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T8-2두 눈, 해질녘에 떠진
의지의 힘을 충분히 모으게 된 아미야. 분노가 오랫동안 쌓여, 그녀에게 속하지 않는 기억으로 자신에 대한 한계를 깨고, 그녀의 힘은 결국 감정에 동화되게 되는데……
아직 부족해. 이 정도로는 내 불꽃을 이길 수 없다.
하아, 하아……
어리석고 나약하구나. 이따위 연극을 누가 보고 싶어 할까 모르겠군.
첸 훼이지에, 대체 언제까지 남을 위해 검을 휘두를 거냐? 지금까지 단 한 번이라도, 자신을 위해 그 검을 뽑은 적이 있었나?
마왕이라, 하핫…… 왕정에서 싸구려 불량품을 만들었나 보군.
너희 둘 다, 이 정도로는 어림도 없다.
아뇨, 충분합니다.
또다시 내 머릿속에서 지껄이면 내 생각에서 쫓아내 버리겠어.
이제 됐어요.
첸 팀장님의 감정이……
적소로부터 저에게 흘러 들어왔어요.
예전에 우리 두 사람은 아무런 관계도 없었죠. 하지만 이곳에서 일어난 일이 우리를 연결시켰고, 감염자의 운명이 우릴 이곳까지 오게 했어요……
왜냐하면 우린 둘 다 이 세상의 내일이, 오늘보다 나을 것이라고 믿고 있으니까요.
훼이지에는 너와 다르다, 카우투스.
로도스 아일랜드는 여러 정치 세력의 허수아비에 불과해. 넌 그들을 위해 동료를 죽이곤, 순진무구한 모습으로 혼란 속에서 이익을 취할 기회를 기다리지. 감염자 따위엔 신경도 안 쓰면서 말이야.
또 누구를 인질로 잡으려는 거죠? 첸 팀장님이 당신의 그 거짓말을 믿길 바라는 건가요?
탈룰라를 이용해 리유니온을 인질로 삼고, 체르노보그로 우르수스 군대를 인질로 삼았어요. 이익을 미끼로 우르수스인까지 잡아 놓고, 이제는 또 누구를 인질로 잡으려는 거죠?!
당신의 거짓말을 간파하는 건 아주 쉬운 일이에요. 왜냐하면 당신은 결과와 동기만 말하고,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말하지 않으니까요! 탈룰라에게 했던 약속처럼요!
호오……
첸 팀장님과 리유니온에게 감염자가 살 수 있는 곳을 약속하고, 전쟁이 끝난 후 감염자들이 일어설 것이라고 약속했죠. 하지만 탈룰라였다면 다시는 그런 약속을 하지 않았을 거예요.
왜냐하면, 그때 그 약속은 이미 그녀에게 깊은 상처를 줬으니까요……
아미야!
첸 팀장님……?
아미야…… 솔직히 좀 후회돼. 널 진작에 알았더라면, 많은 게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고.
하지만 난 이미 너무 많은 잘못을 저질렀어.
그때의 첸 팀장님은 아마 지금 제 생각에 동의하지 않으셨을지도 몰라요.
직함은 붙이지 마. 그냥 첸이라고 불러줘.
첸…… 씨.
좋아, 이제야 좀 제대로 된 것 같네. 편하게 불러, 알겠지?
우리 자매가 못난 꼴을 보여줘서 미안해. 난 우리 재회가 좀 더 극적일 줄 알았는데…… 아니면 좀 더 진부하던가.
아무리 진부하다 해도, 오랫동안 헤어졌다 다시 만나면 우리의 감정도 같을 것 같아요.
눈물 흘리는 게 진부한가요?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보통 사람들도 모두 눈물을 흘리는걸요.
말솜씨가 좋군, 카우투스. 아주 적절한 감정 공세였어.
하지만 그 뛰어난 말재주로는, 왕정과 원로원을 설득하고, 의회와 우왕좌왕하는 겁쟁이들을 정복하고, 눈먼 군사와 분노한 백성들을 선동해야지…… 나를 설득할 게 아니라.
"카즈델은 화재로 세 번 파괴되었다. 몇 번이나 재건되고, 수없이 많은 새로운 피를 얻었으며, 왕정을 점거했다. 다만 그전에 있었던 사람들의 육신은 한 줌 재가 되어 바람에 날아갔다.”
