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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D-ST-1파인릴리

사이드 스토리브릿지2021-09-30

전임 재무대신 위트가 불쑥 찾아왔지만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 없었던 켈시는, 대공에게 약물을 투여한 뒤, 죄인과 함께 마지막 시간을 보냈다.

등장 오퍼레이터: 켈시


17년 전

2:44 P.M. 날씨/맑음

우르수스 중부, 파인 밸리 요양원 밖


스으으으…… 후우우우……

스으으으……

후우우우……

스으으으……


위트

아, 좀 괜찮나?

위트

아니, 아니, 일어나지 마세요. 괜찮은지 보러 왔을 뿐입니다, 이제 곧 가봐야 합니다. 버든비스트는 멈추면 안 되니까요. 게다가 안장을 씌운 사람은 나 자신이니까요.

위트

네? 아닙니다. 전 재무대신 같은 게 아니라 여전히 당신이 기억하는 그 젊은이입니다……

위트

그깟 지위가 뭐라고…… 우리 모두 우르수스의 광활한 땅과, 폐하께서 그린 명예로운 미래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동료일 뿐인데……

위트

우린 모두 폐하의 백성들이지요. 그걸 잊은 채 과거의 폭력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어차피 시대에 뒤처지고 말 것입니다.

위트

……죄송합니다. 일 때문에 스트레스가 꽤 쌓인 것 같군요.

위트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 또한 동료와 같은 뜻을 가진 이들의 당당함도, 자신들의 부패에 스스로 잠식되는 자들도 모두 지켜보고 있으니, 우리는 곧 승리할 것입니다.

위트

군 내부에 만연하는 불온한 뜻을 품은 귀족들…… 그들과 그 수하들은 폐하의 발밑에서 한 줌의 재로 변하게 될 겁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잔해를 폐하의 발밑에서 흔적도 없이 치워낼 거고.

위트

……그렇습니다.

위트

……제국의 의회는 변하고 있습니다.

위트

우리는 어리석은 귀족들의 손에서 우르수스, 그리고 폐하의 모든 것을 되찾아올 것입니다.

위트

우리는 구시대를 무너뜨리고 짓밟고 갈기갈기 찢어, 우르수스를 위해 새로운 항로를 열어줄 것입니다. 친구여, 저는 그렇게 할 겁니다. 우리 모두 그렇게 해야 합니다. 평생을 바치는 한이 있더라도……

위트

우르수스는 반드시 변해야 합니다.


켈시

오늘?

릴리아

원래는 다음 주였는데…… 오늘이 절호의 기회에요.

릴리아

재무대신의 방문으로 그 겁쟁이가 동요했다고 간호부장이 그러더군요. 재무대신도 그 사람과의 만남을 꺼렸지만, 적어도 그가 나오려는 눈치더라고요.

켈시

그 사람은 두려워하고 있어. 그로 인해 빈틈이 생길 거야.

릴리아

갑작스런 방문 때문에 그 사람의 경비대도 경비를 강화할 수 없었고, 그도 어쩔 수 없이 급급히 우리 앞에 나타나게 될 거예요……

릴리아

우르수스의 중요한 인물이 방문하는 때를 골라 대공을 암살한다는 건 확실히 위험한 결정이죠. 하지만 이곳에 오는 큰 인물들이 아무리 많았어도 바냐 대공이 자신의 정원에서 나오는 일이 거의 없었거든요.

켈시

그렇지만 우리는 아직 충분한 승산이 없어.

릴리아

그건 저도 마찬가지예요.

릴리아

하지만 당신은 아닐 거라고 믿어요.

릴리아

심지어 당신이면 무조건 해낼 거라 믿어요.

켈시

……

릴리아

아직도 무슨 걱정거리가 있나요?

릴리아

제가 해결해 줄게요, 설령 제가……

켈시

릴리아.

켈시

내 바람대로 잘 살아갈 수 있을지, 이게 내 가장 큰 걱정이야.

