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W-ST-4미래의 문을 열어
여느 때와 같이 태양이 떠올랐고, 모든 게 그대로인 듯하다. 하지만, 미래는 이미 우리에게 길을 열어 주었다.
등장 오퍼레이터: 사일런스, 뮤엘시스, 내스티, 사리아, 사일런스 더 패러디그매틱
……
……
특별구 감옥의 규정엔 펜을 포함한 모든 날카로운 물건의 사용이 금지돼 있을 텐데. 자넨 규정을 위반한 걸세.
선글라스도 금지입니다. 블레이크.
우리가 수감된 첫날에 말했을 텐데요, 날 방해하지 말라고. 내게는 해야 할 중요할 일이 있다고요. 지난 며칠 동안 잘해줬잖습니까.
계속 그렇게 부탁드리죠.
……
젠장, 원고지를 또 다 썼잖아…… 뒷면에는 아직 더 쓸 수 있겠군.
블레이크, 부탁 하나 하죠. 교도소장한테 원고지 좀 더 달라고 해주세요. 컬럼비아 학계에서는 당신의 공헌에 고마워할 겁니다.
자네 대체 뭘 하려는 건가?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퍼디낸드.
컬럼비아의 법률은 절대 자비롭지 않아. 우리의 마지막을 조용하게, 얌전히 기다릴 수는 없는 건가?
그렇게까지 바쁘게 보내고 싶은 거라면, 죽기 전에 뭘 먹을지 메뉴나 생각해 보는 게 어때?
당신은 내 시간을 2분이나 낭비했어요. 블레이크.
……방금 어디까지 추론했었죠?
마지막 식사 메뉴까지.
본인이 매우 웃기다고 생각하나 보군요? 당신은 지금 제가 하는 일이 얼마나 의미 있는 일인지 전혀 모르고 있어요.
앞으로 100년 동안 고에너지 물리학 분야에 발을 들여놓으려는 모든 연구자들은 저의 이 이론을 명심해야 할 겁니다.
그들은 내 이름을 기리며, 나를 왕처럼, 선지자처럼 여기게 되겠죠.
죽음? 죽는 게 뭐 대수입니까?
기다려, 기다리라고, 크리스틴. 넌 자신이 대단하다고 생각하나?
그 진리들을 대지로 가져갈 사람은 이 퍼디낸드 클루니야, 멍청한 것아!
안녕하십니까, 건강해보여서 다행이군요.
물론이지. 모두 당신 덕분이야.
얼마 전 트리마운츠에 안 좋은 소문이 돌긴 했지만…… 지금은 다 지나간 일이지.
우리 컬럼비아에 당신과 같은 훌륭한 법 집행자가 많이 계신다는 것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곧 승진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주 지방 검사라는 직위는 당신에게 아주 잘 어울릴 것 같네요.
당신의 사업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라인 랩에서 기술 방면의 투자를 확대함과 동시에 다양한 분야의 소형 실험실 열 몇 개를 인수했다던데…… 하하하, 예전 같으면 이런 금융 뉴스엔 전혀 관심이 없었을 텐데 말이야.
하지만, 지금은 저스틴 씨와 같은 친구가 있으니, 나도 예전처럼 매일 쇠창살만 멍하니 쳐다보고 있을 순 없지.
좋은 투자처를 추천해 드리죠.
당신이 자신의 운명을 잡으려고 하는 걸 볼 수 있어서 매우 기쁩니다.
그런데, 제가 이번에 찾아온 건 중요한 일들이 있어서예요.
저 둘을 말하는 건가? 위에선 이미 연락 받았어.
마음대로 해, 저스틴 씨.
그리고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잘 부탁해.
잘 부탁드립니다.
그런데 하나 묻고 싶은데, 대체 누굴 데려가려는 거야?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미치광이와 괴짜죠.
너도 왔구나, 내스티.
이미 해체된 컴포넌트 총괄과의 명의로 임시회의 통지를 보내다니…… 아직 보름밖에 안 지났는데 벌써 라인 랩을 재정비하러 온 사람이 있다는 건가?
라인 랩뿐만이 아니야, 볼보트 코친스키, 파라솔…… 이 도시 내 최고의 첨단기술 회사 전부가 회의에 참가하라는 통지를 받았고, 모두 대표를 파견했어.
누가 이 회의를 소집했을 것 같아?
