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서진 대지
전설의 조직 '녹슨 망치'에 가입하기 위해 우르수스를 떠나 황무지에 도착한 체르노보그의 두 생존자…… 하지만 그들이 마주한 황무지는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조심해, 천천히 걸어.
괜찮아…… 잡아주지 않아도 돼.
됐으니까 힘을 아껴, 아직 저 산도 넘어야 하니까.
우리, 우르수스에서…… 얼마나 왔지?
얼마 안 됐어. 아직 황무지 깊숙이 들왔다고 하기도…… 어쨌든 아직 멀었어.
조금만 쉬자……
그래, 기다릴게.
후우……
북동쪽의 저 산을 넘어가면 어디지?
저 산 너머는 아마 카시미어의 땅일 거야.
하지만 그쪽으로는 안 갈 거야.
……우르수스를 떠나는 건 처음이야.
곧 익숙해질 거야.
더 이상 우르수스에 미련을 가질 게 없으니까.
후…… 여기면 괜찮을 것 같은데.
이제 곧 날이 저무니, 오늘은 여기서 야영하자.
응…… 식량은 얼마나 남았지?
창고에서 가져온 건 반도 안 남았고, 유랑민 마을에서 교환한 것까지 더해도 앞으로 4일 정도 버틸까 말까야…… 별로 없어.
짐 좀 봐줘, 내가 장작 좀 주워올게.
여기는…… 조용하네.
조용하면 좋지, 다른 사람이 있으면 경계해야 하니까.
우리가 여기까지 아무 일 없이 올 수 있었던 건 단지 운이 좋았던 것뿐이야.
강도나 도적, 떼지어 다니는 비스트들……
대부분의 사람에게 황무지는 목숨을 잃을 정도로 위험한 장소니까.
우리가 정말 그 '녹슨 망치'라는 조직을 찾을 수 있을까?
유랑민 마을 사람들이 우릴 속이진 않았을 거야. 속여봤자 별 이득도 없잖아.
여기 일대에서 '녹슨 망치'가 활동한다는 건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이기도 하고.
……그들이 우리를 받아줄까?
모르겠어, 그래도 시도는 해봐야지.
마을에 있었을 때…… 병사들 모두 '녹슨 망치'는 잔학하고 살인을 즐기는 황무지의 폭도라고 했어.
다들 그렇게 말하더라고, 나중엔 팀 내에서도 비슷한 소문이 있었고……
소문은 소문일 뿐이지. 그 귀족들이 우리더러 뭐라고 했는지 잊었어?
'탐욕스럽고 잔인한 리유니온 강도'라고 했지.
우르수스 귀족 나리들이 유언비어 몇 마디만 퍼뜨려도, 자신들의 눈에 가시를 일반인들이 식인귀 취급하게 만드는 건 한순간이야.
흔한 수법이긴 하지만, 적어도 내가 본 건 절대 그렇지 않아.
'녹슨 망치'를 만난 적이 있어?
응, 그것도 군대에 있었을 때 일이야.
그 해는, 국경의 수비군이 카시미어 영토에 침입해 마을을 덮쳤다는 소문이 돌던 바로 그 해지.
아…… 마을 사람들에게서 들은 적이 있어.
대장님도 그 얘길 했었는데, 그 뒤에 수비군은 다 죽었다고 했던가?
대장님이 그런 것까지 말했다고?
수비군은 우르수스의 정규군이었어. 완전 군장을 한 부대가 전투 장비를 가지고 국경을 넘는데 눈에 띄지 않기도 쉽지 않지.
마을을 덮쳤을 뿐이라는 건 상관이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핑계일 뿐이야. 어쩌면 그 병사들은 진심으로 전쟁을 일으키고 싶었던 걸지도 몰라.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실제론 그들 뜻대로 되지 않았어. 카시미어의 숲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단 한 명도 살아 돌아오지 못했으니까.
