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모범의 이름
한껏 고무된 분위기에 빠져 있던 시즈의 부대는 '파라곤 부대'의 식별 코드를 발견하였고, 이 이름을 내세워 작전을 계속 진행하기로 결정한다. 이후 델핀은 어느 한 자작을 마주치게 되고, 그에게 캐스터 공작을 찾아가 도움을 청하라는 제안을 받지만 거절한다.
전장이란 직접 발을 내딛기 전까진, 아무도 그것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
과거에 난 친구들과 노포트 구에 있는 비디오방에서 옛날 영화들을 보며 많은 시간을 보냈었다. 그중에는 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도 꽤 있었고, 영웅을 소재로 한 영화도 있었다. 잔인한 게 취향이었던 일부 감독들은 전장의 공포를 영상에 담기도 했다.
그날 밤, 우리 넷 모두 밤새 악몽을 꾸었던 게 기억난다.
그리고 지금, 나는 여전히 그 꿈속을 떠돌고 있는 것 같다.
그 골짜기를 지나면서 겸사겸사 아직 숨이 붙어 있는 병사 몇 명을 구했어. 아 참, 생존자들은 우릴 따라나서기로 했고.
전부 감염됐어. 그런 시체로 가득한 포탄 구덩이에서 하룻밤 자면 누구든 감염될걸.
데려올 때 소독은 했어? 활성 오리지늄 분말이 몸에 붙어 있을 수도 있잖아.
……한나, 우리 지금 어디에 있어?
나 조금……
안심하세요, 델핀 씨. 제가 힐록 카운티에 있었을 때도 이와 유사한 대규모 활성 오리지늄 환경을 많이 겪어 봤습니다.
저희도 엄격한 과정을 거쳐서 정화 작업을 실시했습니다.
그 병사들은 애시워스 공작의 징집 부대 소속이었습니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교전 직후에 중대는 부상자를 구하지도, 전장을 정리하지도 않은 채 바로 철수했다고 합니다.
혼 씨, 한나는 내가 멋대로 움직인 것 때문에 화가 난 걸까?
왜 날 무시하는 걸까?
……또, 그에게는 멀지 않은 곳에서 쓰러진 동향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다리에 부상을 입고 몸조차 뒤집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는 얕은 물가에서 밤새 도움을 청했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우리가 발견했을 땐,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습니다. 익사한 거예요.
그 물가는 발목조차 전부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얕았습니다. 누군가가 몸을 뒤집어 주기만 했어도 살았을 테죠.
내가 현장을 조사했는데, 그 사람들은 왕정군의 함정에 빠졌었어. 아마 살카즈 용병들이 자원해서 스스로를 희생해 미끼가 되었을 거야.
내 가슴을 짓누르고 있는 건 무엇일까?
숨이 안 쉬어져…… 모건…… 모건?
뜨거운 열기가 내 가슴속에서 요동치는 것이 느껴진다.
하지만…… 저런 식으로 아무런 저항도 못하는 상황이 있을 순 없는데……
사실 이건 매우 흔한 일이야…… 힘이 강력한 몇몇 공작들을 제외한 다른 공작들의 부대는 직업 군인이 전체의 4분의 1도 안 되는 경우가 많으니까.
대다수의 빅토리아 병사들은 군에 징집되거나 강제 징용된 사람들이고, 그들은 수개월 동안 군용 석궁이나 캐스팅 유닛의 사용법을 대충 배우자마자 이곳에 던져지지.
……솔직히 말해서 이 전쟁이 아니었으면 저 군관이랑 병사들은 서로 평생 말 한 번 안 섞을 기회조차 없었을 거야.
비나가 이 말을 들으면 또 엄청 화내겠지……
나도 이런 건 싫어. 서로 신뢰하지 못하는 사람끼리 어떻게 전장에 나가서 서로에게 등을 맡길 수 있겠어?
왜 아무도 내 말을 들어 주지 않는 거지?
