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9영웅의 엔딩
비나는 공작들의 도발에 정면으로 응했고, 본래 런디니움 사람들 것이었던 물자를 탈환하며, 동시에 국왕이 되지 않을 것임을 정식으로 선언한다. 한편, 글래스고 패거리도 노포트 구로 돌아가는 길을 떠나게 된다.
비나…… 저는 그 이야기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왕좌 위에서 영면해 안식을 얻지 못한 군주, 왕관을 포기한 영웅……
이야기는 끝났습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죠. 아닌가요?
알리스테어 폐하, 그리고 비나. 당신들은 모두 빅토리아를 좋게 만들려고 했어요. 하지만 결과는……
다이앤은 술을 입에 흘려 넣었다.
콜록, 콜록……
사레가 들린 다이앤은 이미 빨갛게 부어오른 눈에서 또 눈물을 흘렸다.
국왕조차 하지 못했는데, 우리는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정말로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는 걸까요?
아직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다이앤.
나도 국왕이 편안히 잠든 후 막이 내릴 줄 알았다…… 하지만 뜻밖의 인물이 찾아왔지.
……네가 왜 여기에 있는지 물어야 하는 건가……
왕좌의 뒤쪽, 그림자 속에서 하얀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빅토리아의 많은 전설 속에서 우리는 항상 그 요정의 모습을 포착할 수 있었다.”
“권력, 음모, 운명, 실현되는 꿈. 수백 년 동안 전해지는 동화 속에서 요정은 다양한 힘을 지닌 것처럼 보이지만, 무엇이 진짜 요정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비나, 당신은 누구와 만났나요?”
“유니콘.”
비나, 너는 내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네가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 주었어.
해머를 내려놓도록. 나는 네 적이 아니다.
우리도 한때는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싸우지 않았나.
정체가 뭐냐, 유니콘.
재봉사의 딸, 자경단의 리더, 빅토리아를 지켜보는 자……
물론 죽기 직전까지도 자신이 집필한 역사서에 일방적인 염원을 담아 나를 '호국공'이라 부르는 불쌍한 노인도 많이 있지만.
빅토리아에 수백 년 동안 머물면서 나는 너무나도 많은 신분을 버렸지. 하지만 지금의 나는, 클로비시아……
네가 완수한 일에 진심으로 만족하는 친구다. 이 대답이면 만족하는가? 비나.
흥, 또 장생자인가. 너는 자경단 동료 모두를 속이고 로도스 아일랜드를 속였어.
속였다고? 나는 아무도 속인 적이 없어. 누구에게나 소원은 있고, 나는 그저 그들의 소원을 이루어 준 것에 불과해.
살카즈의 재난으로 고통받는 일반인은 삶을 원했고, 그래서 나는 자경단을 지휘해 활로를 찾아냈지.
권력 투쟁에 깊이 빠진 옛 가문은 제국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라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어. 그래서 나는 그 가여운 공작 대신 일족의 존속을 끊을 가능성이 있는 온갖 위협을 제거했지.
프레데릭 3세는 빅토리아가 붉은 용 때문에 다시 혼란에 빠지지 않기를 진심으로 원했고, 마찬가지로 나는 그의 소원을 이루어 주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나를 찾아온 건가?
알렉산드리나, 알리스테어의 딸. 내가 지금에 와서야 너에 대해 알아차렸다고 생각하나?
비나, 역사란 한 척의 돛단배다. 방향을 정하는 자는 언제나 너희들이지.
네가 빅토리아를 바꾸고 싶다면 내가 힘을 빌려주겠다. 너는 어떤 신분으로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고 싶지?
국왕, 의장, 나아가 그저 한 명의 파라곤 부대의 리더. 어느 것이든 선택할 수 있다.
“비나, 당신 이야기에는 새로움이 전혀 없어요. 이런 이야기는 오래된 서점에서 질릴 만큼 봤습니다.”
“결말은 항상 영웅이 요정이 남긴 선물을 받아들이는 거예요. 그래서 당신은 결국 의장을 선택했나요……?”
“아니. 나는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았다, 다이앤.”
“수백 년의 파란 속에서 유니콘은 누가 영웅인지 선택하는 일에 익숙해졌고, 영웅은 원하는 포상을 선택하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어째서지?”
