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V-5의혹의 그림자
블랙스틸이 현지 은행과 손잡고 빚을 진 주민들을 연거푸 내쫓자, 제시카는 분노와 함께 무기력함을 느낀다. 우드로도 밤늦은 시간에 '클립' 클리프를 찾아간다.
등장 오퍼레이터: 제시카, 프란카, 리스캄, 제시카 더 리버레이티드, 콜드샷
……이렇게 늦었는데, 밖에 왜 아직도 사람이 있는 거지?
저건…… 제시카 씨?
제시카 씨, 이 시간에 은행엔 어쩐 일이세요?
저…… 하아, 하아…… 당신들에게 볼일이 있어서요!
어, 어쨌든…… 안에 들어와서 얘기하세요.
실비아 씨, 어떻게 된 일이에요? 저녁엔 정문을 열지 말라고 했잖아요, 요 며칠 블랙스틸의 사람들이 바깥에 있다고……
아, 당신이었군요, 제시카 씨.
이렇게 늦은 시간에 무슨 용무인가요?
사…… 사람들을 쫓아내지 마세요!
쫓아낸다고요? 저희가 누구를 쫓아냈다는 거죠?
빚진 주민들이요. 블랙스틸에 쫓아내지 말라고 하세요!
……그건 어느 분의 뜻인가요? 클리프 씨인가요?
제, 제 뜻이에요.
제가 잘못 들은 건 아니죠, 제시카 씨, 농담도 정도가 있어야죠.
농담 아니에요! 빚을 갚아야 한다면 제, 제가 대신 갚을게요. 그러니 겨울이 끝난 후에 떠나게 하면 안 될까요? 지금 개척지에 가라는 건, 그냥 죽으러 가라는 것과 마찬가지라고요!
은행에서 말할 수 있는 건 헛소리나 해대는 용병이 아니라, 확실한 수표예요.
수표라면 있어요! 헛소리가 아니라고요. 저 사람들 대신 갚는다고 하면 갚는 거예요!
죄송합니다만, 은행에선 망상병 환자를 받지 않습니다……
저는 버니 브린리의 딸이에요. 버니 브린리는…… 레이시언 공업의 책임자 겸 대주주고요!
말이 떨어지자, 제시카는 멍해졌다. 블랙스틸에 온 이후로 제시카는 그 어떤 좌절과 어려움에 부딪혀도, 아버지와 가족에게 기대지 않았었다.
그것은 그녀의 일관된 고집이었다. 제시카는 성씨로 인해 자신에게 특별한 혜택이 차려지는 걸 원치 않았다.
하지만, 방금 그녀는 아버지의 성함과 가족의 성씨를 말해버렸다.
버니 브린리?
그렇다면, 당신은 정말 거물이시군요. 제시카 브린리 씨.
빈정거릴 필요 없어요, 매니저님, 말씀해 보세요. 도대체 얼마가 필요하죠?
음…… 저도 당장은 정확한 액수를 모르겠네요. 하지만, 괜찮아요, 실비아 씨가 여기에 있으니깐요. 실비아 씨는 항상 숫자에 민감하거든요.
멍하니 뭐해요, 실비아 씨? 빨리 브린리 씨에게 알려드리세요.
……제시카 씨, 저……
실비아 씨, 이 분은 브린리 가문의 따님이에요. 이 분한테 그건 작은 숫자일 뿐이라고요.
이, 이건 아닌 것 같아요……
빨리 알려 드리세요, 실비아 씨!
지금까지…… 데이비스 타운 모든 사람의 채무는 약…… 2억 7,600만 수표예요. 내년 봄까지 대충 계산하면 갚아야 할 총금액이……
얼마에요?
2,845만 수표예요.
이천…… 팔백만이요?
겨우 이 정도 돈으로 다들 섹터에서 3개월 동안 편안하게 지낼 수 있다면, 수지가 맞겠죠, 브린리 씨?
왜 또 말이 없으시죠?
제, 제 수중에 아직 돈이 그렇게 많지 않지만, 있는 만큼 다 드릴게요……
2,845만…… 가문 신탁기금이 있는 아가씨들도 이렇게 많은 돈은 한꺼번에 지불할 순 없나 보네요?
새로운 배움을 얻었네요.
저…… 저는…… 아니……
제시카 씨……
실비아 씨, 저, 저는……
당신은…… 데이비스 타운 사람도 아닌데, 모두를 위해 이 정도까지 하다니…… 정말 그럴 필요 없어요.
제시카 씨, 제 말을 들으세요. 일단 돌아가세요…… 당신이 돈을 써서 이번 한 번은 도울 수 있다고 해도, 다음번, 다다음 번은…… 또 어떡하죠?
