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S-8극한 속도
회색 모자'는 엔시오데스가 숨겨둔 패를 처리하려 했지만, 시우루스가 미리 세워둔 계획에 의해 저지당하는 예상 밖의 결과가 나와버린다. 혼자서 수천 대군의 전진을 막고 있던 데겐블레허가 수적 열세로 밀리려 하던 순간, 엔시오데스가 숨겨뒀던 패가 도착하며 위기를 모면한다.
등장 오퍼레이터: 데겐블레허, 해럴드, 노시스, 마터호른, 뮤엘시스, 샤프, 레토, 실버애쉬, 프라마닉스, 쿠리어
윽……
쿨럭!
조심해……!
다음.
……
하아압……!!
보고합니다!
해럴드 대령님의 지원 덕에, 지금 중상을 입은 몇몇 전사들을 모두 구출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공세로는 상대에게 효과적인 피해를 줄 수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급습하겠다!
무기를 사용해라! 적은 하나야! 포위해!
근데 말입니다……
저 여자를 피해갈 수는 없는 겁니까?
저쪽은 한 명입니다. 전선을 길게 늘어뜨리면 저 여자도 모두 막아낼 수는 없을 겁니다!
……멍청한 놈!
그 정도도 모를 거라 생각했나!?
그렇다면 어째서……
눈이 달려있다면 직접 봐라!
지금 중상을 입고 쉐라간드와 만날 뻔한 녀석들은 모두 네가 말한 것처럼 돌아서 이곳을 빠져나가려 했던 녀석들이다!
그리고 다른 병사들을 봐라, 방금 말한 녀석들보다 심하게 다친 녀석들이 있는지!
……
그렇다는 건, 지금 그 말씀은……
그 말씀이고 나발이고 비켜! 피해!!
크윽……!
힘 조절을 못했네.
귓속말은 다 했어?
언제 여기까지……?!
방금.
지금 네 앞에 있는 수십 명으로 날 막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면 큰 오산이야.
큿, 괴물 같은 녀석……
수십으로 안 된다면, 수백, 수천을 이용하면 된다.
너 혼자서 우리 모두를 상대할 수는 없을 거다……
이 꽉 깨물어.
……뭐?
때릴 때 입 벌리고 있지 말라고.
혀 깨물지 않게 조심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싸늘한 바람이 불었다.
1명 대 2000명의 상황, 상식적으로 봐도 이건 1명인 쪽이 불리해야 한다. 하지만 저 금빛 눈동자에는 일말의 흔들림조차 없었다.
데겐블레허는 이 전장의 포식자이며, 지배자였다.
이런 데겐블레허를 목전에 두고 조금이라도 방심한다는 건, 상대를 존중하지 않는다는 의미임과 동시에.
……자신의 목숨을 내놓겠다는 의미와 같았다.
……!!
좀 봐주시죠, 데겐블레허 님!
제 부하가 실례되는 말을 했다면,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호오?
대신 사과한다고?
저 녀석들을 얼마나 지킬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거지?
그건, 하하. 아마 제가 죽기 전까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크윽……
당신의 트윈 소드브레이커스는 정말 대단하군요. 아무래도 당신을 상대하기엔 제 실력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데겐블레허 님. 이전에 당신의 이름을 여쭈어봤던 일, 아직 기억하십니까?
혹시 그 대답을 지금 들을 수는 있을까요?
시간 끄는 거 별로 안 좋아하지 않았어?
쉿, 쉿!
전장에서 서로를 인정하거나, 짧은 대화를 하는 일도 일어나는 법이죠…… 어떻게 보면 일상다반사라고나 할까요!
……
원래 이름 같은 건 잊어버렸어. 그냥 처음부터 그런 사람은 없었다고 생각하라고.
라이타니엔의 허름한 거리에는 이름도, 갈 곳도 없는 사람들이 수두룩하거든.
……라이타니엔 출신이라는 얘기는 들었지만, 그런 일을 겪으셨을 줄이야.
하지만 라이타니엔으로 돌아가 사람들에게 대우를 받았고, 귀족들의 연회에 초대됐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는데 말이죠.
그 녀석들은 버든비스트에게 우승 메달을 걸어줘도 똑같이 좋다고 쫓아다닐 거야.
아무 의미도 없어.
그런 곳에서는 이름의 유무 따위 신경 쓰지 않아. 폐수와 함께 하수도로 흘러 들어간 사람의 이름에 대해서 관심을 가질 사람은 없지.
하지만 당신은 지금…… 아주 강력한 이름을 갖고 계시지 않습니까.
강력하다고?
꼭 그렇지만도 않아.
맑은 날이었지.
