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W-9원한과 갈등
파르비스의 광기는 사일런스의 예상을 뛰어넘는다. 다행히 이프리트의 격려 덕분에 사일런스는 다시 정신을 차린다. 수천 년의 역사가 아무것도 모르는 당신을 시험하려 든다. 당신은 반드시 받아들여야 한다.
등장 오퍼레이터: 사일런스, 켈시, 이프리트, 아미야, 블레이즈, 아스카론, 로고스, 사일런스 더 패러디그매틱
선생님……
난…… 요즘 항상 중추신경 시스템의 기본 구조를 암기한다네. 한 번 또 한 번, 처음부터 끝까지.
……그건 생물학 입문 과정의 과제 아닌가요?
맞아, 기본 중의 기본이지. 내가 질문했을 때 1초라도 머뭇거리면 난 바로 그 학생에게 C를 줬겠지.
하지만…… 최근에는 완벽하게 외워진 적이 한 번도 없었네. 단 한 번도.
끊임없이 막히고 잊어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길 반복했지.
매일 아침 5시부터 7시까지, 난 라인 본부 맞은편에 있는 식당에 앉아 내가 쓸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써 봤네.
하지만 내 신경은 점점 퇴행하고 있어. 평생 연구해 온 것이 하필 지금 날 버리고 있지.
앞으로 5년, 어쩌면 3년만 지나도 난 그저 햇볕이나 쬐는 치매 노인이 돼버릴지도 모르네. 58년 동안의 내 모든 자랑과 만족감을 깨끗이 잊어버린 채 말이야.
사일런스, 난 이런 식으로 은퇴할 수 없네.
……선생님……
내 끝은 이미 정해졌어.
이제 내 실험실에서 나가주게. 아무것도 건드리지 말고!
……그럴 수 없어요.
'초인'이든 '강력한 영혼'이든…… 어쩌면 정말 그런 사람이 존재할지도 몰라요. 그런 사람들은 시대를 초월하고 한계를 초월하고 이 대지를 초월하겠지만, 그건 절대 선생님이 아니에요.
선생님이 한 그 말씀은, 자신이 비웃던 그 미천하고 나약한 '평범한 사람'들이 하는 말이나 마찬가지예요.
그저 '사람'의 소망일 뿐이죠.
……시대를 초월하고 한계를 초월하고 이 대지를 초월한다고?
난……
미노스나 쉐라그의 이야기에서 나오는 신은 만물을 하사하고 지배하며 결정하는 자예요.
하지만 과학은 결코 신이 아니에요. 과학은 사람들이 통행하는 길일 뿐이에요. 늘 검사하고 늘 고쳐야 하며 늘 규격에 맞춰야 하죠.
과학이 우리에게 줘야 하는 건 정신 나간 사람이 만들어 낸 기이한 미래가 아닌, '사람들의 평범한 기대'라고요.
안 돼…… 안 돼. 거기서 떨어져, 사일런스!
선생님, 다 끝났어요.
선생님에게 필요한 건 충분한 휴식이에요. 나중에 제가 병원에 모시고 갈게요.
……전달물질의 중추는 이미 파괴되었어요.
선생님의 실험이든 크리스틴의 계획이든 전달물질이 없으면……
……하하.
이 대지를 초월한다라……
그래, 어쩌면…… 나조차도 신경 쓰지 않았던 훌륭한 성과가 또 하나 있었나 보군.
시간을 많이 쓴 것도 아니고, 그저 물 흐르듯이…… 심지어 내 프로젝트도 아니었어.
하지만 뭐, 상관없겠지.
그럼, 그렇고말고. 내가 왜 그걸 생각 못했을까?
우리는 모두 그녀에게 이끌려서…… 애초부터 우리는 함께 길에 올랐던 건데 말이야.
노인은 멍하니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화면에서는 에너지 다발로 인해 공중에 떠 있는 커다란 고리가 빛이 났고, 그 중심에서는 더 찬란한 은빛이 뿜어져 나왔다.
전달물질의 중추가 파괴되어서인지, 아니면 에너지 다발의 기세가 너무 맹렬해서인지 초점 발생기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으윽……
왜 아직도 전달물질의 반응이 멈추지 않죠?
