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짝이는 불꽃
길을 재촉하다 미노스 국경 근처에서 쓰러진 헤비레인, 깨어난 그녀의 앞에 미노스의 제사장 '팔라스'가 있었다.
“여기는 이제 네가 머물 곳이 아니야.”
“도망가…… 도망가는 게 좋을 거야. 전사여, 너의 가엾은 운명은 이미 결말이 났어. 이제 너에게 안식처란 어디에도 없다.”
“그래, 너의 삶은 우리에게 아무 의미도 없는 거야.”
……그리하여 적의 전고 소리에도 두려움이 없던 그녀는, 적의 잔인한 외침에도 물러선 적이 없던 전사는, 그렇게 거기서 도망쳤다.
아크로티, 사르곤 주변의 미노스 마을 지역
연일 계속되는 장마 때문에 건장한 젊은 전사들조차 몸져누울 정도였다.
하물며 절망에 빠진 가여운 사람이 어찌 그걸 감당할 수 있겠는가.
대체 어떤 사정으로 젊은 그녀가 고향을 떠나야만 했을까?
대체 어떤 과거가 낯익은 고향을 돌아볼 때마다 그녀의 가슴을 미어지게 만들었을까?
그녀는 누구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았다.
도망가자, 낯선 곳으로 가자.
그러나……
상황은 어떤가요?
2시간 동안이나 발악하다가 이제 겨우 진정이 된 것 같아. 처음 발견한 지점에서 10미터나 전진했더라고.
그 여인이 만약 프로 스파이라면 아마 체력을 비축하기 위해 죽은 척이라도 했을 거야. 우리의 주의를 끄는 게 아니라.
하지만 이것 또한 함정일 수도 있어. 미노스인들의 선량함과 동정심을 이용해 위험을 무릅쓰고 선행을 유도할지도 몰라.
네, 미노스 사람이라면 아마 양심의 가책에 견디기 힘들었을 거예요. 그렇다면 타향의 전사인 당신은, 그녀의 행동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흥, 계략이야.
내 생각엔 역시 미끼일 가능성이 커. 너도 알지? 사르곤인의 음흉함과 교활함 때문에 이 마을이 얼마나 오랫동안……
그건 또 다른 얘기죠. 제가 당신에게 그녀를 감시하게 한 건, 그러한 억측과 의심보다는 그녀의 무고함을 확인받고 싶기 때문입니다.
마을 사람들의 목숨을 걱정하고 있는 당신의 마음은 감사드립니다…… 그게 선의든 아니든.
(썩은 미소)
그래서 살카즈 전사님, 지금 우리 방문객의 상황은 어떤지 그것만 알려주시겠어요?
한마디로, 생명이 위험해.
장비나 무기로 봤을 땐 전사 같다. 아마 사르곤 쪽에서 왔겠지. 지금은 미노스 땅에 누워 마치 물 밖에 나온 물고기처럼 의미 없이 발버둥만 치고 있어.
그녀 혼자였나요?
지금까지는…… 그 뒤로는 어떻게 될지 장담 못 해.
음, 그렇다면……
저기, '팔라스' 제사장.
네, 무슨 일이죠?
내가 주제넘은 짓을 하고 싶은 건 아니지만, 미노스인이 날 고용했고 너에게 우리들의 지휘를 맡겼으니, 이 말을 해야 할 것 같다……
너는 단순한 간호사도 아니고, 동정이나 용서밖에 모르는 순수하고 착해빠진 얼간이 제사장도 아니야.
너는 미노스인의 지휘관이자, 이곳의 전사를 육성하는 지도자이며, 여기 미노스 마을들이 신봉하는 '여신' 같은 존재야.
네가 그녀를 받아들인다면 사람들도 그녀를 환대해야 할 거야. 너를 대하듯이 그녀를 존중해야 할 거다. '여신'이 데려온 사람이니까.
하지만 지금, 그 전사에 대해 명백한 것은 십중팔구 사르곤인이라는 것이야……
사르곤과 정전 협정을 맺기 전까지, 그 여인은 미노스인이 경계하고 대항해야 할 적군임은 틀림없다.
