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8밤의 끝자락
환화 의식의 노래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로흐시니는 검은 안개와 내면의 동요를 이겨내고 보랏빛 불꽃 속으로 걸어 들어가, 죽음을 상징하는 보랏빛을 생명을 상징하는 주황빛으로 물들인다. 불빛 속에서 붉은 용은 다시 살아나고, 어둠은 걷힌다.
등장 오퍼레이터: 브리지드, 아르모니, 리드 더 플레임 섀도우, 네크라스
전하, 방금 '성악가'가 고발하길, '달변가' 일행이 로흐시니를 납치해 힐록 카운티로 데려갔다고 합니다.
알았어.
그는 일부러 사람을 보내, '리더'가 힐록 카운티로 출발하는 시점에 고발했습니다. 이렇게 하면 '달변가' 일행을 적으로 돌릴 필요도 없고, 사실을 은폐했다고도 할 수 없죠……
어떻게 할까요?
애초에 더블린은 그놈에게 스파이를 맡길 생각이 없어. 아무도 그런 기대를 한 적도 없고.
죄송합니다. 이건 저의 불찰입니다. 전 그들이 명령에 따라 힐록 카운티로 가고 있다고만 생각했을 뿐, 감히 로흐시니를 납치했을 거라는 생각은 못 했습니다.
멀리 가지는 못했을 테니, 지금 출발하면 따라잡을 수 있을 겁니다……
전하, 동생분 대신 소식을 전하지. 동생분은 전하께서 '달변가' 일행의 경솔한 행동을 멈추고, 자신을 이곳에 데려다주길 바라고 있어.
당사자의 뜻인가?
맞아.
그렇다면 부대를 준비해서……
서두를 거 없어.
전하, 지금 그들을 막는 건 꽤 좋은 선택임이 확실합니다.
그리고, '힐록 카운티에 안 가고 싶다'는 것 역시 로흐시니 본인의 뜻이야.
본인의 뜻이 그러하다면, 본인이 직접 그렇게 되도록 만들어야지.
로흐시니의 불꽃이라면 어렵지 않을 거야. 이미 '리더'라는 명목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사형을 집행했잖아?
가서 전해. 본인이 원하면 직접 하라고……
아니지, 말을 전할 필요도 없어.
전하, 아무리 그래도 로흐시니는……
내 동생이라는 말을 하려는 건가?
……
거대한 용은 강철의 날개를 펄럭이면서 차갑고, 이글거리는 소용돌이를 일으켰지만 로흐시니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창끝을 거대한 용의 눈으로 힘껏 찔러 넣었다.
로흐시니, 아직도 날 죽일 각오가 안 됐어?
거대한 용의 목소리는 점점 에블라나의 목소리처럼 변했고, 형체 역시 에블라나의 모습이 되었다.
이어서 주변의 환경도 변했다. 마치 라브리타흐를 따라 유적지에서 보낸 그날 밤 모습처럼.
난 그냥…… 잘 모르겠어.
네가 원하는 게 뭐야?
도대체 무엇을 위한 거였어? 나를 속이고, 사람들을 속여서 도시 전체가 언니를 위한 장례를 치르게 하기 위한 거였어? 아니면 게일 왕의 전설처럼 되기 위한 거였어?
난 널 속이지 않았어.
지금 상황에 내가 그 소리를 믿을 것 같아?
언니에게 나 시어셔가 가진 의미는 뭐야? 타라는 뭐고?
난 우리가 늘 같은 꿈을 이루고 싶어 한다고 믿었어. 그런데 왜 지금 이 순간, 우리의 꿈은 달라져 버린 걸까?
어쩌면 언니가 권력을 좇는 사이, 꿈마저도 시시한 장난처럼 변해버렸을지도 몰라. 마치……
마치 힐록 카운티에서의…… 로흐시니처럼.
힐록 카운티?
그때 난 네 눈에서 돌아오고 싶은 간절함이 아닌, 해방감을 봤어. 내 말이 틀려?
