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2밀려오는 파도
왕의 안식처로 통하는 지하 통로에서 시즈는 과거의 일부 기억을 떠올린다.
도착했다. 이…… 왕궁과 공작 저택을 이은 길.
(작은 목소리로) ……황금빛 갈기.
무슨 말 했어, 비나 씨?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나도 그들을 못 본 지 오래됐어.
얼마 전만 해도 우리가 여기를 통해 도망쳤는데, 오늘 또 이 오래된 길을 걷고 있네. 이 길도 이렇게 자주 밟힌 건 아마 처음이겠지.
원래는 비상 상황을 대비한 통로였는데.
안타깝지만 왕실이든 공작이든 어느 누구의 비상사태에도 도움이 되지 않았네.
용병, 우리 모두에게 술 살 생각이 아니라면 그딴 농담은 하지 마.
알았어.
알레데일, 예전에 내가 이 길을 따라 왕의 숨결을 들고 왔다고 했지……?
그런데 난 아무 기억도 안 나.
그래서 너무 불안해. 마치 내가 일부러 엄청난 책임을 피하려고 하는 것 같아서.
비나, 괜찮아. 그때는 너무 어렸어.
이제 막 말을 배운 아이에게 그 책임을 떠넘기려고 한다면, 그 사람들이야말로…… 정말로 무책임한 거야.
미안, 내가 어쩌면 당신과 가까운 사람을 욕했을지도 몰라.
훗, 사실 나도 네 말에 동의해.
그렇지만 결국, 우리는 이곳에 다시 돌아왔어.
'책임', '기적'? 당시 사람들이 내게 어떤 기대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신경 쓰지도 않아.
다만, 내가 다시 이 자리에 선 이상 아직도 내가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거지.
그 일에 어떠한 거창한 이름도 붙일 생각이 없어. 나는 그저…… 사람들이 평화로운 생활을 되찾길 바랄 뿐이야.
하하…… 그렇다면 목표 달성에 점점 가까워진 것 같은데.
자, 용병들, 저기 저 막힌 벽을 부숴버려. 큰 소리 나지 않게. 들키면 곤란하니까.
이제부터는 지하로……
알았어, 내가……
어둠 속에서, 그들의 등 뒤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황금빛 갈기……
비나, 왜 그래?
……
아무것도 아니야. 계속 가자.
추격병은 없네.
우리가 밑으로 갈 거라고 살카즈들이 예상했을 리가 없잖아?
위에서는 열심히 싸우고들 있겠지.
그 참혹한 전투에서 희생되는 게 우리 동료일 수도 있어.
사실 알레데일이 이번 계획을 내놓았을 때 나는 한참 망설였어.
나는 원래 자경단 전사들…… 그리고 로도스 아일랜드 모두와 함께 싸워야 했는데.
박사의 계획도 우리의 행동을 숨기기 위한 거잖아.
지상의 상황이 어떻든 간에 우리는 반드시 왕의 숨결을 얻어야 해.
그것이 살카즈 계획을 파괴할 수도, 심지어 전세를 주도하는 열쇠가 될 수도 있어.
그 검은…… 이야기 속에서만 들어봤는데~
원래는 아슬란 선조들의 검이었어.
전설에 의하면 이 검은 초원의 신적인 존재가 아슬란을 위해 만든 건데, 한 고대의 파디샤가 이 검으로 페이 군주의 머리를 벴었대.
그 후에 아슬란이 빅토리아의 왕이 되면서, 이 검도 자연스레 왕권의 상징이 된 거지.
일부 서적에는 이동도시가 없던 시절에 왕들이 이 검으로 재앙을 갈라버렸다는 기록도 있어.
수백 년 동안 런디니움을 멸망시킨 폭풍은 단 한 번도 없었잖아.
사람들은 이 왕의 숨결만 있으면 그 어떤 강적도, 그게 막강한 페이든 무서운 재앙이든, 모두 이길 수 있다고 믿고 있지.
……
설마 그걸 정말 믿는 건 아니지~?
난 믿어.
나는…… 비나를 믿어.
그건 다른 얘기잖아. 나도 당연히 비나를 믿지. 하지만 이건 누가 봐도 그냥 지어낸 이야기 같은데……
사실 '재앙을 가른다'는 것은 비단 아슬란 왕권을 신격화하기 위한 말이 아니라, 실제로 가능한 일이야.
만약 폭풍을 일으킬 수 있는 더 샤드 빌딩이 바깥세상을 향한 빅토리아의 창이라면, 재앙을 가르는 왕의 숨결이야말로 빅토리아의 가장 견고한 방패 아닐까.
그 창은 누구나 다 알고 있지만, 이 방패만큼은 아직 전설 속에만 존재하고 있어.
만약 우리가 이 힘을 손에 넣을 수 있다면, 분명 살카즈의 야망을 막을 수 있을 거야.
알레데일, 너는 국검에 대해 매우 잘 알고 있네.
내가…… 그건 컴버랜드의 책임이니까.
너 그 검을 직접 본 적 있어?
……
응, 그런데 딱 한 번.
그때 내가 본 건 마치 꿈에서나 나올 법한 것들이었어……
그 검이 어떻게 생겼는데?
