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P-5불치의 운명
항로 계획에서 심해 교회의 진정한 음모를 밝히기 위해 어비설 헌터스 연구소에 모습을 드러낸 박사는, 블란두스 고문을 상대하며 울피아누스가 연구소 내부로 잠입해 조사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음성 기록 #33
(알 수 없는 언어, 알 수 없는 시간)
스타게이트 개조 계획은 분명 성공했다. 우리는 탈로스와 다시 연결됐다. 2년간 쌓인 소식들이 물밀듯이 쏟아졌지만 그중에 좋은 소식은 없었다.
먼저 소행성 고리 밖의 관측소 그다음엔 전체 시스템의 성간 허브, 마지막으로 거주 가능한 별 궤도의 순항 함대까지도 침묵에 빠졌다.
이동식 박물관이 된 그 오래된 식민 함대 역시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 충격적인 소식과 함께 뜻밖에 도착한 건 발레리아가 남긴 마지막 자료였다. 그녀의 메모에는 여전히 그녀답게 시시콜콜 많은 말들이 남겨져 있었다.
다만 기술 문헌 외에도 발레리아는 마지막 시간에 문학과 역사를 반복해서 읽은 듯했다. 위인과 영웅들의 죽음의 장면, 그들의 유언과 묘비명……
마치 아이가 성인식 전날 의젓해 보이는 옷을 찾으려 부모 옷장을 뒤지는 것처럼.
그녀는 자신의 삶이 충분히 위대하거나 무겁지 않다고 여겼던 걸까?
아니다. 그녀는 거의 자신의 모든 걸 스타게이트에 남겼다. 과거를 남겨놓으면, 어떻게 그녀의 업적이 역사에 기록되지 않겠는가?
하지만 지금 보면, 이것 역시 두 개의 닫힌 작은 방 사이의 좁은 문을 연 것에 불과하다. 아마 머지않아 이 작은 문도 다시 닫히고 말 것이다.
인류의 역사는 결국 인류의 척도를 넘어섰군. 하하.
읽기 오류. 두 번째 오류 보고.
고장 테스트를 실행하겠습니까?
……
아비투스 씨, 제가 도와드릴까요?
아니, 괜찮아요. 그냥 버려진 이 조력자를 살펴보고 있었어요.
누가…… 버린 건가요?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조르디, 당신은 여기 왜 온 거죠?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싶어요. 분명히 위급한 상황이고 이 도시엔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을 텐데 제가 할 일을 못 찾았어요.
보통 이런 상황에서는 발전계획소로 가서 평가를 받죠.
하지만 당신이 제게 의견을 묻는다면,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그럼요. 아비투스 씨는 존경받는 학자시고 도시의 많은 사람들이 당신을 선생님이라고 부르잖아요.
선생이요? 제가 마지막으로 출판한 책은 《삶의 죽음》이에요. 남에게 아무것도 가르칠 수 없는 책이죠.
저도…… 읽었어요. 하지만 용어들이 너무 난해해서 내용을 이해할 수 없었죠. 우주선이나 스타게이트 같은 건 마치 하늘 밖의 이야기 같았어요.
하늘 밖의 이야기라…… 틀린 표현은 아니네요.
하지만 저를 선생이라고 할 수는 없어요. 저 자신도 자주 혼란에 빠지니까요.
조르디, 제가 혈연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 걸 기억하나요?
기억해요. 하지만 전 이미……
그 말에 좀 오해의 소지가 있었을지도 모르겠어요. 우리는 혈연을 중요하게 여기진 않지만 '관계' 그 자체는 아주 좋은 시작점이 될 수 있죠.
길을 잃고 방황할 땐, 사람은 자신과 현실 사이의 관계에서 방향을 찾아야 해요. 그게 생활이든 이상이든 말이죠.
그렇지 않으면 저처럼 자신의 존재 가치를 오랫동안 의심하게 됩니다.
아비투스 씨 혹시 가르쳐 주실 수 있나요? 당신의 그 '관계'는……
내 반려자입니다.
반려…… 자요?
저와 뜻을 같이하고 내 정신과 사상을 풍요롭게 해주는 사람이에요. 제가 그녀를 사랑하는 건, 제가 에기르를 사랑하고 우리가 에기르를 위해 한 모든 일을 사랑하는 것과 같죠.
고대 문명의 방대한 사료들, 낯선 문자, 이해하기 힘든 문법…… 난 그것들을 하나씩 에기르 문자로 해독하는 과정을 즐겼어요.
