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돌
운송보장국의 운전기사들과 발주 상인들 사이에서 줄곧 중재자 역할을 해온 에이레네는 두둑한 보수 뒤에 숨겨진 수많은 문제, 그리고 여전히 짙게 드리운 패밀리의 그림자를 감지한다.
그 뒤로 오랫동안 에이레네는 혼자 트럭을 몰 때마다 그날 밤 주저하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곤 했다.
트럭이 법원 광장 가에 멈췄을 때, 하늘은 이미 완전히 어두워진 뒤였다. 그녀는 곧바로 시동을 끄지 않았다. 엔진의 진동이 핸들을 타고 손목으로 전해졌다가 또 조금씩 멀어졌다.
에이레네는 오는 길에 이미 라비니아에게 전화를 걸어 상의할 일이 있다고 말해둔 상태였다.
후……
어떻게 말하지…… “라비니아 씨, 더는 방법이 없어요……”
운전석에 앉은 에이레네는 끝맺지 못한 말을 나지막이 되뇌었다. 뒤에 이어질 말인 “당신을 찾아올 수밖에 없었어요”는 좀처럼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찾아올 수밖에”?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에이레네는 씁쓸한 듯 한동안 입을 다물었다. 빗소리가 차창 틈으로 비집고 들어와 그녀의 뺨을 두드렸다.
그녀는 손을 뻗어 시동을 껐다.
이번 배송 한 건으로 지난 보름 동안 뼈 빠지게 뛰어서 번 것보다 더 많이 벌었어.
카시미어인들은 정말 손이 크다니까.
자랑하는 거냐?
난 이번 주 그놈의 위약금 때문에 배송 한 건 치가 통째로 날아간 참인데.
카시미어인들, 돈 뗄 때는 야멸차게 떼잖아. 이런 건 왜 안 말하냐.
하하, 지난달에 위약금 대신 내줘서 고마웠어. 마침 이번 보수도 들어왔으니까 돌려줄게. 내가 얼마 빚졌더라?
빚은 무슨, 형제끼리 어려울 때 서로 돕는 거지.
그래? 그러면 나도 따로 모아뒀다가 다음에 누가 또 돈 떼일 때 보태야겠다.
아껴둬. 요즘 오리지늄 연료비도 오른 것 같더라고. 방금 트럭 주유소 들렀다 왔는데, 숫자 올라가는 거 보니 얼마나 속이 쓰리던지.
그러고 보니 주유소에서 마침 레오티 약국 녀석을 만났거든. 애들이 아주 착하더라? 연료 할인 카드도 쓰게 해 주더라고.
다음에 약국 지나갈 때 담배나 한 갑 챙겨줘야겠어.
그래? 하, 에이레네한테 안 들키게 조심해. 안 그러면 또 패밀리 사람들이랑 뒤에서 어쩌고 하면서……
뒤에서 뭐?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오랜만, 에이레네. 아무래도 얼마 안 가서 내가 네 배송 기록을 갈아치울 것 같다.
제법인데. 그럼 그때 포상으로 운송보장국 문서 작업을 맡길게.
하하, 싫어, 제발. 나는 이제 다음 건 인계 장소로 가야겠다. 다음에 봐, 에이레네.
캠프에서 보는 건 진짜 오랜만이네. 꽤 야윈 것 같은데, 바빠도 몸은 챙겨. 안 그러면 소머가 우리한테 뭐라고 하겠어……
딴소리하지 마. 방금 둘이서 무슨 얘기 했어?
아무것도 아니라니까 그러네.
에휴……
너나 샘이나, 어쩜 그렇게도 정신을 못 차리냐!
샘은 왜 없어? 캠프를 한 바퀴 돌았는데도 안 보여. 일정표 보니까 오늘부터 며칠 동안 비어 있던데, 어디 간 거야?
요즘 많이 아파. 며칠째 열이 난 데다 배탈에 구토 증상까지 있었거든. 어젯밤에 배송 끝내고 바로 뻗었어. 오늘 하기로 한 일도 다 지아니한테 넘겼고.
