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4과거의 스텝
조각상이 불타는 광장에서 마주한 과거와 현재의 춤 약속이 교차하고, 에블라나와 로흐시니는 죽은 영웅을 사이에 두고 대치한다. 모든 것이 끝난 후, 로흐시니는 고인을 데리고 나 시어셔를 떠나달라는 부탁을 받고 유적지로 향한다.
등장 오퍼레이터: 브리지드, 리드 더 플레임 섀도우, 네크라스
고고한 붉은 용은 친구가 없었고, 종종 거울 속의 자신과 대화를 나눌 뿐이었다.
사윈이 열리던 어느 해, 붉은 용은 성대한 연회를 열고자 했고 거울 속 존재의 도움이 필요했다. 하지만 두 사람이 동시에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거울 속의 존재는 소멸하고 말 터였다.
붉은 용의 명을 거스를 수 없었던 거울 속의 존재는 신비한 영혼수호자를 초대하기 위해 떠났다. 그러나 영혼수호자는 연회에 참석하려 하지 않았고, 되려 거울 속의 존재에게 돌아가지 말라고 설득했다.
하지만 거울 속의 존재는 결국 홀로 연회가 한창인 붉은 용의 둥지로 돌아왔다. 이어서 그녀는 황급히 모닥불의 불빛이 닿지 않는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어느샌가 연회의 참석자들은 하나둘씩 사라졌고, 붉은 용은 거울 속의 존재를 어둠에서 끌어내 함께 춤을 췄다.
그들은 계속 춤을 췄다. 거울 속의 존재는 발가락이 떨어져 나갈 것만 같아 잠시 쉬고 싶었지만, 붉은 용은 멈추려 하지 않았다.
받아, 로흐시니.
네가 찾던 책, 증기 기사 모험 이야기 속편이야.
나한테 물었지? “왜”냐고.
이유 따윈 필요 없어, 내 사랑하는 동생아.
근데, 정말 읽게?
네 또래들이 눈치를 주지 않았으면 실제로는 관심도 없었을 그 책을?
내가 읽고 싶어서 그래.
아빠한테 그랬다며, 왜 빅토리아인이 증기 기사 이야기를 싫어하냐는 질문을 받기 싫다고.
이 책…… 아빠가 사 오라고 시켰어?
그럴 리가.
그럼 언니가…… 그걸 어떻게 알아?
뒷걸음질 치고 있네, 로흐시니.
난 네가 다른 사람들처럼 날 무서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아냐, 난……
내가 그걸 알게 될까 봐 겁난다면 춤이라도 추자, 긴장도 풀 겸. 어때?
춤…… 이라고?
안 될 거 없잖아?
에블라나는 우아한 자세로 동생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하지만 로흐시니의 기억 속 에블라나는, 가족 모두가 좋아하는 음악이 틀어져 있을 때도, 아빠는 흥겹게 몸을 흔들고 엄마는 손가락을 탁자에 튕기며 리듬을 타고 있을 때도……
그저 냉랭하게 웃으며 꼿꼿이 앉아 있을 뿐이었다.
언니는 한 번도 음악에 맞춰 춤을 춘 적이 없었다. 단 한 번도.
네가 내 스텝을 따라올 수 있게 되었을 때면, 겨우 책 한 권, 부탁 하나, 또래 친구들 몇 명 때문에 고민하지 않아도 될 거야.
……
뜯지도 않은 기사 소설책이 바닥에 떨어졌다. 새 책 특유의 기분 좋은 잉크 냄새가 흙탕물로 덮였다.
그때의 로흐시니는 아직 너무 어렸다. 원하는 것을 손에 넣는 일이 이토록 버겁고 쓰라릴 줄은 미처 몰랐다. 로흐시니가 기억하는 건 이것뿐이었다. 비틀거리며 돌아섰던 것……
그리고 부드럽지만 차가웠던 손을 뿌리쳤던 것.
로흐시니.