……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그래 맞아. 힐록 카운티에서는 이미 싫증이 날 대로 났지.
난 불꽃을 이용해 모든 것을 원하는 형태로 녹여낼 수 있었지만, 거울 속 그림자는……
아무리 큰 불꽃을 일으켜도 변하지 않았어.
……언니는 한 번도 불꽃으로 직접 그림자를 불태워본 적 없었으니까.
난 한 번도 불꽃으로 직접 너를 불태워본 적 없었으니까.
난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어. 계속 기다렸어, 네가 답할 때까지.
답?
……넌 어때, 로흐시니? 네가 원하는 건 뭐야?
넌 핏줄과 교양 덕분에 고상한 존재가 되었지, 그건 좋은 일이야. 하지만 네가 그렇게 바라는 것 하나 없이 산다면, 과연 내가 너한테 어떤 자리를 남겨 줘야 할까?
말해 봐, 눈 내리는 밤에 비는 소원이잖아…… 아무리 큰 야망이라고 해도, 전부 허락할게.
……
언니는 불로 날 태우지 않았지. 왜냐하면, 더 효과적인 도구가 있었기 때문이야. 공포, 책임감, 죄책감, 동정심 같은……
언니는 내게 직접적으로 요구한 적은 없지만, 여러 번 간접적으로 내가 그렇게 하게 만들었지.
나의 영향력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는데, 지쳐있던 나는 되려 보상을 받았어. 정말 아이러니해, 그렇지 않아?
……
어쨌든 넌 결국 돌아오는 것을 원했고, 진짜 삶을 받아들이려 했어. 그거면 충분해.
언니 눈에는 음모, 권력, 전쟁 같은 것들이 진짜 삶이라는 거야?
맞잖아? 이야기, 시, 전설. 이런 게 우리가 누려야 할 삶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나도 알아. 난 늘 죄책감에 시달렸어. 언니의 고통을 덜어 주지 못한 내가 미웠지.
내가 도망쳤기 때문에 언니는 혼자서 모든 걸 짊어졌고, 그래서 지금의 모습으로 변한 거야……
아니야, 로흐시니.
요 며칠 계속 생각했어, 너도 사실은 나처럼 오만해. 네가 나랑 다른 점이 있다면, 내 오만함은 이 대지를 향했지만, 네 오만함은 나를 향했다는 점이야.
뭐?
넌 왜 음모, 권력, 전쟁 같은 것들이 날 만들었다고 생각해?
이것들은 날 변하게 만들지 않았어, 우연히 내가 손쉽게 휘두르기 좋은 형태가 된 것뿐이지.
……
작은 권력은 사람의 생사를 결정하고, 더 큰 권력은 군대의 존망을 결정하고, 막강한 권력은 국가의 흥망을 결정하는 법이야……
하지만 권력에는 끝이 있는 법.
시인들은 아주 오래전 이미 이 이치를 알고 있었어. 아마 너도 알고 있었을 거야. 그렇지 않아, 로흐시니?
죽음은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비웃어. 권력에 취한 자를 위한 운명의 종착지를 결정해 주지. 그리고 그 순간이 되면 한평생 좇아온 것을 피도 눈물도 없이 냉정하게 빼앗아.
이 길이 결과가 없는 길이란 걸 뻔히 알면서, 도대체 왜……?
에블라나가 뒤로 물러났고, 쇠로 만든 거대한 용의 조각상 역시 물러섰다.
도망치려는 걸까? 아니면 피하려는 걸까?
로흐시니는 무의식적으로 힘을 뺐지만, 곧바로 입술을 꽉 깨물고 순간적으로 힘을 실어 에블라나를 앞으로 밀어냈다.
좋아, 적어도 내가 떠나고 난 후의 삶에서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걸 할 수 있게 되었네.
……잔인함?
단호함.
이 길이 네가 갈 길이라는 걸 받아들이기로 했다면 앞으로 가, 돌아볼 생각은 하지 말고.
그 말은 나 시어셔의 사람들에게 해……
로흐시니, 말을 끝내게 해줘.
