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ST-1흐르는 강을 건너
사르곤과 미노스가 《상호 불가침 조약》을 맺은 지 5년, 양국의 우호 관계 증진을 위해 사르곤 사절단 대사로 임명된 티티가 미노스의 문화재를 가지고 아테누스에 방문한다.
그리하여 아가멤의 가장 따뜻한 영웅이자 서사시의 영창자 케레세이라는
리라를 월계수 가지 끝에 걸어두었다.
그 리라의 몸체는 힘노이 고산에 높게 솟은 삼나무로, 현은 아그네스 평원에 사는 용맹한 버든비스트의 창자로 만든 것이었다.
리라 소리가 울리면, 만물은 영웅의 나라에서 노래하며 자유롭게 멀리 퍼져나갔다.
그리고 지금, 케레세이라는 그녀의 리라를 월계수 나무 끝자락에 걸어두었다.
“이방인들이 먼 곳에서 찾아왔다.” 케레세이라는 단검을 꽉 쥐며 입을 열었다.
“우리의 땅을 짓밟고, 우리의 터전을 불태우고, 흐르는 강마저 막아버린 자들……”
“놈들은 심지어 만물에게 놈들을 위해 노래하라고 명령했다. 그럴 순 없다!”
“그것만큼은……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다.”
“내 리라는, 오직 영웅의 이야기만을 위해 울린다!”
——《케레세이라기》
“사료에 명확한 기록이 남아 있는 건 아니지만, 사르곤이 미노스에 건설한 세 이동도시 중, 파디샤 말라가 가장 사랑한 도시는 아테누스였다는 것이 학계의 통설이다.”
“도시 전체를 이동 플랫폼으로 옮길 때, 사르곤과 미노스의 기술자들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기에 그 유명한 '산에 둘러싸인 정원'의 특징을 온전히 살릴 수 있었다.”
“지금의 관광객이 만약 파디샤 말라가 특별히 보존해 둔 산길을 통해 아테누스에 간다면, 마주하게 될 산과 강의 모습은 케레세이라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봤던 모습과 조금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 루트는 필자가 모든 독자들에게 강력히 추천하는 루트로……”
시끄러워! 그 쓸모없는 책이 우릴 어떤 길로 데려왔는지 봐봐!
이것도 옮겨야 하잖아! 그것도 우리 둘이서만! 크고 무겁고 성가셔 죽겠어!
아얏, 그만해, 때리지 마!
그렇지 않아도 며칠 내내 걸어서 허리도 아프고 목도 타는데……
그게 네가 할 소리야?!
애초에 왜 본대에서 이탈한 건데? 네가 들떠서 멋대로 돌아다니지만 않았어도, 나는 지금쯤 아테누스 꽃밭에 누워 플로럴 리큐르를 마음껏 마시고 있었을 거야!
들떠서 그런 게 아니야.
전에 말했었잖아. 어릴 때 아버지가 들려준 이야기가 있는데, 아그네스 강 건너에 미노스라는 곳이 있다는 걸 알게 되고부터……
어쨌든, 출발하면서도 말했어. 미노스에 사절로 가는 건 정말 얻기 힘든 기회니까, 나는 옛길을 따라 당시 케레세이라가 남긴 발자취를 좇아 아테누스로 가면서 역사 속을 다시 걸어보고 싶다고……
역사 속을 다시 걸어보려면, 이 50kg짜리 짐짝은 좀 두고 오지 그랬어! 둘이서 옮기자니 힘들어 죽겠다고! 뭐, 부중청죄라도 하는 거냐?
부'형'청죄겠지. 염국 속담을 마음대로 바꿔 말하지 말라고……
머리가 역사책으로 꽉 막혀버렸어? 지금 그게 중요해?
알았으니까, 이제 그만 좀 때려. 다른 사람들한테 맡기기엔 마음이 안 놓이는걸.
이건 바르야반다바드 박물관에서 제일 귀한 소장품이야. 사르곤과 미노스 양국 모두에게 중요한 의미를 지닌 문화재라고. 우리가 이렇게 멀리까지 온 건……
이걸 미노스에 돌려주고, 두 나라 간의 새로운 시대적 우호 관계를 증진하기 위해서? 그 임무는 잘도 기억하고 있었네!