사람들이 갔어, 더는 네 신분을 숨길 필요도 없어.
저 사람들이 아직 살아있다고 생각해?
내가 아는 건 모든 타라인의 가슴에 그런 불꽃이 있다는 것뿐이야. 선조들이 빅토리아 앞에 무릎을 꿇은 그날부터 그 불꽃은 단 한 번도 꺼진 적이 없지.
도시 주민들도, 나와 함께 돌아온 사람들도 똑같아. 아직 불꽃이 죽음의 색으로 물들지 않았을 뿐이지.
꽤 괜찮은 비유인걸, 로흐시니.
그럼, 다시 물을게. 어떻게 할 생각이야?
그 불꽃을 다시 네 색으로 물들이려고? 아마 시도를 안 해본 건 아닐 텐데.
……
누가 됐든 죽음에 물들어 버린다면, 네 불꽃은 그 대상을 불태워 잿더미로 만들어 버릴 수밖에 없겠지.
그러니까, 날 죽여. 로흐시니.
도시의 모두를 함께 죽이라는 거야?
만약 이 일이 어떻게 기록될지 그렇게 신경 쓰인다면, 이렇게 말해. 사람들을 죽인 건 나고, 넌 사람들을 묻어줬을 뿐이라고.
나 시어셔의 사람들은 아직 살아있어.
그 육신을 움직이는 게 생명이 아니라 죽음이라 해도?
정말 작은 생명의 불씨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면, 그들은 진작에 자아를 잃어버린 채 언니의 의식 없이 방황하는 좀비가 되었을 거야.
언젠가는 그렇게 될 거야.
아니, 그렇지 않아.
난 살아있는 사람들의 몸에 보이는 보랏빛 불꽃을 역병이라고 생각할 거야. 언니가 퍼뜨린 역병.
그렇다면, 역병 치료제라도 찾겠다는 거야?
맞아.
그 치료제로 언니의 상처도 치유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 에블라나.
다행이네.
다행이라고……?
맞아, 정말 다행이야. 로흐시니.
아직도 모르겠어?
내게서 도망칠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 날 어떻게 구할지를 생각하고 있잖아.
자, 춤추자, 로흐시니. 항상 너와 함께 추고 싶었지만, 늘 네가 피해 왔던 그 춤을 말이야.
뭐라고……?
춤을 추자고, 로흐시니.
마지막 소절이 끝나기 전, 네 창으로 내 심장을 찔러. 죽음을 부르는 역병에 치료제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아. 네 의지는 확고하긴 하지만, 결국 헛수고가 되고 말 거야.
자, 이제 그만 받아들여…… 나 시어셔의 운명을, 그리고 우리의 운명을.
아직 사윈 시작 전이지만, 생명과 죽음의 경계가 타라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모호해졌어.
정말 타라를 죽음의 땅으로 만들 셈이야?
로흐시니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영웅이 이곳까지 끌고 온 조각상 위로 이글거리는 보랏빛 불꽃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고, 조금 전 불꽃에 휩싸이며 벌떡 일어났던 쿨란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 모습을 더 지켜볼 수 없었던 로흐시니는 고개를 돌려 언니의 두 눈과 몇 년 만에 자신에게 다시 내민 손을 직시했다.
로흐시니의 착각이었을까, 아니면 보랏빛 불꽃에 휩싸인 모든 것이 생기를 잃었기 때문일까, 기억과 다르게 앞에 있던 손은 핏기 없는 창백한 색을 하고 있었다.
여기는 한 도시고, 이곳에는 수많은 생명이 있어. 에블라나, 이건 고작 '운명'이라는 두 글자로 쉽게 결론 내릴 수 없어.
이제 얘기는 다 했어?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각자의 얘기만 해온 것 같아.
……에블라나!
원한다면 얘기를 계속해도 돼. 네가 원하기만 한다면 난 여기서 얼마든지 널 기다릴 테니까.