당사자들이 모두 죽은 마당에, 수비군이 국경을 넘은 목적을…… 누가 신경 쓰겠어.
하지만 수비군이 죽은 건 카시미어 사람 때문이 아니야…… 이건 확실해.
그래서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거야?
병사들이 국경을 넘은 지 나흘째 되던 날…… 한 보초병에게서 황무지의 유랑민 무리가 우르수스 국경에 침입한 것 같다는 보고가 있었어.
황무지의 유랑민?
그때 난 때마침 국경 수비 구역 보급소에 있었는데, 보초병이 침입 정황을 보고했는데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더군.
황무지에서 갈 곳 없는 유랑민은 흔하진 않지만 그렇게 신기하지도 않아. 특히 우르수스의 국경에서는 말이야.
군은 한 개 소대를 파견해 그 재수 없는 놈들을 잡아다 관할 구역의 광산으로 보내려고 했어. 흔히 쓰던 수법이지.
……그런데……
그 소대는 돌아오지 않은 거지?
이튿날 아침, 한 병사가 얼굴이 피범벅인 채로 우리 캠프로 도망쳐왔어. 소대가 전멸했을 뿐만 아니라 근접 초소 세 곳도 습격을 당했고, 그 병사 혼자 살아서 도망친 거였어.
당시 지휘관은 바로 카시미어 군인이 황무지의 유랑민으로 위장해 초소를 습격했다고 판단하고, 즉시 상부에 지원을 요청했어. 지금처럼 멍청하진 않았거든.
그제야 우리는 오리지늄 통신기 범위 내에 지원 신호를 수신할 수 있는 아군은 어디에도 없고 우리가 고립되었단 사실을 알게 됐어. 그리고 그날 밤……
해가 지고 나니 주변의 산에서 쇠붙이를 두드리는 소리가 무섭게 들려왔어, 마치 옛날에 전쟁 때 쓰던 북소리 같았지.
그러고는 녀석들이, 아주 많은…… 수백…… 수천 명도 될지 모르는 놈들이 투박한 무기를 가지고,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외치면서 우리 캠프로 돌진해 왔어.
놈들은 생긴 건 사람 모습이었지만, '사람' 같은 면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어. 난 그들이 미친 줄 알았지, 옆에 있던 동료가 폭탄을 맞고 날아가도 멈추지 않고 돌진해 왔으니까.
그건 내가 겪은 가장 끔찍한 전투였어. 나중에 리유니온에 들어와서도 수많은 전투를 겪었지만, 그날 밤의 미친 듯한 돌진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었어.
……
동틀 무렵이 되고 나서야 그들은 비로소 물러났지.
무수히 많은 시체가 캠프 주위에 널브러져 있었고, 온 사방이 핏자국과 오리지늄 아츠가 폭발한 흔적이었어…… 꼬박 하루 동안 구역질 나는 쇳내가 진동했지.
……말도 안 돼.
왜?
그렇게 막무가내로 우르수스 군대를 습격한 목적이 뭐였는데?
그게 포인트야.
며칠 뒤 지원부대가 겨우 도착하고 나서야 근처 두 곳의 감염자 광산이 습격을 당했고, 놈들이 안에 있던 모든 사람을 풀어주고 그 주변 군용 보급 창고 다섯 군데를 다 불태워버렸다는 걸 알았어.
놈들은 붙잡은 지휘관과 광산 책임자들을 갈기갈기 찢었고, 우르수스 깃발과 상징물들을 죄다 찾아내 부숴버렸지……
'녹슨 망치'는 폐허에 남아 있는 우르수스의 흔적을 모두 지워버린 거야.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가장 먼저 카시미어 안으로 들어갔던 소대는 후방 지원을 거의 상실했고, 우르수스군이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너무 늦었다는 거지.
놈들의 그런 미친 짓은 도저히 이해가 안 돼.
