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C-3풀더미에 점화
일행은 마을에서 부상자들을 치료하며 밤을 보내기로 한다. 백파이프와 리드는 각자의 과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한편, 아르모니는 리드가 불을 질렀다는 소식을 접하고, 피셔는 아르모니의 순간적인 반응을 포착한다.
하아, 이렇게 오랜 시간 도망치는 와중에, 방안에 편히 앉아 따뜻한 식사를 할 수 있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그 백파이프라는 아가씨는 정말 매력적인 사람 같아. 방금도 그 아가씨가 만든 스튜가 맛있다고 다들 칭찬했다니까.
그래, 요리 쪽으로는 확실히 괜찮지.
정착에 대해선, 순조롭게 얘기되고 있나?
결정됐어, 당장 떠날 수 없는 사람들은 여기에 남기로. 며칠 동안은 일단 창고를 두 개 빌려서 숨어 있기로 했어.
도망치던 사람들이 카라반이랑 싸웠지만, 실질적으론 아무것도 못 뺏었잖아. 이런 일은 너무 흔해서 아마 수사 기관도 별로 신경 안 쓸 거야.
며칠이 지나 방송에서 보도마저 안 나올 즈음이면 더 이상 안 숨어도 될 거야. 그땐 직접 집을 지어도 되고.
음, 하지만 광석병에 걸린 몇몇 사람은 마을이랑 좀 떨어진 곳으로 가야 할 거야.
여기 사람들은 꽤 친절하군.
하아, 맞아. 우리가 처음 도망 나왔을 때 누군가 우리를 거둬줬다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겠지.
물론 누군가를 탓할 수도 없어. 예전이라면 마을에서 피난자들을 거둬 주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겠지만, 지금은 다들 힘들어졌으니까.
셀몬을 봐, 만약 그 남매를 받아주는 곳이 있었다면, 셀몬도 여러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문제를 일으키진 않았을 거야.
우린 오늘 밤 마을에서 밤을 보낼 수 있게 됐지만, 셀몬은 여전히 마을 밖에서 숨어 있어. 셀몬은 여기서 남의 가축을 빼앗았던 일 때문에 지금 그 어르신을 만나기가 껄끄러운 모양이야….
……하아, 방금 그 말은 잊어 줘. 셀몬이 들으면 또 자기를 존중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테니까.
안녕하세요……
어, 모란? 날도 어두워졌는데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야? 아직 등불이 있으니까 바래다 줄게……
고마워요, 하지만 이젠 어두운 길엔 익숙해졌어요……
…… 저기, 리드 씨 계신가요?
리드 말이야? 혼자서 나갔는데.
리드도 분명 신경 쓰이는 일이 있겠지…… 여기에 오고 난 뒤로, 셀몬도 리드랑 대화하려고 하지 않으니까.
걱정 마, 백파이프가 찾으러 갔으니까.
음…… 다르게 말하자면, 차라리 리드가 우리를 시끄럽다고 느끼는 건 아닐지를 걱정하는 게 좋겠네.
으아, 미안!
……괜찮아.
와, 여기 사람이 있는 줄 몰랐다니. 제대로 못 봤아. 종이 울리면 주위가 대번에 시꺼메져서, 눈알이 좀 지나야 적응된다니.
니라서 다행이다야, 다른 사람이었으믄 부디 켜 넘어졌을 기야.
근데, 오늘은 다들 보초를 안 서기로 했던 거 같은데, 아니나?
난 그냥…… 밖에 앉아 있고 싶었을 뿐이야.
야, 건초 냄새가 좋다야, 맞나?
……건초?
응, 저기 건초 더미. 오랫동안 이런 냄새를 맡아본 적이 없어서, 제대로 맡아볼려고 뛰쳐나왔다니.
예전에 군사 학교 시험 준비를 하고 있을 때였나, 이론 공부를 하다 머리가 아파오면 건초더미를 찾아서 누웠 버렸아. 그럼 다 좋아졌다니.
하지만 엄마는 내가 게으름 피운다고 했다니. 문제를 생각하는 게 힘들다고 포기하면 안 된다고 했었아…… 근데 머릿속에 뭐가 너무 많아 버리면, 그게 힘들어져 버린다니.
……맞아.
그럼, 손 좀 줘보라니?
어……
자자, 같이 누워 봐! 잠깐이면 된다니!
난 생각하는 건 잘 못해서 도움은 못 되겠지만서도, 건초 더미는 분명 도움이 될 거라니!