하지만 조금 서두르는 게 좋을 거야, 로흐시니. 너는 기다릴 수 있을지 몰라도,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으니까.
(깊게 숨을 들이쉬며) 그 말이 맞아. 언니는 기다릴 수 있을지 몰라도,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을 테니까.
좋아, 춤을 춰줄게. 우리 중 한 명이 쓰러질 때까지.
하지만 네가 원하는 대로 추지는 않을 거야. 절대.
좋을 대로 해.
근데 로흐시니, 내 사랑하는 동생, 네가 오해한 게 하나 있어.
아까 말했던 기다릴 수 없는 사람은 바로 네 앞에 서 있는 사람이야.
기다릴 수 없다고?
로흐시니는 언니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리고 전혀 예상치 못한 사실을 발견했다.
손이 창백하다고 생각한 건 착각이 아니었다.
보랏빛 불꽃은 천지를 뒤덮을만한 거대한 망토처럼 엮여 에블라나를 아름답고도 두려운 존재로 보이게 했지만, 그 피부 속에서 스며 나오는 생명을 갉아먹는 병마와도 같은 창백함은 감출 수 없었다.
이럴 리가 없다. 에블라나는 한 번도 이런 모습이었던 적이 없었다.
에블라나……
응?
언니……
언니, 괜찮은…… 거야?
에블라나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마치 얼음장처럼 차가운 미소였다.
이번만큼은 온기가 느껴진 것 같았지만, 그럴수록 창백한 그녀의 얼굴은 더 섬뜩해 보였다.
걱정해 줘서 고마워, 로흐시니.
이 차가운 이별과 고통스러운 재회 끝에, 네가 날 걱정해 주는 건…… 정말 오랜만이네.
나도 너와 춤을 추고 싶었어. 로흐시니.
……언니를 치료할 방법을 찾아내면 그때 같이 추자.
좋아,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
에블라나는 천천히 요새로 걸어갔다. 그 발소리는 거의 들리지도 않을 만큼 작고 쇠약했다.
후우……
후우…… 붉은 용! 네모스!
성문에 도착했는데, 아무도 없었어! 무슨 일이 벌어진 게 분명해. 광장에서 대체 무슨 일이……
……
붉은 용, 이건……?
로흐시니는 작은 상자를 안고 있었다. 희미한 밤의 등불 아래, 모든 것이 평소보다 흐릿하게 보이는 것 같았다.
쿨란을 구해내지 못했어. 그래서……
……이렇게라도 편히 쉬게 해주고 싶었어. 쿨란이 더는 광장에서 죽음의 불꽃으로 고통받지 않게.
……
한참을 조용히 있던 유목민은 바닥을 더듬은 뒤 작은 돌멩이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녀는 온 힘을 다해 돌멩이를 요새 방향으로 집어던졌다.
하지만 돌은 순식간에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고, 작은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통행금지 시간이 됐네. 네모스, 브리지드, 우선은……
싫어요……
싫습니다.
네모스는 손을 뻗어 보이지 않는 먼지들을 털어내려는 듯 나무 상자 위를 부드럽게 쓸었다.
그리고 며칠 전 동족들에게 거절당하며 들었던 쓸데없는 말을 떠올렸다.
영혼수호자는 산 자와 함께하지 않고, 산 자의 존중도 필요 없어. 죽은 후라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이게 바로 더블린이 마땅히 지켜야 할 전통이야.
어쨌든, 피리라도 주셔서 감사해요……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잠깐만 네모스. 넌 사윈이 곧 열린다는 것도 알고 있고, 영혼수호자들이 제기를 줄 가능성이 없다는 걸 알고 있는데도 찾아왔어.
더블린이 시켰나?
아뇨, 이건 저의……
네모스, 넌 아직도 여전하구나.
기다림, 중재, 타협…… 나 시어셔에서도, 붉은 용의 휘하에서도 넌 아직 그런 것에 집착하고 있는 건가?