알잖아, 카시미어인들…… 일 빠지면 떼먹는 돈이 너무 많아서, 차라리 여유 있는 사람이 대신 뛰는 게……
……
됐어. 하아, 이따가 의사한테 연락해서 가보라고 할게.
왜? 걔한테 볼 일 있어?
에이레네는 짜증 섞인 표정으로 손에 든 물건을 흔들었다. 안에서 유리병 속 액체가 출렁이는 소리가 났다.
겉모습만 봐도 안에 와인이 들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는데, 하물며 포장 박스에는 살루초 와이너리의 로고가 버젓이 붙어 있었다.
살루초 와이너리가…… 왜 우리 캠프로 와인을 보냈을까나?
수취인에 샘 이름이 떡하니 적혀 있지 않았더라면, 너희 중 누군가가 배송할 화물을 캠프에 흘리고 갔나 했을 거야.
아, 그거 아마도 샘네 사촌 동생의 집들이 선물일 거야.
집들이 선물?
전에 걔네 사촌 일가족이 뉴 볼시니로 이사 오면서, 드미트리 씨…… 아니, 드미트리가 집 구하는 걸 좀 도와줬거든.
그때 이사 끝나면 와인 한 병 보내주겠다고 말했었나 봐.
……
에이레네, 그냥 와인 한 병이야…… 그리고 샘한테 보낸 것도 아니잖아. 샘은 이미 술 끊은 거 알면서.
그건 당연히 나도 알지. 그런데 드미트리 씨가 왜 샘 사촌 동생네 사정을 알고 있냐는 거야.
그리고 너, 루지에로, 전에 임대한 그 작은 슈퍼 있잖아. 며칠 전에 물건 사러 갔더니 살루초 와이너리 전문점으로 바뀌어 있더라?
너희들 언제 그렇게 친해진 거야?
음, 그쪽에 다시 임대해 줬거든. 관리하는 게 생각보다 훨씬 번거롭더라고. 슈퍼 주인은 내 체질에 안 맞는 것 같아서, 일찌감치 손 떼고 마음 편하게 트럭이나 몰려고.
무슨 사정이라도 있어? 나한테는 말 못 하면서, 패밀리 사람한테는 말할 수 있는 사정이?
그런 거 없어, 에이레네……
……
너희는 언제쯤 정신 차릴래? 이런 작은 호의도 다 빚이고, 언젠가 갚아야 할 날이 온다니까? 그것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비싸게.
하지만 지금은 그냥 우리를 도와줄 뿐이잖아.
도와준다고? 와인 챔피언십이 며칠 뒤면 시작인데, 하필 이 타이밍에 살루초 와이너리에서 '집들이 선물'을 보내왔어. 목적이 뭔지 모르겠어?
지금은 '그냥 와인 한 병'이지만, 그다음엔 뭘까? 패밀리의 돈? 패밀리의 이름? 또 예전처럼 패밀리 밑에서 일할 셈이야?
예전 같은 일이 또 생길까 봐 걱정하는 거라면, 장담하는데 절대 그럴 일 없어.
게다가 지금 뉴 볼시니의 질서하에서는…… 에이레네, 나를 못 믿어도 시장님과 라비니아 판사님은 믿어야 해.
그분들을 안 믿는 게 아니라, 그냥……
됐어. 그냥 너희가 카르네발레 때 일을 잊지 않았으면 할 뿐이야.
패밀리 사람들이랑 될수록 어울리지 마. 너는 그쪽을 그냥 평범한 점원이나 직원쯤으로 생각하겠지만, 그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엔 모두 패밀리의 뜻이 담겨있으니까.
에이레네, 지난번 일이 너에게도, 우리 모두에게도 큰 상처였다는 거 알아.
하지만 살루초의 사장도 이미 바뀌었고, 베네치아 주니어도 이젠 없잖아. 지금은 그때랑 달라……
벨소리가 루지에로의 말을 끊었다. 에이레네는 더 이상 반박하지 않고 그저 고개를 저은 뒤 자리를 뜨려 했다.
하지만, 전화가 연결되자마자 다급한 목소리가 단말기 너머로 흘러나왔다.
여보세요, 루지에로! 샘이랑 연락이 안 되는데, 어떡하지?