제시카는 입술을 바르르 떨며 한마디도 못 했다.
그녀는 실비아가 자신을 놀리는 게 아니라, 사실을 말하는 것뿐이란 걸 알고 있다.
그녀의 계좌에 찍혀 있는 숫자들은 그녀를 평생 근심 걱정 없이 살게 할 수는 있지만, 섹터의 사람들에게는 한 달 동안의 안정도 보장할 수 없었다.
그녀는 일을 처리할 땐 장단점을 따져보고, 자기 능력에 맞게 해야 한다던 아버지의 의미심장한 말을 떠올렸다.
그걸 터득하지 못했기에, 그녀는 늘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
클리프 씨, 계십니까?
그래, 무슨 일이야?
클리프 씨, 그분이 왔습니다. 만나보시겠습니까?
……
클리프 씨?
응, 들었어, 데리고 들어와.
제시카? 네가 어떻게 여기에? 블랙스틸의 본함에 돌아간 거 아니었어?
……헬레나 씨, 우드로 씨는…… 돌아오셨나요?
아니, 옛 친구가 왔다면서 만나봐야 한다고 갔는데, 아직 안 돌아왔어……
너 이상해 보이는데…… 왜 그래? 우디한테…… 무슨 일 있어?
아니요…… 우드로 씨는 블랙스틸의 본함에 우리 보스를 만나러 가셨을 거예요…… 두 분은 옛 친구 사이라, 보스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지도 모르거든요……
블랙스틸의 보스? 우디한테 그런 친구가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는데.
우드로 씨한테 사진이 한 장 있잖아요, 그 두 분과 한 산크타가 있는……
그 사진? 본 적 있어. 그런데 계속 서랍장 안에 있었을 텐데 어떻게 본 거야?
그……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중요한 건 그 세 분이 아주 즐겁게 웃고 있었다는 것 아니겠어요?
……우디가 사진 속의 사람을 만나러 간 게 확실해?
……헬레나 씨, 뭔가 알고 계시는 거죠, 그렇죠?
제시카, 우디가 독립전쟁에서 겪었던 일인데, 나도 아는 게 많진 않아. 그 사진 속에 있는 사람에 대해서도 간단하게 몇 마디만 들은 게 다야……
그 당시, 너희 보스의 선택 때문에 우디가 다른 한 사람과 함께 적군에게 포로로 잡혀가 콜루스 캠프에 갇혔대.
……콜루스 캠프가…… 포로수용소였나요?
몰랐어? 하긴, 매우 오래된 일이기도 하고, 관공서에서도 다시 언급하려고 하지 않을 테니, 너희 젊은이들은 모르겠지.
콜루스 캠프는 컬럼비아 독립전쟁 때 빅토리아 군에 의해 지어진 포로수용소야, 그 안에서…… 끔찍한 포로 학대 사건이 있었어.
포로 학대요……?!
응, 열 명 들어가면, 한 명밖에 못 나왔지.
제시카, 누가 자신을 그런 곳에 처넣은 사람을 옛 친구라고 하겠어……
제시카는 갈색 증명서가 생각났다.
그녀는 문뜩 그것이 갈색 같은 게 아니라, 피가 말라붙은 색이라는 걸 깨달았다.
안에 계십니까?
응, 무슨 일이야?
그분이 왔습니다. 만나보시겠습니까?
응, 데리고 들어와.
……앉아도 될까?
당연하지.
여기에 앉아, 우디……
……미안하군, 최근 2년 동안 바닥에 앉는 게 습관이 되어서. 지금은 의자에 앉아도…… 얻어맞지 않는다는 걸 깜빡했어.
……
1019년 가을, 컬럼비아, 콜루스 캠프
……할 말이 있어서 나를 부른 건가?
다시 만나면, 너야말로 물어볼 게 많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 내가 물어보고 싶은 건 딱 하나뿐이야.
3년 전에, 왜 지원하러 오지 않았지?
네가 떠난 후 상황이 변했거든. 오른쪽 적군의 포위선이 갑자기 좁혀져서, 전투력 보존을 위해 나는 기존의 구출 계획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어.
……해명은 고작 그 몇 마디뿐인가?
네가 구출 계획을 세웠고, 나한테 적군의 주의를 끌게 했지. 하지만 결국 너는 그 녀석을 구하러 가지 않았어.
상황이 급박했고, 나는 부하 병사들을 책임져야만 했어.
남 얘기하는 듯한 표정 짓지 마!