햐~!
백파이프는 풀더미에 누워서, 방금 전에 농가에서 배워 온 노래를 흥얼거렸다.
따뜻한 밤바람이 불어오자, 리드는 백파이프의 말에 따라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하지만 그녀가 맡게 된 것은 건초 향이 아닌, 축축한 진흙과 먼지 냄새뿐이었다.
삼 년 동안 집에 안 들어갔다는 사실을 떠올리자니, 느낌이 이상하다야.
생각을 좀 해 봐라. 밭을 갈거나 벼를 베거나 하는 중요한 일들이 날 기다리고 있다니…… 근데 일 년 동안 집에 안 들어가잖아? 그럼 이 모든 일들을 한 번씩 놓쳐 버리는 거라니.
그리고 집으로 온 편지들도, 다음에 로도스 아일랜드에 돌아가고 나서야 받아 볼 수 있는 거라니.
집이…… 그리운 거야?
당연하지. 니는? 넌 힐록 카운티 사람 맞나?
……아니.
하지만 예전엔 힐록 카운티랑 비슷한 도시에서 살았어…… 짙은 빨간색의 벽돌, 회색 보행 도로와 이, 삼 층 높이의 집, 그리고 창밖으로 뻗은 꽃 덩굴들.
난…… 평온했던 그 시간들이 그리워.
그때 집에 오래된 책들이 많았는데, 어떤 건 필사본이기도 했어. 난 언제나 서재로 숨어든 다음 문을 잠갔었어. 그러면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아도 됐으니까.
아, 집에 사람이 너무 많아서 시끄러웠나? 아니면은 손님들이 자주 왔나?
……아니, 그런 건 괜찮았어. 그냥 숨어 있으면 많은 문제들을 피해 갈 수 있어서 그랬던 것뿐이야.
서재에 있는 창문으로 내려다보면 거리가 눈에 들어왔고, 그곳을 통해 부모님이 일을 끝내고 돌아오는 모습을 지켜봤었어.
만일 가능하다면, 꼭 다시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아, 설마 그곳은 이미……
맞아.
미안…… 내가 괴로운 기억을 떠올리게 했나.
괜찮아, 이미 오래전 일이니까.
나랑, 생활이 무너져 버린 힐록 카운티의 일반인들, 그리고 눈앞의 거처를 포기하고 도망쳐 나온 사람들은 모두 다르지 않을 거야.
다들 이곳에서 다시 안주할 수 있겠지, 집도 새로 짓고…… 하지만, 그 사람들의 고향은 과연 어디일까?
그리고 더 멀리 떠나야만 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은 또 어디까지 도망쳐야만 하는 걸까?
음…… 그런 문제는 혼자 생각한다고 답이 나오진 않을 것 같은데, 맞나?
응……
그래도 그게 소용없다는 말은 아니라니!
혼자 답을 낼 수 없다믄, 같이 생각해 보면 된다니. 나도 답을 모르는 문제를 만나면 첸 햇아를 귀찮게 했었아.
그리고 나중엔 항상 대장을 물고 늘어졌아…… 첸 햇아는 내가 귀찮게 군다고 했지만, 항상 나랑 얘기해 주고, 또 문제를 해결해 줬아.
니는? 니한테도 마음속 이야기를 터놓을 상대가 있나? 예를 들면 자매라든가, 친구라든가, 전우라든가……
……
나에겐…… 언니가 있어.
하지만……
사이가 별로드나?
……아니, 이런 건 말하면 안 되는데……
사실 셀몬이 했던 말 중에도 맞는 게 있아, 너는 습관적으로 안 된다는 말을 너무 많이 한다니.
근데, 그 말도 또 잘못된 게, 니는 니랑 관련된 얘기를 할 때만 “아니”라는 말을 많이 한다니. 마치…… 음,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무언가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것만 같다니.
……누군가 나한테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었어.
에에, 진짜나?
그 사람은…… 나를 살렸어. 나한테 그랬었지. 죽으려고 하지 않아도, 원래의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아웃캐스트구나, 그 사람 말투잖아.
정말 후회가 돼…… 그 사람이랑 더 많은 얘기를 나누지 못했던 게.
그 사람한테 묻고 싶어, 왜 나를 살렸는지.
그 사람은…… 내게서 무얼 본 걸까?
하아, 나도 그 사람이 뭐라고 대답했을진 모르겠다니.
