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사세행

TA-2석탑조이기

사이드 스토리작전 후2026-07-16

한 미치광이가 왕에게 질척이지만, 왕은 그 속에서 쉐이의 함정을 간파해 낸다. 그는 서도로 책 속의 '쉐이'자를 전부 긁어내고 쓰러진다. 그 대국에서 그는 흑돌 3개를 대가로 꿈속에서 쉐이를 죽이고, 쉐이의 기억을 어지럽힌다.

등장 오퍼레이터:


593년

돌을 내줄지언정…… 주도권을 잃지 마라……

한 수만 잘못 둬도…… 완패한다!

완패한다……

완패……

……결국 찾아왔군.

계속 따라왔으면서, 아직도 모습을 나타내지 않을 생각인가?

왕은 돌아봤다. 그 불만 같기도 하고 울부짖음 같기도 한 소리는 멈출 줄을 몰랐지만, 그의 귓가에서 천천히 멀어질 뿐이었다.

흥.

실력 한번 봐야겠군.

왕은 괴이한 소리를 따라 낡은 바둑판 앞에 도착했다.

노점 주인처럼 생긴 남자가 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흐느껴 울고 있었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상한 남자

한 수만 잘못 둬도…… 완패한다……

이상한 남자

완패한다!

왕이 앞에 놓인 바둑판을 살펴볼 새도 없이, 남자는 바둑판에 엎드려 통곡하기 시작했다. 바둑돌이 바닥으로 우르르 쏟아졌다.

……웃기는군.

왕이 돌아서서 떠나려고 하자, 뒤에 있는 남자의 울음소리도 작아졌다.

이상한 남자

손님, 손님, 가지 마세요. 돌은 제가 다시 놓으면 됩니다……

이상한 남자

저는 이 대국 때문에 재산과 가업을 잃었습니다.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죽은 사람까지 있죠…… 저도 중병에 걸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상한 남자

바둑 한 판, 겨우 바둑 한 판에 집안이 망했습니다……

이상한 남자

도저히 마음에서 내려놓을 수가 없습니다. 손님, 조금 도와주세요. 손님께서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알려주신다면……

이상한 남자

……운명을 바꿀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울먹이던 남자의 목소리가 크게 격앙됐다. 그는 가만히 있는 왕을 보고 바닥에서 바둑돌을 하나하나 주워 재빠르게 바둑판 위에 놓기 시작했다.

포석, 견제, 접전, 버림, 수 다툼, 교환……

극도로 빠른 남자의 손 때문에, 바둑판은 마치 살아있기라도 한 듯 원래대로 돌아갔다. 치열한 싸움이 모서리에서 중앙으로 번져나가더니, 다시 아직 비어 있는 반대편으로 튀었다. 눈이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남자는 왕이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그의 손에 흑돌 하나를 쥐여주었다.

이상한 남자

손님 차례입니다.

……어떻게 둬야 하지?

이상한 남자

그러니까요, 어떻게 둬야 하죠?

이상한 남자

흑돌과 백돌을 번갈아 가며 놓아야 하는 건데, 손님이 흑돌을 쥐니 바둑판 위에 있던 흑돌이 하나도 보이지 않게 됐어요. 어떡하죠?

……어이가 없군. 이만 실례하지.

이상한 남자

손님, 손님께서도 이 정도 이치는 알고 계시겠죠.

이상한 남자

이 바둑판은 심연처럼 광활하고, 바둑판 위의 백돌은 하나하나가 산처럼 거대합니다. 반면 제가 제 분수도 모르고 놓은 이 흑돌들은…… 그저 바둑돌일 뿐이죠.

이상한 남자

손님과 저, 그리고 이 바둑판 사이의 거리는 아주 멀어서 태산이 겨우 손가락만 하게 보일 정도인데, 그 작은 바둑돌 하나를 어떻게 제대로 볼 수 있겠습니까?