하지만 '살육을 즐기는 황무지의 악당'이 광산의 불쌍한 무리들을 위해 우르수스군을 습격할 리가 없지.
확실한 건 놈들은 보통의 폭도가 아니란 거야.
……어떻게 그런 일이……
믿기 힘들겠지.
난 아직도 모르겠어…… '녹슨 망치'에 들어가려는 것이 정말 올바른 선택인지.
심지어 패트리어트 씨 같은 사람도……
그만 생각하고 오늘은 일찍 자.
어떻게든 되겠지.
글쎄……
다 왔다……
여기가, 우리가 찾던 그……?
'두 번째 산봉우리에서 계속 북쪽으로 가다 보면 보이는 커다란 바위 위'
설마 진짜 있을 줄이야.
얼룩덜룩한 녹슨 망치가 산꼭대기 바위에 거꾸로 꽂혀 있었고, 망치 자루에 묶인 검은 천이 마치 깃발처럼 바람을 가르고 있었다.
'우리와 함께하려면, 바위를 부술 녹슨 망치를 찾아라.'
시적인 표현을 좋아하는 사람들이군.
이건 시가 아니다, 이것은 일종의 상징이지.
황무지에서 살아남으려면 그 망치처럼 되어야 한다.
날카로워질 필요는 없다, 다만 참고 견뎌야 할 뿐.
!!
……
너희 꼴을 보니…… '그냥 지나가는 사람' 같진 않군.
난 너희 그 옷에 달린 마크를 알고 있다.
'리유니온'.
말해라. 우리를 왜 찾고 있지?
너는…… 감염자 같아 보이지는 않은데.
나는……
우린 '녹슨 망치'에 가입하려고 왔어!
'녹슨 망치'에 가입하겠다고?
연약하고, 겁 많고, 공포에 질린 무력한……
황무지에서 겁에 질려 벌벌 떨고 있는, 마치 도축을 기다리는 가축 같은 너희가?
자, 주워라.
이…… 이건, 삽과 곡괭이…… 덫이잖아?
무슨 뜻이지?
왜 이 도구들을 주는 거지?
'녹슨 망치'에 가입하고 싶다 하지 않았나? 그렇다면 자신을 증명해 보여라.
뭐?
너흰 황무지에 속한다는 걸 증명해라, 울타리 밖에서는 살 수 없는 가축이 아님을 보여달라는 거다.
우리는 모두 전사이자 황무지의 정복자로서, 서로를 의지하고 모든 것을 함께한다.
그렇다고, 약해빠진 쓰레기를 돌보지는 않지.
저기 협곡 보이나? 저긴 이 근처에서 가장 좋은 곳이다.
저기엔 너희가 원하는 모든 것이 있다.
저기서 한 달 동안 생존해라.
그 정도도 할 수 없다면 지금 당장 꺼지던가.
생존? 한 달을? 저런 데서?
*욕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고작 이런 걸 갖고 황무지에서 살아남으라고?
그냥 우리가 죽는 꼴을 보고 싶은 거라면 이렇게까지 번거롭게 할 필요가 있나? 바로 손을 쓰지 그래?
우리가 황무지에서 쓰러져 죽는 꼴을 보며 즐기는 악취미라도 있는 건가?
아니면, 감염자를 박해하는 취미?
너희는 다른 도적들과는 다를 거라 생각했는데…… 결국은……
……하하하하.
감염자? 감염자라고 했나??
하하하하……
감염자를 박해한다고? 하하하하하……
분!
이리 와서, 여기 이 멍청한 놈 좀 봐.
'녹슨 망치' 사내의 거친 웃음소리와 함께 바위 뒤에서 등이 굽은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남자의 몸에 붙어 있는 오리지늄 결정은 모양이 추한 나머지 무섭기까지 했다. 남자는 매서운 눈빛을 하고선 헝클어진 머리칼 사이로 눈앞의 두 사람을 훑어보고 있었다.
이리 와봐, 분.