순찰하는 헌병들은 갈 곳 없는 사람들을 길거리로 내몰았어. 그중 한 명은 내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날이 없는 이상한 무기를 들고 있었지.
그 사람의 전투 기술은 정교하지 않았고, 아츠 이론의 수준도 높진 않았어.
그냥 단순한 공격이었어. 하지만 흠잡을 부분은 없었지. 그리고 그 사람은 무기를 사용해 자신에게 대항하는 사람의 머리를 부쉈어.
그때부터 나는 내가 가진 게 무엇인지 알게 되었지.
내가 가진 건 규칙, 신념, 테크닉과 같은 듣기에 좋아 보이는 것들이 아니었어.
내가 가진 건 폭력이었지.
그래서 그날 나는 스스로에게 이름을 지어주었어.
나는 데겐블레허야.
……
미노스인들의 말에 따르면, 폭력과 승리는 형제자매처럼 절대 떨어질 수 없는 사이라고 하죠.
데겐블레허 님을 보니, 그 말이 맞는 것 같군요.
데겐블레허 님, 만약 당신이 정말로 폭력의 화신이라면 얻어낸 승리를 누구에게 바칠 생각이죠?
마지막으로 여쭈어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만…… 물론 이 문제는 별 가치가 없는 질문일 겁니다.
그때 데겐블레허 님에게 깨달음을 준 그 헌병은 승리했나요?
나는 그 사람의 트윈 소드브레이커스가 마음에 들었어.
사용하는 건 편해도, 너무 빨리 망가지는 게 문제지만.
마치 당신처럼 말이야, 크레이개번.
당신의 팔, 이제 못쓰게 될지도 몰라.
이런, 데겐블레허 님. 그렇게 노골적으로 말씀하시면 안 되죠.
이래 봬도 일군의 장교입니다. 체면을 좀 세워주십시오……
만약 제가 30…… 아니, 20년만 더 젊었더라도 지금보다 더 즐겁게 당신을 상대할 수 있었겠죠.
하지만 지금은, 비록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현실은 참 슬프군요…… 전 이제 늙었습니다.
그렇게 안 보이는데.
당신도 그렇게 생각해 주시는 겁니까?!
그렇다면 방금 한 말은 취소하죠. 전 아직 기운이 넘친다고 생각하고 있거든요!
하지만 이 의족, 비만 오면 여기가 조금 아플 뿐입니다……
……
시끄럽네.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 것 같아?
제가 얼마 더 버틸 수 있을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건 데겐블레허 님, 당신입니다. 당신은 얼마나 버틸 수 있죠?
……
직접 확인해 보는 건 어때.
싸움이 시작됐군.
지금의 상황을 보면 데겐블레허는 아직 버틸만한 것 같아. 해럴드도 전력을 다하고 있진 않고. 녀석들의 유탄 사수와 캐스터는 여유롭다고 할 수 있을 정도야.
술을 선물한 게 효과가 있나 보군, 엔시오데스.
바이스와 마터호른 쪽은 지금 어떻게 됐지?
이미 설산귀 소대 하나를 파견해 찾으러 갔지.
그리고, 현재 보고에 따르면 그쪽은 이미 공격당했다.
크레이개번 자작은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야. 목숨의 위협은 없을 거다.
그랬으면 좋겠군.
우리 쪽 사람들이 이미 역에 나가 대기하고 있어. 손님들이 도착하면 바로 이쪽으로 연락이 올 거다.
손님이 제대로 도착할 수 있길 기도해야겠군.
방금 그쪽으로 연락한 상인들은 어떻게 처리할 생각이지?
아마 당분간은 날뛰지 못할 거다.
노시스, 성녀님께……
전할 필요 없어요!
전 여기에 있어요. 엔시오데스 님, 하실 말씀이 있다면 직접 하세요.
……성녀님.
낙성식 현장에서 이런 사고가 발생한 건 실버애쉬 가문의 실책입니다. 낙성식이 끝나면 직접 만주원에 찾아가 성녀님께 사죄하겠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낙성식 시간을 조금 미뤄야 하겠죠.
당연합니다. 그건 엔시오데스 님께서 말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직접 말씀해 주세요.
……이렇게 찾아온다는 걸 알고 계시면서도 조용히 계시지 마시고요.
마음이 정말 넓으시군요, 성녀님.
하지만, 지금은 성녀님과 만주원의 수도사님들이 함부로 움직일 때가 아닙니다. 성녀님은 여기서 계속 낙성식을 거행해 주시죠. 분명 시민들을 안심시킬 수 있을 겁니다.
데겐블레허의 실력은 의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워낙 약속을 잘 하지 않지만, 약속한 일은 반드시 지키는 사람이죠.