빨리 제2부두 차량 정비소로 와줄 수 있어? 카시미어인들한테 설명이 안 돼! 계속 나한테 위약금 더 물리겠다고 하는데!
뭐……?
루지에로까지 당황하는 기색을 보이자, 에이레네가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단말기를 건네받았다.
나야, 무슨 일인데?
에, 에이레네? 네가 있어서 다행이다!
샘이 고열 때문에 일을 못하잖아. 마침 샘의 배송지가 내 배송지랑 가는 길이 겹쳐서 내가 대신 배송하기로 했는데, 카시미어인이 갑자기 인도 장소를 바꾸는 바람에 내가 미처……
카시미어인한테 설명했는데 내 말을 못 알아듣나 봐. 계속 내가 계약을 위반했다는 말만 반복하더니, 이젠 또 위약금을 더 물리겠다는 거야!
아, 아무튼 빨리 와줘! 에이레네, 계약서에 쪼끄마한 글씨가 빼곡한데, 무,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알겠어, 바로 갈게!
……이번만 봐 줄 수 없을까? 당신네 상회가 갑자기 인도 장소를 바꾼 것도 예상치 못한 상황이잖아. 그쪽 조정으로 인해 생긴 배송 지연인데, 이것도 운전기사의 위약으로 처리해야 해?
국장님, 주문은 모두 저희 시스템에 등록되어 있고, 저희는 당연히 일정에 따라 조정한 것뿐입니다. 운전기사가 임의로 교대한 이상, 그 결과는 스스로 책임져야죠.
하지만……
계약서에도 명시되어 있는 사항입니다. 이번 건에서 예외를 두면, 추후 유사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 처리하기 어려워집니다.
그리고 기사님, 여기서 계속 논쟁해봤자 양측 모두 득이 될 게 없습니다. 현재 도로 상황과 일정표를 감안했을 때, 지금 바로 출발하지 않으시면……
음, 아마 실질적인 위약이 1회 더 추가되겠군요. 그렇게 되면 위약금이 이번 운임의 약 15퍼센트까지 올라갈 겁니다.
아울러 이번 달 일곱 번째 위약 기록이 되고요.
이후 주문의 수령 시간도 그에 맞춰 더 빡빡해질 겁니다.
에이레네는 난처해 하면서도 억지로 웃음을 짜내던 지아니를 마주할 때 자신의 표정이 어땠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괴로움이었을까, 미안함이었을까.
어쩌면 미처 어떤 표정을 지어 보일 새도 없었을 터였다. 지아니는 외국 상인의 '친절한' 조언을 듣고 난 후, 스스로 다그치는 말 몇 마디를 내뱉고는 서둘러 출발해 버렸으니까 말이다.
이 일을 이대로 넘어갈 수는 없어. 에이레네가 속으로 생각했다.
에이레네? 벌써 왔네. 지아니는 어떻게 됐어?
……아직 보장국에 가져가지 않은 계약서가 있어? 한 부 가져다줘. 카시미어인들이랑 처음에 체결한 계약서.
무, 무슨 일이야?
조항들이…… 좀 이상해. 적어도 지금까지 돌아가는 꼴을 보면 불합리한 데가 한두 군데가 아니야. 그쪽이랑 이야기해서 수정해야겠어.
……
지아니 일은 해결 못 한 거지?
응……
하지만 해결할 거야.
에휴, 역시…… 사실 전에 기사들도 여러 번 카시미어인을 찾아가서 얘기한 적 있어…… 딱히 공식적인 건 아니었지만, 뭐, 결과야 안 봐도 뻔했지.
우리는 네가 나가자마자 지아니의 위약금을 어떻게 메울지 의논하고 있었어.
와이프가 얼마 전에 쌍둥이 낳았지, 집안 어르신들은 편찮으시지, 돈 들어갈 데가 한두 군데가 아니잖아. 그래도 다행히 드미……
……
루지에로는 돌연 말을 멈췄고, 에이레네도 더는 캐묻지 않았다. 자신도 방금 알게 된 지아니의 사정을, 그 패밀리의 거물이 어떻게 알았는지 자신이 추궁하게 될 것 같아서였다.