“어째서……?”
“어째서 내가 유니콘을 선택해야 하지?”
왜 웃나, 비나?
바깥의 목소리가 들리나?
다들 승리에, 그리고 빅토리아에 환호성을 보내고 있다.
저들 대부분은 신변의 사소한 일들만 걱정하는 사람들이고, 그런 자들은 남을 지키려고 하는 생각이 없어. 배곯는 자에게 한 입조차 주려고 하지 않는 인색한 사람도 있지.
하지만 고작 한 입을 위해 그들은 목숨까지도 던질 수 있어. 그들이 바로 나의 빅토리아다.
나는 그런 바보가 좋다. 기꺼이 그 멍청이들을 지킬 것이다.
그리고 너에게는 내가 이미 행한 일을 선택하게 할 자격이 없다, 클로비시아.
하, 아무래도 넌 그냥 가는 게 좋을 거야. 기분 나쁜 체험을 하고 싶다면 얘기는 다르지만.
……
시즈 씨!
너도 참 바보군, 알렉산드리나. 네 아버지처럼.
저들에게 전해 주거라. 그 재봉사의 딸은 죽었다고.
저들의 소원은 이미 이루어 주었다.
시즈 씨! 내가 '크롤러호'를 몰고 구하러 왔어!
계속 안 나와서 무슨 일이 있나 싶어 다들 걱정……
이미 해결됐다. 고맙다, 피스트.
응?
가자. 다들 아직 우리를 기다리고 있지? 이 전쟁을 끝낼 때가 왔다.
이게 결말이다, 다이앤.
다이앤?
죽을 운명을 앞에 둔 군인은 이미 마지막 술 한 방울을 마시고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녀는 만취하기를 원했다. 비나의 이야기는 이미 결말에 이르렀지만, 다이앤은 자신의 이야기 결말과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그녀는 꿈에 취하기를 원했다. 꿈속이라면 죽음도 따라잡지 못하니…… 다이앤의 소원은 이루어졌다.
하아.
미안하다, 다이앤. 나는 국왕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냐. 의장에 어울리는지도 의심스럽고……
그리고 이 전쟁은 많은 것을 바꾸었다. 기존의 관념은 부서졌고, 우리는 파멸적인 환경에서도 일상을 되찾으려 하고 있어.
곧 런디니움에서 변혁이 시작되어 빅토리아 전체를 휩쓸겠지……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나도 알 수 없어. 하지만 우리에게는 이미 위기와 맞서는 용기가 있다고 확신한다. 그렇다면 왜 과거로 돌아가야 하지?
빅토리아에 이제 국왕 따위는 필요 없어, 다이앤.
……
좋은 꿈 꿔라.
술에 취한 군인은 교수대에 오르기 전날, 생애 가장 평온한 꿈을 꾸었다.
그녀는 국왕 대관식 꿈을 꾸었다. 고향의 공장에서 일을 마친 직원들이 모자를 흔들며 공장 문을 나서는 꿈을 꾸었다……
그리고 그녀는 하늘로 올라가, 자욱한 안갯속에서 푸르른 대지를 달리는 런디니움을 보았다.
그녀는 빅토리아의 꿈을 꾸었다. 그녀는 노래했다……
넓은 대지여 우리의 왕을 지켜 주소서♪
그의 백성과 그의 행복을 지켜 주소서♪
우리에게 무한한 은혜를 내려 주소서♪
우리를 즐겁게 노래하게 하소서♪
빅토리아, 나의 고향이여!♪
의장실1098년 12월 26일 3:58 P.M.
비나, 복싱장 벽의 낙서도 아직 남아 있을 줄은 몰랐다고! 이거 봐봐. 모건이 그날 위대한 화가가 되는 꿈을 꾸고 나서 그린 거야!
아 맞다, 이 사진도 봐봐! 비디오룸 간판이 또 기울어져서 말이지, 멍청하게 생긴 파울비스트 두 마리가 그 간판에 앉아 있다니까. 아하하!
노포트 구 상황은 우리가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훨씬 좋아졌네.
얼른 돌아가서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어.
그래……
그런데 이 사진은 누가 보냈지?
