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V-8과거와의 작별
리온은 마지막 순간에 섹터에 남기로 하고, 제시카는 동력로가 폭발하는 광경을 지켜본다. 그리고 우드로도 소식을 알게 된 후 홀로 클리프를 찾아가기로 한다.
등장 오퍼레이터: 제시카, 리스캄, 프란카, 제시카 더 리버레이티드, 콜드샷
넉넉잡아도 10분 정도면 블랙스틸의 차량 행렬이 도착할 거예요.
에너지 타워까지 뛰어가기에는 시간이 부족해.
내가 여기 남을 테니까…… 먼저 가.
시간을 얼마나 벌 수 있겠어?
얼마나 필요하지?
적어도…… 30분?
우드로는 허리춤에서 리볼버를 꺼내 총알을 세어보았다.
……1시간? 도착하면 폭약도 설치해야 하잖아.
그 정도면 충분해.
우드로 씨……
……몸조심해, 우드로.
어서 가. 참, 제시카……
우드로 씨, 왜요?
고마워…… 여기까지 이걸 가져와 줘서.
우드로는 모자챙을 가다듬고 돌아서서 도로로 나갔다. 그의 뒷모습은 어둠 속에 금세 사라졌고, 작별 인사만이 공기 속에 남았다.
다음에 다시 만나자고, 친구들.
클리프 씨, 동력 추진 설비 테스트가 끝났습니다. 현재 엔지니어링팀에서 연결 구조의 안정성을 재확인하고 있습니다.
……
……클리프 씨?
언제 출발할 수 있을 것 같나?
이번 주 수요일이면 모든 준비가 끝날 겁니다.
그래…… 알았어.
크, 클리프 씨…… 죄송하지만 보고드릴 일이 있습니다.
그럼 클리프 씨,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래……
무슨 일이지?
섹터에 주둔하는 팀에서 본부에 지원 요청을 보냈습니다. 강도들이 은행 금고문을 폭파하고 안에 든 준비금을 모두 가져갔답니다.
강도는 총 4명으로…… 신분이 확인되었습니다. 우드로 씨와 그분의 친구, 그리고……
그리고 누구지?
제시카 씨입니다.
……훗.
사람을 보낼까요? 며칠 전에 클리프 씨께서 은행에 배치한 모든 보안요원을 철수시키셨잖아요……
섹터 견인 준비 작업이 우선이야. 현재 작업 중인 사람은 계속 진행하고, 나머지는…… 모두 보내.
그리고 제시카 씨는 특별한 신분입니다만, 어떻게……?
다치지 않게 해. 브린리의 체면도 생각해야 하니까. 우디는…… 다치지 않게 우디를 제압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한데, 아무도 못 하겠지.
뭐 좋아…… 녀석은 살아만 있으면 되니까, 나머지는 아랫사람에게 알아서 처리하라고 해.
네, 알겠습니다.
참, 돈은 그 녀석들 중 누가 갖고 있지?
아직 파악되지 않았습니다.
누가 됐든 틸라를 보내서 주시하라고 해.
소, 소식 들었어? 제시카랑 사람들이……
방법을 찾아야 해. 위에서 명령이 내려왔는데, 제시카랑 우드로 씨를 제외한 나머지는…… 각 팀에서 상황에 따라 처리하라고 했어.
……프란카.
넌 가서 다른 사람들한테 출발할 준비를 하라고 말해. 우리 팀도 체포 명령을 받았어.
……명령에 따를 생각이야?
……프란카, 그 사람들을 돕든…… 체포하든, 우리에게는 시간이 얼마 없어.
반드시 우리가 가장 먼저 도착해서 사람들을 찾아야 해.
헬레나 씨, 리온 씨, 전 여기까지만 배웅할게요.
차량 소리가 메인거리 쪽에서 들려오지 않는 걸 보면, 블랙스틸이 사람을 더 보내 체포하려는 것 같아요. 애초에 예상한 것처럼요.
계획대로 진행하면 되겠지?
네, 전 밖에서 유인할게요.
조심해…… 남은 이 길은 우리한테 맡겨.
후우…… 제시카……
여기까지 온 이상 날 믿을 수밖에 없어.
며칠 내로 블랙스틸이 섹터를 견인해서 떠나겠군. 문 앞에 몇 명 없는 거 보면 모든 인원을 연결 지점으로 보내서 출항 준비를 시작한 거야.
잘됐네…… 상대하기 어렵지 않겠어.
저 병사들은 지금……?