근데 리드, 그 사람한테 묻기 전에, 너 자신한테는 물어봤아? 넌 자신으로부터 뭔갈 발견한 거나?
나…… 자신?
아, 누군가 나왔아.
더듬거리는 모습을 보니, 모란인 것 같아…… 모란은 밤이 되면 눈이 안 보이거든.
와, 근데 어떻게 혼자 나왔나.
모란! 뭐 도와줄 일 있아?
아, 일단 거기 서 있어 봐, 우리가 갈 테니.
……고마워요.
저기, 리드 씨는 어디 있나요? 밖으로 나가셨다고 들었는데.
여기 있어.
……미안해요. 혹시, 저도 같이 가도 될까요?
어디든 괜찮아요. 전 아직 기운이 있고, 일도 할 수 있고…… 싸울 수도 있어요.
……
싸우고…… 싶어?
네. 다들 저 보고 얼마 못 살 거라고들 해요, 그냥 조용히 죽어갈 수밖에 없을 거라고요.
하지만 전 그러고 싶지 않아요.
“만일 네가 타라인으로 살아가고 싶다면, 작업장을 바꾸고 더 낮은 급여를 받아들여라”, “만일 네가 광석병에 걸리고도 살아가고 싶다면, 여길 떠나 감염자 구역으로 가라”……
더 이상, 이런 말들은 듣고 싶지 않아요.
리드 씨, 예전의 저라면 이런 생각은 하지 않았을 거예요. 하지만 당신을 만났죠.
그 사람들이 말해 줬어요, 당신도 감염자라고요. 당신이 셀몬과 다른 사람들을 설득해서, 우리를 이곳으로 데려왔다고 하더군요.
너도…… 핀처럼, 나를 믿는 거야?
부담 가지진 말아 주세요, 저는…… 짐이 되고 싶지는 않아요. 그 누구에게도요.
전 단지 뭐라도 하고 싶을 뿐이에요, 뭐든지요. 저 같은 사람은, 더 이상 잃을 게 없으니까요.
만약 제가 다른 타라인들에게 뭔가를 해 줄 수 있다면, 그러고 싶어요. 제 다리가 아직 앞으로 나아갈 수만 있다면, 당신들과 함께 걷고 싶어요.
……
괜찮겠다야. 리드, 일단 같이 가 보자니. 어때, 괜찮나?
붉은 머리의 와이번에게 있어서, 이것은 어쩌면 리드가 대답해야 할 문제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질문에 대한 답이 나오기도 전에, 그녀는 리드를 이끌고 앞으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리드는 뒤돌아 다른 사람도 보았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모란에게는 야맹증이 있고, 밤이 되면 누군가 길을 안내해 줘야 한다는 사실을.
머뭇거릴 틈도 없이 리드는 모란에게 손을 내밀었다.
……같이 가.
아르모니 씨, 드디어 오셨군요. 오늘은 뵙지 못하게 되는 줄만 알았습니다.
자작님의 파티인데, 어떻게 놓칠 수가 있겠어요?
그럼요, 그럼요. 당신은 트렌트 후작님의 친구이자, 자작님의 귀빈인걸요.
당신의 소개 덕분에 일전의 거래가 성사됐었지요. 감사의 말을 전할 기회를 찾고 있었습니다.
별말씀을요, 할 씨.
저는 귀족 신분도 아니고 큰 자신을 소유한 것도 아닌지라, 대단하신 분들을 위해서 다리 역할 정도만 하고 있을 뿐이랍니다.
(잔을 들어 올린다)
저분은……
시정 부서의 유명인, 피셔 씨입니다.
음? 처음 들어 보는 것 같은데요.
피셔 씨는 이쪽 구역에 부임한 지 얼마 안 되었습니다. 저런 젊은 분들이 고속 승진을 하려면, 아무래도 더욱 노력이 필요하겠죠.
하하, 그건 누구나 마찬가지 아닌가요?
겸손하시군요.
참, 제 친구들에게 듣기론, 최근 대공작들께서 군대를 빈번하게 움직인다고 합니다. 각 대공작령의 주요 도시들은 이미 계엄 상태라고 하더군요.
당신은 소식에 유난히 빠르니…… 혹시 조만간 전쟁이 나는 것은 아닌지, 살짝 귀띔해 주실 수 있을까요?
신문에서는 모두 그렇게 예측하고 있겠죠? 아무래도 공작님들의 함대가 이미 런디니움 성벽 앞에 가 있으니 말이에요.
