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3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책임자가 되기 위해서는 투표가 필요하다. 당선이 거의 확실하다고 생각했던 티티는, 사르곤의 과거 침략이 미노스인들에게 남긴 원한은 진심과 열정만으로는 씻어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오, 자애롭고 용맹한 우리의 건국 영웅 케레세이라시여, 아무리 어두운 밤도 당신의 빛을 삼키지 못하나이다.
당신은 제1신전의 장인들을 지켜주시고, 두 현자를 보내시어 그들이 우리의 근심을 덜고 당신의 전당을 세우게 하셨나이다.
당신의 리라 대신 벌레 소리가 울려 퍼지고, 그 월계관은 후세의 손에 의해 승리의 형상으로 엮였으며, 달빛은……
아, 죄송합니다. 당신을 비추는 게 달빛이 아니라, 저희가 지난주에 설치한 조명이었네요.
(꿀꺽꿀꺽)
……
술 좀 작작 마셔. 오늘 밤에 투표하러 온 거라는 건 기억하고 있냐? 이따가 오스트라콘에 글자 새길 때 손 베지 않게 조심해.
물론 기억하지. 나는 티티 씨한테 투표하러 왔어!
어제 나 혼자 신전 내실에서 조각상을 수리하다가 넘어질 뻔했는데, 티티 씨가 오리지늄 아츠로 날 구해줬어. 덕분에 지금 이렇게 술을 마실 수 있지.
흠……
못 믿는 거야?
내가 보여줄게. 그때 내가 바닥까지 늘어진 조각상의 옷자락에 발이 걸려서 넘어졌는데……
으악!
조심해!
어둠 속에서 부드러운 순백의 띠 몇 가닥이 뻗어 나오더니, 곧장 술에 취한 소녀에게로 날아가 중심을 잃지 않게 붙잡았다.
순백의 띠들은 상대가 괜찮다는 걸 확인한 후, 스르륵 풀어져 헝클어진 소녀의 머리칼을 쓰다듬고는 포르테 소녀의 두 뿔을 나무라듯 톡톡 건드렸다.
봤어? 그러고 나서 또 다른 띠들이 나를 구해 줬다니까, 신기하지!
어라? 티티 씨, 언제 왔어? 같이 한잔하자.
팔라스가 그러더라고. 운반팀에 키 작고 힘센 애주가 친구가 있는데, 잘 넘어진다고.
그런데 설마 사흘 만에 넘어지는 모습을 열 번도 넘게 보게 될 줄이야, 칸티아.
고마워, 티티 씨.
얘 주량은 딱 미노스인 평균 수준이라, 많이 마시면 안 돼. 원래 미노스인은 반주 정도로만 즐기는데, 얘는 마음만은 천상 술꾼이거든.
아하하……
그런데 티티 씨야말로, 한잔 필요한 거 아니야?
왜…… 내가 긴장한 것처럼 보여?
얼굴만 봐서는 모르지만, 며칠 같이 지낸 공사팀 사람들은 다 알지. 우리 필라인 아가씨의 꼬리는 속마음을 못 숨긴다는 걸 말이야.
앗……
티티 씨, 저 비계 아래 회색꼬리에 잎사귀 장식을 단 친구가 누구게?
도색팀의 세라핌이지? 체격 좋고 건장한 도색공들이랑 같이 일해야만 의욕을 보이더라고. 본인 말로는 게으름 부리길 좋아할 뿐이라고 하지만, 아무도 안 믿지.
그러면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서 아무랑도 인사 안 하는 엘라피아는?
조각팀의 라프테리아. 햇빛이 없는 곳에서만 볼 수 있는 친구지. 나도 아직 몇 마디 못 나눠봤지만, 자기 작품에 진심이라는 건 알아.
대부분 사람들은 라프테리아의 존재조차 모르는데, 티티 씨는 벌써 라프테리아에 대해 많이 알고 있네.
티티 씨, 남들이 당신과 당신의 신분을 어떻게 평가할지는 모르겠지만, 난 당신을 우리의 일원으로 생각해.
……!
고마워, 마노스.
친구를 격려해 주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조금 긴장한 것 같습니다만.
사람 마음을 헤아리는 건 당신 주특기잖아요, 엔디미온 신전의 카산드라 씨.
지금 티티에게 필요한 건 친구의 응원이 아니라, 건설에 참여한 미노스인들의 지지예요.