……
전사님, 당신의 말에는 진지함이 있고 지혜가 돋보였어요. 경의와 직책 때문에라도 저는 그 말에 마땅히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다만, 당신 말대로 우리의 판단은 상반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슬프긴 하나 이 또한 반드시 마주해야 할 현실입니다.
분명 저는 그녀를 받아들이려고 생각하고 있어요. 적어도 그녀를 치료할 것입니다.
그녀는 아직 젊고 지금은 사경을 헤매고 있지만, 어떤 경위가 있더라도 지금의 그녀는 우리에게 위험하지 않다고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녀 배후에 수백 수천 명의 사르곤 병사가 숨어있을 가능성…… 그에 대한 판단은 당신이 확인해야 할 일이에요.
현시점에서 위험이 없는 이상 저희는 전쟁이란 핑계로 생명을 구하는 것을 포기해선 안 됩니다.
(오지랖은……)
쓸데없는 참견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모두 돌려보내고, 당신에게만 그녀를 감시하도록 지시한 것입니다.
살카즈여, 가여운 살카즈. 냉혹하고 냉정한 것으로 알려져 그것을 삶의 신조로 삼고 있습니다. 즉 당신들 대부분이 그 냉혹을 자랑스럽게 여긴다는 것이죠.
적재적소, 잘하는 일을 시켜라, 저는 이 원칙에 따라 명령을 내립니다.
당신은 자신의 임무를 확실하게 완성하면 됩니다. 나머지는…… 자연스레 해결될 방법이 있을 거예요.
네가 내 말을 귓등으로 흘려보내고 생각을 바꿀 마음이 없다면, 그 여인을 누가 감시하든 다 똑같은 거 아닌가?
당신은 지난 3개월간 이곳에서 용병으로 지냈으니, 이곳의 상황을 잘 아실 거예요.
미노스인이 감시했다면 두 시간은커녕 십 분 만에 죄책감이 그들의 순수한 마음을 갉아먹어, 양심을 거역하지 못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겠죠……
그런 상황에서 배신이 정말로 일어난다면, 마을 사람들의 성실한 마음은 얼마나 크게 흔들릴까요?
하아, 그러니까 너도 여기 마을 사람들이 쓸데없이 호의적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잖아. 원수일지도 모르는 자의 목숨까지 소중히 여기다니.
살카즈, 당신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알아요. 이미 일부 마을 사람들은 당신을 인정했고 심지어 당신을 자식처럼 생각하는 노인들도 있어요. 이건 선의에 의한 수용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원하는 것은 이게 아닙니다. 당신은 사랑에…… 적어도 동족이 아닌 사람에게 받는 사랑에 대해 금전적 보상보다 그다지 가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지요.
거야 우리한테는 쓸모없는 거니까.
당신들은 자신만의 생존법이 있겠죠. 그건 제가 관여할 바 아니지만.
그러나 전 느꼈어요. 제가 말한 살카즈의 신조는 당신의 처음 모습이었어요. 처음 만났을 때 당신은 분명 순순한 선의도 아닌, 그렇다고 철저한 악도 아닌 마음을 품고 있었죠.
지금은 달라요. 미노스 병사들, 그리고 마을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당신은 사려 깊고 자신의 의지로 무기를 휘두르는 명석한 전사가 되었어요.
당신의 경고는 일리가 없지 않아요. 다만 사르곤이 이 시점에서 공격해올 이유도 없고, 굳이 어설프게 '미끼'를 던져 함정을 팠을 리가 없다고 판단합니다.
사르곤이라면 미노스인의 착한 마음을 이용한 함정보다는, 아마 정면으로 거침없이 쳐들어와 살육과 약탈을 감행하는 걸 더 선호할 겁니다.
알았다, 알았어. 네가 맞는 걸로 치자.
자, 그럼 다시 사르곤에서 온 젊은 전사 얘기를 해볼까요.
저는 그녀를 도와주고 싶은데……
당신도 경고했듯이 그녀를 경솔하게 마을로 데려오는 것은 현명한 판단이 아닙니다.