저는 살카즈에 대해선 크게 관심이 없습니다. 제 말은 대공작들 간에…… 흠, 저도 그냥 들은 것뿐입니다만.
최근 많은 오리지늄 연료가 트렌트 카운티로 흘러 들어가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후작님과 캐스터 공작은 사이가 좋죠, 하지만 트렌트 카운티와 철의 공작 영토는 인접해 있어서……
참, 할 씨. 도시 간 연료 거래는 반드시 허가를 받아야만 하니, 당신은 분명 시정 부서에 좋은 친구가 있겠네요. 그렇죠?
하…… 하하, 다 장사를 위한 것이죠.
아르모니 씨, 비록 당신은 전쟁에 큰 흥미가 없으시겠지만…… 당신은 다른 도시에서 온 거죠?
다행히 오면서 큰 트러블은 없었겠지만, 돌아갈 땐 그래도 조심하셔야만 합니다.
제가 듣기론 이동도시 밖의 마을들은 혼란스러운 상황이기에, 시도 때도 없이 반란 분자들이 출몰한다는군요. 며칠 전에는 누군가 방화도 했다더라고요.
어떤 반란 분자들이길래, 당신이 신경을 쓰시는 거죠?
딱히 신경이랄 것까지는 없습니다. 촌뜨기들이 출몰하는 곳에서는, 그런 비슷한 일들이 많이 발생하니까요.
이상한 건 그 불입니다…… 하하, 진짜가 아닐 수도 있겠지만, 그냥 시골에서 떠도는 신기한 소문인 셈 치고 들어 보세요.
목격자에 의하면, 그 불은 일반적인 불과는 다르다고 합니다. 위력은 폭발적이지만, 현장에선 오리지늄의 폭발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고 해요. 그런데도 불은 끄는 것이 지극히 어려웠다고 하니……
……
특별한 불.
우연일 가능성이 높지만, 그녀에겐 이러한 묘사가 익숙했다.
설마…… 로흐시니?
아르모니는 의아했다.
'교관'의 일침은 확실히 그녀의 마음 깊은 곳에 있던 우려를 일깨웠다. 로도스 아일랜드라고 하는 함선이 빅토리아에 들어온 그날부터, 그녀는 한동안 로흐시니의 소식을 듣지 못했었다.
의심할 여지 없이, 분명 누군가가 로도스 아일랜드를 도와 행적을 감춰 주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 제약회사는 그녀가 처음 생각했던 것처럼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이 의미하는 건, 현재 로도스 아일랜드에 몸을 담고 있는 로흐시니가 쉽게 빅토리아의 다른 세력들에게 발각되지 않을 것이란 얘기였다.
하지만 어째서…… 로흐시니가 그 함선을 떠난 걸까?
어째서 그녀가 에블라나와 이렇게 가까운 곳에 출현한 것일까?
아르모니의 등 뒤로, 한 줄기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아르모니가 연회장에 들어선 순간부터,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은 자연스럽게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이 되어서야, 그 시선들이 진정으로 그녀를 향해 집중된 것이다.
아르모니 씨?
……음?
미안해요…… 잠깐 저녁 무도회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어요. 전 어떤 색의 귀걸이를 차는 편이 좋을까요?
……관련 서류와 제 모든 보고는 이미 보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전 즉시 행동을 개시할 것을 건의합니다……
잘했네, 젊은이. 혹시 긴 테이블 위에 있는 위스키 초콜릿은 맛보았나?
……!
……안녕하십니까, 캐스터 공작님. 이 연회에 왕림하실 줄 몰랐습니다, 게다가 여기서 기다리고 계실 줄은 더더욱이요.
이런 성대한 연회를 누가 놓치겠나? 그저 옆방에서 실내악단의 연주를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시원해지더군.
자네도 즐길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저는…… 임무가 있는 몸이라, 방심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노력은, 결국 사람들이 편안한 삶을 즐기도록 하기 위해서야.
정보원은 파수꾼으로서, 평화로운 시대에서도 긴장을 늦출 수 없겠지만, 언젠간 편안해질 날이 올 거야.
그러고 보니, 몸은 좀 어떤가?
……공작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저처럼 평범한 정보원의 감염 상황까지 신경 쓰고 계실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저는……
긴장하지 마, 자네는 숨기는 게 없을 테니까. 방금 내가 말했던 것처럼, 잘해주고 있어.
이번 임무가 끝나면, 상으로 승진을 원하나, 아니면 은퇴를 원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