쇠맛이 내 입안에서 퍼지고 있다. 매우 뜨거운 무언가가 내 목에서 끓어오르고 있다.
어머니는 이런 내 고민에 대해 한 번도 답을 해 준 적이 없었어. 언젠가는 내가 스스로 그 답을 찾을 수 있을 거라면서……
크윽…… 하아!
비나!
살살…… 모건, 내 목이…… 숨이 잘 안 쉬어져……
하하, 미안. 내가 너무 흥분한 모양이야. 비나, 너 꼬박 이틀이나 기절했었어……
그동안 열이 엄청 났거든. 다행히 가슴 쪽에 찢어진 상처는 잘 아물었어. 다들 너 때문에 엄청 가슴 졸였다니까.
여긴 어디야…… 체틀리가 아닌가?
모두들 침묵하고 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크흠…… 내가 말할게.
이틀 전에 우린 거기서 빠져나왔어. 지금은 우리가 원래 있던 주둔지로 돌아온 참이야.
고도딘 공작의 지원 함대가 정식으로 체틀리 카운티에 들어서기 전에, 혼 씨가 어떤 제안을 했어. 그 제안에 따라 우린 거기서 빠르게 철수했고, 지원 부대와의 직접적인 접촉을 피했어.
……혼 씨가?
우리 부대는 대원들끼리의 관계나 신분이…… 엄청 복잡한 상태입니다. 그래서 공작의 부대와 접촉하면서 정부 차원의 교류가 생기기 시작하면 까다로워지는 게 한둘이 아니죠.
저랑 미저리 씨는 이미 이 부분에 대해 얘기를 나눴고, 다른 동료들도 모두 저희 의견에 동의했습니다.
……비록 지금 저희 부대엔 윈더미어 공작의 잔병들도 꽤 포함되어 있긴 하지만, 군사 식별 코드가 무효화된 지 오래돼서 '오인 사격'을 당할 가능성도 적지 않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무효화가 아니라 인정을 못 받는다고 해야 하나…… 그러니까……
하, 귀족들의 그 더러운 수법을 그렇게 예쁘게 포장할 필요 없어.
우리 밥그릇 싸움이랑 똑같잖아?
하, 인드라의 말이 맞다.
이 전쟁은 언제부터 이렇게 변해버린 걸까?
눈앞에 보이는 장소를 구하는 것이라면 우리도 가능하다. 하지만 우리의 손길이 닿지 않는 다른 카운티라면?
……지금 상황은 어때?
일부는 고도딘 공작 부대에 들어가 계속 작전을 진행하기로 했어. 고도딘의 군관은 감염자들한테도 별말 없더라. 물론 우리랑 함께 움직이기로 한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아.
저 사람들은 우릴 믿고 있어!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널 믿고 있는 거야, 비나. 우리가 이겼어! 다들 사기가 대단하다고!
하, 난 심지어는 과거에 자기들끼리 서로에 대해 가지고 있던 마음의 벽에 대해 얘기를 나누는 것도 봤어.
……우리가 해냈구나.
네 계획은 통했고, 우린 끝까지 버텨냈어. 물론 나중에 우리가 거기서 어떤 희생을 치뤘는지 알아 줄 사람은 거의 없겠지만……
전체적으로 보자면 이건 단편적인 승리에 불과하니까.
나는 피곤이 가득한 델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군함이 그녀를 버리고 떠난 이후부터, 그녀의 가슴 속에는 어떤 거대한 감정이 굳게 자리잡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녀의 얼굴에는 간만에 웃음꽃이 피었다.
그렇다고 해도 우린 체틀리를 구해냈어, 비나 씨.
응, 그러네.
지금 이 순간 만큼은 안도와 기쁨을 느껴야 한다며 이성이 말해준다.
하지만 난 그럴 수 없다. 나는 심지어 그 건물에 영원히 남겨지게 될 이들이 얼마나 있을지 아는 것조차 두렵다.