곤히 자고 있어. 일어나면 목이 좀 뻐근할 거야.
우리도 최대한 서둘러야 해. 동력로를 폭파하고 비밀통로를 완전히 봉쇄하려면 이 폭약들을 모두 설치해야 하거든.
자동차 조명이…… 블랙스틸 쪽에서 벌써 채굴 공장 외곽에 접근한 것 같아.
헬레나…… 어서 가, 이런 일은 나 혼자 해도 돼.
……리온.
당신 일이 더 중요하잖아.
아직도 방어선을 돌파 못 했어?
단 한 차량도 주요 도로에 접근하지 못하고 있어.
그 거리에 남은 강도가 몇 명인데?
한 명…… 산크타야.
지원은 도착했어?
아직.
차는 여기 세워두고…… 남은 사람은 다 장비 챙기라고 해. 골목으로 돌아가서 돌파하자.
앞쪽에 매복이 있어……
탄흔을 보니…… 블랙스틸의 식각 탄환이네. 좋은 소식이야, 그 아가씨를 찾았어.
……확성기 좀 줘.
흠흠, 제시카 씨, 무슨 이유로 이번 강도 사건에 합류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체포할 수 있도록 협조한다면…… 곤란한 일은 없을 거야.
(작은 목소리로) 넌 여기서 저 여자의 주의를 끌고 있어. 내가 드론을 띄워서 행적을 추적해 볼 테니까.
다가오지 마세요, 전 순순히 잡히지 않을 거예요.
(작은 목소리로) 총알은 앞쪽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발사된 거야.
(작은 목소리로) 우리가 먼저 가서 배치할 테니까, 준비되면 덮치자.
제시카 씨, 강도 사건을 벌이면 어떤 상황을 마주하게 될지 잘 모르는 것 같군. 종신형에, 가족과 친구는 모두 떠날 테고 세상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까지…… 견딜 수 있겠어?
……제가 블랙스틸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일했는데요. 전 이제 세상 물정 모르는 아가씨가 아니에요.
대가가 뭔지는…… 저도 아주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래도 해야 했어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꼭 해야 하는 일도 있거든요.
앞쪽에 있는 놈이…… 그 녀석이야?
보통 영감이 아니야…… 저기 뒤집힌 차량 보여? 다 저 자식이 그런 거라고.
거리 가운데 있는 그림자는, 마치 떠도는 영혼처럼 깜빡거리는 불빛 아래 조용히 서 있었다.
젊은이…… 할 말이 있으면 내 앞에서 하지 그래?
이렇게 멀리서도 들리는 거야?
여기보다 더 시끄러운 곳에 있었던 적이 있었지만, 이 예민한 두 귀로 살아남았거든.
우드로 씨처럼 전설적인 용병이라면, 전율을 느낄 만한 경험이 많았을 테지.
전설적인 용병이라…… 날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처음이군.
블랙스틸에 창설자와 전우의 사진이 걸린 긴 복도가 있어. 거기에서 우드로 씨와 보스가 함께 찍은 사진을 봤거든. 구석진 위치에 걸려 있었지만, 확실히 봤어.
……아쉽지만 난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전설적인 경험을 하지는 못했어. 그저 전쟁을 겪었을 뿐이지.
상관없어…… 난 늘 보스와 겨뤄보고 싶었거든. 그런데 보스한테 진짜 총을 겨눌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보스와 한 사진에 찍일 정도라면, 당신 실력은 어떨까?
형편없지.
혼자 십여 개의 팀을 갖고 놀고, 거리를 막아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게 했는데도 형편없다고?
아니, 내가 구하고 싶었던 사람은 결국 내 앞에서 비참하게 죽었고, 내가 지키고 싶었던 건 결국 내 앞에서 사라져 버렸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날 버렸고, 내가 증오하는 사람은 내 손으로 죽일 수도 없어.
난 전설이 아니야…… 그저 실패한 늙은 백비스트일 뿐이지.
얼마 안 남은 뼈를 지키는 늙은 백비스트 말이야.
맞은 편에 있는 노인의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움직이는 걸 보고, 용병은 즉시 위험을 감지했다.
그가 가장 빠른 속도로 총을 들어 목표를 겨냥했을 때, 어깨는 이미 총알에 관통돼 있었다.
윽……!
제기랄, 움직임이 전혀 보이지 않았어……
난 슬슬 재미있어지려 하고 있어.
고개 숙여, 미친놈아!
조심해, 더는 접근하지 말라고, 젊은이.
