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정체
캐서린은 26년 전에 근로자들이 항쟁에 실패한 이야기를 피스트에게 들려줬고, 보급로에 관한 정보를 피스트와 박사에게 남긴다. 알레데일과 시즈는 작전 중에 살카즈에 추격당한다.
피스트는 또 호되게 혼날 줄 알았다.
그는 어떤 말로 눈앞의 이 고집스러운 베테랑을 설득할 수 있을까 마음속으로 몇 번이고 궁리했다.
너무나도 많은 일을 겪은 탓에 캐서린의 성격은 공장의 기계보다 더 단단해져 있었다.
피스트의 화려한 말솜씨가 캐서린에게는 통한 적이 없었다. 캐서린의 매서운 눈은 마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것 같았고, 본인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두뇌도 캐서린 앞에서는 그저 부스러기 같아질 뿐이었다.
피스트는 익숙한 실망감을 느꼈다.
할머니 앞에서는 항상 어린아이로 돌아간 듯, 행동거지가 서툴러지고 감정이 격해지며, 툭하면 후회할 말을 내뱉곤 했다. 그는 할머니가 먼저 입을 열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캐서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캐서린은 피스트를 데리고 한참을 걸었다. 마침내 멈춰 섰고, 피스트는 슬쩍 할머니의 눈치를 살폈다. 의외로 캐서린의 표정에는 분노의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
저 앞은……
아무것도 아니지.
나 이 작업장 기억나. 예전에 할머니가 항상 혼자 오던 곳이잖아. 그런데 왜 생산 라인에는 아무것도 없지?
여기가 뭐 하는 곳일 것 같니?
나이 든 직원들이 가르쳐주지는 않았지만, 패토가 데이랑 내기를 했는데, 여긴 아마도…… 당시 증기 갑옷을 만들던 비밀 작업장일 거라고 예상했어.
패토에게 전해, 걔가 이겼다고.
그래서, 이곳이 정말로 증기 갑옷을 만들던…… 아니, 이해할 수 없어……
전에 몇 번 할머니를 따라 몰래 들어온 적이 있는데, 그때는 분명…… 기계랑 컨베이어 벨트가 돌아가는 소리를 들었거든.
전원만 올리면 지금도 가동할 수 있어.
……그런데 왜 안 쓰고 있어? 증기 기사가 빅토리아에서 사라졌기 때문에? 아니지, 아무리 주문이 없다고 해도, 이 기계들은 매우 귀하잖아. 이대로 방치해 둘 이유가 없는데.
왜 멈췄냐고? 글쎄, 왜 그럴까?
캐서린은 차가운 금속 덩어리에 질문이라도 하는 듯 눈앞의 기계를 두드렸다.
피스트는 이곳의 모든 설비들이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하다는 걸 발견했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왜 내가 혼자 여기에 오는지 알아?
캠, 마이크, 브랜슨…… 그들은 모두 저쪽에 서 있었어. 그리고 하비, 하비는 추진기를 담당했지.
이 생산 라인이 가동되었을 땐…… 훗, 그렇게 완벽한 리듬을 들어본 적이 없어. 장담하는데 그 어떤 멜로디보다 아름다웠어.
하비…… 하비는 아버지 이름이 아니야?
맞아.
네 아빠는 이 공장에서 가장 똑똑한 직원이었어. 머리에서 항상 기발한 아이디어가 많이 튀어나왔지.
사진에서만 봤는데.
네가 네 아빠를 만났어야 했어. 게다가 너는 네 아빠를 많이 닮았어…… 가끔 판박이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
하비는 증기 엔진의 전문가였어. 걔 자체가 하나의 엔진 같았지. 가끔 모두를 끌고 가는 속도가 너무 빨라서, 나조차도 따라갈 수 없을 정도였어.
……내가 따라갔어야 했는데.
아버지는 길거리 사고에 휘말려서 실종된 거 아니었어? 어렸을 때부터 내가 물을 때마다 할머니는 항상 그렇게 알려줬잖아?
길거리 사고라…… 26년 전 발생했던 그 전란이 정말로 '사고'라 불릴 만했다면.
26년 전?! 폐하께서도 그때……
맞아, 하룻밤 사이에 런디니움은 혼란에 빠졌고, 대공작을 필두로 귀족들 사이에 충돌이 끊이질 않았지.
