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격
와이너리의 일꾼들 모두가 원치 않지만, 루피나는 경영난에 시달리고 있는 가문의 와이너리를 결국 팔아넘기로 한다.
등장 오퍼레이터: 벨로네
루피나 씨, 저희 살루초 와이너리에서 매입할 포도 목록과 가격 명세서입니다.
확인 부탁드립니다.
알겠어, 한번 볼게……
음, 별문제 없네. 엘리오 씨는 늘 꼼꼼하다니까.
……과찬입니다.
……루피나 씨…… 저기…… 이런 질문을 해도 될지 모르겠는데요.
뭔데, 갑자기 왜 그렇게 진지해?
부담 갖지 말고 물어봐. 우리 알고 지낸지도 얼만데, 그렇게 서먹하게 굴지 않아도 되잖아.
아시다시피, 카시미어 와인이 뉴 볼시니 시장에 들어온 이후로……
루피나 씨네 포도밭에서 재배한 포도가 점차 여유분이 생기면서 저희가 그것을 매입하기 시작했고, 덕분에 저희에게도 보탬이 됐습니다만……
당신들이 가격을 잘 쳐줬잖아. 나도 재고를 줄일 수 있었으니, 서로 이득이지. 아주 좋은걸.
그렇죠. 하지만 이번에…… 포도 양이……
왜? 너무 많아?
아니요, 저희의 생산 규모로는 포도가 많을수록 좋습니다. 하지만 루피나 씨네 와이너리에서 앞으로 생산에 쓸 원재료를 하나도 남겨두지 않으신 게 아닌가 해서요.
……
눈치챘구나?
……루피나 씨……
사실…… 우리 베르디 와이너리가 얼마 전에 '골든 플레인'의 제안을 받았거든.
우리 와이너리를 인수하고 싶다고 말이야. 그리고 제시한 가격이…… 도무지 거절할 수 없는 금액이었어.
우리 와이너리는 상황이 계속 안 좋았어. 물론, 다들 어떻게든 팔아보려 발버둥치고는 있지만……
그런데 '골든 플레인' 쪽에서 먼저 찾아왔다는 건, 적어도 우리 와이너리의 설비와 포도밭이 아직 가치 있다는 뜻이잖아. 뭐, 이것도 내게는 좋은 일이라고 생각해.
베르디 와이너리와 살루초 와이너리의 협력은 늘 즐거웠어. 엘리오 씨, 그간 챙겨줘서 고마웠어.
……
하지만…… 와이너리의 다른 분들은 동의하신 겁니까? 다비데 씨는 뭐라고 하시던가요? 니콜로 씨는요? 그분도 동의하셨나요?
……내가 어떻게든 설득할 거야.
……
나는 동의 못 해, 루피나! 베르디를, 우리 와이너리를 어떻게 카시미어인에게 팔아넘길 수 있어?!
일단 진정해, 니콜로. 여기 앉아, 같이 뭐라도 먹고 마시면서 천천히 얘기하자.
이건……
우리 와이너리의 시그니처 '산지오베제'야. 당신이 제일 잘 알잖아, 안 그래?
……그래. 이 라벨…… 네 할아버지인 베르디 영감이 손수 그린 거였지.
영감이 이 와인을 완성했을 당시, 와이너리의 모든 포도를 돌본 게 나였어!
포도나무를 하나하나 가지치기 한 게 나였다고! 겨울에 쓰는 전지가위는 너무 딱딱하고 힘도 잘 안 들어가서, 그 추운 겨울 동안 내가 밖에서 일하느라 엄청 고생했는데.
그래도 저 포도나무들이 우리 나이를 다 합친 것보다도 더 오래 살았다는 걸 생각하면, 그만큼 공들일 가치가 있는 일이라 생각했지.
지금 카시미어에서는 가지를 다 기계로 치는데, 포도밭 전체 작업을 끝내는 데 하루도 안 걸린다더라.
그거랑 같아? 그 멍청한 기계들은 포도 덩굴을 마구잡이로 잡아끊을 줄밖에 몰라. 물론 당장은 빨라 보이겠지. 하지만 그렇게 가지를 치면 포도나무가 몇 년 못 살아.
덩굴이 뻗는 방향에 맞춰 다듬어서 열매에 햇볕이 더 들게 해야 맛도 살아나는데, 그놈들이 그런 걸 알 리가 없지……
너희 같은 젊은이들은 시라쿠사 전통 기술에 대해 전혀 모르는 데다가, 배우려는 사람도 없어.