봉투에는 사진만 있고 서명은 없었어. 하지만 고향 재건을 위해 직접 공사팀에 들어간 사람은 많으니까. 애초에 노포트 구에 살던 옛 친구들도 몇 명 있어.
아, 그리고 비디오테이프도 두 개 있었다. 다 질릴 만큼 본 옛날 영화였지만. 델핀, 지금 우리 중에서 B급 영화 다시 보기를 제일 좋아하는 게 너였지?
너 줄게.
……고마워.
비나…… 정신이 딴 데 가 있는 것 같네.
……너희는 다들 돌아갈 거야?
……
뭐 갑자기 그런 표정을 하고 앉았어. 먼저 돌아가서 비나를 위해 방을 정리해 놓으려는 거잖아.
모건, 아까 집에 돌아가겠다고 했을 때 가장 흥분한 게 너잖아?
다그다, 너는?
이 녀석들을 도우러 갈 거야. 여기 있어 봤자 내가 거들 수 있는 일도 많이 없으니까, 비나.
탑의 기사 박물관 건축은 순조로우니까 내 소원은 이미 이루어졌어.
그런가.
비나. 솔직히 말인데, 우리는 같이……
종소리.
4시야. 비나 씨……
……알고 있다. 이제 갈 수 있어.
다이앤한테 가려고?
아니, 의회를 대표해서 공작들과 만나기로 약속했다.
……그래.
비나, 밖에서 항의하는 사람들은……
내가 처리할게. 잘 알고 있어. 저들이 신경 쓰는 것은 다이앤의 처우뿐만 아니라, 오랜 시간 애타게 기다려 온 국왕이라는 것도.
……하. 그건 글래스고가 참견할 일이 아니지.
모건……
자자, 우리는 먼저 돌아가서 정리해야지. 노포트 구가 생각보다는 좋아졌지만, 그렇다고 엄청나게 좋아진 건 아니니까.
돌아오길 기다릴게, 비나.
비나 씨, 붙잡아도 괜찮아.
당연히 글래스고가 계속 함께 있었으면 해. 하지만 오슈테리그 구는 원래 저 녀석들의 집이 아니야.
그리고 들어 봐. 밖에는 아직 내 대답을 기다리는 자들이 많아. 하지만 그전에 구두 약속 이외의 것도 얻어낼 거야…… 그 공작들로부터.
비나 씨, 하지만 지금의 의회가 얻어낸 것은 절대 구두 약속만은 아니야. 산업의 부흥, 질서의 회복, 그리고 전쟁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을 위한 절차……
그러면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살 권리를 얻었나, 델핀?
나는 우리를 의심하는 모든 자들에게 증명해야 해. 설령 국왕이 없어도, 우리가 변함없이 이 나라 미래의 가능성을 충분히 제시할 수 있다는 것을.
……가자. 공작과의 회의에 늦고 싶지는 않으니까.
뭐 노래 좀 해 봐.
아앙? 뭔 노래를 하라는 거야.
그 짜증 나는 《오슈테리그 캐롤》만 아니면 돼.
한나가 링에서 내려올 때 항상 흥얼거리는 “한나는 강해, 전부 다 날려 버릴 거야♪”라도 할까?
하지 말라고, 그 노래 안 한 지 한참 됐어!
그리고 너네는 내가 비나한테 만들어 준 응원가가 더 좋다고 생각하잖아?
아 관둬. 그건 다그다가 좋아하는 밴드 히트곡에 나오는 사람 이름을 전부 비나로 바꾼 게 다잖아?
그렇게 웃긴 노래를 비나가 아직 기억하려나?
당연히 기억하지!
비나는 절대 아무것도 잊지 않아. 다만……
됐어, 역시 비나가 말했던 그게 제일 타당해. 앞으로 나아가는 게 제일 중요하다는 거.
아직 갈 길이 멀잖아. 그렇지?
그날 우리는 다이앤의 결말을 보러 돌아가지도 않았고, 방송도 아무것도 듣지 않았다.
다이앤은 감염이 심각해서, 예상 밖의 사태를 피하기 위해 최종적으로 혼자 처분을 받았다고 한다…… 마지막 존엄을 지켜준 것이 광석병이라니.