그곳에서 벌어진 모든 일들이 아직 내겐 꿈만 같다.
승리란 이리도 무거운 것이었나?
만약 모두가 처음부터 이렇게 한마음으로 빅토리아를 위해 싸웠다면, 상황이 이렇게까지 나빠지지는 않았을까?
……아니, 저들 모두 자신이 빅토리아를 위해 싸우는 거라고 굳게 믿고 있어.
이 말은 반대로 해야 해. 상황은 이미 나빠졌고,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위해 싸워야 해.
참, 시즈. 체틀리 카운티의 한 생존자가 우리에게 좋은 소식을 하나 가지고 왔어.
자기 집에 가울 예술품을 '수집'하는 전통이 있는데, 그의 아버지는 과거 링고네스의 항로에서 빅토리아풍의 어떤 작은 물건을 주웠다고 하더라고.
나중에 그 작고 검은 물건이 별 가치가 없다는 걸 깨닫고는 창고에 던져 뒀었는데, 우리가 철수할 때가 되니까 감사의 의미로 선물해 주겠다는 거야. 근데 혼 씨는 그게 무슨 물건인지 한눈에 알아봤어.
바로 이거야.
비나 씨, 이건 보병 전차에서 쓰이는 물건이에요. 빅토리아의 군대는 이것이 내는 신호로 서로의 소속을 확인하거든요.
……이 안에 군사 식별 코드가 있다고?
네. 이 검은 상자는 분명 빅토리아 군 거예요. 이 상자 위에 있는 도안에 대해 잘 알거든요……
전 이 부대의 번호가 가울의 폐허 속에서 완전히 사라졌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파라곤 부대'.
저희 폭풍돌격대의 전신이자, 전설적인 부대예요. 그런데 이게 그 많은 풍파를 겪고 다시 빅토리아로 돌아오게 될 줄은 정말 몰랐어요.
그것도 저희 손에 말이에요.
'파라곤 부대'……
지금의 공작은 이 오래된 부대의 번호를 인정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적어도 그들에게 직접적인 포격을 당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보다 중요한 건……
상자에 새겨진 이 부대의 모토다.
'파라곤 부대'
'우리는 기적을 만든다.'
……하.
운명이 우리에게 준 선물이라고 치자.
이건…… 시어러 소위가 남긴 비콘에 신호가 잡혔잖아?
시어러?
델핀 님, '갈라바에 철 방패'에 조금 문제가 생겼습니다……
현재 저희는 델핀 님 쪽으로 접근 중입니다. 아마 한 시간 후면 합류할 수 있을 겁니다.
조금 듣기 안 좋은 소식들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리고 델핀 님을 만나고 싶어하는 손님도 한 명……
대체 누가 상처를 이런 식으로 처리한 거야, 순 엉터리잖아!
네가 그렇게 오랫동안 열에 시달렸던 건 상처가 언뜻 보기엔 금방 아문 것처럼 보이지만, 내부 염증에 대한 효과적인 처치는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정도로 심각한 상처라면 바로 의사에게 여러 검사도 꾸준히 받고, 후유증이 남지 않도록 잘 관리했어야 했어.
네 몸을 꿰뚫었던 건 금속 파편이지, 오리지늄 결정은 아니었어. 그래도 그 파편들은 살카즈의 주술 장치에서 나온 것들이니까, 오염 물질이 조금이라도 묻어 있었으면 넌 감염되고도 남았을 거야.
직접적으로 오리지늄에 상처를 입은 건 아니지만, 그런 상황에선 감염될 가능성이 상당히 높아. 내가 네 혈액 검사 결과를 보니, 그래도 오리지늄 결정 밀도는 아직 정상 범위 내야.
정말 운이 좋았다고 해야겠지.
하아…… 소위, 그땐 상황이 정말 혼란스러웠었다니까.
적어도 난 지금 이렇게 살아 있잖아? 몸 하나는 정말 튼튼하거든.
……하아.