에이레네는 자신이 그 사무실에 너무 오래 앉아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 가족들의 사정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게 되어버릴 만큼, 꼭 2년 전 그때처럼 말이다.
……계약서 가져다줘.
괜찮아질 거야. 내가 방법을 찾아볼게, 내가 해결할게.
외부인이 숨겨진 값을 매겨 전하는 호의 같은 건, 운송보장국 기사들에게 필요 없어.
카시미어 상회의 응접실 조명은 시내 도로나 운송보장국의 조명보다 훨씬 은은했고, 두툼한 카펫은 발소리를 흔적도 없이 삼켜버렸다.
탁자 위에는 물과 서류가 미리 준비되어 있었다. 자리 배치는 이 자리가 공식 회담 자리인지 의례적인 소통 자리인지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절묘했다.
카시미어 대표는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일찍 와 있었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자료를 넘기고 있다가 에이레네가 들어오자 서류를 덮고 일어나서 인사했다.
에이레네는 인사치레 없이 곧장 자리에 앉았다.
운송보장국과 카시미어 상회 간의 협력 관계를 좀 조정하고 싶어.
운전기사들은 기계가 아니고, 이미 최대한 맞춰주고 있어. 현재 위약 사례가 빈번하게 발생하는 건, 일부는 확실히 기사들의 문제이긴 해.
하지만 더 많은 경우는 계약 조항과 현실 상황에 괴리가 있기 때문이야.
……당신들 계약서에 불합리한 조항이 한둘이 아니야.
에이레네는 계약서 한 묶음을 꺼내 탁자 위로 밀었다. 계약서는 수없이 들춰본 탓에 모서리가 너덜너덜했고, 표시용 스티커가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이 조항들은 따로따로 보면 합리적일 수도 있어.
하지만 한데 놓고 보면, 모든 부담을 가장 말단에 있는 사람에게 떠넘길 뿐이야.
카시미어 대표는 그제야 손을 뻗어 계약서를 펼쳤다. 그는 매우 진지하게 읽었고, 어느 페이지에서는 몇 분간 더 머물며 문구를 확인하는 듯했다.
한참 후 그는 계약서를 덮었다.
우려하시는 바는 이해합니다. 사실 저희도 최근 운송 과정에서의 혼란을 인지했습니다.
다만, 계약 조항은 애초에 명확히 기재되어 있었고, 서명 당시 이상 없음을 확인하셨잖습니까.
맞아. 당시에는 아무도 그 조항들이 이렇게 자주 동시에 발생할 줄 몰랐으니까.
규정 자체는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단지 현재 운행 상황이 당시의 예상보다 조금 빡빡해진 거죠.
그렇다면 국장님,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요?
당분간만이라도 이런 애매한 상황들은 좀 더 유연하게 처리해 줬으면 해. 적어도 집행상의 여지는 좀 남겨줘.
앞으로의 더 원활한 협력을 위해서라도 말이야.
카시미어 대표가 잠시 침묵했다.
에이레네는 그때 어렴풋이 그 침묵이 망설여서가 아니라, 자신의 말을 응대할 필요가 있는지 가늠하는 것 같다고 느꼈다.
하지만 그 생각은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갔을 뿐이었다.
모든 조정 사항을 일일이 기록하면 이후 관리가 상당히 복잡해집니다.
하지만……
이전 몇 건의 기록은 일단 보류하겠습니다.
보류하겠다는 게 무슨 뜻이지?
현 단계에서는 평가에 참고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적어도 이번 일정이 끝나기 전까지는요.
그럼 운전기사 개인의 위약 기록은……
현 단계에서 따로 문제 삼지는 않겠습니다. 전체적인 흐름을 조율하는 데 집중하시면 됩니다. 순조롭게만 운행된다면 많은 문제가 자연히 가라앉을 테니까요.
저희도 협력 상대가 줄곧 긴장 상태에 놓여 있는 건 바라지 않습니다.
게다가 지금이 특수한 시기이기도 하고요. 와인 챔피언십이 곧 개최되니, 확실히 관련 배송 주문이 평소보다 많고, 기사님들도 수고가 많으십니다.
