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W-5유암화명
사리아는 사일런스를 쫓아가기로 하고, 로즈몬티스는 로켄을 만나러 가기로 한다. 고요한 실험실에서 두 사람은 고독의 춤을 추고 있다.
역시, 연결이 안 돼.
사리아, 누구한테 전화하는 거야?
틴맨.
그 깡통 아저씨? 무슨 일 생긴 거 아냐?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아니면 메이랜더도 우리를 추격할 이유가 없지.
군부와 메이랜더가 합의를 본 건가…… 왜 화살을 우리 쪽으로 돌렸지? 틴맨한테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사리아, 네가 알려준 대로 정찰해 봤는데 병사들은 모두 철수했고 우리를 포위했던 특수요원들도 물러갔어.
사일런스가 단지 뒤를 맡아준 것만으로는 추격병이 사라질 리가 없다.
상대가 만족할 만한 뭔가를 제시하지 않았다면 말이지.
혹시 그 은색 액체 아니야? 아까 사일런스가 갖고 있는 걸 봤어!
……전달물질?
사일런스는 359호 기지에서 도로시와 만난 적이 있으니 전달물질은 아마 도로시한테서 얻었을 거다. 도로시는 사일런스에게 뭘 시키려는 거지?
아니, 도로시는 아직 군부에 갇혀 있으니 사일런스를 통해 군부와 퍼디낸드를 찾으려고 할 리가 없어.
그렇다면 파르비스인가? 아니면……
사리아……
당황하지 마, 이프리트.
사일런스는 괜찮을 거다.
그게 아니라, 사리아, 그러다가 통신기가 망가지겠어.
……그렇군. 알려줘서 고맙다.
그리고 나 당황한 거 아니야. 사일런스는 무모한 짓은 안 하니까.
사일런스는 너랑 대화하고 나서 남았잖아. 분명 많이 고민하고 내린 결정일 거야.
……
사일런스는 본인이 뭘 마주하게 될지 모른다. 국가 기관의 운영 방식은 사일런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가혹해.
왜 사일런스가 모른다고 생각해? 난 그런 것도 분명 다 고려했을 거라고 봐.
사일런스는 정말 노력했어. 내가 찾아갈 때면 늘 일하고 있었고, 다들 사일런스가 꼭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쫓기는 것처럼 필사적이라고 했어.
우리가 다시 만났을 땐, 어쩌면 사일런스가 모든 일을 깔끔하게 끝내버렸을지도 몰라!
그럼 난 사일런스한테 우리를 두고 가서 화는 좀 났지만, 그래도 해낼 줄 알았다고 말해줄 거야.
이프리트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걸 알아차린 사리아는 위로의 말을 건네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이프리트가 자신을 위로하려고 애쓴다는 걸 알고 있지만, 사리아는 이프리트가 말하는 사일런스가 왠지 낯설게 느껴졌다.
사일런스는 준비되었고, 무슨 일을 마주하게 될지도 알고 있다……?
사리아는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사리아, 저기 봐.
음?
군부 사람들이 철수하고 있어…… 하지만 주둔지 쪽으로 가는 건 아닌가 본데……
설마 전달물질이 정말 크리스틴을 찾는 단서인가?
사리아, 우리도 몰래 따라가 보자.
……사일런스는 네가 위험해지는 걸 절대 원하지 않아.
사일런스가 아까 함께 움직이자고 했단 말이야!
게다가 “사리아는 깨어나면 또 돌아올 거야.”, “원래 그런 사람이니까.” 이런 말까지 했다고.
그건……
“가장 이성적인 방법이 아니다” 이 말을 하고 싶은 거지? 나도 다 알아.
우리는 모험하러 가는 게 아니야. 나도 사일런스의 용기를 저버리려는 게 아니고. 그냥 종점에서 사일런스를 기다리자는 거지.
이프리트……
왠지 모르겠지만, 사리아는 갑자기 이프리트가 몇 년 전 실험실에서 구출됐을 때보다 많이 컸다는 걸 느꼈다.
곧 다가올 위험을 앞두고도, 이프리트의 눈빛에는 초조함이나 무모함이 아닌, 용기와 지혜가 보였다.
그래, 가자.
앗싸!
맞다, 사리아. 나 트리마운츠에 막 들어왔을 때 별이 떨어지는 걸 봤어.