저기요, 사르곤 사절단의 대장, 메제티케티 나수투 마샤예르 씨, 지금 길을 잘못 드셨다고! 지각이라고! 아테누스 시정감독관과 만나기로 약속한 시간이 지났다고!
으으…… 본대는 정상적인 루트로 갔을 테니까 지금쯤이면 입성했겠지. 베누이 씨가 나 대신 시정감독관한테 잘 설명해 줄 거야.
베누이…… 그 거들먹거리는 귀족? 너 알고 그러는 거야, 아니면 진짜 몰라서 그러는 거야?
그 녀석 사절단에서 너를 보좌해야 한다는 소시를 들었을 때, 눈빛이 싹 변하는 거 못 봤어? 무슨 너한테 금괴라도 털린 사람 같은 표정이더라.
그, 그럴 리가. 베누이 씨는 좋은 사람이야.
내가 박물관 관장이 된 지 얼마 안 돼서 이렇게 중요한 임무를 맡게 된 거라, 사실…… 아무튼 베누이 씨가 오는 길 내내 많이 도와주셨어.
됐어, 네 맘대로 해. 나는 그냥 너 따라 여행 온 것뿐이니까.
빨리 가자. 안 그러면 진짜 기운이 다 빠져버리겠어.
알겠어. 자, 벌써 도착했는걸.
앞을 봐……
와……
와……
아테누스의 자료를 수없이 많이 봤는데, 진짜 이렇게 눈앞에서 보니 정말……
꽃밭이 이렇게 많이…… 플로럴 리큐르랑 생화 케이크다! 살았다!
……
미노스, 사르곤과 강 한 줄기를 사이에 둔, 여러 도시국가가 공존하는 땅.
아테누스, 미노스 최초의 도시국가, '산에 둘러싸인 정원'.
누런 모래로 가득한 사르곤의 풍경과 전혀 다른 광경이 티티의 눈앞에 펼쳐졌다. 사료 속에서만 존재하던 이동도시가 진짜 모습을 드러낸 순간이었다.
새하얀 성벽.
푸르른 들판.
아름답게 어우러져 서로를 품은 산과 강.
그 풍경 속에, 다채로운 형태의 신전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모습이 유독 눈길을 사로잡았다. 만약 영웅의 전설이 미노스를 적시는 비라면, 신전은 그 비를 머금고 자란 식물과도 같았다.
그 유명한 연극과 철학, 그 많은 이야기와 전설들이 이 땅에서 거침없이 뿌리내릴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 있었다. 휘몰아치는 모래바람조차 그 찬란한 유산들을 결코 집어삼키지는 못했던 것이다.
잠깐, 왜 밀고 그래?
아직 숨도 제대로 못 골랐다고……
요 며칠, 티티는 길을 잃고 잔뜩 짜증이 난 비스트 아리스토크랫을 달래면서, 긴 여정에서도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써왔다.
하지만 이 순간, 티티는 미오보다 더 마음이 급해졌고, 눈앞에 펼쳐진 이 도시에 빨리 들어가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저기 아래 봐봐, 보여? 저 나루터가 아테누스로 연결되는 지점이야. 배를 타고 건너야 도시에 들어갈 수 있어.
빨리 가자, 빨리.
형, 도와줄까?
강이 얼고 있어. 얼음 조각까지 보이는데…… 형한테는 노가 하나뿐이잖아.
잘 앉아만 있어, 이타코스.
짐이 무겁지 않아서, 나 혼자 가도 돼.
배웅이라도 해줄게…… 내가 네게 해줄 수 있는 게 많지 않아, 이타코스.
네가 꿈속에서 신탁을 받은 지, 그리고 우리가 만난 지 벌써 2년이 지났지?
너는 이동도시에서 가져온 기술을 우리에게 전수해 줬어. 우리와 함께 사르곤인들이 도외시하던 늪지대에 마을을 세웠고, 물길을 내고 논을 일궜으며, 냉해를 막아냈어.
우린 함께 지냈다. 우린 한 가족이었어.
2년 동안 계속 생각했어. 왜 신탁이 날 이곳으로 이끈 건지.
이제야 알았어…… 사르곤인이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강가에 나타날 거야. 이 늪지대를 나가서 강을 따라가면, 그곳에 제일 빠르게 도착할 수 있어.
……그렇군.
형, 유격대가 사르곤인을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우린 100년 넘게 계속 져왔잖아.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신탁을 받지 못했고, 점술도 몰라. 심지어 너와 함께 떠날 수도 없지.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약속하마.