켈시

체르노보그의 사고로…… 꿈을 품고 열정을 불태우던 젊은 과학자들이 희생됐다는 건 인정해야 한다. 네가 내 말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모르겠지만.

켈시

나도 결코 그들이 죽는 걸 보고 싶지 않았어. 릴리아, 지금의 너한테도 마찬가지야.

릴리아

……

릴리아

……전 그만둘 생각은 없습니다, 켈시 소장님.

켈시

이 일이 끝나면 난 시라쿠사에 갔다가 빅토리아로 갈 거야.

켈시

체르노보그의 계획을 멈추고…… 나와 함께 간다면 살수도 있어.

릴리아

제 남편이 남긴 메마른 핏자국을 배신자가 밟는 걸, 전 절대 용납할 수 없어요, 단 1초라도.

켈시

……넌 굉장히 이기적이구나.

릴리아

맞아요, 그러니까 제 이기적인 부탁을 잊지 말아주세요……

릴리아

제 딸을 보살펴 주세요. 아이가 원한다면 의학도 가르쳐주세요.

릴리아

전 당신을 반드시 살아서 도망치게 할 테니까요, 켈시 소장님.


위트

친구여.

위트

올해 겨울이 무척 춥지만 따뜻한 봄이 찾아올 거라고 믿습니다.

위트

우리가 처음 만나던 날이 아직도 생각나는군요. 그때도 이른 봄이었죠. 열정적인 연설 속에서 당신은 환호하지도, 크게 웃지도 않았습니다.

위트

우린 금방 서로를 알아챘어요. 물론 그 밖에도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위트

침략에 성공한 걸 자랑스럽게 여기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들은 선황의 영광을 흠모하며 환호했지만 그 발밑에 깔린 척박한 땅…… 타인의 생존을 더는 허락하지 않는 땅은 보지 못했죠.

위트, 봄이 온 건가?

위트

글쎄요…… 아마도 그런 것 같네요.

위트

올해 봄은 조금 이른 편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제 재앙정보전달자의 말대로라면 북쪽의 강한 재앙의 영향으로 얼마 뒤엔 추워질 거라고 하더군요.

위트

어쩌면 다시 겨울로 되돌아갈지도 모릅니다.

우리 모두 겨울을 싫어하지, 안 그래?

위트

맞습니다, 친구.

위트

역시 당신 충고대로 술을 끊어야 할 것 같군요…… 더는 알코올에 의지한 채 겨울에 맞설 순 없어요. 그건 그저 감각이 마비되는 것뿐이니까, 아무리 술에 취해도 동상은 걸리니까요.

위트

하지만 이번 겨울도 그리 길지는 않을 겁니다.

위트

그저 재앙의 여파일 뿐이니까요.


릴리아

이건……

켈시

영면…… 가장 안전하고 효과적이지. 우리가 도망칠 곳도 없을 만큼 효과가 빠르지도 않고.

켈시

도망칠 준비는 확실하게 해뒀어?

릴리아

여기 온 첫날부터 모든 준비는 끝났어요.

켈시

우리에겐 시간이 별로 없을 거야.

릴리아

알아요, 그래도 연습대로라면 여유가 있을 거에요……

켈시

아니.

켈시

우리가 요양원을 너무 쉽게 생각했어.

켈시

네 계획을 수정할 필요는 없어. 뒤처리는 내가 할게.

릴리아

뭘 발견한 거죠?

켈시

……

켈시

Mon3tr가 잠복 중에 적의 흔적을 발견했어. 대공이 우르수스의 다른 권력자와 왕래한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 있나?

릴리아

아뇨, 여기서 줄곧 조용히 지냈는데……

켈시

……

릴리아

Mon3tr…… 는 당신의 애완동물같은 건가요? 녀석이 뭘 봤다는 거죠? 우르수스의 민간 전설?

켈시

사실대로 말해줄 순 없어. 우리의 생존 가능성만 낮출 뿐이야.

릴리아

큭…… 우르수스는 수단이 다양하겠죠……

켈시

두려우면 빈틈이 생겨. 깊이 캐봤자 너의 판단만 흐려질 거야. 날 믿어.

