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ST-2정원에서
침묵하던 성도는 줄기가 부러지고 꽃잎이 타버린 그 꽃을 집어 들었다.
등장 오퍼레이터: 이그제큐터 디 엑스 포에데레
빨리 와, 호르스트! 여기야!
성상 앞에 꽃을 심다니, 게다가 다른 곳보다 더 예쁘게 폈네? 클레망은 좀 소심해 보여도 꽤 하는걸!
스테파노가 용케도 허락을 했네. 성당 바닥을 파헤치질 않나, 흙을 찾아다니지 않나…… 어떤 흙을 쓰는지까지 신경 써야 하잖아.
천천히 뛰어. 아직은 부상자라는 걸 잊지 마.
이 정도로 호들갑은?
작은 상처라도 악화될 위험이 있어.
그리고, 이제 그 이름으로 부르지 마. 내 이름은 제럴드야.
네네, 알겠습니다요! 왜 너까지 자꾸 사소한 걸로 투덜거리는 거야…… 스테파노한테서 그런 것 좀 배우지 마!
스테파노 그 노친네는 아마 너무나 많은 걸 신경 써서 얼굴에 주름이 잔뜩 생긴 게 틀림없어.
늙은이는 참견하지 않고 대범해져야 오래 살 수 있단 말이야!
에일린! 말이 너무 심해. 스테파노는 수도원의 미래를 위해 최선을 다한 것뿐이야.
우리가 지금처럼 살 수 있는 것도 모두 스테파노 덕분이고.
나도 알아! 내 말은 스테파노가 너무 많은 걸 신경 쓴다고. 옆에서 보는 내가 다 힘들어!
언젠가 견딜 수 없게 되었을 때, 아마 크게 무너질걸……!
스테파노는 남의 말을 잘 안 들어…… 산크타 중에서도 유난히 고집이 센 편이야. 일단 확신하면 끝까지 밀어붙이니까.
하지만 우리가 이곳에 정착할 수 있었던 것도 스테파노의 그런 성격 덕분이지.
스테파노는 우리 살카즈가 다른 사람들과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해……
그건 맞는 말이지.
언젠가 정말 무너지게 된다면 우리 둘이 힘을 보태지, 뭐…… 보답하는 셈 치고.
너도 이제 과거를 내려놔. 우린 카즈델을 떠난 순간, 이미 테레시아 전하를 배신했어…… 제럴드,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거야.
너도, 나도.
……알아.
네가 말 안 해도 알고 있어, 에일린.
내가 예전에 전하를 따르긴 했지만, 언제부턴가 전하가 그리는 그림은 보이지 않기 시작했어…… 카즈델의 두 전하한테서 우리 살카즈의 미래가 보이지 않았지.
슬퍼하지 마.
괜찮아. 적어도 지금 우리는 새로운 삶을 살고 있잖아.
카즈델을 떠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데리고 온 이상, 나는 그 사람들을 책임져야 해.
그래도 지금의 생활은…… 전보다 많이 좋아졌잖아.
방심하지 마. 예전과는 다르지만, 우리는 물자가 없는 데다 강도 중에는 가끔 상대하기 힘든 놈들이 있어.
지나치게 조심하는 거 아니야?
이러다가 한 십 년쯤 되면 그 악명 높은 용병이 시골 사냥꾼으로 변하겠다. 하하하하!
하하하하……
……저기, 있잖아, 제럴드.
응?
만약 정말 무기를 내려놓고 시골 사냥꾼이 된다면, 네가 어떤 모습일지 상상해본 적은 있어?
그때가 되면 나는 또 어떤 모습일까?
아니, 생각해 본 적 없는데.
그때가 되면 나는 어떻게 변할까……
궁금하다면, 에일린…… 네가 직접 확인해 봐.
오래전, 심야까지 적과 사투를 벌인 후의 깊은 밤. 제럴드는 숨을 돌리고 싶을 때, 늘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다.
하늘에는 울적한 검은색이 펼쳐져 있었고, 모닥불은 점점 꺼져갔으며 불길은 점점 식어갔다.
용병은 피투성이로 물든 얼굴을 닦으며, 동시에 만신창이가 된 동료들을 바라보며 잠시나마 그들에게는 사치스러운 생각을 했다.
과연, 그들과 같은 살카즈들은 이른바 행복한 삶이란 걸 살 수 있을까?
예전의 그는 살카즈가 다시 고향을 갖는 날이 반드시 올 거라고 굳게 믿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점점 무기력해지고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들은 너무나 많은 피를 흘렸다. 이대로 가다가는 전하의 아름다운 미래를 실현하기도 전에 그들의 피는 다 떨어지고 말 것이다.
그래서 제럴드는 카즈델의 모든 것을 버리기로 결심하고, 곧 목숨을 잃을 동료들을 데리고 그 땅에서 도망치듯 떠났다.
그들은 신분을 숨기고 마침내 살카즈를 받아주는 안주의 땅을 찾아냈다. 그들이 원하는 건 여느 사람과 다를 바 없는 평온한 삶을 사는 것뿐이었다.
