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10쉐라간드 신이시여
홀로 '글로리아나'호 갑판에 오른 엔시오데스는 쉐라그를 대표하여 캐스터 공작과 협상을 시작한다. 엔야 일행은 신비한 동굴에서 거대한 쉐라간드 조각상과 얼어버린 성녀들을 보게 되고, 모두가 환상에 빠지게 된다.
등장 오퍼레이터: 실버애쉬 더 레인프로스트, 아스트젠 더 라이트체이서, 프라마닉스, 스노우헌터
폭파 소리와 함께 암벽이 무너지고, 깊은 동굴이 모두의 눈앞에 나타났다.
역시…… 여기가 더 안쪽으로 통하는 곳인가 보네.
여기서는 동굴 입구 쪽만 보이는 것 같은데…… 더 깊숙이 들어가 봐야 해.
엔야?
목소리가 동굴에 울려 퍼졌다. 성녀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그리고 방금까지 쉴 새 없이 지껄이던 노인이 이제는 입을 꾹 다물고 있는 모습을 봤다.
“나의 성전을 구하지 말고, 나의 마음을 구하라.”
……아드소 장로님, 기다리고 있습니다.
……
그의 두 다리는 삭은 나무뿌리 같았고, 마른 목구멍은 건기의 말라붙은 연못 같았다.
그는 그 자리에서 요지부동이었다……
……난 이곳에 있을 테니, 가서 자네들이 해야 할 일을 하게나.
엔야한테 쉐라간드가 없는 걸 증명한다며?
당신이 우리랑 같이 가지 않으면……
이미 말하지 않았는가, 밖에 있겠다고.
그분께서 정말 계신다면, 직접 나와서 모습을 드러내시겠지.
장로님……
진실을 규명하기보다, 그분께서 계신다는 증거를 외면하고 싶으신 거겠죠.
아냐…… 내가 그럴…… 리가……
여기에는 답이 없다네……
그러면 왜 우리를 여기까지 데려와 놓고 진실을 보지 않으려 하는 거죠?
……
아니, 그분은 절대 존재하지 않는다.
실버애쉬의 장녀, 그리고 자네. 아니, 자네들, 못 본 척하지 말게나.
얼어붙은 손가락으로 모피를 무두질하는 사냥꾼들, 먼지를 마시고 기침하는 부랑자들, 그리고 피부가 갈라진 광석병 환자들.
자네는 보았겠지, 진흙탕에 오랫동안 무릎을 꿇은 채, 피를 흘리며 쉐라간드께 구원을 간청하는 사람들을……
아니, 하루빨리 자신의 비참한 생을 끝내주길 바라며 간청하는 것을……
자네들이 따뜻한 집에서 화기애애하게 술잔을 부딪칠 때, 나와 만주원은 자네들이 보고 싶어 하지 않는 금지된 구역과, 가장 가난한 이들의 거처를 두루 다녔다네.
그들을 조용하게 만든 것도 나고, “아무도 버리지 않으십니다.”…… “긴긴 어둠 속에 있을지라도, 그분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라고 말한 것도 나일세……
그들이 웃으며 죽어갈 수 있는 나라를 만든 건 우리였다네. 하지만 자네들, 그리고 쉐라간드는……
변덕스러운 우두머리, 만물을 가축으로 여기는 군왕. 그분은 그 사람들과 쉐라그 전체를 구원할 수 있었다. 아니, 구원해야 했다.
하지만 그분은 무심했지. 가끔 기적이라고 하는 것을 행하여 자신의 왕권을 선포할 뿐이었다……
어째서 소수자가 가장 마지막에 구원받아야 하는 거지?
지금 자네들은 그 마귀이자 폭군을 만나, 나와 우리가 애써 만든 질서를 부정해달라고 간청하려 하고 있는 거라네.
나는 절대……
이 노인을 지탱할 수 있는 것이 또 무엇이 있을까. 그는 마치 보이지 않는 망치에 얻어맞기라도 한 것처럼, 쇠약한 몸을 흙바닥 위에 포갠 뒤, 울음을 터트렸다.