지금 우린 데겐블레허를 믿어야 합니다.
당신은 데겐블레허가 2000명을 상대할 수 있을 거라 믿는 건가요? 아니면, 엔시오데스 님의 계략대로 될 때까지 필사적으로 싸울 거라 믿는 건가요?
데겐블레허는 전방에서 빅토리아인과 싸우고 있습니다. 무슨 생각인지도 알고 있죠. 데겐블레허는 유명인, 설령 무슨 일이 생긴다고 해도 쉐라그와는 무관한 일이라고 선을 그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있을 겁니다.
데겐블레허 씨가…… 잠깐만, 데겐블레허 씨가 자발적으로 나섰다는 건가요?
데겐블레허는 지금 쉐라그의 시민으로서 쉐라그의 명예를 지키고 있는 겁니다.
성녀님께서는 제가 단순히 명령을 내리고 종용했다고 생각하신 겁니까?
저마저도 데겐블레허가 조금 변했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엔 데겐블레허를 믿어보기로 했습니다. 그 믿음으로 도박을 한 셈이죠.
그게 아니었다면, 저 자작이 '패닉에 빠진 관광객'의 손에 죽는 광경을 보게 되었을지도 몰랐겠군요.
최선의 결과에 베팅한 겁니다.
……
'도박'인가요.
……전 무슨 일을 하든 일의 성패를 신에게 기도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제 손으로 잡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죠.
모든 일에 대책을 세우고, 모든 칩을 걸고, 승패에 굴복하고, 결과엔 승복하는 겁니다.
다만……
엔시오데스 님.
손에 힘 빼세요. 그러다 상처나겠어요.
……
성녀님, 부디 데겐블레허를 위해 기도를.
바이스!
정신 차려봐, 바이스!
윽……
야카 형님……?
여긴 도대체…… 제가 왜……
……! 이런! 큰일이에요! 빅토리아인들의 움직임이 이상합니다. 녀석들, 무언가 심상치 않아요!
주인님께 빨리 알려드려야 해요!
허억……
움직이지 마, 바이스!
너와 나 모두 기절한 뒤 이곳에 묶여있다는 건, 부하들도 이미 제압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시도는 해 봤지만, 힘으로는 빠져나갈 수 없어.
밖이 밝군…… 아무래도 이미 날이 밝은 것 같아.
빅토리아인은요?
한 명도 없어.
아마…… 지금쯤 모두 낙성식 현장에 모여 있을 거야.
……
야카 형님, 저 좀 도와주세요.
뭘 하려는 생각이지?
부츠 옆에 칼을 숨겨뒀거든요.
야카 형님, 그걸 꺼내서…… 저에게 던져주세요!
지금 제정신이야?!
지금 그 상태로 어떻게 칼을 사용하겠다는 거냐! 손을 포기할 셈이냐?!
그래도 해봐야죠.
전 받은 임무를 해내지 못했어요.
만약 주인님이 위험한 상황에 빠져버리기라도 한다면, 전……
어찌 됐든, 설령 너무 늦어버렸다 해도, 주인님에겐 필요 없는 일일지도 모르겠지만, 가능한 제 실수를 만회해야 해요!
……
맞는 말이야.
마터호른은 간신히 몸을 움직여 부츠에 손가락이 닿게 했다.
다음 순간, 마터호른은 바이스의 말대로 칼을 던지지 않았다. 그는 손가락으로 칼을 집고 손을 묶은 밧줄을 힘겹게, 하지만 최대한 강하게 잘랐다.
칼날이 남자의 손가락 사이를 파고들었고, 검붉은 피가 손목 아래로 뚝뚝 떨어졌다.
야카 형님!
손이!
괜찮아, 별거 아닌 상처니까.
원래는 네가 이렇게 하려던 거 아니었어?
네 말이 맞아. 분명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겠지. 그러니까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할 수 없어.
최대한 빨리 밧줄을 자를게!
야카 형님……
저기……
……!
누구냐!
난 적이 아니야.
……미안, 혹시 방해됐어?
묀히?
이미 쉐라그를 떠난 거 아니었습니까?
그 얘기는 나중에 천천히 설명해 줄게.
시우루스 부인께서 상황을 살펴보라고 했어. 근데 두 사람이 빅토라아의 진영에 묶여있는 것을 발견했지.
다른 사람은?
전부 풀어줬어.
우선, 두 사람도 빨리 나와. 빅토리아의 군대가 은심호에서 무력 충돌을 일으켰어.
최대한 빨리 현장에 도착해야 해.
안 되겠어, 얼마 버티지 못할 것 같아!
이렇게 마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
아크토즈! 돌아와!