많은 공장이 영향을 받았는데, 특히 증기 갑옷을 생산하던 우리 같은 군수 공장들은 모두 강제로 생산을 멈추게 됐어.
하비는…… 그땐 아주 젊었는데. 맞아, 지금의 너랑 비슷한 나이었어. 걔는 이 공장을, 이 도시를 매우 사랑했지.
그날 걔는 귀족들에게 시위하기 위해 다른 직원들과 함께 공장을 떠났어. 공작들에게 근로자들의 목소리를 들려주고, 근로자들의 기본 생활을 보장하게 해주고 싶었던 거지.
하…… 너무 순진하지 않아?
……
나는 몇 번이고 생각해봤어…… 12월의 런디니움은 너무 춥지 않을까? 걔 가슴에서 흘러나온 피는 여전히 뜨거웠을까?
아버지는…… 이상을 위해서였구나.
이상을 위한 희생은 고상하다, 이렇게 말하고 싶은 거지?
너희 자경단의 리더, 그리고 '박사'…… 그들이 전사한 동료를 애도할 때 모두 이런 말을 읊지 않아?
……클로비시아 지휘관이라면 그렇게 말할 거야. 박사…… 박사는 아마 평소보다 더 과묵해지겠지. 하지만, 다들 진심이야.
그런데 아쉽게도, 죽은 사람은 본인이 얼마나 위대한지 몰라.
산 사람한테는…… 이런 위로의 말은 담배 연기처럼 가벼워. 폐에 들어갈 때는 기분이 좋아도, 토해낼 땐……
캐서린은 숨을 들이쉬고 조금 멈춘 듯하더니, 다시 천천히 내뱉었다.
하지만 날이 아직 춥지 않아, 공기 중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사실은 단 하나뿐이야. 26년 전 그날 밤, 41명이 중앙 구역의 거리에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았어.
그 뒤로, 런디니움은 역시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지. 귀족들도, 부자들도 그저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지냈고. 하지만 이 작업장은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었어.
난 이제 늙었어, 피스트. 난 더 이상 이렇게 훌륭한 일꾼들을 키워내지 못해.
원래대로라면 그들이 내 일을 이어받을 차례였는데. 그래, 하비야말로 네게 모든 걸 가르쳐줘야 했는데.
할머니……
네가 믿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한 번도 하비를 탓한 적 없어. 너도 마찬가지야.
하지만 너는 잘 생각해야 해, 피스트. 네가 패토 걔들을 데리고 몰래 저항하려고 했을 때부터 잘 생각했어야 해.
만일 너는 이 전쟁에서 살아남고, 다른 사람들이 모두 돌아오지 않는다면, 너도 나처럼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이 기계를 바라보며 분통과 후회로 수없이 많은 밤을 달랠 수 있겠니?
……
할머니, 3년 전 나는 할머니의 결정을 이해할 수 없었어.
하지만 지금 그날을 돌이켜보고, 할머니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보니……
나라면 그 결정을 내리는 것조차 오랫동안 망설였을 거야.
할머니 말이 맞아. 잔꾀만으로 영원히 죽음을 피할 수 없어.
그렇지만 할머니, 타협과 순종도 마찬가지로 죽음을 피할 수 없어.
……
캐서린은 담배 연기를 한 모금 들이마시고는, 아무런 반론도 하지 않았다.
할머니, 내가 다 안다고는 말할 수 없어……
내가 반드시 살카즈를 몰아낼 거라고 장담할 수도 없어.
솔직히 로도스 아일랜드가 우리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알려준 이후로, 나는 내 어깨의 짐이 점점 더 무거워지는 게 느껴졌어.
내가 또 어리석은 짓을 할까 봐 몹시 두려웠어.
하지만…… 그렇다고 멈출 수는 없어.
여기서 멈추면, 내가 빌이나 조니, 가비, 그리고 이미 희생한 자경단 전사들을 볼 면목이 없을 것 같아.
……자식, 넌 아직 어려.
거기 박사라는 녀석, 너는 얘랑 달리 덜렁대지 않는 것 같네.
그러니까 얘를 많이 챙겨 줘.
- 안심해.
- 최선을 다할게.
내 숙소에 있는 책상, 왼쪽 세 번째 서랍에 숨겨진 수납공간이 있어.
어?
살카즈 감시가 아주 심해. 이 공장에는 네가 있을 곳이 없지. 보고 얼른 꺼져.