죽음은 모두를 비웃지…… 하지만, 난 죽음을 비웃어 줄 거야.
로흐시니, 축복해 줘. 위대한 모험이 드디어 시작됐으니까.
에블라나는 계속해서 뒷걸음질 쳤다. 얼굴에 띤 미소는 그 어느 때보다도 희미했다.
강철을 관통했던 손에서 부드러움이 느껴졌다. 마치 몸을 관통한 것 같은 부드러움이었다. 이어서 느껴진 건 마치 불을 꿰뚫은 것 같은 공허함이었다……
이윽고 꺼지기 직전의 불꽃처럼 강렬하게 솟구친 거대한 힘이 창끝을 타고 로흐시니를 끌어당겼다.
차가운 불꽃이 온몸에 휘감겼을 때, 로흐시니는 자신이 지금 나 시어셔 요새의 입구, 붉은 용 광장에서 진행 중인 환화 의식의 한가운데에 서 있다는 것을 문득 깨달았다.
하지만 어쩌면 자신과 얽혀있던 붉은 용의 뼈가 원래 자리로 돌아간 것뿐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붉은 용의 뼈는 자연스레 창을 쥐고 있던 로흐시니를 장례식의 불꽃 속으로 끌어당겼다.
이번에도 나를 놓아버릴 생각이야, 로흐시니?
……!!
로흐시니의 창끝에서 처음 보는 밝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마치 내장이 반복적으로 찢어지는 것 같은 고통이 순식간에 폭발했다. 생명의 불꽃은 폭주를 반복했고, 결국 죽음 속에서 과부하된 아츠를 견디지 못해 창에서도 불꽃이 일었다.
거대한 용의 조각들이 서로 부딪혔다. 마치 수천 명이 동시에 슬픔의 노래를 부르는 것 같았다.
불꽃은 점점 뜨거워졌고, 에블라나의 형체도 점차 희미해졌다.
로흐시니의 입술은 떨리고 있었다. 작별의 말을 건네고 싶었지만, 여태까지 읽었던 수많은 책을 되뇌어도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에블라나는 따뜻한 손길로 로흐시니를 품에 안았다.
영원히 안녕…… 죽음이 우리를 다시 만나게 할 때까지.
이별 선물이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네.
이별…… 선물?
광장에서 애도하는 사람들은 불길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들은 활활 타오르는 불꽃을 볼 뿐이었다. 그 불꽃은 대좌, 관, 붉은 용 조각상, 요새를 뒤덮은 것도 모자라 더 거세게 치솟고 있었다.
불꽃은 붉은 용의 조각상을 구부러뜨렸다. 이제 사람들은 더 이상 조각상이 날갯짓하는 것인지, 원수와 사투를 벌이는 것인지, 머리를 관통당해 비통한 울음을 토해내는 것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사람들은 침묵한 채 불꽃 속에서 조각상의 모습을 찾아보려 노력했지만, 헛수고였다……
그러다가, 브리지드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불꽃의 색이 변했어!
불꽃의 색이 변했다.
마치 땅바닥에서 솟아오른 듯한 강풍이 촛불의 보랏빛 불꽃을 휘감아 소용돌이처럼 만들었고, 소용돌이의 밑바닥, 관이 있는 곳에서부터 작지만 눈부신 태양이 떠올랐다.
마치 소용돌이에 조명이라도 쏜 것처럼, 본래 보라색이었던 소용돌이는 밑에서부터 점점 노란색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불 옆에 있던 사람들은 뒤로 물러났다. 불꽃이 갑자기 뜨거워지면서 화상을 입을 뻔했기 때문이다.
치솟는 열기가 사방으로 퍼졌고, 슬픔에 젖은 노래도 불꽃의 열기에 말라버렸다.
어쩌면 기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지금 사람들의 마음속엔 이 생각만이 맴돌고 있었다.
기적, 타라를 위해 내가 견뎌내야만 했던 기적……
이게 언니가 준비했다는 이별 선물이야?