별? 13구역 트리톤 공장의 추락물을 말하는 건가……
그냥 별이라고 쳐!
사일런스가 들려준 이야기에서 별이 떨어지면 모든 갈등이 사라진다고 했어.
너랑 사일런스도…… 분명 화해할 수 있을 거야, 그렇지?
……그래.
그럼 됐어!
그럴 수 있을까?
사리아는 고개를 돌려 익숙한 트리마운츠의 거리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갑자기 자신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이 약간 낯설게 느껴졌다.
수많은 시련을 겪은 사리아에게 현재 상황은 아직 최악이라 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처음으로 걷잡을 수 없음을 느꼈다.
이 빌어먹을 날씨, 더럽게 춥네!
조심해, 차 온다.
어이쿠, 큰일 날 뻔했네. 다 이 날씨 때문이야. 너무 추워서 정신이 없어서 그래!
그거 아나? 이 날씨마저도, 저 맞은 편에 있는 과학 기술 회사에서 조종하는 거래.
드론으로 하늘에서 약을 뿌리면, 우리가 숨을 쉴수록 폐가 점점 더 얼어붙는 거지.
놈들은 사람들을 막 잡아서 뇌를 수조에 담가 인공 태양의 자양분으로 만들려고 한대.
……
그리고 저 하늘 좀 봐……
뭘 보라는 거지?
저 별은 진짜 별이 아니라 다 괴물이 설치한 감시 카메라야. 심지어 존경하는 대통령님을 잡아가서 그 몸을 뒤집어쓰고 컬럼비아 전체를 통제하고 있지!
……이 돈을 가져가. 따뜻한 곳에서 좀 자도록 해.
아니, 난 돈이 없는 게 아니라 날이 밝길 기다리고 있는 거야.
이건 비밀인데, 난 지금 부통령과 이 과학 기술 회사들에 대한 시위를 계획하고 있어. 모두가 정신 차리게 할 거야.
이것도 가져. 내 돈 전부야.
저기, 잠깐만……
……역시 여기 있었군.
좋은 아침이네, 퍼디낸드.
이 흑두차를 마시고 나면 날이 밝을 테니, 나도 건너편으로 출근해야겠지.
가식 그만 떨어. 파르비스, 언제부터 크리스틴과 협력한 거지?
음?
당신, 야라, 저스틴, 그리고 내스티까지, 당신들은 내가 크리스틴을 허수아비로 만들었고 성공하기 일보 직전이라고 착각하게 만들었어……
결국, 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그저 광대였어. 심지어 내가 심혈을 기울여 개발한 것도 크리스틴을 더 높이 올라가게 해줄 사다리가 되어버렸다고!
따뜻한 차라도 한잔하겠나, 퍼디낸드?
이……
교활한 늙은 염소라 말하려는 건가?
미리 말해두지만 난 크리스틴의 행방을 모르네. 날 그 정도로 신뢰하는 것도 아니고, 나도 크리스틴의 비밀에는 별 관심 없거든.
물론 자네도 나한테 뭘 물어보려고 온 건 아니겠지. 그랬다면 야라에게 했던 것처럼 그 대령의 무장 세력을 데리고 위풍당당하게 왔을 테니.
……
정말 자네답지 않군. 심지어 개척자의 모욕을 참아가면서까지 기어코 돌아와서 자네를 버렸던 그 대령한테 굽신거리다니 말이야.
그렇게까지 결심했으면서, 왜 진실이 곧 드러나려는 찰나에 포기하는 건가?
멋대로 넘겨짚지 마.
아무래도 자네가 직시해야 하는 건 자네의 마음일지도 몰라, 퍼디낸드.
자네는 크리스틴을 질투하고 있어.
크리스틴 자신이 직접 부탁하지 않아도, 많은 사람들이 기꺼이 도와주려 하니까.
자네가 공을 들여야 얻어낼 수 있는 인심을 크리스틴은 몇 마디 말이면 해낼 수 있으니까.
자네는 크리스틴의 인간적인 매력을 질투하는 거야.
심지어, 자네의 마음 한구석에도 크리스틴에게 매료된 부분이 있지 않나? 자네가 그걸 부인하려고 애쓸 때마다 크리스틴을 더 증오하게 되는 것이고……
왜 그렇게 생각하지?