맞아. 운송보장국은 거의 모든 역량을 와인 챔피언십 관련 주문에 쏟아붓고 있어. 그러니 카시미어 상회 쪽에서도 운전기사들의 상황을 이해해 줬으면 해.
앞으로의 더 원활한 협력을 위해서…… 그렇죠?
……
그래. 나도 현재 일정과 운전기사들 현황을 다시 조정할게. 당신들이 모두에게 큰 이익을 안겨줬다는 건…… 나도 잘 알고 있어.
에이레네는 자리에서 일어나 탁자 너머의 상대와 악수했다. 상대의 손은 점잖았고, 필요 이상의 힘도 들어가 있지 않았다. 얼굴의 정중한 표정은 에이레네가 처음 들어왔을 때 본 그대로였다.
이 시기가 지나고 나서 다음 단계를 논의해 보죠.
에이레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탁자 위의 계약서를 챙겨 응접실을 나설 때, 에이레네의 발걸음은 묘하게도 조금 가벼웠다.
그녀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 감각 덕에 오기 전의 긴장감이 꽤 걷혔지만, 그와 함께 후회도 밀려왔다.
진작 운전기사들의 권익을 위해 목소리를 냈더라면, 처음부터 계약서를 꼼꼼히 살폈더라면 좋았을 것을. 하지만 이제는 해결됐다…… 적어도 아직 조율할 여지가 있으니까.
협상이 끝난 뒤, 에이레네는 꼬박 하루 동안 캠프 내 거의 모든 기사의 위약 상황을 정리하고, 운송보장국에서 조달 가능한 자금, 심지어 자신의 저축까지 계산했다.
저녁 무렵에는 캠프로 달려가 모두에게 더 이상 위약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고 알렸다.
요즘 뉴 볼시니에 화창한 날씨가 이어졌듯, 모든 것이 나아지고 있었다. 에이레네는 그렇게 생각했다.
약국을 나서던 샘은 감기가 제법 나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적어도 그의 지갑 사정으로 봤을 때, 사흘이나 쉬었으니 열도 내리고 병도 나아야 했다.
남한테 계속 대타해달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에휴, 내일 가서 일정 조율 좀 하고 다시 뛰자.
응? 이렇게 늦은 시간에 누구지?
여보세요?
어? 톰마소? 살루초 와이너리의 톰마소?
아이고, 며칠 전에 감기약이랑 해열제 정말 고마웠어! 진짜 잘 듣더라고. 방금도 약국에서 같은 약을 찾고 있었거든. 두 상자쯤 더 사두면 다음에 또 열이 나도 걱정 없지.
아이고, 별말씀을! 그 주문은 급하게 배송 안 해줘도 된다고 했지만, 너희 사업에 지장 주면 안 되니까 그냥 빨리 갔다 왔어.
그런데 보수에다 약 2통을 넣어뒀을 줄이야. 보수 받으러 갔을 때 못 만나긴 했지만, 네가 넣어둔 거 맞지?
너희 살루초 사람들은 정말 인정 넘친다니까……
아 미안 미안, 벨로네, 벨로네 사람들이 인정 넘친다는 말이었어! 그나저나 톰마소, 이 밤중에 무슨 일이야?
너희 사장님이 배송 목록에 넣는 걸 깜빡한 술이 몇 병 있다고? 지금 일손이 부족한데……
그게 내일 와인 챔피언십에서 쓸 술이라고?!
큰일이잖아! 마침 사거리 하나만 더 가면 너희 양조장이니까, 그 와인은 나한테 맡겨! 오토바이 타고 가면 금방이야!
아이고, 배송비는 무슨. 이웃끼리 서로 돕고 사는 거지! 아, 알겠어, 네 말대로 할게. 보수는 배송 끝나고 나서 다시 얘기하자!
큰 회사도 이런 실수를 하는구나, 쯧쯧.
그래도 톰마소가 나한테 연락했으니 망정이지…… 어라, 그런데 내가 톰마소한테 전화번호를 알려준 적 있었나……?
뭐, 됐어, 중요한 건 아니니까. 그나저나 와인 챔피언십인가 뭔가에서 우리 뉴 볼시니의 와인이 우승하면 좋겠다.