사일런스, 하나만 묻겠네. 선도자가 될 수 없다 하여 추종자가 되는 건 과연 수치스러운 일인가?
내 나약함과 망설임을 인정한다면, 진정으로 강한 영혼을 따르는 것도 하나의 선택이겠지, 아닌가?
이건 내가 보험으로 남겨 둔 계획이었지만, 지금은……
선생님…… 뭘 하려는……
그동안 내가 너무 어리석었네. 난 반드시……
난 아직 쫓아갈 수 있어. 그녀도 반드시 빛나야 해.
내 모든 노력과 탐구엔…… 반드시 의미가 있어야 하네.
적어도 이러는 게, 무능한 치매 노인이 되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게야.
에너지 밀도는 충분하군, 그렇다면……
선생님! 파르비스 선생님!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사일런스는 몸속 전달물질의 영향이 점점 사라지고 있음을 느꼈다. 그와 동시에 눈앞의 연로한 카프리니의 의식도 빠르게 흩어져갔다.
초월자는 여정에 올랐어. 그 긴 여정에…… 겁쟁이 한 명이 동행한다고…… 별로 신경 쓰지는 않겠지……
적어도 난, 그 일원이 되는 게야……
사일런스, 보게나……
선생님의 의식을 전달물질과 융합하시는 거예요? 파괴된 중추를 보완하기 위해서? 안 돼요!
젠장, 이 데이터들의…… 위상이 완전히 흐트러지면 어떤 결과가 생기지?
이 반응을 어떻게 해야 멈출 수 있는 거야! 선생님! 파르비스 선생님!
이런 시도는 아무런 의미도 없어요! 선생님의 의식은 전달물질에서 보존될 수 없다고요!
이건 그저, 선생님의 신경 시스템을 완전히 파괴할 뿐이에요……
가벼운 탄식, 또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파르비스의 몸은 이미 빈껍데기가 되었고, 그 안에는 어떤 의지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의 집착과 비겁함은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선생님?
……
모니터 화면에서 미세하게 떨리던 초점 발생기는 차츰 안정되었다.
그는 자신의 실험을 완성했다.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안 돼……
어떻게……
사일런스, 사일런스……
사일런스, 여기 있어?
난……
사일런스, 진짜 여기 있구나!
내가 갈게, 뒤로 조금 물러나!
드디어 찾았다, 사일런스. 걱정돼 죽을 뻔했잖아!
네가 병사들의 차 키를 빼앗아 서둘러 차를 몰고 가길래, 나는 또 엄청 위험한 일을 하는 줄 알았지 뭐야!
그런데 여기 너무 무섭다. 위에는 병사들도 있고, 아까 에너지 다발이 터질 땐 깜짝 놀랐어!
이프리트, 네가 왜……
후훗, 그야 물론 널 구하기 위해서지! 그거 알아, 사일런스? 나 이제 운전할 줄 알아! 내 완벽한 운전 기술을 못 보여줘서 너무 아쉽네!
이제 운전할 줄도 아니까, 정예 오퍼레이터가 될 수 있겠지? 난……
……왜 그래, 사일런스?
파르비스가 왜 여기 있어? 왜…… 안 움직이는 거야?
선생님은…… 나도 몰라.
선생님은 끝내 목적을 이뤘어. 결국 난 아무것도 하지 못 했고.
난……
내가 좀 더 단호했다면, 내가 좀 더 확고했다면……
이프리트, 나는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막아야 할까? 너무나도 눈부시고 강력한 영혼을 가진 사람들을……
설마…… 설마 나도…… 사리아와 크리스틴에게 닿을 수 없는 게 아닐까?
무슨 소리야, 사일런스!
이프리트는 흥분하며 사일런스의 멱살을 잡았다.
이건 그녀가 아는 사일런스가 아니다.
넌 내가 이 땅에서 본 가장 강한 사람이야!
로즈몬티스는 확실히 강해. 블레이즈도 대단하고. 로도스 아일랜드의 오퍼레이터들은 다들 본인만의 특기가 있어.
하지만 너, 사일런스, 넌 그 모든 사람 중에서 가장 대단해! 왜냐하면…… 왜냐하면 날 위해 많은 일을 했으니까. 그 일들은, 솔직히 말하면…… 난 상상도 할 수 없어.