전 그저…… 더 나아질 수 있을 상황이 악화되는 것, 그리고 함께 힘을 합쳐야 할 사람들이 서로 싸우는 것이 보기 싫을 뿐입니다.
만약 갈등이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넌 그 수렁에 점점 더 깊이 빠지게 될 거야.
네모스, 도시가 널 어둡게 물들였어.
그래서 리더, 붉은 용께서……
로흐시니 씨, 에블라나는 나 시어셔에 진정한 삶을 가져다줄 수 없는 겁니까? 제 말이 맞나요?
언니는 못한다고 그랬어. 언니는…… 거짓말하는 걸 좋아하지 않아. 무언가 제약이 있는 게 아니라면……
에블라나 씨는 타라를 이끄는 리더이자 유일한 붉은 용입니다. 그런데 제약이라뇨?!
아……
네모스, 왜 그래? 조금…… 이상한 것 같아……
이제 알았습니다. 로흐시니 전하, 이제 깨달았습니다.
아무래도 불꽃은 살아있는 사람도 물들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네모스?!
제가 의지했던 사람들은 사실 사사로운 탐욕에 눈먼 악의 무리였습니다.
제가 존경했던 리더는 사실 타인의 생사 따위 안중에도 없는 사악한 용이었고요.
그리고 제가 목숨을 걸고 지키려 했던 사람들…… 그리고 제 가장 소중한 친구는 그들을 위해 죽었습니다.
심지어, 그 사악한 용이 보랏빛 불꽃으로 친구를 태워버리지 않았다면, 그들이 제 친구에게 또 무슨 짓을 했을지도 모르겠죠……
쿨란 씨의 질문은 옳았어요. 사윈이 끝나면 전 뭘 해야 할까요?
복수를 빼면, 제가 할 수 있는 건 없습니다.
네모스가 말을 마친 뒤, 로흐시니는 아직 보랏빛 불꽃에 물들지 않았던 마지막 나 시어셔 주민의 몸에서 불길이 타오르는 것을 보았다.
로흐시니 전하, 전하께선 저를 이 도시 사람들과 같은 분류로, 에블라나의 신하로 여기실 겁니까?
아니, 그렇지 않아. 그냥 치명적인 역병이…… 도시의 마지막 주민에게까지 번졌을 뿐이야.
그렇다면 로흐시니 전하, 맹세하겠습니다. 전하께서 춰야 하는 그 춤, 제가 전하를 도와 끝까지 함께 추겠습니다……
사악한 붉은 용이 쓰러질 때까지 말입니다.
……그 맹세, 기억할게.
이제 난 나 시어셔를 떠날 생각이야. 함께 가자, 네모스.
영혼수호자들의 마을로 가실 생각입니까?
맞아. 이 도시엔 불꽃을 없앨 희망이 없어. 도움을 줄 만한 사람을 찾아야겠어.
저는 가지 않겠습니다. 제게 돌아갈 자격은 없어요.
전 도시에 남겠습니다. 붉은 용에게 발각되어 갈기갈기 찢기지만 않는다면…… 무슨 수를 쓰든 사태가 악화하지 않게 막겠습니다.
이 피리를 그들에게 돌려주세요.
그리고…… 쿨란 씨도 부탁드립니다. 그를 위해 제대로 된 장례를 치러주세요.
장례식에서는 지인이 추도사를 낭독해야 합니다. 추도사는…… 제가 쓸 테니 대신 낭독해 주시죠. 괜찮으신가요?
……그래.
다 됐습니다. 여기요.
난 리드와 함께 떠날 거야. 검은 숲은 누구도 통과시켜 주지 않지만, 우리 둘이라면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을지도 몰라.
아뇨, 브리지드 씨. 당신은 남아야 합니다. 당신의 도움이 필요해요.
리드?
나 혼자 가도 괜찮아.
좋아, 알았어. 그런데…… 네모스, 너는 점점 너답지 않게 되고 있어.
……어쩌면 복수가 절 이렇게 만든 걸지도 모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