시라쿠사의 와인이 특별한 건, 와이너리의 포도나무 한 그루 한 그루가 이곳의 가족만큼이나 오래됐기 때문이야.
하아…… 포도나무를 돌보는 것과 가족을 꾸리는 건 똑같은 일이야. 적어도 네 할아버지 때는 그랬지.
니콜로……
잘 생각해봐, 루파. 베르디 와이너리의 포도 한 알 한 알이 다 네 할아버지보다 나이 많은 나무에서 열리는 거야.
우리같이 늙은 일꾼들도 한평생 포도를 따고, 나무통을 나르고, 와인을 빚어왔지.
내 아들이 내 기술을 이어받았고, 내 손녀까지도 와이너리의 와인을 팔고 있잖아.
그런데 와이너리가 팔리면, 우리는 다 어디로 가야 하는데?
다들 앞으로 어떻게 할지도 내가 고민 중이야. 어떻게 쌓은 기술인데, 헛되게 만들 수는 없잖아.
난…… 하아! 루파, 와이너리를 팔면 사람들이 다 떠나게 될 텐데, 그럼 우리 이 커다란 가족은 어떻게 될 것 같아?
뉴 볼시니에서 꼴사납게 연명하느니, 차라리 품위 있게 끝내는 게 나아. 이 땅이 아직 값어치가 있을 때, 아름답게 작별하고 싶거든.
보상 문제는 계약서대로 철저히 이행할게.
너…… 아니, 내가 지금 보상을 따지는 게 아니잖아!
네가 어릴 때부터 와이너리 사업에 관심이 없었던 건 알아. 하지만 베르디 영감이 공들여 일궈낸 사업인데, 손녀로서 조금도 아쉽지 않은 거야?
할아버지도 자신의 와이너리가 경영 실패로 문 닫는 걸 원치 않으셨을 거야. 좋은 곳으로 보내는 게 나쁜 것만도 아니지. 여기는 뉴 볼시니잖아, 니콜로. 새로운 질서를 받아들여야 해.
연로한 일꾼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이윽고 그는 주머니에서 초대장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이건……
다음 주면 내 손녀 베티나의 10살 생일이다. 시라쿠사의 전통대로 할 생각이야.
아, 벌써 그 나이가 됐구나. 그럼 내가 꼭……
간다.
고요한 골목 안의 볼품없는 작은 건물.
루피나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꽤 늦은 시각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문을 열자, 따뜻한 불빛이 그녀를 맞이했다.
역시 있었네.
여기는 제 프라이빗 바니까요. 별일 없는 한 늘 여기 있지요.
자, 늘 드시던 거요. '트라몬토'에 오렌지즙 듬뿍, 시럽 조금, 얼음 6개.
바쁠 줄 알았는데.
며칠 후면 카시미어인이 개최하는 와인 챔피언십이잖아…… '골든 플레인'에서 현지 와이너리 전체에 초청장을 보냈어.
우리 와이너리는 됐다고 쳐도, 당신네는 참가할 거지?
주최 측이 어디든, 이름 알릴 기회는 되니까.
맞아요, 확실히 좋은 기회죠.
그런데 이미 다 준비해 둬서, 앞으로의 일은 제가 직접 관여하지 않아도 되거든요.
……그래서, 여기 틀어박혀 한가롭게 칵테일이나 만들고 있었던 거야?
소소한 취미일 뿐이에요. 당신도 똑같잖아요?
와이너리 후계자 아가씨, 저 구석에 있는 드럼을 좀 살펴봐 주시겠어요?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드럼 의자로 가서 앉았다. 라이드 심벌과 베이스 드럼을 가볍게 두드리자, 경쾌한 소리가 울렸다.
그녀는 하이햇 페달을 밟으며, 드럼 스틱으로 드럼과 심벌즈를 차분하게 두드렸다.
“내가 불행히 전장에서 죽거든, 플로린 한 닢으로 나를 묻어주오. 어머니의 곡소리를 와인으로 빚어 내 무덤 앞에 뿌려주오……”
시라쿠사의 아이들이라면 다들 아는 노래를 뉴 볼시니까지 가져오셨네요.
편곡 버전이야. 원곡 멜로디는 너무 슬퍼서, 지금이랑은 안 어울리니까.
거리에 왁자지껄한 카시미어 주류 광고가 넘쳐나잖아? 우리도 눈치껏 행동하는 시라쿠사인이 돼야지.
매사 눈치껏 행동할 필요는 없죠.
……
엘리오 씨한테 우리 와이너리 얘기를 들었구나.
지금 저를 찾아오신 것도 그 일 때문이겠죠.
