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B-10안녕, 잘 있어
모든 게 끝나고 켈시가 바벨로 돌아왔을 때 사태는 이미 돌이킬 수 없었다. 테레시아는 검은 왕관을 쓴 아미야의 입을 빌려 켈시에게 마지막 이상을 알려준다.
테레시아는 마치 처음 만난 사이처럼, 눈앞에 있는 사람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조용히 상대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눈 속의 감정이 끊임없이 바뀌다가 결국 텅 빈 공허함만 남게 되었다.
테레시아는 알고 있다. 마지막 기억은 지워졌고, 영혼도 깨끗해졌다는 것을.
너의 기억은 죽었어, 그리고 너의 영혼은 다시 태어날 거야……
정말 무서운 방법이야……
하지만 그 사람들은 네 선량함, 승리를 향한 갈망을 과소평가했어. 그 사람들은 우리를, 테라가 지금까지 견뎌온 기원을 과소평가했지.
박사,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이렇게 부를게……
이건 너를 향한 나의 소소한 복수야.
그리고 내가 주는…… 마지막 선물이고.
기억은 결코 너 자신을 형성할 수 없어. 너는 가장 본래의 모습으로……
……다시 한번…… 이 대지 위에서 살아. 이 세상을 보고, 삶의 희로애락을 느끼고, 테라의 여러 사람들을 사귀어……
어쩌면…… 너의 여정은 고난에서 시작될 거야, 언제나 이 대지의 어두운 달그림자를 벗어날 수 없겠지, 하지만 결국…… 태양이 다시 떠오르는 걸 볼 수 있을 거야.
그리고 난 믿어. 너는 다시 답을 얻을 수 있을 거야. 진정한 자신의 답을 말이야.
그건 분명…… 켈시와 내가 전에 들었던 그 속삭임과 같겠지……
분명 뜨거운 눈물이 눈시울에 가득할 거야.
생명이 사라지고 있었다.
테레시아의 귓가에 먼 곳에서 애도의 엘레지가 들려왔다. 그렇다. 라케라말린은 이전에 그녀와 연결되어 있었다.
테레시아의 숨결은 약해지고 있었지만…… 전에 느껴보지 못했던 홀가분함을 느꼈다.
테레시아는 아미야를 품에 안았고, 보호했다. 아미야의 심장 박동은 테레시아를 안심시켰다.
이젠…… 좀 피곤해졌어. 그 왕관을 들고 있느라 정말 힘들었어.
피곤하면 쉬라고 했지? 아미야.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했었어……
어쩌면 언젠가…… 우리가 함께 이 대지 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평온한 잠에 빠질 수 있게 만들지도 모른다고.
아주 먼 이야기겠지만, 어쩌면 네가 그날을 나 대신 보게 될지도 모르겠네……
아미야, 깨어나게 되면……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 해.
하아…… 피곤해졌어……
그래도 아직은 안 돼, 아직 안 왔는데……
테레시아에겐 마지막이면서도 소중한 힘밖에 남지 않았다.
반드시 기다려야 하는 사람이 있었다.
하지만 다행히 자신이 기다리던 사람이 오는 소리를 들었다.
설령 눈을 뜰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해도 알고 있었다……
그 사람이 왔다는 것을……
켈시……
켈시.
……
테레시아……
아미야…… 박사……
이렇게 될 가능성이 있다는 건 줄곧 알고 있었는데…… 어째서……
내가 남았어야 했는데, 내가……
……
테레…… 시아.
우…… 우린……
테레시아의…… 죽음을…… 확인했다.
Mon3tr, 명령이다……
이어질 습격에…… 대비해.
박사와 아미야에게…… 또다시 이런 일이 생기게 할 순 없어…… 절대로!
Mon3tr!
켈시……
켈시.
……!
아미야가 눈을 뜨자, 눈동자에 분홍빛을 띠는 마름모꼴이 은은하게 나타났다.
테레시아는 여전히 눈을 꼭 감고 있었다.
하지만 켈시는 알고 있다.
그게 바로 그녀란 것을.
켈시…… 줄곧 기다렸어.