그렇습니까? 메제티케티 씨는 방금 친절한 두 장인이 말을 걸기 전까지, 줄곧 발표할 연설문만 외고 있던데요.
혀가 꼬이면 무의식적으로 자기 꼬리를 잡는 버릇이 있던데, 두 번은 실수로 옆에 있는 애완동물의 털을 잡아당기는 바람에 그 친구가 상당히 언짢아했죠.
그것까지 관찰하고 계셨나요? 당신도 티티가 꽤 마음에 드는 모양이군요.
……
하지만 이런 것만으로는 티티 씨가 믿을만한 사람이라고 단정 지을 순 없어요. 저는 편견 때문에 제 눈으로 확인할 권리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던 것뿐이에요.
당신은 처음부터 티티 씨가 신전 건축 책임자로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했고, 저 또한 그 판단을 존중할 생각입니다.
오늘 밤, 케레세이라의 눈동자에 길 잃은 자들의 모습이 비치는 일은 없을 거예요. 모두가 마음속으로 각자의 결정을 이미 내렸으니, 영웅의 대변인이 나설 필요도 없겠죠.
그럼 저는 개인적인 용무가 있어서, 이만.
벌써 가시게요?
대외적으로 신전 재건을 주관하는 제사장이 투표에 참여하지 않으면, 시정감독관한테 시위한다고 오해를 살 수도 있는데요?
걱정하지 마세요, 제 오스트라콘은 이미 투표함에 넣어뒀으니까. 그리고 리디아 시정감독관이 정말 신전 제사장들을 트집 잡을 생각이라면, 그렇게 노골적인 핑계를 댈 필요도 없어요.
만약 교환식이 제1신전에서 열린다면, 영웅을 모시는 연극 의식은……
그건 제가 리디아 시정감독관과 다시 한번 상의해 볼게요. 적어도 극을 선택할 권한만큼은 아테누스의 제사장에게 돌려주도록 말이에요.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나중의 일입니다. 일단은 오늘 밤 투표가 순조롭기를 바랄게요.
……이상의 내용으로, 제가 며칠간 이곳을 둘러본 결과, 석재 문제가 해결된 후 건축물의 주요 부분이 거의 다 완성된 상태이므로, 관람객에게 개방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계획대로 마무리 작업을 완료하고 검수만 마치면, 며칠 내에 이용할 수 있을 겁니다.
또한, 교환식을 광장에서 거행할 경우 필요한 작업이 많지 않습니다. 공간을 비우고, 지원 구역만 따로 분리하면 됩니다.
건물의 나머지 부분은 그대로 뒀다가, 완공 후에 전면 개방하면 됩니다.
제가 시공 계획에 관한 전문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실행 가능한 방안을 정리해 제공하겠습니다.
제가 당선된다면, 내일부터 정식으로 여러분과 함께 이 웅장한 케레세이라 제1신전을 완공하겠습니다!
……
이런 이런, 오늘 밤 신전 광장은 전례 없는 성황을 이뤘네요. 메제티케티 님은 참 진실하고 호감 가는 분인 것 같습니다.
메제티케티 님이 무사히 선출된다면, 양국의 우호 관계에도, 신전의 마무리 작업에도 큰 이득이 되겠네요!
당신의 목적은 뭐죠?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네요. 저는 초대 받고 온 손님일 뿐인데요?
코리니아 상인의 아들이, 저와 사르곤 대사가 일을 논의하는 중에 때마침 지나가다 즉흥적으로 해결책을 제시했고, 아주 순조롭게 오늘 밤 투표로 이어졌죠.
이 모든 게 그저 케레세이라의 가호 덕분이라는 건가요?
그러면 안 되나요?
전통에 따르면, 가호를 받은 미노스인은 다음날 신전에 가서 제사장을 만나고, 자신이 영웅의 축복을 받았음을 털어놓아야 하죠.
하지만 엔디미온 신전이 시정감독관 사무실과 아무리 가까워도, 당신이 카산드라 제사장을 찾아갈 일은 없겠죠. 안 그래요?
……
선을 넘는군요, 페리안드로스 제사장.
어찌 됐든 메제티케티 님의 취임은 당신에게 있어 단순한 외교적 퍼포먼스에 그치지 않을 겁니다. 저나 당신이나, 언제나 미노스 내부 문제에 더 관심을 두고 있으니까요.
원하는 걸 말씀하세요. 아무리 뛰어난 언변이라도, 거래 조건을 알기 전에는 절 설득할 수 없습니다.
