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귀가

귀가

오퍼레이터 레코드브릿지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블레이즈를 따라 빅토리아에 온 싱주의 마음속에선 희비가 교차했다. 그녀에게는 마주할 용기도 필요했지만, 그보다 더 필요한 것은 자신이 무엇을 두려워하는 것인지 분명히 파악하는 것이었다.

등장 오퍼레이터: 싱주, 블레이즈, 블레이즈 디 이그나이팅 스파크


세 마리 눈먼 무스비스트♪ 서쪽으로 뛰고 동쪽으로 뛰네♪

한 마리는 도랑에 빠지고♪ 한 마리는 넘어져 머리를 다쳤네♪

또 다른 한 마리는 헤이♪ 딩가딩가 둥둥♪

빅토리아의 동요는 정말 재밌네요. 당신의…… 저희 어머니는 머리를 다쳐서 피가 나온다는 노래를 불러주시면서 블레이즈 씨를 재웠던 거예요?

더 재미있는 것도 있지만, 지금 상황엔 이게 제일 잘 어울리잖아. 이 3마리 눈먼 무스비스트들이 이리저리 부딪치면서 찾으려는 게 뭔지 알겠어?

네…… 그 아이들도, 엄마를 찾고 있는 거였군요.


빅토리아, 데이웰 타운1103년 3월 22일 오후 6:00 P.M. 맑음

블레이즈

발가락에 잡힌 물집은 괜찮아?

싱주

네. 이렇게 많이 걸어본 적은 처음이지만…… 물집이 터지고 굳은살이 생기면 좀 괜찮아지겠죠.

싱주

여기까지 오는 동안에는 정말 눈먼 무스비스트 같았어요. 이리저리 부딪치고 허둥대는 게 말이죠.

블레이즈

염국을 떠난 것도 처음인데, 테라를 벌써 거의 절반이나 가로질러 왔잖아. 이것만으로도 이미 대단한 거야. 앞으로 몇 번 더 오다 보면 차츰 익숙해질 거야.

싱주

그렇겠죠……

블레이즈

그런데 왜 그렇게 울상이야?

싱주

울상이 아니라요. 그저…… 며칠 전까지만 해도 어머니를 뵙는 일이 아주 멀게만 느껴졌는데, 그게 당장 내일이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거든요.

블레이즈

음……

블레이즈

맞다, 넌 길거리 음식을 제일 좋아했지? 이참에 내가 어릴 때 맛있게 먹었던 것들을 맛보여줄게.

블레이즈

하핫, 맛있는 거 얘기하니까 바로 표정이 풀리네, 너 정말 먹보구나!

싱주

저는 배고픔을 감수하면서 블레이즈 씨와 함께하고 있는 거라고요. 여길 떠난 지 그렇게 오래됐는데, 이곳의 맛있는 것만 기억하는 블레이즈 씨야말로 먹보 아닌가요?

블레이즈

그도 그럴 게, 여길 떠났을 때가 일고여덟 살쯤이었으니까. 어릴 때 가족들 따라 여기저기 이사를 많이 다녔어도, 마을마다 맛있는 건 다 기억하고 있어. 하핫! 하나씩 다 데려가 줄게.

싱주

……이번에 직접 이사를 해 보니, 그때 얼마나 힘드셨을지 조금은 알 것 같아요.

블레이즈

이것 참, 말하다 보니 또 울상이 되려고 하네. 자, 저쪽에 있는 과일 크림 케이크나 먹으러 가자.

블레이즈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매일 들렸던 가게야. 맛은 있는데 양이 좀 적거든. 예전엔 매일 1펜스씩, 2달을 꼬박 모아야 겨우 한 조각을 살 수 있었는데, 한 입 먹으니 바로 없어지는 거 있지.

싱주

그럼 오늘은 사양 마시고 마음껏 드세요. 제가 살게요.

싱주

……

싱주

어?

블레이즈

왜 그래? 지갑이 안 보여? 에이, 설마 영 소저께서 쏘기 싫어서 그러는 건 아니겠지~

싱주

(당황한 기색으로 뒤적거린다)

블레이즈

진정해. 주머니는 다 찾아봤어? 안주머니에 그 볼록한 건 뭐야?

싱주

그건 제 손수건이에요……

블레이즈

잘 생각해 봐. 장거리 버스표를 사고 나서, 지갑을 어디에다 뒀어?

싱주

주머니? 아닌데…… 설마 매표소에 지갑을 두고 왔나? 저…… 전혀 기억이 안 나요.