지금 우리가 괜히 가만히 있는 줄 알아? 너만 나서고 싶어 하는 것 같냐고! 눈으로 봐도 잘 모르겠으면 생각이라는 걸 좀 해 보든가!
지금 네가 나서면, 일이 더 커져 버리게 돼!
남의 등 뒤에서 구차하게 목숨을 연명하는 건, 우리 페일로쉬 가문의 수치다!
이대로 보고 있을 수만은 없어!
나도 알아! 하지만 지켜봐야만 한다고!
저 상황을 보고만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건 너 혼자뿐만이 아니야.
……저 데겐블레허가 쉐라그에 온 지 벌써 10년은 되지 않았나? 근데 저렇게 버림받아야 한다고?
만약 엔시오데스가 오늘 이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다면, 앞으로 아무리 큰일을 해도, 쉐라그에 큰 이익을 가져다준다고 해도, 난 그 녀석의 말을 절대 믿지 않겠다.
난 너희처럼 큰일을 해낼 수 없다. 그리고 너희처럼 냉정하게 있을 수도 없는 사람이야!
……그러기엔 이미 늦었어.
지금은 엔시오데스를 믿는 수밖에 없어.
손에 난 상처는 우선 놔두지. 나중에 장갑이라도 껴서 가려라.
그리고, 설산귀의 보고를 들었으니 너도 감을 잡았겠지.
아무래도 데겐블레허가 얼마 버티지 못할 것 같다.
데겐블레허가 더 이상 피하지 않고 있어.
저건 데겐블레허가 예전에 카시미어에서 경기를 할 때 생긴 버릇이다.
그 이후엔……
이후 데겐블레허는 너를 데리고 추격을 피하는 중에 저 버릇을 고쳤지.
아마 그때 데겐블레허가 조금만 실수했으면 네가 죽는 게 더 빨랐을 거야.
……아마 그랬겠지.
아직 연락을 받은 건 없나?
아직이다.
조사하러 갔던 사람들은 이미 돌아왔다. 그 손님은 확실히 은심호행 열차에 탔다고 하더군, 원래대로라면 낙성식이 끝날 즘에 이곳에 도착하겠지.
열차가 도착하기까지 아직 시간이 남아있다.
그런가……
노시스, 이전의 난 그 어떤 내기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예전부터 늘 그랬다. 내가 걸어온 길엔 많은 내기가 있었지.
이번에도 마찬가지야.
알고 있다.
준비는 충분히 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난 인내심이 부족한 사람인 것 같군.
……속마음을 털어놓다니 고맙군. 네가 뭘 듣고 싶어 하는진 알아. 내가 대신 대답해 주지.
만약 네가 어둠의 기사를 지키고 싶다면, 또는 데겐블레허가 끝까지 버티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든다면 명령을 내려. 아직 성공 가능성은 있으니까.
우리가 데려온 건 최고의 궁수와 캐스터다. 호수를 폭파해 혼란을 일으키고, 그 틈에 시민들과 군인을 모두 차가운 얼음 구덩이에 집어넣는 거지.
엔시오데스, 결정권은 네가 쥐고 있다……
네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 지지하겠다. 하지만 그에 따른 책임은 모두 네가 감당해야 할 거야.
이 일이 초래하는 결과는 간단한 정치 문제로 끝나지 않을 거다. 아마 넌 견디지 못할 수도 있겠지, 난 그렇게 생각해.
하나 더 묻지, 만약 너라면 어떻게 할 거지?
겨울의 수영 대회가 이미 시작되었겠지.
훗.
데겐블레허를 믿어보지.
데겐블레허는 쓰러지지 않을 거다.
데겐블레허의 몸에 생긴 첫 번째 상처는 언제 생긴 걸까.
어깨와 팔에 상처가 나 옷이 찢어졌지만, 이를 알아챌 수 없을 정도로 피가 나고 있었다.
이전에 익숙해진 상처와 비교해 보면, 이 정도 상처쯤은 별것 아니었다.
데겐블레허는 주변에 있는 병사 몇 명을 쓰러뜨렸다. 희미하게 느껴지는 통증 때문일까, 그녀의 표정은 더 무섭게, 동작은 더 강렬하게 변했다.
두 번째 상처는 오리지늄 아츠 때문에 생겼다.
평소였다면 아츠는 데겐블레허에게 소용이 없었겠지만, 수적 우위가 가진 우세는 오리지늄 아츠의 유효성에 변화를 일으키기엔 충분했다.
병사들 사이에 있는 캐스터가 아츠를 시전했고, 이어서 화염, 서리, 천둥이 일제히 날아왔다. 엄청난 기세였다.