조금 있으면 알게 되겠지…… 머리 기대지 마, 어깨가 다 젖잖아.
내스티가 눈살을 살짝 찌푸리자, 허리의 마른 가지 모양의 장치가 갑자기 뻗어 나왔고, 뮤엘시스에게 닿는 순간, 기포가 터지듯 상대방은 시야에서 사라졌다.
또 이런 장난칠 기운이 생긴 걸 보니, 넌 참 회복이 빠른 것 같아, 뮤엘시스.
수분 부족은 내게 그다지 심각한 병이 아니라서 말이야, 그러니 치료도 어렵지 않지.
네 정신 상태를 말하는 거야.
네가 충격을 받아 좌절하고, 엉엉 울면서 어느 숲속으로 숨을 줄 알았거든.
……어떤 친구가 그러더라고. “생명이 사라질 때까지 경험하는 모든 것엔 반드시 의미가 있어.”라고.
너는 여전히 감정적이구나. 누군가가 달래줘야 하다니.
아니야, 내스티. 나는 그저 냉정하게, 내가 간과하고 있었던 것들을 깨달았을 뿐이야.
오늘 이곳, 네 곁에 있는 건 라인 랩 생태과의 주임이자, 라인 랩의 최연소면서 가장 권위 있는 생태학 전문가야.
무슨 뜻이야?
크리스틴이 내게 스텔라리아의 미니 생태원 생물 데이터를 넘겨줬어……
753종의 식물은 모두 죽을 수도 있었어. 하지만 죽기 전까지 그것들은 차단층 옆에서 충분히 오랜 시간 생존해왔고, 심지어 별깍지를 뚫은 후에도 전부 다 바로 죽진 않았지.
그건 테라인이 생명이 닿을 수 있을 거라고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고도였어.
……얼마나 기뻐할 만한 실험 결과인데.
내스티, 당신의 꿈이 뭔지 알고 있어.
……
(살카즈어) 하늘은, 살카즈에게 허락된 땅이기도하지.
이번에 스텔라리아가 공중으로 발사된 이후의 모든 데이터를 수집했지?
맞아…… 그날 나는 충분히 가까이 있었으니까.
에너지가 튀며 일으킨 그 불꽃은, 마치 미래의 톱니바퀴가 돌 때의 불꽃같았어.
즉, 그 데이터는 더 크고, 더 안정적이며, 더 많은 공중 플랫폼 연구에 사용되기 충분하다는 거야.
아니면, 이미 시작된 건가?
……그건, 도시의 새로운 형태가 될 거야. 아무도 이동도시가…… 땅 위만을 기어다녀야만 한다고는 하지 않았어.
그리고 난, 이 도시에 생기를 불어넣을 수 있지.
이제 우린 목표가 같네. 당신 말을 빌리자면, 우린 '동행자'야.
가자, 회의가 곧 시작될 거야.
……올리비아 사일런스 씨, 인증 통과했습니다. 들어가시죠.
사리아 주…… 인증 통과했습니다. 들어가시죠.
……
……
사일런스와 사리아가 앞뒤로 긴 복도를 지나가는 동안,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고, 그곳에는 침묵만이 가득했다.
두 사람은 회의실 입구에서 멈춰 섰다.
사리아, 물어볼 게 있으면 직접 물어봐.
정말 준비가 됐나?
네가 상처를 치료하는 동안, 충분히 잘 생각한 줄 알았는데.
……
과학은 사회를 바꾸기 위해 존재하지. 난 이 점을 의심하지 않아.
그렇기 때문에 난 총괄이 한 행위의 의의 역시 인정해. 저 찢어진 하늘에 흔들리지 않을 과학 연구자는 없겠지.
하지만 우리가 직면한 진짜 문제는…… 그 이후엔 어떻게 할 건지에 대해서야.
하늘의 한 귀퉁이가 찢어지고 진상이 모두의 앞에 드러났어. 우린 그걸 무시할 이유가 없지. 설령 모두가 고개를 든다고 해도 발밑의 문제가 사라지는 건 아니야.
과학이란, 기존의 인지 체계가 전복되는 순간, 앞으로 나아가던 발걸음이 멈추는 게 아니라 오히려 빨라지게 되지.