릴리아

……네.

켈시

자, 시간이 거의 다 된 것 같군.

켈시

가방을 든 금발의 필라인을 봤나? 저 사람이 대공의 주치의야.

릴리아

……알아요.


위트

고작 대공 한 명이 뭘 할 수 있다는 거죠?

위트

현 상태에 안주하며 제자리만 지키는 것들을 보세요…… 한쪽 눈이 먼 총독이 폐하의 앞에 무릎을 꿇은 순간부터 총독은 더는 위협이 되지 않았습니다.

위트

적당할 때 제 몸을 지킬 줄 아는 똑똑한 자입니다.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 우르수스의 얼마 남지 않은 전력을 쏟아부어 반란의 여파를 가라앉히려는…… 누구와는 다르단 말입니다.

위트

참으로 애석한 일이죠…… 제가 군정을 이끄는 건 아니지만, 경제와 민생이 무너져내리는 걸 볼 때마다 정말, 가슴이 미어터질 것만 같습니다.

폐하께서 저 기회주의자들을 용서하실까? 기회만 있다면 저들은 또다시 폐하와 우르수스보다 자신의 이익을 우선시할 거야.

위트

폐하의 인자함을 원망해서는 안 됩니다. 잠시 배신하지 않는 교활한 귀족들을 용서하는 것보다 더 견딜 수 없는 건, 지루한 소모전이니까.

위트

잡초와 해충을 제거하고, 씨앗을 뿌려야 합니다. 봄이 되면 새로운 싹을 볼 수 있도록 말이죠.

위트

그것 때문에 오랫동안 노력해 왔습니다…… 이런 말을 자주 하는 편은 아니지만 이해해 주십시오. 폐하를 모시고, 지금의 자리에 올랐다는 사실이 무척 자랑스럽습니다.

위트

친구여, 걱정 마세요. 희생자들이 끝내지 못한 일은, 살아남은 자들이 끝낼 테니.

위트

폐하께선 우르수스에 새로운 미래를 가져다주실 겁니다. 아무리 완고한 귀족이나, 삐뚤어진 악의 무리들, 우르수스의 가장 어두운 곳에 숨어지내는 괴물들이라도 모두 두려워하게 될 겁니다. 우리의 위대한 황제를……

위트

그걸 해내는 게 제 사명입니다.


켈시

……

우르수스 군관

거기 서.

우르수스 군관

간호부장이 알려주지 않았나? 바냐 대공께서 이곳을 사용 중이니 누구도 접근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릴리아

제가 오늘 당직 의사입니다. 대공님의 의료 고문이고요. 자, 여기 사원증입니다.

우르수스 군관

……새로 왔나?

릴리아

맞아요.

우르수스 군관

바냐 대공의 개인 의사가 당직을 서는 게 불문율이다. 축하한다. 오늘은 쉬어도 좋을 것 같군.

우르수스 군관

새로 왔다니 더는 말하지 않겠다. 하지만 여기에 또다시 발을 디뎠다가는 곱게 죽지 못할 거다.

우르수스 군관

어서 꺼져. 모처럼의 휴식을 만끽할 곳이나 찾아보라고.

우르수스 군관

나다. 아무것도 아냐. 요양원의 당직 의사더군. 곧 쫓아낼 테니……

우르수스 군관

뭐? 그 돌팔이 의사가 없어졌다고?

우르수스 군관

……하지만 위험이…… 으음, 재무대신도 왔고, 알았다……

우르수스 군관

거기 둘, 서라.

릴리아

네.

릴리아

무슨 일 있으신가요?

우르수스 군관

……따라와.


우르수스 군관

너희들이 뭘 보게 될지 모르겠지만, 이건 대공 님의 고질병이니 괜한 소란 피우지 마.

우르수스 군관

제대로 모시다가 해가 지면 여기서 꺼져. 대공님께 걸리적거리지 말고……

우르수스 군관

잘 하면 큰 상을 주마. 너희처럼…… 가난한 것들이 오랫동안 걱정 없이 살 만큼.

