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5보잘것없는 산
무슨 이유에서인지 낮과 밤의 흐름이 정상으로 돌아왔고, 더 이상 햇빛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 묵량도 무자비한 살생을 감행하게 되었다. 라바 일행은 온 힘을 다해 마을 사람들을 보호하고, 우요우 역시 예상 밖의 무술 실력을 뽐냈지만 여전히 역부족이었다.
연기는 도시가 흘리는 피다.
난 윤곽이 희미하게 사라져 조각 같은 얼룩만을 깔끔하게 하늘에 남긴 달과, 찢긴 경계를 따라 흘러들어 하늘을 온통 물들인 달빛을 본 적이 있다.
난 내가 사랑하는 고향이 화마에 삼켜지던 것을 본 적이 있다. 난 산을 넘고 강을 건너야 했으며, 세상의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걸어야만 했다.
난 굶주린 이재민들이 서로를 잡아먹는 걸 본 적이 있다. 선혈이 낭자한 살육이 벌어지고 있어도, 손만 뻗어도 닿을 수 있는 거리에서조차, 사람들은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앞만 보고, 지나쳐 갔다.
난 그 기나긴 길을 본 적이 있다. 난 왜 모든 사람이 같은 길을 선택하는지 궁금했던 적이 있었다. 방법은 달라도 어차피 우린 무감각 속에서 이미 정해져 있는 죽음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갈 뿐인 것을.
난 황량한 사막과 아름다운 산천도, 비틀거림 끝에 결국 다시 일어나지 못한 친구도, 그리고 비록 순간이었지만 자신을 포기하려고 하던 부모님의 눈빛을 본 적도 있다.
……난 당신을 본 적이 있다.
난 당신을 알고 있다.
당신의 눈. 아득한 위를 바라보며 얼음처럼 차갑고 고독을 품은 당신의 그 눈.
재앙보다 부모의 버림과 기아와 죽음에 허덕이는 내가 더 안쓰럽다. 더할 수 없는 안쓰러움이다.
당신은 나를 바라보는 것인가? 아니면, 당신 자신을 보는 것인가?
나는 당신에게 이런 질문을 했었지.
오지 마! 다가오지 마!
저, 저 녀석이 내 손을 뜯어먹었어. 하, 하하, 그런데 왜 조금도 아프지가 않지, 난……
크아!
으윽…… 저리 가!
괜찮은 거야?
왜 이렇게 늦게 온 거야!! 왜 아무도 종을 치지 않았지?! 그 종치기 스님은 어디 간 거야!?
당신들을 믿고 시키는 대로 다 했는데, 왜! 왜 내 남편이 죽은 거야! 어떻게 책임질 거야, 어떻게 책임질 거냐고!!
……일단 여기부터 벗어난 뒤 다시 이야기하지.
우아앙…… 엄마, 엄마, 엄마를 돌려줘!
크아!
어이쿠! 이번에도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네!
아, 아저씨, 엄마, 엄마……
크아!
바깥에 꽤 큰 놈이 있는 것 같으니 이 작은 놈은 일단 신경 쓰지 말고, 꼬마 아가씨, 잘 잡아. 우린 도망갈 거니까!
크아……! 크아!
또 있어?!
도, 도무지 끝이 나질 않는군!
크아……!
크!
도대체 어디에서 튀어나오는 거야……!
안 되겠어, 도저히 막아낼 수 없는 수야……
크……?
그림 속 동물이라도 모조리 없애 버릴 필요는 없잖소…… 이런 광경은, 보고만 있어도 괴로운 법이오.
여긴 소승이 보고 있을 테니, 라바 시주께선 어서 다른 사람을 대피시키시오.
너……
소승은 걱정하지 마시오, 소승은 몇 년 동안 이곳을 돌아다녔잖소. 비록 미래의 일에 대해 생각은 많지만, 걱정만 할 수는 없지 않소이까……
……소승은 단 한순간도, 눈 앞에 펼쳐진 일 때문에 낙담한 적이 없소.
