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V-1침입자
한밤중, 의료실에 있던 스펙터가 사라진 것을 발견한 스카디. 스펙터를 데려간 것은 그녀의 전 대장인 글래디아였다. 떠나기 전, 글래디아는 스카디에게 이베리아의 어느 한 작은 도시로 갈 것이라 알려주게 된다.
과묵. 괴이. 예측 불가. 이방인.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음울. 냉혈. 무정. 괴물.
그리고 뒤에서는 이렇게 얘기한다.
맞다.
사람은 고향을 잃는 순간,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된다.
사실 이곳에 오면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과거는 떨쳐버릴 수는 없었다. 그것들은 그림자를 타고 내 다리를 잡아 늪 깊숙한 곳으로 끌어당긴다.
우린 누구도 과거에서 벗어날 수 없다.
만약 언젠가, 고향이 나를 찾아오게 된다면……
2:33 A.M. 날씨/흐림
로도스 아일랜드 본함, 복도
좋아요! 이 보고서만 제출하면 스카디 씨의 외근 임무는 끝난 셈이네요.
응.
잠깐만, 또…… 빈 곳이 이렇게나? 크, 크흠……
처음부터 끝까지, 내용이라곤 '완료' 두 글자뿐이잖아요!
응?
임무는 확실하게 완수했어.
그, 그건 맞는데요……
……하지만 몇 마디 더 적으면 어디 덧나기라도 하나요?!
응?
(어떡하지…… 생각보다 상대하기 어렵겠는데?)
(스카디와 한 번도 대화해본 적이 없는 사이라 팀장님께서도 귀띔해 주시긴 했지만…… 역시 어려워.)
(스읍…… 하아……)
아, 알겠습니다.
임무의 세부 사항에 대해서, 혹시 박사님께서 궁금하신 게 있으시면 제가 다시 찾아서 확인할게요.
……박사?
네, 켈시 선생님께선 스카디 씨가 보고서를 제출하기 싫어할 수도 있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리고 아미야 씨는 스카디 씨한테 너무 상냥하게 대한다, 계속 그런 식이면 안 된다…… 등등, 이런 이야기도 하셨구요.
그래서 이번 임무 보고는 박사님께서 처리하게 된 거죠.
그 여자도 참, 흥.
그럼, 박사님께 직접 보고드리실래요? 지금은 박사님이 안 계시는 것 같으니, 박사님이 돌아오실 때까지 며칠 쉬셔도 됩니다.
제출한 보고서는 정말로 보완이 필요하긴 하지만요!
……
귀찮아.
알겠어요. 임무 코드 F1071, 제출 확인했습니다. 나머지는 추후에 보완……
잠깐.
네?
서류 돌려줘 봐. 생각났어. 몇 줄 더 적어줄게.
아! 물론이죠! 그럼 부탁드릴게요.
(생각보다 순조로운걸……)
그럼 제 쪽은 볼일이 끝났으니, 돌아가서 편히 쉬…… 음??
……
안색이 갑자기 달라졌는데, 무슨 일이 생겼나요?
아마도.
네? 여기 함선 안에서요? 설마 침입자?! 스카디 씨의 오감이 특별하다고 들었는데, 설마……
아닐 거예요. 함선에 위험한 상황이 발생했다면 사이렌이 울렸겠죠?
……노랫소리야.
노래라뇨? 무슨 노래요? 아주 조용하기만 하고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데요……
이곳에서 왜 노래가 들리는 거지?
윙윙거리는 소리가 나는 것 같긴 한데, 그게 노랫소리는 아니겠죠? 로도스 아일랜드에는 각종 기계가 아직 가동 중이니, 기계 진동 소리가 아닐까요? 아직 익숙하지 않은 거죠?
아니, 냄새가 나.
바닷물 냄새.
……스카디 씨? 사람 놀라게 하지 말아요. 지금 무슨 이야길 하시는지……
아니? 이봐요! 스카디 씨!