릴리아

감사합니다, 그런 기회를 주시다니…… 켈시, 뭐 하고 있어?

켈시

아…… 감사합니다.

우르수스 군관

……흥, 멍청하긴. 제대로 해.

릴리아

명심하겠습니다.

우르수스 군관

……

우르수스 군관

기다려.

우르수스 군관

한 명만 방에 들어갈 수 있다. 이번에도 예외는 없어. 안 그러면 대공께서 질책하실지도 몰라.

우르수스 군관

너, 하인이 먼저 들어가.

릴리아

하, 하지만…… 제가 의사인데……

우르수스 군관

대공께서 드시는 약은 우리가 준비한다. 여기서 기다리다가 문제가 생기면 그때 들어가.

릴리아

무슨 말씀이신지……

우르수스 군관

명령이 떨어질 때까지 여기서 3시간 대기하라는 거다.

우르수스 군관

그리고 너! 10분 이상 방에 머물러선 안 돼.

우르수스 군관

시간이 지나도 나오지 않으면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든지, 넌 살아서 여길 나가지 못할 거다.

우르수스 군관

안으로 들여보낼 테니 몸수색해.

켈시

……네.


켈시

……

켈시

……대공님.

빛이 닿지 않는 곳에 노인이…… 누워 있었다. 그는 꼼짝 않고 조용히 숨을 고르며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냐 대공

……의사인가?

켈시

아닙니다. 저는 하인입니다.

바냐 대공

그렇군…… 자, 이리로.

켈시

……네.

바냐 대공

우르수스인인가?

켈시

아닙니다.

바냐 대공

고개를 숙이거라, 얼굴을 만져보게.

켈시

……네.

바냐 대공

아…… 불포, 아니면 필라인인가? 귀여운 종족이지.

켈시

눈…… 눈이 보이지 않으시는 건가요?

바냐 대공

그래, 지난달부터 그러더군.

바냐 대공

나는 곧 죽게 될 거야. 오늘, 혹은 내일. 그러니까 넌 헛수고한 셈이란다, 아이야.

켈시

……

바냐 대공

날 죽이려는 이들이 의사를 들여보내 줄 리 없지.

켈시

항의하지 않는 건가요? 대공이시잖아요.

바냐 대공

그 때문에 우르수스에 맞서지 못하고 받아들이는 거란다.

바냐 대공

오늘 날씨는 어떻지? 햇볕이 따뜻해지는 게 느껴지는구나.

켈시

구름 한 점 없이 맑아요, 대공님.

바냐 대공

아…… 구름 한 점 없다라…… 그런 날들이 이어지고 있지.

켈시

……절망하시는 건가요?

바냐 대공

절망? 절망은 한순간의 반짝임일 뿐. 우리는 긴 인생 속에서 항상 모종의 감정으로 뒤덮여 있지. 그건 절망적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유쾌하지도 않아.

바냐 대공

우린 모두 그렇게 살아가고 있지, 젊은이. 그걸 무뎌졌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자업자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어.

바냐 대공

……그렇군, 날씨가 따뜻해진 게 느껴져. 방금 불던 바람에도 더는 추위가 느껴지지 않아.

바냐 대공

누가 자네를 보냈나, 젊은이?

켈시

벌써 눈치채셨나보네요.

바냐 대공

놀라지 않는구나. 아무 일도 이루지 못한 채 결국 희생양으로 끌려온 나 같은 사람은 젊은이들이 깔볼 거라고 생각했는데……

켈시

누구에게도 그런 적 없습니다. 하물며 우르수스의 대공님께는 더더욱……

바냐 대공

내게 사실대로 말해주지 않겠지…… 당연해. 그럼 누구의 짓인지 맞혀볼까?

바냐 대공

재무대신인가? 아, 아냐…… 그는 이번 일과 무관해. 주제넘는 짓은 하지 않지. 만약 대신의 뜻이라면…… 차라리 그편이 고맙겠군.