무수한 구상이 실패했지만, 새로운 환상은 그 시기마다 생겨났어. 과학자들은 하늘의 구름 조각을 뜯어내려 할 거고, 현재를 사는 평범한 이들은 늘 비를 맞게 되겠지.
“현실이 이렇기에, 우린 그걸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라느니, “꿈을 좇는 길에는 늘 희생이 따르기 마련이다”라느니…… 이런 말들, 우리 질릴 정도로 들어왔잖아.
바꿀 수 없는 현실도, 당연한 희생도 없어.
만약 대부분의 사람들이 꿈과 현실 사이에서 부득이하게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요받고 있는 거라면, 내가 꿈과 현실을 잇는 다리가 되어주겠어.
윤리 심사, 자금 관리, 프로젝트 평가…… 나는 질서의 고삐를 조이겠어. 과학자들이 보기엔 진부하고 융통성 없는 수단으로 그들을 제한할 거고.
나는 과학자들의 진로를 감시하는 감시카메라가, 완충대가, 분기기가 될 거야…… 아무튼, 뭐 정당한 '악당'이 될 거라는 소리지.
나는 과학이 모든 사람들에게 닿을 수 있게 만들 거야.
……
사일런스, 네가 어떻게 트리마운츠의 과학기술계 전체를 바꿀만한 힘을 얻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명심해라……
정부 세력이든, 메이랜더든, 놈들이 널 선택한 것은 너의 그런 우려와 열정 때문이 아니다.
나도 알아, 하지만 목표가 같다면……
나는 기꺼이 받아들이겠어.
……
사일런스가 문고리를 잡았다.
그러다 갑자기 멈춰 서서는 사리아 쪽으로 돌아섰다.
사일런스의 그 시선은 사리아조차 순간 눈을 피하려 할 정도로 뜨거웠다.
사리아, 이게 바로 네가 예전에 하려고 했던 일이야. 설마 잊은 거야?
만약 네가 망설이고 있다면, 아니, 이미 포기한 거라면……
내가 할게.
수십 개의 시선이 사일런스에게 쏠렸다. 솔직히 모두에게 주목받는 감각은 그다지 기분 좋은 느낌이 아닐 것이다.
사일런스는 깊게 숨을 들이쉬고는, 그들의 놀라움, 당황스러움 혹은 조롱 섞인 시선을 하나씩 넘겼다.
잠시 후 그녀는 회의실 안으로 한 걸음 내딛었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저는 올리비아 사일런스, 《트리마운츠 과학 윤리 공동 선언》의 발의자입니다.
오늘 제가 이 자리에 서게 된 건……
감사합니다, 의장님……
아닙니다. 당시 저는 랭크우드에서 페니 씨에게 오디션 기회를 제공했을 뿐, 이번에 주신 도움에 비하면 언급할 가치도 없는 하찮은 일이죠……
……글쎄요, 그 아이는 각 회사의 대표들이 내뱉은 침에 잠길지도 모릅니다. 그저 그 아이가 그런 상황에 잘 대처할 수 있길 바랍니다. 앞으로 이것이 그 아이의 일상이 될 테니까요.
이런 걱정이 불필요할 수도 있죠. 아이들은 항상 용기를 잃지 않고 달리는 것도 빠르니까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아이들과 함께 여기까지 와 주는 것뿐입니다……
하하, 당신 말이 맞아요. 말씀처럼 걱정이 많은 노부인이 돼버렸네요.
……다음 달 골프 모임이요? 죄송합니다, 이번엔 함께하지 못할 것 같군요.
네, 의장님, 제게는 더 이상 라인 랩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게다가 이미 정년도 지났고요……
……이번엔 긴 여행이 될 것 같네요.
야라 씨, 정말 죄송합니다만 길을 잘못 들었습니다. 방금 인근 주민에게 물어보니 지금 방향을 틀면 가장 가까운 이동도시에서 쉴 수 있을 거랍니다.
됐어, 그냥 계속 가지.
네?
그러면 야라 씨의 일정에 차질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내가 방금 차 안에 있는 지리 잡지를 뒤져봤는데, 앞으로 십여 킬로미터 더 가면 와이러니가 있을 거야.
그곳의 와인 맛이 아주 좋다고 적혀있기도 하고, 특정 업체를 통해서만 한정 공급받는 걸 고집하며, 수십 년 동안 포도밭 재배 규모를 확대하지 않고 있다는데…… 그래서 좀 궁금해졌어.