체르노보그에 있을 때 넌 장벽을 들어 내 호흡을 막았지…… 내가 널 놔준 것은, 널 위해 희생한 용감한 전사들이 존경받아 마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내 시선 밖으로 다시는 도망치지 못할 거다.
산 채로 불타올라라, 카우투스.
이런……! 아미야, 어서 이리로 와!
네가 아니라 아미야와 대화하는 중이잖아. 사랑하는 동생아, 자, 이제……
……카우투스가 타면 어떤 냄새가 나는지 맡아봐라.
아미야!!
불길이 형체를 드러낸 순간, 새하얀 불꽃이 포효하며 아미야를 향해 달려들더니 그녀와 그녀가 밟고 있던 땅을 송두리째 감싸버렸다.
탈룰라! 너 이 자식……!
어디 한번 해봐라, 네가 지금 검을 뽑는다면, 내 아츠와 이 카우투스를 함께 베게 되지 않을까?
아미야를 놔줘, 탈룰라! 네가 죽이고 싶은 건 나잖아!
이미 늦었어.
3분이 지났다. 시간은 이제 충분하다.
그녀들의 사고는 용문과 체르노보그를 뛰어넘었고, 기억은 북부 황야와 우르수스의 땅을 가로질렀다.
첸의 생각을 이미 잘 알고 있었던 그녀는 첸의 머릿속에 있던 전투에 관한 기억을 전부 모아, 용문과 체르노보그, 그리고 북툰드라에서의 모든 것들을 몸에 새겼다.
불덩이가 토해 낸 검은 선들이 점차 형체를 이루며 불덩이 안에서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 순간, 새하얀 불길이 갑자기 사라졌다.
……어, 어떻게……
무엇으로 염옥을 벤 거지……?
아미야는 거칠게 숨을 내쉬고는,
지긋이 눈을 감았다.
수많은 생각이 아미야의 머릿속에서 형태를 이루었다가 재빠르게 흩어졌다.
프로스트노바가 이를 악문 채 질러대던 비명을 기억해냈다.
우뚝 선 채 쓰러지지 않던 웬디고의 육체가 보였다.
억누를 수 없는 알리나의 가쁜 숨소리가 들렸다.
에이스와 스카우트가 보였고, 정예 오퍼레이터들이 파티에서 춤을 추는 모습이 떠올랐다.
오븐에서 생강 쿠키를 꺼내는 리사, 미미가 손수 만들어준 배지, 정전된 복도에서 반짝이던 선티를 감싼 빛, 그리고 실없이 웃던 주근깨 가득한 얼굴이 떠올랐다.
아빠와 엄마의 모습이 떠올랐다.
바이올린을 켤 때 제 어깨를 잡아주던 엄마의 가늘고 흰 손, 그 흉터와 굳은살이 가득한 손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자신을 문밖으로 밀어 넘어뜨리는 아빠의 모습도 생각났다. 아빠가 뭐라고 했는지 기억나진 않지만, 눈가를 적신 채 "안녕, 아미야. 꼭 살아남아야 한다"라고 말했던 건 아직도 생생하다.
검으로 자신의 가슴을 찌르는 테레시아가 보였다.
잘 자라고 인사한 뒤 불을 껐던 테레시아.
자신에게 하얀색 옷을 골라주며 자신보다 더 환하게 웃는 테레시아가 보였다.
제 앞으로 걸어오는 박사가 보였다. 돌아보던 박사는 자신이 곁에 오자, 다시 발걸음을 내디뎠다.
살카즈가 보였다.
큰불. 모든 것을 태우지만 악의는 태우지 못한 큰불. 악에서 태어난 큰불……
큰불에 휩싸인 캠프에서 살카즈는 크게 포효하고 있었다.
“우린 또 배신당했다! 놈들이 협약을 깨고, 우리의 주둔지를 습격했다!”
“그들은 일반인이지 병사가 아니야! 평범한 살카즈라고!!”
“왜 내 아내를 죽인 거지? 왜 내 사람들은 이런 불공평한 대우를 받아야 하는 거지?”
“왜 우리가 살아가게 내버려 두지 않는 거야?”
“우린 평온한 땅을 원할 뿐이야! 살 곳이 필요할 뿐이라고!”
“단지 우리가 살카즈라서?!”
아미야의 눈물이 화염 속에서 증발했다.