싱주

여기도 없어요. 방금 갔던 곳들을 다 찾아봤는데, 정말 지갑을 잃어버렸나 봐요!

블레이즈

괜찮아, 집에 도착하면 내가 역에 편지를 써서 물어볼게. 어쩌면 단순히 매표소에 두고 온 걸지도 모르니까, 다시 돌아갈 때는 분명 찾을 수 있을 거야.

싱주

어떻게 괜찮을 수 있겠어요, 그 안엔 내일 차표도 들어있단 말이에요. 차표도 없이, 어떻게 블레이즈 씨 집에 가려고요?

블레이즈

지금 조급해 봐야 소용없어, 고작 지갑을 찾으러 다시 하루를 꼬박 걸어서 역으로 돌아갈 수도 없잖아. 마음 편히 가져, 네 몸이라도 안 잃어버린 게 어디야.

싱주

어째 말 속에…… 뼈가 있는 거 같은데요?

블레이즈

헤헤, 아니야. 그냥 요즘 누가 정신이 없는지, 아침엔 내 클렌징폼으로 양치질하고, 점심엔 포크랑 나이프를 거꾸로 잡더라고……

블레이즈

어이쿠, 말 못 하게 누가 입을 막네. 아직 열 가지는 더 말할 수 있는데!

싱주

지금 농담할 때가 아니라고요! ……애초에 돈을 다 저한테 맡기지 말자고 했잖아요.

블레이즈

그야 네가 나보다 꼼꼼하잖아.

블레이즈

괜찮아…… 그렇게 조급해하지 마, 고작 지갑 좀 잃어버린 게 무슨 대수라고. 여기서 우리 집까진 차로 몇 시간밖에 안 걸리니까, 걸어서도 갈 수 있는 거리야.

싱주

걸어서 간다고요? 이런 낭패가……

싱주

……

블레이즈

(무언가 문득 깨달은 표정)

싱주

아니에요! 전 그저 걱정돼서……

블레이즈

갑자기 배고프네. 염국에 “사람은 밥심이다”라는 말이 있지. 그러니까 일단 밥부터 먹자. 문제야 뭐 어떻게든 해결되겠지.

싱주

지갑도 없는데, 어떻게 해결한다는 거예요……

블레이즈

모든 빅토리아인이 다 부자인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굶어 죽는 사람은 거의 없잖아?

블레이즈

지금 시간이…… 다행이다, 이 시간이면 아직 밥이 있겠네. 가자, 더 늦으면 없어질 거야!

싱주

가자고요? 어디로요?

블레이즈

너한테 진수성찬을 만들어주러!

싱주

앗…… 좀 천천히 가요!


블레이즈

베일리네 가게가 아직 열려 있네, 늦진 않았어!

블레이즈

넌 줄 서고 있어. 난 양이 얼마나 남았는지 확인하러 갈게.

싱주

(작은 목소리로) 식당? 블레이즈 씨…… 저희가 음식을 사 먹을 돈이 대체 어딨다고 그래요?

블레이즈

지금은 안 알려줄래, 네 차례가 되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거야.

싱주는 조마조마해하면서도 줄을 따라 앞으로 이동했고, 이내 좋지 않은 냄새를 맡고 나서야, 앞에 줄을 선 사람이 폐지를 줍는 노숙자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더 앞을 살펴보니 줄을 선 사람들 전부 저마다의 고충이 있어 보였다.

줄을 따라 앞으로 가던 싱주는 한 테이블 위에 수십 개의 도시락이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앞에 서 있던 사람들은 도시락을 받은 뒤 돈을 내지 않고 아무 말 없이 식당을 떠났다.

블레이즈

(빅토리아어) 두 개요,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싱주

(무료 급식이었구나. 어쩐지 블레이즈 씨는 익숙한 것 같네……)


블레이즈

거 봐, 밥 있다고 한 거, 거짓말 아니었지?

블레이즈

다른 곳이면 몰라도, 여기 데이웰 타운은 내가 살던 곳이잖아. 그깟 돈 없는 게 뭐 대수라고, 해결할 방법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조급해하지 마.

싱주

(가볍게 한숨을 쉰다)

블레이즈

자, 그럼 메뉴나 한번 볼까…… 파울비스트 다리 스테이크, 호밀빵…… 그리고 치스티밀크 치즈까지. '말짱 도루묵 세트'는 여전히 이 세 가지 구성이구나.

블레이즈

먹어봐, 네 입맛이 나랑 같은지 한번 봐야겠다.