하지만 이미 죽어버린 에블라나는 그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로흐시니는 방금 언니의 그 포옹을 떠올리려 했다. 그 포옹에는 얼마나 많은 기대가 있었을까, 얼마나 많은 따뜻함이 있었을까, 그리고 얼마나 많은 냉정한 계산이 있었을까.
하지만 이런 것들은 에블라나에게 있어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
에블라나, 언니 말이 맞아.
만약 이게 언니의 궁극적인 목적이었다면, 만약 언니가 원했던 게 내 머리에 피로 물든 왕관을 씌우는 거였다면, 언니가 맞는 거겠지.
영원히 안녕.
죽기 전까지, 아마 다시 만날 수 없게 되겠지.
불꽃의 소용돌이가 소리를 내며 흩어졌다.
붉은 용, 타라인을 이끌고 긴 밤을 지나온 붉은 용이 조각상 중앙에서부터 나 시어셔를 향해 걸어왔다.
붉은 용의 표정은 불길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지만, 형체는 대지 위의 메마르지 않은 생명처럼 굳건했다.
한 걸음, 한 걸음.
그녀는 아직 보랏빛이 남아있는 관 위를 두 발로 밟았다. 나무로 된 관은 재가 되었고 그 안에는 누구의 시신도 없었다. 오직 리더가 사용하던 불꽃을 내뿜던 창만 남아 있었다.
……
사람들은 숨을 죽였다. 광장은 마치 출산이 임박한 분만실 밖, 혹은 마지막 삽질을 남겨둔 묘지처럼 고요했다.
활활 타오르는 불꽃의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내게 했던 모든 것은 용서할 수 있어, 에블라나. 하지만 이 이별 선물만은……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야.
과거부터 지금까지, 언니의 이름과 타라를 세웠던 무수히 많은 이름들은 모두 함께 망각의 심연 밑으로 가라앉겠지.
타라의 붉은 용은 로흐시니 더블린뿐이야.
내가 돌아왔다.
너희를 이끌고 빅토리아에 맞서 독립과 자유를 쟁취한 붉은 용……
로흐시니 더블린이…… 죽음의 심연에서 귀환했다.
난 너희를 태우는 불꽃을 없애기 위해 죽었고, 너희가 날 위해 흘린 눈물은 불꽃을 잠재웠다. 그리고 나를 죽음의 심연에서 돌아오게 했다.
앞으로 다신 너희를 죽음으로 내몰지 않을 거다.
위대한 목표는 이미 이루었다. 이제 많은 타라인이 자신의 목숨을 바쳐야 할 것이 남아있지 않게 됐지만, 우리에게 남은 건 잔해와 울음소리뿐이다.
진심을 담아 모든 타라인에게 부탁하겠다. 부디 자신의 불꽃을 거둬줬으면 한다. 노역에서, 핍박에서, 굴욕에서 왔던 불꽃을, 오랜 세월 동안 꺼지지 않았던 슬픔의 불꽃을 거둬줬으면 한다.
있었던 일을 잊어버릴 필요는 없다. 그저, 선조들이 그랬던 것처럼 불꽃을 등불로 바꾸길 바랄 뿐이다.
우선 스스로를 따뜻하게 하고……
우리 모두를 위해 앞길을 밝혀주고, 우리 모두가 고향에서 진심으로 웃고, 노래하고, 생활할 수 있게 만드는……
밝고, 따뜻한 등불로 바꾸길 바랄 뿐이다.
군중들은 붉은 용이 말한 내용을 곱씹으며 생각했다. 순간, 평범하기 그지없는 한 나 시어셔 주민이 갑자기 소리쳤다.
아야! 갑자기 불에 데었던 손이 아프기 시작했어!
잠깐, 네 오리지늄 램프의 색이……
내 오리지늄 램프의 색도 변했어?
이것이 바로 붉은 용이 말한 등불이에요. 자신을 따뜻하게 하고 앞길을 밝혀 주는 그런 등불이죠.