……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인가요?
인수 의향서엔 이미 서명 끝냈어. 내일 카시미어인이 재산 목록을 확인하러 올 거야.
아버지가 할아버지 사업을 물려받았을 때부터, 남은 일꾼들이 얼마 없었어. 더 버텨봤자 의미 없어.
전통 양조법은 시간이랑 인력이 더 많이 들어서, 작년에 아버지가 와이너리를 내게 넘겼을 때부터 이미 적자였거든.
아쉽네요. 하지만 이미 결정을 내렸다면…… 제가 도움이 될 일이라도 있을까요?
……
당신이 머뭇거리다니, 드물군요.
우리 와이너리에 남은 일꾼들 말이야…… 다들 손 빠른 숙련공들이거든. 다른 와이너리에 가더라도 지금처럼 충분히 잘할 수 있어.
살루초 와이너리 산하의 양조장은 열 곳도 넘잖아. 숙련공이 필요한 곳이 하나쯤은 있지 않을까?
물론 무작정 떠넘기겠다는 건 아니야.
시라쿠사 패밀리의 규칙은 나도 잘 알아. 이렇게 하면 당신한테 큰 빚을 지는 셈이지만, 지금의 나에겐 갚을 수 있는 게 없어.
그러니까, 먼저 검증해 보고 필요에 따라 일자리를 주는 식으로……
그렇게 긴장하지 마세요.
자기 가족을 챙기는 건 당연한 일이죠. 마침, 제 쪽도 일손이 모자라던 참이었어요.
……고마워.
일꾼들이야 그렇다 치고, 당신은 어쩔 건데요?
나야…… 음악의 꿈을 좇아야지?
솔직히 나는 와이너리 운영보단 드럼 실력이 훨씬 낫잖아, 안 그래?
그녀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하고는 드럼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 소리는 이 작은 프라이빗 바 안에서 맴돌 뿐, 조금도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았다.
……아아…… 어쩌다가 이렇게……
누구야? 엘리오? 왜 여기 있어?
도와드릴게요.
정말 조용하네…… 이명이 들릴 것만 같아.
예전에는 정말 북적북적했는데…… 발소리, 나무통 굴러가는 소리, 금속과 유리그릇이 부딪치는 소리, 포도가 발효되고 기포가 터지는 소리……
그런데 지금……
남은 건 적막뿐이었다.
루피나는 천천히 원료 창고, 와인 저장고, 작업장을 지나갔다.
그녀는 이게 이곳을 둘러볼 마지막 기회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의 손이 낡은 설비들을, 세월이 켜켜이 쌓인 흔적들을 쓸어갔다……
그 순간 압착기의 손잡이가 수직 나사봉에서 덜컥 떨어져 내렸다.
?!
이런…… 카시미어 회계사가 곧 도착하는데, 설비는 왜 하필 이 타이밍에 문제가 생긴대?!
이래서 낡은 설비는 문제라니까…… 빨리 다시 끼워야지……
전구 갈듯이 돌려 끼우면……
왜 안 돌아가지?
루피나……
다비데? 마침 잘 왔어. 빨리 이것 좀 고쳐줘.
……
수직 나사봉이 망가진 거야. 나사산이 완전히 닳아 없어져서 다시 못 끼워.
……
사실 나 보고하러 온 거야, 루파. 방금 정기 점검하다가 여과 설비의 유압 실린더에 문제가 있는 걸 발견했거든.
실린더 벽에 금이 가서 유압을 유지할 수가 없어.
……
루파, 카시미어인이 왔어.
……
꽤 고풍스러운 와이너리네요, 베르디 씨. 술통의 늑대 머리가 상당히 정교하고, 저장고 벽돌의 장식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이것들은…… 할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직접 그리신 거야.
가족분이 남기신 이 작품을 어떻게 처리할지 얘기 나눠볼까요? 온전히 떼어서 돌려드릴지, 아니면 인수 항목에 포함할지요.
떼어낸다고?
이 벽돌에 그려진 그림이 할아버님의 유작인 만큼, 보존을 원하신다면 복원 전문가를 보내 온전하게 떼어드릴 수 있습니다……
오, 그렇게 해줘.
물론, 전문가 파견 비용은 당신이 지불해야 합니다.
그럴 줄 알았어…… 좋아, 비용은 내가 낼 테니 꼭 온전하게 떼어줘.
그럼, 다음 단계로 넘어가죠.
……그래.
분쇄기, 발효조, 압착기, 온도 조절기, 여과 설비…… 생산 시설이 아주 잘 갖춰져 있군요.