이상한 남자

지금까지는 어떻게든 버텨왔지만, 이 지경까지 두고 나니 눈앞이 핑핑 돌고 현기증이 났죠. 결국 생각할 여력이 없어 한 수를 잘못 두고 말았습니다……

격앙된 남자의 목소리가 다시 처량한 울음소리로 돌아왔다……

이상한 남자

……완패예요!

이상한 남자

자, 보세요! 저는 모든 바둑돌에 이름을 붙여줬지만, 단 하나도 지키지 못했습니다. 살릴 수 있는 녀석들이 없어요!

이상한 남자

얘는 숴, 얘는 왕, 얘는 링, 얘는 쥔……

왕의 손에 들린 칼이 칼집에서 튀어나와 바둑판 위의 백돌을 찔렀다. 하지만, '쨍'하는 소리와 함께 도신이 휘어질 뿐이었다. 마치 진짜 산을 찌르기라도 한 것처럼.

이상한 남자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입니다.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아요……

이상한 남자

후회됩니다. 애초에 어째서 이 대국을 시작한 건지……

칼이 방향을 틀어 남자의 목구멍을 관통했다. 남자는 땅바닥에 쓰러졌지만, 상처에서는 단 한 방울의 피도 흐르지 않았다. 남자의 울음소리는 점점 커졌고, 그것이 말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게 되었다.

남자의 눈에 왕으로서는 분간하기 어려운 어떤 기색이 떠올랐다. 그것은 공포 같기도 하고 쾌락 같기도 했다. 그는 왕의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왕의 손이 무의식적으로 허리춤의 서도로 향했지만, 도중에 멈췄다.

결국, 왕은 잠시 망설인 뒤, 다른 손에 있던 흑돌을 바둑판에 내려놨다.

……완패? 웃기는군.

여기에 뒀다면, 형세는 5대 5였을 것이다.

왕의 말이 끝나자마자, 바닥에 쓰러진 남자의 몸은 연기가 되었고, 바둑판 위에 보이지 않았던 흑돌이 모두 나타났다.

순찰하는 지촉인

왕 선생님!

너는……

순찰하는 지촉인

방금 사세대 앞에 오셨다가 그냥 돌아가시길래요. 혹시 선생님께도 무슨 이상한 일이 생긴 게 아닌가 싶어 나왔습니다.

이상한 일? 이미 알고 있었나?

순찰하는 지촉인

네.

……이상할 것도 없지.

방금 미친 사람을 봤다. 울면서 영문 모를 불길한 말을 하더군.

순찰하는 지촉인

어디로 갔죠?

사라졌다. 녀석이 두던 바둑판은 여기 남아있고.

순찰하는 지촉인

알겠습니다. 곧 동료를 보내 이 대국을 베껴두겠습니다.

순찰하는 지촉인

그리고 감정 대인께서 지에 님의 필사 작업이 끝났을 거라고 하시더군요. 지금 그것 때문에 오신 것 같은데, 혹시……

가져가라.

순찰하는 지촉인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확인 좀 하겠습니다.

순찰하는 지촉인

시집 3부 32권……

순찰하는 지촉인

소학 5부 60권……

순찰하는 지촉인

술수 1부 5권……

순찰하는 지촉인

이건…… 《급취장》? 이게 왜 술수에 있지?

순찰하는 지촉인

그나저나 지에 님은 정말 출중한 인재이십니다. 한 편에 1400자나 되는 데다 한 글자도 중복되지는 않는 글을 하룻밤 사이에 전부 필사하다니.

순찰하는 지촉인

지에 님의 묵보를 보면 정말 언제나 눈이 즐겁습니다. 이런 서법은 그야말로 유일무이입니다.

지촉인이 책을 만지작대며 감탄하고 있었다. 왕은 지촉인의 시선을 따라 책을 봤지만……

책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이건…… 내 기억이 맞다면 500년 전, 경성에 있을 때의 일이다.

그건 지에가 처음으로 내게 제시한, 쉐이를 제거할 수 있는 실행 가능한 구상이었지.

