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B-5격변의 봉화
테레시스는 빅토리아 대공작의 초청을 받게 되고, 바벨과 군사위원회의 대립은 끝내 전쟁으로 변하면서 카즈델 200년의 평화도 결국 끝나고 만다.
카즈델 섭정왕, 군사위원회 장군 테레시스 전하에게,
여행 중인 학자가 그의 견문을 공작 저택에 알린 뒤에야 머나먼 황무지에서 신흥 이동도시가 대두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오래된 용광로의 불길은 꺼질 줄 모르고, 도시의 장벽은 나날이 높아져 가고 있으며, 과거 뿔뿔이 흩어졌던 용병들이 하나 된 깃발 아래 모이고 있다.
당신이 보여줬던 비범한 역량과 위신은 캐번디시 공작이 발걸음을 멈추고 감탄을 자아내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당신은 혼자의 힘으로 살카즈 부족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바꿨다. 어쩌면 더는 과거의 선입견에 얽매이지 말아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성실하고 솔직한 교류는 서로에게 유익할 것이다.
……
캐번디시 공작은 당신이 영지로 오길 바라고 계신다.
당신의 휘하에 있는 용감한 전사들도 이 오래된 제국에서 실력을 발휘할 자리가 있을 것이다.
1091년 겨울
다시 한번…… 반드시 성공해야 해……
이런 일도 못 해낸다면 광석병 치료는 꿈조차……
큭……
그래도 안 돼…… 하아…… 하아……
저기, 의료 박스를 내려 두는 게 좋겠습니다. 이런 일은 저희한테 맡기시죠.
그래…… 알았어……
다 회복하셔도 더 훈련하셔야 합니다.
지금은 '훈련'을 해도 테라인들의 신체 능력은 따라잡을 수 없을 거야, 박사.
몸을 쓰는 노동보단 다른 게 네 장점을 더 발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알아. 나도 가끔은 지기 싫을 때가 있어서……
그날 이후로 계속 가만히 있질 못하네.
그게, 하아…… 테레시아에 대해 생각했어.
홀몸으로 적이 장악하고 있는 도시에 가는 건 지도자로서 이성적인 행동이 아니야.
같이 간 전사들은 물론 강하겠지만, 군대 앞에서는 안전을 보장할 수 없어.
마왕이 살카즈의 전통에서 갖고 있는 입지는 상상을 초월해. 게다가 테레시아의 업적은 모두가 알고 있어, 군사위원회는 오히려 함부로 움직이지 못할 거야.
하지만 빅토리아가 카즈델을 초청한 건 결코 우호적인 신호라 할 순 없겠지. 카즈델이 다시 테라의 많은 나라들의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단 뜻이니까.
테레시아는 카즈델로 가서 입장을 표명해야 해. 카즈델이 또다시 전쟁에 휘말리는 데 절대 동의하지 않는다고.
군사위원회와 바벨의 설립 경위에 대해 알고는 있지만……
내가 알고 있는 게 맞다면, 이미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살카즈는 더 이상 무언가와 대립해서는 안 돼. 그건 갖고 있는 몇 안 되는 자원을 낭비하는 꼴이야.
살카즈가 갖고 있는 복잡한 역사는 이종족이 다른 태도를 갖게끔 만들었어.
테레시스와 테레시아는 2개의 깃발과 같아. 살카즈들에겐 자신이 정답이라 여기는 길을 선택할 권리가 있지.
아무래도 광석병 말고도 귀찮은 일이 많은 모양이네.
무언가를 '아는 것'과 '이해하는 것'에는 꽤 큰 차이가 있어. 테라의 역사를 더 공부해야겠네.
이번엔 네가 날 이끌어줘, 켈시.
……물론이지.
지금 당장은 최대한 로도스 아일랜드의 광석병 환자들을 돌봐 주는 수밖에 없어. 안정적인 치료 환경을 만들어 줄 수 있도록……
무슨 일이……
적? 지금 같은 때?
……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전하는 이미 출발했다고 한다.
