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2묵량
따로따로 움직여 마을에서 단서를 끌어모아 돌파구를 찾기로 한 라바, 크루스, 그리고 우요우는 '묵량'이라고 불리는 괴물의 습격을 다시 맞닥뜨리게 되는데……
……화룡점정이라, 그림이란 생동감을 주는 마지막 한 획이 가장 어려운 법이지요. '쉬' 씨 성을 가진 어느 부인은 오랫동안 고심했지만, 끝끝내 마지막 획을 긋지 못했습니다.
경거망동하지 않고 심란해진 마음을 전환하기 위해 거리로 나선 쉬 씨 부인은, 마침 거리에서 백정 하나가 살찐 새 한 마리를 가둔 새장을 옆에 끼고 소리치고 있는 걸 듣게 되었답니다.
쉬 씨 부인은 그 새를 한참 동안 쳐다보았습니다.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그 새는 왕래하는 행인을 멍하니 주시하기만 할 뿐, 소란을 피우지 않았지요.
가만히 보고 있던 쉬 씨 부인은, 자신도 모르게 만약 자신이 저 새라면, 무슨 생각을 할까 하고 상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오가는 것은 모두 이해할 수 없는 생물들이고, 푸른 초원과 강가는 저 멀리 있으며, 자신이 속하지 않는 이 황야에서 혈혈단신의 몸……
운명을 더 이상 논할 수 없는 범주에 있는 그 새는 성대한 해탈만을 바랄 수밖에 없었을 터……
무력함과 무감각만으로는 형용할 수 없는 그 느낌…… 쉬 씨 부인은 자신도 모르게 몇 걸음 다가가자, 그 이상한 눈빛에 홀린 듯 그 새도 쉬 부인을 향해 눈을 돌렸습니다.
그 찰나의 순간, 쉬 씨 부인은 그 어떤 강렬한 기법이나 희소한 색채도 전혀 필요치 않으며, 그림을 구매하는 귀족들의 마음 또한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성공과 실패, 이득과 손실에 대한 답을 쉬 씨 부인은 도살을 기다리는 새의 눈에서 모두 찾아낸 겁니다.
쉬 씨 부인은 돈을 내고 그 새를 사서 자기 집 정원 작은 못에서 기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바로 붓을 들어 마지막 획을 그을 수 있었습니다. 어떤 일은 시간이 해결해준다고들 하지요, 쉬 씨 부인에겐 더 이상 막힘이 없었습니다.
다음 날, 쉬 씨 부인은 그 미인도를 순조롭게 완성했고, 고관과 귀인의 극찬을 받았습니다.
허나, 금은보화를 잔뜩 안고 집에 돌아오던 쉬 씨 부인은 어쩐지 마지막 한 획 외에도 아직 무언가 부족하단 생각에 허전함을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쉬 씨 부인이 문을 열었을 때 연못에 뛰어드는 그 새를 보고 문득 깨닫기 전까진 말이죠.
쉬 씨 부인은 본래 자신이 출세하여 속박의 굴레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했으나, 단지 헤엄을 치는 연못이 바뀌었을 뿐, 자유로워진 게 아니란 걸 깨달은 겁니다……
지금의 쉬 씨 부인은 더이상 그때의 의기양양한 젊은 여자가 아니었습니다.
수십 년간의 작품 활동을 통해 부인은 부와 명성을 모두 쌓았지만, 일찍이 남편을 떠나보내고, 항시 남의 눈치를 보며 살고 있는 부인에게, 이 세상의 어느 누가 마지막 한 획을 그어 다시 들판으로 돌려보낼 수 있을까요?
그날 저녁 쉬 씨 부인 저택으로 돌아온 건 금은보화를 잔뜩 실은 수레들뿐이었습니다.
이후 강제 관내에서 쉬 씨 부인을 보았다는 소문도 있었지만, 그날 이후 '당대 제일'의 여류 화가는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로부터 20년 후, 석성의 귀족들 사이에서 쉬 씨 부인의 절필 작품이라는 그림이 떠돌기 시작했습니다.
세상 사람들 대부분이 가짜라고 여겼습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쉬 씨 부인의 초기 화풍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이지요. 그림 속에는 여백이 많았고, 죽은 듯 보이는 새 한 마리만 그려져 있었습니다.
수많은 평론가들은 당시 이렇게 생각했다 합니다. 같은 영모화라고 해도, 당대의 대가들이 그렸던 새나 짐승들은 그 모습이 마치 살아 숨 쉬는 듯하여, 금방이라도 그림에서 뛰쳐나올 것만 같았는데,
하지만 그 그림 속의 새는 그 모습에 조금의 생기조차 느껴지지 않아 위조품이라 여긴 것이지요.