하지만 너는 모두 견뎌왔어. 너랑 사리아가 함께 모두 견뎌왔잖아!
사일런스, 네가 하고 싶은 일이 엄청 대단하고 복잡한 거 알아.
네가 막으려는 사람도 아마 엄청 대단하고 까다롭겠지.
그럼 더 많은 사람한테 도와달라고 해! 저쪽은 조력자가 그렇게 많은데, 너는 왜 혼자 모두를 상대하려고 하는데!
분명…… 나도 그렇고, 사리아도 그렇고, 우리 모두 네 곁에 있잖아!
난……
사일런스는 눈앞의 아이를 바라보았다.
3년 전과 비교했을 때, 아이는 안색도 좋아졌고 많이 건강해져서 전반적으로 활기가 넘쳤다.
지금 이 아이의 건강은 본인이 여태 노력한 결과다.
그런데…… 이 아이가 언제 이렇게 컸을까?
……
그래.
반드시 잘 준비해서 꼭 해낼 거야.
너희가 있으니까. 너희가 함께하니까.
……에너지 우물의 출력 단계가 거의 끝났어. 이 건물도 안전하지 않아.
가자, 이프리트. 여기서 떠나자.
……우리가 데리러 가야 하는 사람이 있잖아.
장난감처럼 초라할지라도, 하늘을 뚫어버린 2차 문명의 창날은 이 어린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하기에 충분하네.
……
{@nickname} 박사, 현재의 자신을 자네가 어떻게 받아들이든, 나한테서 진실을 얻어야 하네.
난 내 사명과 끝없는 세월 동안 돌봐왔던…… 이 생명들을 포기하기로 했네.
저들은 자네의 동포야. 따라서 자넨 알 권리가 있지, 그것뿐일세.
- 뭐라고?
- ……
- 내가……?
……참으로 긴 시간이었지.
자네 기억의 깊은 곳엔 예전 문명의 그림자가 아직 남아 있나? {@nickname} 박사, 기억이 떠오른 순간은 있나?
- ——
……박사!
아무런 기억도 없는 건 아닌가 보군. 됐어, 과거의 위업을 얘기해 봐야 의미가 없으니, 남은 기억으로 마음껏 상상하게.
하지만 자네가 뭘 기억하든 우리의 마지막 생존자는 자네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적다네.
어떤 커다란 절망으로 인해 '보존자 프로젝트'가 탄생했네. 특수한 생명유지 장치, 튼튼한 지하 요새. 언젠가 재앙이 물러가면 이들은 새로운 씨앗이 될 것이었지.
하지만 파멸은 예상보다 일찍 찾아왔고 그 기세는 거침없었어. 사람들이 다양한 대비책을 생각해 뒀음에도 말이야……
그중 대부분은 자네 곁에 있는 저 하인조차 이해할 수 없거늘, 백지상태인 자넨 더 말할 필요도 없겠지.
절망 속에서 우리는 충분한 준비를 하지 못했네. 순수한 고급 인공지능은 위험만 키울 뿐…… 그래서 한 사람이 희생하기로 했지.
그 자는 자발적으로 영원히 전자구름의 의식이라는 감옥에 갇혀, 지하 깊은 곳에 있는 견고한 관 속에 머물기로 했네.
- 그 말은……
- 결국……
- 지금 이 모든 석관에 깨어나지 않은 사람이……
- ……나라는 건가?
그래.
하지만 이들은 다시 깨어나지 않아.
……이미 깨어날 수도 없지.
신분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지만, 당신은 몸 어딘가가 세차게 옥죄이는 느낌이 들었다.
통증은 심장을 통해 손바닥으로 전해졌고, 당신은 순간 이런 감정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몰랐다. 로도스 아일랜드에서 지내면서 당신은 늘 가장 근본이 되는 고민을 잊고 있었다.
'동포'.
……박사.
……
켈시는 다시 말을 멈췄다.
당신은 켈시가 어떻게든 위로해 주길 바랐다. 예전처럼 모르는 것이 없는 그녀가 해결 방법을 알려 주고, 늘 품고 있던 당신의 의문에 대해 답해주길 바랐다.