음…… 엄청 아름다웠어.
왕의 숨결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는 것 같아. 그걸 보는 순간 마음속으로 그 어떤 것도 이겨낼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생겨.
정말 그렇게 대단해~?
전설…… 전설이잖아.
혹시 살카즈를 말하는 게 아닐까? 그 검이라면 살카즈를 잘 벨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네 머릿속엔 베고 자르는 것밖에 없지~?
야, 만약 비나가 망치로 저번에 우릴 쫓아오던 그 뱀파이어 생귀나르인가 하는 녀석의 머리를 내려쳤으면, 한 200년 후에 그 망치도 이런 전설이 생길걸~?
하하, 그럴 수도 있겠다.
그때가 되면 그 망치를 선물한 신적인 존재가…… 너희 로도스 아일랜드가 되겠네.
……클로저 씨가 알면 엄청 기뻐하겠는데.
“황야의 신의 함선! 왕의 귀환!”
그건 이야기가 아니라 사실이잖아!
20년 후, 우리 집 앞에서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입에 가장 많이 오르내릴 이야기는 틀림없이 “위대한 왕 비나가 런디니움의 시민들을 이끌고 살카즈를 몰아내다”일 거야!
그렇다면 나는 잘 고민해봐야겠네. 어떻게 하면 비나의 이야기가 더 멋지게 들릴 수 있을지…… 음……
……이건 내 이야기가 아니다.
용감한 한나 '인드라' 잭슨, 지혜로운 케이트 모리건, 충성을 다하는 이사벨 몬터규.
그리고…… 고결하고 정직한 알레데일 컴버랜드.
이건 우리 모두의 이야기야.
……아하하.
계속 가자.
그렇지 않으면 이야기는 진행되지 않으니까.
왕의 숨결.
시즈는 속으로 자신이 그 검을 본 적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희미한 기억의 단편, 어렴풋한 목소리뿐이지만.
사랑스러운 우리 딸, 검을 꼭 움켜쥐어.
너를 부르는 소리를 들었니?
느껴봐……
소리를 느끼고……
빅토리아를 느껴봐.
궁전이 불타고 있다.
그녀는 일어나서 밖에 어떤 공연이 펼쳐지고 있는지 보려고 했을 뿐이었다. 왕의 탄신에 밖은 항상 떠들썩했으니까.
하지만 그녀가 본 것은 불길, 노여움을 자아내고 있는 커다란 불길이었다. 그리고 제복을 입은 수많은 사람들이 이리저리 도망 다니거나, 바닥에 쓰러져 있는 모습이었다.
땅이 끊임없이 흔들렸다. 시즈는 순간 침대 머리맡에 놓인 유리 파울비스트가 걱정되었다. 그것은 그녀가 최근에 받은 선물이었고, 그녀는 매일 밤 그 정교한 선물을 끌어안아야만 잠이 왔기 때문이다.
알렉산드리나 전하!
저곳으로 돌아가시면 안 됩니다. 그쪽은 위험합니다! 도망쳐 나오셨다니 다행입니다. 놈들의 목표는 폐하와 전하입니다……
폐하…… 폐하께서……
아니요, 전하께선 아실 필요는 없습니다.
전하를 모시고 이곳을 떠나라고 폐하께서 마지막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비나, 왜 그래? 지하에 들어온 후부터 자꾸 딴생각하는 것 같은데?
내가…… 갑자기 옛일이 떠올라서. 내가 잊은 줄만 알았던 일들이.
괴로운 기억? 아니면 즐거운 기억?
누군가의…… 목소리야.
……전하, 여기서부터는 혼자 가셔야 합니다.
얼마 전에도 이곳에 온 적이 있으십니다. 기억나시죠?
놈들이 쫓아오고 있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이 통로를 따라 계속 도망치셔야 합니다.
절대 뒤돌아보면 안 됩니다.
시즈는 장교의 말대로 앞으로 뛰어갔다.
앞은 캄캄했지만, 그녀는 등 뒤에서 쫓아오는 별처럼 부드러운 빛이 더 무서웠다.
그녀는 계속 달렸다. 시작과 끝이 어디인지는 진작에 잊었고, 눈물도 거의 마를 지경이었다. 하지만 눈앞의 통로는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었다.
달리고 있는 와중에 그녀의 몸 아래에서 갑자기 커다란 황금빛 갈기가 나타났다.
그녀는 따뜻한 금빛을 꽉 움켜쥐었고, 자신이 마치 네 발로 달리는 야수가 된 것같은 느낌이 들었다.
더 이상 그녀는 쫓아오는 악몽이 두렵지 않았으며, 더 이상 자신이 잃은 모든 것 때문에 흐느끼지 않고, 그저 어둠 속을 자유롭게 달렸다.
환영이 모두 사라지자 기억은 썰물처럼 밀려 들어왔다.
그제야 시즈는 자신이 긴 통로에 서 있는 걸 발견했다.
통로의 끝에는 문이 하나 있었다. 그 문은 삶과 죽음을 갈라놓았다. 하지만 삶에서 죽음이든, 죽음에서 삶이든 그 문은 오직 빅토리아의 왕을 위해서만 열린다.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