한편, 쉬 씨 부인을 숭배하는 자 중엔 '궤이위'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젊었을 땐 장사 수완이 좋았으나, 지금은 가세가 기울고 가산을 탕진하는 바람에 실의에 빠져 있었지요.
궤이위는 그 그림과 그림 속 새의 눈을 보았는데, 마치 벼락을 맞은 것 같았다 합니다. 몽롱한 상태로 집에 돌아온 그는 오랫동안 제대로 자지도 먹지도 못하다가, 열흘 만에 마음을 다잡고 재기를 다짐하였지요.
……
……세상일이란 건, 어찌 될지 모르는 것입니다.
같은 실의에 빠진 궤이위만이, 죽은 듯 잿빛을 띤 그 짐승의 두 눈에 숨겨져 있는 쉬 씨 부인의 끝없는 갈망과, 그 '그림 속에 갇힌 짐승'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었던 걸지도 모르지요.
산다는 것, 삶이란 이런 것이겠지요.
……선생님께서는 역시 기이한 이야기를 많이 수집하셔서 사람들의 견문을 넓혀 주시는군요.
그런데, 대부분이 염국 화가에 관한 전설 같네요?
그렇습니다. 제 서재에는 아주 많은 서적이 있지요. 여러 가지 야사와 괴담 소설도 적지 않습니다만, 대부분은 역사상 유명한 대화가에 관한 것입니다.
물론, 어떤 연유로 인해 이름이 없거나, 염국의 방대한 역사에 묻힌 작은 인물들의 기록도 있지요.
비록 그들은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지만, 이 세상에 대해 애정 어린 시선을 가지고 있었지요. 누구에 의해 기록되었는지 알 수 없고, 진위도 알 수 없지만 말입니다.
그러고 보니…… 라바 씨께서 친구를 대신해 찾는다는 그분도 화가이지요?
만약 유명한 스승 밑에서 배웠던 적이 있거나, 어느 곳에서 나름 명성이 있었다면, 단서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흠……
자, 여기가 바로 마을의 출구라오.
오호…… 이런 날씨에는 확실히, 등불을 들지 않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것 같군그래!
내 스님께 뭐하나 묻지, 혹시 마을 밖으로 나가보신 적이 있는가?
음? 여러분 모두 밖에서 온 게 아니오?
아하하, 난…… 당시에 만취 상태였는데, 깨어나 보니 저분들과 함께 객잔에 누워있더라고.
그랬군. 마을 서쪽에는 홍동산이 있는데, 이쪽으로 나가서 산길을 따라 몇 리만 가면 도착하는 곳이라오!
홍동산에는 일 년 내내 기이한 괴물이 출몰하니, 소승은 그곳에 함부로 접근하지 않길 권하오!
……괴, 괴물이라면, 그 괴물들 말이지? 스님은 괴물의 정체를 알고 있나?
몇 가지 짐작하는 정도지만, 섣불리 단정 짓긴 힘드오. 소승은 보통 그것들을 '묵량'이라고 부르오.
묵량? 아, 그 녀석들이 전부 먹물 같은 걸로 변해 사라져서 그런가? 정말 딱 맞는 표현인데!
과찬이오. 소승이 어렸을 때 주지 스님께서 해주시는 '묵량' 이야기를 많이 들었는데, 그것이 기억에 남았을 뿐이오.
겸손하기까지 하다니.
이곳 사람들은 묵량이 공격하는 날을 '섣달그믐날'이라고 부르며, 밤을 지새우고 태양에 보호를 구한다오. 이건 소승이 들은 염국의 '섣달그믐날 밤'과는 좀 거리가 있지만……
혹 염국이 땅이 넓고 생산물이 풍부하다 보니, 지역마다 풍속이 다를 수도 있지 않겠소?
아니, 내가 있던 곳에서도 이런 섣달그믐날은 들어본 적이 없어. 묵량 같은 건 더더욱 본 적 없고.
소승도 이곳저곳을 돌아다녀 봤지만, 묵량을 본 적이 손에 꼽는다오. 파산 마을에 온 뒤로도 마찬가지고……
하아! 그럼 우린 정말 운이 없던 거네……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묵량의 습격을 당했으니까…… 금방 끝나서 다행이지, 여기서 끝장날 뻔했다고.
소승은 시주께서 손가락 점만 쳐 봐도 모든 일을 다 알 수 있을 거로 생각했소만.
그럴 리가. 만약 그런 능력이 있었으면 지금 이렇게……
……잠깐, 그 묵량들은 평소에도 홍동산을 벗어나는 일이 있나? 무리를 이탈한 묵량이 우연히 마을에 접근하는 일은?