하지만 켈시의 눈에서 보이는 것은 의혹과 슬픔뿐이었다.
슬픔은 켈시에게서 좀처럼 보기 드문 감정이다. 특히 당신으로 인한 슬픔은 더욱.
……크리스틴을 막기 위해 온 거라면 여길 떠나게.
우리를 막을 수 있는 건 없네. 크리스틴의 죽음이 도박을 의미한다고 해도. 난 이미 결심을 했으니.
기억을 잃은 {@nickname} 박사와 여태까지 연명한 AMa-10, 자네들이 대답할 마음이 없다면 나도 더 이상 할 말이 없네.
- ……안 돼!
- ……
“안 된다”라?
그럼 자넨 어떻게 하고 싶은 건가? 기억과 진실을 되찾으려는 건가, 아니면 기어코 크리스틴을 막으려는 건가?
자넨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자네가 기억을 잃은 건 그리 간단한 게 아니니까. 자넨 스스로 신념과 새로운 꿈을 가졌다고 착각한 채, 무감각하게 떠밀려 가고 있을 뿐이네.
아무것도 모르는 희망은 절망의 전조일 뿐이라는 건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을 터. 왜 힘들게 얻은 두 번째 인생을 즐기지 않고, 기어코 진실에 다가가려고 고집부리는 겐가?
아닙니다.
우리는 재앙이 오기 전에 답을 얻어야 합니다. 가능하다면 전 당신의 도움을 받고 싶습니다.
지금 당신이 하는 일은, 사태가 통제를 벗어나는 걸 가속할 뿐입니다. 이 땅은 아직 한 마음으로 단결할 수 없어요.
……AMa-10 켈시.
난 오랜 시간 이 고통을 혼자서 감당해 왔거늘, 자넨 내 고통스러운 결심을 비난하고 있네.
당신은 정말로 이 땅에 대해 이해하고 있습니까?
바다의 위협은 날로 더해지고 강력한 에기르 문명은 아직도 거만한 본성을 고집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아직 여력이 있지만, 여전히 바다를 얕보고 있죠.
한편 데몬과 사미의 깊은 곳에 있는 미지의 구멍은 확장되는 경향은 없지만, 여전히 간과할 수 없습니다. 마치 얼음 위에 생긴 균열처럼 언제든지 붕괴할 위험이 있죠.
하지만 이것들은 문명의 땅 밖에 있기에, 미래를 짓밟는 직접적인 원인은 아닙니다.
갈등과 편견, 전쟁과 배척. 사람들은 단결의 중요성을 깨닫기에는 아직 멀었고, 근본적으로 차이와 과거의 원한을 버릴 수 없기에 평화와 미래를 논할 수 없죠.
재앙이 들이닥쳐도 우르수스의 군수 공장은 여전히 돌아가고 있었으며, 카시미어의 농민은 여전히 무거운 처벌과 세금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단결은 영원한 난제입니다. 아직도 누군가는 역사 속 전쟁을 떠들어대며 고난과 억울한 죽음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심지어 이 말이 들리지도 않죠.
너무 이릅니다…… 그들은 아직 너무 연약합니다. 정신을 차린 소수의 사람이 있다고 나라 전체를 대표할 수 없습니다.
컬럼비아는 곧 크리스틴의 손에서 그들이 원하는 이익을 빼앗고 자신의 욕망을 확대해, 볼리바르와 사미, 사르곤을 향해 위선적인 무기를 내밀 겁니다.
크리스틴의 행동은 인류 미래를 탐구하는 위대한 행위와는 거리가 멉니다. 자칫 잘못하면 그저 다음 정복의 뿔피리 소리가 될 뿐이죠.
……이게 바로 자네, AMa-10, 켈시가 현재 테라를 보는 관점인가?
좋아…… 알겠네. 이 땅이 잉태한 문명과 사람에 비해 자네 의견은 참고할 가치가 있지.
다들 물러설 수 없는 이유가 있다면, 우리는 고대의 방식으로 서로를 시험해 보도록 하세나.
단순히 말로 설득하는 것보다, 난 더 본질적인 행위로 자네들의 소질을 검증해서 계획을 수정할 것이네.