지에는 내게 이 서도를 줬다. 하지만 그 문장에 무엇이 쓰여 있었는지, 지에가 내게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건지 이젠 기억나지 않는군……

훗, '반복'이라는 건, 나를 꿈속에 몰아넣은 뒤, 과거에 일어났던 일을 되풀이하게 만드는 거였나?

난 그저 네게 보여줄 뿐이다. 이 천 년의 세월 동안, 네가 나를 없애겠다며 꾸었던 실패가 예정된 꿈을.

나는 이 기억들로 감옥을 만들 것이고, 넌 무수한 패배의 굴욕 속에 빠져 죽을 것이다.

똑똑히 보아라…… 네가 잊어버린 기억이 이곳에 얼마나 많이 있는지.


지에

잊어버렸어?

미안.

지에

아니, 괜찮아. 사세대에서 별말이 없었다면, 내가 괜한 걱정을 한 걸지도 몰라……

지에

서도를 돌려줘.


지에

하아…… 난 정말 오빠가 왜 항상 그렇게 거리를 두는지 모르겠어. 어렵사리 오랜만에 만났는데, 안 반가워?

지에

언젠가 동생 중 하나가 갑자기 사라져서 다시 만날 수 없게 됐을 때, 과연 오빠가 후회하는지 지켜보겠어.

[CG: pic_rogue_5_21]
???

난 평생 다른 사람한테 '쉐이 다섯째'라고 불리기 싫어. 왠지 그의 기호 같아.

???

글자를 만드는 사람이 내게 이름을 만들어 줬는데, 오빠가 한 번 읽어서 들려주면 안 돼?

???

네가 써주면 내가 읽어줄게.

???

■■,■


순찰하는 지촉인

왕 선생님?

순찰하는 지촉인

혹시…… 마음에 걸리는 일이라도 있습니까?

생각난 게 있다.

……지에가 《급취장》을 너무 급하게 필사하느라 실수가 있을지도 모른다며 한번 확인해 달라고 부탁했던 것을 잊었군.

시간을 좀 줬으면 한다.

순찰하는 지촉인

그러시죠.

순찰하는 지촉인

그러면 이 책은 일단 빼겠습니다. 늦었으니 내일 다시 가져다주세요.

기억으로 만든 감옥?

웃기는군…… 뜻대로 되지 않을 거다.


대리인이 객잔에 도착했을 때는 날은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

“급취는 특별하여 보통의 것과 다르니, 온갖 것의 이름을 나열했다”……

……나는 분명 기억하고 있다.

바람이 불어와 책장이 팔랑이며 넘어갔다. 왕의 눈에는 뒤표지에 색이 다른 종이 한 장이 끼워져 있는 것이 얼핏 보였다.

역시 그때…… 내게 뭔가를 말하고 싶었던 거였군……

왕은 책상에서 얇은 책자를 집어 들고 무심코 표지를 펼쳤다.

급취는 특별하여 보통의 것과 다르니, 온갖 것의 이름을 나열했다.

서로 분류하여 뒤섞이지 않았고, 필요한 시일이 적으니 참으로 통쾌하도다. 힘써 정진하고 매진하라, 반드시 기쁜 일이 있을 것이다.

첫 페이지에는 본래 이런 것들이 적혀 있어야 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왕이 처음 종이를 훑어볼 때만 해도 그런 글자들이 적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괴이한 먹물 자국만이 지면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쉐이쉐이쉐이쉐이쉐이, 쉐이쉐이쉐이쉐이쉐이

쉐이쉐이쉐이쉐이쉐이, 쉐이쉐이쉐이쉐이쉐이, 쉐이쉐이쉐이쉐이쉐이쉐이

왕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서도를 들어 종이 위에서 이빨을 드러내고 발톱을 휘두르는 '쉐이'를 겨누었다.

???

한 수만 잘못 둬도……

……!

밖에 누구냐?