이런 일을 이해하는 것도 이제 지긋지긋하다. 그리고 중앙 구역을 떠나 노포트 구 공장을 봤을 때……
우리는 돌아왔다는 것을 실감했다.
시네셀드 의회실1098년 12월 26일 5:01 P.M.
비나 씨, 형장에는 안 가시나요? 항의하는 사람이 그토록 많은데. 만에 하나 소동이 일어나면 당신이 그 자리를 진정시켜 주길 모두가 기대하고 있을 텐데요.
나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마치 백작. 그리고 현장에서는 도시 방위군이 질서를 유지하고, 의회에서도 많은 의원을 보내 과정을 확인하고 있다. 나는 필요 없어.
다이앤 웨버는 틀림없이 영웅이었는데, 정말 유감입니다. 사실 아무것도 잘못한 것은 없죠.
알렉산드리나, 자넨 이 일의 처분에 대해 최선을 다했어. 하지만 수완에 있어서는 아직 강행하는 능력이 부족하군.
자넨 반대하는 목소리에 과하게 신경을 써. 대부분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는데 말이지.
캐스터 공작, 런디니움 의회가 성장할 때까지 우리가 의장님을 비바람으로부터 지켜 준다고 해서 무슨 지장이 있겠습니까?
지금 형세를 보면 웰링턴은 태도가 모호하고, 윈더미어 영지에서는 불온한 움직임이 보이며, 애시워스 공작은 여전히 눈에 띄지 않는 상황입니다.
의장님에게 도움이 필요하다면, 빅토리아의 장래를 위해 우리가 기꺼이 도와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래, 그렇게 말한다면 사양하지 않겠다.
도시의 감염자 상황은 알고 있겠지. 네가 안전을 핑계로 한 달 넘게 미뤄 둔 그 물자 루트를 당장 개방해야 한다.
우리가 돈을 지불한 약과 물자를 전달해라. 물론, 아직도 걱정된다면 도시 방위군이 도시 밖으로 나가 '도적'을 처치하고 받으러 가도 상관없다.
물론입니다. 모두 사소한 문제이지요. 그러면 감염자 부대의 창설과 훈련에 관한 저의 제안은 생각해 보셨는지요?
네가 네 영지에 감염자 부대를 창설할 생각이고, 우리가 그 가능성을 발견해 주길 바란다는 건 알고 있다. 상관은 없지만 병사들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을 전제로 할 필요가 있지.
모든 데이터를 너에게 공개하겠다. 물론 다른 공작들에게도. 이건 앞으로 빅토리아 전체의 전력에 아주 중요한 영향력을 가져다줄 거다. 아닌가?
다만 그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의장. 이 일 관련해서는 고민할 거리도 많으니, 좋은 소식을 가져다주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캐스터 공작, 곧 당신 부하인 회색 모자들에게 초대장을 받게 되겠지.
런디니움은 몇 년 만에 '빅토리아'의 이름으로 각국 외교 사절과 외교 루트를 재개하겠다. 그때가 되면 다들 결석하지 않기를 바라지.
하지만 그때, 런디니움이 너희가 바라는 모습으로 외부에 보여 줄 수 있기를 기도해 두도록.
……지금 그건 도발로 받아들이도록 할게, 알렉산드리나.
전쟁 후에 런디니움이 타국에 접촉할 가능성을 의도적으로 봉쇄했을 때부터, 너희는 이미 의회를 도발하고 있었다.
예전에 거리에 있었을 때, 나는 그런 '보호'를 '유괴'라고 불렀지.
유감스럽지만, 우리는 우리의 방법으로 연락하고 싶은 사람에게 연락할 수가 있어서 말이지.
이런, 비나 씨도 저와 조건을 논의하실 생각인가요?
아니, 마치 백작. 우리는 논의할 사항이 없다. 하물며 친구가 될 필요성 따윈 더더욱 없지.
아마도 그 결정권은 당신에게 없을 텐데요.
흥, 네 목적이 뭐든 간에, 런디니움에 컬럼비아가 개입할 필요는 없다.
보아하니 이미 저와 거래를 거절할 자신이 있는 것 같네요?