내 마음도 그렇기 때문이지.
……
퍼디낸드, 바깥을 보게.
내가 어렸을 때 밤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면…… 별이 보이지 않았네.
보이는 거라곤 거대한 고탑의 실루엣과 탑 꼭대기의 꺼지지 않고 반짝이는 주술의 빛이었지.
어른들은 그게 위치킹의 눈이라고 말했네. 그자의 의지가 라이타니엔을 뒤덮었다고 말이야.
그때마다 난 이런 생각이 들었지. 만약 위치킹만이 운명의 선택을 받은 유일한 기적이라면, 다른 사람들의 생명은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당신은 그 어리석은 캐스터들이 위치킹의 영혼을 불러들이는 데 시간을 낭비한다고 줄곧 비난했지 않나?
맞아, 난 그 자들의 행동에 반대했지.
내 가족과 예전의 동료들은 그 유성 같은 기적이 이 시대에 다시 강림하길 빌며 평생을 허비했어.
하지만 기나긴 연구의 세월 속에서 난 진작 깨달았네. 기적을 기적이라고 부르는 건, 그게 통제할 수 없고 재현되지도 않는 우연이기 때문이지.
그리고 오직 그런 우연만이 우리의 머리 위에 있는, 운명이라는 족쇄를 부술 수 있는 걸세.
크리스틴의 사업도 그런 우연이라 보는 건가?
크리스틴은 기적을 만들어 낼 가능성이 있네.
당신도 꿈이 있고 나도 꿈이 있어. 만약 크리스틴이 정말 운명으로 정해진 기적이라면, 그럼 우리는 뭐지? 생산 라인의 폐기물? 아무런 의미도 없는 소음?
아닐세, 퍼디낸드. 자포자기할 필요 없어.
어쩌면 인류의 운명은 이 세상을 초월한 어느 한 개체에 달려있을지도 몰라. 그 사람은 모든 속박을 벗어나 모든 사람의 눈이 되어,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풍경을 볼 수도 있지.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의 생명이 꼭 무의미하다는 건 아닐세.
기적은 진화의 여정에서 생겨나고, 자네와 나, 심지어 바깥에 있는 저 무지한 부랑자, 그리고 우리의 꿈마저도 그 여정을 구성하는 요인이 되니까.
……왜 나한테 그런 말을 하는 거지?
이제 좀 기운을 차렸나? 일단 차라도 좀 마시게, 안색이 좋아질 테니. 출근하는 아이들이 이렇게 초췌한 자네의 모습을 보면 안 좋잖나.
……
지금의 난 가진 게 거의 없어. 당신이 신경쓸 만한 건 거의……
급할 거 없네. 차를 다 마시면 일 얘기나 해보자고.
나도 오랜 벗과 더 대화를 나누고 싶거든. 어찌 됐든…… 우리는 처음부터 함께 시작했으니까 말이야.
마음씨 좋은 형씨, 또 만났네!
……확성기랑 하드보드지?
내가 준 돈으로 음식과 잠자리를 구한 게 아니라…… 그것들을 산 건가?
그렇게 말하지 말고. 한순간의 편안함보다 올바른 일을 하는 게 더 중요하잖아.
하드보드지 좀 줘 봐.
'라인 랩'…… 시위하기 전에 회사 이름부터 제대로 써야지.
하하, 그러네. 훨씬 보기 좋군! 고마워, 형씨!
……그럼, 이제 말해 주겠나.
네가 꿈에서 본 것, 너의 '사업'이 쟁취하고 싶은 게 대체 어떤…… 미래였는지.
박사, 내 생태원 괜찮지?
여긴 아무나 못 들어오는 곳이야. 그리고…… 로즈몬티스는 여길 아주 좋아하는 것 같네.
로즈몬티스는 초목이 울창한 실험실을 조용히 둘러보고 있었다.
그러면서 식물들의 생김새를 열심히 구분하고, 또 고개를 숙여 그 모양을 노트에 자세히 기록했다.
그러다가 시선이 노트의 마지막 페이지에 멈췄다.
거기에는 얇은 편지가 꽂혀 있다는 걸 당신도 잘 알고 있다.
- 로즈몬티스, 또 편지를 보고 있어?
응, 박사.
잊어버리기 전에 오늘 일을 모두 기록하고 단말에 입력하려고.