소승은 한가할 때마다 마을을 산책하오만, 지난번을 제외하고 한 번도 묵량과 마주친 적이 없다오. 그것들은 실로 결속이 단단하더이다.
그 말은 즉, 한 마리와 마주하면 뒤에는 무리가 있다, 이 말인가?
소승은 대개 그럴 거라 생각하오.
그, 그럼 우리도 빨리 도망치는 게 좋을 것 같네……
어? 시주께선 그게 무슨…… 아.
언니, 언니!
어, 또 무슨 일이야~?
아빠가 그러셨는데, 언니는 마을을 도운 영웅이래. 그럼 언닌 분명 엄청 강하겠지?!
흐음~ 영웅이 대단한 사람인가~?
아니야?
영웅은 그냥 다른 사람을 도와주고 싶은 것뿐이야.
그렇구나…… 아, 언니, 저거 봐봐. 저기가 바로 내가 말했던 객잔이야!
이름이…… 취청루야!
……정말 아름다운 염국 글자네~ 읽을 줄 아니?
그러엄!
좋아, 우리 들어가 볼까~?
와, 여기 객실은 우리 집보다 더 환하네!
확실히 나쁘지 않네~
언니 여기서 머무를 거야? 좋겠다!
(장식품…… 책걸상 디자인…… 그리고 글씨 양식 전부 단서니까 모두 기록해 두자……)
어…… 잠깐만……
와! 방금 무슨 소릴 들은 것 같은데……
……종소리야.
스, 스님, 좀만 더 빨리할 수 없을까?
그럴 순 없소이다. 소승은 반드시 종을 열두 번 다 쳐야 하오!
하지만…… 윽…… 방금 뭔가가 지붕 위로 날아가지 않았어?!
이제, 세 번 남았소!
내, 내가 도울게!
하아…… 하루 동안 두 번이나 습격하다니. 왜 이렇게 잦은 걸까요?
'하루 동안'이라면…… 24시간을 말씀하시는 거죠.
낮과 밤이 바뀌지 않는 건 정말 번거롭네요. 늦잠이라도 잤다간 시간을 기억 못 하겠는데요……
하하하, 게으름 피우는 건 좋은 습관이 아니긴 합니다……
그런데, 라바 씨는 정말 침착하시군요. 이전에 저런 괴물들과 맞닥뜨렸을 때도 두려워하지 않으셨겠죠?
……돌발 상황은 항상 많았죠. 선생님께서도 매우 평온해 보이시네요.
우리 머리 위에 내리쬐는 태양을 보시면 알다시피, 저 요물들은 절대 이곳에 올 수 없으니까요.
다친 사람은 없을까요?
피신이 늦으면 부상은 피할 수 없겠지만…… 그로 인해 목숨을 잃지 않는다면, 그것만으로도 다행일 뿐입니다.
……자산 선생님, 제안이 하나 있습니다.
말씀하시지요.
파산 마을이 섣달그믐날을 무사히 넘길 수 있도록 저희가 돕겠습니다. 그 괴물들은 강하지 않으니, 우린 최선을 다해 마을 사람들의 안전을 지키겠습니다.
파산 마을이 안전해지면, 저희가 이곳을 떠날 수 있게 자산 선생님께서 도와주세요.
이곳을 떠난다? 그건 쉬운 일입니다, 허나…… 라바 씨께서는 우리 마을에 이제 막 오셨는데, 정말 우릴 위해 위험을 무릅쓰겠다는 겁니까?
괜찮습니다. 그 괴물들은 그저 무섭게 생겼을 뿐, 그다지 대단하지 않습니다.
……그럼 제가 먼저 파산 마을의 모든 사람을 대신해 라바 씨께 감사드려야겠군요.
은, 은인님!
오오, 시주께서 바로 우요우의 은인 라바 씨구려! 반갑소, 소승은 사가라 하오. 극동에서 왔……
잠깐 잠깐 잠깐! 스님! 자기소개는 나중에! 그 묵량이 지금 마을까지 들이닥쳤다니까!
……묵…… 량?
소승이 그 괴물에게 지어준 이름이오.
묵량…… 묵량이라…… 먹물을 뜻하는 묵에, 이매망량에서 따온 량 자를 쓴다 이건가. 어쨌든 호칭을 통일하는 건 좋은 것이겠지요.
그 묵…… 묵량은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으니 그리 긴장할 것 없어.
오! 기세가 등등하오! 아주 좋소!
은인님, 제 느낌에 이번엔 좀 다른 것 같은데……
어떻게 다른데?
그 녀석들은 그러니까, 그 뭐라 해야 하나, 좀…… 많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