사진 몇 장에 불과하지. 런디니움 지하에 뭐가 숨겨져 있는지 네가 모를 리가 없을 텐데?
호오?
비나 씨, 아무래도 당신은 패를 찾아낸 것 같네요.
알렉산드리나, 자네의 성실함은 높이 사지. 하지만 주의는 줘야겠어. 지금 자네 신분은 의장이지, 글래스고의…… 그래, 불량배가 아니야.
친애하는 고모님. 옛날에 우리가 노포트 구에서 어떻게 그 부패 경찰들을 멀리 내쫓았는지 알고 있나?
다 함께 아무 일도 없는 척하면서 문제를 해결하거나, 아니면 놈들이 저지른 비열한 행동을 전부 밝히고 공멸하거나. 이 방식은 몇 번을 해도 틀리지 않았지.
그리고 너희가 모를 리가 없다. 빅토리아와 너희 중에 과연 어느 쪽이 둥지고 어느 쪽이 알인지. 이 얘기는 과거에 당신도 했던 것 같은데, 캐스터 공작.
……하아. 알렉산드리나, 자네에게 의장을 맡긴 것이 좋은 선택이었는지 의문이 드는구나.
아니지. 이건 내 선택이다. 너희가 맡긴 게 아니야.
너희 일정이 바쁘다는 건 나도 안다. 슬슬 본론으로 돌아가도록 하지.
전체 의원 수, 약품 구매, 군 제도 개혁, 전용 회선, 물자 루트, 부흥 원조……
내 머릿속에는 너희와 얘기해야 하는 일이 아주 많아. 그러니 시간 낭비는 안 했으면 좋겠군. 물론 지금처럼 반론하는 것은 상관없다.
걱정 마라, 이번엔 너희 목에 검을 들이대지는 않을 테니.
드디어 나왔어! 다들 얼른 와 봐!
우리 목소리를 의장님에게 전하면 그 불쌍한 병사를 구해 줄 거야.
……
도로에서 목이 빠지게 기다리던 군중들이, 혼자 있는 비나를 에워쌌다.
모두가 자신의 대답을 기다린다는 것을 비나는 알고 있다.
저희 목소리를 들으셨죠! 그 무고한 영웅이 이런 결말을 맞이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이라도 생각을 바꾸시면 늦지 않습니다!
……
미안하다. 다이앤의 처벌에 관해서는 더 이상 아무 할 말이 없다.
이건 의회의 결정이고, 변경은 허락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내 태도이기도 하다.
다들 해산해라. 만약 어떻게든 결과를 원한다면 남아도 상관없다.
조금 전, 손님으로 온 공작들에게서 원래 우리 것이었던 많은 것들을 되찾아왔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미래에 관한 것이다.
하나씩 모두에게 설명하겠다. 이게 지금 내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말이다.
항의하는 목소리가 약해졌다. 그들은 이번 의회의 결과를 기대하기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불만을 품은 일부 사람들이 군중 속에서 목소리를 높였다.
그 불쌍한 사람은 진짜로 구할 방법이 없는 거냐고…… 대체 왜!
이 일은 이제 어떻게 할 수가 없어. 설마 너는 의장이 스스로 한 약속을 저버리길 바라나?
한번 샛길을 만들어 버리면 의회의 새 법률은 전부 장난이 되지.
……캐서린 씨, 왜 여기 있지?
여기를 지나가던 옛 친구가 항의가 끝나지 않는 것을 보고는, 무슨 일이라도 일어날까 싶어 도와 달라고 찾아왔지.
그리고 마침 퇴근하던 직원들이 우연히 그 얘기를 듣고 도우러 온 거야.
보라고.
도로 주변에서 공장 노동자들이 속속 몰려들어 비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고, 항의하던 군중 속에서 자신이 잘 아는 친구나 가족을 찾아냈다.
다들 옆에 있는 사람을 설득했고, 도로는 순식간에 북적였다.
아무래도 조금 늦은 것 같군.
……소위?! 요양소에서 출발을 기다리던 게 아니었나?
델핀 님에게서 네 얘기를 들었다. 원래는 오기 싫었지만, 요양소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고는 이번엔 누가 너한테 폐를 끼치는지 보러 가겠다고 소동을 피워서 말이지.