스카디는 급히, 그리고 빠르게 계단으로 뛰어갔다. 그녀는 엘리베이터를 타는 몇 초 사이 그 냄새가 사라질까 두려웠다.
한 헌터가 해변에 올라왔네 ♪
스카디의 귀에는 이 노래가 들렸지만, 함선의 대다수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그 언어, 그 선율이 그녀의 기억을 되살렸다. 고향이 그리운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에겐 너무나도 친숙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이 노래가 여기서 들려서는 안 되는 것이다.
고향은 뒤에 있고, 탄식만 남았네♪
노랫소리가 함선의 파이프를 타고 울려 퍼졌다.
바닷물의 냄새가 벽을 뚫고 끊임없이 배어 나왔다.
스카디 역시 그 냄새를 기억한다. 축축한 기운이 바싹 다가오자 그녀의 피부는 저도 모르게 수축하여 팽팽해졌다. 떨리지만 한편으로 흥분되기도 했다.
설마 그녀가 깨어난 것일까? 스카디는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재촉했다.
스펙터!
스카디가 의료실 문을 열었다.
침대는 비어 있었다.
……
어쩌면 막 깨어나서 조금 걷고 싶어졌을지도 모른다.
잠깐…… 이게 뭐지?
스카디는 그 물건을 주워 주물러봤다.
……그녀의 물건 같은데.
스펙터의 금목걸이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아니면 일부러 그랬을지도.
이 물건이 싫은 걸까? 그렇다면 그녀는 분명 지금의 자신도 싫을 것이다.
교회, 적어도 심해 교회와 관련된 일은 모두 좋은 일이 아니었다.
다만…… 뭔가 이상하다.
이방인.
왠지 모르겠지만 스카디의 머리에 갑자기 이 단어가 떠올랐다.
그녀는 이것이 스펙터의 냄새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 냄새는 예전의 스펙터에 비해 너무 진하고 너무 냉혹했다. 스카디는 그저 기쁨과 놀라움에 정신이 혼미해진 게 아닐까 하며 자신을 의심했다.
이 근처네. 누구지? 나와.
어비설 헌터, 그러나 스펙터는 아니다. 설마 아직 살아남은 어비설 헌터가 있었던 건가.
그런데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스펙터는 어디에 있지?
……
……네가 누구든, 네가 무엇이든, 당장 나와.
쫓아가야 한다. 뭔가 이상하다. 그녀는 확실히 상대가 근처에 있다는 것을 느꼈다.
스카디가 방문을 열고 뛰쳐나오자 그림자 하나가 복도 깊숙한 곳을 스쳐 지나갔다.
아니…… 두 개다. 노랫소리는 계속 들렸고, 상대는 여전히 낮게 읊조리고 있다.
스펙터. 그 어비설 헌터가 스펙터를 데려갔다.
너무 느리군요.
빨리 오지 않는다면, 우리는 곧 떠날 겁니다.
헌터! 당신은 뭐야?
스카디는 도약하며 구석을 돌았고, 자연스레 몸에서 사용할 수 있는 무기를 더듬기 시작했다.
……무슨 짓이야?
그 순간, 스카디는 먼저 상대의 눈을 직시하고 말았다.
……잠깐, 당신은……
생각지도 못한 인물이었다.
스카디.
건강해 보이는군요.
……당신은…… 설마 제2대대, 스펙터의 대장……?
당신은…… 글래디아……?!
오랜만이군요, 스카디. 아직도 에기르의 노래를 기억하다니, 매우 기쁘네요.
그녀의 표정에선 일말의 '기쁨'도 찾아볼 수 없었다. 스카디는 글래디아를 알기 시작해서부터, 단 한 번도 그녀의 표정이 변한 것을 본 적이 없다.
늘씬한 여성이 스펙터를 안고 있었다. 수년 동안, 스카디가 유일하게 알고 있던 어비설 헌터스의 생존자 스펙터, 그녀는 지금 글래디아의 어깨에 기대어 모처럼 또 하나의 평온한 꿈을 꾸고 있다.