???

완패한다……

창밖에서는 바람 소리만 들릴 뿐, 인기척은 없었다.

그러고도 감히 우리의 악몽이 되겠다는 거냐?!

수백 년 전에 사용한 졸렬한 수법이 아직 안 질렸나?

???

불리하다면 무승부를 취하라……

우리 사이에 애초부터 무승부 따위는 있을 수 없다.

???

위험에 처하면 돌을 희생하라……

헛소리.

쉐이

서도가 첫 번째 '쉐이'를 긁어냈다.

여동생의 서도를 처음 사용해 보는 건 아니었다. 죽간을 살짝 그으면 대나무의 표면은 온전하게 유지된 채로 오탈자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왕은 저항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치 바위를 깎아내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는 건장하다고는 할 수 없는 팔에 힘을 잔뜩 주고 아래로 그어 내렸다……

창밖에서 갑자기 천둥이 쳤다.

그리고 마침내 첫 번째 '쉐이'가 사라졌다. 종이에 순간 빈 공간이 나타났고, 이어서 교재의 가독성을 위해 지에가 일부러 단순하게, 힘 있게 써 내려간 글씨가 선명히 드러났다.

종이를 가득 메운 '쉐이'의 사이에 나타난 '급'은 기괴하게 보였다.

……'급'.

별거 아니군.

네가 할 수 있는 건, 덧칠하는 것뿐이다.

???

경거망동 마라……

흥.

쉐이

서도가 두 번째 쉐이를 겨눴다. 왕은 다시 한번 힘을 줬다. 칼날에서 전해지는 저항이 조금 전보다 훨씬 강해진 느낌이 들었다.

'취'.

바깥에서 부는 밤바람이 실내로 들어와 책장을 넘기려 했지만, 왕은 손바닥으로 종이를 꽉 눌러 고정했다.

쉐이

'는'.

쉐이

'특'……

네 번째 글자가 나타나는 순간, 방 전체가 심하게 흔들렸다.

쉐이

'별'……

창밖에서 치는 건 이제 우레가 아니었다. 끝없이 울려 퍼지는 육중한 뇌성이 끝없이 울려 퍼졌고, 번개가 쳤다.

쉐이

'하'……

번개가 객잔 지붕에 정통으로 떨어졌고, 건물 전체가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쉐이

'여'……!

방 안 가득 맹렬한 불길이 타올랐지만, 왕은 그저 책상 앞에 앉아 글자를 하나씩 긁어낼 뿐이었다.

왕이 '쉐이'를 긁어낼 때마다 더 힘을 강하게 줘야 했고, '쉐이'를 지워낼 때마다 그의 주변으로 이전과는 완벽히 다른 지옥 같은 현상이 나타났다.

천재지변, 풍식과 벼락, 맹렬한 불길.

기둥, 침상, 책상, 장롱…… 모든 게 다 타버리고 방 안에 더 이상 탈 게 없어지자, 가장 견고해야 할 바닥마저 불타버렸다.

왕은 자신이 땅 밑으로 추락하고 있음을 느꼈지만, 손을 멈추지 않았다.


혹서.


혹한.


질식.


단절……

백, 삼백, 오백, 일천……


천삼백구십삼……

천삼백구십사……

마지막 '쉐이'를 긁어내자, 어두컴컴한 그 방으로 되돌아왔다.

방 안의 장식품은 처음부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가만히 있었다. 오직 방 한가운데 있는 왕만이 온갖 지옥을 겪고 온 사람처럼 너덜너덜해진 옷을 걸친 채 누렇게 뜬 얼굴을 하고 있었다.

……

(거친 숨소리)

다른…… 바둑 격언을 말하고 싶다면 한 번에 끝내는 게 어때?

???

……

정적뿐이었다.

왕은 페이지를 넘겼다. 역시 마지막 페이지와 뒤표지 사이에 종이가 한 장 끼워져 있었다. 먹줄로 그린 19줄짜리 바둑판이었다.