로켄…… 로켄 윌리엄스……
그 사람이 말한 '집'은 어떤 모습일까? 로도스 아일랜드 같은 곳일까?
- 아니.
- 절대 그럴 리 없어.
그럼 그 사람도 내 가족이 아닌 거네.
난 그 사람이 싫어, 박사. 그 사람을 통해서 내가 싫어하는 감정을 너무 많이 느꼈어.
난 그런 감정을 하나로 뭉쳐서 내가 닿을 수 없는 곳에 밀어 넣고 싶어. 출발하기 전에 아미야가 다 치워줬었는데 지금 계속 다시 자라나고 있어.
- 어떤 느낌인데?
……상실감.
그리고…… 파멸.
난 이것들을 부숴버리고 싶어. 하지만 이건 옳지 않아. 피스가 엄청 화를 낼 거야……
박사, 나 다시 로켄을 만나러 가면 안 되겠지?
- 로즈몬티스, 너는 과거를 되찾고 싶어?
기억은 아주 소중한 거니까, 나쁜 건 기억해 두고 싶지 않아.
하지만 내 눈으로 한 번 더 보고 싶어. 내가 어떻게 할지 알고 싶거든.
되찾는 게 아니라…… 다시 버리는 걸 수도 있어.
이번에는 제대로 작별 인사를 할 거야.
- 좋아.
- 로켄을 찾아가자.
- 그 전에 일단 좀 쉬는 게 어때?
응……
- (외투를 벗는다)
- (로즈몬티스에게 덮어준다)
- 잘 자.
응…… 박사……
필라인 소녀는 옷을 꼭 잡고 조심스럽게 당신 곁에 누웠다.
그녀의 숨결은 깨어있을 때와 다름없었다. 연약하면서도 꿋꿋했다.
많이 피곤했나 보네.
- 로즈몬티스의 아츠는 의식에 의지하니까.
- 오늘은 소모가 너무 컸어.
그럼 당신은, 박사?
- 로즈몬티스가 잠들었으니 다른 곳에서 얘기하자.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네.
- 군부의 조사에 협조해야 할까?
- 메이랜더 재단에 자수해야 할까?
- 우리는 트리마운츠의 소용돌이에 완전히 휘말렸어.
……
당신들을 라인 랩에 초대한 건 나야. 내가 당신들은 적법한 절차를 거쳐 라인 랩 빌딩에서 '공적인 방문'을 진행했고, 부통령 암살 사건과 무관하다는 걸 증명할 수 있어.
군부에서는 당신들을 건드리지 못할 거야. 걱정 마, 박사.
오올헤약이 가장 잘하는 게 바로 아무런 상관없는 사람에게 불을 지피는 거야…… 진짜 정신 나간 여자라니까.
하지만 그 소위 말하는 '살인 현장'에는 진정한 목격자가 없었어.
메이랜더 재단이 아무런 이익 관계도 없고 약해 빠진, 후드를 쓴 사람이 고급 특수요원의 머리를 잘랐다는 걸 믿을지, 아니면 누군가의 자작극이라고 의심할지는 아직 알 수 없어.
트리톤 공장 폭발, 부통령 암살, 크리스틴의 실종까지…… 트리마운츠는 지금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야.
좀 무책임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군부든 메이랜더 재단이든 적어도 당장은 로도스 아일랜드를 상대할 여유가 없을걸. 그러니까 당신들은 소용돌이의 중심에 있는 게 아니야.
박사, 그렇게 긴장할 필요 없어.
- ......
어찌 됐든 당신의 현재 상황은 나랑 관련이 있어. 박사, 우리의 협력은 아직 끝난 게 아니야. 날 도와줬으니까 나도 최선을 다해서 도울게……
필요하다면 지금 당장 방법을 찾아서 당신과 로즈몬티스, 그리고 이프를 트리마운츠에서 내보내 줄 수 있어.
- 뮤엘시스, 난 그걸 걱정하는 게 아니야.
- 뮤엘시스, 성의는 협력의 기본이야.
- 넌 사리아도 찾고 크리스틴도 찾고 있지?
- 너는 뭘 막으려는 거야? 아니면 뭘 만회하려는 거야?
- 너의 태도는 처음부터 애매했어.
- 나는 파트너인 네 생각을 잘 모르겠어.
박사, 춤출래?