하하하, 조급해하지 마시죠, 아테누스의 시정감독관님.
상인은 무엇보다 신용을 중히 여깁니다. 일이 모두 마무리되면 제가 알아서 찾아뵙겠습니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서요.
……
자, 여러분, 우리의 전통에 따라 오스트라콘의 뒷면에 '찬성' 또는 '반대'를 새겨주세요.
그런 다음 오스트라콘의 뒷면이 아래로 가게 해서 이 투표함에 넣어주세요.
모든 투표가 끝나면 함께 최종 투표 결과를 집계하겠습니다.
만약 '찬성'이 절반을 넘으면 티티…… 메제티케티 씨는 문화재 교환식이 끝나기 전까지 이번 신전 재건 작업의 책임자가 됩니다.
시작하겠습니다.
……
사람들이 차례로 앞으로 나와 오스트라콘을 투표함에 넣었다.
투표함이 놓인 곳은 티티가 서 있는 광장 중앙과 다소 거리가 있었지만, 티티는 여전히 며칠 전에 갓 사귄 친구들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를 확인할 수 있었다.
눈이 마주칠 때면 그들은 티티에게 고개를 끄덕여 인사했다.
오스트라콘에 새겨진 글자는 보이지 않았지만, 티티는 그들이 어떤 표를 던졌는지 알 수 있었다.
누가 상상할 수 있겠는가? 자신이 미노스 신전 건축을 총괄할 수 있을 거라고. 그건 파디샤 말라의 시대에도 상당히 명예로운 일이었다.
아테누스인들은 티티에게 엄청난 호의를 보여주었다. 그녀는 어떻게 보답해야 할까?
허, 웃기는군.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가 티티의 생각을 끊어놓았고, 시끌벅적했던 광장도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올해가 정말 1100년이 맞나?
나는 또 100년 전으로 돌아간 줄 알았네. 사르곤인이 또다시 우리를 통치하러 오다니 말이야.
……
전쟁은 끝났어요, 메가스.
당신은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아니야.
사르곤 놈들은 지금도 내 꿈속에 나타나, 나를 놓아주지 않아.
나도 당신들처럼 잊어버리고 싶어. 하지만 꿈속에서 우리의 영웅들이 그래선 안 된다고 말하고 있어.
당신에게 해몽을 해 준 제사장이 그렇게 말했나요?
……
아니. 하지만 그 반복되는 꿈은 영웅이 내게 내리는 지시야. 그분들의 뜻을 정확하게 아는 건 나뿐이야.
나는 사르곤인과 웃고 떠들며 함께 일할 수 없어.
설령 모두가 그 사르곤인이 한 일은 옳은 일이고 결과도 좋은 것이라 해도, 나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어.
그 미노스인은 티티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그녀 앞을 가로질러 갔다.
그리고 투표함 앞을 지나며 무심하게 오스트라콘을 던졌다. 그러자 오스트라콘은 투표함을 스쳐 바닥에 떨어졌고, 몇 바퀴 구른 후 멈추자 아무 글자도 새겨지지 않은 뒷면이 보였다.
티티는 그것을 보고 깨달았다. 이 남자는 사르곤인에 대한 증오가 너무도 깊은 나머지, 투표에 참여해 반대 의사를 표할 가치조차 없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녀는 뺨을 강하게 맞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얼굴은 화끈거렸고, 등줄기는 서늘해지며 전율이 일었다.
주변의 모든 것이 아득히 멀어져 버린 것 같았고, 사람도 목소리도 모두 두꺼운 막 너머에 있는 것처럼 다가갈 수 없게 느껴졌다.
옆에 있던 팔라스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선 것 같았고, 근처에 있던 장인들도 걱정스럽게 자신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티티는 괜찮다고 전하고 싶었다. 악행을 거듭한 침략자 사르곤이 보낸 평화의 사절로서 모욕받을 각오는 당연히 되어 있었을 터였다.
심지어 그 미노스인 또한 그녀를 모욕한 것이 아니라, 단지 함께 일하고 싶지 않다고 표명했을 뿐이다. 누구나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을 수는 없는 법이고, 그래도 괜찮을 터였다.
그녀는 웃으려 했다. 메제티케티 나수투 마샤예르의 트레이드마크인 쾌활하고 천진난만한 그 미소는 본래 박물관을 찾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었다.
그러나 목소리는 목에 걸려버렸고, 웃음은 나오질 않았다.