블레이즈가 음식을 맛있게 먹으며 추억에 잠긴 모습을 보자, 싱주는 절로 호기심이 생겼고, 고개를 숙여 세 가지 음식을 한 입씩 맛보았다.

블레이즈

어때? 뭐가 제일 맛있어?

싱주

다…… 맛있어요.

블레이즈

그치! 특히 이 다리 스테이크 말이야, 위에 붙어 있는 젤라틴이 입에 들어가자마자 녹아내리는 게, 진짜 일품이라니까.

싱주

(약불로 구워낸 다리 스테이크네요. 갓 조리했을 땐 육즙이 흘러내렸을 테지만, 팔고 남은 건 육즙이 식으면서 굳어져, 젤라틴이 되었군요……)

싱주

염국 구오에 수정효육이라는 유명한 요리가 있어요. 젤라틴을 좋아하시면, 다음에 염국에 오실 때 대접할게요.

블레이즈

(한입 가득 음식을 씹으며 고개를 가로젓는다)

블레이즈

(오물오물) 그거랑 달라…… 이 젤라틴을 먹으려면 운이 따라줘야 하거든. 그래서 예상치 못한 즐거움 같은 느낌도 있어.

싱주

운이 따라줘야 먹을 수 있다고요? 그 말은 허탕 칠 때도 있다는 뜻이네요……

블레이즈

그렇진 않아, 식당의 배식 시간을 난 전부 외우고 있거든.

블레이즈

다만 이 가게는 우리 집에서 아주 멀었어. 아빠랑 엄마가 둘 다 야근하고, 다른 식당의 배식이 다 끝났을 때만, 먼 길을 돌아 여기에 왔었지.

블레이즈

밥이야 몇 입 거리도 안 되니까, 집에 도착할 때쯤이면 당연하게도 다시 배가 고파지더라고. 그래서 아빠는 이걸 '말짱 도루묵 세트'라고 부르셨어. 먹으나 마나라면서 말이야, 하하!

싱주

……

싱주

아버지는 원래 그렇게 농담을 좋아하시는 분이셨군요……

빵은 딱딱해서 씹히지도 않고, 치즈는 갈라질 정도로 말라 있었다. 분명 진열장에 며칠은 놓여 있었던 것일 테고, 그마저도 양이 안타까울 정도로 적었다.

계속해서 부모님의 과거를 물어왔었지만, 이 음식들이 입안으로 들어오고 나서야 줄곧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던 장면들이 비로소 선명해졌다.

싱주는 죄책감을 느끼며 손에 든 음식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크게 한입 베어 물더니 순식간에 도시락 하나를 깨끗이 비워버렸다.

그녀는 부모님이 걸었던 길을 따라 걸으며, 눈을 크게 뜨고 그 지난 시간마저 꿰뚫어 보려는 듯, 일찍이 이곳을 거닐던 그들의 생생한 모습을 눈에 담으려 했다.

블레이즈

정말 그립네, 예전에 이 길로 집에 갔었어. 저기는 내가 처음으로 다녔던 초등학교야. 가장 기억에 남는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의 엄마가 매일 교문 앞에서 과일 쿠키를 파셨거든.

블레이즈

난 매일 그 노점 앞으로 달려가서 그 친구한테 말을 걸었어. 그러면서 쿠키 냄새를 조금이라도 더 맡아 보겠다고, 있는 힘껏 콧구멍을 벌리고 있었지.

싱주

풉……

블레이즈

그때 엄마는 염색 공장에서 일하시던 때라, 매일 코를 찌르는 냄새를 풍기며 집으로 돌아오셨거든. 그래서 난 엄마도 쿠키를 팔아보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었지.

싱주

그런 얕은 속셈 정도는 한눈에 간파당하셨겠는데요.

블레이즈

하하, 근데 우리 엄마는 다른 부모님들처럼 아이의 말이라고 해서 그냥 흘리시진 않으셨어. 바로 다음 날 나를 데리고는 그 쿠키 파는 아주머니한테 가셔서, 매주 쿠키가 얼마나 팔리는지 물어보시더라니까.

블레이즈

집에 돌아와서 같이 계산을 해보니까, 쿠키를 파는 것보다 공장에서 일하는 게 매주 5파운드나 더 안정적으로 벌 수 있고, 그 돈이면 쿠키를 엄청나게 살 수 있다는 걸 나도 알게 된 거야.

블레이즈

우리 엄마 대단하지? 아빠처럼 구구절절 설명하기보단, 있는 사실로 설득하는 타입이거든. 그해 생일엔, 쿠키 한 봉지를 선물로 받았어.

