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용병의 하루
환각이 사라지고, 일행은 핏빛 마법진을 발견하게 된다. 외드레르는 리치가 카즈델을 위해 분산 철수 계획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에 에르망가르드에게 살카즈들이 집에 돌아올 수 있도록 원거리 전송 수단인 '생명선'을 가져오겠다는 말을 전한다.
난 내 피가 혈관을 타고 흐른다는 걸 이토록 실감나게 느껴본 적이 없다.
혈액은 이리저리 부딪히며 계속 나아가고, 내 사지를 지나, 마지막에는 내 심장에 모여든다.
로도스 아일랜드에서 메딕 오퍼레이터들이 내 몸을 검사할 때면 항상 그…… 뭐더라, 이름은 잊어버렸는데, 아무튼 그것을 내 몸에 놓으려고 했었다.
그때 난 오퍼레이터들을 깜짝 놀라게 했었다. 이미 몸속에 오리지늄이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벅찬데, 또 무언가를 집어넣으려고 하니 상당한 거부감이 들었다.
지금은 나도 알고 있다. 우리는 이 피 덕분에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피에 산소가 있다는 것도 외드레르가 이야기해 준 적이 있다.
하지만 지금은, 이 느낌이 너무나도 싫다.
내 피라면 내 말을 들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게 싫다면 내 몸에서 나가든지.
난 허리춤에 있는 검에 손을 올렸다.
하……
W, 무슨 일이야!
괜찮아, 사혈요법일 뿐이야.
후우……
……
외드레르는 눈썹을 찡그렸다. 그 리치도 자신의 모자를 꼭 붙잡고 있다.
흥분이 드디어 가라앉았다. 아니, 우리가 적응했다고 하는 게 더 맞을 것이다.
이네스, 괜찮아?
난 멀쩡해. 그보단 너희가 나한테 설명해 줘야겠는데?
알았다, 이 돌들은 냉혹한 할망구에게는 통하지 않는 거야. 켈시라면 여기서 춤도 출 수 있을걸?
나도 그렇게 믿긴 하지만, 일단 네 상처부터 치료해.
걱정 마, 정확하게 동맥은 피해서 찔렀으니까.
그래서, 이건 살카즈를 상대하기 위한 장치인가? 피와 관련이 있는?
살카즈와 피라. 하, 어렵네 이거.
이 주술 장치들은…… 아직 완전히 가동된 게 아니에요.
으음…… 왠지 불안한 느낌이 들어 이곳에 왔더니만, 이게 원인이었군요.
어쩐지 선생님들이 런디니움의 사정에 대해 항상 지나치게 신중한 태도를 보이시더라니.
그럼 완전히 가동되면 어떤데? 모든 살카즈가 폭발해서 죽기라도 하는 거야? 그러면 뱀파이어 생귀나르가 우리 피를 다 모아서 빅토리아한테 뿌리는 거고?
이 주변에…… 바퀴 자국은 없다. 무언가를 운송한 흔적은 없어.
녀석들은 이 거대한 결정을 먼 거리에서 바로 이곳에 던져버리기라도 한 건가?
……이런 방법, 어디선가 들어 본 것 같기도 하다.
에르망가르드 부인…… 이것도 당신과는 무관한가 보군요.
당연하죠. 리치도 이런 건 못 해요. 우리가 연구하는 것도 여기 있는 '공간'이 아니고요.
또 한 가지, 방금 절 알고 있는 것 같던데요?
외드레르 씨…… 예전에 당신의 책을 본 적이 있어요. 당신의 책 복사본이 라이타니엔의 살카즈들 사이에서 돌아다녔거든요.
짐작가는 부분이라도 있으십니까?
제가 왜 당신들을 도와야 하죠? 당신들은 조금 전 제 큐브를 깨뜨렸잖아요.
쳇. 저 여자, 방금 날 째려봤다.
적어도 네 가슴팍에 있는 구멍에 폭탄을 집어넣진 않았잖아?
흠. 요즘 살카즈 용병은 모두 그렇게 죽고 싶어 안달이 난 건가요?
저 여자가 여기서 한 마디만 더 하면, 난 정말로 저질러 버릴 것만 같다.
……뭐, 됐어요.
일단 조금 전 그 환상에 대해 얘기해 보죠.
그건 일종의 흔적이에요…… 공간과 시간의 흔적.
방금 바퀴 자국을 찾고 있었죠? 그 환상이야말로 바퀴 자국이에요. 어떤 특수한 아츠가 이곳에 영향을 끼쳤거든요.
그건 오리지늄 아츠 같은 게 아니었습니다. 살카즈 주술도 아니었고요.
이 마법진은 확실히 뱀파이어와 연관이 있어요. 환상도 마법진과 연관이 있긴 하지만 직접적인 건 아니에요.