……물론, 자네들에게 그럴 자격이 있을 때의 얘기일세.
- 받아들이지.
- ……
- 난 상관없어.
(미지의 언어) '변론'.
미리 말하자면 자네들이 말한 사실은 내 인지 범위를 벗어나지 않았네. 컬럼비아의 데이터베이스를 통해 난 진작부터 역사를 알고 있었으니.
하지만 그 전에, 자네 두 사람이 함께 큰일을 상의할 자격과 능력이 있는지 봐야겠네. 다시 말해, 테라 문명이 자네 같은 사람의 손에서 미래를 논할 자격이 있는지를 판단하는 것이네.
크리스틴은 예전에 이곳에서 나와 언어를 초월하는 시간을 가졌었지. 잘 버티게나. 그럼 시작하겠네.
- 전송된 건가?!
- ……
- 여기는……
......Dr.{@nickname}.
- ......
- ......
- ......
정말 내가 기억나지 않나 보네.
- ……난……
- ……
- 프리…… 스티스?
- 아니…… 넌 아니야……
- ……
- 하지만 난 방금까지만 해도……
맞아.
이건 사고가 공명해서 일어나는 현상이야. 원래 이 기술은 석관에 있는 휴면자의 생명 징후를 확인하거나 그 존엄을 보존하는 데 쓰이지.
예를 들면…… 내가 당신의 꿈에 들어가서 꿈을 만드는 것처럼. 당신에겐 내가 그 꿈이 되는 거야.
- 그러니까 넌 그 기계가 만들어낸 허상이라는 건가?
- 그러니까 넌 내 꿈이라는 건가……?
가장 근접한 설명이지만, 본질적으로는 차이가 있어.
마치 철학자와 변론자들이 옛 궁전에서 그리하던 것처럼, 생각이 서로 부딪히고 언어가 서로 맞붙을 때, 그들의 생각은 비로소 하나로 뒤섞여 서로를 구분하지 않게 되는 거지.
당신은 지금 '박사'의 시점에서 '나'와 대화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내가 '박사'의 역할을 하는 것이고 당신은 바로 '내'가 되는 거야.
……하지만 네 의식은 이어지고 있어. 이건 눈앞에 보이는 허상이나 자신의 형상이 변한 것과는 달라.
오직 '꿈결 같은 환상'이라는 말로만 그 느낌을 설명할 수 있지.
너는 자칭 '보존자'라는 차가운 기계를 볼 수도, 무력하고 망연한 널 볼 수도 없어. 우리의 주관적인 시점이 분명하지 않게 되는 건 오직 꿈에서만 일어나는 일이야.
자, 이 사고의 공명이라는 기술에, '변론'이라는 흥미로운 이름이 붙었단 걸 잊지 마. 아, 이 단어가 흥미롭다 느끼는 건 그저 네 잠재의식 속의 생각일 뿐이지만.
저 문을 열어. 우리가 반드시 문제를 해결해야 해.
- 문제?
- ……
- 꿈속에서도 어려운 문제를 내려는 거야?
아니, 문제를 내는 건 내가 아니야. 물론, 이건 '보존자'의 미스터리 퀴즈쇼도 아니고, 켈시의 매력적인 은유도 아니지.
출제자는 {@nickname} 박사, 당신이야.
- 무슨 뜻이야? 나라고? 잠깐만!
- ……(침묵하며 문을 열고 나간다)
- 지금까지 난 적당히 살아왔어. 자신을 괴롭히진 않았는데.
……너 자신에 대한 얘기를 하지.
기억을 잃은 후, 넌 로도스 아일랜드의 생활에 금방 익숙해졌다. 켈시가 숨기는 게 있다는 건 알았지만, 몇 년간 마주한 고난에 정신이 없었지……
심지어 진실에 대한 의욕마저 잃게 했어. 어쩌면 진실을 향한 너의 욕망은 바벨 시기에 머물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너는 언제부터 '이래도 좋다'라고 생각하기 시작했지? 기억을 되찾는 일에 대해 진심으로 집착하고 있기는 한 건가?
- ......