그래, 나도 당시 상황에 대해선 델핀 님에게 들은 게 있다.
양측의 전력을 비교해서 본다면, 그 전투는 확실히 군사 학원 교재에도 올라갈 만한 전투였지. 심지어 너흰 군인 신분도 아니니까……
그럼 난 우리 활약상을 기억해 주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에 아쉬워해야 하려나?
아니, 이번엔 네가 틀렸어, 시즈.
나와 바깥에 있는 병사들이 기억할 거다. 체틀리 카운티에서 살아남은 사람들도 너흴 기억할 거고.
원래 전설은 공식적인 기록에서 생겨나지 않는 법이지.
……그런 말도 할 줄 아는구나.
크흠.
좋아, 네 상처는 내가 다시 제대로 처리해 뒀다. 하지만 앞으론 신체 조건이 좋다는 이유로 이렇게 날 귀찮게 만들지 말도록. 내가 시간 날 때마다 몸을 검사할 테니까 그렇게 알고. 기억해, 의사는 바로 나야.
네 동료의 상처도 내가 다시 한번 봐줄 수 있다. 병사들이랑 시민들도 마찬가지고.
고마워, 소위.
아…… 또 한 가지.
그 손님이라는 사람도 한번 만나보는 게 좋을 거야. 난…… 델핀 님이 그 사람을 감당 못하실까 봐 걱정되거든.
내가 예전에 저질렀던 여러 악한 행위와 더불어, 네게 내렸던 잘못된 평가에 대해선 진심으로 사과하겠다.
하지만 이 점 하나는 꼭 말해 주고 싶군. 넌 너무 충동적이고, 감정적이야.
너 혼자 이 모든 걸 해결할 필요는 없어. 가끔은 뒤돌아 볼 줄도 알아야 해. 네 뒤에는 널 기꺼이 도와줄 수많은 사람들이 있으니까.
……
꿀꺽꿀꺽꿀꺽…… 푸하!
천천히 드세요, 매닝 아주머니.
진짜로 죽는 줄 알았어! 오면서 얼마나 많은 살카즈들을 피해다녀야 했는지!
그래도 시어러 소위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그 사람은 며칠 동안이나 쉬지 않고 계속 움직이는 '갈라바에 철 방패'를 뒤쫓았거든. 그 덕분에 내가 구해질 수 있었어.
으음…… 하지만 사람은 믿음직한데, 융통성이 너무 없어. 그 사람들은 어떻게 소위가 승선하는 걸 허락했던 걸까.
그럼 아주머니는 그 '갈라바에 철 방패'에서 도망쳐 나오셨다는 말씀이신가요? 거긴…… 대체 어떻게 된 거죠?
말하다 보니 또 열 받네! 그 망할 군관 놈들! 그놈들이 감히 한꺼번에 요새의 코어 중추에 몰려오더니, 나한테 칼을 겨누더라니까! 분명 본테르 후작이 그놈들 뒤를 봐주고 있는 거야!
난 틈을 봐서 옷을 수수한 걸로 갈아입고 가까스로 빠져나왔다니까! 요새의 승강기에 하마터면 치마도 찢어질 뻔했고!
……아무래도 운이 좋으셨던 모양이네요, 아주머니.
델핀, 난 우리가 단순히 네 어머니를 따라 전선에 와서 견문도 넓히고, 겸사겸사 널 집으로 데려가는 거라고 생각했어. 이동 요새에 숨어있는데 무슨 일이 생기겠니? 그런데 이렇게 될 줄은……
……
어머니의 삶은 윈더미어 공작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것이었어요.
맞아.
하지만, 이제부턴 네가 윈더미어 공작이야, 델핀.
아주머니? 왜 갑자기 절 이렇게 꽉 붙잡으시는 거예요…… 그리고 표정은 왜 또?
참모단이 급히 영지로 철수했던 건…… 공작의 죽음이 라이타니엔 사람의 음모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어.