보랏빛 불꽃은 죽은 자의 것이에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많은 죽음과 상실은 우리의 불꽃을 보라색으로 물들이고 말았죠.
하지만 우리는 이 불을 축복으로 잘못 받아들였고, 죽음의 심연에 끌려가게 내버려뒀죠……
오늘 밤 붉은 용이 스스로를 죽이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붉은 용에게 불을 돌려주지 않았더라면, 모든 사람은 죽게 되었을 것이고, 죽음에 끌려다니는 좀비로 변했을 것입니다.
우리 몸에 붙은 죽음의 불꽃을 끄기 위해서…… 붉은 용이 자신을 죽인 거라고?
보랏빛 불꽃이 사라지고 갑자기 든 죄책감에 네모스는 대답하지 못했다. 단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순간, 네모스의 얼굴에 무언가 차가운 것이 떨어졌다.
그것은 물방울이었다. 네모스는 고개를 들어 아득히 먼 밤하늘을 바라봤다.
잠시 뒤,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들고 위를 바라봤고, 촉촉한 빗방울이 얼굴로 떨어져 부드럽게 눈물 자국을 씻어냈다.
비가 내렸다.
사윈 전날 밤의 비는 점점 더 세게 내렸지만, 사람들은 광장을 떠나지 않았다. 그들은 붉은 용이 자신들에게 생명을 되돌려 준 것에 감사했고, 생명과 죽음의 경계를 나눠준 것에 고마워했다.
붉은 용은 모두가 집으로 돌아가 잠들기 전까지 이 광장에 계속 있을 거라 말했다.
사람들은 하나둘 자리를 떴고, 영혼수호자와 유랑민들 역시 붉은 용과 작별했다. 그들은 유적지 근처에 불꽃을 돌려주지 못한 망령이 모일까 걱정했지만, 그건 불필요한 걱정이었다.
동이 텄을 때, 타라의 땅에는 더 이상 배회하는 죽은 자가 없을 것이다.
네모스 역시 울먹이며 붉은 용에게 작별을 고했다. 다음날, 네모스는 일찍 일어나 쿨란의 공방에 새 문을 달아주기 위해서 여기저기서 벽돌을 모았다.
텅 비어 있는 넓은 광장에는 붉은 용과 유목민만 남아 있었다.
브리지드, 이제 어디로 갈 생각이야?
……딱히 갈 곳도 없어. 그냥 예전처럼 사람들에게 편지나 전하고, 재앙을 미리 알리지 않을까……
그리고, 아마 점점 더 효율적인…… 뭐였더라…… '재앙정보전달자'? 하여튼 그런 게 나를 대신하겠지.
어쨌든 우리 종족의 수도 점점 적어지는데 이 일을 이어받는 사람이 있다니, 정말 기뻐.
로도스 아일랜드에 연락해 봐.
로도스 아일랜드, 그게 뭔데?
제약 회사, 다들 좋은 사람들이야. 그 사람들이 있는 본부는 육지 함선이지.
내일 편지 한 통을 보낼 생각이야, 네가 전달해 줬으면 좋겠어. 아마 너도 그곳을 좋아할 거야.
오늘 밤은…… 일단 요새 안에서 하룻밤을 보내. 비가 많이 오니까 광장에 텐트는 치지 말고.
일단 요새 입구로 가자.
두 사람은 요새로 천천히 걸어갔다.
쏟아붓는 비 때문에 조각상의 불씨 역시 거의 꺼졌다. 하지만, 붉은 용의 눈 속에는 색을 분별할 수 없는 불꽃이 희미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두 사람의 뒤에서 갑자기 말소리가 들렸다.
역시, 어리석고 고집스러운 성격은 집안 유전이라도 되는 것 같군.
어떻게 본인이 했던 내기를 잊을 수가 있지?
광장에 아직 누가 있나?
……
보이지 않는 그 형씨야, 그 사람이랑 내기했거든.
보이지 않는다고?
로흐시니, 뒤돌아보지 마.