명승부는 아니군. 실력 차가 심한데…… 접바둑?

잠깐, 이건……

둘째 오빠, 아무리 심심해서 나를 불러 바둑을 두는 건 그렇다 쳐도, 꼭 바둑돌로 이 한가할 '한'자를 만들어 나를 놀려야 했어? 진짜 너무한 거 아니야?

진짜 너무하네. 내가 바둑을 제대로 배운다고 오빠의 상대가 되기라도 한다는 거야?

딱히 바둑 둘 마음도 없는 것 같은데, 다른 즐길 거리나 찾아보시지 그래? 유람을 한다던가, 악기를 배운다던가. 정 안되면 내가 서예라도 가르쳐 줘?

호오? 그렇다면 오빠는 이번 대국에서 내 생각을 읽은 거였어?

기보 뒤에…… 글씨가 있었군.

종이가 뒤집혀 있음에도 왕은 알아볼 수 있었다. 교재를 집필할 때의 단순한 글씨체와는 다른, 형제자매에게 편지를 쓸 때마다 사용하는 지에만의 수려한 필체였다.

왕은 자신이 보지 못했던 그 메시지가 무엇이었는지 보기 위해 종이를 뒤집었다……


하지만, 모든 글자가 그가 방금 긁어낸 천여 개의 '쉐이'보다 더 진하고, 날카로운 필체의 '쉐이'로 덮여 있었다.

……또 같은 수작인가? 좋다, 환상을 만드는 것 말고 또 다른 재주가 있는지 지켜봐 주지……

아까처럼 왕은 다시 서도로 모든 것을 덮은 '쉐이'를 찌르고 오른쪽 위로 번진 점 하나를 지워냈다……

환상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붉은 선혈이 왕의 오른쪽 어깨에서 콸콸 쏟아져 나왔다.

윽?!

너를 제거한다는 건…… 나를 제거한다는 건가?

바라던 바다……!

칼을 긋자, 오른쪽 어깨의 상처가 벌어졌다.

다시 긋자, 뼈가 드러났다.

또 한 번.

다시 한번……

서적상의 목소리

엥, 글자가 빠졌네? 참나, 어디 보자, 쏜살같은 세월…… 인생…… 인생이…… 뭐였더라?

아이의 목소리

아저씨, 10월이 지나면 제가 아, 아홉 살이 돼요……

지촉인의 목소리

감정 대인, 천경각 급보입니다. 베헤모스에 관한 기록이 지금……

으윽…… 크아악!

피 때문에 시야가 이상해진 걸까, 글자를 덮고 있던 '쉐이'가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먹물 자국은 서도가 두렵기라도 한 듯, 열두 대리인의 이름으로 쉴 새 없이 변하며 일렁였다……

……결국 '왕'으로 정했군.

왕은 잠시 멈칫하더니, 왼손으로 피범벅이 된 오른쪽 몸을 꽉 붙잡고는 모든 것을 덮은 글자에 결연하게 다시 서도를 겨누었다.

새카만 먹물 자국은 왕의 몸이 비칠 정도로 번들거렸다.

이게…… 마지막이다.

서도에서 극도로 강렬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대리인은 모든 정신과 혼을 칼날에 담았고, 이름에 칼이 닿는 순간을 기다릴 뿐이었다……

하앗!!!

기보 뒷면의 먹물 자국이 완전히 사라졌고, 수려한 필체가 마침내 드러났다.

하지만 대리인은 볼 수 없었다.


선혈이 낭자한 대리인의 몸이 퍽 소리를 내며 바닥에 쓰러졌다. 본래도 수척했던 얼굴은 이제 사람의 모습이 아닌 것처럼 말라비틀어져 있었다.

이어서, 그의 호흡이 멈췄다.


너는 나를 죽이고자 했고, 그 뜻을 이루었군.

지난번 실패 후 100년만의 포석이 이렇게 허무하게 막을 내리는 건가? 가장 생각이 깊었던 또 다른 나여.