……그걸 지키기 위해서라면, 난 모든 걸 바칠 거니까.
결국 들어왔네요.
제시카 씨, 실내에서는 총알이 사방으로 튈 거야. 난 당신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
저도 당신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요…… 바깥에 있는 사람들을 데리고 떠나세요.
미안하지만 이건 위에서 내려온 임무야. 모든 사람이 다 부잣집 딸이라서, 자기 마음대로 굴 수 있는 건 아니라고.
여러분에게 폐를 끼쳤네요……
칸막이 좌석 뒤에서 들려오는 여자아이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망설임이 묻어났다. 여자아이에 대한 용병의 첫인상처럼 나약하고 예민했다.
권총을 얼굴 옆까지 들어 올린 용병은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아갔다.
이건……
칸막이 좌석에는 아무도 없었다. 테이블 위에는 저격총만 놓여 있었고, 원거리에서 조종할 수 있게 방아쇠 위에 장치가 달려 있었다.
옆에 통신 설비가 놓여 있고, 스피커에서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정말 미안해요.
목표는 주방에 없어.
2층에도 없어.
바깥에도 없어.
여기엔 없어……
당장 철수해, 이건 양동작전을 벌이고 있는 거야……
제가 제 마음대로 군다고 했으면서…… 왜 당신 예상대로 움직일 거라 기대한 거죠?
아니야, 나가면 안 돼!
창밖에서 불빛이 떨어졌다.
명령이다! 다들 엎드려……
말이 끝나기도 전에 폭발음이 울려 퍼졌다.
타이어 하나가 창밖에서 실내로 튕겨 들어왔다. 불과 함께 연기를 뿜으며 몇 바퀴 돌다가, 온통 유리 조각이 깔린 바닥 위로 넘어졌다.
……폭파했어. 차량이 없으니 저들도 동력로까지 가려면…… 시간이 걸릴 거야.
충분하겠지.
더 많이 온 건가?
서둘러야겠어.
계획대로 당신은 이 비밀통로를 통해 떠나고, 난 동력로를 폭파할 거야. 여기가 터지면 이 통로는 아무도 발견하지 못해.
리온……
노선도는 잘 챙겼지?
응.
이 길은 지하 배수관으로 연결돼. 내부 구조는 복잡하지만, 무사히 섹터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길은 하나뿐이야.
제시카가 출구 쪽에 차량과 물자를 숨겨뒀어. 개척지로 가는 길에 군부의 주둔 지점은 피해야 해…… 강도와 폭도가 엄청 많을 테니까.
리온, 수십 번도 더 연습했잖아. 도중에 있을 위험에 관해선…… 우드로가 수도 없이 얘기해 줬고. 우리가 다 알고 있는 일이야.
마음이 안 놓여서 그래…… 헬레나.
난 절대 쉽게 약속하지 않아, 리온.
하지만 장담하건대, 무슨 일이 생기건, 난 전력을 다해 약속한 목적지까지 갈 거야.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럴 일은……
당신이 쓰러지는 일은 없을 거야, 헬레나. 내가 뒤에 있을 거거든. 당신한테 걸림돌이 되는 모든 걸 내가 막아줄게.
이건 내 약속이야.
헬레나, 당신은 쭉 달려가기만 하면 돼. 명심해, 앞만 보고 달리는 거야. 뒤돌아보지 말고.
그럴게, 리온…… 또 봐……
어서 가.
좁은 황혼의 터널이 헬레나의 뒷모습을 삼키는 것을 바라보며, 그제야 리온은 고개를 돌려 방 중앙에 있는 동력로를 쳐다보았다.
섹터에 사람은 얼마 남지 않았지만, 로 안의 화염은 활활 타올랐다.
불빛이 리온의 눈동자에 비쳐 끊임없이 꿈틀거리고, 튕기며, 날뛰었다.
하지만 리온의 눈 안에 있는 차가움을 녹이지는 못했다.
이제…… 우리 둘만 남았구나……
늦었어, 산크타 영감은 벌써 떠났다고.
……어디로 갔는데?
채굴 공장.
너희 다쳤어……?
괜찮아, 그놈이 적당히 하고 멈췄어…… 쓰읍…… 잡을 수 있었는데, 제기랄.
……조언 하나 하지. 영감을 만났을 때 왼쪽 어깨를 집중적으로 공격해 봐.
뭐……
……알려 줘서 고마워, 우리 먼저 가 볼게.
