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B-ST-3영혼의 끝자락
박사의 기억 속에서 테레시아는 모든 것을 보게 되고, 마지막으로 그 사람과 작별을 하게 된다.
기억 지우기. 이건 테레시아에도 경험이 많지 않은 일이다.
하물며 지금은 어쩔 수 없이 거의 알지도 못하는 사고에 직면해야만 했다.
어떤 일이 닥칠지, 어떤 위험을 초래하게 될지 예상할 수 없지만, 테레시아에게 물러설 여지는 없었다.
이것은 테레시아 생명의 마지막 결정이었다.
테레시아는 박사의 기억 속을 거닐었다. 무수히 많은 기억의 파편들이 기다란 실이 되어 사라지고 있었다.
기억이 사라지고 있었다. 아무런 소리도 없이.
테레시아는 본 적도 없는 이해할 수 없는 세계를 걷고 있었다.
이토록 눈부신 문명이 어쩌다 종말을 맞게 되었을까?
별똥별처럼 빛나던 천재들은 어째서 이 궁극적인 문제에 대한 답을 얻어내지 못한 걸까?
저항에는 의미가 없었던 걸까? 단결은 그저 망상이었던 걸까?
테라의 미래는 이미 정해진 걸까? 그럼 그녀가 사랑하는 터전은?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답을 내릴 수 없었다. 그녀는 답을 찾지 못했다.
그녀는 기억이 사라진 후의 허무함 속을 계속 거닐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마침내, 익숙한 사람을 보게 되었다.
모두의 열정에 많이 놀랐어?
켈시, 네가 왜 이곳에?
네가 거둔 큰 승리를 축하하는 축제인데, 내가 빠질 수는 없잖아?
알고 있겠지, 난 오랫동안…… 그때의 우린 축하할 수 있는 날이 많지 않았어.
어떻게 축하를 해야 하는지도 벌써 까먹었는걸.
괜찮아, 점점 익숙해질 테니까. 바벨은 새로운 시작이 될 거야.
가 봐. 우리도 제대로 축하를 해봐야지.
켈시가 손을 들어 박사의 등을 툭 쳤다. 그를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던 인파 속으로 살며시 미는 모습이 테레시아의 눈에 들어왔다..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손을 내밀어 경쟁하듯 박사에게 악수를 청하고, 박사의 어깨를 두드렸다.
키가 큰 사람들은 겁도 없이 손을 박사의 머리 위에 얹어 격하게 쓰다듬기까지 했다.
……?
아 그게, 부하의 경솔한 행동에 대해선 사과할게, 박사. 말리려고는 했는데……
팔을 다쳐버려서…… 말리지도 못했네.
괜찮아…… 다친 데는 좀 어때?
큰 문제 없이 회복 중이야.
아쉽네, 오늘 밤엔 마실 것도 많이 준비되어 있는데 제대로 즐기지도 못하겠어.
괜찮아 박사, 내가 저 녀석 대신 더 마시지 뭐.
만약 네가 과감하게 전략을 바꿔 기습하지 않았다면, 우린 다 포위망에 빠졌을 거야.
자, 받아, 오늘은 즐겁게 마셔보자고.
내 주량에 실망할 거 같은데, 에이스.
잠깐, 잠깐만 비켜줘. 오늘의 주인공을 보지 못했단 말이야.
사람 진짜 많네. 지휘실이 이렇게 작게 느껴진 건 처음이야. 이참에 내가 지휘실을 좀 넓힐까? 아직 밖에 맛있는 것들을 갖고 오는 사람들이 많아.
박사, 모든 이가 그대가 가져다준 승리에 기뻐하고 있다. 하지만 어째…… 조금 마음이 불편해 보이는군.
잘 숨겼다고 생각했는데. 크흠, 사람들 사이에 있으면 괜히 긴장이 돼서.
어이, 조심해, 자꾸 밀지 마. 아미야, 괜찮니?
전 괜찮아요!
박사님! 빨리 오세요, 저랑 테레시아 씨가 박사님을 위해 케이크를 구웠어요!
이것 보세요. 오븐이 너무 뜨거워서 손가락도 데었고, 물집도 생겨버렸어요.
고마…… 뭐?! 괜찮아? 누가 화상약 좀 가져다……
가벼운 기침 소리가 났고, 사람들은 바로 양쪽으로 흩어졌다.
테레시아는 하얀 드레스를 입은 여성이 자신의 어깨를 스치며 박사에게 웃는 얼굴로 손을 내미는 모습을 보았다. 손에는 아직 낫지 않은 상처가 있었다.
그녀 자신이었다.
기쁨도, 기억도, 귓가에 들리는 소리도 점차 희미해져 갔다.