스펙터의 대장이 입을 열자마자 노랫소리가 사라졌다.
스카디는 멍하니 서 있었다. 창문으로 불어온 육지 특유의 메마른 바람이 스카디의 건조한 볼을 어루만졌다. 이 헌터가 살아있을 줄이야, 글래디아가 살아있을 줄이야…… 스카디는 드디어 또 한 명의 동족을 발견했다.
아니, 정확히는 글래디아가 그들을 찾아낸 것이다. 다만……
……당신이 죽었다고 생각했어. 당신들이 필사적으로 우릴 내보내서 난 당신들 모두 죽은 줄 알았어.
목숨은 소중한 것이죠. 저도 당신이 살아있는 걸 보니 정말 기쁩니다.
스펙터가 아직 살아있는 걸 보고, 제2부대에 다른 사람도 살아 있지 않을까 종종 생각했었는데……
여길 어떻게 찾은 거지? 스펙터는…… 역시 병실에 있는 편이 좋은데.
……
스카디의 기억 속에서 가장 엄격한 헌터 중 한 명이었던 그녀는, 그 순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스카디의 마음속에 의혹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스펙터는 많이 변했어. 지금은 당신을 못 알아볼 수도 있어. 몸도 많이 허약해졌고.
허약이요? 헌터는 허약하지 않습니다.
육지에 온 진 얼마나 됐지?
육지의 병, 특수한 병이 스펙터의 몸을 갉아 먹고 있어. 이 함선 안의 사람은 스펙터의 병세를 안정시킬 수 있을 거야.
요 몇 년 동안 스펙터는 한 번도 깨어난 적이 없어. 지금의 스펙터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야. 무엇이 스펙터를 그렇게 만든 건진 나도 모르겠지만.
글래디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들바람이 불어오자, 글래디아의 머리카락이 흩날리며 그녀의 눈을 가렸다.
스카디는 문제점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글래디아…… 당신은 글래디아가 맞아. 내가 사람을 잘못 봤을 리 없어. 근데 당신은 뭘 하려는 거지?
스펙터를 어디로 데려가려는 거야?
헌터라면 육지에서는 자유로울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혹시 제가 뭔가 잘못 알고 있었는지요?
아니, 글래디아…… 스펙터는 아직 잠들어 있어. 스펙터가 가길 원하는지, 당신은 스펙터에게 물어보지도 않았어.
당신이 스펙터를 이곳에서 데려가고 싶어 하는 거야.
당신은 새로운 동료들이 마음에 든 모양이군요. 과연 그들도 같은 생각일까요? 당신은 얼마든지 손쉽게 그들의 척추를 부러뜨릴 수 있는데, 그들이 어떻게 당신으로부터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있을까요?
육지 사람들이 우리에게 적대심을 갖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이 배 안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아. 적어도 내가 만난 사람들은 아니야.
저는 당신이 경계심을 늦춘 이유를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아니…… 난 이번 일에 그들의 개입을 원치 않을 뿐이야. 이건 내 문제도, 그들 문제도 아니야.
문제는 당신에게 있어.
스카디는 한 걸음 앞으로 나갔다.
이렇게 하려는 이유가 무엇인지 설명해 줘.
헌터 스카디.
……육지에서는 굳이 집정관의 신분으로 당신을 구속하지 않겠습니다.
으……
하지만, 저 또한 당신에게 솔직하게 말할 의무는 없습니다.
저는 단지, 제 팀원인 스펙터를 데려간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을 뿐입니다. 이것으로 충분하겠죠.
……
어째서?
오늘 밤의 당신은 아직 그 이유를 알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스펙터는!
……(이베리아어)……
그 이름이 스카디의 귀에 온전히 전해지기도 전에, 글래디아는 함선 창문을 통해 달빛 속으로 스며들었고, 축 늘어진 스펙터의 몸도 그녀와 함께 사라졌다.