싱주는 쿠키 노점 앞에 서 있는 노련하면서도 다정한 어머니의 모습을 상상하며 자신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머릿속에서 그려지는 장면들에 이끌려, 그녀는 어느덧 더 빨리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블레이즈

싱주…… 우리 일단 어디 가서 좀 쉴까? 더 걷다간, 내 뱃속에 있는 저녁밥이 정말 말짱 도루묵이 되어버릴 것 같거든.

싱주

저…… 좀 더 걷고, 좀 더 보고 싶어요.

블레이즈

우리 집에 도착하고 나서, 다시 차 타고 오면 되잖아. 어차피 바로 이웃 마을이니까.

싱주

아니요, 지금…… 더 많이 보고, 더 많이 알고 싶어요. 안 그러면 내일 어머니를 뵈었을 때……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도저히 모를 것 같아서요.

블레이즈

아무거나 얘기하면 되지. 넌 엄마의 친딸이니까, 딸이 엄마를 만나는 건 당연한 일이야. 무슨 시험을 보는 게 아니잖아.

싱주

블레이즈 씨야 어릴 적부터 어머니 곁에서 자랐으니, 저랑은 다르잖아요……

싱주

다르고 말고요. 블레이즈 씨와 어머니는 많은 것들을 함께 겪었으니까요……

싱주는 말을 멈추고는 길 맞은편에 있는 오래된 서점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무언가에 마음이 움직인 것처럼, 그곳을 향해 걸어갔다.

블레이즈

어이, 어디 가는 거야? 천천히 좀 가, 차 조심하고!

블레이즈

오래된 친구…… 서점?


싱주

(책장 사이를 천천히 걷는다)

블레이즈

싱주, 아빠가 이곳에 대해 얘기해준 적 있어?

싱주

그럴 리가요…… 제가 아버지와 나눈 대화는 손에 꼽을 정도인걸요. 그런데 그건 왜 물어보시는 거예요?

블레이즈

그것 참 이상하네……

블레이즈

아니지, 오히려 신기하다고 해야 하나. 잠깐 기다려봐.

싱주

대체 무슨 뜻이에요?

블레이즈는 대답하지 않고, 신이 나서 서점 카운터로 달려가 주인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곳과 어떤 인연이 있는 듯 보였다.

하지만 주인과 대화를 마친 후, 블레이즈는 실망스러운 얼굴을 한 채 싱주를 향해 몸을 돌렸다.

블레이즈

하아, 이 서점의 예전 주인분은 이미 돌아가셨대. 아빠가 예전에…… 그 사람 밑에서 일한 적이 있거든. 아빠는 여기서 물품 정리를 하셨었어.

싱주

여기에서…… 말이에요?

블레이즈

응, 그래서 방금 네가 바로 여기로 걸어가길래, 난 네가 여기를 알고 있는 줄 알았어.

싱주

전 그저…… 여기에 와보고 싶었던 것뿐이었어요.

블레이즈

거봐, 걱정할 게 뭐가 있어. 너랑 아빠는 뭐가 됐던 부녀 사이인 거고, 아빠가 살아계셨다면, 이야깃거리가 끊이질 않았을걸.

블레이즈

엄마는 성격이 더 밝으시니까, 너랑은 분명 이야기가 더 잘 통할 거야.

싱주는 블레이즈를 향해 미소를 지었지만, 그 말에 딱히 위로를 얻지는 못했다. 그녀는 블레이즈에게 보이지 않도록 책장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걷고 또 걷다 보니, 한 줄로 놓여있는 책들에 그녀의 시선이 끌렸다.

싱주

……여기에 염국 책이 있네요?

블레이즈

응! 아빠가 왜 굳이 염색 공장의 일을 그만두고 여기 와서 일했겠어? 그 때문에 엄마가 아빠한테 많이 서운해하셨는데도 말이야.

싱주

책을 보기 위해서인가요?

블레이즈

응. 아빠는 워낙 책 읽는 걸 좋아하셨으니까. 여기에 염국 책이 있다는 걸 아신 뒤로는, 매일 내가 학교 마칠 때마다 데리러 오셨어. 아빠가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날 마중 나온 걸 보면, 날 서점에 데려가려고 하시는구나 알 수 있었지.

블레이즈

근데 난 내심 좋았어. 아빠가 30분 동안 여기에 서서 책을 보시는 동안에는, 아무도 내가 그림책을 보는 걸 방해하지 않았거든.