……빨리…… 서둘러야 해……
폭발물을 벽에 붙인 리온은 손을 들어 이마에 점점 더 많이 고이는 땀방울을 훔치려고 했다. 그러나 고온이 바로 그의 피부에 더 많은 수분을 만들어 냈다.
어서……
리온의 입술은 바싹 말라서 침으로도 촉촉하게 할 수 없었다.
서둘러……
벽에 또 하나를 붙였다. 그리고 하나 더, 그리고 또 하나 더……
거센 불빛이 마치 영혼을 둘로 갈라놓을 듯 끊임없이 그의 눈으로 들어왔다. 하나는 리온의 몸이 계속 움직이도록 지탱해 줬다.
또 다른 하나는 몸을 떠나 난로 앞에 서서 타오르는 맹렬한 불길을 바라보았다.
폭약 하나를 벽에 붙였을 때, 리온은 불빛 속에서 누군가 걸어오는 것을 보았다.
나랑 같이 가자, 리온. 개척지로 가는 거야. 거기에 우리 집이 있어.
마이…… 가지 마, 어디 가려는 거야?
폭약 하나를 벽에 붙였을 때, 마일스는 화염 쪽으로 돌아섰고 작은 그림자 하나가 나타났다.
난 데이비스 타운을 떠날 거야. 여기 있기 싫어. 아빠, 난 아빠를 떠날 거야.
베니……
가지 마…… 나한테는 이제 너밖에 없어…… 칼처럼 날 떠나지 마!
폭약 하나를 벽에 붙였을 때, 화염이 베니를 삼키고 뒤틀린 키 큰 청년의 모습이 되었다.
아빠, 좋은 소식이 있어. 한 용병 회사에서 내가 마음에 든대. 거기서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아…… 며칠 뒤에 떠날 거야.
안 돼…… 못 가, 허락할 수 없어.
넌 전장에서 죽을 거야, 칼!
폭약 하나를 벽에 붙였을 때, 청년은 불꽃으로 변해 사방으로 흩어졌다.
안 돼…… 칼, 돌아와!
마지막 폭약을 벽에 붙였다.
불빛 속에서 한 여인이 나타났다. 리온은 여자의 얼굴은 기억나지 않았지만, 목소리만큼은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다.
엄마……
리온……
난 가야 한단다, 미안해…… 도저히 널 키울 힘이 없구나……
엄마…… 사과하지 마. 난 여기서 아주 잘 지내고 있으니까……
리온, 미안해. 결국 널 혼자 여기 남겨둬서.
아니야, 엄마. 난 여기에 집이 있어…… 여기 사는 모두가 내 가족이야.
잘 있어, 리온.
엄마, 여기 있어줘……
나랑 같이…… 여기서 살아.
리온 씨, 그쪽 상황은 어때요?
폭약을 모두 설치했어…… 점화하면 빠르게 동력로가 폭발할 거야. 에너지 타워가 터지면 아무도 그 비밀통로를 발견하지 못할 거야.
리온 씨는 언제 떠날 거예요? 제가 근처에 있는 용병을 따돌리고 지금 그쪽으로 가고 있어요. 곧 리온 씨를 지원할 수 있을 거예요.
제시카…… 오지 마.
벌써 떠난 거예요?
아니…… 난 가지 않을 거야.
하지만……?
제시카, 나 대신 실비아에게 말 좀 전해줘.
아니요…… 전하지 않을 거예요. 직접 말씀하세요.
실비아는…… 아주 똑똑하고, 젊고, 좋은 아이야. 개척지에서 좋은 놈을 만나면 다시 마음껏 사랑하라고 해.
난 실비아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세상에…… 전에는 실비아한테 왜 그랬을까, 만약 조금만 더 일찍 알았다면 칼이……
칼 씨요……?
아…… 아무것도 아니야. 그동안 칼을 걱정하고 사랑해줘서 정말 고마웠다고 전해줘……
하지만 칼은 이미 떠났어…… 이미 가버렸지……
산 사람은…… 한 번 더 선택해도 돼……
산 사람은…… 죽음에 얽매여서는 안 되니까……
리온 씨, 당신도 한 번 더 선택해야 해요. 살아서 여길 떠나야 해요. 앞으로 삶이 다시 시작될 테니까요.
부탁이니까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마세요! 우드로 씨와 헬레나 씨를 생각하세요. 얼마나 마음이 찢어지겠어요!
그리고 베니도요! 막 입학했는데 나중에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앞날이 창창한 그 아이를…… 다시 보고 싶지 않으세요?