스카디는 손을 뻗어 잡지 않았다. 심지어 움직이지도 못했다.
스카디도 알고 있다. 글래디아가 도망치려 마음먹는다면, 어떻게 해도 따라잡을 수 없으리라는 것을. 하지만 그녀가 정말 도망칠 생각이었다면, 구태여 자신에게 메시지까지 남기진 않았을 것이다.
글래디아는 도움을 청하고 있거나 아니면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이리라. 스카디는 그녀에 대해 반신반의했지만, 별수가 없었다. 적어도 그녀는 자신에게 무엇을 해라거나, 하지 말라고 명령하지는 않았다.
'살비엔토'.
글래디아는 이렇게 말했다.
스카디는 그곳에 가야만 한다고 느꼈다.
살비엔토.
……이런 재회는 너무 감동이 없잖아.
……너희, 여기서 뭐 하는 거지?
이봐, 저 여자 스카디 아니야?
어딘가 낯이 익은 것 같은데, 그림이랑 좀 닮았어.
……아! 하하, 제 발로 찾아오다니……
스카디 맞네, 이곳에서 기다리길 잘했어.
응?
봐. 눈치 채고 반응하잖아…… 그리고 저 검을 봐. 저 여잔 스카디가 분명해!
스카디, 아직 '대위'를 기억하나? 우리가 받은 돈이 있어서 그런데, 대위를 위해 복수를 해야겠다. 네 목숨을 내놔!
이 자식 이거 돌았네? 미쳤어? 내가 말도 안 된다고 했지!
우린 돈만 받고 적당히 둘러대기로 했잖아?! 무슨 복수니, 현상금이니, 말도 안 된다고!
너도 그 소문 들었잖아! 정말 스카디가 맞다면, 애초에 이 일이 우리한테까지 굴러떨어졌을 거 같아? 지금 모가지가 날아가게 생겼는데 복수는 무슨!
얼른 도망가! 그 고철인지 무기인지 빨랑 들고 튀라고!
쳇.
도망칠 거면 너 혼자 집에 가서 이불이나 뒤집어쓰고 니네 엄마나 불러라! 어린 계집 하나에 겁먹고 말이야. 이 몸을 허탕 치게 하려고? 어림도 없지!
맞아! 설령 저 여자가 스카디라고 해도, 스카디가 제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지금 저 여자는 혼자잖아. 안 그래?
우린 하나, 둘…… 쳇, 아무튼 엄청 많다고!
하지만 그 대단했던 바운티 헌터들도 모두 땅속에서 썩어버렸잖아? 그때도 스카디는 혼자였다고!
그리고 너 임마, 네가 우리 편이 많다고 말할 때마다 좋은 일이 있었어?
누가 그걸 직접 보기라도 했대? 그놈들이 밤에 잔뜩 취해서 쿠란타의 방에 잘못 들어간 거겠지.
그리고 쿠란타가 바짓가랑이에서 석궁을 꺼내 한바탕 쏴대는 바람에 머리가 모두 박살 난 거 아냐?!
소문이란게 원래 다 그런 거라고. 그렇게 과장하고 부풀리는 걸로 음유시인들이 밥 벌어먹고 사는 건데.
무슨 검 하나로 산 50개를 갈랐다느니…… 그 말이 진짜면, 이 몸은 주먹 한 방으로 런디니움도 뚫겠다!
얘들아! 밥이라도 먹고 싶으면 나랑 같이 덤비는 거다!
저 스카디인지 스카시인지만 잡으면 돈은 전부 우리 거다! 다른 놈들이 저 여자 목에 건 돈까지 보태면 우린 인생 피는 거라고!
기회를 줄게. 지금 도망쳐도 늦지 않아. 네놈들을 상대할 시간이 없어.
가라! 가서 죽여버려!
……
(에기르어) 썩은 해초가 제일 성가신 법이라더니.
설마, 내 삶에 변치 않는 게 잔챙이 바운티 헌터들의 번거로움 뿐이었을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