우리가 존경하는 건 오직 전하뿐이다. 바벨을 무너뜨리기만 한다면, 전하께선 카즈델의 품으로 다시 돌아오실 것이다.
배신이란 죄명은 감수할 수 있지만, 이 중요한 시점에 섭정왕이 벌이는 일이 방해를 받아선 안 된다. 카즈델은 잃어버린 모든 걸 되찾을 것이다.
전하께서 말씀하신 대로, 살카즈가 하나로 뭉칠 수 있도록.
카즈델 지역, 흉터의 상점
전하께서 오셨다……
어느 전하? 아직까지 밖에서 도망 중인?
입조심해. 어느 전하라 해도 네가 함부로 입에 담을 분은 아니야.
흥. 그건 그렇고, 그 의뢰는 받았나?
누가 그런 기회를 마다하겠어? 런디니움이야, 그 쓰레기 녀석들의 소굴이지.
그 필라인의 궁전은 돌기둥에도 금을 박아뒀고, 귀족들이 지나다니는 길엔 빛나는 돌이 싹 다 깔려 있다고 하더군.
*살카즈 욕설*. 그곳은 대제국의 수도인 데다가, 대공작이 준 의뢰잖아. 돈이 얼마나 많겠어!
오랜만이군, 아스카론.
……
정말 오랜만에 흉터의 상점에 돌아왔는데, 앉아서 회포도 좀 풀고 그러지 그래?
용병을 모집하고 있다 들었어, 런디니움으로 보낸다면서.
내가 보내는 게 아니야.
섭정왕이 이 녀석들에게 런디니움에서 크게 돈을 벌 길을 만들어줬다. 모두 가고 싶어 하는 게 당연해.
카즈델에 또 다른 전쟁을 불러올 셈인 거냐.
전쟁을 불러온다라, 그 바벨의 아이들과 소꿉장난을 오래 했더니 살카즈가 원래 어떤지도 잊어버린 건가?
도대체 언제부터, 살카즈가 전쟁과 떨어져 살았다는 거냐!
거인은 갑자기 손을 뻗었다. 아스카론은 아무리 빨리 움직여도 거인의 주먹을 피할 수 없었다. 아스카론은 약간 당황했다.
……쳇.
미래를 간파하는 건 쉽지 않지만, 네 다음 동작을 간파하는 건 어렵지 않아.
넌 네가 운명의 선택을 받은 아이라고,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군. 두 전하 사이의 갈등을 해결할 정도로 말이야.
잘 떠올려 봐, 네가 두 전하를 만났던 그날을……
넌 작은 맹글러 모피를 매곤 핏자국을 따라 황야를 누볐지. 그리고 그 폭풍 속으로 들어가 카즈델의 마왕과 만났고……
네가 어떻게……
내가 어떻게 알았냐고? 많이 놀랐나, 아스카론?
난 그 예언을 봤고, 사냥감을 이용해 황야에 있는 부족을 폭풍 속으로 끌어들였다. 넌 운 좋게 살아남았을 뿐이지.
진짜로 예언을 깨달을 수 있는 사람은 없고, 미래를 간섭할 수 있는 사람은 더더욱 없지. 하지만 나라면 운명의 꼬리를 잡으려고 해볼 순 있어…… 난 예언을 만들어내고 싶거든.
테레시스는 널 죽이지 않았어, 오히려 널 데려가 키워줬다. 어쩌면 자신의 운명을 시험해 보고 싶어서 그랬던 걸지도 모르지.
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넌 전혀 변하지 않았어. 여전히 황야에서 길 잃은 불쌍한 어린아이일 뿐이지.
훗, 조급해할 필요 없다. 아스카론.
지금의 넌 내게 위협이 되지 않아, 네게 했던 기대도 이 정도뿐만은 아니고.
선생님이 그랬어……
“네 칼은 모든 살카즈의 적을 향해야 한다”라고.
넌 테레시스가 키워낸 처형인인 주제에, 테레시스에 대해 아는 건 나 같은 전쟁꾼보다도 적은 것 같군.