웃기지? 그런데 참모단은 얼마 안 가 증거를 찾아냈어. 라이타니엔 사람이 정말로 살카즈와 결탁한 것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지금 이런 상황이 되어버렸어.
그게 무슨……? 라이타니엔 사람이라니요?
참모단은 라이타니엔 귀족들의 혐의를 쉽게 제기하지 않으려 했지만, 이미 영토 내 반란에 대해선 관심을 갖기 시작했어.
살카즈와 맞붙었다가 수백 년 동안이나 평화로웠던 영지를 라이타니엔에 빼앗기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
델핀. 넌 그 사람의 딸이야. 아마 네가 사명을 다할 순간이 금방 찾아오겠지.
됐다, 이제 나도 좀 쉴게…… 그 다음엔 이곳을 떠나자.
……어디로요?
넌 이런 미천한 인간들과 엮여도 되는 사람이 아니야.
저들은 미천한 사람이 아니에요. 언행에 주의해주세요!
……그래, 델핀, 내 말 잘 들어.
만약 네가 정말로 저들을 소중하게 여긴다면, 정말로 저들을 영웅이자, 빅토리아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한다면……
……네 어머니의 영토에 저런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지 생각해야 해.
네가 저 사람들을 정말로 지키고 싶다면 오히려 내 말을 들어야 한다고. 캐스터 공작의 지지를 얻고, 영지로 돌아가 다시 대국을 돌보도록 해.
설령…… 캐스터 공작의 가신이 된다고 해도, 네 사명은 다할 수 있잖아?
저는……
그럼 뭐야? 저들이 너와 함께 싸워줬다는 이유만으로, 저들에게는 정을 붙이고, 네 영지의 사람들은 나 몰라라하겠다는 거야?
내 말 들어, 델핀…… 너와 네 어머니는 이미 너무 많은 고통을 겪어왔어.
캐스터 공작의 제안을 받아들여. 그러면 적어도 윈더미어 공작의 영지는 도탄에 빠지지 않을 수 있어.
……
대체 뭘 망설이는 거야! 설마 너 정말로 네 가문도 떠나고, 네 혈통, 네 사명까지 전부 포기하면서까지 계속 그렇게 떠돌아다닐 작정인 거야?!
……저도 알아요. 아주머니.
전 어머니의 딸이에요. 아주머니 말이 맞아요. 저는 제 동료들 뿐만 아니라, 영지에 있는 사람들까지 책임져야 해요.
그렇다면……
왜 소드베어러들은 사명을 짊어진 절 이렇게 전장에 내버려 둔 걸까요?
이 사명이 정말로 의심할 여지없이 명예로운 것이라면, 아주머니는 왜 이렇게 절박한 모습으로 절 찾아오신 거죠?
난……
아주머니 말씀이 맞아요. 윈더미어 공작령이 정말로 어떤 음모에 빠진 거라면, 저는 모두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할 의무가 있고, 또 제 스스로도 뭐라도 하고 싶어요.
하지만 전……
델핀, 네 곁엔 우리가 있잖아.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전부 해 버려.
미안,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자작, 당신은 우리가 방금까지 무얼 겪었는지 알고 있어?
……당신은……
전 아주머니와 함께 가지 않겠어요.
넌 짊어져야 할 사명이 있다고!
전 제 어머니의 딸이자, 이 전사들의 동료입니다. 그 외에는, 전 아무것도 아니에요.
예전에는 무언가였을 수도 있지만…… 이제 더는 믿지 않아요.
전 저들을 위해 이곳에 있어요. 전 당신 같은 사람들이 저들의 생명을 업신여기는 일이 다시는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곳에 있어요…… 제 숨이 다하는 그날까지, 전 그 어디에도 가지 않을 거예요.
지금 이곳을 떠나주세요.
당신이 살카즈들에게 붙잡히지 않기를 기도할게요.