나는 우리의 마을, 우리의 집, 우리의 논밭, 우리의 꽃밭을 지킬게. 그리고 네가 승리하고 돌아오면, 나는 너와 함께 너의 고향 아테누스에 갈게.
거기서도 나는 뱃사공을 계속할 생각이다. 매일 델피 운하의 아침 햇살을 맞이하며, 네가 도시 건너편 신전으로 출근하는 걸 배웅해 줄게…… 네가 한 말을 들은 이후로 계속 그 광경을 그려왔어.
……이타코스, 듣고 있어?
형, 올해 미노스의 겨울은 유난히 춥네.
(힘차게 노를 젓는다)……
……
뱃사공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당시, 이타코스의 그 말을 듣고 나서, 분명 그에게 뭐라고 대답했었는데.
몇 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떠오르지 않았다.
크산토스 선생님, 오셨네요. 10분 늦으셨어요.
나는 여태 지각이란 걸 한 적이 없어, 리케이온. 이번이 처음이야.
나 원 참. 아까 강가에서 선생님의 로브를 발견하고는, 어제 퇴근길에 부주의로 흘리신 건지, 아니면 도둑이 훔쳐 갔다가 너무 낡아서 내버린 건지 걱정했단 말이에요. 그런데 아침부터 수영을 하고 계셨을 줄이야.
저는 그냥 늘 하던 대로 선생님의 로브를 개어서 가져간 것뿐이에요……
선생님께서 제게 일정을 알려주지 않으셨으니, 이 일로 절 탓하실 수는 없어요.
오히려 제가 선생님께 한마디 해야겠어요. 의사가 한동안은 조심하셔야 한다고 그렇게 당부했는데……
고맙다, 리케이온. 오랫동안 나는 네게 싸우는 법과 노 젓는 기술을 가르쳐 줬고, 너는 최선을 다해 내 일상을 돌봐줬지.
널 탓한 건 아니다. 그저 오늘 일찍 퇴근할 생각으로 왔다 보니, 지각한 게 유독 마음에 걸려서 그랬어.
또 말을 돌리시네요…… 잠깐, 퇴근 후에 또 그 묘지에 가시려는 건 아니겠죠? 그 분은……
이타코스, 나의 절친한 벗.
그날의 이별이 영원한 이별이 되었지. 그때 이타코스가 딱 네 나이였는데.
뭐라도 위로의 말을 드리고 싶지만, 아시다시피 저는 그런 걸 잘 못해서……
……못하는 건 하지 마라. 그런 건 네가 할 일이 아닌 경우가 많으니까.
우리가 신경 써야 할 일은 따로 있다. 배를 차지하기 위해, 과수농들과 제1신전의 장인들이 벌써 며칠째 다투고 있어. 나루터 관리인인 나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만큼은 결판을 내라고 다그치고 있으니.
주 나루터로 가자, 오늘은 바쁜 하루가 될 거다.
잠깐만요, 크산토스 선생님.
방금 리디아 시정감독관이 사람을 보내왔는데, 선생님께서 오늘은 이 보조 나루터에 남아 고장 난 배를 고쳐주셨으면 한다고 '부탁'하더군요.
전 아테누스를 통틀어 '완급조절'이란 말을 제일 많이 하는 건 아마 리디아일 거다. 또 다른 말은?
다른 말은 없었습니다.
……
리케이온, 오늘이 사르곤 사절단이 입성하는 날인가?
……그런 것 같아요.
흥, 리디아가 내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니, 고마워해야 하나 화를 내야 하나?
리디아는 내 노의 톱날을 전부 뽑아서 못 쓰게 만들었어야 했어. 아니, 차라리 날 감옥에 집어넣어 내가 '돌아온' 사르곤 사절단과 영원히 만나지 못하게 해야 했어.
저기…… 후우…… 실례합니다. 혹시 강 건너편으로 태워다 주실 수 있을까요?
다른 나루터에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저희가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할 거 같아서요.
……
……그러니까 지금 이런저런 사정으로, 대사께서 오는 길에 발이 묶이셨다는 거죠?
무례를 범하려던 건 아니지만, 그렇습니다.
……
부디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리디아 시정감독관님. 미노스의 풍경이 워낙 훌륭한 데다, 대사는 아직 경험이 많지 않은 젊은이라 모든 것이 신기할 겁니다. 사려가 부족했던 거겠죠.