여긴, 소승에게 맡겨 주시오.
……응. 계속 동쪽으로 갈 테니까, 끝나면 우릴 찾아와 합류해.
알겠소!
크아!!
소승이 여기 있는 한, 한 걸음도 앞으로 갈 수 없소이다!
!?
이 경계를 넘는 자는, 참형에 처하겠소.
으아악……
아야! 꼬마 아가씨! 내 머리 좀 그만 잡아당겨!
엄마…… 엄마……
크아!
이 녀석은 크아 밖에 할 줄 모르나. 이렇게 쫓아다니기는 잘하면서, 사람 말은 할 줄 모르는 거냐?!
크……
……도망…… 치지 마……
으악 깜짝이야! 농담이야. 그러지 마, 그럴 필욘 없어……!
흐흑…… 아저씨! 아, 앞에!
어?
꺄아!
다, 당신은 그 점쟁이……? 다른 두 영웅은 어디 있죠?
당신 뒤, 뒤에!
크아!
왜 저놈들을 끌어들인 거예요! 어서 방법을 생각해 봐요…… 어서요!
에에?! 내가?!!
당신이 저놈들의 주의를, 주의를 좀 끌어봐요!
아니…… 나도……
흐아아앙…… 으아앙…… 엄마, 엄마……
……
아이고, 그만! 그만 좀 울라고! 이 꼬마야! 그만 울어!
앗! 저 녀석들이 이쪽을 봤어! 어서 가, 어서 도망가……
크아아아!
어……?
부, 부채로?
……멀리 떨어져 숨어 있어.
크오? 크아……
한 방에……?!
크엉?!
대, 대단해……
……
아야야…… 아파 죽겠네…… 이 녀석들은 도대체 뭐야, 보기엔 말랑말랑한데, 때려보니 왜 이렇게 단단한 거지?
어허…… 그렇게 보지 마.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 속담도 있잖아? 우린 그냥 빨리 도망치는 게 좋겠어!
크엇……
!?
흐음~ 방금 공격은 괜찮았는데, 우요우 너~ 이런 상황에서 사람 구해본 적 없지?
눈앞의 적만 해결하고 다각도로 상황을 신경 쓰지 않으면, 언젠간 손해를 보게 될 거야~
아, 아하하…… 좀 전엔 정말 위험했습니다! 은인님 덕분에 무사할 수 있었네요.
……됐으니까 어서 남은 사람들 데리고 피해~
은, 은인님은요?
나? 난 괜찮아~ 난 발걸음이 가벼워서 저 녀석들이 날 찾아내지 못할걸?
(그 실력은, 발걸음이 가볍다는 거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데!?)
이제…… 어떻게 해야 이 묵량들의 수를 빠르게 줄일 수 있으려나……
어어?! 저, 정원의 불빛은 대체 뭐지?
오오! 하늘로 치솟는 불길이라니, 정말 장관이오!
음? 설마 '라바'라는 이름이 여기에서 비롯된 건가?
……
라바~
……근처에 있는 모든 적의 분포 범위 좀 확인해 줘.
이렇게 큰 전장에서?
여태껏 주변 건물에까지 미칠 여파 때문에 아츠를 쓰지 못했는데……
……적이 너무 많아서 이렇게 어정쩡하게 대처하다간, 피해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질지도 몰라.
알았어. 특수한 상황엔 특수한 수단을 써야지~
네가 안심하고 아츠를 쓸 수 있도록, 내가 높은 곳을 찾아볼게.
아츠 범위를 벗어난 적은 내가 처리할게. 한 놈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좋아.
일이 끝나면 임무 보고서는 내가 제출할게…… 로도스 아일랜드가 도울 일은 감염자만 있는 게 아니니까.
감염자……?
왜 그래?
응…… 아무것도 아냐. 그전에, 라바.
혹시 자산 선생 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