내 반려자도 그 과정에서 만났어요. 그녀가 일에 몰두한 모습이 아직도 기억나네요…… 대화가 무르익으면, 그녀는 거의 춤을 추는 것처럼 눈썹을 꿈틀댔죠.
내가 그렇게 칭찬하자, 그 표현이 흥미로웠는지 형체 예술 연구소 사람들을 찾아가서, 어떻게 하면 진짜로 눈썹으로 춤을 출 수 있을지 연구했죠.
정말 난해한 예술이네요…… 성공했나요?
엄밀히 말하면, 성공하지 못했어요. 하지만 그 아이디어로 형체 예술 연구소 사람들은 나중에 의지로 머리카락을 자유자재로 움직이게 하는 기술을 개발했죠.
온 바다를 침묵하게 만든 재앙을 겪고 시본이 에기르의 존속을 위협하는 상황에서도 우리는 과학과 예술 탐구, 미래에 대한 상상을 포기하지 않았어요.
에너지를 맨틀에서 끌어올리는 용암 다리, 해류를 분수로 만드는 수맥 중추, 심해를 밝히는 인공 태양, 황폐한 해저를 생명을 불어넣는 생태 기지……
우린 여전히 선인류가 잃어버린 것들을 신비한 거작으로 바꾸려고 노력 중이에요. 우리가 떠올린 상상만으로도 새로운 것들의 탄생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죠.
하지만 150년이란 시간은 너무나도 짧지요.
150년이요?
그래요. 에기르인의 평균 수명은 고작 150년 정도에 불과해요.
고작이라니……
위기에 쫓기는 시대일수록 우리의 창조는 더욱 가치 있어집니다.
우리는 각자 모두가 충실한 시간을 보내고 후회 없이 생을 마감해, 문명의 불씨가 계속 이어질 거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우리는 교육 과정을 계획했고, 우리가 공공 양육소보다 더 잘할 수 있다고 믿었어요.
우린 아이가 부화실에서 태어나면 직접 키우고 싶었습니다. 그 아이는 활달한 정신과 통통 튀는 있는 생각을 가질 것이고, 더욱 창의성을 가진 세대로 자라길 바랐죠.
직접 아이를 키우는 건 흔치 않죠. 하지만 우리의 인생에 이토록 충실하니,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가치를 직접 물려주고 싶었죠.
그럼 아비투스 씨의 그 반려자는요?
죽었습니다.
……
《삶의 죽음》에 나온 선인류를 기억하나요?
이름 모를 피난처에 숨어, 날마다 대지를 짓누르는 하늘만 쳐다봤죠. 그는 이미 자신의 최후를 예감했어요.
그저 최후를 평온히 맞이하는 것 외에,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어요.
하지만 그건 결국 타인의 삶이고 우리와는 너무 동떨어져 있어요.
동떨어졌다고요? 우린 지금 그와 똑같은 상황을 겪고 있지 않나요?
아마도 50년 후, 어쩌면 100년 후. 드넓은 바다에서 깨끗한 물 한 방울 찾기 어려울 거예요.
……
어느새 시본이 바다를 장악해 가는 속도는 우리가 창조하는 속도를 넘어섰어요. 우리가 자랑스럽게 여겼던 모든 것이 잠식되었고 '생존'만이 유일한 과제가 됐지요.
내 반려자가 실망에 빠지는 걸 봤어요. 어느 날, 그녀는 담담히 아이의 양육 계획을 포기했죠.
결국 우리가 직접 물려줄 모든 것이 사라질 운명인 시대에 놓일 테니까요.
5년 전, 어비설 헌터스가 '퍼스트본'의 소굴로 갔다가 한 명도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이후, 그녀는 곧 병들어 우울하게 죽어갔죠. 우리 아이는 무사히 부화실에서 태어났지만 난 아이를 공공 양육소로 보냈어요.
그 이후로 내 존재 의미가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했죠.
미안해요. 조르디에게 방향을 주어야 하는데, 난 이미 현실 세계와 단절되어 있어요 하지만 조르디는 아직 누군가 혹은 무언가와 연결돼 있지 않나요?
전 이미 브레오간을 찾는 걸 포기했어요. 쫓을 수 없는 그림자에 너무 오래 시간을 낭비할 순 없으니까요.
아마도…… 제가 그분이 생전에 남긴 수기자료를 연구하고 그분이 개발한 기술을 배웠던 건, 단순히 제가 그분의 후손일 가능성 때문만은 아닐지도 몰라요.