"단지 우리가 감염자이기 때문인가요?" 아미야가 물었다.
“단지 우리가 살카즈이기 때문에, 우리가 냉혈한이자 짐승만도 못한 존재라서, 이 땅에서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이냐?”
그 살카즈의 외침이 불꽃과 아츠, 그리고 시대를 관통했다.
“대체 뭘 잘못했길래? 무고한 사람들을!”
"그들을 증오하나요?" 아미야가 조용히 물었다.
기억은 대답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덩치 큰 살카즈는 누군가 이 질문을 던질 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말을 이어갔다.
아니, 어쩌면 그는 자신에게 끊임없이 이 질문을 던지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우리를 증오한다고? 이유 없이 우리의 동료를 죽이고 약속하고 번복하지. 죄악을 덮기 위해 더 큰 죄악을 저지르는 건 저들이다.”
“우리를 가지고 노는 것인가, 조종하려는 건가? 이익 때문인가, 아니면 고약한 재미 때문인가? 순간의 충동 때문인가, 아니면 뼛속부터 새겨진 악한 본성 때문인가?”
“저들이 증오해야 하는 것이 우리라고?”
“그렇지 않아, 이 땅을 이렇게 만들고, 모두를 악당으로 만든 자신을 원망해야 한다!”
살카즈는 검을 들었다.
검은빛과 푸른빛이 검에 스며들었다. 어깨 위로 묵직함이 느껴지더니 아미야의 손에 장검이 쥐어졌다.
“나는 저들을 증오하고 있는 걸까?”
분노. 분노……
끝없는 분노, 이 땅의 모든 고통과 불공정함에 대한 분노……
분노는 살카즈의 한계를 뚫고, 아미야의 마음을 꿰뚫었다.
“증오는 원한도 없애지 못하는데, 악의를 키우는 게 어떻게 악의를 이길 수 있다는 거지?”
“하지만…… 분노는 다르다.”
“복수하지 않고, 원한을 품지 않는다고 해도 내게는 영원히 분노할 권리가 있다!” 살카즈가 포효했다.
“이런 결말을 생각해본 적이 없다면 이렇게 해선 안 되는 거였다!”
그의 포효 속에서 불꽃은 하염없이 떨다가 비웃음을 띤 주황빛에서 푸른빛으로 바뀌었다. 푸른 불꽃이 점점 거세게 타올랐다.
살카즈가 길고 날카로운 검을 뽑아 들자, 푸른 불꽃이 검은 칼날을 타고 미끄러져 내려오면서
그의 분노가 끓어올랐다.
“이게 그 결말이라면…… 덤벼라! 그 결과를 너희와 우리 모두에게…… 그리고 나 자신에게 선사해 주마!”
“무기를 내려놓는 걸 세상이 허락하지 않는다면 최후의 순간까지 무기를 들고 싸울 것이다!”
아미야는 알고 있었다. 이 덩치 큰 살카즈는 모든 배신자를 죽인 뒤, 자결했다는 것을.
아미야는 알고 있었다. 이 검은 그후 재가 되었다는 것을,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하지만 이 살카즈 군왕의 푸른 분노는 일찍이 그와 함께 많은 일을 겪으며, 아미야의 일부가 되었다.
"발도의 기술, 부숴야 할 땐 부숴야 하느니."
"누봉의 기술, 잘라야 할 땐 잘라야 하느니."
"절영의 검, 버려야 할 땐 버려야 하느니."
"운렬의 검, 세워야 할 땐 세워야 하느니."
더 많은 기억이 아미야의 머릿속으로 밀려 들어오더니, 시대의 큰 물결이 아미야의 머릿속에서 일렁거렸다.
좋은 결말이 아니었지만, 아미야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분노로 가득 찬 첸의 시선과,
탈룰라의 화염이 아미야의 시야에 들어왔다.
아미야는 이 일은 반드시 여기서 끝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 분노의 검은 과거만의 것이 아니라, 반드시 현재의 검이어야만 했다.
아미야는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검……
……검?
엮는 것에서 베는 것으로 바뀌었나. 힘은 증가하지 않고 형식만 바뀌었군.
진짜였어. 축하한다, 카우투스.
넌 조각이나 실험물, 누군가를 흉내 낸 복제품도 아니었어.
넌 확실히 살카즈의 군주…… 인간의 적이다.
아뇨, 당신 앞에 있는 건 감염자예요.