데겐블레허는 손에 든 무기를 던졌고, 무기는 한 캐스터의 어깨를 관통했다. 그리고 본인은 아츠의 범위를 무리하게 가로질러 병사들 속에 뛰어들었고, 더 이상 아츠를 시전할 수 없게 만들었다.
세 번째 상처는 포병 여럿이 발리스타를 이용해 그녀를 세 번째로 겨냥했을 때 생겼다.
데겐블레허는 상대의 무장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움직임에 방해가 생기는 것, 또는 발리스타 같은 성가신 것들이 너무 많이 날아오는 건 대처하기 까다로웠다.
놓쳐버린 포탄 하나가 그녀의 허리와 복부에 탄 자국을 남겼다.
피부가 순식간에 타버렸지만, 피는 별로 나지 않았다.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데겐블레허는 자신이 질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이 얼마나 많은 피를 흘릴 수 있을지는 가늠할 수 없었다.
네 번째, 다섯 번째 상처는……
……
기억이 나지 않는다.
상처를 세는 것도 이젠 지겹다.
아직 부족해……
덤벼!
크윽!
리스번!
찰스! 리스번을 후방으로!
우선 지혈을, 돌아와서 응급처치를 할 때까지 대기!
……
쿨럭……
저 여자도 이젠 못 버틸 거야!
지금이다! 돌격!
훗.
손가락 하나만 움직일 수 있어도……
크윽!
너희들은 충분히 상대할 수 있어.
데겐블레허 님!
당신도 지금 한계 아닙니까!?
만약 당신이 정말 우리를 적으로 대할 생각이었다면, 이런 상황이 일어나진 않았을 겁니다!
이렇게 가다가는 양쪽 모두 사상자가……
그게 바로 너희 빅토리아가 잘 일으키는 전쟁 아닌가?
딱 하나 다른 게 있다면, 상대는 나 하나라는 거지.
해럴드, 당신은 군인이야.
그리고, 나는 당신의 적이지.
……하하, 정말 날카로운 말이군요. 데겐블레허 님.
하지만 당신이 눈치채지 못했을 거라 생각하진 않습니다.
카란 무역회사의 은밀한 움직임은 '회색 모자'에게 발각되었습니다. 공작님께서 가만히 보고만 있지는 않을 겁니다!
그건, 쿨럭, 엔시오데스가 해결해야 할 일이야.
엔시오데스 님께 드리는 마지막 기회입니다!
엔시오데스 님이 조금만 고개를 숙이고, 이익을 조금만 줄인다면……
설령 제시했던 조건의 30%뿐이라 해도, 공작님을 설득해 볼 수 있습니다!
이건 일어나지 않아도 될 싸움이었습니다.
가소롭네.
지금 당신은 어떤 신분으로 방금 한 말을 뱉은 거지?
축하하러 온 사람? 관광객? 버든비스트를 치료하는 수의사?
이곳에서 너무 편하게 지낸 탓에, 스스로 지어낸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기라도 한 거야?
……
……아니.
당신은 단 한 번도 당신의 신분이 무엇인지 잊어버린 적 없어.
당신은 전쟁을 싫어해.
당신은 권력을 포기하고, 부하들, 그리고 당신과 생각이 같은 일부 사람들을 데리고 소용돌이 중심에서 멀리 쉐라그로 도망친 거야.
당신이 생각했던 전쟁 같은 건 절대 일어나지 않을 곳으로.
하지만, 당신은 결국 빅토리아인이야.
아니.
이건 굳이 알려줄 필요도 없는 말이었네.
……물론 당신은 그렇게 말씀하시겠죠.
전 빅토리아 군인이 맞습니다, 데겐블레허 님.
전 이 운명을 싫어할 수도, 또는 이 운명에서 도망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전 빅토리아의 이익에 손해를 끼치는 일은 할 수 없습니다.
좋아.
나도 마찬가지야.
데겐블레허는 눈앞의 이 빅토리아인과 같을까?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데겐블레허는 라이타니엔에서 태어나, 카시미어에서 자랐고, 지금은 쉐라그에 왔다.
사람들이 그녀의 이름을 알 필요는 없었다. 그저 그녀가 타고난 전사라는 것, 기사 스포츠 경기의 우승자인 것, 유일하게 3회 연속 우승을 한 사람이라는 것만 알았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그녀는 오리지늄 아츠와 인연이 없는 사람이었고, 그렇기에 라이타니엔에서 갈 곳이 없었다.
이런 신분을 얻거나 포기하는 건 쉬웠다.
게다가 시시했다.
하지만, 데겐블레허에겐 쉽게 포기할 수 없는, 포기하고 싶지 않은 것이 생겼다.
그리고 지금, 두 사람은 같아졌다.