……당신이 그 분야에 재능과 이상이 있어서 일지도 모르죠.
뭔가 하고 싶다면 비콘탑에 가보는 게 어때요? 브레오간이 그 탑 재건에 참여했거든요. 조르디가 그의 기술을 이해한다면 그곳에서 도움이 될 수 있을 거예요.
모든 에기르인은 항상 자신의 저작물, 이론 그리고 기술에 약간의 독특한 특징 같은 걸 더해요. 때로는 창작자를 잘 이해한 사람만이 그것을 해석할 수 있죠.
고맙습니다. 아비투스 씨!
블란두스 고문님, 괜찮으십니까?
그래, 당연하지.
그 심해 신도들은 내가 헌터들을 수술하는 걸 막지 못했네.
전 고문님의 건강 상태가 걱정됩니다.
고맙네, 세쿤다. 역시 자네는……
고문관께선 이상하리 만큼 의료 지원을 거부하시니 누군가 직접 확인해야 할 것 같아서요. 그뿐입니다.
고문관님 건강 상태를 보아하니, 저 외에도 이미 많은 사람들이 고문님을 병원으로 보내려고 했겠군요.
항로 계획의 부담이 너무 컸나 보군. 나도 반쯤은 의사니까 건강을 유지하는 법은 알고 있네…… 항로 계획을 진행하는 데 지장이 없는 선에서 말이야.
……
……
자네도 심해 신도들이 살인에 쓴 그 식물을 봤어야 했네. 생태 예술 창작소에서 누군가가 그런 것으로 그림을 그릴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어.
고문께서 무사하시다면 추가 조사에 협조해 주셔야겠습니다.
방금 울피아누스를 만났습니다.
……
……당신도 그를 만난 것 같군요.
아주 잠깐, 투지장에서 만났지.
누구에게도 보고하지 않으셨더군요.
군중 속에서 익숙한 그림자를 본 것뿐이네. 보고서를 써야 할 일은 아니지.
이건 농담이 아닙니다, 블란두스 고문님.
데이터 분석가 실종은 심해 교회가 주도한 살인사건으로 밝혀졌습니다. 심해 교회의 연구소 습격과 연관성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울피아누스는 데이터 분석가 사건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았고, 에기르에 대한 불신을 노골적으로 보여줬습니다.
울피아누스는 늘 그랬네. 말보다는 행동했고, 그 행동 뒤엔 늘 남에게 밝히고 싶지 않은 이유가 있었지.
특이한 행동 스타일만으로 그의 모든 의혹에 대해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심해 교회가 주도한 사건들과 그가 연관됐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하, 세쿤다. 더 의심스럽고 조사할 가치 있는 다른 대상은 없는 건가?
아니면, 울피아누스에 대한 자네의 집착은, 한 순간의 감정에서 비롯된 건가?
……
하아.
세쿤다, 당시 자네의 신청을 기각한 건 나였네.
무슨 말씀입니까?
내 말은, 자네의 어비설 헌터스 개조 신청을 기각한 사람이 나라는 걸세.
울피아누스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지만, 절차상 그 결정을 내린 건 나였지.
……어째서죠?
자네가 발전계획소에 제출한 서류를 봤네. 희망 분야를 '유전자 연구'라 적었더군.
서류를 하나 더 보셨다면, 어비설 헌터스 개조를 받겠다는 것도 제 의지라는 것을 아셨을 텐데요.
어비설 헌터스 계획 참가자 중에서도 자네는 정말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네.
기술 토론에서 울피아누스에게 연달아 열 가지 질문을 던지고 모든 답변을 받은 유일한 연구원이었지. '신입 연구원 최고 기록'이었어.
초기 개조 기술은 안전성 문제가 있었기에 우린 계속 더 나은 결합 방법을 찾고 있었네. 결국 자네의 이론이 어비설 헌터스 계획의 기술 진보를 이끌었지.
적어도 그때만큼은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이 계획 자체에는 자랑스러울 게 없네, 세쿤다.
어비설 헌터스란 개념은 약 200년 전에 생겼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이전이지. 하지만 20여 년 전이 되어서야 울피아누스가 이를 실현했네.
100여 년 동안 '어비설 헌터스' 개념은 체계적인 검토와 연구가 이루어지기는커녕 끝없는 논쟁만 불러일으켰지.