카시미어인이 양조를 알기나 해? 알아도 우리 시라쿠사인만 못하지……
행사장…… 신호등 2개만 건너면 도착이다……
뭐, 뭐야?!
후우…… 후우……
주, 죽는 줄 알았어…… 와인은…… 무사하네. 그나저나, 트럭은……
세상에, 차가 뒤집어 버렸잖아…… 설마 졸음운전인가, 빨간불을 못 본 거겠지. 운전기사는 무사해야 할 텐데…… 일단 경찰에 신고부터……
……!
이건…… 지아니?!
여기 누가 좀 도와줘! 내 친구가 다쳤어! 거기 있는…… 톰마소? 너도 있었네?
얼른 얘 좀 트럭 밑에서 꺼내줘! 난 구급차를 부를게!
……여보세요, 구급차! 교, 교통사고가 났는데 기사가 의식을 잃었어! 빨, 빨리 와줘……!
……그래서, 톰마소가 그러는데, 자기네 사장님이 지아니 치료비랑 그 트럭에 실린 와인 대금을 부담하겠다고 했대.
……나한테 배송을 도와달라고 하지 않았더라면, 지아니도 사고를 당하지 않았고, 카시미어인의 물건도 망가지지 않았을 거라면서……
……
그다음은?
응? 그다음은 없어, 톰마소가 한 말은 그게 다야.
받자, 에이레네. 살루초 와이너리 사장님의 호의잖아. 톰마소한테 들었는데, 사고 나고 사장님도 많이 걱정하셨대. 이렇게 큰 사고가 날 줄은 몰랐다면서.
게다가, 병원에 있는 지아니에겐 이 돈이 필요하잖아!
에이레네, 방금까지 카시미어인이랑 얘기했잖아. 그쪽은 뭐래? 물건 배상은 우리 책임으로 하겠대? 아니면 살루초 와이너리 쪽?
카시미어인이 그 화물은 배상하지 않아도 된대……
말을 절반쯤 하던 에이레네는 갑자기 목이 턱 막힌 듯 침묵했다.
그녀의 시선은 아직 수리하지 못한 채 캠프 구석에 세워진 트럭으로 향했다. 짐칸에 남은 유리 파편이 햇볕을 받아 반짝였다.
그러니까, 특정 개인에게 책임을 물을 생각이 없다는 말이야.
샘은 눈에 띄게 멈칫하더니, 한참이 지나서야 그 말의 의미를 알아챈 듯 숨을 돌렸다.
그럼…… 지아니는?
마찬가지로, 개인의 배상 책임도 없을 거래.
사고는 이행 실패로 기록하지만, 화물 손해는 그쪽에서 자체적으로 처리하겠대. 위험을 공동으로 부담하겠다느니, 협력하는 사이에 너무 몰아붙이면 안 된다느니 하면서 말은 참 듣기 좋게 하던데.
잘됐다, 잘됐어!
지금 지아니 상황에서, 배상금까지 떠안게 된다면 완전히 무너질 거야.
아휴, 지아니 녀석, 주문을 엄청 받았었거든. 분명 오래전부터 과로한 거겠지……
……
아무튼, 너에게 일을 부탁한 그 친구한테 도움은 필요 없다고 전해줘. 지아니의 치료비는 운송보장국 보험으로 일부 충당하고, 나머지는 내가 해결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
응, 알았어. 치료비는 나도 부담할 수 있어! 어젯밤 사고 이후, 다들 지아니 치료비를 최대한 보태기로 얘기했거든.
참, 톰마소한테 지, 지금 바로 연락할게……
하아……
그 카시미어 놈들이 그렇게 순순히 넘어갔을 리 없을 텐데. 듣기 좋은 말 뒤에 듣기 안 좋은 말도 있었겠지?
듣기 안 좋은 말도…… 분명히 했지. 이런 '처리 방식'이 당연한 건 아니고, 지금의 협력 관계를 고려해서 특별히 이렇게 해주는 거라나 뭐라나.
그게 무슨 뜻이야?
일정, 노선 배정, 그리고 여태껏 우리가 자체적으로 결정해 온 일들을…… 앞으로 될 수 있는 한 그쪽 시스템에 더 맞춰달라는 거지.
