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ST-4봉합
문명과 야만의 충돌은 결코 끝나지 않았다.
으, 꼬리가 젖었잖아.
여긴 정말 하나도 변한 게 없네. 지저분한 거리에, 짜증 나는 비까지도.
목숨을 앗아갈 수도 있는 우르수스의 눈보다, 여기 비가 더 불쾌한 이유는 뭘까.
선생님 집에 드라이기 있었으면 좋겠다……
선생님의 집은 바로 이 골목의 끝에 있다. 당시 크라운슬레이어는 본인을 뒤덮고 있는 먹구름에 복수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강해졌음을 증명하기 위해 이곳을 떠났었다.
그리고 지금 류드밀라는 다시 돌아왔다. 자신의 노력으로 흐린 하늘에 약간의 균열을 만들어낼 수 있을지는 그녀 본인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사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을 수도 있고, 또 어쩌면 류드밀라는 그저 더 큰 재난을 불러오는 공범자가 되었을 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류드밀라는 이곳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으며, 본인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선생님께서 분명 알려주실 거라고 생각했다.
별안간 류드밀라는 오한을 느꼈다.
류드밀라는 다시 선생님을 마주할 생각에 긴장돼서 그런 건 줄만 알았다.
그러나 이내 자신의 생각이 틀렸음을 알게 되었다.
류드밀라는 자신의 몸이 걷잡을 수 없이 떨리고 있음을 느꼈다.
선생님!!
진동하는 피비린내.
류드밀라의 선생님은 고개를 뒤로 젖힌 채 바닥에 쓰러져 있었고, 그녀의 몸에서는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옆에는 단검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류드밀라는 여전히 피를 흘리고 있는 선생님에게 다가가 상처를 눌러 지혈하려고 했지만, 자신이 한 발짝도, 심지어 시선조차 움직일 수 없음을 깨달았다.
류드밀라는 익숙하면서 무서운 기운이 그림자 속에서 나타나는 것을 발견했다.
빨간 후드티를 입은 회색 머리의 늑대.
진랑은 죽었다. 레드는, 할머니의 말을 들었다.
……너였어?
너…… 무슨 짓을 한 거야……
레드는 울프 헌터다. 레드는 할머니의 말을 듣는다.
진랑은 죽었다. 진랑은 저항하지 않았다.
너!!
죽여버리겠어!
어…… 레드는, 켈시에게 늑대만 죽이겠다고 약속했다. 너는 늑대가 아니야.
그런 건가, 이 여자가 너의 켈시인 건가? 어쩐지 너한테서 늑대 냄새가 났어.
하아…… 하아…… 선생님은 분명 더 이상 싸울 수 없었을 텐데, 넌 왜 선생님을?!
할머니가 그랬다, 그게 게임의 룰.
이제, 이 여자는 탈락이다.
레드는, 이제 간다. 다른 늑대 찾아야 해. 놈들이 근처에 있다.
(킁킁)
그런데, 또 다른 늑대 한 마리도 탈락했다. 레드보다, 더 빠른 놈이 있는 걸까?
거기 서!
빨간 후드티를 입은 늑대는 류드밀라의 부름에도 아무 대답 없이 박자 하나 맞지 않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경쾌한 발걸음으로 류드밀라 옆을 지나갔다.
류드밀라는 손을 반쯤 뻗었다가 공중에서 멈췄다.
류드밀라는 문득 예전에 선생님이 하셨던 말씀이 떠올랐다.
“류드밀라, 내 제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니?”
“나는 이미 불구가 되어 큰 쓸모가 없을 거란다. 그럼에도 기꺼이 나의 제자, 그리고 나의 도구가 되어주겠다는 거니?”
“얘야, 우린 둘 다 후회하게 될 거란다.”
류드밀라는 바닥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희생자의 고통을 삼켜라……”
역시 카테리나 씨가 오랫동안 준비해온 작품은 다르다니까.
극 중에서 첼리니아는 완벽한 시라쿠사인의 모습이었는데, 설마 마지막에 그 모습을 시라쿠사인이 만들어낸 환상으로 풀어낼 줄이야.
하지만 소문으로 들은 첼리니아는 완벽한 이미지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공통의 상상에 의한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도 꽤 합리적인 것 같아.
마지막에 첼리니아가 실존 인물이 아니라고 표현한 그 대목은 정말 소름 돋았어.
정말 의미심장한 결말이었지.
얼마 전 일어난 그 라디오 방송 사고랑 그 후의 혼란 때 나는 볼시니가 이대로 끝나는 줄만 알았어.
하지만 지금 이렇게 훌륭한 작품을 볼 수 있다니, 하아, 역시 살아 있는 보람이 있네.
그러게 말이야.