바냐 대공

그렇다면 군단의 좀벌레들인가? 그 늙어빠진 겁쟁이들이…… 아냐, 이것도 아닌 것 같군. 그놈들은 더 간단하게 해치웠을 테지……

바냐 대공

대체 누가 자넬 보낸 걸까……

바냐 대공

……

바냐 대공

아직도 있나, 젊은이?

켈시

네.

바냐 대공

……폐하인가? 폐하께서 어리석고 거만한 나에게…… 멍청한 짓에 대한 대가를 치르라는 건가?

바냐 대공

아, 그날 밤이 끔찍한 악몽을 꾼 게 아니었구나……

바냐 대공

두 눈이 보이지 않는 기분을 아나? 오래전부터 익숙해진 어둠 속에서 일그러진 뭔가가 꿈틀거리는 기분이 들었지. 끔찍한 이질감……

켈시

눈이 보이지 않아도 감춰지지 않는 공포 말인가요?


바냐 대공

……그건 근위병의 의지였네, 젊은이. 그날 밤, 황제의 칼날은 코앞에서 내 목을 겨누고 있었지.


위트

뭐에요? 과도? 제가 할게요.

위트

일정이 빠듯하긴 하지만 옛 친구를 위해 사과를 깎아줄 시간도 없다면 너무 매정하지 않겠습니까?

재무대신에게 이런 잡일을 시킬 수는 없지.

위트

절 비꼬는 건가요?

진심이야. 재무대신은 칼을 쥘 게 아니라 다른 일에 전념해야 하니까.

위트

농담하지 마세요, 친구여. 기껏해야 사과를 깎는 건데…… 설마 미신 같을 걸 믿는 건 아니겠죠?

위트

보세요, 요양원의 과일은 무척 신선해 보이는군요. 건강에 좋겠어요.

위트, 그러지 말고 칼을 줘…… 몸이 굳지 않게 적당히 움직이는 편이 좋으니까.

오래된 친구

위트

당신은 너무 허약해졌어요. 손을 벨 수도 있죠.

우르수스의 장교가 과도를 쥘 힘도 없다는 건가?

위트

아니, 그렇진 않지만……

위트

알겠습니다, 친구여. 칼을 줄 테니 다치지 않게 조심하세요.

위트

……

위트

이, 이게 무슨…… 의사! ……대체 왜 이러십니까??

위트

왜 이런 짓을? 손가락을 자르다니요…… 의사, 의사!

쓰읍…… 위트! 괜찮아, 생각보다 아프진 않군…… 이미 오랫동안 진통에 시달린 탓에 이젠 익숙하니까…… 잠시 내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겠나?

보게, 위트. 오른손 손톱은 포화 때문에 다 떨어졌고…… 오른손 엄지손가락은 카시미어인에게 내어주고 말았지. 극동의 암살자는 둘째 손가락을 절반이나 떼어가더라고.

오른손을 볼 때마다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어. 칼을 쥐었던 손이 오른손이라는 이유로 이렇게 되어버렸으니 말이야.

지금은 왼손의 둘째 손가락을 베어버렸으니, 이젠 양손 모두 불완전해졌지. 참으로 공평하지 않은가?

위트

대체 왜……!

위트, 알려 주게. 우르수스의 전쟁에서 내가 영광의 상처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과연 영광스러운 것들이 맞나?

아니, 내게 답을 달라는 게 아니야. 그건 중요하지 않아. 하지만 피범벅이 된 새로운 상처…… 이건 내 의지로 만든 거지. 덕분에 정신 차리고 당신과 이렇게 다시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고.

위트, 자넨 디에티 그라이퍼부르크로 돌아가겠지? 언젠가 그 위대한 도시로 돌아갈 테지.

내 몸의 일부를 가져가 주게. 내 육신은 전쟁 속에서 갈가리 찢기고 상처받았지만, 이 혈육은 내 의지로 떼어낸 유일한 것이니까.