봐봐, 이 녀석들이 네 '감염자 동료'다.
허튼소리, 나는 이렇게 나약한 동료를 둔 적이 없다.
당, 당신도 혹시 리유니온……
여기선 말이지, 네가 감염자든 아니든, 무슨 특수한 신분이든 관심 없어.
아무도 신경을 *욕설*도 안 쓴다고.
남자든, 여자든, 노인이든, 아이든, 살카즈든……
리유니온이든, 몰락한 귀족이든 다 상관없고, 황무지를 받아들이고 문명을 멀리한다면, 우린 모두 동료로 대한다.
……
한 달…… 맞지?
일라?
그래. 한 달을 버텼다면, 너희는 문명의 굴레를 벗어나 황무지에 속했음을 의미하지.
그때면 비로소 너희는 황무지의 일부가 되어 '녹슨 망치' 형제들의 환영을 받게 될 거다.
좋아…… 약속하는 거다.
그 태도 마음에 든다. 아주 믿음이 가.
행운을 빈다, 여자.
일라, 제정신이야?
우리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잖아, 안 그래?
식량이 아직 남아서 우린 돌아가도 돼. 유랑민 마을로 돌아가서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보자.
거짓말 마! 식량은 거의 다 떨어졌잖아. 넌 이틀 동안 아무것도 안 먹었고, 내가 다 봤어!
난……
우린 전우잖아? 전우라면 서로 도와줘야지, 맞지?
이 '녹슨 망치' 사람들이…… 여기서 살아가고 있으니…… 우리도 가능하지 않을까?
……그래.
그럼 나 좀 도와줘. 일단 지낼 곳을 찾아볼게.
15일 후
……저 녀석 왜 이렇게 안 움직이지……
쉿! 소리 내지 마. 곧 걸려들 거야.
내가 보기엔 도망갈 것 같은데?
아니야…… 기다려…… 가만히 기다리면……
움직였다!
조금만 더…… 앞으로 조금만……
잡았다! 잡았다! 하하하하!
좋아! 해냈어!
하하하하, 좋았어.
일라, 칼 좀 줘봐.
자, 여기.
이런 곳에도 버든비스트가 있을 줄이야. 야생종은 처음 보는데.
이 고기를 훈제해서 동굴 안에 말리면, 당분간은 보관할 수 있어……
적어도 한동안은 말린 갯지렁이를 먹지 않아도 되겠어.
그 유랑민 마을은 아직 남아 있을지 모르겠네.
갑자기 그건 왜?
이 고기를 훈제한다 해도 우리끼리 다 먹지는 못할 거야. 남은 고기로 그쪽 유랑민들과 물자를 교환할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예를 들어 씨앗이라던가……
모쏘앗에 싹이라도 튼 거야?
너 말이야, 농사를 지어본 적 없지?
……없어, 난 도시에서만 살았으니까.
후훗, 도시 어린이, 곡식은 그렇게 쉽게 자라지 않아. 이번 기회에 잘 배워둬.
어린이라니…… 나랑 얼마 차이도 안 나면서.
뭐 됐어, 그것보다.
그 유랑민들은 한곳에 머물지 않아. 동쪽 산기슭에도 마을이 몇 개 있을 텐데…… 그쪽으로 가보는 게 좋겠어.
자, 얼른 들고 돌아가자고.
알겠어.
열셋, 열넷, 열다섯……
앞으로 보름 정도 남은 거네……
'녹슨 망치' 사람들이 꼭 약속을 지켜야 할 텐데.
그래도 지금은, '녹슨 망치'가 있든 없든 상관없어.
우리도 여기서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점점 그런 생각이 들어.
계속 신경 쓰였는데…… 어째서 이 협곡에 이런 동굴이 있을까? 자연적으로 형성된 것 같지도 않고……
이 동굴은 아마 오래전엔 갱도였을 거야.
갱도? 이런 황폐한 곳에? 카시미어 사람이 판 건가?