쿨럭, 시시한 얘긴 여기까지 하지.
데겐블레허 님, 매우 유감입니다.
여기까진 오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게 당신의 뜻이라면, 그 뜻을 존중하도록 하죠.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전 정말 당신의 팬입니다. 당신은 승리할 때마다 눈부신 활약을 보여주셨죠.
이건 진심입니다. 믿어주십시오.
훗.
기억할게.
영광입니다.
상처투성이인 여자는 다시 손에 쥔 트윈 소드브레이커스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처음 사람들의 앞에 나타났을 때처럼 트윈 소드브레이커스 끝으로 빙판을 내리찍었다.
은심호의 안개가 점점 걷혔고, 묵직한 소리가 적들의 마음속에 울려 퍼졌다.
쩌적, 쩌적.
무언가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귀청이 터질 것만 같았다.
이제 끝을 내야겠네.
……! 전원! 명령입니다!
얼음을 파괴하는 걸 저지하세요! 대열을 가다듬고 최대한 빨리 '카시미어의 어둠의 기사'를 쓰러트리십시오!
없군.
여기에도 없어.
음, 여기도 아니군.
그렇다면, 이곳 밖에……
고객님, 열차가 속도를 올리고 있습니다. 이동하실 때 조심해 주세요!
아, 아직 선물을 받지 않으셨죠? 어떤 선물을 드리면 될까요?
열차가 늦어진 것에 대한 보상입니다. 무료로 드려요!
필요 없어.
하지만 고객님, 이건 공짜로 드리는 건데요……
그렇다면 당신에게 선물하지.
아, 그, 그건……
받아.
이제 지나가도 괜찮겠지?
네, 네, 지나가세요!
감사를 표하지.
후…… 하아……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왜 다리가 풀리는 느낌이……
(이곳이 마지막 객실이야.)
(최근엔 꽤 피곤했단 말이지.)
(은퇴를…… 하아, 런디니움의 일도 아직 수습되지 않았는데. 아마 공작님께서 은퇴를 받아주진 않겠지.)
(이 문 뒤에 있는 건 과연 뭘까?)
(쉐라그가 여태 숨겨놓은, 심지어 몰래 숨겨뒀던 운송로보다 더 깊이 숨겨둔 카드가 있을까……)
(뭐가 됐든, 안타까운 일이야.)
아깝군, 아무래도 실버애쉬가 숨겨둔 비장의 카드가 이렇게……
……
음?
당신, 무슨 일이지?
미안하지만, 이 객실은 만석이라서. 다른 곳을 알아봐 줬으면 하는군.
저기, 제가 자리를……
……
…………
아직 용건이 남은 건가?
말했지만, 이곳은 만석이다. 보이는 것처럼 몸을 돌리기도 힘든 상황이지.
그러니까, 전 나가서 앉아도 괜찮다니까요! 정말이에요!
왜, 왜 꼭 저랑 같은 객실에 있어야 하는 건가요!
너무 그러진 말라고 대변인 씨. 당신도 나도 초청장을 받고 이곳에 온 것 아닌가?
게다가 이 객실은 우리가 딱 알맞게 앉을 수 있지. 가는 길에 서로 지켜줄 수도 있고.
우리가 있는 한, 안전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 없어.
그런 문제는 걱정하고 있지 않습니다만.
그리고, 이게 딱 알맞다뇨! 당신들은 의자에 앉아있고, 전 테이블에 앉아있지 않습니까!
……이런, 미안하군. 실례했다.
……
이거였나…… 이제 이해가 되는군, 분명 아직 꿈을 꾸고 있는 거겠지.
카시미어의 출정 기사와 상업연합회를 대표하는 대변인이 같은 열차, 그것도 같은 객실에……
이게 바로 실버애쉬가 숨겨둔 카드였군.
정말 간이 크군, 물론 이게 그 당주의 스타일이지만.
공작님, 전 최선을 다했지만 이건……
출정 기사를 적으로 돌리는 건, 아무리 내게 책임이 있다고 해도 어렵겠어.
그렇긴 해.
네가 하는 일도 참 힘들어 보이네.
……?!
진정해.
그냥 지나가는 길이니까.
그 제복……
……정말 놀랍군.
로도스 아일랜드가 어째서 이곳에 있는 거지?
그건 우리 상사한테 물어봐야 할걸.
- 캐스터의 오른팔이 왜 이곳에?
- 뭐가 궁금해, 벨링엄 씨?
놀랍군, 이곳에서 당신과 만나게 될 줄이야.
하지만, 로도스 아일랜드와 쉐라그의 관계는 '회사 간 협력'에만 한정되어 있는 것 아니었나?
내가 잘못 알고 있었던 건가?
