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4전당포 사장
묵량의 말까지도 알아듣는 객승 사가의 실력에 라바는 당혹스러워하지만, 이내 사가와 함께 전장을 정리한 뒤, 어느 스산한 전당포에 도착하게 된다.
남은 사람 있어?! 어서 선생님 계신 곳으로 가서 숨어!
동쪽으로, 어서!
……하늘색을 유심히 보다 알게 됐어, 여긴 정말 서쪽으로 갈수록 밤에 가까워진단 걸 말이야……
그렇다면, 우린 지금 '정오에서 황혼을 향해 가는 중'인가요? 꽤 시적이네요.
아니야…… 이 '낮부터 밤까지'의 거리가 너무 짧아. 우리 이제 고작 몇 걸음 걸었지?
그림의 길이는 때때로 바뀌고, 곳곳의 경치는 괴상해진다오. 그림 속 사람은 자신의 세상에서 규칙을 하나 찾았으나, 결국 거짓이었소. 이것 역시 어쩔 수 없는 일이라오.
그래서 내 말이…… 잠깐, 뭐라고?
네?
방금 뭐라……
으아아악……!
……! 아직 여길 못 빠져나간 사람이 있었어?!
이쪽이오!
살, 살려줘!
걱정 마오. 소승이 가겠소!
크어어……
흠, 역시, 칼로 베면 먹물 흔적이 된단 말이지. 참 괴상하오.
스님, 대단한데!
방심해서는 아니 되오. 낭자, 어서 동쪽으로 가시오!
아, 네! 여러분도 조심하세요!
……아직 도주하지 못한 마을 사람들이 꽤 있는 것 같아.
너무 갑작스러워서 대응이 늦었을 수도 있소……
아빠? 엄마?
저, 저쪽에 아이가!
이런…… 어서 엎드리시오!
너무 늦었어!
엉엉…… 으아앙……
아!
이거 이거,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네!
다치지는 않았니?
흐아아앙…… 응…… 흐흑……
방금…… 무언가가 저 녀석을 뚫고 지나가지 않았습니까……?
까다로운 각도였는데 저걸 맞추다니, 역시 크루스야.
지, 지금 어디에 있나요?
찾지 마. 못 찾을 거야. 크루스가 주변에 있단 것만 알면 돼. 우선 마을 사람 모두가 이 어둠에서 벗어나도록 해야 해.
허, 호흡이 이렇게 척척 맞다니. 정말 소승의 견문을 크게 넓혀주시는구려.
흐흑…… 흐흑……
그, 그런데 우리 이 여자아이를 데리고 갈 건가요?
……먼저 이 아이를 여기서 데리고 나가 안전한 곳으로 데려다줘. 할 수 있지?
물론이죠! 당연한 말씀을!
하지만…… 전 도저히 은인님을 두고 혼자 도망치진 못하겠습니다! 은인님 곁에서 함께 정의를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없다니, 정말 아쉽군요……
그럼 이 아이를 자산 선생에게 데려다준 다음에 다시 우릴 찾아오면 되잖아.
아하하…… 아…… 듣고 보니 확실히……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꼬마 아가씨, 오빠랑 같이 갈까?
흐흑…… 흐아아앙…… 아저씨, 우리 엄마 못 봤어?…… 흐흑……
오빠가 네 엄마 찾아 줄게, 어때?
흑…… 응…… 고마워, 아저씨……
크흠…… 은인님, 그럼 전 먼저 가보겠습니다.
어.
……
선생님, 사가와 그 영웅 세 분만으로도 싸움이 될까요?
……
선생님?
……괜찮을 걸세.
어찌 된 일이지? 선생님께서 오늘 기분이 안 좋으신 것 같은데? 어제 못 주무셨나?
선생님께선 온화하고 점잖은 분이셔. 변덕스러운 사람과는 달라.
분명히 선생님께선 우릴 걱정하느라 피곤하신 걸 거야. 선생님께서 좀 더 주무실 수 있게 해드려야겠어.
육근청정!
크아!
번뇌를 베어버리겠다!
크으아!
유부튀김!
크, 크엉?
꽤…… 꽤 대단한데.
소승은 어려서부터 절에서 자라면서, 어깨너머로 조금 배웠을 뿐이오.
이게 조금이라고?
신경 쓰지 마시오. 소승이 라바 시주를 위해 길을 열어 드릴 터이니!
크…… 크아!
저 괴물이 널 무서워하기 시작했어…… 그 말은 곧, 묵량도 지능이 있단 말인가?
크! 크아! 크아크아!
오?
왜 멈춘 거야?
크, 크아아, 크아크아……
어, 그래, 그래……
어?! 너, 저 녀석의 말을 알아듣는구나?!