인간성을 구한다는 명목으로 동포를 이용해 사람의 몸에 이종의 피와 살을 결합하는 건, 에기르의 근간을 뒤흔드는 것과 다름없네.
울피아누스는 매우 단호하네. 그는 주저 없이 자신의 연구, 이상, 감정, 심지어 인성까지 버릴 수 있어. '에기르의 이익'이 유일한 원칙이었지.
그가 정말 에기르를 구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에기르는 끝없는 희생을 국가의 기초로 삼아서는 안 되네.
울피아누스는 누구보다도 자신의 존재가 에기르의 비극임을 알고 있지.
그렇기에, “어비설 헌터스에는 제2의 울피아누스가 필요 없고, 에기르에도 제2의 울피아누스가 있어서는 안 된다.”라 말했지.
“에기르에서는 그 누구도 다른 사람이 되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 사람이 그 말을 할 때의 말투가 상상이 되는군요.
농담으로 그에게 세쿤다 자네가 내 제자였으면 좋겠다고 말한 적이 있지. 자네는 아마도 우리가 하던 연구인 '에기르 세포 진화사'를 이어가거나 새 분야를 개척했을 거야.
자네는 이 시대 최고의 과학자 중 한 명이 되어, 만물의 근원을 탐구하고 우리의 미래를 이끌어갈 기회를 가졌을지도 모르지.
블란두스, 당신들에게 그럴 자격은 없습니다……
미안하군, 세쿤다.
갑자기 옛날이야기를 늘어놓는 건 울피아누스를 증오하지 말라는 뜻인가요?
울피아누스 문제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는 뜻이네.
너무 성급하게 울피아누스를 체포하려는 건 그에게도 자네에게도 좋지 않아.
아직 심문할 심해 신도들이 남아있지 않나? 자네의 임무를 잊지 말게, 세쿤다.
그자들은 어디 있죠?
1층 설비관리실 안쪽 칸에 있지. 내가 안내해 주면 되겠나?
어디인지 알겠군요. 해양 순찰대가 범인들을 이송할 겁니다.
……
미안하지만 더 이상은 갈 수 없네. 여기는 지금……
잠깐…… 전에 평의회에서 자네를 본 것 같은데.
기억나는군, 육지에서 온 사절이었지. 실례지만, 자네는 사절단에서 어떤 역할을 맡고 있나?
- ……
그 데이터 분석가를 찾았을 때는, 이미 거의 시본이 되어 있었다.
이 데이터가 '항로'와 '비콘'이 연관성이 있다는 것 말고는, 다른 유용한 정보를 들을 수는 없었다.
데이터에 대한 해석이 끝났다…… 도시 안에 비콘과 시본 소굴에 투하된 비콘 사이에 비정상적인 정보 교환이 있었어.
신호 발신지는 도시의 여러 곳이다. 허브항과 가능성 있는 선박들은 이미 조사했고.
……마지막으로 남은 곳이 여기다. C-22 연구소. 초기의 어비설 헌터스 실험 기지 중 한 곳이지.
- 너도 이곳을 잘 알겠네.
하지만 이곳은 지금 내가 기억하는 그 어느 날 보다도 훨씬 더 북적거리는군.
세쿤다가 부대까지 주둔시켰어. 명목상으로는 블란두스를 보호하기 위해서라지.
방해되는군.
- 필요하다면 내가 주의를 끌어줄게.
해양 순찰대의 순찰은 어떻게든 대처할 수 있다.
네 힘은 가장 까다로운 상대를 위해 아껴두도록.
로도스 아일랜드의…… 박사였던가?
- 보시다시피.
- 틀림없어.
자네는 소속 기관에서 헌터들의 광석병에 관련하여 진료를 했고, 지금은 어비설 헌터스의 신체 재생 수술을 도와주고 싶다는 건가?
- 바로 그거야.
- 거짓말은 안 해.
그렇다면 안심하고 돌아가도 되네.
심해 교회의 습격은 작은 해프닝에 불과했고, 헌터들은 다시 수면 상태에 들어갔지.
내가 그들의 상태를 계속 모니터링하고 있네. 자네가 아무리 깊은 애정으로 바라본다 해도, 헌터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는 못할 걸세.
- 헌터들은 역시 날 속이지 않았구나.
- 정말로 연구소에 유머 감각이 형편없는 사람이 있었네.
……헌터들이 육지에서 떠돌던 시기에, 자네와 깊은 유대를 쌓았다는 건 잘 알고 있네.