한 명의…… 인간입니다.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군.
아미야, 이건…… 무슨 마술이야?
그건, 지금은 중요하지 않아요……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건 존엄성 문제야. 왜 네가 적소와 거의 비슷한 검을 들고 있는 거지? 어떻게 내가 십수 년 동안 익힌 검술을 네가 쓸 줄 아는 거냐고.
(첸 씨…… 그게 그렇게 중요해요?!)
그냥 해 본 말이었어,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자고. 그나저나 이 검, 적소와 얼마나 비슷한 거지?
또 하나의 적소라고 생각하면 돼요.
그렇군. 아미야, 내 검술을 얼마나 기억하지?
전부 기억해요. 제 눈으로 본 것, 당신의 마음에서 발견한 것 모두요.
……내 마음에서 뭘 발견했는데?
핫, 첸 씨…… 거,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배웠으면 하는 것들만 봤으니까요. 저도 그 정도는 판단할 줄 안다고요. 으으으…… 정말 다른 건 안 봤어요.
전부 잊어라, 알았지?
웨이 옌우는 늘 말했어, 적소를 다루려면 기대야 할 것은 검술이 아닌 마음가짐이라고.
난 늘 그 사람이 아무 말이나 지껄인다고 생각해왔지만, 검술에 대한 조예가 깊다는 건 인정해, 나는 평생 따라잡지 못할 거야.
그러니까 그 사람이 협력이니 도리니 이런 이야기를 할 때는 헛소리한다고 여겨도 되지만, 검에 대해서라면 내 말도 듣고, 그 사람 말도 들어야 해!
그렇게 할게요!
두 자루의 검이라. 네가 적소 같이 악독한 무기를 선택하다니 정말 의외로군.
무기에 악독하고 안 하고가 어디 있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무기 중에 너보다 더 악독한 게 또 있을까?
아미야, 잘 들어……!
네 분노가 내 분노와 같다면, 우리의 검은 네 것 내 것을 가리지 않을 거다!
가라, 아미야! 상대의 생사 따윈 일단 무시해 버려!
에?! 정말 그래도 될까요……?
우리에게 진짜 선택권이라도 있는 줄 아는 거야?!
그 무기가 너희에게 자신감을 준 건가?
유치한 연극이라면 오늘 본 것만으로 충분하다. 더는 보고 싶지 않아.
네 검을 시험해 봐라, 카우투스. 네 검술이 어떠한지 한번 보도록 하지.
너무 느려! 적소!
발도!
큭……
(켈시 선생님 말이 사실이었어, 적소는 아츠를 가를 수 있는 검이었어……!)
주변의 사물을 끊임없이 삼키는 무형의 화염이 검푸른 색과 붉은색으로 번쩍이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상처?
어떻게……
증오 속에서 다시 태어난 뒤로 이 육체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상처를 입은 적 없었는데.
손가락밖에 베지 못하다니…… 탈룰라의 아츠가 지닌 에너지가 너무 커요!
우습게 볼 게 아냐!
그 정도 상처라도 매번 입힐 수 있다면, 그런 상처를 수없이 입혀서 과다 출혈로 죽게 만들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 말하다니 너무 섭하군.
그 얼굴로 잘도 그따위 말을 지껄이는군, 네가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냐?
용문근위국에서 성인군자를 키워냈군그래.
이방인과 함께 제 피붙이를 다치게 하고도 기뻐하는 모습이라니, 훼이지에……
그 이름 함부로 부르지 마!
날 죽이고 싶다면 그렇게 해라, 훼이지에.
너……
난 이미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모든 걸 증오한다. 너도, 널 키워낸 이 땅도 증오한다. 널 이렇게 만들어 버렸으니까.
벗어날 수 있게 날 죽여라. 안 그러면 내가 널 죽일 거다.
훼이지에…… 적어도, 적어도 내가 널 죽이지 않게 해줘. 그러고 싶지 않아, 그럴 수 없어……
내가 너 때문에 이렇게 변했다고 해도 말이야.
……난…… 20년 전 그때, 난……
나와 함께 가지 않았던 건 너야.
물러선 것도, 도망친 것도 너다, 훼이지에. 내가 이렇게 된 것도…… 나조차도 혐오하는 모습으로 변한 건…… 모두 너 때문이다.
모두 너 때문이다, 네가 약속을 뒤집은 탓이다.