신뢰가 쌓이면서 넌 차츰 진실의 일부를 깨닫게 됐고, 심지어 너 자신을 의심하기도 했다. 하지만 너희는 지금까지 함께 난관을 극복해왔지.
하지만, 그전에는 어땠지? 네가 체르노보그에서 아미야의 손을 잡기 전에는, 바벨보다 훨씬 전에는?
너는 누구지? 너는 무엇이지? 어디로 가려는 것이지?
박사님은 대체 누구죠?
- 나…… 나는 {@nickname} 박사야……
- ……
- 나도…… 모르겠어.
박사님, 드릴 말씀이 있어요.
제가 과거에 믿었던 박사님과 체르노보그에서 깨어난 뒤 줄곧 우리와 함께 싸워온 박사님은 같은 사람이에요.
……전 그렇게 믿어요. 줄곧 그렇게 믿어 왔어요.
하지만 정말일까요? 켈시 선생님…… 그리고 테레시아 씨…… 두 사람의 눈에 비친 바벨의 지휘관과, 로도스 아일랜드의 박사님인 당신은 정말 같은 사람일까요?
모르겠어요…… 전 모르겠어요. 저는 다정하고 절 구해준 박사님만 기억나요……
켈시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이 정말 진실이라면……
아미야.
앗, 켈시 선생님!
박사는 지쳤으니 쉬게 둬라. 아직 받아들여야 할 일이 많다.
그러니까 내일 물어봐. 로도스 아일랜드의 미래는 아직 많이 남았으니까, 서두를 필요 없어.
네…… 죄송해요, 박사님. 갑자기 이렇게 물어봐서 당황하셨죠.
- 아니야.
- ……
- 사실 나도 알고 싶어……
쓸데없는 생각 그만해. 런디니움에 도착하기 전까지 시간이 별로 없다.
- 런디니움?
- 하지만 여기는……
그리고 정예 오퍼레이터 회의가 남았다. 너도 옆에서 함께 듣길 바란다.
빨리 따라와.
어째서지?
체르노보그는 이미 감염자와 관련된 이례적인 상태가 됐다.
지금의 로도스 아일랜드는 거기에 휘말리는 위험을 감당할 수 없어.
……박사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힘이 될 거야.
너희가 말하는 이 사람이, 정말 로도스 아일랜드에서 수십 명, 혹은 더 많은 목숨과 바꿀 가치가 있다는 거야?
그렇다면 동의할게. 하지만 단 한 명이라도 의문을 제기하면 난 바로 반대야.
......
- ......
- 뭐?!
꼼짝 마라! 로도스 아일랜드의 지휘관!
하! 이제…… 이제 그 흰 털의 필라인도 어쩔 수 없겠지! 그놈이 대위님과…… 패트리어트를 죽인다 해도 널 지켜줄 수는 없다!
넌 우리가 어떻게 사는지 생각해 본 적 있나? 우리의 시선으로 이 땅을 바라본 적이나 있냐고?!
당연히 없겠지! 넌 우리 사이에 어떤 우정이 있고, 어떻게 부모님과 작별했으며, 어떻게 친구의 유골을 얼굴에 바르고 왔는지조차 모른다고!
리유니온을 죽이고 사람을 죽이는 게, 너에게는 그저 임무를 완성하는 것처럼 당연하겠지. 네가 정말 뭐라도 되는 줄 알아?
네가 정말 우리의 목숨과 죽음이 뭘 의미하는지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나?!
- 생각…… 해봤어.
- ……
- 난…… 아직……
박사님! 조심하세요!
- 잠깐! 아미야!
- 기다려!
……네가 항상 이 땅의 주인공인 건 아니야.
너의 삶과 너의 과거처럼 말이지. PRTS의 조작 패드에서 눈을 돌려 봐. 넌 영원히 모든 일을 파악할 수는 없고, 항상 어디에나 나타날 수는 없어.
진실을 직시하는 사람만이 '용기'라는 단어를 말할 자격이 있지.
웃긴 건 너는 진실이 뭔지 전혀 모른다는 거야. 무엇 하나 이해하지 못하면서 네 무지함 때문에 슬퍼하고 심지어 분노하기까지 하지.