눈에 띄는 외상은 없고, 수술이 필요한 심각한 사태도 아닌 것 같군요.
아무튼 제가 그녀를 치료할 테니, 결과가 어떻든 책임은 제가 지겠습니다.
그 말은 국경선 2킬로미터도 안되는 곳에, 심지어 주둔군 거점보다 더 먼 곳에 텐트를 치고 거기서 그 여인을 치료하겠다는 거야?
네, 거점이랑 별 차이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너의 신분을 잊지 마. 너는 마을 사람들의 신앙이고, 그들을 사르곤의 굴레에서 해방 시켜 줄 유일한 희망이야.
그들은 너를 '승리의 여신'으로 부를 정도로 너를 좋아해. 그런데도 너는 이런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병사님, 언행에 주의해주세요.
……쳇.
아무 죄가 없을지도 모르는 젊은이가 두 시간 동안 의식을 유지하며 필사적으로 살아가려고 합니다.
그녀는 이미 당신의 시험에 통과했습니다. 누구보다 함정에 민감하고 조심스러운 당신 같은 살카즈도, 그녀가 스파이거나 미끼라는 증거를 내놓지 못했으니까요.
게다가 제 마음은 죄책감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더 이상 내버려 둘 수 없습니다.
너의 열변에 나는 아무 의견이 없어. 다만…… 그 여인이 깨어나면 너랑 지금처럼 대화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눈을 뜬 즉시 싸울 준비를 하라고.
......
그 시각 젊은 사르곤 전사는 꿈속에서 고통받고 있었다.
마지막 의지로 간신히 몸을 내밀고 있었지만, 이내 시야가 칠흑으로 물들었다.
오랜만에 얻은 긴 잠. 따스한 온기가 그녀를 감쌌다. 그러나 따뜻함에 익숙하지 않은 그녀는, 꿈속에서조차 경계를 풀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꿈에서 도망쳤다. 아늑한 덫으로부터, 피부에 닿은 포근한 촉감으로부터.
……누구죠?
어머, 깨셨나요?
……!!
긴장하지 말아요. 꽤 오랫동안 잤어요……
쿠란타 병사는 벌떡 일어나 경계하는 눈빛으로 주위를 살폈다.
좁은 공간에는 낯선 포르테 여인과 몇몇 잡동사니뿐이었다.
……아하, 무기를 찾고 계셨나요? 자, 여기.
……
쿠란타 전사는 재빨리 무기를 집어 들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녀를 향해 휘둘렀다.
그러나 좁은 공간은 그녀의 움직임을 방해했고, 무기는 천막에 부딪혀 둔탁한 소리를 내는 데 그쳤다.
눈앞의 포르테 여인은 침대 옆에 앉은 채 놀라는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거침없고 날렵한 솜씨군요. 낯선 방문자님, 분명 당신은 자신의 실력에 자부하는 훈련된 병사입니다.
아쉽게도 여기서는 제대로 실력을 발휘할 수 없네요.
……
질문에나 대답해요. 그렇지 않으면 이 무기로 당신을 때려 부술 겁니다. 쿨럭쿨럭……
네, 알겠습니다. 직성이 풀릴 때까지 질문에 대답해 드리지요.
여긴 어딥니까?
제 텐트예요. 치료를 위해 당신이 편하게 쉴 수 있는 장소가 필요했습니다.
쓸데없는 말 말고! 텐트 밖은 어디고, 누가 있죠?
우리 병사가 있습니다, 미노스인이죠.
(*사르곤 욕설*, 어째서 또 미노스 군이랑 엮인 거지?)
당신은 사르곤에서 넘어와 우리 미노스 국경 근처에 쓰러져 있었습니다. 저희 병사가 당신을 발견했을 때, 여전히 기어서 나아가려고 발버둥 쳤다더군요.
……여기는 미노스인가요?
네. 당신의 짐은 정리해서 발 옆에 놔뒀어요.
당신은 나침반이 완전히 고장 난 것도 모를 정도로 엄청 배고팠고 힘들었던 것 같더군요. 방향을 가늠할 수 있는 모든 기기도 고장 났고요.