그 점을 아무리 강조한다 해도, 이번 수술에서 자네가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아.
무례한 발언은 용서해 주기 바라네.
방금 이곳에 습격 사건이 발생했었지. 자네 안전을 위해서라도 돌아가주게.
블란두스는 더 이상 당신을 신경 쓰지 않고, 앞에 있는 홀로그램으로 시선을 돌린다.
그 안의 여러 화면을 통해서, 글래디아, 스카디, 로렌티나가 투명한 젤 속에서 잠들어 있는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당신은 아직 에기르의 문자 체계를 완전히 익히지 못했고, 며칠 간의 탐색에도 불구하고 영상 속 문양은 절반 밖에 읽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 가운데 주목할 만한 현상을 발견했다.
블란두스가 영상을 선택할 때마다, 해당 영상에서 미약한 알림음이 들려왔다.
즉, 영상을 하나 선택할 때마다 해당 영상을 생성하는 감시 유닛에서 알림음이 울려왔다.
- 이 영상들의 표시 순서를 바꿀 수 있게 도와줘도 될까?
물론이지.
박사. 정말 이곳에 남겠다고 한다면 강제로 내보낼 순 없지. 어쨌든 자네는 진심으로 어비설 헌터스를 걱정하고 있잖나. 나는 그런 사람을 항상 좋아하네.
조력자, 박사는 에기르 장비에 익숙하지 않으니 잘 지켜보도록.
알겠습니다.
박사, 건들면 안 되는 것들만 건들지 않으면……
복도의 감시 유닛에서 알림음이 났군. 누군가 이곳을 감시 중이야.
그다음은 앞쪽 실험용 캡슐, 그 앞의 모퉁이…… 음? 규칙이 있는 것 같은데.
중앙 통제실에서 누군가 홀로그램 영상 표시 순서를 빠르게 변경하고 있군.
……박사? 뭔가 전달하려는 건가?
그럼 이쪽으로 가야겠군.
박사, 수술이 끝났네. 자네의 그…… 분주한 협력에 감사를 표하지.
헌터들은 10분이 더 지나야 깨어날 수 있을 걸세. 수술은 아주 순조롭게 잘 진행되었네.
이제 안심하고 떠나도……
- 헌터들이 아주 깊이 잠든 것 같네.
박사와 로도스 아일랜드가 최선을 다해 도움을 줬다지만, 헌터들은 육지에서 진정한 휴식을 취한 적이 없었네.
게다가, 막 고향으로 돌아왔음에도 또다시 전선으로 가야 했지.
한 번의 수술과 수면으로 체력을 완벽히 회복하긴 턱없이 부족해.
- 당신도 최선을 다했나 보네.
직무를 다했다고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최선을 다했다고는 할 수 없지. 이 둘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네.
자네는 광석병 전문가라고 했지?
광석병에 걸리면 어떤 느낌인지 알려 줄 수 있나?
- 광석병 환자는 여생을 운명의 중압감과 맞서 싸워야만 해.
운명?
- 사람이나 사물의 정해진 경향과 결말을 일컫는 말이지.
흥미롭군. 옛 현자가 '운명'이란 개념을 논한 적이 있지만, 이 단어를 다시 언급한 사람은 상당히 오랜만이군.
보다시피, 바다엔 광석병이 없네. 다른 질병도 대부분 치료할 수 있지.
우리의 인생은 우리가 선택하고, 우리 문명이 나아가야 할 방향 역시 우리가 정하네.
아주 오랫동안 우리는 '정해진 것'이 무엇인지 잊고 살았지.
하지만, 지금 헌터들의 혈맥에 새겨진 이 고질병은 내 의료지식으로는 완전히 제거할 수 없네.
자네가 언급한 개념을 빌리자면, 이 고질병은 어쩌면 '운명'이라고 할 수도 있겠어.
헌터들에게도 원래 자신만의 이상과 삶이 있었네. 하지만 지금은 소멸할 때까지 살육과 함께해야 하지.
여러 방법을 시도해 봤지만, 그들을 이 잔인한 죽음의 길에서 벗어나게 할 수는 없었네.
지금이라도……
- 글래디아가 깨어났다.
- 로렌티나가 깨어났다.
- 스카디가 깨어났다.
헌터들이 급하게 떠났군.
……그럼 나도 가봐야겠네.
자네와 대화할 수 있어서 영광이었네. 기회가 된다면, 헌터들을 계속해서 잘 보살펴주길 바라겠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