오랜만이군…… '박사'.
이쪽도 로도스 아일랜드의 오퍼레이터인가? 아무래도 정보가 맞는 것 같군. 확실히 로도스 아일랜드의 정보는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어.
뭐, 다른 얘기는 제쳐 두도록 하지. 이곳에서 당신과 만나다니 놀랍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군.
이건 진심이야. 이런 옷차림을 했는데도 날 알아볼 줄이야.
로도스 아일랜드, 당신들은……
박사! 빨리 나 좀 도와줘!
- 뮤엘시스!
음, 무슨 일이지?
이제 곧 역에 도착해, 빨리 와서 장비 정리하는 것 좀 도와줘, 박사……
어라? 너희들 지금……
박사, 열차장에게 조금 더 빨리 달려보라고 말해볼까……?
어, 너!
로도스 아일랜드와 컬럼비아의 라인 랩이라…… 그런 거였나, 그런 거였군.
모두 이곳에 나타나다니, 아무래도 우연은 아닌 것 같은데.
어라, 아무래도 날 아는 사람인 것 같네.
박사, 샤프, 그리고 레토, 저 모자 쓴 사람을 소개해 주지 않을래?
키야르 씨, 과연 쉐라간드께서 자신의 조각상을 위해 혈투를 벌이는 저 사람을 지켜주실까요?
저 사람은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이고, 쉐라간드를 향한 신앙심은 전혀 없는데도 지켜주실까요?
하하, 성녀님, 그 문제는 간단해.
'쉐라그인'이라는 호칭은 이곳에서 살고, 이 땅을 사랑하고, 이 나라에 속한 사람들을 지칭할 때만 사용돼.
그건 쉐라간드가 인정하는 것과 별개의 문제야.
만약 한 사람이 마음속으로 자신의 신분을 정했다면, 다른 사람이 그걸 부정할 수 있을까?
……
맞아요.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죠. 데겐블레허 씨 본인조차도 부정할 수 없을 거예요.
데겐블레허 씨는 쉐라그인이에요.
키야르, 저와 함께 손님을 맞이하러 가시죠.
빅토리아에서 온 손님이 낙성식에 참관하러 오셨어요. 저도 성녀로서 응대해야 합니다.
최소한, 인사는 해야겠죠.
그건 매우 위험하다고 말하고 싶은데.
뭐…… 알았어, 성녀님.
가주님!
시우루스가 돌아왔습니다!
정말?!
왜 이렇게 늦게…… 아, 아니지, 말했잖아! 여기 오지 말고 최대한 멀리 가라고!
왜 내가 오면 안 되는데?
그냥 온 게 아니라 손님까지 모셔 왔지!
하필 이런 때에 손님을 데려왔다고?
이 바보야,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난 바보가 아니야.
확실히, 시우루스 부인의 현명한 수단은 탄복할 만하다.
라타토스, 아무래도 시우루스 부인을 과소평가하고 있는 것 같군.
……뭐라고?
부인, 손님이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좋아! 빨리 모셔 와!
……
……
네.
주인님!
손님을 모셔 왔습니다!
무슨 소리야? 저분들은 내가 모셔 온 손님이야!
당신이 바로 브라운테일 가문의 시우루스 부인입니까?
이번 낙성식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시우루스, 이게 바로 네가 준비했다는 거야?
당연하지!
자 소개할게. 이쪽은 카시미어 감정회 소속의 출정 기사, 쉐라간드 동상을 세운 것을 축하해 주러 온 사람들이야!
특별히 감정회에 초청장을 보내서, 어렵게 모셔 왔다고!
그러니까 내 손님이야!
엄청난 우연의 일치군, 시우루스 부인.
출정 기사를 데려올 줄이야, 대단해. 그리고 이쪽은 내가 초대한 손님이다.
환영합니다. 상업연합회의 대변인.
안녕하세요, 당신이 실버애쉬 님이시죠?
반갑습니다. 회사를 대표해서 인사드리죠. 특별히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쉐라그는 정말 아름답더군요. 귀사와 함께 반드시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참, 하나 여쭈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말입니다. 오는 길에 얼어붙은 호수 위에서 치열한 전투를 봤던 것 같은데요?
그런데 그중에 낯이 익은 분이 계셔서요. 사용하는 전투 기술을 어디서 본 것 같았습니다.
이런, 죄송합니다. 말이 너무 많았나요?
이건, 그게, 이전의 직업 때문에 생긴 직업병이라고나 할까요. 크흠, 뭐 그런 겁니다. 어쨌든, 귀사와의 협력에 도움이 되지 않을 말은 삼가도록 하죠.
아뇨, 모브 님. 지금 마침 모브 님의 그런 재능이 필요합니다.