자작의 안색이 한순간에 변하더니, 꽤나 볼만한 얼굴이 되었다. 하지만 델핀은 그녀가 입을 열 여지조차 주지 않았다.
그녀는 결국 쓸쓸하게, 시어러 소위가 있는 쪽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델핀의 안색은 생각한 것보다 평온했다. 그녀가 했던 말들…… 그녀가 겪었던 일들……
사람들은 모두 한 사람을 떠올렸다.
델핀은 똑같은 전철을 밟지 않았고, 비극은 재연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어떻게 가능했을까?
그것은 혈육의 죽음과 순식간에 일어난 배반이었다.
난…… 델핀이 그동안 일어났던 일들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일 지에 대해 유난히 걱정했었던 것 같다.
감정을 추스른 델핀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내게 미소를 보였다.
난 괜찮아, 가자.
……같은 일이 되풀이되게 해서는 안 된다.
캠프 서쪽으로 계속 움직이면 그 자애로우신 캐스터 공작을 만날 수 있을 거야. 물론 네 운이 정말로 좋아야 하겠지만.
……공작의 보호 없이 정말로 너희끼리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해?
우리라면 가능해.
확실히 난…… 캐스터 공작을 찾아갈 생각이었어. 속도를 적당히 늦추도록 할게. 이것이 너희들에게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해줘.
날 따라오면 모두 살 수 있어.
말리지는 않을 거야.
하지만 델핀과 그 아이 어머니의 기반은……
아니, 난 틀리지 않았어…… 너희가 너무 순진하고 어리석은 거야. 그런데도 너희들은 자신들이 깨어있다 여기고 있겠지.
이걸로 됐어.
……
난 그녀가 떠나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들판을 건너기 적합하지 않은 탈것에 몸을 싣고, 소수의 호위들의 도움을 받으며, 날이 어두운 틈을 타 캠프를 떠났다.
나는 고개를 돌려 우리의 부대를 바라보았다.
수천 수백의 시선들이 한곳에 모여들었다. 그중에는 담소를 나누던 병사의 것도, 기뻐하는 평민의 것도 있었다.
캠프는 조용했다.
그들 모두 하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의 대답을.
너도 자작의 말을 들었지? 확실히 그 조건은 많은 사람들이 혹할 만한 것들이었어.
비나 씨, 우린 모두 가장 힘든 시기를 거쳐 지금 이곳에 왔어……
그런데 앞으로는? 고난으로 인해 모두의 불타오르던 투지와 사기가 사그라든 다음에는?
그들이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누가 알려줄 수 있을까?
난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왔다.
금발의 머릿결을 가진 생물이 인파를 뚫고 천천히 걸어오더니, 날 쳐다보고 있다.
과거의 나는 선생님의 눈동자 속에서 답을 갈구했었고, 그 찰나의 빛줄기 속에서 몇 마디 안 되는 가르침을 얻고자 했었다……
하지만 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날 바라만 볼 뿐이었고, 답을 주는 쪽은 내 자신이었다.
그렇다. 그는 심지어 그곳에 있지도 않다.
모두들.
만약 너희들 중 아직 빅토리아 공작을 신뢰하는 사람이 있다면, 지금 당장 저 여자를 따라나서도 좋다.
그 누구도 너희의 선택을 탓하지 않을 것이다.
군중은 잠시 술렁거렸으나, 그 누구도 떠나지 않았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네.
강력한 힘의 가호를 받길 원하는 건 우리의 본능 아닌가? 이는 결코 부끄러워 할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런 생각을 가진 건 나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난 꿈에서도 그 낡은 검에게 내 친구들을 지켜 줄 힘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정말로 그 누구도 죽지 않아도 될 테니까.
이건 그녀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너희들이 모르는 사이에 정말 많이 울었었다. 누군가 자신의 어머니를 구해 주지 않을까 상상하며 말이다.