……말해주게, 자네들이 알려주게.
그분은 어째서 알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거지?
그리고 자네들은 또 어째서 침묵하는 있는 겐가……
아……
대장로가…… 어떻게 된 거야……
아드소 장로님…… 저는 장로님을 이해할 수 있어요.
우리에게 '신'의 진짜 모습을 보는 건 허락되지 않았어요. 우리는 오직 그분의 가르침과 그분의 창조물을 통해서만 그분의 존재를 그릴 수 있죠.
하지만 저는 그래도 믿고 싶어요……
제가 이 동굴의 반대편에서 무엇을 보든, 그분께서 가르쳐 주신 미덕과 계율, 지식과 지혜가 모두 의미 있는 것이라 믿는 제 신앙은 흔들리지 않을 거예요.
저는 그저 똑바로 보고 싶을 뿐이에요……
쉐라그 사람들이 왔던 길을요.
엔야는 주저 없이 돌아선 후, 신앙의 방향을 따라 동굴 깊숙이 걸어 들어갔다.
'글로리아나'호 갑판
……얼마나 지났지?
최후통첩 이후로 5시간 57분이 지났습니다.
그렇군……
실버애쉬가 이런 식으로 응답할 줄이야, 정말 예상 밖의 일이네.
정말 아쉽군, 결국 이런 식으로 끝나야 한다니.
명령이다! 전군……
저건……
공작님! 쉐라그의 고속 전함입니다!
……몇 척이지?
1척이…… 전부입니다……
갑판에 서 있는 사람이라면 망원경을 통하지 않아도 볼 수 있었다.
저 멀리 눈 덮인 골짜기에서 은회색의 고속 전함이 천천히 나오고 있었다.
아마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 전함은 맞은편 함대와 비교해도, 그 뒤에 선 산과 대조해도 아주 초라해 보였다……
실버애쉬……?
공작님, 저쪽 전함에서 공개 채널을 통해 교신해 왔습니다.
저쪽에서 말하길, 저건 쉐라그의 고속 전함이며, 전함의 지휘관은 엔시오데스 실버애쉬라고 합니다.
빅토리아의 캐스터 공작께 인사를 드린다고 합니다……
그래……?
하지만, 저건 협상을 원하는 건지, 전쟁을 원하는 건지 알 수가 없군.
공작님과 만나서 직접 만나 대화하고 싶다고 합니다…… 협상 장소는 공작님의 '글로리아나'호로 지정했습니다.
……좋아.
손님을 맞이하지.
오랜만에 뵙습니다, 존경하는 캐스터 공작님.
잘 지냈는가, 엔시오데스…… 확실히 오랜만에 보는군.
자네 같은 젊은이가 내 앞에 서 있으니,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가고 있다는 게 체감되는 것 같아. 정말 어찌할 바를 모르겠어.
오랫동안 인사드리지 못했지만, 예전에 저와 카란 무역회사를 도와주신 은혜를 잊지 않고 있었습니다.
허허…… 빅토리아를 떠날 때 너무 서둘러서 그런가, 캐스터의 지원만 챙겨가고, 우리의 우정은 빠뜨린 것처럼 보이던데 말이지.
난 언젠가 자네가 나를 쉐라그에 초대할 거라고 기대했다네.
그래도 쉐라그에 오셨잖습니까. 어찌 되었든 주인의 도리를 다할 생각입니다.
“주인의 도리”?
정말 궁금하군. 자네는 카란 무역회사에서 제명됐고, 실버애쉬 가문은 빅토리아와 내통한 배신자 취급을 받고 있는데……
대체 무슨 신분으로 나를 만나러 온 거지?
간단합니다.
지금 저는 쉐라그의 유일한 실권자로서……
쉐라그를 대표하여 공작님과 협상하러 왔습니다.
쉐라간드 신이시여, 여긴 엄청나게 크네……
말도 안 돼…… 여기가 정말 사람이 만든 피난처라고?
최소한 사람 손에 숨겨진 곳이긴 해요.
엔야, 만주원에서 숨긴 유적 같은 거 봤어?