테레시아! 난……
괜찮아 켈시. 괜찮아.
잘 들어……
난 이미 죽었어.
지금 보고 있는 건 내가 왕관에 남겨둔 의식이야. 이 아이의 몸을 빌려 켈시와 작별 인사를 하는 거지.
켈시. 바벨의 깃발을 카즈델의 하늘 위로 걸어 올렸어?
카즈델로 돌려보냈어. 깃발이 하늘 높이 올라가는 걸 지켜봤지.
고마워.
내가 너무 늦었어. 이런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너무 자책하지 마. 켈시에겐 완수해야 하는 임무가 있었잖아.
그리고, 결국엔…… 이렇게 결국 만났잖아. 이거면 충분해.
……
……작별 인사를 할 시간을 좀 더 가질 순 없을까?
미안해, 켈시……
……알고 있어.
켈시, 자책하진 말아줘.
우린 박사를 믿었었지. 난 켈시가 앞으로도 계속 우리의 길을 따라 나아갔으면 해.
켈시, 이제 더 의심할 필요 없어.
난 그를 죽였고, 그를 구하기도 했거든.
그가 깨어나면…… 있어야 할 곳으로 돌려보내 줘……
그를 이끌어줘, 우리가 가야 할 길의 종착지까지 안내할 사람이니까.
난 그렇게 믿고 있어.
알았어.
하지만…… 우린 더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로도스 아일랜드의 깊은 곳으로 들어갈 수 없어.
아는 사람에게 부탁해서 박사를 우르수스로 보낼게.
체르노보그라면 안전할 거야. 박사가 로도스 아일랜드에 계속 남는 건…… 너무 위험해.
그것도 괜찮겠네…… 켈시. 이제 뒷일은 아미야에게 맡길게.
아미야는 험난한 길을 걷게 되겠지.
내가 함께할게, 그리고 바벨도…… 함께할 거야.
아미야는 아직 어리지만, 충분히 강인한 아이야.
켈시, 난 순간적인 생각 때문에 왕관을 바벨에게…… 아미야에게 넘겨준 게 아니야.
굴레를 끊고, 다가올 미래에 대비하려면…… 마왕은 살카즈만의 마왕이 되어선 안 돼. 테라의 마왕이 되어서도 안 되고.
마왕은 족쇄도, 통치자도, 무적의 힘도 아니야.
마왕은 열쇠야…… '문명의 존속'이지.
아미야에겐 알려주지 마, 켈시. 지금부터 이 모든 걸 감당할 필요는 없으니까.
그 길을 걷게 되면 아미야는 알게 될 거야. 그리고 알아야 할 거야……
모든 방해를 뚫고 나가야 비로소 대지로 통하는 문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너는?
난 이상 속에서 사라져 가겠지, 하지만 아미야는……
썩어 문드러진 모든 것들을 모두 태워버릴 불꽃이 될 거야.
“새로운 전쟁이 곧 시작될 거야…… 켈시.”
“테레시스, 나의 혈육은……”
“빅토리아에 우리의 요람을 내려줄 거야. 오리지늄이 그 땅을 가득 뒤덮을 것이고……”
그녀가 떠나려 하고 있다.
“그는 대지의 다른 종족들에게 재난을 가져올 거야……”
그리고 너희는 그녀가 추구하는 이념의 마지막 발악이 될 것이다.
또한, 최후의 노력이 되겠지.
“그는 살카즈를 다시 전 테라의 적으로 만들게 될 거야.”
처형인들이여……
포기하지 마라, 그녀의 끝이 확정되기 전까지는……
내게 증명해라, 그 길에 여전히 미래를 쟁취할 기회가 있음을……
“그날이 오는 걸 막아야 해. 모든 걸 되돌릴 수 없게 되기 전에……”
그녀에게 증명해라, 너희가 말하는 평화가 답을 얻어낼 수 있다는 것을.
하지만 유감인 건, 내 동포들의……
피맺힌 원수를 갚으라는 외침이 이 대지에 울려 퍼졌다는 것이다……
“카즈델의 원한이 더 이상 퍼져 나가선 안 돼.”
그녀의 죽음은 정해졌다.