마일스 씨도…… 리온 씨를 기다리고 있잖아요……
……하지만 그녀는 내가 남기를 원해……
누가요……?
♪그녀는 두 팔 벌려 나를 안아주었네♪
♪그때부터 그녀의 두 팔 사이엔 내 집과 꿈으로 가득하다네♪
내 말 잘 들어, 제시카. 난 여길 떠날 수 없어. 왜냐하면…… 그 사람이 비 내리는 봄날에 날 여기에 남겨뒀거든.
뿌리를 내리기 좋은 날이었지. 지금 난…… 뿌리가 너무 깊이 박혀서 아무도 뽑아 갈 수 없어.
리온 씨……
이따가 소리가 엄청 클 테니 귀를 잘 막도록 해. 무서워하지 말고, 슬퍼하지도 말고……
내가 태어난 날은 삶이 시작된 날이 아니라, 여기에 온 날이야.
마찬가지로 내 삶이 끝나는 날은 죽는 날이 아니라, 여길 떠나는 날인 거지.
리온 씨, 제발요……
걱정하지 마, 제시카. 난 죽지 않아. 난 영원히 여기에 있을 거거든……
그녀의 품에서 영원히 살아갈 거야……
안 돼……!
높은 곳에서 폭발음이 들려오며, 거대한 충격파가 제시카를 쓰러뜨렸다.
힘겹게 일어선 제시카는 두 발을 움직여 앞으로 뛰어가 보려고 했지만, 몸이 너무나도 무거워서 움직일 수 없었다.
제시카는 고개를 들어 먼 곳을 바라보았다. 타워의 거대한 균열에서 끊임없이 연기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벽돌 조각이 불꽃과 함께 무거운 망치처럼 사정없이 바닥을 내리쳤고, 주변의 건물도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했다.
안 돼……
멀리서 매서운 바람이 불어와 제시카의 눈앞을 흐릿하게 하고, 눈가를 차갑게 했다.
공중으로 손가락을 뻗으며 제시카는 아련한 가운데 무언가를 잡으려고 했다.
눈을 깜빡이자 시야가 점점 선명해졌고, 제시카는 눈송이를 보았다.
눈이 내렸다.
저건…… 동력로? 서둘러, 프란카, 더 빨리 몰아!
힘 좀 내, 똥차야!
이건…… 성공한 건가?
제시카…… 그쪽 상황은 어때?
리온…… 대답해……
……신호가 전혀 안 터지네.
젠장……
헬레나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려 했다.
지면의 폭발로 안 그래도 약했던 지하층 구조는 그 부담을 이겨낼 수 없었고, 헬레나의 시선 먼 곳까지 벽의 균열이 끊임없이 뻗어나갔다.
마치 이 길은 돌아갈 수 없는 길이라고 헬레나에게 거듭 말해주는 것처럼.
그래서 결국 헬레나는 돌아보지 않고 계속 뛰었다.
어두운 터널로, 알 수 없는 전방으로 뛰어들어갔다.
……정말 늙었군.
겨우 이 정도 폭발도 피하지 못했다니……
저건…… 에너지 타워 쪽이군.
제시카……
우드로 씨……
에너지 타워 쪽 상황은 어때? 헬레나는 지하 통로로 들어갔어?
……
무슨 일이야?
리온 씨가…… 떠나기 싫다면서…… 거기 남겠다고 했어요……
리온 씨가 나오는 걸 못 봤어요……
기다렸는데…… 리온 씨가 안 나왔어요……
……헬레나도 알아?
지금…… 연락이 안 돼요……
너 지금 우는 거야, 제시카?
……제가 울고 있나요? 그런 것 같네요.
하아, 다 끝났으니 넌 괜찮을 거야. 어찌 됐든…… 넌 블랙스틸 사람이고 브린리의 아이니까 널 어떻게 하지는 못할 테지……
……어디로 갈 건가요, 우드로 씨? 제가…… 찾아가도 될까요?
난 처리할 일이 남아서…… 네가 따라오면 좀 불편해.
……우드로 씨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어쩌면, 제시카……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지……
벽에 기댄 우드로는 어지러움을 느꼈고, 어깨의 화상이 욱신거렸다.
우드로는 주머니에서 총알을 꺼냈다. 어두컴컴한 달빛 아래에서는 잘 보이지 않았기에, 우드로는 손으로 어렴풋이 그 위의 무늬를 느꼈다.
(라테라노어) 용서…… 정말 딱 맞아떨어지는군.
마음으로 용서할 수 없는 것은 총알로 용서할 수밖에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