카시미어나, 우르수스 사람이 아닐 수도 있어.
아니면, 우리가 모르는 국가 일수도.
전에 군대에 있을 때 옛날이야기를 자주 하는 녀석이 있었어.
수백 혹은 수천 년 전, 우르수스는 우르수스가 아니고 카시미어도 카시미어가 아니던 시절, 많은 나라가 이 대지에서 생겨나고 발전하고 강대해졌다 하더군.
하지만 결국은 전쟁, 재앙 혹은 또 다른 원인으로 멸망하고 분열되고 흩어졌지.
재앙이 반복적으로 대지를 쓸고 지나가면서 그 나라들이 존재했던 흔적도 모두 사라졌고, 남았다고 해도 다 땅속에 묻혔다고 해, 이런 갱도 같은 것들뿐이지. 비슷한 고대 유적이 많은 곳에 남아 있다고 하던데.
그렇다면……
여기도 옛날에는 황무지가 아니라 사람이 살던 마을이었다는 거야?
아마도.
만약…… 만약 우리가 이곳에 계속 살아서, 우리 같은 사람이 점점 늘어나면 작은 마을 같은 게 생길지도 몰라……
이 협곡은 남북으로 뻗어 있어서 많은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을 거야.
그때가 되면 내가 촌장, 넌 부촌장 하면 되겠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꿈은 밤에 꾸고, 일단 고기 매다는 거 좀 도와줘.
알았어~
29일 후
가레스! 가레스 일어나!
뭐야…… 이 꼭두새벽부터……
빨리 봐, 저 모쏘앗!
!
이건…… 싹이 튼 건가?
그래!
와! 대박! 정말 대단한데!
이런 땅에서도 싹이 나다니!
버든비스트 뼛가루가 효과 있었나 봐.
좋아, 그…… 제일 중요한 게 뭐였지?
물이야, 물!
그렇다면 개울물만으로는 부족할 텐데, 다른 방법도 생각해 보자.
하지만 이 근처에…… 다른 물은 없어.
동쪽 산기슭 아래 숲에서 찾아보자. 숲이 있다는 건 물이 있다는 거니까.
거긴 너무 멀어. 물이 있다 해도 매일 길어 올 생각이야?
멀긴 해도, 해볼 만하지.
모쏘앗이 잘 자랄 수만 있다면, 뭐든 해볼 만해!
간단히 짐 챙겨서 숲으로 가보자.
분명 가까워 보였는데…… 이렇게 멀 줄이야……
돌아가서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보자. 더 큰 그릇이 필요하겠어.
물주머니만으로는 불가능해.
잠깐만…… 이게 뭐지?
이거 발자국인가? 이 근처에 사람이 있나 봐.
발자국? 무슨 발자국?
……잠깐…… 이건……
군화 자국이야!
이 신발 자국은 분명 우르수스군의 군화야.
왜…… 어째서 우르수스 병사가 여기에 있는 거지?
어떡하지……
……빨리 돌아가서 짐부터 챙기자.
여기를 떠나야 해, 이 발자국을 보면…… 아직 멀리 가지 않은 것 같아. 적어도 스무 명은 되어 보여.
잠깐만! 다른 방법이 있어.
불을 피우지 않으면…… 협곡에 동굴이 있는 줄은 아무도 모를 거야.
아니, 어차피 언젠가 들킬 거야. 불도 못 피우고 매일 동굴에 숨어있어 봤자 무슨 소용 있겠어. 놈들이 언제 여길 떠날지도 모르는데!
분명 나 때문에 온 걸 거야. 그 사람이 날 이렇게 순순히 놓아줄 리가 없으니까……
싫어, 난 안 갈 거야!
일라!
어디로 도망갈 수 있다는 거야? 더 이상 도망 다니기 싫어. 내가 리유니온에 가입한 건 조금이라도 사람답게 살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지난 한 달…… 한 달 동안 힘든 건 사실이었지만, 좀 힘들면 뭐 어때?