아니요, 못 봤어요……
잠깐만, 무슨 소리 안 들려?
눈밭에 돌멩이가 떨어지는 소리 같은데?
아니야…… 계측기에 나오는 이미지를 보면, 매우 규칙적이야. 꼭……
……심장박동 같죠.
여기에 있는 돌멩이들도……
무늬가 꼭 혈관처럼 소리를 따라 은은한 빛을 뿜어내고 있어……
이런 것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죠?
……계측기에 생체 신호가 전송됐어.
아무리 믿기 힘들어도 답은 하나뿐이야.
우리는 지금 어떤 생물의 몸속에 있어.
……말도 안 돼.
……
으악!
이게 뭐지? 넘어질 뻔했어.
조각품 같은 게 있는 것 같아요. 저도 방금 부딪힐 뻔했어요……
탐측기의 비상 조명을 킬게.
탐측기에서 빛이 나자, 어둠이 걷히며 가까운 곳에서 길을 막고 있는 물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 얼음 조각상? 왜 엎드린 자세지?
하나가 아니야.
봐…… 저기에도 있어…… 이쪽으로 갈수록 많아져……
옷과 장신구가 쉐라그 역사 도감에 나오는 옛날 사람들의 차림새와 일치해. 하지만 그 당시 사람들에게 이 정도 조각 기술이 있었나?
그 당시 공예품과 조각상은 전부 보잘것없었을 텐데. 엔야……
엔야?
……
조각상이 아닌 것 같아요.
조각상이 아니라고?
이 사람들은…… 모두 과거의 성녀들이에요.
쉐라간드께서 자취를 감추셨을 때 다시 쉐라그로 돌아와달라고 기도하며 제사를 드리던 사람들이요.
엔야의 손끝이 눈앞에 있는 '얼음 조각상'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주름, 근육, 이를 악물어 부풀어 오른 양 볼, 속눈썹과 얼굴에 남은 눈물 자국까지.
저체온증으로 사망한 소녀의 얼굴에는 환각이 자아낸 안도감, 혹한으로 인한 떨림이 하나의 표정이 되어 엉겨 굳어져 있었다.
죽은 후에 차가운 얼음으로 뒤덮여서, 당시의 모습과 자세가 그대로 간직됐어요…… 다 같은 방향을 보고 있네요.
모두 그분의…… 응답을 구하고 있어요.
소녀들은 '조각상'의 시선을 따라 뒤를 바라봤다.
……이건 뭐지? 쉐라그에서 이런 모양은 처음 보는데.
쉐라간드예요.
이게 옛날 사람들이 봤던 거예요…… 그리고……
……
고대의 기술로는 이 높이와 부피를 구현할 수 없어, 이건 그때 남긴 것일 리가 없는데……
하지만 이 동굴은 아주 오래 폐쇄된 상태였어. 도대체 누가, 왜 이런 짓을……
어디선가 찬바람이 싸락눈을 싣고 날아들었다.
엔야, 조심해!
저 조각상이…… 저를 부르고 있는 것 같아요.
심장박동 소리가 점점 귀를 찢는 듯한 울부짖음으로 변했다. 그녀는 동료의 외침도, 자신의 숨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지금 엔야의 감각에 남은 건, 눈앞에서 차가운 빛을 반짝이는 조각상과 억제할 수 없는 충동뿐이었다.……
성녀의 손바닥이 조각상 하단을 쓸자, 엄청난 충격이 그 자리의 모든 것을 삼켜버렸고, 다채로운 풍경이 성녀의 머릿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후, 또 어디 숨은 거야?
방금 분명히 봤는데. 왜 수풀에 있다가 눈 깜짝할 새에 사라진 거지? 내가 또 놓친 건가?
과거의 경험이 그녀를 바짝 엎드리게 했다. 처음 숲에 발을 들였을 때의 조안나는 아직 어린아이였다. 그때 아버지가 가르쳐 줬던 건……
“조안나, 잘 들어.”
“사냥은 단순한 노동이 아니야. 사냥할 때는 세심해야 하고, 용기도 있어야 해. 게다가 결단력도 필요하고, 자비가 뭔지도 알아야 하지.”