왜 내 표정을 그렇게 신경 쓰는 거지, 우디? 여기에 들어오고 나서, 내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표정을 읽고 있어.
언제부터…… 산크타 사이에도 눈치를 살펴야 했지? 어떻게 된 거냐고, 우디?
……그 녀석이 죽고 나서, 습관이 됐어. 어쨌든 이곳엔 나와 그 녀석 외에 다른 산크타가 없었으니까.
그 녀석은 언제 죽었지? 여기 서류에는 '사망'이라고 도장만 찍혀 있을 뿐, 다른 건 아무것도 기록되어 있지 않아.
자세한 건 나도 몰라…… 달력도, 시계도 없었으니까…… 대략 작년 초봄쯤인가…… 아니, 여름이었을 거야. 그날 철조망 너머에서 팬지 한 그루를 봤거든.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처음엔…… 열이 펄펄 났어…… 계속 헛소리를 하면서, 눈을 크게 뜨고 내 소매를 꼭 잡아당기더라고. 나에게 무슨 할 말이 있는 것 같더군.
그래서, 녀석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 보려고 몸을 가까이 가져다 댔어.
뭐라고 했나……
듣지 못했어…… 그 녀석은 잡고 있던 내 소매를 놓았어. 눈은 여전히 뜨고 있었지만, 시커먼…… 동공이 확장돼서…… 마치 주변의 모든 것을 빨아들일 것만 같았지.
우디……
왜? 왜…… 안 왔던 거야?
남자는 고개를 돌려 다시 용병의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그 눈빛은 공허했다.
용병의 동공 속 검은빛이 계속 퍼지고, 흐르며, 회전하여 마치 주변의 모든 것을 삼켜버릴 것만 같았다.
상대방의 무뚝뚝한 시선 속에서, 용병은 어디선가 뻗어 나온 갈고리가 자기 발목을 뚫고 지나가 자신을 그 검은 소용돌이 속으로 힘껏 끌고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
지금은 널 뭐라고 불러야 하지? 개명한 것 같던데?
뭐든 상관없어…… 좀 더 일찍 나를 찾아올 줄 알았는데, 우디.
어젯밤 일 때문에 나는 해야 할 일도 많았고, 도와야 할 친구들도 많았거든.
만약 도움이 필요하면, 돈이든 사람이든 뭐든 말해.
고맙군, 클리프 씨. 하지만, 필요 없어. 도와주는 것도 다 때가 있지. 하지만 네 도움은…… 항상 늦거든.
그렇군. 무슨 일이든 타이밍이 적절한 게 좋지.
넌 뭐 하러 왔어?
옛 친구를 만났는데, 안부부터 물을 수는 없는 건가?
……단순히 '옛 친구'라는 한 마디로 우리 관계를 요약할 수는 없을 것 같은데. 왜 우리가 다시 만났을 때 옛 친구처럼 지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거야?
그럼, 우디, 내가 너랑 어떻게 지내길 바라는 거야?
다시는 볼일 없었으면 좋겠군.
우디, 우린 이미 늙었어. 말을 꼭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잖아.
지난 십여 년 동안, 많은 친구들이 차례로 건강에 문제가 생겼고, 장례식도 끊이지 않았어. 건재한 녀석들도 가끔 한 번 만나기도 쉽지 않았지.
넌 이렇게 멀리 사는 데다가, 신문으로 네 부고를 접할 일도 없을 테니, 직접 보러 올 수밖에 없었어.
올 필요 없었어, 내가 죽어도 장례식에 네 자리는 없을 테니까.
그렇다면, 정말 유감이군, 우디. 오래전에 서로 상대방의 장례식에서 추도문을 읽어 주기로 약속했잖아.
그렇게나 그게 좋다면, 장례식에서 네가 하는 말을 듣고 싶어하는 놈들은 많을 거야. 하지만 난…… 역시 됐어.
우디, 나는 장례식을 안 좋아해. 내가 장례식에 참가하는 건 단지 관 안에 누워 있는 사람이 내 친구이기 때문이야.
장례식에 참가하면 너는 어디에 앉지? 친지들 가운데에?
그런 경우는 거의 없어. 친족이 요구하지 않는 이상, 멀리서 장례식이 끝날 때까지 지켜보기만 할 뿐이지.
왜? 그들의 슬픔을 감당하지 못할까 봐 두려운 건가?
다른 종족의 장례식에서 슬픔은 비교적 개인적인 감정이라 할 수 있지. 우리는 각자 마주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
가식적인 친절은 걷어치우고 단도직입적으로 묻지. 난 그 녀석을 포로수용소 뒤에 있는 산비탈에 묻었어. 그 녀석을 보러 간 적은 있나?