……
아까 말했듯이 밖에는 전부 미노스 병사들입니다. 이런 데서 혼자 무력으로 뭘 해결하려는 것은 현명한 선택이 아니라고 봅니다.
이 텐트를 어떻게 떠날지는 당신에게 달렸습니다. 좋게 마무리 짓고 태연하게 걸어 나갈 수도, 혹은 교섭을 거부하고 홀로 떠날 수도 있습니다. 물론 후자는 그리 권하는 편이 아니지만.
그걸 어떻게 증명할 수 있죠?
저는 제사장입니다. 이 마을 사람들과 병사는 신앙심이 두터워 제 말을 잘 따라줍니다.
나는 당신들이 어떤 인간인지 알아요. 그런 소리는 들어 본 적도 없고요.
이곳은 지금 사르곤 부족과 한창 전쟁 중입니다. 당신이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살았다면, 아마 사르곤 마을에서 들어 본 적 있었을 겁니다.
……그렇다면 여긴 아크로티 근처인가요?
맞습니다.
저기, 사르곤에서 온 방문객님, 존함은 어떻게……?
질문하지 말아요.
흠, 이건 공평한 교섭이 아닌데요. 적어도 제게 너무 불리한 게 아닙니까?
쿠란타 병사는 현재 상황에 대해 생각을 정리하기라도 하듯 갑자기 눈살을 찌푸렸다.
아까 제가 미노스 영토에서 쓰러진 후 당신이 저를 치료했다고 그랬죠?
병사들의 무자비한 심문보다는 제가 나서는 편이 대화의 여지가 생길 테니까요.
대화?
당신과의 대화 말입니다, 젊은 사르곤 전사님.
당신은 미노스와 사르곤의 국경 근처에서 갑자기 쓰러졌습니다. 뒤에 기세등등한 원군이 보이지 않았기에 저는 당신을 적이 아니라고 판단했고요.
이곳 아미르도 결코 좋은 사람이 아닌 걸로 알고 있어요.
전쟁은 당신들과 그들 사이의 일이지, 저랑 무관합니다. 저는 그저 여길 떠나고 싶을 뿐이에요.
아하, 역시 그렇죠? 그럼 무기를 내려놓고 저랑 대등하게 대화하시죠. 적어도 이쪽의 성의를 보여줄 기회는 줘야 될 거 아닙니까?
당신 말은…… 너무 어려워요. 뭔가 괴이해요.
으음…… 병사들한테도 가끔 그런 소리를 듣습니다만, 제 본의는 아닙니다. 영웅의 전당에서는 사람들에게 가장 친근한 제사장으로 칭송받고 있는데……
어쨌든 전 당신들의 병사든 장관이든 누구와도 만나고 싶지 않아요. 게다가 저는 이제 사르곤의 용병도 아니니까요.
단지 여기를 떠나고 싶을 뿐, 다른 건 상관없어요.
그래요? 알겠습니다, 그런 거라면……
(꼬르륵……)
……
……음.
죄 없는 전사님, 젊은 나이에 밀림과 대지를 씩씩하게 거니는 여행자여, 우선 무기를 내려놓고 식사를 하는 게 어떻습니까?
필요 없어요…… 으윽……!
괜히 얼마 안 남은 기력까지 쓰면서 서 있지 말고요. 안심해요, 저는 마을의 제사장이고 당신의 치료를 담당할 뿐입니다.
대화가 잘 마무리되어 당신이 이 텐트를 떠날 때까지, 저도 밖에 있는 병사들도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까, 대화할 게 없다고요.
(꼬르륵……)
(안돼, 배가 너무 고파……)
식사부터 하세요, 이름 모를 여행자님. 당신의 무기는 성한데 몸이 지나치게 허약해져 있으면, 전사로서 당연히 안심할 수 없겠지요?
당신은 지금까지 미노스인과 왕래해 본 적이 없을 거예요. 기껏해야 소문으로 들은 정도겠죠. 미노스 병사들은 명령이 떨어질 때까지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특별한 전시 상황이라 당신에 대한 최소한의 경계는 필요하다는 걸 이해해 줬으면 합니다. 참고로 미노스 병사들은 매우 예의 바르답니다……
그럼 왜 저를 도와주셨죠?