말씀드렸다시피, 사절단의 부대사이자, 사르곤에서 가장 유서 깊은 가문 중 하나인 엔시파 가문의 이번 세대 수훈자인 저도 사르곤을 대표해 움직일 권한이 있습니다.
물론입니다. 저 또한 베누이 님을 신뢰해요.
그럼 아테누스는 언제 의식을 거행할 생각이죠?
의식이요?
교환식 말입니다.
올해 초에 사르곤과 미노스가 정식으로 수교를 맺으면서, 문화 교류의 일환으로 아테누스는 사르곤에 넘어온 미노스 건국 영웅 케레세이라의 유물을 되돌려 받기로 했지요.
그리고 우리는 아테누스, 코리니아, 라케다이몬 3대 도시 건설 시기에 사르곤인이 이곳에 남긴 기술 자료를 가져가기로 했고요…… 잊어버리면 곤란한데요, 시정감독관.
부…… 대사님, 제가 그걸 잊어버릴 리 없잖아요.
5년 전, 미노스 국경에서 마지막 대전쟁이 끝나고 양국은 정식으로 상호 불가침을 체결했죠. 덕분에 제가 이렇게 시정감독관 사무실에서 부대사님을 만날 수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흥……
죄송합니다, 요즘 너무 바빠서요. 방금 도시에 들어와 강가의 광장을 지나오실 때, 대규모 공사 현장과 의욕적인 장인들을 보셨겠지요?
네.
그건 제1신전 재건 공사 현장인데, 도시 전체의 5분의 1에 달하는 인력이 동원되었어요.
제1신전이라……
부대사님께서도 방금 케레세이라가 미노스의 건국 영웅이라고 하셨죠. 그렇다면 그 이름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계실 거예요.
아주 먼 태초의 시절, 케레세이라는 자신을 따르는 각 부족의 난민들을 이끌고 전쟁과 역병에서 도망쳐 나와, 산에 둘러싸인 정원으로 향했습니다.
추종자들은 케레세이라와 함께 터전을 세우고, 국가의 첫 번째 신전인 제1신전을 건설했어요. 그날로부터 미노스에는 영웅의 피가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에 아테누스가 생겨났고, 그제야 수많은 도시국가가 공존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죠.
하지만 원래의 제1신전은 전쟁의 불길 속에서 파괴되었고, 지금은 아테누스의 시민들이 재건 작업에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있지요…… 이 일의 의미에 대해서는 잘 알고 계시겠죠.
……그렇죠.
하아, 하지만 신전 재건에 필요한 석재를 채굴하기 위해서, 아테누스는 벌써 일주일째 힘노이 산에 정박 중이에요.
그런데 마침 사과 수확 철이기도 하거든요. 갓 딴 사과는 곧장 나루터에서 배에 실어 내보내야 하고, 덜 익은 열매는 햇빛을 충분히 쐬어줘야 해요.
도시를 일조량이 충분한 곳으로 다시 이동시키지 못하면 사과의 품질에 타격이 갈 거예요…… 부대사님도 나루터에 모여 있는 과수농들을 보셨겠죠?
네.
영웅의 뜻을 기리고자 하는 시민들의 행동에도 지원이 필요하지만, 수확을 걱정하는 과수농들의 마음도 달래야 해요. 부대사님도 미노스의 행정 체계를 잘 아시겠지만, 시정감독관인 제가 실질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이 사실 그리 많지 않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 신전 제사장의 동의를 먼저 받아야 하거든요……
그래서 지금 저는 도저히 여유가 없는 상태입니다, 베누이 님.
그럴싸한 이유를 찾는 재주가 있으시군요.
오해예요, 베누이 님.
저도 대사님과 마찬가지로 젊은이랍니다. 제가 보기에 지금 핵심권의 강대국들 모두 적극적으로 변화를 모색하고 있어요. 저희 같은 약소국도 시대에 맞춰 발 빠르게 움직여야 하죠.
윗분들은 케레세이라의 유물을 미노스 3대 도시 건설 자료와 교환하는 사안을 조율하는 데만 해도 반년이 넘는 시간을 할애하셨어요.
결국 제 치하에서, 사르곤과 미노스가 기나긴 세월을 보낸 끝에 마침내 우호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다면, 저도 기꺼이 최선을 다할 거예요.