라인 랩 일로 트리마운츠의 사람들이 모두 초조해하니, 빨리 떠나고 싶어 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퇴직한 사람을 그렇게까지 곤란하게 만들 사람은 없을 거야…… 게다가 경치도 좋으니까.
멀리서 바람이 불어왔고, 야라는 안경을 다시 쓰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구름이 빠르게 걷히며 별 하나가 황혼 속에서 희미하게 나타났다. 하늘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높고 아득했다.
잠시 후 야라는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기사는 그녀가 자기를 부른다고 생각하고는 서둘러 문을 열었다.
……여행이 순조롭길.
가자.
스텔라리아의 서비스 모듈 폐쇄.
스텔라리아의 관측 브릿지 폐쇄.
스텔라리아의 생태 구역 폐쇄.
5일 8시간 43분…… 테라의 시간 계산 방식에 따르면 스텔라리아는 차단층 돌파 후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오랜 시간을 버티고 있어.
그러나 머지않아 테라의 최첨단 과학기술이 응축된 이 선실도 먼지가 되겠지.
스텔라리아는 애초부터 성간 비행에 필요한 기술과 조건을 갖추고 있지 않았으니까. 내스티가 제출한 설계도를 프리스턴에게 보여줬을 때 그가 코웃음을 쳤던 기억이 나네.
이제 난 로켄이 개발한 생명유지 휴면 캡슐에 들어갈 거야. 지상에선 실제 테라 밖의 환경을 시뮬레이션할 수 없으니, 내가 얼마나 오래 살 수 있을지는 나도 모르지만.
……
스텔라리아의 천문관 폐쇄.
스텔라리아의 전역이 폐쇄되었습니다. 생명유지 휴면 캡슐이 5분 후에 가동됩니다. 준비해 주세요.
……
'우주'…… 프리스턴으로부터 처음 이 개념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이렇게나 넓고 웅장하며, 아름답고 감동적인 광경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어.
……그것은 우리의 시야를 초월했고, 우리의 빈약한 상상력을 초월했으며, 언어로 정확하게 묘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야.
자료로 이 음성밖에 남길 수 없다는 게 아쉬울 뿐이야.
여기선 색깔조차 구분할 수 없는 끝없는 하늘 아래, 우리의 '테라'는 별의 먼지로 둘러싸여 있어. 그것은 지렛목도 밧줄도 없이 쓸쓸하게, 당연하다는 듯 돌고 있지.
별들은 하나가 되었고, 거리, 크기, 모양에 관한 그 어떤 측정도 모두 무의미해. '우주'의 심오함은 말을 잃을 정도로 깊고…… 경외감을 느끼게 하지.
육안으로 관찰할 수 있는 별들은 테라와 비슷해. 한때 밤하늘을 수놓았던 별들은 우리와 같은 존재인 거지.
저 위에도 생명이 존재하고, 똑같이 뜨겁게 사랑하고 미워하며, 끔찍한 재앙이 발생하고 위인의 원대한 계획과 낭만, 평범한 몸부림과 견수가 반복되고 있을지도 몰라.
문명의 창조와 파멸이 그 별의 역사를 써 내려가고, 수많은 웅장하고 아름다운 기적, 빛나는 이름, 그리고 부풀어 오른 지위가 주석을 더하다가, 결국엔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겠지.
저들도 '우주'의 존재를 알고 있을까? 우리의 적이나 이웃이 되는 걸까?
……
만약 그럴 수 있다면, 모두가 이 장소에서 '우리'를 이해해야 해. 우리가 살고 있는 땅과 하늘, 바다를……
자신이 인류 역사의 어떤 위치에 있는지, 그리고 전체 인류 역사가 우주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알아야 해.
그것을 깨달아야만 우리는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 고민할 자격이 주어질 거야.
생명유지 휴면 캡슐이 1분 후에 가동됩니다. 자리해 주십시오.
다시 한번 안내해 드립니다. 생명유지 휴면 캡슐이 1분 후에 가동됩니다. 자리해 주십시오.
휴면 전 마지막 기록: 생명 징후 정상, 기분도 비교적 안정적…… 선실 내 이 화초들이 아직 살아 있다니, 정말 기쁜걸. 뮤엘시스가 더 이상 이것들의 데이터를 수집할 수 없다는 것이 조금 안타깝네.