말리지 못하고 같이 오는 수밖에 없었다.
정렬한 병사들이 노래를 부르며 발걸음을 맞춰 북적이는 군중 쪽으로 향한다.
시끄러웠던 현장이 순식간에 조용해지며, 사람들은 무심코 길을 비켜섰다. 그리고 병사들이 비나 앞에 서서 항의하는 사람들을 가로막는 것을 보았다.
비나 대장이 오늘 우리를 위해 공작들하고 중요한 얘기를 하러 간 것은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공작들 앞에서 창피를 당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전쟁은 더 이상 무리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머릿수로는, 헤헤, 아무 데도 안 집니다!
다들 고맙다!
야, 빨리 와! 아마 여기일 거야!
시끄럽게 떠드는 아이들이 겁도 없이 군중을 억지로 헤쳐 나와 비나 앞으로 다가왔다.
진짜 누나였구나!
나를 아나?
당연하지. 다들 누나 얘기를 들은 적 있어. 파라곤 부대의 영웅, 지금 우리의 의장!
요즘 새 친구가 많이 생겼는데, 다들 누나네랑 같이 런디니움으로 돌아온 애들이야.
걔들이 누나랑 아는 사이라고 했어. 봐봐!
아, 안녕하세요. 비나 씨……
애니? 저쪽은 아나벨라인가! 존스도 왔군!
거짓말이 아니었네!
그런데…… 너희들이 왜 여기 있지?
그 까무잡잡한 누나가 그랬어. 누나가 난처한 상황일지도 모르니까 도와주러 가라고!
어…… 우리가 도움이 됐을까?
물론이다!
……고맙다, 모건.
점점 많은 사람이 계단 앞으로 모이자, 다이앤을 위해 항의하던 사람들은 점차 소리를 지르지 않게 되었다.
하아…… 후우……
비나는 요 며칠 동안 일어난 많은 일들을 떠올렸다.
고주망태가 된 다이앤, 떠나간 글래스고 패거리, 도둑맞은 왕관.
*빅토리아 비속어*……
비나는 계단 위에 편한 모습으로 앉아 새빨간 하늘을 바라보았다.
퇴역한 병사들도 바닥에 주저앉자 다른 시민들도 함께 비나를 에워쌌다.
……?
그래, 다들 잠시 쉬도록 하자.
누나, 하나 물어봐도 돼?
앞으로, 우리한테 국왕이 생길까?
……그건 알 수 없지. 하지만 국왕이 없는 건 나쁜 일이 아냐.
왜?
네가 어른이 되면 알게 될 거다.
응?
저기, 이게 빅토리아에 과연 좋은 일일까, 나쁜 일일까?
그거야 모르지. 지금은 무슨 말을 하든 시기상조야.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면, 모두의 인식도 그에 따라 변해야 한단다.
흠…… 우리에게 감시당하는 의회, 어떠한 개인의 권위도 없고 국왕도 없고…… 이건 지금까지의 빅토리아엔 없었던 일이야.
아무리 나라고 해도 비나가 터무니없이 대담한 일을 하려고 한다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겠네.
우아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자세로 계단 위에 앉아 있는 의장을 보며, 캐서린도 여러모로 걱정이 많았다.
하지만 비나를 에워싼 아이들은 마음껏 웃고 있었다.
가끔씩 비나는 자기가 알고 있는 공작에 관한 웃긴 얘기나, 조금 전 회의에서 공작에게 돌려받은 이익에 대해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큰 소리로 얘기했다.
석양빛이 그녀의 몸에 내렸다가, 시간과 함께 서서히 멀어져갔다.
나는 앞으로 좋아질 거라고 생각해.
캐서린은 연기를 내뱉었고, 그 희미한 연기가 햇빛 속으로 사라져 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국왕의 왕관을 성왕궁 서쪽 회당 왕좌에 두고 도시 방위군이 밤낮으로 감시하기로 의회에서 결의했습니다.
적합한 국왕 후보자가 나타날 때까지 왕관은 의회가 대신 보관하게 됩니다.
국왕 후보가 결정되면, 의회가 국민 투표를 심사 및 감독 후 대관에 관한 협의를 진행합니다.