어쩌면…… 당신이라면 이 단서를 어딘가에 쓸 수도 있지 않을까요?
……리치들의 태도는 어떻습니까?
평소대로예요. 아무런 약속도 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저도 정보원을 통해 들었습니다. 최근 카즈델에도…… 몇몇 리치가 나타났다더군요. 평소대로라면 리치가 카즈델에 모습을 드러내는 건 흔한 일이 아닙니다.
……흠?
당신은 바벨을 떠나 감염자 조직에 가입했고, 마지막에는 런디니움까지 오게 되었어요. 그런데 어떻게 아직도 카즈델에 정보망을 가지고 있는 거죠?
당신 정말로 용병이 맞나요? 제가 보기엔 당신 정도의 능력이라면 충분히 라이타니엔에서 게사츠슈베이터가 될 수 있을 것 같거든요. 아, 아츠는 그리 대단하지 않지만요.
개인적인 습관 같은 겁니다.
……흐음, '습관'이라.
전장이 이리도 넓은데, 만약 제가 정말로 마음 먹고 사라지기라도 한다면 절 막을 수 있을 것 같아요?
혹시…… 당신도 저흴 찾고 계셨던 겁니까?
그런 셈이죠. 당신한테 조금 흥미가 생겼거든요.
살카즈들은 은어를 사용하지 않으면 대화가 안 되는 거야?
이네스가 처음으로 대화에 끼어들었다. 짜증이 난 것 같다. 너무 좋다.
그녀가 주의를 끄는 사이에 내가 이 리치인가 뭔가를 처리하면 될 것 같다.
당신조차 카즈델의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건, 그 남매가 보고도 못 본 척한다는 거겠군요.
우리는, 음, 테레시스를 위해서 뒷일 같은 걸 준비해야 해요. 우리는 지금 카즈델을 인계받고 있어요. 다들 빅토리아에 와 있으니 누군가는 남아서 고향을 지켜야겠죠.
뒷일이라니? 뭐, 쫑파티라도 준비하는 거야?
그래요, 그건 계획의 첫 단계죠. 건국기념일 같은 것도 만들어야 하고요.
……
하하, 농담 아닌데……
……그건 정말로 계획의 첫 단계예요.
테레시스와 테레시아는 물러설 생각이 전혀 없어요. 그 두 사람은 정말로 런디니움을 전장으로 삼아 온 대륙이랑 전쟁을 하려나 봐요.
우리도 그 자신감이 어디서 나온 건지는 잘 모르지만, 그 남매의 계획이라면 분명 미리 준비를 하고 있을 거예요.
그러니까 만약 그 둘이 정말로 성공한다면…… 우린 정말로 카즈델의 낙원을 재건하게 될 수도 있어요.
……만약 실패하면요?
만약 살카즈가 이곳에서 실패를 겪게 된다면, 살카즈가 잃는 것은 한 세대의 젊은이들일 겁니다. 어쩌면 나라의 미래를 짊어질 모든 젊은이들을 말이죠.
200년 전의 그 원정 이후, 대부분의 국가들은 카즈델의 현상황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고, 그리 관심을 가지지도 않습니다.
현재까지도 빅토리아의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이들은 대부분 카즈델이 단순한 폐허에 불과하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하지만 내전이 발발하기 전, 테레시아 전하의 계획 아래, 카즈델에는 이미 이동도시의 초기 모델이 존재했었습니다.
하지만 테레시스가 모든 것을 엉망으로 만들었어. 지금의 카즈델은 하나의 거대한 주술 견인기에 불과해. 그것도 움직일 때마다 부품이 하나씩 떨어지는 그런 물건 말이야.
카즈델은 애초에 이른바 전쟁이라는 것을 감당할 능력이 없습니다. 하지만 섭정왕은 결국 전쟁을 일으켰어요.
전쟁이 발발한 이후에는 분명 각 진영의 스파이들도 카즈델에 접촉하기 시작했을 겁니다. 방관만 하고 있는 그 나라들의 사람들은…… 자기 영토 내의 살카즈들을 어떤 눈으로 바라볼까요?
음, 당신은 비관적인 사람이군요. 나쁘지 않네요, 저도 그렇거든요.
그래서 계획의 두 번째 단계에 대해서 말인데…… 지금 카즈델에 남아 있는 리치들은 이미 카즈델을 조각낼 계획을 세워뒀어요.
만약 테레시스가 실패한다면 카즈델은 그 즉시 뿔뿔이 흩어지게 될 거예요. 아마 십수 개 정도로 나뉘게 되겠죠……
그리고 각각 가지고 있는 거주 구역과 함께, 으음, '씨족' 단위로 황야의 가장 깊은 곳에 숨어 살게 될 거예요.