음…… 일종의 후천적으로 길러진 미덕이라 해야 하나요? 때로는 선량함이 객관적이고 이성적으로 판단하게 해주죠.
그러면 손에 든 무기는 무슨 뜻이죠?
아…… 그러고 보니 당신은 저와 비슷한 무기를 다뤄서 저의 무기를 한눈에 알아챘군요.
역시……!
아니, 제 말을 끝까지 들어 보세요. 당신의 무기는 매우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아마도 사르곤의 뛰어난 장인 솜씨겠죠.
당신도 분명 그걸 소중히 다루고 익숙하게 사용했을 겁니다. 그러니까…… 제 무기를 보면 어떻게 쓰이는지, 그리고 저의 실력이 얼마나 되는지 대충 감이 오겠죠?
……
당신이 저를 의심하는 것처럼, 저도 당신의 정체를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당신의 모습을 보세요! 기진맥진한 것은 물론, 장비도 그렇고 가방 속의 물건들도 모두 소진되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주목할 점은 당신의 무기에는 새로 생긴 흠집이 없다는 겁니다. 즉 당신은 최근 얼마 동안 전투를 하지 않았다는 증빙이죠. 이런 것들로 미루어 볼 때 저는 당신을 두려워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엔 싸우겠다는 거네요.
아니죠! 무기는 결코 당신과 협상하기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저는 무기를 내려놓겠습니다.
자! 사르곤 여행자님, 이제 안심하고 식사를 하세요. 당신이 우리의 진짜 적과 무관하다는 것을 저는 완전히 믿고 있습니다.
당신이 앞으로 어떤 선택을 하든 체력을 생각해서라도 이 맛있는 공짜 식사를 이렇게 낭비해서는 안 됩니다.
……아, 드디어 나왔네.
살카즈……
뭐야, 내 덩치와 뿔을 보고 쫄았나?
뭐……!
혐오와 공포, 첫눈에 그렇게 꺼리는 표정은 내가 또 여태까지 *살카즈 욕설*나게 많이 봐왔지.
이해하세요, 용감한 전사님. 당신이 여기 있는 건 아무런 잘못이 없습니다.
쳇, 너는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쟤는? 쟤도 네 말을 믿을 거 같아?
저기…… 밖에 미노스 병사들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요?
벌써 점심시간이야. 밥 먹고 술도 좀 마시고 노래 부르고, 거기다 시까지 읊조린 후에야 녀석들은 돌아와. 그러니까 나 같은 살카즈가 망을 보는 거지.
흠, 역시 제 공덕이 아직 부족했나 보군요. 미노스 병사의 배려 깊은 도량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만……
만나지 않아서 더 다행이네요.
저는 바로 떠날게요. 한가롭게 당신들의 전장을 구경할 생각은 없습니다.
이런, 벌써 가시게요? 용감한 여행자님?
아크로티에서 제일 유명한 마을이 근처에 있는데, 당신 같은 여행자들이 또 다른 즐거움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됐습니다.
아, 아니면 극장이랑 영화관도 있는데요? 그리고 미노스 레스토랑도……
됐.다.고.요.
아니면 우리 전사들이 가장 즐기는 사우나도 있는데……
……사우나요?
남녀 혼욕이다. 포기해라.
그럼 됐어요.
제, 제사장 전용 사우나도 사용할 수 있어요. 자, 긴 여행으로 온몸이 먼지투성인데, 조금 쉬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겁니다……
됐다니까요! 저는…… 여행하러 온 게 아니에요.
저를 본 사람이 적으면 적을수록 좋아요. 뭔가 느낌이 좋지 않으니 서둘러 떠날 거예요.
여기는 아직도 사르곤에 너무 가까워요.
흐흑…… 하지만 이렇게 검소한 옷차림의 가여운 타향 소녀는 좀처럼 만날 수 없는데……
네?