싱주

예전 주인분은 화도 안 내신 걸 보면, 참 좋은 분이셨나 봐요.

블레이즈

그거야 뭐 어쩔 수 없었을 거야. 다른 손님들도 다 그렇게 보는데, 아빠만 안 된다고 할 순 없었을 테니까.

블레이즈

하루는, 아빠가 책을 읽지 않고 바로 카운터로 가져가셨어. 그러고는 갑자기 빅토리아어를 잊어버린 사람처럼 우물쭈물하시더라고.

블레이즈

옆에서 한참 동안 듣고 나서야 알았지. 아빠가 온갖 정중한 말을 늘어놓은 건, 주인분께 책값을 좀 깎아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였다는걸. 이유는…… 책이 낡았다는 거였지.

블레이즈

그런데, 여기 있는 염국 책들은 애초에 아무도 안 보거든. 그러니까 책이 그렇게 낡아버린 건, 아빠가 매일 들여다봐서란 말이지!

싱주

푸흡……

블레이즈

외국 책이 여기서 확실히 잘 안 팔리긴 했나 봐. 어쨌든 결국 예전 주인분이 허락해 주셨으니까. 그런데 가게를 나오자마자, 아빠가 먼저 나한테 절대 아빠를 따라 해서는 안 된다고 하시더라.

싱주

어머, 일부러 그러신 거예요?

블레이즈

그래서 내가 뭘 따라 하지 말라는 거냐고 물었더니, 아빠는 귀밑이 빨개져선 군자란 어쩌고 저쩌고 한참을 떠드셨는데, 이제는 기억도 안 나. 아무튼 그 일로 마음이 무거우셨는지, 나중엔 여기서 일을 하시더라고.

블레이즈

근데 오히려 일을 하시니까, 아빠가 여기 있는 책들을 더 당당하게 보실 수 있게 된 거 아니겠어? 게다가, 그때 돈을 주고 책을 산 건 엄마한테 비밀로 하셨거든. 그러니까 내가 보기에 아빠는 이 일에서만큼은, 처음부터 끝까지 군자가 아니셨던 거지, 하하!

싱주는 블레이즈가 들려주는 옛날이야기에 푹 빠진 채, 멍하니 그 책장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아버지가 이곳의 몇 안 되는 염국 책들을 소중히 넘겨보는 모습과, 그리고 그런 아버지 곁에서 책 속의 글자들을 하나하나 익히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마치 눈앞에 보이는 것만 같았다.

잠시 후, 이곳은 또 마치 집안의 책상이 된 듯했고, 책 위의 글자들은 아버지가 쓴 유려한 글자들로 변해있었다.

그러나 눈앞의 환영이 흩어지고 나자, 그녀의 손에 들린 것은 그저 생소한 제목의 책과 가지런히 인쇄된 글자들뿐이었다.

싱주

블레이즈 씨! 저…… 어머니께 드릴 책을 한 권 사고 싶어요. 달을 노래한 이 시집이 딱 좋을 것 같아요.

블레이즈

어, 괜찮긴 한데…… 왜 갑자기 책을 사려는 거야? 만날 때 드릴 선물은 이미 준비했잖아?

싱주

그냥 만약에 어머니도 저와 같은 마음이시라면, 아마 이곳에서 산 염국 책을…… 받고 싶어 하실 거 같은 느낌이 들어서요.

싱주는 말하며 당황한 듯 몸 이곳저곳을 뒤적이다가, 이내 망설임 없이 손목의 옥팔찌를 빼내어 카운터로 향했다.

블레이즈

아, 잠깐잠깐잠깐, 그 팔찌면 서점에 있는 책을 통째로 다 살 수 있을 거 같은데?! 그러지 말고, 내…… 음, 이 접이식 칼로 하는 건 어때?

싱주

괜찮아요.

블레이즈

……그렇게 책을 꽉 쥐고 있지 않아도 돼, 표지 다 찢어지겠다.

싱주

정말 괜찮아요, 블레이즈 씨. 이 팔찌는…… 어느 대신이 제 생일 선물로 보내준 거예요. 이제 할아버지께서 몰락하셨으니, 그 사람도 아마 이 팔찌가 알아서 깨지고 없어지길 바라고 있겠죠.

싱주

와서 통역 좀 도와주실래요?


빅토리아, 데이웰 타운 외곽1103년 3월 23일 12:16 A.M. 맑음

블레이즈

여기가 이 근처에선 노숙하기에 제일 적당해 보이네. 이쪽 풀밭이 비교적 말라 있으니까, 네가 내 옷 깔고 여기서 자면 되겠다.