“모든 동물의 흔적을 주의 깊게 봐야 한다.”
“눈 위의 발자국, 나무에 생긴 발톱 자국, 떨어진 털, 분뇨, 먹을 것을 묻은 흔적까지……”
그녀는 눈밭, 나무 기둥, 나무줄기와 벌거벗은 땅을 지났음에도 사냥감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산처럼 거대한 사냥감은 마치 증발이라도 한 것처럼 자취를 감춰버렸다.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해도 조급해하지 마. 조급할 거 없어, 조안나.”
“너는 사냥꾼이야. 반드시 사냥감을 찾을 수 있을 거야.”
“그분께서 활과 화살을 들고 숲으로 들어가면, 숲이 기름진 고기를 줄 거라고 약속하셨으니까……”
……!
찾았다. 저기다!
수풀에서 튀어나온 검은 그림자가 재빠르게 오솔길을 가로질러 반대편 숲속 깊숙이로 도망쳤다.
소녀는 등 뒤로 팔을 흔들며 소리쳤다.
아버지, 숲 옆쪽에서 들어가세요. 같이 에워싸요……!
텅 빈 숲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라, 조안나! 나도 너와 함께 움직이마, 분명 잡을 수 있을 거야!
“너는 분명히 잡을 수 있을 거야.”
“너는 독실한 아이다. 기도와 예배를 거르지 않았고, 신상을 조각할 때도 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 게다가 매일 밤 쉐라간드께 진실한 마음을 고백하기도 했지.”
“그분께서 너의 그 독실함과 헌신을 보고 네게 배부름과 행복, 그리고 내일의 삶을 주실 거다.”
만약에…… 후…… 정말 그 녀석을 잡으면……
올겨울은 우리 가족 모두 배부르게 날 수 있을 거야……!
동생들뿐만 아니라 나도…… 그리고 옆집 할머니랑 아기를 낳은 앞집 언니에게도 조금씩 나누어 줄 수 있을 거야……
뿔로는 쉐라간드의 조각상을 만들고…… 가죽으로 동생에게 새 옷을 만들어줄 수도 있어.
조안나는 행복했다. 따뜻해진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부풀어 오른 듯한 기분이었다.
그녀의 두 다리에는 힘이 더 실렸고, 손의 떨림도 사라졌다. 그녀는 사냥감에 점점 더 가까워졌다.
다 왔어…… 곧 잡을 수 있어!
쉐라간드시여, 우리를 보호하소서……
발사된 화살이 고요했던 공기를 찢으며 날아갔다.
소녀는 사냥감을 바짝 쫓으며 덤불을 뛰어넘었다. 이제 손만 뻗으면 사냥감의 단단한 털을 움켜잡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
하지만, 조안나의 손에는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오리지늄 결정이 조안나의 팔에서 마구 자라나고 있을 뿐이었다.
네 신앙이 쓸모가 있더냐?
쉐라간드는 너를 지켜주지 않는다…… 이 대지가 사람을 집어삼킬 때가 되면, 너도 삼켜지는 사냥감 중의 하나가 될 뿐이다.
……
익숙한 방이로군. 본 적은 없지만, 여기가 어딘지 아주 잘 알고 있지.
비좁고 어두운 실내에서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열기가 느껴졌고, 그와 동시에 송진 냄새가 어지러울 만큼 진하게 났다.
이건 내 머릿속이군.
노인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노인은 자신의 두 발로 방의 크기를 재려는 듯 걸음을 내디뎠다.
한 걸음, 두 걸음, 다섯 걸음, 열 걸음.
열 걸음이면 충분하군.
방음도, 단열도 되고 아무도 모르는 좁은 방, 비밀리에 대화하기에 딱 알맞은 곳이지.
이렇게 호소하고 초대한다면, 실버애쉬 부부는 분명……
……
루카 형님이 물어보면 뭐라고 말해야 할까?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의 길에서 헤매지 말고, 돌아오라고 설득해야 하나?
나는 그 부부가 가져온, 새로 태어난 모든 것들이 쉐라그인의 마음을 어지럽힐 거라는 형님의 생각에 동의하는가?