신경 쓰지 마라. 오랫동안 대도시로 돌아가지 못하고 이렇게 외딴 시골 촌구석에 처박혀 지내니 미쳐버릴 지경이겠지. 쟤 말투를 참는 것만으로도 이미 넌 대단한 거야.
아크로티 마을은 확실히 네가 머물기엔 적합하지 않아. 도망 다니는 처지에 말썽까지 피우고 싶지 않다면 지금 떠나는 게 제일 좋아.
하지만 타지인이여, 당신의 목적지는 어디입니까? 이토록 발길을 재촉하는 이유는, 혹시 뭔가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거나, 또는 중요한 귀족의 사건에 연루된 것입니까?
어느 것도 아닙니다. 전 그냥…… 자유 신분을 얻은 용병일 뿐이죠.
멀리 갈수록 좋아요. 목적지 같은 건 상관없어요.
북쪽이나 더 동쪽으로 갈 거예요. 여기는…… 이곳은 지금의 제가 살기에 적합하지 않아요.
황야도, 전쟁터도, 사르곤인도…… 지금은 어느 것도 마주하고 싶지 않습니다.
아…… 가엾어라, 괴롭고 슬픈 과거를 짊어진 젊은이여.
하다못해 이름이라도 알려줄 수 없겠습니까? 제가 당신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당신에게 닥칠 위기나 행복한 안식처에 대한 계시를 찾아드리죠.
그게 사르곤 사람에게도 통하나요?
흥, 난 안 믿어.
(발을 밟는다)
쓰읍…… 팔라스 너……!
'팔라스'?
(이름을 들킨 건 당신 때문이에요, 살카즈 전사.)
기억할 만한 이름은 아니에요. 아직까지는.
그런데 혹시…… 미노스 국경에서 한 제사장이 열두 영웅의 계시를 받고, 이곳에서 미노스 사람들의 존엄과 자유를 위해 사르곤의 침략에 맞서 승리를 거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면……
전혀요.
쿨럭, 쿨럭…… 그, 그렇죠. 아직 전쟁의 최종 승리가 선언된 게 아니니까요.
죄송합니다. 제 이름을 알릴 생각은 없었습니다만, 미노스의 전설을 사르곤 사람들에게 알려 서로 더 잘 이해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어서요.
그런 이야기는 다음에 온 사르곤인에게 들려주세요.
흐흑…… 알겠어요. 그렇다면 사르곤에서 온 여행자와 손을 흔들며 작별 인사를 하는 것 말고는, 당신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게 없네요.
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나침반을 당신에게 드릴게요.
아직 명확한 목적지가 정해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만…… 전진, 전진이 당신의 유일한 목적이자, 과거의 모든 고난에서 벗어나는 방법이겠죠.
전진도 나름 훌륭한 선택입니다. 당신이라면 도중에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라 믿습니다.
당신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최악의 위기에서 당신을 구해주고, 저승사자의 추격에서 당신을 데리고 도망칠 착한 사람이 나타날 때, 그때 다시 결정하세요…… 혹은 그 사람과 함께 가던가요.
제사장, 말조심해. 네가 말한 고난들이 정말 이 여인에게 닥치면 어떡할 거야?
가끔 네가 한 말은 의외로 잘 맞는다니까.
괜찮아요……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어요.
여정의 끝이 여정 자체가 될 수도 있죠.
당신이 가는 길은 길고 끝이 없습니다. 당신을 위해 기도할게요, 젊은이여.
당신은 용감하고 의연한 용사입니다. 당신의 용감은 당신의 무기에, 손발에, 그리고 영혼에 새겨있습니다.
당신의 눈이 지금은 혼탁할지 몰라도, 비바람이 지나면 다시 맑게 씻길 것입니다.
당신에게 충분한 믿음을 줄 만한 힘이 없어 죄송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똑같은, 더욱더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당신도, 저도, 그리고 우리 귀여운 살카즈 전사도, 우리 모두 끝없는 여정을 걷고 있고, 자신의 영혼을 지키기 위해 고통을 감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마주해야 할 더 중요한 일은 바로……
자신만의 안식처를 찾은 것입니다.
자, 교대야.
어.
저기, 살카즈.
뭐야?