내겐 자식이 없어. 하지만 이건…… 어리석다고 비웃겠지만 그래도 이 손가락은 내가 남긴 유일한 혈육이네.

디에티 그라이퍼부르크로 가져가 자네의 정원이나 길가의 화분에 묻어주게. 난 그곳의 흙 속에서 살아갈 테니.

제발 내 혈육이 우르수스에 스며들게…… 디에티 그라이퍼부르크로 가져다주게. 우리가 대대로 지켜온 우르수스의 중심으로!

……위트!


우르수스 군관

……

릴리아

……

우르수스 군관

오늘 왜 이렇게 다들 왔다 갔다 하지? 쯧, 한심한 것들 같으니라고.

우르수스 군관

잠시 다녀올 테니 여기서 가만히 대기해.

릴리아

네, 그러죠.

릴리아

(켈시 소장님 쪽 상황은 어떠려나……)

릴리아

(크윽, 시간이 많지 않아.)

우르수스 군관

야, 너! 116호 숙소로 빨리 가봐.

릴리아

네? 하지만 제 조수가 아직……

우르수스 군관

어쨌든 여기에 하인 한 명이면 충분해. 의사는 필요 없다.

우르수스 군관

재무대신의 명령이다. 대단한 인물이니 함부로 비위 거스르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우르수스 군관

서둘러! 교수대에 오르고 싶은 건 아니겠지?

릴리아

네, 죄송합니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릴리아

(켈시 소장님…… 서둘러요!)


바냐 대공

젊은이, 이리 와서 앉아보게. 이름이 뭔가?

켈시

켈시입니다.

바냐 대공

……그건 자네 코드네임도 가명도 아닐 텐데, 그렇지?

바냐 대공

나는 알아…… 자네가 이름을 대는 태도에서 그 이름을 무척 아낀다는 걸 말이야. 안 그런가, 켈시?

켈시

글쎄요.

켈시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대공. 잠시 뒤에 경비병들이 들어올 겁니다.

바냐 대공

흠…… 날 죽이러 오는 암살자들을 위해 시간을 내야 한다니……

바냐 대공

아. 통신기가 근처에 있던 것 같은데……

켈시

여기 있습니다.

바냐 대공

훗, 신중한 킬러로군. 언제 찾아낸 거지?

바냐 대공

내게 주게.

켈시

……

바냐 대공

자네의 믿음에 대해선 고맙게 생각하네, 젊은이. 무척 여유롭더군…… 누가 보낸 건지 모르겠지만 나중에 대단한 인물이 될 것 같네.

바냐 대공

경비대장, 내 방에 있는 하인은…… 나와 같은 고향 출신이야. 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으니 내가 명령할 때까진 방해하지 마라.

바냐 대공

방해하는 자는 명령에 불복한 걸로 알겠다.

바냐 대공

……그래.

켈시

……고향이 어디신가요?

바냐 대공

파인 밸리의 다른 쪽이라네.

바냐 대공

내 말을 믿는다는 건 모든 수단을 미리 준비해뒀다는 건가? 저들이 당장 방안으로 뛰어든다고 해도 자네라면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안 그런가?

켈시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바냐 대공

……자넨 황제의 근위병 쪽 사람이 아닌 것 같군, 지독하게 꼬여 있지는 않아. 하긴, 그자들이 자기 일을 함부로 맡길 리 없지.

바냐 대공

그들은 우르수스에서 가장 냉철한 감시자야. 저울에 올려둘 만한 인물만 그들이 상대할 가치가 있지.

바냐 대공

내가 졌네, 젊은이. 자네의 속내가 전혀 보이지 않는군.

바냐 대공

여기에는 왜 온 건가?

켈시

……제가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바냐 대공

켈시, 난 고통스럽게 죽게 되는 건가?

켈시

아뇨, 약물이 신경에 서서히 스며들 겁니다. 기절한 것처럼 잠들어 다시는 깨어나지 못할 거예요.

바냐 대공

……중병에 걸린 노인에게는 자비로운 일이로군.