조금은 알아듣소. 저 묵량은 잘못한 게 없고, 진심으로 뉘우치고 있다 하오. 다시는 마을에 침입하지 않겠다고 하니, 이만 놔줘도 될 것 같소.
크아!
……그래도 될까?
문제없소. 소승이 잘 처리할 것이오.
크……
이제 좀 조용해진 것 같군…… 여긴 남아 있는 마을 사람이 없을 거야. 이제 우리 이야기 좀 해볼까?
시주께선 매우 심각해 보이시구려. 소승이 무슨 잘못이라도 했소?
그건 아냐. 다만 방금 네가 말한…… 그림? 그것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 같아서.
그야 물론이오. 소승이 이곳을 떠돈지도 시간이 꽤나 흘렀으니.
이곳은 떠돌만한 곳이 없어 보이는데.
한 장의 그림이 크면 얼마나 크겠소?
무슨 뜻이야…… 우리가 그림 안에 있단 거야?
그렇다오.
……도대체 무슨 소리야?
아, 알겠소. 시주께서도 소승처럼 이 중산하에 잘못 들어오셨구려……
뭐?
당시 소승은 염국 구오의 경계를 지나치던 도중 기발한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가, 대가의 후손을 찾아갔다오.
그러다 회제산 폭포 아래에서 더할 나위 없는 절경을 발견하곤 산속의 초가집에서 하룻밤을 묵기로 했다오. 하지만 눈을 떠보니 이미 이곳에 와 있는 게 아니겠소.
자, 잠깐, 무슨 말이야, 너도 그 '시'를 찾아온 것이야?
……'시'? 소승은 그런 이름은 들어보지 못했다오……
소승이 찾는 건, '한 획으로 보잘것없는 산을 살리고, 작품 곳곳에 풍류가 넘치는' 염국의 화가라오.
하지만 시간을 계산해 보면, 그 화가는 이미 세상을 떠났을 것 같으니 생가라도 찾아가 보려 한 것이오.
어쨌든 너도 염국 구오의 회제산을 갔다가 영문도 모르고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이거지?!
아, 그렇긴 하오만, 시주께서는 어찌 그리 흥분하시오?
그리고 여긴 그림 속이라는 거고……
세상사 모두 이치에 맞지 않는단 걸, 라바 시주께서는 아직 깨닫지 못하셨소?
그건 나도 알아. 하지만 어떻게 그림 속에……?
소승도 뭐라고 말하기는 어렵다오. 다만, 이 파산 마을을 소승이 두루 돌아다녀 보니…… 크기가 대략 백여 폭 정도 되었소! 그래서 적어도 소승이 어디에 있는지는 잘 알고 있다오.
하지만…… 그 사람들은 멀쩡히 살아 있었어. 차에서도 향이 났고, 과일도 먹을 수 있었고……
단순한 아츠의 결과물일까? 하지만 이것이 아츠의 결과물이라면…… 이건 도대체 어떤……
소승 역시 갈피를 못 잡겠소. 운 좋게 이 세상의 진실을 얼핏 볼 기회가 없었더라면, 소승 역시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했을 것이오.
이곳은 재앙도 없고, 모든 생명체가 자신만의 규율을 따르고 있어 일정한 규칙을 이루고 있는 모습이 이루 말할 수 없이 훌륭하다오. 그런 연유로 소승은 이곳에 남아 편안히 지내고 싶은 마음을 먹은 적도 있었소.
그건……
하하, 시주께서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으시는 건 당연한 것이오. 소승이 석아를 처음 봤을 때도 시주님 같은 표정이었으니 말이오……
잠깐…… 누굴 만났다고?!
소승이 만난 건…… 잠깐, 저 등불. 저건 설마 주인장의 전당포 아니던가? 아직 도망치지 않았다니!
기다려!
……
크오……
……알았어, 알겠으니까 그렇게 흥분하지 말라고.
그러게 왜 사람들을 놀라게 했어? 그 여자가 뭐라고 말했기에?
아…… 그런 거였나…… 여전하네.
주인장!
……가.
크……
주인장, 괜찮소?
난 괜찮아…… 이분이 그?
맞소, 이분이 바로 라바, 일전에 떠들썩하게 했던 외지인이오.
만나서 반갑습니다.
이쪽은 이 전당포의 주인장이오. 이름은 '라이', 여명 할 때 '여'자를 쓴다오.
……혹시 이상한 물건에 습격을 받지 않았나?
아뇨, 본 적 없어요.
……
묵량들이 다시 돌아올지 모르니, 저희가 이곳에 숨어 좀 지켜봐도 되겠소?
……그래,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