에휴, 나는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니까.
그런데 설마 그렇게 끝날 줄이야.
이봐, 넌 신도시로 이사 갈 생각 없어?
상황 봐서. 만약 신도시에도 카테리나 씨의 작품이 있다면 나도 이사를 가겠지만.
어쨌든…… 패밀리가 없는 도시는 여태까지 상상해본 적이 없기도 하고.
그러고 보니…… 너 그거 들었어?
카테리나 씨가 새 작품을 준비하고 있는 것 같다던데.
새 작품?
그래, 제목만 들어도 꽤 흥미롭다고.
제목이…… 《시라쿠사인》이래.
한 삽, 그리고 또 한 삽.
공원묘지에서는 레온투초가 힘껏 무덤을 파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관이 놓여 있었고, 그 안에는 그의 아버지 베르나르도가 있었다.
오늘은 한때 벨로네 패밀리의 보스였던 베르나르도의 장례식 날이었다.
그는 열두 패밀리의 보스 중 한 명으로, 원래라면 장례식에 참석하는 사람들로 인해 묘지가 북적였을 것이다.
그러나 패밀리를, 도시를, 시대를 배신한 자의 장례식에는 아무도 참석하지 않았다.
레온투초는 라비니아와 다른 이들의 참석 역시 사양했다.
이것은 그와 아버지의 작별 인사였다.
아버지, 후세 사람들은 과연 아버지를 어떻게 평가할까.
새 시대를 연 사람으로 기억할까? 아니면, 구시대를 배신한 사람으로 기억할까?
어쩌면 그건 내가 앞으로 일궈낼 성과에 달려 있을지도 모르겠어. 하하.
내게 정말로 곤란한 문제를 남겨 놨네.
하지만 역시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해야 하나, 내가 이렇게 잘 이어받았으니까.
레온투초는 구덩이를 파면서, 한 편으론 마치 살아 있는 아버지를 대하듯 경쾌하게 말했다.
그렇게 하는 것 외에 그는 도저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참, 시칠리아 부인이 내 요구를 승낙했어.
새로운 이동도시에 패밀리는 없을 거야.
이걸로 아버지의 꿈도 일부 실현된 셈이겠지.
시칠리아 부인과 대화를 나눠보니, 나도 조금 이해가 됐어.
그 사람은 자신이 죽은 후에 시라쿠사가 어떻게 되든 전혀 개의치 않는 것 같았어.
시칠리아 부인은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에라도 시라쿠사가 평화롭기를 바랄 뿐, 시라쿠사에 미래는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지.
뭐랄까…… 시칠리아 부인은 통치자라기보다 구시대의 간수자에 더 가까운 것 같아.
시칠리아 부인이 내게 기회를 준 건, 그저 내가 내놓은 대답이 본인에게 시도해볼 만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어.
정말 무서운 존재야.
……어, 파는데 반나절은 걸릴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수월하네.
무덤의 크기는 충분했고, 관을 묻기만 하면 됐다.
레온투초는 관 앞까지 다가가 조금 망설이더니, 결국 손을 뻗어 밀기 시작했다.
관은 매우 무거웠고 혼자서 밀기는 많이 힘들어 보였다.
레온투초가 힘에 버거워하고 있을 때, 갑자기 누군가가 나타나 함께 밀어주었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드미트리가 눈에 들어왔다.
드미트리, 너……
드미트리는 아무 말 없이 그저 주머니에서 은빛으로 반짝이는 무언가를 꺼내더니 무덤 안으로 던져 넣었다.
회중시계.
이건 보스가…… 전에 제게 주신 회중시계입니다.
이제야 원주인에게 돌아가네요.
......
당신은 이미 제게 사과했습니다, 레온투초.
다만, 제가 당신을 용서한다고 해도 이번 소동에서 죽임을 당한 형제들은 당신을 용서하지 않겠죠.
벨로네 패밀리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저는 그들을 잊지 않을 겁니다.
네가 새로운 패밀리를 다시 조직한다는 얘기 들었어.
살아남은 사람들은 대부분 떠났지만, 그래도 남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도 보금자리가 필요하니까요.
설령 그게 당신 입장에선 시대에 뒤떨어진 패밀리라고 할지라도요.
……그것도 나쁘지 않네.
당신이 가는 길은 가시밭길이 될 겁니다.
알고 있어.
때가 되면, 저 역시 당신의 길을 막을 겁니다.
그것도 알고 있어.
그때까지 멋대로 죽지 마세요.
빗소리가 제법 요란했지만, 레온투초는 그래도 드미트리가 마지막에 자그마한 소리로 '레온'이라 부르는 것을 들었다.
너도, 드미트리.
레온투초는 고개를 들어 떨어지는 빗방울을 맞이했다.