이 소원은 한때 실현되기도 했다.
하지만 언제부터 삶이 숨조차 쉴 수 없을 정도로 어려워졌을까?
마치 상 위에 차려놓은, 아무도 손대지 않은 진수성찬 같았다.
분명 유지하려고 애쓰며 파괴하는 이도 없었지만, 그것은 점점 썩어가고 있었다.
만약 피를 흘려야만 이 모든 것을 끝낼 수 있다면……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이것뿐이다.
클레망, 이제 괜찮아.
난 이제 못 도망가, 갈 수도 없지.
너한테는 내 과거의 이름을 알려준 적이 없구나. 뭐, 떠올릴만한 과거는 아니니까. 나는 그저 돌아갈 곳이 없는 악명 높은 탈영병에 불과해.
내가 있는 한, 놈들에게는 다른 사람들에게 손을 댈 명분이 생겨.
그런 얼굴 하지 마. 나는 그냥 한발 먼저 에일린을 만나러 가는 것뿐이야. 죽음은 나 같은 놈에게 매우 익숙해.
내 목으로 다른 사람의 목숨을 바꿀 수 있다면, 그건 가치가 있는 일이야.
내가 간 뒤에도 남은 녀석들은 걱정하지 마. 녀석들은 내 말을 잘 따를 거야.
라이문트는 젊으니까 아마 충동적으로 굴겠지. 그때는…… 네가 좀 말려줘.
……
마지막으로……
이 말을 스테파노에게 전해줘. 어쩌면 우리가 황야를 헤매던 그때…… 우리는 멈춰 서지 말아야 했고, 머물지 말아야 했을지도 몰라.
다만, 이곳은 나에게 있어, 우리 살카즈에게 있어…… 너무나도 이상적인 곳이었으니까……
오랫동안 함께해 온 날들이 마치 꿈만 같아. 하지만 언젠가는 꿈에서 깨어나 현실을 마주해야 한다는 걸 나도 알고 있어.
마지막으로 스테파노한테 전해줘…… 고맙다고, 그리고 미안하다고.
그럼 부탁할게. 클레망.
결국엔 이 신분인가……
나는 과연 사냥꾼일까, 아니면…… 여전히 용병일까?
미안해, 에일린. 네가 지금의 내 모습을 보고 있다면 아마 눈살을 찌푸리겠지.
……날이 밝았습니다.
어제부터 많은 일이 일어난 것 같네요. 또 눈 깜짝할 사이에 모든 게 끝난 것 같기도 하고요.
어쨌든…… 이 밤이 길었던 건 확실합니다. 그렇지 않나요?
뭘 하고 있는 겁니까?
당신이 신경 쓸 만한 일이 아니에요. 페데리코 씨.
꽃이라도 찾아보려고요. 제럴드가 에일린을 만나러 가는데 빈손으로 갈 순 없잖아요.
그러고 보니…… 어젯밤 화재로 모두 타버려서 아무것도 남지 않았네요.
꽃을 원한다면 일부러 여기까지 오지 않아도 되잖습니까.
그게 아니에요, 페데리코 씨. 당신은 모릅니다.
여기 꽃은 특별하거든요. 이 수도원에서 기른 특수한 품종입니다……
우정과 희망의 상징…… 입니까?
맞아요, 우정과 희망. 주교님께서 이것은 라테라노와 이베리아가 손을 잡은 상징이라며, 수도원에서 가장 중요한 물건 중 하나라고 말씀하셨어요……
얼마나 멋진 일인가요…… 그때 저는 바로 이 꽃에 매료됐습니다.
그때만 해도 수도원에는 여기저기 꽃이 만발했는데. 매년 개화기 때, 종루 같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 수도원은 온통 꽃으로 채워져 있었죠.
에일린은 그런 풍경을 진짜 좋아했습니다. 제럴드도 좋아했고요……
원래는 살카즈들이 무서워서 말도 걸지 못한 사람이 많았는데, 개화기가 지난 뒤에는 사이가 많이 좋아졌어요.
다들 알게 된 거죠. 소문으로만 듣던 냉혹하고 호전적인 살카즈도 꽃밭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걸음을 멈추고 구경하거나, 조금 따서 집안을 장식하기도 하니까요.
그 모습은 도저히 흉악한 망명자처럼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그들도 우리와 다르진 않았어요……
……
여기 한 송이 있습니다.
네? 아…… 성상 아래에 있는 저 꽃을 말씀하시는 거죠?
저도 봤어요. 행운의 꽃이네요. 마침 무너진 성상 밑에 가려져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아쉽게도 제가 찾던 그 꽃이 아니에요.
어째서죠?
이 꽃을 보세요…… 그래도 모르시겠어요?
성상 밑에 숨어 겨우 살아남았지만, 줄기는 부러지고 꽃잎은 불에 그슬려 이미 상처투성이에요.
그래도 살아 있잖습니까.
글쎄요, 진짜 살아 있을까요?