크리스틴은 일생에서 단 두 번, 자신이 정말 살아 있음을 느꼈어.
첫 번째는 사리아, 너를 내 고향으로 데려가 너에게 모든 것의 시작을 털어놓았던 때. 두 번째는 나와 부모님의 꿈을 이룬 바로 지금이야.
이후에 발생한 일들은 모두 처음의 연장에 불과하지.
날씨가 맑은 밤이면, 시야가 탁 트인 곳을 찾아 망원경을 설치해 봐. 하늘에 별 하나가 널 위해 반짝일 거야.
……
그럼, 잘 자. 테라의 여러분.
잘 자, 우주.
“천년만년이 흐른 뒤, 인간이 뭇별의 곁을 거닐게 되는 때가 온다면, 사람들은 필시 그녀의 이름을 칭송하리라.”
“당신은 누구야”
“아무런 의미도 없는 수호자일세. 그저 다시는 깨어날 수 없는 혈족과 동포와 친구들을 지키고 있지.”
“이건 뭐야?”
“자네의 상상을 아득히 뛰어넘은 생명 유지 장치일세. 자네들이 알고 있는 오리지늄 에너지에 의존하지 않는. 하지만 수만 년이란 시간 동안 이미 충분히 닳고 닳아, 지금은 그저 과거 망자들의 관짝에 불과하지.”
“왜 당신은 인간처럼 느껴지는 거지?”
“가장 어두운 나날 속에, 인간성만이 나의 철저한 파멸을 막아줬기 때문이지. 내게는, 끝없는 고통이나 다름없지만.”
......
“하늘은 가짜야?”
“다는 아닐세. 차단층 때문에 테라가 뭇별을 향해 돌진할 수 없을 뿐. 빛마저 왜곡되어 사람들이 세계의 의미를 정확하게 인지할 수 없기에 그렇다네. 다만, 별이 존재한다는 것엔 의심의 여지가 없지.”
“우주는 어떻게 생겼어?”
“아주 흥미로운 질문이군. 빛을 포착하는 모든 생물이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볼 때면, 그 거대한 별바다에 정복되고 말지. 웅장한, 미지의, 아름다움에. 하지만 내 눈에는 파멸과 차디찬 쓸쓸함과도 같을 뿐이네.”
“모든 별은 테라랑 똑같아?”
“아니, 테라가 훨씬 작다네. 하지만 테라보다 수천만 배나 큰 4호 항성도 조베이드 성운의 거대한 블랙홀을 만나면 먼지처럼 사라지고, 심지어는 탈로스 밖에 있는 위성군이 이런 행성의 지형 환경도 바꿀 수 있지.”
......
“산크타는 왜 광륜과 날개가 있는 거야?”
“냉정한 지휘체계가 그것들에 신분의 정체성을 부여했을 뿐. 자아의식이 없는 기계가 신이라는 이름으로 가동되어,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사명을 수행하고 있지. 이건 위험한 것일세.”
“버든비스트를 본 적이 있어?”
“소위 버든비스트라고 부르는 그 생물은 진화 속에서 큰 변화를 이루지 못했네. 그것들의 굳건함이야말로 행성과도 같지. 사람들은 그것들을 겸손하게 대하고 존중해줘야 마땅하네.”
“바다 여행은 어떤 느낌이야?”
“자네에겐 내가 시뮬레이션해 낸 느낌밖에 말해줄 수 없네. 행성을 가로지르는 바다는 마치 자신을 감싼 파란색 스카프와도 같다네. 다만, 이 빛나는 파란색이 순식간에 사라질 뿐이지.”
......
“크리스틴.”
“말해.”
“이 모든 걸 알았음에도, 여전히 목숨을 대가로 하늘을 찢을 생각인가? 테라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네. 자네의 죽음 또한 이성적으로 보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이야.”
“그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내가 마지막으로 하나만 물어볼게.”
“그러게.”
“우리의 사업, 우리의 도시와 터전, 아름다운 예술과 잔혹한 역사……”
“고난, 전쟁, 재앙과 모든 걸 파괴하는 오만, 사고와 이상, 주어진 위대함과 타고난 평등, 이 보잘것없는 광야에 탄생한 문명과 우리가 열심히 사랑했던 모든 것들……”
“……그것들의 유일한 의미와 생명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건, 과연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