……
이 가구들은 이제 쓸 일이 없겠죠.
벨로네 패밀리는 이제 존재하지 않으니까.
대다수 패밀리 멤버들은 이미 떠났어. ……보스의 배신을 받아들이기 힘들 테니까.
패밀리 통치의 정점에 서 있던 베르나르도가 패밀리의 존재 자체를 부정했죠.
우리가 한때 보물처럼 여겼던 것들도 부정했지.
영광, 믿음, 충성, 패밀리를 위한 공헌……
아버지는 패밀리 멤버 모두에게 이 규칙들을 지키라고 요구해놓고, 정작 본인은 그런 것들을 한 번도 믿어본 적이 없었던 걸까?
……모르겠습니다.
요 며칠 내내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과연 지금까지 난 진정으로 베르나르도 벨로네에게 다가간 적이 있을까.
델 알바 극단의 아트 디렉터는 위장이었고, 벨로네 패밀리의 용의주도한 보스 역시 위장이었죠……
그렇다면 내게 자신의 이상에 관해 이야기하며 미소를 짓던, 그 두 눈이 빛났던 베르나르도 역시 위장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요?
하지만 이제 상관없죠. 이젠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레온, 당신과 베르나르도는 이 신도시가 진정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게 해주었어요.
아마도.
……
이사 차량이 곧 도착할 거야.
……알고 있어요.
이 모든 것은 결코 헛수고가 아니에요, 레온.
알고 있어.
우린 신시가지에…… 아니, 지금은 신도시인가. 우린 그곳에서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 낼 거야.
시라쿠사에 없었던 새로운 것들을……
모두에게 속하는 질서를.
라비니아를 바라보는 레온투초의 반짝이는 눈에는 결의가 보였다.
문명.
태어나는 순간부터 모든 늑대는 자신의 존재가 황야의 상징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오랜 세월 수많은 싸움 끝에 그들은 지금과 같은 게임의 방식으로 늑대 두목을 선택하기로 했다.
자로에게 있어 이번 참패는 틀림없는 수치였다.
하지만 그들에게 끝은 없었다.
다음 게임이 시작되면, 그는 바로 다시 재기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이를 위해, 그는 이미 적임자 물색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는 곧 볼시니를 떠나 황야를 거니는 라플란드를 발견했다.
하지만……
하아…… 하아……
휴식은 충분해, 자로.
……
자로와 라플란드는 황야에서 3개월 동안 싸웠다.
그동안 자로에게는 이 미치광이의 목을 물어뜯을 기회가 수없이 많았다.
라플란드에게 자로를 이길 방법은 없었다.
하지만 자로는 날이 갈수록, 본인이야말로 라플란드를 절대 이길 수 없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라플란드의 피와 살은 그 어떤 사상에도 영양분이 될 수 없었고, 라플란드의 머리는 그 어떤 승리도 칭송할 수 없으며, 라플란드의 죽음은 그 어떤 의미도 없었기 때문이다.
라플란드는 그저 가득 채워진 빈 껍데기였다.
라플란드 역시 황야일까?
아니, 라플란드는 황폐다.
자로는 순간 깨달았다. 베르나르도의 배신이 예상 밖이긴 하지만 이해할 수 있는 선에 있었다면, 눈앞의 이것은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범주 밖에 있는 존재란 걸.
아니, 자로도 이런 인간을 본 적이 있다. 라플란드가 결코 유일무이한 건 아니었다.
그러나 라플란드는 그 중 유일하게, 이 유일무이한 순간에 그의 눈앞에 나타난 사람이었다.
이것은 일종의 전조였다.
이것은 일종의 부름이었다.
그렇게 수천 년 동안 황야의 상징이었던 자로는 처음이자, 어쩌면 마지막으로 한 인간에게 몸을 숙였다.
그는 미지를 향해 존엄을 내려놓기로 했다.
벌써 끝이야?
우리의 싸움은 천년만년 계속될 거다.
그 승부가 날 때까지 네놈과 동행하지.
하, 마음대로 해.
라플란드는 힘없이 무기를 땅에 버렸다. 그녀의 몸은 이미 감각을 잃은 지 오래였다.
라플란드가 쓰러지기 전, 자로는 다가와 당연하다는 듯이 자신의 몸으로 그녀를 지탱해주었다.
텍사스, 우린 시라쿠사를 파멸시키기 위해 서로 다른 길을 택했어.
기대하고 있을게, 다시 너와 만나는 그날을.
라플란드는 두 눈을 감고 깊은 잠에 빠졌다.
광활한 평원에는 다른 생명체가 없었다. 마치 이 순간만큼은 천지간에 인간 한 명과 늑대 한 마리만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야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