바냐 대공

고맙네.

켈시

……

바냐 대공

참…… 의사인가, 아니면 과학자인가?

바냐 대공

빛나는 눈동자를 지녔나? 손가락에 약물의 흔적이 남아있는 건 아닌가?

바냐 대공

당신……!

바냐 대공

……자, 잠깐. 혹시…… 체르노보그 사건 때문에 온 건가?

바냐 대공

켈시…… 켈시…… 그날 불길 속에서 숨을 거둔 소장도 이 이름이었던 것 같은데……

켈시

희생자들의 이름을 다 기억하셨다면 저는 우르수스의 법망을 피할 수 없었을 것 같네요.

바냐 대공

아…… 그래, 자네였군. 자네는 켈시야……

바냐 대공

대단하기도 하지…… 비밀경찰을 속이고, 본명으로 여기까지 들어오다니……

바냐 대공

어떻게 한 거지?

켈시

방법은 언제나 많습니다, 대공님.

바냐 대공

내가 죽기를 원하는 자도 그렇지 않은 자도 있겠지만, 나는 틀림없이…… 하지만 자네가 그냥 과학자라면 이렇게…… 쉽게 속아서는 안 되네.

바냐 대공

아…… 혹시 누군가 자네를 매수한 건가? 자네의 복수심을 이용해 날 죽이려는 건가?

켈시

말씀드릴 필요는 없을 것 같군요, 각하.

켈시

약물을 주사하겠습니다.

바냐 대공

후, 사형을 언도하는 건가? 좋아, 지금처럼 괴로울 바에야 그게 나을지도 몰라……

바냐 대공

윽……

바냐 대공

……

켈시

끝났습니다, 각하.

바냐 대공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가?

켈시

15분입니다, 각하.

바냐 대공

……알려 주게, 젊은이.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은 아름다운가?


[CG: avg_ac18_4]
켈시

대지에 피어난 새싹을 햇빛이 비추고 있습니다. 희망을 선사해 주고 있군요.

바냐 대공

아름다운가?

켈시

네, 웅장한 아름다움입니다. 우르수스에 비하면 시시하기 짝이 없겠지만요.

바냐 대공

……후, 젊은 사람들은 역시 말주변이 뛰어나군…… 그 풍경을…… 볼 수 있는 우르수스인이 얼마나 될는지……

바냐 대공

참…… 꽃, 내 꽃은 어떻게 됐나? 씨앗을 뿌렸었는데…… 싹을 틔워 봉오리를 맺었나? 망가진 두 눈이 꽃이 만개할 때까지 버티지 못한 게 아쉽네만……

켈시

지금 상태로는 불행히도……

켈시

제국의 겨울은 식물이 자라기에는 적합한 환경은 아닌 것 같습니다.

바냐 대공

아…… 여기서는 필 수 없는 건가?

켈시

기나긴 겨울 동안 뭘 심으셨나요?

바냐 대공

젊은 시절에…… 카시미어와의 전투에 참여한 적 있었지. 자네도 전쟁을 겪은 적 있나, 켈시?

켈시

……

바냐 대공

한 마디로 엉망진창이었어. 첫 포성이 울린 지 십여 분 만에 대열과 전장이 의미를 잃었거든.

바냐 대공

기사들의 공격으로 다리를 다치고, 머리를 얻어맞았지. 투구를 벗어 던지고 나는 죽기 살기로…… 꽃밭으로 기어갔네.

바냐 대공

그곳에서 정신을 잃은 날 지원군이 구조해 줬어. 희미한 의식 중에도 그 꽃을 기억하고 있다네.

켈시

……파인릴리.

바냐 대공

맞아…… 전쟁이 끝난 후 사람을 시켜 변경에서 씨앗을 가져왔네. 꽃의 카시미어식 학명이 마음에 들지 않아 이름을 새로 지어줬지.

바냐 대공

꽃이 무척 마음에 들어, 내 도시에서는 도시를 상징하는 꽃으로 삼았지. 우르수스의 땅은…… 카시미어보다는 꽃을 심기에 적합하거든.