그리고 위약 기록도 다 평가에 반영하겠다고 했어. '내부 참고용'일 뿐이라 그걸 가지고 바로 보수를 차감하지는 않을 거라면서 말은 되게 번지르르하게 하더라고.
전에도 그렇게 말했잖아.
구체적인 규정에 관해서는 와인 챔피언십이 끝난 다음에 카시미어 쪽이랑 다시 정식으로 협상할 거야. 이번에는 계약서에 그런 불합리한 조항들을 집어넣게 두지 않겠어……
아무튼, 그 트럭에 실린 와인 문제는 마무리됐어. 더 묻지도 말고, 더 생각하지도 마. 일은 이미 해결됐으니까.
에이레네……
무슨 말 하고 싶은지 알아, 루지에로.
나에게도, 우리에게도 필요 없어. 이미 끝난 거야.
……
내가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내가 방법을 생각해 볼게. 그러니까, 운송보장국……
상조회의 트럭 기사들 모두 괜찮아질 거야.
그 뒤로 꽤 오랫동안, 두 번의 협상을 돌이켜 볼 때마다 에이레네가 가장 또렷하게 기억하는 건 상대가 한 말의 내용이 아니라, 자신이 가졌던 보기 드문 확신이었다.
그녀는 정말로 믿었었다……
문제를 꺼내 들고 정면으로 맞서기만 하면, 규칙과 경계를 지키기만 하면, 원치 않는 힘에 기대는 일 없이 반드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었다.
일단 좀 기다려. 지금은 네 말 듣고 있을 시간 없어……
에이레네는 말을 전하러 왔지만 끼어들 기회를 못 잡고 있던 등 뒤의 루포를 향해 짜증스럽게 손짓하고, 돌아서서 정장 차림의 쿠란타를 마주했다.
그녀는 다급했지만, 어찌할 바를 몰랐다. 막 들어 올린 손이 갈 곳을 잃고 그대로 멈춰버렸다.
하, 하지만 이렇게 큰 금액을 우리가 어떻게 배상해?!
그리고 방금 한 말, 이걸 수용하지 않으면 추후 협력은 없다는 게 무슨 소리야……
그날 응접실에서 분명 합의했잖아……
그날의 합의는 그날까지의 상황을 전제로 한 것이었습니다. 오늘 이런 요구를 드리는 건, 오늘 이후로 상황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고요.
그 말을 하는 그의 어조는 평온했다. 그저 이미 확인된 사실 하나를 설명하는 듯했으며, 심지어 에이레네를 위해 다시 한번 설명해 주고자 하는 정중한 태도까지 엿보였다.
저희는 교통사고 책임 인정에 대한 관련 부처의 판단에 개입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화물은 이미 손상됐습니다.
더욱이 독살 사건까지 있었으니……
그러고 보니 참 공교롭기도 하죠. 원래 그 지휘자가 마지막으로 시음하는 건 우리 쪽 와인이어야 했는데, 웬 루포가 튀어나와서는 자기가 사람을 시켜 배송한 술이었다고 말하더군요.
하필 또 용의자의 와인을 배송하던 차 때문에 저희 와인을 배송하던 트럭이 사고를 당했으니……
우리 운송보장국 기사들은 독살 사건이랑 아무 상관 없어!
오, 물론이죠, 저도 믿습니다…… 적어도 단순 교통사고였다는 점만큼은, 저 개인적으로는 당연히 그렇게 생각합니다.
……“단순 교통사고였다는 점만큼은”.
그 기사가 교통 법규를 위반했든 아니든 상관없이, 그 배송 행위는 이미 저희의 화물 운송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타이밍에 큰 위험 상황을 초래해, 결국 계약이 약정대로 이행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실질적으로 계약을 위반하지 않은 사람에게 책임을 묻겠다는 거야?
저는 '책임을 묻는다'라는 표현을 쓴 적이 없습니다.
저희는 법에 따라 손실과 책임의 연관성을 확인하는 것뿐입니다.
쿠란타가 잠시 멈추더니 한마디를 덧붙였다.
손실 중 보험으로 충당할 수 없는 부분은 당연히 책임 당사자가 부담해야 합니다.