흠, 그게 좋을 겁니다.
이렇게 하죠. 사절단 분들은 일단 도시를 마음껏 둘러보도록 하세요. 아테누스는 경치가 아주 멋진 곳이니, 귀빈들께서도 먼 길 오신 게 전혀 아깝지 않을 겁니다.
아, 맞다. 이참에 제1신전 재건 현장을 둘러보셔도 좋을 것 같네요…… 돌려주실 것도 마침 케레세이라의 유물이니, 이것도 일종의 인연이겠죠.
미노스인은 연극과 철학을 사랑해요. 우리는 치밀한 구성과 사고를 즐기면서도 뜻밖의 서프라이즈를 기대하기도 하죠.
교환 사안과 관련해서는 며칠만 기다려주세요. 제가 성대한 교환식을 준비하겠습니다.
미노스의 전통에 따르면, 중요한 행사는 제사장이 연극으로 막을 올리고, 여러 영웅께 순조로운 진행을 위한 가호를 구합니다.
다만 신전 제사장의 부담을 덜고 절차를 간소화하고자, 아테누스는 2년 전에 시정감독관이라는 직책을 새로 만들었어요. 그래서 이번 일은 제가 준비할 사람을 보내뒀습니다.
그동안에는 제 믿음직한 조수인 서기관을 보내 모든 일정을 준비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무슨 문제가 있으면 제 서기관에게 맡기시면 돼요…… 헤카데모스!
네.
미노스의 이름 없는 풋내기이자, 폭주하는 메가폰, 헤카데모스입니다. 부대사님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물론 근무 시간 내에서만요.
허허. 이런 기생오라비는 필요 없습니다만.
……
아, 제 말은, 먼 길을 왔더니 심히 피곤하다는 말입니다. 전 호텔에서 교환식 준비가 끝나기를 기다리겠습니다.
제1신전 재건 현장을 둘러보는 흥미로운 일정은 우리 진짜 대사님께 양보하도록 하지요. 의욕도 넘치시고 박물관 학자이기도 하시니 관심이 많을 겁니다.
원하는 대로 하시지요, 베누이 님. 헤카데모스는 메제티케티 대사님께 보내겠습니다.
리디아 시정감독관, 당신의 '서프라이즈'를 기대하겠습니다.
다만…… 일부러 시간을 끌거나 다른 일을 꾸미지는 않는 게 좋을 겁니다.
그건 저도 드리고 싶은 말씀입니다, 베누이 님.
……
창문을 열고 밖을 보세요. 델피 운하를 덮은 아침 안개가 이제 막 걷히려는 참이에요. 힘들게 얻은 평화이니만큼, 서로 마음을 열고 진심으로 대할 수 있길 기대하겠습니다.
그나저나 오늘 메제티케티 대사님을 뵙지 못해 정말 아쉽네요. 젊고 유능하신 분이 이렇게 자유분방하시기까지…… 대체 어떤 분이시죠?
우웩……
으…… 제발 좀. 배에 겨우 한 발 올려놓고 그러면 어떡해. 유난 좀 떨지 마.
(작은 목소리로) 배가 흔들리잖아.
배니까 흔들리지.
맥스 특별구에서 공부할 때, 학교 요트 동아리에 직접 지원했다고 그러지 않았어?
(작은 목소리로) 전공 수업이 너무 많아서, 고서 복원실이랑 고고학 현장에 다니느라 겨, 결국 두 번 밖에 못 갔어.
컬럼비아에서 왔나. 차림새만 보고 나는 또……
크산토스 선생님.
음?
이분, 뱃멀미하는데요.
별일이군.
아, 아니, 에요. 그, 그냥 너무 많이 걸었더니 피곤해서, 발을 헛디뎠을 뿐이에요……
어떡하죠?
손님들 짐을 배로 옮겨드려. 나는 뭘 좀 챙겨올 테니.
이 아가씨는 선실 안쪽에 앉혀. 오늘 파도가 그리 세진 않으니, 배는 흔들리지 않을 거야. 델피 운하는 모든 선량한 승객들에게 친절한 법이지.
아가씨를 건너편에 데려다주면, 우리는 주 나루터에 가서 사르곤 대사를 좀 만나보도록 하지…… 리디아 시정감독관의 호의를 무시할 순 없으니.