저도 예전에는 비바람에도 꺾이지 않고, 어떤 위험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들이 어딘가에 존재한다고 믿었습니다. 비웃지 말아 주세요…… 그때는 진심으로 믿었으니까요.
그 시절에도 결코 풍족한 삶은 아니었지만, 모든 게 잘 되어 갔거든요.
조금이라도 여유가 생기면 니나 아주머니는 아이들한테 디저트를 만들어 주곤 했어요.
허브 피첼레라고 들어보셨습니까?
니나 아주머니와 하이먼이 라테라노에서 가져온 레시피로 살카즈가 재배한 바닐라까지 넣어 만든, 남녀노소 모두 좋아하는 수도원에서만 맛볼 수 있는 디저트예요.
니나 아주머니는 늘 어른들은 고생해서 쓴맛을 봐도 상관없지만, 아이들은 '쓴' 맛을 알아서는 안 된다고 하셨죠.
아이들은 '단' 맛을 알아야 한다면서……
……그 디저트는 기억해 두도록 하겠습니다.
하하, 이젠 중요하지 않습니다. 단맛을 잊은 지 너무 오래됐어요……
이제는 허브 피첼레 같은 걸 만들려는 사람은 없겠죠.
페데리코 씨, 가끔 궁금할 때가 있어요.
산크타가 특별하지 않았더라면, 라테라노에 사는 게 온통 저처럼 평범하고 보잘것없는 사람들이었다면……
그 신성한 도시는 지금도 계속 같은 모습이었을까요?
라테라노는, 여전히 그 라테라노일까요?
……저도 모르겠습니다.
아쉽군요.
클레망 씨, 당신은……
이미 믿지 않고 있군요…… 설마 생각이 바뀐 겁니까?
저는 현실을 마주하지 않을 수 없을 뿐이에요.
많은 것들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튼튼하지 않아서, 시련이 찾아오면 바로 상처를 받게 됩니다.
약간의 흠집만 있어도, 약간의 이물질만 섞여도, 아무리 눈에 띄지도 않는 상처라고 해도…… 더 이상 아물 수도, 다시 되돌릴 수도 없게 되죠……
당신이 발견한 그 꽃처럼요, 페데리코 씨.
여기엔 제가 원하는 꽃이 없습니다.
……
조회 시간이 다 됐네요. 전 이만 가봐야겠어요.
안녕히 계세요, 페데리코 씨.
……
페데리코 잘로는 새벽녘의 성당에 홀로 남겨졌다.
화재의 흔적은 간단하게나마 정리됐지만, 진열품들이 사라져 텅 빈 성당 안은 발소리만 울려 퍼졌다.
페데리코는 공증소의 훌륭한 집행자다. 집행자가 된 지 올해로 6년째가 되지만, 그는 이미 모든 일을 능숙하게 처리했다.
동시에 올해는 성도라는 직함을 받은 첫해인지라, 그에게 조언이나 가르침을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침묵한 성도는 줄기가 부러지고 꽃잎이 불에 그슬린 그 꽃을 주워들었다.
성상의 가호를 받아 불길에 휩싸일 운명에서 벗어난 꽃, 어쩌면 기적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눈에, 이런 기적은 아무런 가치도 없었다.
꽃은 아직 여기에 있는데……
원하는 꽃은, 아니다?
아물 수 없는 상처……
이해할 수 없군요.
……
라테라노는, 여전히 그 라테라노일까……?
…………
참고할 만한 데이터가 부족해서 원하는 답안을 얻을 수가 없군요.
이때, 집행자 페데리코는 문득 깨달았다……
클레망의 표정이 지나치게 평온했다는 것을.
그는 제럴드의 죽음도, 다른 살카즈에 대한 계획도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클레망 자신은?
행동을 수반하지 않는 말에는 아무런 설득력이 없다. 그래서 그가 반드시 진실을 찾아낼 거라고는 말하지 않았던 것이다.
제럴드의 마지막 소원을 꼭 들어주겠다고 말하지도 않았다.
페데리코는 너덜너덜해진 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모든 의문이 이 꽃에서 답을 얻을 수 있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음……하아아아……
아침이야…… 타라, 일어나……
음, 으으으으, 하아……
에렌, 에렌! 빨리 일어나, 에렌……
일어나 봐! 엄마, 엄마가 어제 왔다 갔어!
응?!
엄마? 어디, 어디?
응! 분명 엄마가 맞아. 봐봐……
우와! 이건 엄마가 우리한테 주려고 가져온 새 담요일까? 좀 너덜너덜하지만……
그래도 여기 동그라미가 있어! 그리고 날개 달린 작은 사람도…… 응, 틀림없어! 엄마가 전에 가져올 거라고 약속했던 거야!
좀 너덜너덜해지면 어때, 우린 착한 아이니까 엄마의 마음을 이해해야지. 엄마의 옷도 너덜너덜해졌잖아……
그래, 나도 알아!
페데리코 형을 찾으러 가자!
오늘도 페데리코 오빠랑 같이 놀 수 있는 거야……?
바보야, 페데리코 형한테 엄마가 저녁에 왔다 갔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안심시켜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