너희는 마왕을 잃었다.
난 유일한 가족을 잃었다.
……
난 모든 희생을 무의미하게 만들지 않을 것이다.
동포들이여……
너희가 이곳에 모인 이유가 평화를 위해서인지, 복수를 위해서인지는 상관없다.
난 너희의 목소리를 들을 것이다.
“복수. 전쟁. 생존. 미래.”
너희는 살카즈가 걸어야 할 진정한 길이 어디 있는지 보게 될 것이다.
빅토리아의 계단을 물들인 너희의 피는 언젠가 돌아갈 곳을 얻게 될 것이다……
이곳은, 우리의 새로운 시작이 될 것이다.
“지금도 난 살카즈들의 목소리가 들려, 켈시……”
“살카즈의 영혼에 가까워질수록, 소리가 더욱 또렷해지고 있어.”
“만 년 동안의 절규 속에서 들리는 건……”
고난이 다시 찾아올 것이다……
전 테라를 굴복시키는 것……
그것은 바로 이곳에서 시작될 것이다.
살카즈는……
“살카즈는……”
……새로이 태어날 것이다.
“……이 대지를 파멸시킬 거야.”
우린 그를 막아야 해, 켈시.
하지만…… 지금의 바벨로는 무리야.
넌 언제나 방법을 찾아냈어.
그리고 우리가 함께 세운 바벨에서, 켈시는 영원히 혼자가 아닐 거야……
“우리의 동료가 켈시를 도와줄 거야.”
전하……
테레시아……! 전하……! 전하!
“그들은 가장 굳건한 사람들이야.”
……전하……
전하, 내가 돌아왔어……
지금까지 이곳에 서 있을 때면, 언제나 당신이 나를 맞이해줬지.
하지만 이번엔…… 없어.
내 목소리가 들려?
어째서 조금 더 기다려주지 않았던 거야, 전하……
……젠장! 젠장!
녀석들이 대가를 치르게 하겠어…… 약속할게.
가담한 모든 녀석들을……
설령…… 설령 그 사람이라 해도……
선생이었던…… 테레시스라 할지라도……
테레시스……
반드시 날 상대하게 만들겠어…… 반드시…… 그를 상대해 내고야 말겠어!
모든 배신과…… 고통……
테레시아 전하..... 테레시스……
나의…… 나의 유일한 두 사람…… 이었는데……
구름이 석양을 가렸고, 그림자가 아스카론의 모습을 덮었다.
아스카론을 비추던 햇살이 사라졌다. 그녀의 신앙이 사라졌다.
아스카론은 발버둥 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 폭풍의 아이가 결국 보게 된 건 죽음뿐이었다.
“그들은 가장 뛰어난 사람들이야.”
……
……
……
……로고스.
……응.
우린…… 난 잘 모르겠다…… 일단은……
일단 철수하자.
일단…… 바벨로 돌아가자.
“그들이야말로 우리의 이상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사람들이야.”
……
……끝났습니다.
내가…… 어째서……?
……저도 이상합니다. 나흐체러르 킹.
마왕의 죽음에는 익숙해진 줄 알았는데요.
“그 사람들…… 남겨진 사람들은, 배신을 의심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야.”
……
……말도 안 돼.
*살카즈 욕설* 대체 누가 통신 주파수를 맡고 있는 거야?! 군사위원회한테 뺏기라도 했나? 도대체 이게 무슨 헛소리냐고!
난 안 믿어…… 난…… 닥쳐! 스카우트!
본함은…… 이쪽일 거야!
테레시아가…… 이렇게 쉽게…… 그냥…… 죽어버렸다고?!
898년 겨울, 마왕이 죽었다.
일리스는 카즈델이 멸망하기 전에 죽었다.
영혼 용광로가 폭발해 생긴 분진은 카즈델 지역 상공에서 밤낮없이 3일간 흩날렸고……
결국 검은 눈처럼 떨어졌다.
침략자의 뼈는 땅에 묻혔고,
과거 '카즈델'이란 이름을 가졌던 폐허 또한 땅에 묻혔다.
카즈델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카즈델은 사라진 적 없어.