테레시스가 그 공작들의 앞잡이 노릇을 할 것 같나? 넌 아직 테레시스의 계획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 같군, 그렇다면 적어도 이곳에선 조용히 있어라.
오히려 궁금하군. 지금 테레시스가 내 뒤에 있는 방에 앉아 있다면, 넌 테레시스 앞에 어떻게 서게 될까?
……
바로 지금처럼, 넌 네 뒤에 있는 사람을 대신해 발언할 뿐이겠지.
이번 전쟁에 의견이 많은 것 같네.
적은 얼마나 되지?
정확한 수는 알 수 없지만, 항로 앞뒤로 습격 반응이 탐지됐다. 수가 적진 않아……
테레시스 본인의 뜻이든 아니든, 군사위원회의 다른 장교들은 모두 테레시아가 없는 틈을 타 바벨을 한 번에 무너뜨리려 하고 있어.
이렇게 되면, 살카즈도 '다른 선택지'가 없어지겠지.
우리가 동원할 수 있는 전투 인원은 얼마나 있지?
가장 우수한 전사들은 모두 전하와 함께 협상을 하러 갔어, 나머지 부대도 물자 수송대에 우선 배치된 상태야. 남은 건 평소의 3분의 1도 안 돼.
적어도 전방의 포위망은 뚫어야 할 텐데……
……켈시.
지휘는 내게 맡겨.
박사?
네 말대로 군사위원회의 일부 구성원들이 일으킨 기습이라면, 분명 단숨에 끝내려 할 거야.
그들에게 끌려다닐 순 없어.
취약한 곳을 찾아내 돌파해서 그들의 페이스를 흐트러뜨리면, 본함의 안전을 확보할 수 있을 거야.
……
{@nickname} 박사, 전투를 해 본 적이 있나?
피 튀기는 전쟁은 아니었지만…… 훈련이라면 전에 받아본 적 있어.
전장을 계산 가능한 데이터 모델로 구축하는 것 정도는 가능해.
켈시, 전선 관리와 공격 임무는 네게 맡길게. 네 힘이라면 우리를 지켜줄 수 있을 거라 믿어.
……알았어.
흉터의 상점에 오신 걸 환영하지, 전하.
요즘 같은 때라면 흉터의 상점도 상당히 바쁘겠네.
대다수 사람들의 목소리에 반대할 필요는 없겠지. 그렇지 않나, 테레시아 전하?
하지만 소수의 목소리도 존중받아야 해, '스카 아이'.
많은 사람들은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몰라, 사람들의 삶은 하루아침에 바뀌게 되겠지. 그렇게 되면 또 한 번 집을 잃고 바깥을 떠돌게 될 거야.
난 상인이야, 매우 제한적인 장사를 할 뿐이지.
용병들은 자신들의 목숨을 팔고 싶어 하고, 난 돈을 벌고 싶어 하지. 그래서, 난 항상 큰 손들의 생각을 존중해 왔어.
그럼, 당신의 가장 큰 손님을 찾아 얘기해 봐야겠어…… 뒤에 있는 방에 있는 거지?
전하, 그 앞으론 더 나아가면 안 돼.
스카 아이, 당신에게 언제부터 카즈델의 결의에 관여할 자격이 생겼지?
그러니까 더 앞으로 나아가게 둘 수 없다는 거야.
당신……
너무 '스카 아이'를 곤란하게 만들지 말아 주시죠, 전하.
알고 계시잖습니까, 섭정왕과 여기서 만나게 된다면 사태를 수습할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고해신부.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테레시아 전하.
이미 결정을 내린 모양이네.
그게 테레시스의 입장이야?
그렇습니다.
테레시스가 우리의 도시를 포기하기로 결정한 거야?
단지 한 발짝 더 나아가 집 밖으로 원정을 떠나는 것뿐, 포기가 아닙니다.
전하께서는 저희를 너무 오랜 기간 가둬뒀습니다. 저희는…… 나아가는 것을 갈망하고 있었죠.
……
고해신부의 말이 맞아.