여긴 세금 내라는 사람도 없고 귀족도 없어. 숲에서 사냥한 사냥감이나 싹이 튼 모쏘앗, 모두 우리 것이라고!
이 한 달은 나도 사람답게 살았어! 죽지 못해 살아가는 가축 같은 삶이 아니라!
일라, 진정하고 내 말 좀 들어.
일단은 살아남아야 언젠가 우리가 속할 곳을 찾을 수 있잖아. 그렇지만 죽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그럼 도망칠 때마다…… 우리의 모든 걸 모두 포기해야 하는 거야? 왜 매번 저놈들이 우리 삶을 파괴하도록 내버려 둬야 하는 건데!
처음엔 마을 사람들…… 여동생…… 그리고 샬라…… 대장님까지.
오늘은 도망가지 않을 거야.
죽어도 이 협곡에서 죽을 거야. 여기 있는 모든 게 나의 전부이자, 우리의 피와 땀이고, 여기가 우리의 새집이야.
도망치지 않을 거라고!
……일라.
남아 있자, 가레스. 여기 남아서 싸워보자.
우린 리유니온의 전사지, 겁쟁이가 아니야.
그래……
네 말이 맞아!
저 빌어먹을 *욕설*들!
귀족들도, 로모노 대령도…… 모조리…… 모조리 뒤져야 해!
좋아! 훌륭하군!
이제 제법 그럴듯해졌네.
!!
……너!
……설마 계속 우리 근처에 있었던 거야?
너희가 황무지에서 한 달간 살기로 했으니, 난 매일 너희가 숨이 붙어 있는지 확인하러 와 봤을 뿐이다.
그것보다, 지금 이 근처에 우르수스……
흥분하지 마라. 듣자 하니 별일도 아닌 거 같은데.
그래서…… 우리 합격인 거야?
합격?
넌 이제 '녹슨 망치'의 일원이다, 자매여.
……
그리고 너. 의지는 조금 부족했지만, 올바른 길을 선택해서 좋았다.
타협과 도망에는 끝이 없다. 이 말을 기억해 둬라.
환영한다, 형제여.
그리고 멍청한 사냥감들이 지금 덫 쪽으로 오고 있으니, 놓치지 말고.
사냥감? 무슨 사냥감?
왔다.
역시 이 협곡에 사람이 있을 줄 알았어.
덕분에 우리가 꽤 고생했다고, 가레스 하사.
……
염치없는 탈영병 놈. 감히 창고에서 군량과 보급품을 훔쳐 가?
우르수스군의 존엄을 짓밟고도 이렇게 활개 치며 도망갈 수 있을 줄 알았는가?
로모노 대령께서 매우 화가 나셨다. 네놈의 목을 베어버려야만, 노여움을 푸실 테지.
네놈이 저지른 범죄에 대해 대가를 치러야 할 거다, 이 파렴치한 감염자 녀석……
검은 옷을 입은 우르수스의 개가…… 스물네 마리인가.
하, 이 야만인들과 사이가 좋은가 본데. 설마 이 황무지의 악당들이 네 목숨을 구해줄 거로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즉시 무릎을 꿇고 자결해라. 그럼 깨끗하게 묻어주도록 하지.
스나이퍼, 준비……
얼굴을 가린 ''녹슨 망치' 전사가 손에 든 무기로 땅을 내리쳤다.
한 번
두 번
세 번
그 순간 협곡 전체에 무언가를 두드리는 소리가 귀가 찢어질 듯이 울려 퍼졌다. 그 소리는 우렁차고도 요란했다.
전쟁의 함성과 부르짖는 소리가 협곡의 차가운 바람과 함께 울려 퍼져, 마치 이 대지가 내는 울부짖음과 같았다.
그때 가레스는 보았다.