- ......
난 그렇게 따져 묻는 거 안 좋아해.
뮤엘시스는 뒷짐을 지고 천천히 거리를 벌렸다. 그러다가 당신을 향해 고개를 돌렸는데 표정은 모처럼 진지해 보였다.
음악이 울렸다.
느린 박자의 우아한 곡이었다. 당신은 멀지 않은 곳에서 수분이 잎사귀로부터 배어 나와 투명한 물방울이 되는 걸 보았다.
물방울은 점점 더 많이 나타났고, 잎사귀를 떠나 당신과 뮤엘시스를 쫓으면서 선율에 따라 움직였다. 당신은 모든 물방울의 율동을 보았고 숨 쉬는 것처럼 나긋나긋하게 움직였다.
……그것들은 선율 그 자체였다.
박사, 느껴봐. 물방울이 우리의 스텝을 이끌어 줄 거야.
- 이 생태원에서 너의 물방울은 아주 '자유로워' 보이네.
- 이 생태원의 공기는 아주 '깨끗'한 것 같네.
박사, 아주 예리한데.
이 생태원의 조명과 물 순환 시스템, 공기 정화 장치는 모두 오리지늄 기술에 의존하지 않아. 다시 말하면, 여긴 트리마운츠에서 가장 깨끗한 곳이야.
여긴 트리마운츠에서 나의 근원이나 다름없는 곳이야. 여기에서만 내가 그나마 편해질 수 있으니까.
사실 내가 분신으로 자주 행동하는 건, 내가 원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야.
당신의 손이 갑자기 텅 비며 뮤엘시스는 시야에서 사라졌다.
물방울은 리본을 이루어 당신을 살짝 붙잡고 상태원의 한구석으로 이끌었다.
삼나무는 성장 환경에 대한 조건이 매우 까다롭습니다. 오리지늄 공업 발전으로 인한 토양 오염으로 현재는 컬럼비아의 일부 산간 지역에서만 소량 분포하고 있습니다.
물방울이 흩어지고 부서지자 삼나무와 당신 사이에 자욱한 안개가 생겼다.
안개 사이로 뭔가 어렴풋이 보였다…… 묘비? 뮤엘시스는 묘비 옆에 조용히 앉아 잡초를 뽑고 있었다.
저렇게 슬퍼하는 뮤엘시스를 당신은 처음 봤다.
저건, 과거의 투영인가?
난 트리마운츠의 트렌턴이라는 마을에 있는 한 보육원에서 자랐어.
원장님 말로는 내가 한밤중에 보육원 입구에 버려졌대. 그래서 내 부모님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사실 난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남들과 다르다는 걸 알았어……
내 아츠는 아주 특이하지만, 오리지늄 아츠는 아니야. 난 일반 사람보다 오리지늄에 대한 반응이 10배는 더 강해. 그래서 오리지늄 농도가 조금이라도 높은 곳에 가면 바로 몸에 부담이 오거든.
난 대체 무엇일까? 아무도 몰라.
그래서 난 어렸을 때부터 계속 답을 찾고 있었어. 좀 웃기기는 하지만, 내 성적이 계속 좋았던 이유이기도 해.
그리고 마침내, 나는 한 고서에서 그 생소한 단어를 찾았어……
- '엘프'.
박사는 이 단어가 전혀 낯설지 않은 것 같네…… 역시 당신도 비밀이 많구나.
- ......
뭐,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아.
아무튼, 난 친부모가 트리마운츠에서 머물렀던 거처도 찾아냈어. 이미 주인은 오래전에 바뀌었지만.
나는 그대로 포기할 수 없어서 부모님이 남긴 단서를 따라 계속 찾았어.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고 했나, 난 겨우 그 행방을 찾아냈지.
바로 당신이 본 그 마을이야…… 솔직히 너무 외진 곳이라 내가 잘못 찾은 줄 알았어. 마을에 있는 건물도 대부분은 너무 낡아서, 몇백 년 전에 지은 것 같았어.
그런데 막상 찾아가 보니 사람이 한 명도 없더라. 그래서 마을 뒷산에 가봤는데, 그때 안 좋은 예감이 들었어……
삼나무들에 둘러싸인 초라한 묘지가 하나 있었는데, 묘지 안에는 수십 개의 묘비가 있었지.