응, 이건 다 할아버지가 들여놓으신 거야. 당시에 잘나가는 양조 설비를 많이 사들이셨는데…… 전부 튼튼하고 오래 쓸 수 있는 것들이었어.
할아버님이요? 그렇다면 꽤 연식이 있겠군요.
그래도 아직 쓸만한 것들이 좀 있어. 진짜야, 이쪽으로 와서 우리 분쇄기 좀 한번 봐봐.
이 기계는 포도를 거의 손상 없이 압착할 수 있어. 게다가 할아버지가 개조해서 엄청나게 넓은 롤러로 바꾸셨거든. 그래서 생산 능력이……
루피나 양, 이 분쇄기 연결부 고무 패킹 모양이 좀 이상한 것 같은데요?
제가 설비의 가치를 평가하는 전문가는 아닙니다만, 고무 패킹이 밖으로 튀어나와 있으면 안 되는 거 아닌가요?
……
그리고 온도 조절 설비도……방금 지나갈 때 온도를 봤는데, 양조에 필요한 온도와 맞지 않는 것 같더군요.
……
설비가…… 좀 낡긴 해서.
그래도 우리 일꾼들이 쭉 정기 점검해 왔고, 필요한 부품도 늘 여분을 두고 있으니까 금방 고칠 수 있어.
인도에는 절대 지장 없을 거야.
그걸 걱정하고 계셨군요, 괜찮습니다.
이 설비들은 애초에 보고서 평가 항목에 넣지 않았거든요.
……
시라쿠사의 전통 설비는 저희의 생산 라인과 맞지도 않고 효율도 많이 떨어져서 애초에 인수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직접 처분하셔도 됩니다.
……
방금 창고에서 보여주신 숙성용 오크통들도……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그런 낡은 수제 오크통은 저장 과정에서 불순물이 생기는 것을 막기 어려워, 대량으로 생산되는 와인의 품질을 관리하기엔 불리합니다.
오크통을 안 쓴다고?
저희는 전통 오크통 대신, 더 밀폐된 환경을 제공하면서도 온도 조절이 편리한 스테인리스 탱크를 사용하고 있거든요.
그러면 풍미가 많이 날아가잖아……
세상에, 나 지금 꼭 할아버지처럼 말하고 있네.
그건 저희 검수 담당자가 신경 쓸 문제입니다. 루피나 씨는 인수 가격이 기대에 부합하는지만 신경 쓰시면 돼요.
물론,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희가 주목하는 건 와이너리 부지의 가치거든요. 그에 걸맞은 값을 쳐 드릴 겁니다.
저희는 좋은 부지를 얻고, 루피나 씨는 상당한 인수 대금을 받으실 테니, 서로 윈윈인 셈이죠.
……
그럼, 오늘의 검토 결과를 최대한 빨리 정리해서 저희 법무 담당자가 계약서에 관해 연락드릴 겁니다.
궁금한 게 있으시면 그쪽에 문의하시면 됩니다.
……한잔하고 가지 않을래?
베르디 와이너리의 재고는 지난달에 저희에게 전부 판매된 걸로 아는데요. 일꾼들의 급여 지급 문제로 자금 융통이 급하셨잖아요.
……
배웅은 괜찮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베르디 씨.
서류 가방을 낀 카시미어인은 와이너리를 나서며 다소 황량해 보이는 포도밭을 힐끗 쳐다본 후, 밖에서 오래 기다리고 있던 검은 차에 올라탔다.
루피나는 엔진 소리가 멀어지고 한참이 지나서야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이렇게 빨리 끝날 줄은 몰랐네. 할아버지의 와이너리가, 이렇게 팔려버렸어……
……나는…… 저 사람들이 우리의 전통과 설비를 더 중요하게 볼 거라고 생각했는데……
니콜로.
압착기, 분쇄기, 온도 조절 설비, 여과 설비……
전부 내가 고장 낸 거야.
알아. 책임 물을 생각 없어.
와이너리에서 지낸 시간이 얼만데, 설비 몇 개 고장 내는 걸로 인수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진 않았겠지.
……나는 그냥……
적어도 그것들만큼은 남기길 바랐던 거지?
엘리오가…… 와이너리 수도관에……
손을 댄 곳이 또 있어?
내가 막으려고 했는데……
당신들의 분노는 이해해…… 이렇게 된 이상, 그 회계사가 발견하지 못했으니 우리도 굳이 알려줄 이유는 없지.
……루파……
나도 알아. 내가 사업 수완은 없어도, 사람 보는 눈은 있거든.