아……
그날 밤, 비가 억수같이 퍼붓던 그날 밤……
왜 그 사악한 용 곁에 남기로 한 거지?
그자는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사지로 몰아넣었다…… 우리 둘을 갈라놓은 것도 그놈 짓이야!
그런데 넌 지금, 그를 돕겠다고?
거짓말이에요!
첸 씨, 잘 생각해보세요……
그날 밤 대체 어떤 일이 있었던 거죠?
……
그날은 맑은 날이었어. 내 기억은 틀림없어…… 그날 밤은 달도, 별도 보이지 않았지만 무척 밝았지……
하지만 네가 날 끌고 밖으로 나갔을 때는 낮이었어. 그때는 낮이었어.
그러니까 그 말은……
아니요, 탈룰라. 카셰이의 오리지늄 아츠는 그가 죽고 나서부터 효력이 발동한 게 아니에요……
그는 그때부터 이미 당신에게 아츠를 쓰기 시작했던 거예요.
얼마나 많은 생각이 왜곡되고, 또 얼마나 많은 기억이 베일 뒤에 숨겨져 있었는지 생각해 보세요.
그가 당신의 기억을 조작하지 않았다고 해도, 흐릿한 기억의 일부를 이용했을 게 분명해요!
탈룰라, 당신이 아직 탈룰라라면……
아무리 전쟁을 원하고, 많은 사람을 희생시켜서라도……
자신 때문에 사람들이 무의미하게 죽도록 내버려 둘 건가요?
정말 희생이 필요하다면 당신이야말로 최초의 희생양이 되어야 하는 게 아닌가요?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 채 눈의 악마와 프로스트노바가 죽어가도록 내버려 두고, 패트리어트가 지켜온 것으로 당신이 존경하던 패트리어트를 무너뜨릴 건가요? 그로 인해 수많은 우르수스인과 감염자가 죽기를 바라나요?
그만해. 넌 내 의지를 꺾을 수 없다.
완벽할 정도로 손발이 맞아떨어지다니…… 왠지 역겹군.
하지만 그 검들로는 날 어떻게 할 수 없다.
너희들의 체력은 시간이 지날수록 떨어지겠지만 내 불길은 지칠 줄 모른다.
검이 너희의 손발에 힘을 실어줬을진 몰라도 난 힘 그 자체다. 너희들이 나가떨어지면 내가 목숨을 거둬갈 거다.
탈룰라, 잘 봐요…… 이런 결과와 비극이 당신이 원하던 건가요?
이게 당신이 원하던 거였냐고요!!
그만해!
껍데기 안에 숨어들어봤자 소용없어요, 절 보세요!
아미야가 고개를 들었다.
진실을 말하는 것처럼,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10분 전과는 전혀 달라진 듯한 아미야를 첸은 물끄러미 바라봤다.
첸은 평소와 다른 아미야의 말투에 놀랐다. 삼 분의 일은 아미야 자신의 말투, 다른 삼 분의 일은 자신의 말투를 흉내 낸 듯했다. 그리고 마지막 삼 분의 일은……
첸도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드라코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여러 차례 말을 삼키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또 누구에게서 어떤 광경을 본 거지? 어떤 유언을 들은 거냐?
카우투스, 죽기 직전의 사람이나 그런 케케묵은 말을 반복하길 좋아하지. 과거의 그 어떤 것도 나에겐 상처 입힐 수 없다.
그 순간, 아미야는 칼자루로 일렁거리는 공기를 가른 채, 감염자들을 향해 고온의 에너지 덩어리를 퍼부었다.
첸이 기합을 내질렀다. 그녀는 검을 뽑으려 하다가, 문득 이 검을 아미야에게 양보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적소여, 밤을 가로질러라!
아미야가 첸을 힐끗 쳐다보며 미소 지었다.
앗, 죄송해요…… 이렇게 하는 거, 맞죠?
푸른색인듯 검은색인듯 한 아름다운 푸른색이었다. 그에 비하면 적소에서는 강한 피비린내가 났다.
그 순간, 첸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번 전투를 이렇게 해야 할지 모른다고.
산소 공급 장치는 전투 중에 타버렸다. 산소통을 멘 채 불을 내뿜는 용과 싸우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내키지 않았지만, 첸은 여분의 장비를 버리며 자신의 계획이 너무 경솔했음을 절감했다.