이 마을은 엘프의 마을이 아니라, 엘프의 무덤이었던 거야.
묘비 옆에 앉아 있던 뮤엘시스가 일어났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당신을 힐끗 쳐다보고는 삼나무 앞에 있던 안개와 함께 흩어져 버렸다.
파트너가 다시 곁으로 돌아왔다.
- 엘프는 그 특성 때문에, 현대 문명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었나.
- 부모님은 왜 너를 두고 갔을까?
현대 문명을 멀리하는 게 말처럼 쉽나?
더 편리하고 더 발전되고 더 다채로운 삶이 눈앞에 있는데도, 산속에서만 숨어 살아야 하다니.
긴 수명을 가진 엘프들은 그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런 이유로 우울하게 살다가 죽은 사람도 있고, 심지어는 일찍 자결한 사람도 있어.
하지만, 더 많은 엘프들은 결국 이 사회에 들어가기로 했어. 우리 부모님도 마찬가지야.
두 사람은 최대한 오리지늄의 접촉을 피하면서 문명 속에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했어. 조심스럽지만 용감하게 살아남았던 거야.
부모님은 언젠가 오리지늄 때문에 죽게 될 걸 알았지만, 그 결과를 받아들이기로 했지.
두 분은 '광석병'에 감염됐거든.
엘프는 오리지늄에 매우 예민하고 취약해서, 광석병에 일단 감염되면…… 수명은 한 달도 넘기지 못해.
두 사람은 대다수의 엘프처럼 인적이 드문 깊은 산골에서 평생 살아야 한다는 걸 받아들일 수 없었어. 더 편리하고 더 발전되고 더 다채롭지만, 동시에 위험천만한 삶을 갈망했지.
언젠가 오리지늄 때문에 죽게 될 걸 알았지만, 그 결과를 받아들이기로 했던 거야.
그렇게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는 걸 알게 된 후, 어쩔 수 없이 나를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마을에 버렸고, 예전에 살던 마을로 돌아가서 죽음을 맞이했어.
- 그 사실이 안타까워? 아니면 부조리하다고 생각해?
- 그럼 너는, 종족의 운명을 바꿀 방법을 찾고 있는 거야?
……
계속 춤이나 추자, 박사.
생태원에 더 많은 물방울이 떠올랐고 새로운 음악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뮤엘시스의 얼굴에는 다시 미소가 찾아왔다. 선율이 바뀌었고, 당신은 아까 그 얘기가 계속 이어질지 알 수 없었다.
가끔은 로도스 아일랜드가 너무 부러워. 언제나 사람이 복작거리잖아.
- 로도스 아일랜드에 와봤구나.
어머, 들켰네.
몰래 그 함선에 한 번 올라타긴 했지. 두 번이었나? 아무튼, 이프가 잘 지내는지 보고 싶었어. 사리아가 뭐 하나 궁금하기도 했고.
그러고 보니…… 석양이 막 지려고 할 때 갑판 위에 멍하니 서 있던 누군가도 봤지.
- 네가 가까이 있는지 몰랐어.
다른 사람한텐 말하지 마. 가까이 갔던 건 내 아주 작은 분신이었어. 위험한 건 아니야.
그때 난 이런 생각을 했어. 선실에 있으면 그렇게 즐거운데, 왜 당신은 꼭 혼자 갑판에서 고민하는 걸 좋아할까?
- 뭐라도 떠오르지 않을까 싶어서.
- 예전에 같이 여러 번 석양을 봤던 사람이 있던 것 같거든.
그 사람에 관한 추억은 찾았어?
- 아니.
- ……
- 몇 년이나 흘렀지만, 아는 건 여전히 이름뿐이야.
음…… 당신처럼 신비롭고 박학다식한 사람도 답을 못 찾을 때가 있구나. 뭔가…… 좀 공평한 것 같네.
뮤엘시스는 당신을 리드하며 가볍게 반 바퀴 돌았다.
- 춤을 잘 추네.
당연하지. 대학교 때 댄스 동아리 에이스였거든. 오랫동안 배웠어.
마을을 떠난 후로 난 모든 시간을 '공부'하는 데 썼어.
이 컬럼비아에서 삶을 바꾸려면 과학 연구가 제일 좋은 선택이라는 걸 모르는 아이들은 없거든.