결국 너도 이 혼란스러운 세상 속, 수많은 사람들의 투영일 뿐이야. 놈들은 너를 통해 위로받고 자신이 원하는 걸 얻고 싶어 하지.
검은 아츠에 관통된 리유니온 멤버는 정예 오퍼레이터 쪽을 가리켰다.
하지만 당신이 바라본 그곳에는, 파울비스트 몇 마리만 지나가고 있을 뿐이었다.
놈들 중에 본인의 운명을 직시하는 자는 과연 몇이나 될까? 다들 로도스 아일랜드 뒤에 숨어서 남이나 부려 먹는 방관자가 됐을 뿐이지.
그렇다면 너는 어떻지? 새로운 기억으로 만들어졌다고, 과거로부터 완전히 멀어질 수 있는 건가? 설령 그렇다 해도, 넌 어떻게 새로운 자신과 마주할 거지?
방관자들은 너에 대해 하나도 아는 게 없으면서, 네가 되고 싶어 해. 너를 통해 자신들의 저속한 욕구를 만족시키려고 하지.
너는……
넌 정말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일까? 정말 그렇게 무거운 짐을 떠맡을 필요가 있을까?
- ......
- 잊어버린 과거를 내려놓을 생각은 없어.
- 과거의 책임을 내팽개치려 한 적은 없어.
- 다만, 그 과거가 로도스 아일랜드를 위한 싸움에 도움 되지 않는다면……
- 하지만, 과거는 현재에 영향을 줄 수 없어.
- 이젠 중요하지 않은 일이야.
그건 네가 가볍게 결론 내릴 수 있는 일이 아니야, 박사.
죄인이 기억을 잃는다고 그 죄를 씻을 수 있을까? 선한 사람이 기억을 잃는다고 선행이 더는 존재하지 않게 되는 걸까?
특히나 너에게 있어서…… 기억을 잃었다는 건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야.
네가 뭘 잃었는지 너 자신도 깨닫지 못했을 텐데, 어떻게 제대로 된 답을 얻을 수 있겠어?
박사님……
……손을……
제…… 손을……!
제 손을 잡으세요!!
- ……내가 그 의미를 찾아내겠어.
- 그리고 '박사'로서 올바른 선택을 할 거야.
- 과거의 기억이 날 이끄는 것도 아니고……
- ……그때부터의 일이 나를 바꿔낸 것도 아니야.
- 내가 바로 나 자신이다.
- 처음부터, 한결같이.
……네 생각을 이해했어.
후훗, 지난 몇 년간의 일도 완전히 기억 못하는 사람이 스스로 '한결같이'라는 말을 하다니.
그것이 과거든 미래든, 진실을 알았을 때에도 넌 그저 '알아낸' 것일 뿐, '떠올려낸' 게 아니라는 거지?
넌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야. 그렇다고 슬퍼할 필요는 없어. 너는 가장 네 본성에 가까운 사람이니까. 희망을 좇을 기회를 다시 얻었잖아.
너와 켈시, 아미야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지 정말 궁금해지는걸……
……더는 그게 내 것이 아니라는 게 아쉽네.
- 테레시아……?
- 너는…… 테레시아인가?
별거 아니야. 작은 도움을 줬을 뿐이지.
어찌 됐든 나도 '변론' 시스템에서 생겨난 허상일 뿐이니까.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중요하지 않아.
그렇지만 명심해. 그것이 가장 혼란스러운 네 잠재의식에서 나온 것이든 아니든……
“한결같이”라는 이 말은 네 삶에서 가장 중요한 설명이 될 거야. 네가 무심코 뱉은 이 단어의 뜻을 진정으로 깨달았을 때……
……널 사랑하는 사람과 네가 사랑하는 사람을 저버리지 않게 될 거야.
우리는 모두 스스로 운명을 움켜쥐어야 해. 그러면 이 땅에 정해진 운명이라는 말은 사라지겠지.
넌 유일한 해독약이자 모든 걸 파괴할 수 있는 독이야. 진정으로 우리를 가로막는 건 오리지늄이나 재앙, 바다와 하늘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니까.
아미야와 켈시를 믿어. 영원한 어둠의 밤이 곧 다가올 것이고, 너희는 그 유일한 빛이 될 거야.
그럼,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