저도 동행하겠습니다, 크산토스 선생님. 선생님을 감시해야 하니까.
……일단 저 손님들 짐부터.
……내 말은 전혀 안 듣네.
(작은 목소리로) 너 또 핵심을 잘못 짚었어. 저 사람들, 어떻게 봐도 너한테 원한 있는 사람들이잖아!
(작은 목소리로) 지금 컬럼비아로 국적을 바꿔도 늦지 않아. 그러니까 절대……
저기, 두 분 모두 조심해 주세요. 엄청 중요한 물건이라서요.
야…… 너……
하아, 일단 타자.
뭐길래 이렇게 무겁지?
그건……
화물이야. 랭크우드에서 가져온 영화 등장인물 피규어인데, 최근에 개봉한 《미스 듀폰》의 등장인물도 있어. 도착해서 팔 생각이야.
그렇지만 아테누스에는 영화관이 하나도 없는데.
그러면 더 좋지. 자고로 유능한 장사꾼은 맨발로 다니는 곳에 가서 신발을 파는 법이니까.
뱃사공님, 방금 “델피 운하는 모든 선량한 승객들에게 친절하다”라고 하셨죠?
(고개를 끄덕인다)
델피 강은 힘노이 산에서 시작되어 미노스 산 중앙의 평원을 가로지르고, 아직 이동도시가 아니었던 아테누스와 코리니아 옛터를 따라 흘렀었지……
또 한때는 우리 전사들이 사르곤 도적놈들의 철제 말굽을 막아낼 수 있게 도왔어.
지금은 운하가 되었지만, 아직도 노래와 변론을 사랑하는 동포들을 먹여 살리고, 미노스의 문화를 번성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지.
그래, 맞아. 델피 운하는 모든 선량한 승객들에게 친절해…… 사르곤인을 제외하고 말이야.
사르곤인 중에도 미노스의 문화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잖아요.
……
예전에 그렇게 자신을 소개한 사르곤인이 있었지. 왕중왕의 여동생, '저편의 여왕' 파디샤 말라.
그녀는 미노스 3대 도시를 제외한 모든 도시국가를 불태워버렸어. 신전을 폐쇄하고, 연극을 금지했으며, 사르곤인을 이주시켜 전방위적으로 미노스의 문화를 동화시키려 했지.
그녀는 그렇게 미노스를 암흑의 시기로 몰아넣었다. 그 여자가 말하는 '이해와 사랑'은 미노스인의 몸에 흐르는 영웅의 피를 완벽히 씻어버리는 거였어.
그리고 지금 다시 사절이라는 이름을 달고 천리 길을 달려온 놈들도, 미노스에서 공적을 세우고 또 다른 '저편의 여왕'이 되고 싶어하는 파렴치한 귀족일지 누가 알겠어?
그건……
이 배, 왜 또 흔들리는 거야……
우웩……
읍, 우욱! 우웩……!
살려줘……!
하아……
음……
됐고, 이 얘기는 그만하지. 자, 사과 좀 먹어, 속이 좀 편해질 거야.
아, 크산토스 선생님, 방금 가져오신다는 게 사과였군요.
고, 고마워요.
눈은 감고 있어. 수면을 안 보는 게 훨씬 나을 거야.
괜찮아요, 뱃사공님. 저는 보고 싶어요.
티티는 뱃전에 몸을 기대고는 메스꺼움을 참으며 간신히 눈을 떴다.
태양이 하늘 한가운데 떠 있었다. 델피 운하의 가을 아침 안개는 완전히 걷혔고, 바람이 마지막 남은 싸늘한 기운을 그녀의 뺨에 불어 보냈다.
뱃사공님, 복수의 칼날과 정복자의 목이 미노스 연극의 주된 모티프 중 하나라는 건 알아요.
하지만 전 미노스의 연극에서 훨씬 더 인상 깊은 표현들도 봤어요.
……
그 하나하나를 제대로 볼 생각이에요.
제가 아테누스에 온 이유는 바로……
음? 왜 말을 하다 말지?
아니, 저 앞을 보세요……
지금 이렇게 속이 울렁거리는데, 그런데도 정말……
이 강, 이 도시가…… 너무나도 아름다워요.
저, 분명 이곳을 좋아하게 될 거 같아요.
그렇다면…… 나 역시 영광이지.
도착했어.
미노스에서의 여정이 즐겁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