난 열심히 공부해서 반에서 1등, 학년에서 1등을 차지했어. 트리마운츠의 대학에 들어가서도 여전히 1등이었지.
학업 외에도 '현대 생활'에 적응하기 위해 나는 많은 시간을 썼어. 패션, 게임, 문학, 음악, 춤까지…… 난 사교 예절을 익혔고, 많은 사람을 알게 됐지.
다른 사람에게는 그저 취미겠지만, 나에게는 임무이자 탐험이며, 일종의 시련이었어.
아주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난 자신에게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요구했어.
……
뭐, 마지막으로 춤을 춘 지도…… 꽤 오래됐지만.
- 사리아, 그리고 크리스틴과 함께?
물방울이 당신 곁을 맴돌았고, 생태원의 빛은 물방울을 투과하지 못했다. 물방울에 스며든 지난 기억의 조각들은 부드럽고 또렷했지만, 만질 수 없었다.
새롭게 장식한 실험실, 절반 넘게 비어버린 술병…… 사리아, 다른 사람은 크리스틴인가? 그리고 시무룩한 얼굴의 뮤엘시스까지……
세 사람은 실험실 한가운데에 가만히 서서 서로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었다.
이때는 라인 랩이 설립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맞이한 새해의 밤이었어…… 다들 신나 했지만, 내가 가장 신났지.
난 대학을 졸업하기 얼마 전에 크리스틴과 사리아를 알았어.
크리스틴은 절대 투자자들이 좋아할 타입이 아니었어. 딱 봐도 예상치 못한 놀라움과 두려움을 안겨 줄 그런 사람이니까. 그리고 사리아에 대한 나의 인상은 '믿음직하다'였어.
어쩌다 보니 우리 교수님이 두 사람의 프로젝트를 접할 일이 생겼는데, 본인은 관심이 없어서 날 대신 보냈던 거야……
그 당시 난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의지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어. 이것저것 시도해 봤지만, 갈피를 못 잡고 있었지. 그때 그 둘이 내 '졸업생'과 '엘프'라는 혼란스러운 시기를 함께 보내줬어.
그때는 크리스틴과 사리아, 나, 파르비스, 그리고 퍼디낸드까지 5명밖에 없었어.
파르비스 그 영감은 밤을 못 새운다는 핑계로 이미 위층에 올라가 피신했고, 퍼디낸드도 처리할 일이 있다면서 일찍 떠났지.
결국은 끝내 함께 춤출 사람을 찾지 못했어.
그래서 난 사리아랑…… 크리스틴을 붙잡을 수밖에 없었지.
하하, 셋이서 하는 춤은 아무도 출 줄 몰랐고, 난 아직도 그때 두 사람의 표정이 기억나!
- 왜 그렇게 크리스틴에게 집착하는 거야?
- 너한테 라인 랩은 정말 중요하구나.
음…… 꿈이니까.
우리는 약속했어. 크리스틴이 내스티를 도와 여정에 오르면, 내 꿈도 함께 데려가겠다고.
……정확히 말하자면 사리아와 크리스틴, 두 사람 모두 나한테 정말 중요해.
난 두 사람이 힘을 합쳐야 우리가 정말 가고 싶은 곳에 다다를 수 있다고 믿거든.
한 곡이 끝났다. 텅 빈 생태원에서 뮤엘시스는 삼나무처럼 조용하게 당신의 맞은편에 서 있었다.
갑자기 공기 순환 시스템이 작동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얼굴에 닿은 바람은 이상하리만큼 축축했다. 식물의 상쾌한 향과 진흙의 부드러움…… 당신은 그제야 아까 나풀거리던 물방울, 그 노래, 그리고 춤이 정말로 존재했었다는 걸 깨달았다.
박사, 당신은 내가 흔들리는 걸 눈치챘을 거야. 확실히 난 최대한 모두를 이용하고 있어. 당신도 포함해서……
하지만 내가 하는 모든 일은, 나와 얼마 남지 않은 동족이 자유롭게 숨을 쉬고, 바람을 쐬고, 뛰어다니고, 여행할 수 있게 하기 위한 거야……
지금처럼 힘겹게 살지 않기 위해서.
난 그저…… 이 도시에서 조금이라도 더 잘 지낼 수 있게, 얼마 되지 않는 친구들을 지키기 위해……
……
당신에게 알려줄 수 있고 약속할 수 있는 건 이게 다야.