당신이 할아버지랑 같이 와이너리를 운영하던 때는 내 술고래 아버지도 아직 태어나지 않았었지.
이 압착기…… 할아버지가 이걸로 내 키를 쟀어. 투입구 통에 죽죽 그어진 선들이 전부 그 기록이야.
고장 난 게 차라리 잘됐지. 팔려 가지 않을 테니까.
베르디 와이너리는 내 평생이야. 나는 베르디 영감이 와인을 한 병 한 병 빚는 모습을 곁에서 다 지켜봤고, 시라쿠사의 숱한 풍파에도 꿋꿋하게 버텨왔어.
내 손녀, 아니, 그다음 세대까지도…… 와인이 탄생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런 결말은 상상도 못 했어.
예전 방식으론 끝까지 지켜낼 수 없는 거라면, 차라리 이런 결말이 제일 나은 걸지도 모르겠네.
또 뭔가……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있을까?
아들 녀석이…… 네가 자기 딸아이의 10살 생일 파티에 와줬으면 하더라고.
시라쿠사의 전통대로 아이와 같은 나이의 술 한 병을 들고 와줘.
하지만……
그리고, 완전히 넘기기 전에 이 와이너리를 잘 봐둬, 루파.
“와이너리 후계자 아가씨, 수고스럽겠지만 제 프라이빗 바에 한번 들러주십시오. 술은 알아서 꺼내 드셔도 됩니다.”
사람을 불러놓고 정작 본인은 없네.
사람 죽는 게 시라쿠사에서 하루이틀 있는 일도 아닌데, 그것 때문에 가택연금이라고?
게다가 손님더러 알아서 칵테일을 만들어 마시라니……
직접 만들어 먹은 지 너무 오래됐어. 할아버지가…… 어떻게 가르쳐줬었더라?
양조는 매우 더딘 과정이란다. 술이 통 안에서 가라앉는 건, 마치 천천히 한 가족을 모으는 것과도 같아. 독특한 풍미가 발효되어 나오길 기다리면서 말이야.
칵테일은 서로 다른 풍미를 내는 술과 과일즙을 한데 섞어, 필요한 사람에게 맛보게 해주는 거란다.
너는 마시면 안 돼. 아직 술 마실 나이가 아니잖니.
루파, 듣고 있니?
그건 붓이다. 드럼 스틱이 아니라고…… 아직 다 못 그렸는데……
이것만 다 그리면 줄게. 보렴, 이건 우리 포도밭이고, 이 큰 늑대는 나, 작은 건 너다.
너도 좀 그려보겠니?
드럼 스틱 2개? 그래그래, 우리 루파는 하고 싶은 게 따로 있었구나.
음악가가 돼서 테라 전체에서 가장 리드미컬한 곡을 치고 싶다고? 그럼 이 할아버지는 테라에서 제일 대단한 화가가 될 거다! 하하하하!
속상하긴, 난 지금도 그림을 그리고 있잖니? 이렇게 술병에다가……
날이 따뜻해지면 널 와인 저장고에 데려가서 벽을 좀 꾸며야겠어. 오래전부터 하고 싶었던 거거든. 구상하는 데만 몇 년이나 걸렸단다.
루파, 나는 네가 와이너리의 후계자도 되고, 음악가가 될 자유도 가졌으면 좋겠구나.
가족이란 건, 꿈을 포기하게 만드는 곳이 아니니까.
미안, 할아버지. 결국 이렇게 됐네.
올해 술은 한 병도 남기지 못했어.
하아, 음악으로 기분이라도 좀 달래볼까?
그녀는 악기 쪽으로 다가갔다.
늘 앉던 드럼 의자 위에 정성스럽게 포장된 선물 상자가 놓여 있었다. 드럼 스틱을 내려놓고 리본 장식이 달린 상자를 열자, 와인 한 병이 눈에 들어왔다.
라벨에는 포도 넝쿨과 크고 작은 늑대 두 마리가 그려져 있었다. 작은 늑대의 귓가에는 서툰 솜씨로 그려진 드럼 스틱이 2개 있었다.
그리고 밑에는 '베르디 1092'라고 적혀 있었다.
그녀는 손으로 병을 쓸다가 살며시 상자 안에 돌려놓은 뒤 드럼 스틱을 들었다. 바에서 노랫소리가 울렸다.
“내가 불행히 전장에서 죽거든, 플로린 한 닢으로 나를 묻어주오. 어머니의 곡소리를 와인으로 빚어 내 무덤 앞에 뿌려주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