……
아쉽게도 못 가봤어, 시간이 없어서.
……역시 넌 전혀 변하지 않았어.
그런데, 우디가 왜 그 사람을 찾아갔을까……?
제 탓이에요…… 제가 우드로 씨한테 가달라고 부탁했거든요……
제시카, 네가?!
저는…… 우드로 씨가 보스와 친구 사이인 줄 알았어요. 과거의 정을 봐서, 보스가 어쩌면 섹터 사람들의…… 사정을 봐줄 수……
너 왜 그렇게 순진하니? 제시카…… 우디, 우디는……
전……
……
뭐, 됐어, 제시카……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나도 너를 속일 필요가 없겠네.
나는 섹터를 떠나 개척지로 갈 거야.
헬레나 씨까지……
그래, 단골손님들이 하나둘 쫓겨나고, 남은 건 우리 늙은이들뿐이야. 섹터에서 레스토랑을 지켜낸다고 해서 무슨 의미가 있겠어?
하물며, 어젯밤에 일어난 싸움 때문에 여기저기 바람이 새는 이 벽을 보면, 정말이지 더 이상 수리할 마음도, 힘도 없어.
그동안 이 레스토랑을 위해 노력한 것만으로도 충분해…… 충분하다고.
죄, 죄송해요.
제시카, 넌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왜 자꾸 죄송하다고 하는 거야?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죄송해요, 진심으로……
이 일로 너 자신을 탓해선 안 돼. 섹터가 이 지경에 이른 데 대해, 가장 자책하지 말아야 할 사람은 바로 외부인인 너야. 친구들 곁으로 돌아가……
너에게도 너만의 삶이 있잖아. 우리를 위해 이렇게 마음 쓸 필요 없어.
네가 그때 내게 준 수표는…… 그냥 가져가.
하지만…… 그건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에요……
가져가.
……헬레나 씨, 그럼 당신들은 언제 떠날 계획인가요?
그렇게 급하진 않아. 떠나기 전에 제대로 작별 인사도 해야 할 테고.
레스토랑 문이 닫히고, 문 앞에 우두커니 선 제시카의 손바닥에는 구겨진 수표가 쥐어져 있었다.
그녀는 갑자기 길가에 쌓인 눈더미를 세게 걷어찼다. 눈이 날려 머리 위에 내려앉았고, 눈에 젖은 머리카락이 이마에 닿아 뜨거워진 그녀의 이마 온도를 조금 낮춰주었다……
그녀는 가방에서 녹음기를 꺼내 테이프를 되감기 시작하더니, 이미 수없이 들었던 녹음을 처음부터 재생했다.
“……철없는 아가씨일 뿐인 네가 뭘 할 수 있다는 거야?”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검은색 거함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누구 듣고 있는 사람 있어?
우리 좀 구해줘…… 사, 살카즈들이 갑자기 섹터에 나타났어……
많은 사람이 죽었고, 저와 나머지 사람들은 시청 지하실에 숨어 있어…… 치직…… 치직……
런디니움 주둔군과 연락을 시도해 보았지만……
응답하는 사람은 없어…… 아무도 우리에게 응답하지 않아……
누구라도 좋으니까, 이 메시지를 받는다면 제발, 우리를 도와줘……
당신이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니까……
치직…… 치직……
난 왜 용병이 되었을까?
난 다른 사람의 생명도, 다른 사람의 삶도 구할 수 없어.
제시카, 하루 종일 어디에 갔었어? 연락도 안 되고.
저…… 아니에요, 그냥 여기저기 돌아다녔어요.
대체 무슨 일이야?
팀장님, 저는…… 진짜…… 이번 임무의 의미가 뭔지 전혀 모르겠어요.
제시카…… 너 뭘 본 거야?
……동료들이 빚진 주민들을 집에서 끌어내서, 개척지로 가는 차량 행렬로 보내는 모습을 봤어요.
뭐라고?
……
이봐, 우등생 씨, 통신기만 쳐다보고 있으면 안 되지!
제시카가 한 말 들었어?!
들었어…… 그리고 난 그것보다 더 황당한 소식을 들었어.
상부의 명령이야. 앞으로 은행의 경비 업무는 우리가 맡게 됐어. 밖에서 24시간 내내 지켜야 하고, 구체적인 교대 시간은 우리가 알아서 결정하라고 하네.
뭐라고…… 은행의 경비 노릇을 해야 한다고?!
응, 맞아.
……
하……
……진짜…… 빌어먹을…… 웃기지 마.
제시카, 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