또한 의회는 가까운 시일 내에 물자 배급 등 국민 생활에 관한 결정을 공표하고……
훗, 의회의 감독이라.
이런 회의는 정말 신경을 깎아먹는군요. 저는 역시 댄스파티에서 얘기를 나누는 편이 취향입니다.
적어도 목이 마르면 한잔할 수 있으니까요. 하아, 데이비스 경은 술을 가져오는 데 얼마나 걸리는 겁니까.
캐스터 공작은 이제 어디로 가시는지?
알면서 굳이 물을 필요가 있어?
웰링턴 곁에 있는 첩자가 정보를 전해 주기를 기다리는 것보다 당신에게 직접 듣는 게 훨씬 빠를 테니까요.
엘레노어, 당신은?
고도딘 공작님, 아직 우리는 헤어지기 전에 인사가 필요할 만큼 친한 사이가 아닙니다.
그 말은 참으로 섭섭하군요. 아무래도 노르망디를 방문할 때는 좋은 술을 들고 가서 당신 앞에서 나를 좀 치켜세워 달라고 부탁해야겠습니다.
아, 차가 도착했네요. 캐스터 공작님, 제가 문을 열어 드리죠.
고맙네, 마치 백작.
그리고 잊지 말도록. 우리는 결국 빅토리아인이라는 것을 말이야.
물론입니다.
오, 이 종소리가 얼마 만인지. 정말 그립군요.
고, 고, 고도딘 공작님! 이게 바로 저희 술 저장고 비장의 술입니다! 가져왔습니다!
제 저택을 점거했던 마족들도 발견하지 못했던 겁니다.
데이비스 경, 당신은 정말 재미있는 분이군요.
걱정 마시기를. 고도딘 영지는 항상 당신을 위해 자리를 마련해 두겠습니다.
고도딘 공작은 술을 한 모금 마시고, 뒤돌아 감상에 젖으려던 순간,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그가 본 것은 절경이었다.
……태양이 진다……
붉은 해가 천천히 저물며 마치 도시 전체를 불태우는 듯했다.
살카즈가 찢어 놓은 도시의 상처는 석양 속에서 더욱 흉측하게 드러나며, 아직도 피를 흘리는 것 같았다.
에취…… 겨울의 석양은 정말 무정하군요.
훗, 우리를 대하는 의장의 태도와 비슷하네요.
겨울옷을 몇 벌 보내 주지, 고도딘 공작.
몸조심해. 빅토리아는 아직 당분간은 당신이 없으면 안 되니까.
감사합니다.
적어도 우리가 웰링턴보다 먼저 죽을 수는 없으니까 말입니다. 그렇지요?
……
두 분은 왜 그렇게 쓸데없이 감상적이시죠?
저는 오히려 이 석양이 아주 아름다워 보입니다.
해가 지고 달이 뜨고, 달이 지고 해가 뜬다. 이런 풍경을 눈에 담을 기회가 몇 번이나 있을까요?
런디니움의 안개와 구름이 사라지는 일은 좀처럼 없습니다.
엘레노어, 옛날 학생들은 다들 태양이 런디니움을 쫓아다닌다고 농담을 했죠.
우리가 일출을 바라면 해가 뜨고, 해가 지지 않기를 바라면 해는 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런디니움은, 전력으로 가속해야 해가 지는 속도를 간신히 따라잡겠군요.
이래서야 마음 놓고 잘 수가 없겠어요.
해가 뜨든 지든 마음대로 하게 놔둬. 빅토리아의 수도가 될 수 있는 건 런디니움뿐이야.
마치 백작, 내 말을 잘 기억해.
하하, 캐스터 공작님도 썰렁한 농담을 하시는군요.
훗, 이 태양은 정말 빨리도 움직이는군.
종소리가 또 한 번 울렸다.
그 소리에 검은 파울비스트 몇 마리가 도시 상공으로 날아올랐다. 파울비스트들은 공중을 선회하다가, 증기를 뚫고 붉은 태양으로 날아가 서서히 모습을 감추었다.
곧 태양이 저물어가고, 쌍둥이 달의 달빛이 점점 더 뚜렷해진다.
밤이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