오스트라콘을 내던진 미노스인의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고, 그녀는 아테누스에 온 첫날 나루터에서 자신에게 질문한 그 뱃사공이 떠올랐다.
장인들과 보낸 시간은 결코 거짓이 아니었으며, 그들은 지금도 자신을 믿어주고 있었다.
하지만 낯선 미노스인에게 그녀는 기상천외하고 미노스 전설을 사랑하는 티티가 아니라, 그저 한 명의 사르곤인일 뿐이었다.
……
다들 갔어. 조명도 꺼졌고. 계속 그렇게 웅크리고 있을 거야? 포르테 친구랑 신전 장인들이 너를 많이 걱정하던데.
설마 다들 보내버리고, 네 두 손이랑 그 보잘것없는 띠만으로 밤새 신전을 고쳐서 미노스인들에게 사죄라도 하게?
……
하아, 아까부터 계속 네 주위를 돌면서 신호를 줬는데 말이야. 한 번이라도 나를 봐줬다면…… 정말 이상하다는 생각이 안 들었어?
그 재수 없는 부대사 녀석은 핑계로 투표를 피했고, 그 리디아라는 시정감독관은 분명 뭔가 꿍꿍이가 있었는데, 너는 제 발로 함정에 뛰어들었어.
지금 네 꼴을 봐, 완전히 정신이 나갔잖아!
……
야, 설마 울고 있는 거야? 겨우 이 정도로? 왕중왕이 사는 황금성에서 이런 강약약강을 내가 얼마나 많이 봤는지도 몰라!
게다가, 네가 슬퍼하는 건 녀석들에게 이용당했기 때문이 아니잖아!
거봐, 파디샤에게 임무를 받았을 때, 이번 여정이 마냥 즐거운 여행이 되진 않을 거라고 내가 경고했지?
잊을 수 없는 역사도, 상처가 회복되지 않은 미노스인도, 사르곤 대사로서의 입장도, 이 모든 게 너에게 알려주고 있잖아. 이건 단순한 문화재 교환이 아니라는 걸 말이야.
……
늘 오만하던 생물도 드물게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소매 아래에서 티티의 얼굴을 들여다보려 했다. 하지만 그녀가 고개를 푹 숙인 탓에 끝내 표정을 확인할 순 없었다.
미오는 한숨을 쉰 뒤 머리로 티티의 손을 가볍게 밀고는 그녀 곁에서 몸을 말아 자기를 쓰다듬으라고 재촉했다.
복슬복슬한 걸 만지면 기분이 좋아진다며. 네가 그랬잖아.
특별히 허락해 줄게. 내 꼬리를 쓰다듬어도 되고, 스트레스 풀듯이 내 등을 마구 헝클어 놓아도 돼. 아니면 내 털로 눈물 닦아도 되고.
……
눈물 닦는 건 취소. 축축해지는 건 질색이야.
하아, 내가 어쩌다 이렇게 약해 빠진 사고뭉치 꼬맹이를 골라가지고, 위로까지 해주고 있냐.
풉……
내가 정말 그렇게 나약했다면, 네가 그랜드 바자르를 떠날 때 나를 선택하지도 않았겠지?
훗, 잘난 척은. 기분 안 좋은 거 아니까, 이번만 넘어가 줄게. 다음은 없어.
고마워, 미오.
이제 기운 좀 차렸어?
응, 오스트라콘에 내 이름을 새긴 사람이 있다는 건, 누군가는 나를 믿고 기대한다는 뜻이잖아.
마노스도 아까 말했는걸, 나는 이미 장인들의 일원이라고.
한 가족 안에도 미운 사람이나 평생 왕래하지 않는 친척이 있잖아. 하물며 나는 지금 사르곤 때문에 상처받은 나라에 와 있는데.
내게 전설 속의 미노스 영웅처럼 노래나 시, 연설로 모든 문제를 기적처럼 해결할 능력은 없어.
내가 할 수 있는 건, 케레세이라 제1신전을 최대한 빠르게 완공시켜, 진작 반환되어야 했을 미노스의 물건을 케레세이라에게 돌려주는 것뿐이야.
달빛이 케레세이라의 얼굴을 비췄다. 그녀는 월계관을 쓴 채 현을 튕기며 머나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티티는 거대한 대리석 조각상 아래에 서서 케레세이라와 나란히 고요한 달빛을 맞으며, 눈을 감고 하나의 소원을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