노선을 계획한다거나, 생산의 균형을 맞춘다거나, 카즈델을 위한 이동도시를 확보하는 건 결코 무의미한 일이 아니에요. 살카즈에겐 다른 인간들의 적의야말로 진정한 재앙이니까요.
카즈델은 또 다른 방랑의 시대를 맞이하게 될 거예요.
또 방랑인가.
이 무슨 헛소리란 말인가,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건 방랑이 아니라는 얘기인가? 언제는 우리가 이동도시에서 재앙 구름을 구경하며 편안하게 차 한 잔이라도 마신 적이 있었던가?
……
카즈델은 이미 끈끈하게 단결되어 있습니다. 비록 이건 제가 원하는 형태의 단결은 아닙니다만…… 그래도 결과만 따지고 보자면, 테레시스가 확실히 해낸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단결이란 단순히 복수와 살육을 반복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 단결이 원한과 전쟁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것이라 해도 말인가요? 분명 쉽지 않은 길일 거예요, 외드레르 씨.
……
카즈델은 단순한 하나의 도시가 아니라, 카즈델을 고향으로 여기는 사람 모두를 뜻하는 거예요.
원래 계획대로라면 카즈델에는 많은 거주민들이 필요하지 않았어요…… 군사위원회도 우리가 사람들을 잔뜩 데려가는 걸 허락할 리가 없고요.
우린 빅토리아에서의 전쟁을 끝내야만 합니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원한을 거둬들일 수 없다면, 적어도 그 원한의 힘을 활용해서 카즈델의 기반을 튼튼하게 만들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카즈델의 미래를 위해선 생명 하나하나 모두 중요합니다.
뭐든 말은 쉽죠……
저희가 방금 얘기했던 먼 거리에서 물자와 인원을 운송하는 수단 말입니다만, 이건 아마 저희가 계속 조사하던 군사위원회의 '생명선'일 겁니다.
전 이 '생명선'을 찾을 겁니다. 이것이 우릴 런디니움으로 오게 만든 이상…… 우릴 고향으로 돌려보낼 수도 있겠죠.
모두가 매장 당하기 전에 말입니다.
……그래요.
다만……
성공하지 못할 수도 있어요. 당신은 그저 용병일 뿐이니까요.
“모두에게 돌아갈 집이 있도록.”
……
테레시아.
난 계속 이 전쟁에서 그 이름을 멀리 떨어뜨리려 노력했다.
전하는……
이전과 달라진 게 하나 없는 이 전쟁에서, 과연 누가 안식을 찾을 수 있을까?
하하, 아마 그 망할 테레시스가 부린 속임수일 것이다. 그녀석은 전하를 죽이고 모독하기까지 했다.
난 반드시 테레시스가 무릎 꿇고 사과하게 만들 것이다.
사과가 끝나면 그 망할 머리통을 날려버려야지.
……역시 당신에게 접촉하는 건 정답이었어요. 전 당신의 대답을…… 바벨 잔당의 뜻으로서 다른 리치들한테 전달할 생각이에요.
감사합니다.
그건 그렇고 당신들, 제 큐브를 터뜨렸잖아요! 설마 저더러 걸어서 돌아가라는 건가요?
북서쪽으로 8km 떨어진 곳에 살카즈 운송 기지가 있어. 그 녀석들의 차를 뺏으면 돼.
혹시 도움 필요해?
……됐어요.
또 그 여자한테 잡혀서 제가 당신들이랑 무슨 거래를 했는지 들키고 싶진 않네요.
그럼, 행운을 빌게요. 그녀를 만나고 난 이후에도…… 살아남아서 꼭 당신들의 말을 지켰으면 좋겠어요.
'그녀'?
잠깐만.
뭔가…… 익숙한 느낌 안 들어?
무슨 말이야?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나도 잘 모르겠다.
역겹네, 이런 감성적인 말은 외드레르나 할 법한 소린데.
……그렇지만 정말로 뭐였던 걸까?
그리 멀지 않은 산 정상에 누군가 앉아 있다. 원래라면 흩어져 사라졌어야 했을 그 환상의 끝자락에.
그녀는 아무 생각이 없는 듯 그저 앉아만 있었다.
그녀의 분홍색 긴 머리는 늘 그랬듯 어깨를 걸치며 늘어뜨러져 있었다.
게다가 저…… 슬픈 눈빛……
나는 눈길을 돌렸다.
……그럴 리가?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아니, 저건 환각이 아니야……
그녀를 본 순간부터, 난 그것이 환각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바로 그녀였다.
……전하?
그녀가 떠났다.
나는 손을 내밀어……
아니, 그만뒀다.
어쩌면 다음 기회로 미뤄두는 것이 좋을 지도.
어차피…… 저게 진짜일 리도 없으니까.
저건 단지…… 정말로 비슷한 무언가일 뿐이야. 대부분의 멍청이들은 속아넘어가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