협곡 양측의 벼랑 위에 황야의 전사들이 빼곡히 서 있는 모습을.
그들은 남루한 옷차림에, 낡은 금속으로 만든 투박한 갑옷을 입고 있었다.
그들은 형체가 일그러져 있었고, 손에는 허름하지만 무시무시해 보이는 무기를 들고 있었다.
대…… 대장님! 이건……
뭐…… 뭐야 이게, 대체 몇 명이야???
이, 이럴 수가! 보초병은? 보초병은 뭐하나!
네가 찾는 '보초병'은 여기 있다.
그…… 투구…… 그 무기, 어떻게 네놈들이……
우리 형제자매들이여, 황무지에 온 걸 환영한다. 이번은 너희가 '녹슨 망치'에 가입한 이래 첫 사냥이다.
함께 싸울 수 있어서 기뻐.
싸워?
자매여, 우리들은 '싸움' 같은 건 하지 않는다.
'녹슨 망치' 전사들이 줄줄이 나타나자 우르수스 병사들은 쉽사리 움직이지 못했다. 전사들이 말하기 시작했고 이 스물네 명의 우르수스 병사들은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저것들이 말하는 소위 '국가'와 '문명'에는 근본적으로 악이 배어 있다. 저 거대한 이동도시들, 추악한 쇳덩이들, 그리고 저 악의에 의해 만들어진 금속의 굴레와 감옥들은 바로 저들이 사악하다는 죄의 증거다.
저것들은 모든 것을 빼앗아 갔다. 대지의 광물을 약탈하고, 물과 토지를 강탈해 그 전부를 차지했다.
저것들은 '문명'을 믿음으로써 구원을 얻는다고 했다. 그 굴레 밖의 모든 것에 야만이라는 낙인을 찍었다. 저것들은 진실을 두려워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진실을 까밝혀 이 대지에 되돌려 줘야 한다.
저것들은 너희에게 공포를 심었고, 문명으로 하여금 너흴 연약하게 만들었으며, 저것들이 만든 터무니없는 '질서'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하여, 자신을 수렁에 가두게 만들었다.
저것들은 그런 수법을 이용해 자유롭게 살아야 할 너희를 부려 먹으면서 지배해 왔던 것이다.
이 대지는 마땅히 모든 사람에게 속해야 하고, 모든 사람은 자신의 손으로 황무지에서 자신이 설 자리를 개척해야 한다! 황무지는 자연히 약자를 도태시키겠지만, 진정으로 세상 사람들을 약하게 만드는 것은 과연 누구인가?
너흰 저것들의 악몽이고, 저것들의 재앙이며, 저것들을 멸망시키는 힘이 되어야 한다.
과연 누가 폭풍과 지진에 질곡과 족쇄를 채울 수 있겠는가? 과연 누가 번개와 벼락을 우리에 가둘 수 있겠느냔 말이다!
우린 단 한 번도 싸움을 한 적 없다! 우린 파괴할 뿐이다!
우리를 부수고, 족쇄를 부수며, 빼앗긴 모든 것을 도로 빼앗을 것이다. 나약함을 떨쳐내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든 '녹슨 망치'의 형제자매가 될 수 있다.
……부수고! 부수고! 또 부수리……
우렁차고도 요란한 금속을 두드리는 소리가 협곡 전체에 울려 퍼졌다.
그들은 고함을 지르며 무기로 대지를 내리쳤고, 금속과 바위가 부딪치며 내는 소리가 마치 암울한 천둥소리 같았다.
……부수고! 부수고! 또 부수리……
두려워하지 마라! 미치광이들일 뿐이야!
진형을 가다듬어라! 전…… 전투 준비!
놈들이 떨고 있다. 우리의 파괴를, 우리의 사냥을 두려워하고 있다.
문명의 굴레에서 벗어난 우리에게 더 이상 나약함은 없다.
재앙이 황무지를 휩쓸었듯……
녹슨 망치가 대지를 내려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