마왕에게 들은 얘기로는, 카즈델은 과거에도 3000번 넘게 멸망했었지. 하지만 결국 재건되었어.
……일리스가 사람들을 속이기 위해 지어낸 얘기일 수도 있다.
그는 이미 죽었어, 테레시스.
설령 그게 일리스가 궁궐에서 허송세월하던 중 지어낸 얘기라고 해도…… 난 적어도 그 이야기들 속에서, 방향을 하나 찾을 수 있었어.
어쩌면 존재하고 있을지도 모를 평온한 삶이란 방향을.
승리한 후엔, 지금처럼 모두 이 대지를 떠돌게 되겠지……
동포들은 영웅이란 이름으로 우릴 칭송하겠지만, 우린 생기가 없어진 폐허를 돌려주는 것밖에 할 수 없어.
우리가 대체 뭘 할 수 있을까?
영웅…… 이 전쟁이 끝난 후에는, '영웅'이 가진 의미가 사라지게 돼……
맞는 말이다.
그리고…… 방금 전부터 계속 살카즈의 영혼이 속삭이는 소리가 들리는 거 같아……
그 속삭임이 점점 또렷이 들려……
살카즈의 영혼이 날 어디로 데려가려고 하는 건지 잘 모르겠어……
너는?
……나도 그렇다.
승리할 때의 흥분으로 인해 헛것이 들리는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그런 건 아닌 것 같군.
살카즈의 영혼이 우릴 부르고 있어.
그렇다면 가도록 하지, 그곳이 어디든.
마왕 일리스는 긴 잠에 들었다.
산더미처럼 쌓아 올린 유해 아래에서.
먼 훗날, 한때 이곳에서 죽음을 맞이했던 왕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자였으니.
살카즈는 실패한 자를 기억하지 않는다.
살카즈의 운명을 바꾼 전쟁에서, 사람들은 여섯 영웅의 눈부신 이름만을 기억할 것이다.
도착했어.
기억나는군…… 일리스의 수레가 이곳에서 무너진 뒤, 우린 여기서 이 전쟁에 합류하겠다고 맹세했었다.
이곳이 바로 우리가 시작했던 곳이다……
한 재봉사와 한 검사의 시작점.
……들었어? 테레시스.
살카즈의 영혼의 목소리가 우리 발밑에서 전해지고 있어……
……그렇군.
이거였구나.
그래.
이렇게나 작았었다니.
왕관.
죽음이 지켜보는 가운데……
살카즈의 영혼이 지켜보는 가운데……
쌍둥이는 함께 왕관을 들어 올렸다.
왕관은 쌍둥이를 동시에 선택했다.
폐허 위, 실존하는지도 모를 살카즈의 영혼이 두 희망을 동시에 선택했다.
테레시아…… 네가 이 왕관을 써라.
왜?
마왕이란 것은 역사가 침묵을 선택할 때, 불쌍한 사람들이 품는 일방적인 희망에 불과하다.
맞아…… 살카즈의 운명을 바꾸는 데에 외부 세력에게 도움을 받을 필요는 없어.
하지만 이 절망의 시대에선, 이건 우리의 동포들에게 한 줄기 희망을 가져다줄 거야.
난 희망을 가져다주는 사람이 되기엔 적합하지 않다.
나의 검은 네가 안내할 우리의 앞길을 열 것이다.
……알았어.
전쟁은 이제 막 끝났다. 그렇다면 이번엔 우리가 그걸 언제까지 짊어져야 하지?
우리가 정착할 수 있는 터전을 찾을 때까지, 검은 왕관의 고난이 우리를 삼킬 때까지……
모든 사람들이 같은 하늘 아래에서 편히 잠들 수 있을 때까지.
방금 “앞길을 안내한다”고 했지? 예전에 우리가 했던 모험, 기억해?
테레시스는 검을 쥐고, 나를 업었지……
그리고 넌 내게 숲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안내해 줬다.
테레시아……
내가 왕관을 씌워줄 수 있게 해줘.
그래.
테레시스……
모든 살카즈에게 맹세하겠어……
“우리는 영원히 평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