비즈니스이지 않습니까, 에이레네 국장님.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해할 수 없어. 이게 무슨 비즈니스야? 남의 위기를 틈타 이익을 챙기려는 거면서!
물론 그렇게 생각하실 수 있죠. 저도 유감입니다.
이런 상황은 저희 회사로서도 바라던 바가 아니니까요.
앞으로의 협력에 관해서, 의향이 있으신 기사분들은 제게 직접 안내 자료를 받아 가시면 되겠습니다.
합리적인 선택을 기다리겠습니다.
……
자, 잠깐만, 에이레네, 아무 말도 안 하면 어떡해?! 여기 쓰인 건 나 혼자서는 감당 못 한다고!
하, 아무래도 그 사람한테……
안 돼!
그럼 어떻게 하라고? 네가 처음에 저 외국인들이랑 협력 계약인지 뭔지만 안 맺었으면, 그날 밤 그 사고는 아예 일어나지도 않았을 거고, 지아니도 지금 병원에 누워 있지 않았을 거야!
난……
에이레네, 다들 많이 벌게 해주려고 그런 건 아는데, 지금 그, 그 카시미어인들이 나를 고소하겠다잖아?!
이렇게 큰돈이라니…… 평생 살면서 본 적도 없는 금액을, 내가 어떻게 배상해?
네가 그때, 시정 시스템에 편입되면 우리 트럭 상조회…… 아니, 우리 운송보장국 기사들이 제도적으로 보호받을 수 있댔잖아.
그러면 이런 일은…… 나 혼자 감당해야 하는 건 아니겠지, 그렇지?
알아, 내가 방법을 찾을 거야……
에이레네, 네가 해결할 수 없다면……
나는 네 뒤에 있는, 벨로네 패밀리의 말을 전하러 온 사람의 말을 들어 봐야겠어.
에이레네는 이 주제가 나올 때마다 그래 왔듯, 반사적으로 “안 돼”라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그녀는 입만 벌렸을 뿐, 끝내 말을 내뱉지 못했다.
그녀는 멀리서 모범적인 미소를 머금은 쿠란타 주변에 운전기사 몇 명이 모여드는 모습을 보았다.
상대는 홍보 책자를 들고 그곳에 묵묵히 서서 이따금 고개를 끄덕이고, 이따금 낮게 대꾸했다. 마치 무언가를 홍보하기보다 누군가의 말을 들어주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운전기사들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쿠란타의 설명을 듣는 한편, 조심스러운 눈빛으로 에이레네를 슬금슬금 살폈다.
조급해하지 마, 일단 진정해…… 내가 방법을 찾을 테니까……
에이레네는 이미 오랫동안 트럭을 몰고 출근하지 않았었다. 심지어 신도시의 도로를 달린 게 언제였는지도 까마득했다.
운송보장국 사무실이 있는 시정 청사 앞은 늘 주차 자리가 빠듯했다.
현지 기업의 손님, 외국 상회의 손님, 운송보장국 기사들, 다른 부처의 동료들까지, 각자의 차량이 이곳을 오가며 정차했다.
그곳에 그녀의 트럭이 들어갈 자리는 도무지 생기지 않았다.
그날 오후, 에이레네는 캠프에서 트럭을 몰고 나오면서 기사들이 설렘 반 의심 반으로 카시미어 상회의 대표가 가져온 홍보 책자를 두고 의논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들은 이번 분기의 위약 횟수, 건당 수익이 높은 주문에 관해서 이야기했으며, 자녀들이 어느 양조장, 어느 약국, 어느 차량 회사에 취직할 수도 있다는 등의 이야기도 했다.
그 홍보 책자들은 하나같이 그럴싸한 미래를 그리고 있었다. 당초 에이레네가 패밀리를 피하고자 외국인을 선택하면서 본 것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그 안에 더 많은 것이 담겨 있다는 것을 알았다.
에이레네는 트럭을 몰고 먼 길을 달렸다. 노을이 하늘을 거의 다 물들일 무렵, 그녀는 단말기에서 번호 하나를 눌렀다.
여보세요, 라비니아 씨…… 저예요, 에이레네. 지금 법원으로 갈게요.
정말 중요한 일로 당신과 상의할 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