슬슬 우리한테 이름을 가르쳐줄 때도 됐잖아. 아니면 '살카즈'를 네 이름으로 쓸 거야?
이름 따위가 뭐가 중요해. 너희들은 제사장을 '여신'이라 부르고, 그 여자는 자신을 '제사장 팔라스'라고 부르더구먼. 그럼 대체 어떤 게 진짜란 말이야?
좋을 대로 해. 다만…… 전쟁이 끝나고 영웅들의 이름을 새기고 기록할 때, 역사에 남을 너의 이름은 '살카즈'가 되는 거다?
허허, 그런 얘기는 살아남고 나서 하라고! 낙관주의 미노스 놈아!
(……)
(영웅으로 책에 이름이 기록될지 말지는 중요치 않아.)
(내가 살카즈인 한, 무엇을 하든 살카즈로 취급된다…… 살카즈가 영웅으로 알려지는 것도 나쁠 건 없잖아.)
음?
팔라스 제사장, 네가 왜 거기서 나와?
아, 살카즈 씨.
……그렇게 부르지 마. 이 야밤에 초소까지는 왜? 무슨 이상이라도 있어?
병력을 동원할 정도는 아닐 겁니다, 아마도.
다만 낮의 일이 아직도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어, 왠지 여기에 오면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서요.
뭐야, 아직도 그 사르곤의 쿠란타 병사를 걱정하고 있었어? 그렇게 특별한 녀석이었나?
그 반대예요. 그녀는 지극히 평범해요.
지극히 평범하기 때문에 악령에게 쫓기듯 황급히 떠나고, 누구에게도 믿음을 주지 않는 모습이 오히려 석연치 않은 거죠.
그녀는 이렇게 공격적인 천성이 아닌 것 같습니다만, 아마 최근에 중대한 사건을 겪으면서 크게 낙심한 것 같네요.
살카즈 님, 그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요?
나랑 상관없는 일이야. 나는 너처럼 다른 사람에 대해서 그렇게까지 관심이 없는 편이라.
내가 지금 궁금한 건 네가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야. 나한테 뭘 시키려고 온 것인지, 아니면 그냥 산책하러 온 것인지. 기분파 '여신'께서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것만 알려줘.
쉿.
……
(칼을 잡는다)
거기 누구냐?
당신 말이 맞아요, 살카즈 님. 사람의 마음이란 게 알기 어렵습니다. 낮에 만난 쿠란타 여행자와는 옅은 인연일 뿐이죠.
하지만 그녀의 허약함을 당신과 저 모두 목격했습니다. 그녀의 굳은 의지가 좌절에 꺾이는 바람에 지금이 가장 방황할 때입니다. 그녀에게 저희가 해줄 수 있는 건 거의 없고, 아침 식사를 제공한 게 고작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가여운 쿠란타 전사, 그녀가 원하는 것은 단지 자신의 운명을 자기 손에 넣는 것뿐입니다. 스스로 목적지를 정하거나, 모든 걸 정리하거나.
어쨌거나 그녀의 목적은 우리와 같습니다. 자유에 대한 갈망을 사명으로 삼는 것이죠.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의 자유를 앗아간 배후의 악령이 얼마나 악랄한지 저는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가슴 아픈 상황을 마주해야 한다는 것도 믿기지 않고요.
안 그래요, '살카즈 씨'? 당신은 이런 상황이 슬프지 않습니까?
……
지금 이 상황에서, 곧 일어날 분쟁으로부터 직접적인 결론을 도출할 수 있도록, 제가 미리 경고해두겠습니다.
불청객이시여, 당신은 전에 봤던 또 다른 여행자와는 달리, 온몸에 피와 죄악의 비린내가 진동하는군요. 당신은 자신보다 약한 자를 표적으로 삼을 잔인한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당신은 미노스의 신성한 땅에서 한차례의 암살, 사냥, 내지는 훗날 웃고 떠들며 자랑할 더러운 짓을 꾸미려고 합니다. 그건 제가 절대 용납할 수 없습니다.
아무런 징조도 없이 어둠 속을 꿈틀거리는 교활한 검은 그림자가 미노스의 제사장을 향해 돌진해 갔다.