60여 년 전, 테레시스 장군과 함께 흉터의 상점에 왔던 그날이 아직도 생생해. 그때 어깨를 나란히 했던 두 사람은, 운명조차 거스르려고 했지.
하지만 지금 분열되어 버린 카즈델을, 이곳 사람들을 봐.
당신은 여전히 '마왕'의 신분으로 모든 살카즈를 호령할 수 있고, 심지어는 우리 모두를 죽일 수도 있어. 하지만 한 번 물어보지 그래? 저 녀석들이 아직 당신의 이상을 따라가길 원하는지.
거대한 흉터의 상점에서 소란스러움을 사라졌다. 흩어져 있던 용병들은 무기를 거두곤, 공손히 머리를 숙인 상태로 서 있었다.
그들의 눈빛에는 한결같은 침묵이 감돌았지만, 마왕은 그들의 마음의 소리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방황, 흥분, 갈망, 그리고 울분.
……대부분 결정을 한 모양이네.
그럼 내가 막아도 의미는 없겠지.
……!
한 살카즈가 돌연 무릎을 꿇었다.
그는 마음을 바꿀 생각도, 테레시스의 매력적인 계획을 포기할 생각도 없었다.
단지…… 카즈델을 세운 테레시아를, 여섯 영웅 중의 한 명을, 자신들의 마왕을 배신했다는 점에 약간의…… 부끄러움을 느꼈을 뿐이었다.
괜찮습니다. 무릎을 꿇으세요. 테레시스 전하도 '스카 아이'님도 여러분의 행동을 탓하지 않을 겁니다.
아…… 이 오래된 동작은 단지 충성과 복종만을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이 동작이 가진 또 다른 의미, 전 매우 익숙합니다……
죄책감.
……키사르투슈타지.
당신은 당신의 이름이 뜻하는 의미가 무엇인지 찾아냈나?
아직 못 알아냈습니다. 전하.
그럼 그들의 죄를, 그리고 당신의 죄를 사하러 가도록 해.
죄를 짊어지는 건, 나와 테레시스 뿐이야.
알겠습니다.
저도 몸을 숙이죠. 마왕 전하.
……
만 년이나 되는 살카즈의 역사 속, 마왕을 따르는 원정은 전사에겐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그들은 몸부림치고, 빛났으며, 피와 진흙의 땅에서 수천 번을 다시 일어섰다.
마왕이 앞에 있기 때문에, 마왕은 백성을 버린 적 없기 때문에.
마왕이 가리키는 곳에는 집이 있었고, 도시가 생겼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마왕을 버렸다.
난 약속했어. 당신들에게 안정된 터전을 주고, 살카즈가 전란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겠다고.
이곳에 다시 발을 들이기 전까진, 난 희망을 갖고 있었어…… 어쩌면 누군가 나를 따를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난 당신들의 눈동자 속에서 불꽃을 보았어.
당신들이 보지 못했던 도시가 불길 속에서 타오르는 걸 보았어.
그 오래된 도시가 당신들의 눈에는 다른 모습으로 비치고 있어.
욕망의 도시, 증오의 도시, 부의 도시, 영광의 도시……
당신들은 그 낯선 땅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지.
그렇기에 난 처음 했던 생각은 내려놓고, 카즈델에서 가장 용감한 전사들을 배웅하기로 결정했어.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카즈델의 전사들은 다시 본격적으로 다른 종족을 정복하는 여정에 오르게 될 거야.
당신들은 존경받을 만한 사람이야. 설령 당신들이 그 여정에 오르는 것을 내가 바라지 않았다고 해도.
당신들은 테레시스의 부름에 응했고, 증오에 빠지게 될 또 다른 행동 속으로 자신의 몸을 던졌지.
머나먼 땅에서 당신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 죽음이야.
그런데도 우리의 고향을 떠나 런디니움으로 향하려는 거야?
슬픔에 잠긴 마왕은 백성들 사이를 걸었고, 백성들은 그런 마왕의 시선을 받으며 머리를 숙였다.
하지만 그들의 결심은 변하지 않았다. 설령 그것이 마왕의 마음을 거역하는 일이 된다고 할지라도.