싱주

그럼 블레이즈 씨는요?

블레이즈

난 그냥 풀밭에서 잘게. 걱정 마, 임무 수행할 때 잤던 몇몇 곳들에 비하면, 여기가 훨씬 깨끗하고 편하니까.

싱주

안 돼요, 지금은 임무 중이 아니잖아요. 제 옷도 깔 테니까, 우리 같이 자요.

블레이즈

그래, 내일도 하루 종일 걸어야 하니까 일찍 자자.

……

블레이즈

……뭐 잃어버린 거라도 있어?

싱주

아, 제가 시끄러웠나요? 조심할게요. 물건을 잃어버린 건 아니고, 내일 어머니께 드릴 선물을 미리 정리해 두고, 방금 산 책을 포장한 다음에 자려고 했어요.

블레이즈

내일 정리해도 충분할 것 같은데…… 알았어, 너무 무리하지는 마.

싱주

네.

……

블레이즈

……어디 뭐 묻었어?

싱주

어머, 아직 안 자고 있었어요?

싱주

저…… 제 몸에서 냄새가 날까 걱정돼서요. 머리카락도 온통 먼지투성이니까, 간단히라도 좀 씻으려고요. 그런데 물이 조금 차갑네요……

싱주

(얼어붙은 손을 계속 입김으로 불고 있다)

블레이즈

그냥…… 내일 집에 도착하면 따뜻한 물로 씻을 수 있는데.

싱주

……금방 끝날 테니까, 먼저 주무세요.

……

블레이즈

……너 ……지금 안자면 내일 걷지도 못할걸.

싱주

알았어요, 알았어요. 바로 잘게요.

싱주

이제 누웠어요. 제 걱정은 그만하시고, 블레이즈 씨도 주무세요.

블레이즈

방금 보고 있던 건 뭐야?

싱주

아무것도 아니에요……

싱주

그렇게 쳐다보지 마세요…… 알았어요, 블레이즈 씨가 어머니께 물어봐서 가져온 그 책이에요. 어머니께서 학궁에 계실 때 집필에 참여하셨던 문학 논술이요.

블레이즈

혹시, 너 정말 엄마를 만나는 걸 시험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싱주

아니에요…… 그냥 이리저리 뒤척여도 잠은 안 오고, 글을 보면 그 글을 쓴 사람을 만난 것 같으니까, 이렇게라도 하면 마음이 좀 진정되지 않을까 해서요……

싱주

전…… 정말……

싱주

앗!

싱주는 방금 블레이즈가 번개 같은 속도로 찌르고 간 옆구리를 감쌌다. 어릴 적부터 또래 자매들과 이렇게 장난치며 놀 기회가 없었던 그녀는, 블레이즈가 대체 무엇을 하려는 건지 몰라 그 자리에 멍하니 굳어 있었다.

블레이즈는 눈을 감은 채 모른 척 크게 코를 골고 있었지만, 입가에는 얄미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상황을 파악한 싱주는 '한번 당해봐라'라는 마음으로, 블레이즈의 옆구리를 똑같이 찔렀다.

하지만 싱주는 손이 느린 데다 찌르는 것도 정확하지 않았다. 자는 척하던 블레이즈는 몸을 돌려 피하더니 순식간에 싱주를 찌르며 반격했고, 그녀는 간지러움에 이리저리 도망쳤다.

화가 난 싱주가 손을 뻗으며 블레이즈에게 달려들었고, 이에 막고 있던 두 팔이 열리게 되었다. 블레이즈는 벌떡 일어나 그녀를 간지럽히기 시작했고, 깜짝 놀란 싱주가 바닥에 뒹굴었으며, 두 사람은 웃으며 장난을 쳤다.

싱주

아야! 그만해요!

블레이즈

하하, 하하하!

싱주

그만하라고요!

블레이즈

……너 머리가 왜 그래? 돌에 부딪혔어? 어디 봐봐…… 어이쿠, 이마가 까졌네.

싱주

으으…… 제가 그만하라고 했잖아요!

싱주

블레이즈 씨는…… 정말…… 덤벙이고, 생각도 짧고, 어처구니없고, 아주 막무가내예요!

블레이즈

미안 미안, 잘못했어. 그래도 그렇게까지 화낼 건 없잖아……

싱주

내일 어머니를 만나 뵙는데, 이게 대체 무슨 꼴이냐고요……!