다른 사람한테 피해주지 말고.
……고마워, 할머니.
캐서린이 스쳐 지나갈 때, 당신은 그녀의 표정을 보았다.
뿌듯하면서도 슬픈 표정이었다.
박사, 이렇게 된 거 우리 빨리 할머니 숙소에 가보자.
따라와, 할머니 숙소는 이쪽이야.
물건은 다 온 건가?
다 여기에 있습니다.
바더 씨는 요즘 어때?
요즘 앓고 있다고 들었어요. 어쨌든 물건은 여기 다 있으니까, 이번 거래는 이걸로 끝난 셈입니다.
알았어. 바더 씨한테 고맙다고 전해줘.
완전 무장한 용병들이 창고 안에서 하나둘씩 나왔다.
그리고 선두에 서 있던 자가 자경단 앞까지 오더니 무기를 들지 않은 손을 내밀었다.
안녕, 새로운 고용주. 나는 토터라고 해.
안녕. 토터 씨, 오느라 고생 많았어.
아, 컨테이너 안은 조금 답답했는데……
밖에 나와도…… 별로 다를 게 없네.
하하, 런디니움에 온 걸 환영해.
8팀, 새 친구들을 데리고 기지로 가. 부근의 살카즈 순찰대는 잘 피하고.
네, 지휘관님. 용병분들은 이쪽으로 따라오세요.
……이 마지막 부대까지 더하면, 우리의 전력이 또 오르겠지.
클로비시아, 우리에겐 시간이 많지 않아. 살카즈가 이미 귀족들에게 손을 대기 시작했어.
우린 이미 공작 저택에서 철수해 나와 더 찾기 어려운 제2 기지로 옮겼어. 지금은 그나마 안전한 편인데,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
도시 내 살카즈의 수가 계속 증가하고 있어.
사흘 뒤면, 살카즈의 주력부대도 돌아올 거야.
……나흐체러르 킹, 끔찍하고 역겨운 구울.
아미야가 놈의 능력을 알려준 적 있는데, 전쟁을 '포식'하며 살아가는 놈이래. 놈이 전장에 나타나면…… 전장은 놈의 일부가 되고.
어떤 대가를 치러야…… 전장 자체를 격파할 수 있을까?
공작의 함대가 단결하지 않으면 이길 가능성이 희박해.
우리 전사들은 반드시 놈을 피해야 해.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놈이 돌아오기 전에 움직여야 하는 이유야.
놈들은 살아있는 전설이야.
살카즈의 왕정…… 만약 그들이 정말로 레토 중령의 방위군을 넘어 직접 이 도시를 진압할 계획이라면……
……클로비시아, 너 수학 잘하잖아. 우리가 이 무서운 전설을 이길 확률이 얼마나 돼?
……
상관없어. 자경단이 계산을 통해 오늘까지 온 것도 아닌데 뭐.
전사들은 이미 최선을 다해주고 있어.
무슨 일이 있어도…… 적어도 우리의 마음은 하나잖아. 그렇지, 알레데일?
……응? 아, 당연하지.
너 무슨 생각 하고 있어?
난…… 내일의 작전이 요 며칠처럼 순조로웠으면 해서.
……요 며칠 작전이 너무 순조롭다고 생각되지 않아?
그건 좋은 일 아니야?
아무 이유 없이 좋은 일이 생길 리는 없어.
나도 비나의 말에 동의해~ 한 번쯤은 운이 좋을 수 있어도, 어떻게 매번 좋아?
……
……
잠깐, 저 사람이 근처에서 한참이나 서성거린 것 같은데……
……
길목에 서 있던 남자가 그녀들이 있는 방향을 힐끗 쳐다보았다.
시선이 골목 깊은 곳까지 닿을 수 없으니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게 맞아야 했지만, 남자는 무언가를 본 듯 급히 시선을 돌리고는, 고개를 숙여 쏜살같이 먼 곳으로 달려갔다.
……다그다!
응.
당장 알레데일한테 알려…… 모든 자경단을 창고에서 철수시키라고 전해!
알았어.
……
무슨 일인지 다들 물어보는데.
우리를 지켜보는 자가 있는데…… 아니다, 설명할 겨를이 없어.
다그다, 인드라, 모건, 계획대로 움직여.
……
음……
다들 철수했어?
아니…… 모르겠어요……
……일단 뛰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