“갈 겁니다.” “가겠습니다.”
소리가 울렸다. 하지만 테레시아의 귀에는 전사들이 떠나기 전 자신들을 위해 부르는 엘레지처럼 들렸다.
전하, 저희는 당신을 존경합니다. 하지만 당신을 따르지 않으려 합니다.
섭정왕께서 약속하셨습니다. 런디니움이 저희의 새로운 시작이 될 것이라고요.
살카즈의 미래는 그곳에 있습니다.
저희의 미래는 그곳에 있습니다!
……
이국의 땅에서 부디 몸조심하기를.
설령 그대들이 카즈델로 돌아올 수 없다 할지라도, 나의 전사들이여.
순백의 그림자가 양옆으로 갈라진 군중을 뚫고 지나갔지만, 마왕의 백성들은 아무도 동요하지 않았다.
한때 우러러보았던 그 군왕을 따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녀가 애써 일구었던 꽃이 만개한 터전, 그녀의 백성들이 생존할 수 있는 또 다른 가능성, 이 모든 것들을 모든 살카즈에게 보여주기엔 너무 늦어버렸다.
장군님……
……
이런 날이 올 줄 알고 계셨군요.
네 생각은 어떻지?
……망설임은 우리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전하께서 망설임이 없다면, 저희 또한 망설이지 않습니다.
그럼 준비해라, 맨프레드.
그리고 마찬가지로, 지금 불타오르는 그 감정을 잊지 마라.
그게 무엇이라 할지라도.
카즈델 지역, 흉터의 상점의 비밀 입구
……
아스카론, 낙담할 필요 없어.
바벨이 충분히 견고해져 더 많은 사람들이 비바람을 피할 수 있게 될 때가 되면, 우리와 함께하는 사람도 더 많아질 테니까.
누가 우리를 쫓아오고 있어.
전하……!
기다려 아스카론, 저 여자에게 적의는 없어.
윽…… 가차 없네. 소매에 감춘 암살검인가?
맞습니다 전하, 저는 전하와 함께 떠나고 싶을 뿐입니다.
……고마워, 당신의 이름은?
율리에.
예쁜 이름이네. 용병들 중에선 드문 이름인데, 직접 지은 이름이야?
아뇨…… 전 이름이 없어요. 이건 다른 사람이 지어준 거죠. 이름이 있으면 소속감이 생긴다고 해서요.
맞는 말이네.
왜 다른 사람들과 함께 런디니움으로 가지 않는 거야?
싸움이라면 이제 지긋지긋해요. 그 사람은 전하께서 언젠간 저희가 싸우지 않아도 되게끔 만들어 줄 거라고 말해줬죠. 그래서 대신 왔습니다.
원래는 전하께 도전해 보고 함께 갈지 정하려 했습니다만, 전하 앞에 있으면 칼을 들 용기조차 나지 않네요.
당신은 강한 전사야, 그런 확신이 들어.
이건 전하의 앞에서 함부로 할 말이 아니겠죠.
하지만 적어도 전하께서 과거 카즈델의 영웅이었다고 말한 그 사람의 이야기는 믿을 수 있다는 확신이 듭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단순한 이유네.
붉은 머리 용병이 머리를 긁적였다.
굳이 말하자면…… 아까 전하께서 말하던 그 모습이 너무 좋았습니다. 잘 알아듣진 못했지만요.
당신의 동료는 어디에 있어? 같이 와도 괜찮은데.
여기 있습니다. 칼이랑 옷이랑…… 옷은 좀 커서 몸에 잘 안 맞긴 하지만요.
그 사람을 말하는 거라면…… 생전엔 아주 강한 전사였습니다. 굳이 말하자면…… 음, 저 사람이랑 좀 닮은 느낌이었다 할 수 있겠네요.
……
옷이 크다면 내가 수선해 줄 수 있어.
괜찮습니다 전하, 이미 몸에 익어서요.
그럼 갈까, 율리에.
전하,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어요?
이쪽에 전하와 함께 가고 싶어 하는 다른 용병들이 더 있습니다.