형님에게 작은 방을 하나 만든 뒤, 브라운테일 저택의 앞마당 뒤에 숨겨두라고 알려줘야 하는 걸까……
……송진, 가연성 물질, 마른 장작, 필요한 점화 시설을 어떻게 비축해야 하는지 말해줘야 하나?
그 냄새가 더 진해졌다. 코가 아플 지경이었다.
우리의 약속을 잊었군.
형님……
너는 만주원의 권력을 장악해야 했어. 그리고 밖에서 움직이는 나와 손발을 맞춰 쉐라그 전체를 브라운테일의 지배하에 둬야 했지.
어째서 항상 그렇게 나약한 거냐?!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우리가 여기까지 오기 위해 손에 얼마나 많은 피를 묻혔는지 잊었어?
이 두 아이를 봐라. 라타토스와 시우루스, 이 아이들도 네 혈족이다.
설마 이 아이들이 실버애쉬와 페일로쉬의 칼에 찔리는 모습을 눈뜨고 지켜볼 작정이냐?
……
나는 평생 많은 거짓말을 했고 많은 이를 속였지.
그중에는 내가 다가갔던 사람, 내게 다가와 줬던 사람, 내가 믿는 사람, 나를 믿어주는 사람도 있었어……
나도 예전에는 막강한 권력이 모든 문제의 해답일 것이라고 진심으로 믿었지……
하지만, 내가 틀렸던 거야……
서재에서 보낸 수십 년의 세월이 내 마음속에 있던 우매함을 씻겨냈어. 이제 제 인생에 남은 임무는 단 하나……
난, 진리를 섬기겠어…… 쉐라간드께서 우리 모두의 영혼에 새기신 미덕을 찾겠어……
그리고 깊이 참회하겠어……
나 자신을 위해 이웃을 해친 짓, 나 자신을 위해 어린아이의 부모를 빼앗은 비열함, 나 자신을 위한 권력 추구, 나 자신을 위해 한 모든 기만, 이 모든 것을 참회하겠어.
……
만약…… 쉐라간드께서 정말 존재한다면 이 모든 것을 과연 가만히 보고만 있었을까?
불. 어디서 시작됐는지 모를 불꽃.
수십 년 전에 붙었던 그 불은 정교하게 설계된 감옥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마침내 그 감옥의 죄수가 붙잡혔다.
그 불꽃은 아주 오랫동안 불탄 끝에, 맹렬히 덮쳐와 아드소가 본 모든 것을 삼켜버렸다.
……여기를 떠나라. 이 얼지 않은 호수를 먼저 발견한 건 우리다!
헛소리하지 마. 우리가 먼저 발견했어. 우리가 민첩하고 똑똑하니까 나뭇가지 위로 높이 올라가서 찾은 거지. 그러니까 우리가 이 수원의 주인이야!
너희가 눈이 좋아서 이 산속의 물과 나무 열매를 찾은 건 맞지만, 너희는 팔다리에 힘이 없어서 종이 인형처럼 나풀거리잖아.
우리가 튼튼한 팔로 바위를 뚫고 길을 개척하지 않았다면 아무도 여기에 들어올 수 없었을 거다!
그러면 우리는?
산골짜기를 넘은 것도 우리고, 너희에게 길을 안내한 것도 우리고, 독충과 오염에서 밤낮으로 호수를 지킨 것도 우리야. 이건 우리 거야!
어째서 싸우고 있는 거냐……
이 호수는 너희 모두가 마시기에 충분하고, 이 산은 너희 모두가 정착하기에 충분하다.
맙소사…… 과일과 작물이 어떻게 그냥 자라날 수 있지?
이게 당신의 기적입니까? 당신을 왕으로 모시겠나이다.
이제부터 우리 모두가 당신의 뜻을 경청하고, 당신의 가르침을 따르겠습니다……
나를 깨운 것은 너희 모두다.
나는 너희가 서로 다른 곳에서 천신만고 끝에 이곳에 왔다는 것을 안다…… 너희에게는 서로 싸우고 죽이는 본성도 있지만, 서로 돕는 본성도 있다.