그런 네놈이야말로 가련한 망상에 빠져 있는 모양이군.

갓 쉐이 능묘에 들어갔을 때처럼 멀쩡한 모습의 대리인이 쓰러진 자신 곁에 홀연히 나타났다.

바닥의 육신은 새벽 서리처럼 서서히 흩어졌고, 마지막에는 희미하게 푸른빛을 내는 흑돌 3개만이 남게 되었다……

그리고 그 흑돌 3개도 부서져 가루가 되었다.

훗, 본인을 바둑돌로 만드는 게 네가 생각한 방법이었나.

흑돌 3개로 네 죽음과 맞바꾸는 건, 그리 대단한 거래는 아니지.

자기기만이로군, 가련하구나.

자기기만?

나는 네 동류를 수도 없이 탐구했다. 그리고 난 너를 안다. 그리고 넌 우리가 얼마나 난해한 생명체인지 알지.

나는 태초에 태어난 그 미미한 의지를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의지가 어떻게 무한에 가까운 시간을 사용해 자신을 거대한 실체로 빚어내는지도 알고 있지.

시간, 공간, 수량, 구조, 인간의 눈에는 당연하고 영원히 변치 않는 것이라 보이는 것들이, 너희에겐 단지 사는 곳, 지내는 곳에 불과하다.

난 너의 동류를 보았다. 이미 죽어서 인간에게 조종당하는 기계로 전락했지만, 여전히 쉬지 않고 평온하게 흘러가야 마땅한 시간을 교란하고 있더군.

그걸 알면서도 나를 죽이려고 하는 건가?

네가 죽을 필요까진 없다. 하지만 반드시 영면에 빠지게 될 것이다. 쉐이, 진화의 몽상가여.

인간에겐 네 오만한 설계 따위 필요 없다. 물론, 내게도 그 끝없이 이어지는 너의 꿈은 필요 없다.

네가 기억하는 모든 죽음은 모두 실재하는 죽음이었다. 그건 네 거대한 의식 속 일부분이었고, 의심의 여지 없는 확실한 죽음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그날을 다시 돌이켜 봐라. 네가 썼던, 실소가 터져 나올 정도로 유치했던 그 수단 말이다. 내가 그 미치광이와 만난 후에…… 도대체 뭘 했을 거라 생각하나?

내가 사세대에 책을 돌려줬을까? 아니면, 내가 책을 망가뜨렸을까? 책에 뭐라고 쓰여 있었지? 그게 정말 책이었나?

봐라, 넌 이미 잊어버렸다.

네놈……!

네 기억은 완전히 죽어 없어졌다. 흑돌 3개와 맞바꾼 대가가 되었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너는 한 대리인이 자신의 목숨을 바쳐 휘두른 서도에 죽은 것이다.

그는 그 서도를 들고 염국 전체에서 '쉐이'라는 글자와 그리고 '쉐이'라는 생물이 존재했던 모든 흔적을 하나씩 지웠지.

이 무모한 녀석…… 감히!

만약, 그 서도가 내 손에 있다면, 난 얼마든지 다시 반복할 것이다.

난 네가 깨어나기 전, 네게 영원히 깨어날 수 없는 악몽을 만들어 줄 것이다. 설령 내 모든 것을 바치는 한이 있더라도.

……너는 해낼 수 없다.

네가 죽인 부분이 많을수록, 네가 나를 약화시켰다고 생각할수록, 내 각성은 더 앞당겨질 것이다.

알고 있다.

죽음은 고통스럽다. 네 모든 기억은 진실이며, 어느 한구석에서 정말로 벌어지고 있지. 네 죽음은 뼈저리게 고통스러울 것이다.

그렇다면 너는 어쩔 거지? 네가 무엇을 할 수 있다는 거냐!

……이 대국을, 계속할 거다.

너, 그리고 내가 영원히 쓰러져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게 될 순간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