흉터의 상점의 컴컴한 출구를 바라보던 테레시아의 시선은 흔들리는 불빛에 사로잡혔다.
한 무리, 두 무리…… 어둠 속에서 나타난 빛이 점점 더 많아졌다. 첫 번째로 횃불을 든 용병이 햇빛 속으로 발을 디뎠을 때, 그는 언덕 위에 있는 새하얀 모습을 보았다.
그 사람은 앞을 가리키더니 고개도 돌리지 않고 테레시아를 향해 걸어갔다. 그 뒤로 캄캄한 동굴 속에서 테레시아를 따라가는 행렬이 끝없이 이어져 나왔다.
그렇게 한 줄기 햇살이 되었다.
용병이 전쟁터에 익숙하다고는 하지만, 모든 용병이 끝도 없는 원정 속에 죽어가길 바라진 않아요. 저희도 살 방법을 찾고 싶어요…… 가능하다면.
카즈델에서 개인적으로 지원자를 모집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들었어요. 도시 안에도 저희와 함께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몰라요. 물론, 황무지로 나가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까요.
그 부분은 내게 맡겨줘.
같이 가자 율리에. 앞으로 바빠질 거야.
사람이 이렇게 많으니, 우리도 살 곳을 마련해 줘야겠지.
돌아왔구나.
놈들이 철수했어. 훌륭한 지휘였다, 박사.
저건……
의료진이 들것 몇 대를 들고 복도를 황급히 지나갔고, 켈시는 몸을 옆으로 돌려 의도적으로 박사의 시야를 가렸다.
적은 거의 자폭식으로 우릴 습격했어. 포위를 뚫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사상자가 생겨버렸지.
하지만 사상자 수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적었어.
우린 몇 명의 전사를 잃은 거지……?
박사. 네 지휘에는 실수가 없었어. 뒷수습은 책임지지 않아도 돼.
켈시 선생님, 예비용 혈액이 좀 부족한데요……
내가 조율해 보지. 수술 준비해.
켈……
의료진은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박사는 자신이 본 끔찍한 광경이 진짜인지 확신할 순 없었지만, 콧속에 가득 찬 피비린내는 지워지지 않았다.
현기증이 났다.
전장을 계산 가능한 데이터 모델로 구축하는 것 정도는 가능해.
하지만 전장은…… 숫자가 아니야.
살아 있는 생명들이 자신의 생존을 위해 외적에 대항하는 것, 난 이미 얼마나……
박사.
이런 참상은 처음 본 건가?
……그런 셈이지.
전에 맞닥뜨렸던 전투에선 잃은 생명이 이렇게 많지 않았어.
달콤한 걸 마시면 한결 나아질 거야. 경험담이야.
이번에 우리가 이렇게 적은 수로 많은 적들을 이길 수 있었던 건, 전부 박사의 지휘 덕분이다.
너희가 겪었던 전투는 모두 이런 식이야?
아니. 이번은 비교적 가벼운 전투였어.
앞으로 모든 전투를 이렇게 이길 수 있다면, 난 안심하고 당신에게 목숨을 맡길 수 있을 것 같아.
어쩌면 전쟁 말고도 우리가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만한 방법을……
하하, 그렇게 말하는 게 당신이 처음은 아니야.
하지만 이번 습격은 일종의 신호에 불과하겠지. 앞으로 우리에게 어떤 일이 생기게 될지는 아무도 몰라.
그럼 앞으로의 활약을 기대하겠어, 천재 지휘관님.
후세의 역사에는 이와 같이 적혀 있다. 1091년 겨울, 살카즈의 두 전하는 마침내 서로 적대 관계를 선언하게 되었다. 군사위원회와 바벨의 대립은 본격적인 전쟁으로 치달았다.
하지만 살카즈의 입장에서 보면, 1086년부터 국소적인 충돌이 끊임없이 일어났으며, 그들이 말하는 '내전'은 이미 시작된 상태였다.
그렇게 카즈델이 200년 가까이 유지했던 평화는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