그리고 너도 마찬가지다. 고개 숙이지 마, 네가 그런 생각을 한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너흴 호위하던 부대가 도망가지 않았더라면, 네 형제는 시체도 못 찾을 정도로 살카즈들에게 무참히 살해되진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너희 모두 이곳을 떠나지 않았다.
그건 진정으로 너희 목숨을 신경 써 줄 귀족이 없다는 걸 너희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너흰 정말로 타인의 힘에 기대며 보호만 받을 생각인가?
우리의 삶은 언제나 그랬다. 우리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사람과 사건이었지만 우리는 자발적으로 그것들을 숭배하고, 그것들의 노예가 되길 자처하였다.
학살, 감염, 포위, 그런 위기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지금까지 살아왔다!
우리 모두 고향에 돌아가고 싶고, 이 썩어빠진 전쟁을 끝내고 싶어 한다. 하지만 도망만 쳐선 이 전쟁을 결코 끝낼 수 없다.
가장 빠른 방법은, 바로 아직 런디니움에 숨어 있는 망할 전쟁의 주동자들의 턱을 날려버리는 것이다!
그 대공작들이 계속 나오지 않을 작정이라면, 우리가 직접 런디니움에 찾아가서 녀석들을 때려눕히자!
그 누구도 우리를 고향에 데려가 주지 않는다면, 우리 스스로 돌아가자!
그런 우리에게 의외의 선물이 하나 생겼다. 그건 바로 공작들이 가울에서 포기한 부대의 번호다!
'파라곤 부대', 그들은 일찍이 이런 영광스러운 이름으로 불렸다. 그들은 정예였고, 국가의 의지였으며, 혁혁한 전과였다.
하지만 그 이름은 현재 내 손안에 있는 작은 상자에 불과하다.
이 상자에 신비로운 힘 같은 것은 없지만, 우리는 이것을 들고 런디니움에 돌아갈 수 있다……
가서 그 전쟁을 일으킨 망할 녀석들의 얼굴을 힘껏 때려 준 뒤, 이 검은 물건을 공작들의 얼굴에 던지며 이렇게 말하자……
여기는 우리 땅이다!
나는 집에 돌아가고 싶다. 모두가 있었던 그 복싱장에.
그들도 마찬가지다. 모두 원래의 삶으로 돌아가고 싶어한다.
우린 누군가에게 의지해선 안 된다. 더 이상 정의가 자연스럽게 실현될 것이라고 믿어선 안 된다.
나는 온 힘을 다하여 수중에 있는 망치를 대지를 향해 휘둘렀다.
그때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그 순간 나는 더 이상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쾅'!
대지에 내리친 망치는 모든 소리를 지웠다.
'파라곤 부대!'
처음엔 글래스고의 소리가 침묵을 깨부쉈다.
'파라곤 부대!'
이어, 델핀의 소리가 그들의 소리와 한 몸이 되었다.
'파라곤 부대!'
나는 모두의 소리를 들었다.
'파라곤 부대!' '파라곤 부대!' '파라곤 부대!'
그러고 보니, 이상한 꿈을 하나 꿨는데……
어떤 금빛의 야수가 우리 캠프에서 산책을 하고 있었어.
좋은 징조 아닐까?
앞으로의 작전이 모두 순조로웠으면 좋겠어.
자경단이 우리보다 먼저 브렌트우드에 도착했으려나……
나중에 그쪽과 합류하게 되면, 우리 부대도 인원수가 훨씬 많아질 거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우리가 군대에 들어가게 될 거라곤 상상도 못했어.
난 '파라곤 부대'라는 이름이 마음에 들어.
그건 그렇고 비나, 정말로 무슨 계획이라도 있는 거야? 우리가 저 녀석들을 전부 데리고 런디니움을 되찾으면 되는 건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왕정군과 정면으로 싸우는 게 불가능해.
어쩌면……
이 길 위에서 더 많은 이들을 잃을 수도 있어.
……
내가 모두를 지킬 거야.
아니면, 더 이상 녀석들에게 누군가의 보호 같은 건 필요 없을지도 모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