꼬일 대로 꼬인 녀석이야. 눈에 띄는 걸 좋아하지 않는 것이 분명해. 그래서 늘 신출귀몰하지.
……
……하하.
붉은 용의 눈가에서 일렁이는 불꽃을 보며, 라브리타흐는 몇백 년 전의 일을 어렴풋이 떠올렸다. 그때의 아일릴은 막 변성기가 온 소년이었고, 자신 역시 막 수염이 자라기 시작한 나이였다.
이미 '화려한 왕' 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던 마리에드는 왕성에서 빅토리아의 모든 것을 받아들였고, 급기야 타라인들의 일상적인 도박놀이도 금지되었다.
바로 그날, 라브리타흐와 그의 어머니는 가장 격렬한 말다툼을 벌였다.
이후, 어머니는 그에게 금식과 마음 수양을 명령했지만, 아일릴은 몰래 형의 침실로 숨어 들어갔고 형에게 스테이크를 갖다주었다.
형제는 방 안에서 불을 끈 채, 손가락까지 싹싹 빨아먹을 정도로 정신없이 먹었다. 그리고 아일릴은 왕성의 모든 사람은 빅토리아인으로 변할 테니, 고집부리지 말라 말했다.
라브리타흐는 자신의 부드러운 수염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는 내기하지 않겠냐며 물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왕성에서 계속 빅토리아인 행세를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을지 없을지에 관한 내기였다.
아일릴은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형은 크게 웃었다. 그렇다면 뭘 걸어야 할까, 뭐가 좋을까? 그는 왕관을 걸겠다 했다. 동생이 이긴다면 평생 왕성에 발도 들이지 않겠다 했다.
“안 돼. 뭘 걸어도 다 좋지만, 그건 안 돼”
아일릴은 분명 거절했다. 그러나 라브리타흐가 반은 오기로 반은 농담으로 끝까지 밀어붙인 바람에 하마터면 아일릴은 울뻔했다.
그렇다. 아일릴은 늘 양보하는 쪽이었고, 결국은 형의 의견을 따를 것이다.
그리하여 아일릴은 알겠다고 말했다. 대신 떠나면 다신 돌아오지 말라고 했다.
결국, 형은 왕성을 떠났다. 흘러가는 세월 속, 아일릴은 왕성에서 즐겁지 않은 나날을 보냈다.
훗날, 궁정의 세력 절반 이상을 잃은 아일릴은 빅토리아인도 아닌, 빅토리아인 행세를 하는 타라 귀족에게까지 휘둘렸다는 소문이 돌았다……
……
내기 결과를 받아들여, 라브리타흐.
네가 아무리 왕성에 미련이 남았다고 해도, 가족을 만날 시간은 충분했으니까.
하물며 넌 지금 불꽃에 비친 비극적인 그림자일 뿐이잖아. 사람에겐 자신이 가야 할 길이 있는 법이다. 그때처럼 약속을 저버리지 마.
그래, 이렇게, 가슴을 관통한 상처에서 보랏빛 불꽃을 빼내……
윽, 으윽……
윽…… 그리고, 불꽃을 다시 돌려줘. 너와 같은 길을 걷고 있는 붉은 용에게 돌려줘……
추방된 왕의 표정은 고통으로 일그러졌지만, 조금씩 붉은 용 유해의 눈가로 손을 뻗었다.
쿨럭, 쿨럭, 으아아악……
보여줘, 아일릴. 나를 뚫는 건 네 검인지……
환영 역시 고통을 느끼고, 고통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걸까? 아니면 단지 빗물이 투명해지고 있는 자신의 몸을 관통하고 있을 뿐일까?
그는 이런 것조차 분간할 수 없었다.
……아니면 네가 자랑스러워할 네 후손의 불꽃인지……
라브리타흐!
로흐시니는 뒤를 돌아봤지만 광장에는 아무도 없었다.
오직 붉은 용의 눈가에 있던 보랏빛 불꽃이 순간적으로 폭발했고 빗속에서 완전히 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