그러나 투쟁으로 달성할 수 있는 것은 나눔과 소통으로도 똑같이 달성할 수 있다. 이 대지에서 살아남기 위해 버티는 것만으로도 고된 일이거늘, 어째서 서로 상처를 입히려 하느냐?
이제부터는 서로를 적으로 여기지 말고, 이 땅의 모든 것을 평등하게 누려라.
그게 모든 것의 시작이었다.
그분께서 군중 앞에 나타나 기적을 보이고 다툼을 중재하셨다.
그날로부터 세 가문은 공동생활을 시작했고, 이 땅은 그렇게 이름을 갖게 되었다.
폐하…… 쉐라그의 역사를 기록한 책이 완성되었으니, 훑어봐 주십시오.
우리는 폐하의 가르침을 잊지 않을 것이며, 폐하께서 만드신 계율을 반드시 지킬 것입니다.
아니…… 그러지 않아도 된다.
내가 했던 말을 기억하려면, 너희가 왔던 길을 기억해야 한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속에 있던 최초의 선량함을 기억하는 일이다.
너희는 언제나 스스로 성찰해야 하며, 자기 자신의 마음을 똑똑히 보고 그것을 깨끗이 씻어야 한다. 너희가 선량하다면, 잘못된 길을 걷지 않을 것이다.
이제 내가 너희에게 가르칠 것은 없다. 앞으로의 길은 너희 스스로 가야 할 것이다.
이제는 조금 쉴 때가 되었구나.
폐하께서 떠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이전과 똑같이 살라고 말씀하셨지만, 이제는 세 가문을 다스릴 분이 없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남을 믿겠습니까?
안 됩니다…… 우리는 당장 영지로 돌아가 다른 종족의 침입을 경계하라고 알려야 합니다!
이후, 쉐라간드는 떠나며 자신의 권력을 그분의 백성에게 돌려주셨다.
결국, 모든 것은 반복되었다. 마치 과거의 평화로운 시절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람들은 다시 시작점으로 되돌아왔다.
뭐라고요? 제가요……?
예, 당신이 다음 성녀님이십니다. 환복 준비를 하시지요.
우리 가족들에게는 아직 제가 필요해요. 파종할 때가 되기도 했고. 우리 가족은 제가 없으면 농사를 끝낼 수 없어요. 겨울이 되면 또 굶주릴 거라고요.
저번 언니는요? 산에서 내려와서 어디로 갔죠? 언니가 산에 가면 충분하다고 했잖아요?
……
우리는 답이 필요하고, 그 답은 누군가가 반드시 가지고 돌아와야 합니다. 앞선 성녀가 이루지 못한 일을 이어갈 사람이 필요합니다.
이건 위대한 일입니다. 당신에게 쉐라그의 생존이 달려 있습니다. 떠나십시오, 성녀님.
……헛소리 하지 마세요. 그런 말로 어린아이를 속이려 하다니!
저 사람 말 듣지 말고, 가서 가족에게 알려요. 그렇게 헛되이 목숨을 잃어서는 안 돼요!
구름 위의 관찰자여, 쉐라그의 신 쉐라간드시여……
부탁드립니다…… 후우…… 부탁드립니다…… 우리 곁으로 돌아오소서……
비나이다…… 우리의 목소리에 응답하소서……
……추워…… 엄마…… 너무 추워……
쉐라간드시여, 저희에게 무엇을 원하십……니까……
아 정말…… 계속 몸이 떨리네. 방울소리로 쉐라간드를 화나게 하면…… 안 되는데……
우리가…… 우리가 어떤 잘못을 했든…… 우리를 버리지 말아 주소서……
위대한 쉐라간드시여……
그만해요…… 이제 충분해요.
더는 가지 마요. 그러다 죽어요!
왜…… 왜 그런 거짓말 때문에……
쉐라간드는…… 처음부터……
다 봤구나.
당신은……
키야르 씨……?
이제야 제대로 봤어?
엔야…… 가끔 보면 넌 생각보다 더 바보 같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