- 네 이야기에는 아직 모호한 부분이 많아.
- 네 이야기는 아직 공백이 많아.
- 내가 널 믿어도 될까?
- 너는 날 이용하진 않았어.
그건……
- 뮤엘시스, 한 번만 더 도와줘.
어?
- 반드시 로켄 윌리엄스를 찾아야 해.
……
내게…… 정말 그럴 능력이 있다고 쳐. 그러면 왜 당신들을 트리마운츠에서 안전하게 내보내 달라고 부탁하지는 않는 거야?
- 이렇게 된 이상 이제 물러날 수 없어.
- 로도스 아일랜드는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 해.
사리아와 그 닥터 켈시는 이번 일에 개입할 이유가 있지만, 당신은? 군부, 메이랜더와 동시에 전쟁을 벌일 위험이 있다고 해도 계속 조사하겠다는 거야?
그건 이성적인 선택이 아닌데.
- 난 로즈몬티스를 돕고 싶어.
- 난 사건의 진실을 찾고 싶어.
- 난 나 자신을 찾고 싶어.
로즈몬티스가 푹 잠이 들었네……
로즈몬티스가 잃어버린 과거를 찾아주고 싶어?
크리스틴의 꿈에 그렇게 관심이 많았던 거야?
트리마운츠에도 당신의 지난 흔적이 있다고 믿는 거야?
- ......
……좋아, 도와줄게.
계속 협력하자, 박사.
……
방금은 누구 전화인가요?
외로워서 함께할 사람을 찾고 싶은 사람이지.
두 사람 사이가 언제부터 이렇게 좋아졌죠?
당분간만 함께할 뿐이야.
너도 참, 내 실험실에서 언제 나갈 생각이야? 네 몸에서 나는 술 냄새가 설비의 정확도에 영향을 주는데 말이야.
매정도 하셔라.
당신과 그 여자 특수요원의 '임시 계획' 덕분에, 당신이 감옥에 들어가는 일이 없도록 오늘 밤 전화 미팅을 열몇 번은 더 하게 생겼다고요. 그러니까 당연히 술로 기운 좀 차려야죠.
너도 원하는 걸 얻었잖아. 장사꾼인 네가 만족할 만한 가격을 크리스틴이 약속했을 텐데.
가격? 이 미친 계획을 위해 제가 얼마나 큰 손해를 봤는지 일깨워주려는 겁니까?
……그럼 진작에 카시미어로 가지 그랬어.
상업연합회에 들어가서 그 기사들과 투기꾼들의 운명이나 갖고 놀라고요?
뭐, 그 계획은 저의 단말에서 몇 년이나 묵혀두고 있었습니다만, 그렇게 하면 더 많은 돈을, 더 안전하게 벌 수는 있겠죠.
하지만, 그 모든 거창한 계획은…… 한 나라와 한 시대에만 제한돼 있으니까요.
그보다 저는 지금의 기회를 더 잡고 싶군요. 모두의 상상을 뛰어넘은 미래가 제 손바닥 안에서 하늘로 솟아오르는 걸 보고 싶어요.
너 같은 극단적인 실속파도 꿈을 꾼다고?
누구나 꿈을 꿀 권리가 있습니다. 특히…… 예측할 수 없는 운명을 마주하고 있을 때는 더더욱.
아까 당신이 한 말은 아주 마음에 들어요. 당분간만 함께하는…… 동행자.
과학자들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그렇게 많은 분쟁을 겪으면서, 친구가 적이 되고, 적이 친구가 되어도, 결국은 같은 길을 가게 되잖아요.
가장 비현실적인 미래에서 자기 모습을 봤기 때문이야.
그럼, 당신은요?
무의미한 질문이네. 내가 왜 네가 이렇게 오랫동안 여기 있는 걸 참고 있다 생각하는 거야?
하하하, 그래서 저는 '동행자'라는 호칭이 더 마음에 들어요. 당분간이라고 해도 말이죠.
내스티 루노레이 씨.
내일이 지나, 만약 군부가 우리를 죽이지 않았거나 특수요원이 우리를 감방에 처넣지 않았다면……
저와 함께 트리마운츠 가장 높은 곳에 가서 이 땅을 뒤덮고 있는 영구불변한 하늘을 보러 가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