아미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 저 녀석은 이곳의 산소를 전부 태워버릴 계획인 거야.
옆에 있는 토끼도 많은 전쟁과 어려움을 겪어 왔기 때문에 이런 말은 사실 불필요했지만, 첸 자신의 주의력을 돌리기에는 충분했다.
이유는 하나였다. 첸은 자신의 주의력을 돌리려고 했다. 첸이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지금의 첸은 조금도 냉정하지 않았다.
칼집에 갇힌 채 예리한 칼날을 숨겨야 하는 적소검이 칼집 안에서 격렬히 진동했다. 마치 앞으로 있을 치열한 전투를 위해 광기를 억누르고 있는 것처럼.
아니, 어쩌면 그건 단지 자신이 손을 떨고 있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오랜 세월 동안, 처음으로…… 첸은 적소의 강인함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이 검을 잡지 못할까 봐 두려워 하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검과 함께 기뻐했다.
첸은 불현듯 깨달았다. 적소에는 의지가 없고, 그 의지는 적소를 다루는 사람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그동안 첸이 적소를 뽑지 못했던 것은 아니지만, 반드시 이 검을 사용할 때를 만나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은 눈앞에서 이글거리는 불꽃, 악당, 오랜만에 만난 친구, 가족과 죄인, 그리고 철저하게 궁지에 몰린 상황까지, 그 모든 것들이 그녀의 몸을 무겁게 짓눌렀다.
떨림이 잦아들자, 첸은 직감적으로 때가 왔음을 느꼈다. 적소는 너무 오랜 세월을 기다려왔다.
그리고, 그녀 자신 역시 너무 오래 기다려왔다.
첸 씨, 잠시만요. 지금의 우리에겐 탈룰라를 다치게 할 능력이 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탈룰라를 죽인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어요.
자신이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것 같은 말이 자신의 입에서 쏟아져 나왔다.
그녀는 마치 불공평과 참사에 짓눌려 휜 한 자루의 예리한 칼날 같았지만, 아미야는 이 칼날이 원래 상태로 돌아와 예전처럼 날카로워질 거라 생각했다.
그녀는 자신이 첸을 조금 닮았다고 느꼈다.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결국 첸이 될 수는 없으니까.
아미야가 탈룰라를 바라보았다.
첸 씨, 예전에 첸 씨가 범인을 체포한 건 범인을 채찍질하고 모욕하기 위해서였나요, 아니면 그의 목숨을 뺏기 위해서였나요?
그녀의 알 수 없는 분노는 첸을 닮지 않았다. 배신당하고 이용당하고, 또 단절됐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아직 끝나지 않는 이야기 속, 암담하지만 여전히 존재하는 미래를 경험하고 있었다.
그건 결과일 뿐이겠죠, 제 생각은 그래요. 우리에겐 그런 권리가 없기도 하고요.
알아요. 당신은 그녀가 혐의를 벗는 건 너무 쉬웠다고 말하겠죠.
아니요, 첸 팀장님…… 아니, 첸 씨. 당신은 틀렸어요.
그녀가 혐의를 벗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일이 해결될 때까지 기다려봐야 하는 거예요.
첸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같은 피붙이끼리 서로를 향해 칼을 겨루는 일을 어떻게 기뻐할 수 있겠는가? 그녀는 제대로 대답할 수 없었다.
그녀는 적소를 들어 올리려 하다 참았다.
그녀가 한숨을 내쉬었다.
맞아, 그건 결과일 뿐이야. 일단 놈들이 죗값을 치르도록 해야겠어, 죽이는 건 재판 뒤로 남겨두겠어.
그런 자신감은 어디서 오는 거지?
이건 자신감이 아니야, 이 괴물아.
이건 책임이라고 하는 거다.
첸이 고개를 들고 가슴을 폈다.
우리에겐 의무가 있어요.
하지만 당신에게는 아무것도 없죠, 카셰이.
당신의 육체는 빌려온 것에 불과해요. 당신의 거짓말은 탄로 날 거고, 불꽃 역시 적소 앞에서 위태롭게 흔들릴 거예요.
이곳을 전장으로 삼은 채, 무기와 거짓으로 무장한 채 코어 위에 둥지를 틀었죠. 그건 오만이자, 어리석은 선택이었어요.
이런 걸 자승자박이라고 하죠, 더는 도망칠 곳이 없게 됐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