블레이즈

진정해, 살짝 긁힌 정도니까 흉은 안 질 거야……

싱주

……

블레이즈

미안해……

싱주

……

블레이즈

그럼…… 난 이만 잔다?

싱주

……

싱주

(한숨을 쉰다)


블레이즈

아직도 머리 아파?

싱주

……안 아파요.

싱주

(한숨을 내쉬며) 절 즐겁게 해주려고 그런 거 알아요. 죄송해요……

블레이즈

네가 뭐가 죄송해? 손을 못 가눈 내 탓이지.

블레이즈

방금 널 보면서 문득 든 생각인데, 어릴 때 너 같은 여동생이 하나 있었으면, 난 분명 매일 괴롭히면서 놀았을 거야.

싱주

그럼 전 되레 화를 잘 피한 셈이네요.

싱주

……

싱주

사실 요 며칠간, 정말 심란했거든요.

블레이즈

그래 보이긴 했어.


싱주

블레이즈 씨는 늘 저에게 긴장 풀고, 마음 편히 있으라고 하지만요…… 어머니는 블레이즈 씨에겐 가장 가까운 가족이겠지만, 저에게 있어서 그분은 대체 어떤 사람인 걸까요?

싱주

이 세상에 유일하게 저와 혈연으로 이어진 가족.

싱주

어릴 적 밤낮으로 그리워했지만 만날 수 없었던 사람.

싱주

그리고, 단 한 번도 마주한 적 없는 낯선 사람이죠.

블레이즈

엄마는……

싱주

어렵게 꺼낸 이야기니 제 말을 먼저 들어주세요.

싱주

어머니가 절 낳았으니까, 반드시 절 특별히 대해줘야 한다고 바란 적은 없어요. 하지만, 마음속에서는…… 앞으로 다정하게 지낼 수 있는 가족이 생기길 기대하고 있어요.

싱주

어머니의 과거를 많이 알게 된다면, 분명 거리를 좁힐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거든요.

싱주

그런데 막상 빅토리아에 와보니까, 본 적도 없고 모르는 것투성이라서……

싱주

전 당신들의 과거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걸 실감하게 됐어요.

싱주

그래서…… 겁이 나요.

싱주

우리가 이미 가까워질 수 없는 사이가 된 게 아닐까 겁이 나요.

싱주

막 만났을 때는 감동할지도 모르겠죠. 하지만 그 격한 감정이 지나고 나면, 결국 저희는 서로를 잘 알지 못하는 두 사람일 뿐이라는 걸 깨닫게 되진 않을까요?

싱주

그래서 결국 마지막에는, 여전히 저 혼자 쓸쓸히 남게 되지는 않을지……

싱주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 저 자신이 처량하기 그지없더라고요……

싱주

(한숨을 쉰다)

싱주

알아요, 블레이즈 씨는 제가 생각이 너무 많다고 하겠죠. 저 스스로도 그렇다고 생각해요…… 게다가 참지 못하고 블레이즈 씨한테 화까지 내버렸어요.

싱주

알아요? 전 어릴 때부터 성정이 이랬어요. 긴장되거나 고민거리가 생기면 바로 화가 나곤 했죠.

싱주

학생 때는 시험 직전에 특히나 짜증이 많아졌고, 어른이 되고 나서는 제가 엮은 책을 제출할 때마다 마음이 불안했어요.

싱주

하지만 그때 당시의 저는, 마음속으로 화가 나도 맘 편히 내뱉을 수 없는 처지다 보니 전부 참고 삼켰었어요. 그런데 왠지 모르게 여기에 오니까, 블레이즈 씨한테는 자꾸 소리를 지르게 되네요.

싱주

원래라면 신세 지는 처지에 화를 내면 안 되는데, 가까운 사람에게는 그래도 괜찮은 걸까요? 당연히 가까운 사이일수록 더욱더 그래선 안 되겠죠.

싱주

저…… 사과할게요, 블레이즈씨, 받아주시겠어요? 부디 마음에 담아두진 않으셨으면 해요.

싱주

블레이즈 씨?

블레이즈

(고른 숨소리)

싱주

설마 잠드신 거예요?!



빅토리아, 래닝턴 타운1103년 3월 23일 5:50 P.M.

싱주

싫어요. 하루 종일 견뎌왔으니까, 마지막 남은 길도 저 혼자서 걸어갈 수 있어요.