네? 제가 필요하다고요……?
네, 그렇습니다.
지금, 당장입니다.
저를 따라 앞으로 나와주시죠. 사람을 시켜 소리를 키우는 오리지늄 아츠를 사용하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나서, 큰 소리로 말씀해 주세요.
카란 무역회사와 카시미어의 상업연합회 산하의 회사가 곧 협력할 것이고.
쉐라그는 카시미어의 든든한 파트너가 될 거라고요.
……이건 무슨 소리일까?
이건 그 사람들이 물에 빠진 소리가 아니다, 살려달라는 소리도 아니다.
데겐블레허의 귀에 누군가가 큰 소리로 말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동작에 흐트러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정말 큰 소리였지만, 무슨 소리인지 잘 들리지 않았다.
눈앞의 시야는 점점 좁아지고 흐려졌으며, 소리도 희미해지고 있었다.
손과 발에는 이미 감각이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자신의 오랜 동료를 꼭 쥐고 있다는 건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바로 트윈 소드브레이커스다.
왜냐면 지금 반사적으로 움직이며 다가오는 사람을 하나씩 쓰러트리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너무 시끄럽다.
너무나도 시끄럽다. 어떻게 이렇게 큰 소리를 낼 수 있는 걸까?
왜 사람들이 흩어지고 있지?
이미 누군가 방어선을 뚫은 걸까?
아니다.
빛을 잃어가던 맹수의 금빛 눈동자가 번뜩였다.
……아직 일어설 수만 있다면.
……아무도 지나갈 수 없다!
……데겐블레허 님! 데겐블레허 님!
이제 그만하세요…… 이런!
피를 너무 많이 흘렸습니다. 데겐블레허 님! 정신 차리세요!
……
이런! 더 싸우다간 둘 다 물에 빠지고 말겠어요!
안 싸우는 거야?
네! 안 싸웁니다!
아무리 공작님이 쉐라그를 혼내주고 싶다 한들, 카시미어를 향해 이렇게 직접적으로 행동할 수는 없을 겁니다…… 최소한 지금은 그럴 테죠.
이건 빅토리아와 쉐라그, 또는 공작님과 실버애쉬의 원한일 뿐인데, 만약 카시미어까지 끌어들이면 일이 간단하게 끝나진 않을 겁니다.
그렇게나 먼 거리를, 이렇게나 짧은 시간에…… 카시미어의 야망가들이 카란 무역회사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겁니까?
정말 대단한 사람이군요.
……
아마 공작님도 제가 공격을 멈춘 것을 탓하진 않을 겁니다. 이건 그럴만한 이유가 있으니까요.
지금 제 병사의 절반이 물에 빠졌습니다. 겨우 건져 올렸는데……
계속 이렇게 싸우면 다 치료하지 못할 수도 있어요!
지금도 못 하고 있잖아, 쿨럭.
피를 토하는 사람은 말할 자격 없습니다.
……안 싸운다고?
네, 안 싸웁니다.
좋아.
엔시오데스가 이겼다.
데겐블레허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마쳤다.
데겐블레허의 귀에 이런 말들이 들렸다.
잠깐, 데겐블레허 님, 기다리십시오!
한평생 살다 보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들이 많죠.
마치 오래전에 은퇴하고 싶었지만, 뭐 하나 받은 것 없는 제 형제들을 생각해야 하는 저처럼 말이지요.
하지만 이번엔 소원을 하나 들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팬이 상처투성이가 된 걸 봐서라도……
사인 하나만 받을 수 있을까요?
……이 와중에 사인이 받고 싶다고?
이 카드…… 훗.
왜 그러시죠?
처음 우승한 뒤에, 놈들이 끈질기게 조르는 바람에 사진을 찍은 적이 있거든.
근데 그 후로는 너무 시시해진 탓에 사진을 절대 찍지 않았어.
그런 거였군요. 어쩐지 어둠의 기사 카드는 몇 번을 발행해도 매번 같은 포즈더군요.
데겐블레허는 해럴드가 건넨 펜을 받아 쥐고 자신의 이름, '데겐블레허'를 적었다.
자, 가져가.
더 사인해 줄 물건이 없었으면 좋겠네.
데겐블레허 님, 어디로 가려는 거죠?
치료해 드릴까요? 응급처치는 자신 있습니다.
데겐블레허는 고개를 들어 태양이 떠오르는 곳을 바라보았다.
먼 곳에서 두 사람이 이곳으로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제대로 보이진 않았지만, 누군지는 알고 있었다.
태양과 같은 높이에 높이 솟은 쉐라간드 동상이 마치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괜찮아.
난 돌아갈게.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