테레시아는 자신에게도 매우 익숙한 이 기억을 지웠고,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그녀는 PRTS에서 한 번도 보지 못한 기록을 보게 되었다.
영상 기능 호출. 관리자 권한 암호화 가동.
영상 번호 (0091_admin)…… 제목 추가: (네게 남기는 내용).
기록 가동…… 녹화 시작.
……
네가 깨어날 때까지 내가 버티지 못한다면, 넌 이 영상을 보게 되겠지.
모든 게 일단락될 때까지, 난 이곳, 가장 안전한 곳에 있을 거야.
모든 걸 끝낸 뒤, 난 침묵 속에서 사라질 거야.
나를 미워하는 모든 사람들 앞에서 사라질 거야.
……
마음속에서 어떤 목소리가 계속 내게 말을 걸고, 묻고 있어…… “난 누구지?”라고.
우리 자신의 수호자? 아니면 미래 문명의 배신자?
이젠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어……
내가 남긴 모든 기록을 살펴보고 나면, 넌 답을 얻을 수 있겠지.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망설이지 않게 됐어.
…… 난……
네가 깨어나면, 난 네 과거에서 사라져 있겠지. 다시는 우리가 약속한 미래에 나타나지 않을 거야.
그래서 난 바라고 있어……
……기록 일시 정지. 방금까지의 모든 내용 삭제. 난…… 시간이 좀 더 필요해.
……
그녀는 망설임도, 탄식도 없이 그저 묵묵히 해야 할 일을 계속했다.
테레시아는 점차 깊이, 더 깊은 곳에 묻어두었던 기억에 가까워졌다.
가장 가까운 구조대에 연락해 줘야 해! 사고 난 수송대 차량에 림 빌리턴의 마크가 붙어있어, 이건 너희……
아직 안에서 생존자의 목소리가 들려!
치지직…… 연결됐습니다. 하지만 가장 가까운 채굴 현장까지 가는데 시간이 좀 더 필요합니다.
말씀하신 내용에 따르면, 그곳에서 강도 사건이 있었습니다. 무장 경비원에게 즉시 연락해서 출발시키겠습니다.
…… 으……
…… 무장 경비원이라…… 하지만 림 빌리턴은 가정이 없는 감염자에게……
쳇……
조금만 버텨 줘…… 지금 바로 꺼내줄게……
…… 당신은……
잠들면 안 돼…… 크윽…… 옳지, 손 내밀어.
잡아!
하지만…… 너무…… 힘들……
이름이 뭐야?
…… 저는……
이름……?
엄마가…… 아미야…… 라고……
아미야, 정신 차려, 내 손을 잡아!
잡았…… 어요……
절대 손 안 놓을 테니까……
기억이 부서졌다.
테레시아가 가진 기억의 끝이자, 박사가 가진 기억의 끝이었다……
“테레시아……”
……
말도 안 돼. 분명 모든 기억을 다……
“테레시아.”
그녀는 목소리를 따라 허무 앞으로 다가왔다. 허무 저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긴 어디지……
드디어 여기까지 왔구나, 기다리고 있었어.
박사……?
박사?
날 그렇게 부르는 사람은 별로 없어. 사람들은 날 '예언가'라는 코드네임으로 부르는 걸 더 좋아해.
……예언가……
그럼, 켈시가 믿었던 건 사실 너였구나.
켈시에겐 정말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하지만 방법이 없었어. 난 확실히 피할 수 없는 음모 속에 깊이 빠졌었으니까.
계속 여기서 너를 지켜봤어. 네가 희망을 위해 분주히 움직이는 모습을, 네가 배신으로 인해 아파하는 모습을 지켜봤지……
마치 과거의 나를 보는 것처럼.
……미안해.
지금의 넌 박사의 감정이 타버린 뒤 남은 잔재일 뿐이야. 이런 상황에서 너의 감정과 기억만 따로 남겨둘 순 없어……
끝까지 왔으니까, 해야 할 일을 해.
날 믿어줘서 고마워.
……늦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만나서 정말 반가웠어.
나도 만나서 반가웠어, 테레시아.
예언가는 끝없이 펼쳐진 밀밭으로 향했고, 그 속으로 사라졌다.
휘몰아치는 바람은 보리밭을 가로질렀고, 공간에 남은 마지막 광경도 산산이 무너지며 실의 끝이 드러났다.
테레시아는 실을 당겼다. 실은 아주 빠르게 빛을 잃었고, 가루가 되어 부서졌다.
안녕이라고 말할 때가 왔네……
미래에서 우린 다시 만나겠지……
켈시…… 아미야……
……{@nickname}.
테레시아는 손에 쥐고 있던 마지막 실을 놓았고, 마치 별빛처럼 흩어져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녀는 앞으로 나아갔다. 희망을 향해……
죽음을 향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