바냐 대공

……아내는…… 무척 열심히 꽃을 돌봤지.

바냐 대공

그런데…… 끝내 흙을 뚫고 나오진 못했군.

켈시

봄이 오려면 아직 이르니까요.

바냐 대공

하아…… 나는 우르수스의 땅을 사랑한다네…… 다양한 희망의 씨앗을 뿌릴 수 있거든.

켈시

빈민과 감염자들이 거름이 되었죠.

바냐 대공

그로 인해 저지른 온갖 죄악을 부정하진 않겠네. 그렇다고 해도 땅은 모든 걸 받아주니까…… 으음, 슬슬 피곤해지는군……

켈시

그다지 설득력 있는 변명은 아닌 것 같군요.

바냐 대공

변명? 그렇지 않네, 젊은이…… 용서 같은 걸 바라는 게 아냐. 그럴 필요도 없지……

바냐 대공

다만, 삶의 마지막 순간에서야…… 깨달은 것 같네…… 그 의미를…… 사실은……

바냐 대공

파인릴리……

바냐 대공

다시 한번…… 보고 싶군……

바냐 대공

……그만 가게, 젊은이.

바냐 대공

햇빛이…… 무척 따뜻하군…… 다시, 다시 한번 더 볼 수……

바냐 대공

후우……

켈시

삶의 마지막 순간에 자신을 용서할 자격도 당신에겐 없는 것 같군요.

켈시

(우르수스어) 우르수스가 당신을 잊기 바랍니다, 대공님.

바냐 대공

(우르수스어) ……우르수스…… 나의……

바냐 대공

……조국……


켈시

……대공께서 잠이 드셨어요.

우르수스 군관

……보고할 필요 없다. 30분 뒤에 들어가도 된다는 명령을 받았으니까.

우르수스 군관

참, 대공과는 고향이 같다지?

우르수스 군관

그쪽 여자들이 요양원에 들어오려고 애쓰는 이유가, 대단한 양반들을 만나기 위해서라던데, 진짠가?

우르수스 군관

그래서 목적은 이뤘고? 그 멍청한 표정은 뭐야? 내가 신발이라도 닦아줄까?

켈시

아, 아니에요…… 거슬리셨다면 죄송합니다…… 그만 가 보겠습니다……

우르수스 군관

쯧, 한심하긴……


릴리아

……과도는 녹이 슬기 쉬워 감염증을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저희가 주의를 기울여 지켜볼 테니 안심하세요.

위트

……알겠습니다. 그럼 수고해주세요.

위트

아무래도 제 친구의 피 끓는 열정에 시간을 꽤나 허비한 것 같군요……

위트

저분이 의무실을 떠날 때 대신 전해주세요. 그의 뜨거운 열정이 우리 가슴에 불꽃을 피워줬다고…… 그리고 그의 친구 이슬라므 위트를 믿어달라고요.

위트

그럼 저는 전달자와 함께 출발해야겠군요.

릴리아

조심히 가세요.

켈시

……

위트

……

릴리아

(켈시 소장님……!)

켈시

(당장 출발하자.)

켈시

(재무대신 때문에 관료의 부하들이 많이 위축됐을 거야. 우리에겐 가장 든든한 보호막이 되어줄 거야.)

릴리아

(그 사람은…… 죽었나요?)

켈시

(예상보다 빨리 약효가 돌기 시작했어. 오래 버티지 못할 거야.)

릴리아

(많은 사람이 그의 죽음을 이용하려 했죠. 어쩌면 그들의 싸움이 우리에겐 기회일지도 몰라요.)

켈시

(출발하자.)

릴리아

켈시 소장님……

릴리아

고마워요.

릴리아

저를…… 아니, 우리를 위해 모든 걸 끝내줬어요.

켈시

아직 끝나지 않았어.

켈시

우르수스가 어떤 모습으로 변하든…… 우린 언젠가 이 제국을 다시 마주할 날이 올지도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