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면, 과연 끝까지 걸을 수 있을까?
심지어 이건 내가 선택한 결과가 아니야……
나는 그냥 여기까지 왔을 뿐이야, 비나. 그걸 깨달았을 때 운명이 이미 나를 이곳까지 떠밀었어.
처음부터, 우리는 함께 갈 수 없었어.
……
우리 어렸을 때 만난 적 있지?
……
컴버랜드 공작 저택에서.
잊은 줄 알았는데.
잊을 뻔했어…… 그때 나는 가웨인과 같이 있었지.
그때 그 태양 같은 생물이 알려줬어. 언젠가 당신을 만나게 될 거라고.
하지만 우리의 결말이 이렇게 될 줄은 그 생물도 몰랐을 거야.
비나, 그 검을 줄 생각은 없구나.
그렇다면, 그걸 휘둘러. 우리는……
알레데일.
내가 약속했던 거 기억나?
그만해! 그만 말해!
나는 이제 그 어떤 짐도 짊어질 필요가 없으니까, 이제 그저 당신들의 브레인으로……
미안, 당신에게 모건이 있다는 걸 깜빡했네.
그럼 난 그냥 깍두기나 하지 뭐.
우리 같이 가서 살카즈의 캠프를 폭파해 버리자. 당신이 불을 붙이고, 연기가 세게 피어오를 때쯤 내가 몰래 들어가서 지휘관의 엉덩이를 걷어찰게.
……
농담이야.
나도 알아.
나는 정해진 길을 끝까지 걸을 수밖에 없어, 비나.
왜 그런 말을 해? 너에겐 아직 우리가 있잖아. 글래스고 패거리에서 새로운 이야기가 많이 생길 거라고.
그렇다면……
내가 승낙했다.
네가 그 지휘관의 엉덩이를 걷어찬 후에도 무사히 돌아올 수 있도록 지켜줄게.
이건 내 약속이다.
지금도, 그 약속은 유효해.
우리 모두 돌아갈 수 있어, 무사히.
……
갑자기 울린 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착각인가?
시즈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커다란 석상들은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고, 바닥에 널브러진 살카즈의 시신들도 전혀 되살아난 흔적이 없었다.
또 한 번 소리가 울렸다.
근처에서, 바로 그녀 앞에서.
분사음의 빈도가 점점 빨라졌다.
소리는 갈수록 커졌고, 더 분명하게 들려…… 지하 공간 전체를 메웠다.
저…… 저게 뭐야!
알레데일은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녀는 느낄 수 있었다.
운명의 전조가 지금 다시 한번 잔혹하게 메아리치리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