블레이즈

사양하지 않아도 돼, 넌 내 전기톱보다도 가벼워 보이는데 뭐. 난 전기톱을 메고도 3시간은 숨도 헐떡이지 않고 뛸 수 있는걸. 자자, 내 어깨에 앉아……

싱주

장난치지 말고요. 도대체 얼마나 더 가야 하는 거예요?

블레이즈

다 왔어, 다 왔어. 이제 길어야 한…… 한……

싱주

한 시간이요?!

블레이즈

아니아니, 염국 말로 뭐라고 하더라…… 차 한 잔 마실 시간? 봐봐, 이 길을 따라서 끝까지 가기만 하면 돼!

싱주가 걸음을 멈추고 길 끝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싱주

이제 곧 도착하겠네요…… 잠시만요, 제 빗이 없어졌어요…… 얼른 빗 좀 빌려주세요.

블레이즈

난 손가락으로 하지, 빗 같은 건 쓰지 않아. 필요하다면, 집에서 빗을 찾아 줄게.

싱주

블레이즈 씨 집에 도착하면 이미 늦는다고요…… 안 되는데, 저 지금 머리가 엉망이란 말이에요……

블레이즈

너 머리 아주 단정하거든.

싱주

그럼…… 그럼 잠깐만요, 선물 좀 확인해 볼게요.

싱주

아잇…… 분명 책은 맨 밑에 뒀는데, 모서리가 왜 접힌 거지……

블레이즈

싱주, 가자. 멀고도 힘든 여정을 지나 드디어 그 끝이 눈에 보이는데, 고작 집 문 앞에서 뒷걸음질할 수는 없잖아.

싱주

먼…… 먼저 가지 마세요! 가법은 어떤 게 있어요? 저, 들어가서 신발을 갈아신어야 하나요? 옷은 어디다 걸어야 해요? 저…… 그분을 아주머니라고 불러야 할까요, 아니면 어머니라고 불러야 할까요?

싱주

아앗! 잡아당기지 마세요, 제가 알아서 갈게요!

블레이즈

누가 자기 엄마를 보러 가면서 선물을 챙기고 예의에 어긋날까 봐 겁을 내냐고. 다 같은 식구끼리 어느 쪽 발을 먼저 들일지, 신발을 왼쪽으로 둘지 오른쪽으로 둘지가 그렇게 중요해?!

싱주

갑자기…… 왜 소리를 지르시는 거예요?! 그럼 당연히 중요하죠!

블레이즈

얼마나 중요한데?!

싱주

당연히…… 지금 제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일이라고요!

블레이즈

맞아, 난 네가 모르는 줄 알았네!

싱주

무슨 뜻이에요?!

블레이즈

한번 잘 생각해 봐. 이제 곧 친엄마를 만나게 되는데, 넌 도대체 어떤 기분이야?

싱주

무서워요!

블레이즈

진심으로 말하는 거야?!

싱주

전……!

싱주

전……

싱주

전 당연히……

싱주

너무나 기뻐요……

싱주

매일 밤낮으로 간절히 바라왔던 일인 걸요……

싱주

하지만 전 살면서 이렇게 뜻대로 되는 일이 드물다 보니, 혹시라도 너무 많이 기대했다가 실망하게 될까 봐 무서워요. 그래서 일부러라도 안 좋은 생각을 하려고 애쓰게 되더라고요……

블레이즈

그래도 어쨌든 속으로는 기쁘다는 거잖아, 그치? 그럼 가보자. 뭐가 가까워질 수 없는 사람이야. 40년이란 시간을 잃어버렸다고, 앞으로도 채워나가지 못할 건 없잖아?

싱주

어제 깨어있던 거예요? 블레이즈 씨……

싱주

그 말이 맞아요.

블레이즈

다 왔어.

싱주는 차가운 공기를 한숨 들이키곤, 나무문 앞에 서서 발걸음을 멈췄다. 평범해 보이는 그 나무문 위에는 등불 하나가 걸려 있었는데, 등불 안의 불꽃은 마치 돌아올 이를 마중하듯 고요히 일렁이고 있었다.

싱주

(작은 목소리로) 저를 속였네요, 아직 차 한 잔 마실 시간은 남았다면서요……

블레이즈

헤헤. 빅토리아 찻잔은 좀 작은 편이거든.

싱주는 불안한 듯 블레이즈를 한 번 쳐다보더니, 망설이며 손을 들었다가 또다시 내려놓았다. 그러다 채 뒷걸음질 치기도 전에, 블레이즈에 의해 등이 세게 밀렸고, 이에 싱주는 그대로 집 안으로 부딪히듯 들어갔다.

블레이즈

엄마! 우리 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