하지만 그 순간, 또 다른 날카로운 칼날이 그의 공격을 막아버렸다.
습격자는 즉각 뒤로 물러났다.
……
……
비켜라, 동족. 마녀처럼 정신없는 소리만 구구절절 늘어놓는 저 여자, 이제 지긋지긋해.
아무래도 너는 이 여자의 말을 이해 못 한 거 같다. 이 여자가 무엇 때문에 슬퍼하는지도.
난 할 일이 있어. 너희와는 상관없는 일이야.
저 여자는 내가 '쿠란타 전사'를 찾는 걸 막으려는 거 같군. 내가 단서를 찾으러 여기 오기도 전에 이미 전투를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내 목표를 감싸려는 거라면 살길이 없어. 그런데 너는? 너는 여기서 뭐 해?
난 용병이야. 미노스인에게 고용됐어.
어, 그럼 적이 아니네. 각자 볼일 보자고.
저 무녀의 목숨도 네 일의 범주냐?
그건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야.
하긴, 내 칼은 휘두를 때마다 가격이 매겨지니, 여기서 쓸데없이 힘을 낭비할 필욘 없지.
……아니면, 저 여자의 황당한 자유론이 나를 불쾌하게 했거나. 차라리 저 포르테의 뿔을 잡고 쿠란타의 위치를 알려달라고 하는 편이 더 빠를지도 모르겠군.
안 그래, 궤변밖에 모르는 무녀야?
……정말이지 매너도 도덕도 전혀 없는 짐승 그 자체군요.
당신은 자신을 추잡한 칼로 비유하면서, 그 어떤 훈계도 받아들일 생각이 없네요. 그렇죠?
닥쳐 이 *살카즈 욕설*야. 동족, 너랑 나는 원한이 없으니 눈감아주는 셈 치고 거기서 비켜.
킬러가 커다란 칼을 미노스 제사장의 머리 위로 휘두르려는 순간, 살카즈 용병이 그녀의 앞에 막아섰다.
……
흥, 뭐지? 미노스인의 세례를 받은 살카즈가 정말로 존경받는 경호원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이 여자랑 아무 상관 없어. 다만 네가 받은 그 일이 너무 한심해서 그래.
너는 이런 더러운 일을 안 해봤다고? 솔직히 넌 나를 못 이겨.
아니죠, 흉포한 침입자여, 사악한 추격자여, 당신은 맹목적인 자만으로 인해 오히려 질 것입니다.
영웅들은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는 법이 없습니다. 사냥감을 쫓는 악마가 목적을 이루는 것도 가만히 두지 않고요.
당신은 돈과 권력에 눈이 멀어, 박해와 살육이 얼마나 수치스럽고 더러운 짓인지 이미 오래전에 잊어버렸죠.
마음껏 지껄여봐. 큰소리친 만큼 능력 있다면 뿔 한 개 정도로 봐줄게.
나 같은 재목이 탈영병 따위를 '처리'하기에는 솔직히 능력 낭비야. 차라리 미노스인의 목을 베가면 상금을 더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저를 그렇게 모욕한 이상 저도 악마에게 현혹된 당신의 마음에 대한 마지막 연민도 거둬들이겠습니다.
참고로, 잔인한 킬러님, 그 쿠란타 여행자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저는 당신을 살려서 보낼 마음이 없습니다.
가련하고 가증스러운 살카즈 병사들, 한때 혼돈이었던 당신들의 마음은 전혀 다른 두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살카즈의 결말은 단 하나다. 구원 따위는 없어. 자, 무녀야, 구시렁거리지 말고 이 공격을 받아라!!
어둠 속의 전투에 대한 기록은 후세에 남겨지지는 않았다.
영혼은 아직 달리고 있고, 여행 중 끊임없이 성장해 가고 있다.
그로부터 머잖은 미래에 그 영혼은 더 열렬하게 빛을 비출 것이다.
그리고 그 빛은 서서히 로도스 아일랜드로 모여 더 밝은 빛이 되고, 대지에서 목표를 향해 거침없이 나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