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D-8폭설 전야
빅토리아 저택에는 눈보라가 점점 더 심해졌다. 묵묵히 빅토리아의 평화를 지키던 하이디와 그녀의 아버지 톰슨. 하이디와 켈시가 대화를 나누던 중, 우르수스의 의지를 담은 검은 눈이 조용히 내리기 시작했다.
13년 전
8:09 P.M. 날씨/눈
빅토리아 변경 자치구, 토론, 빈센트 저택
위대한 도시죠. 빅토리아인이라면 시간을 쪼개서라도 그 위대한 도시를 방문해야 합니다.
그리 말씀하시는 걸 보니, 존경스러운 공작님들께서 여전히 결론을 내리지 못하셨나 보군요.
네, 그렇답니다. 런디니움은 여전히 '주인 없는' 도시죠.
노르망디 공작님과 함께 런디니움을 여행하신 건가요?
아쉽지만 대공작께서 런디니움에 들어가는 것은 법적으로 금지되었죠. 신사적인 공작님께서 당연히 금지된 일을 하지 않으시겠죠. 저희는 런디니움 교외의 함선에서 함께 만찬을 가진 게 고작이었답니다.
공작님께선 어떤 분이신가요?
으음…… 공작님은 다정하면서도 고상한 귀족이시죠. 경제와 정치에 독특한 견해를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음악에도 일가견이 있다고 하더군요. 그분의 개인 수집실에서 예술에 대한 남다른 사랑을 느낄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렇게 많은 영웅 덕분에 빅토리아가 여전히 명성을 이어올 수 있었습니다.
최고 통치자가 없는 빅토리아는, 십여 년 동안 안정세를 유지해 왔어.
그러나 실제로는 몇몇 대공작들이 뒤에서 충돌하면서 치열하게 싸웠죠. 심지어……
식중독이나 사냥 같은 뜻밖의 사고에 쉽게 목숨을 잃은 귀족이 그렇게 많았다면 빅토리아의 귀족 통치는 일찌감치 무너져 내렸을 거예요.
3년 전, 네 아버지가 직접 겪을 뻔했지.
……맞아요.
다리를 다쳤어. 그건 사실이야.
학술계에서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은 귀족이, 연회가 끝난 후에 아버지를 습격했어요.
잘도 숨겼네.
아버지께선 낌새를 알아차리셨지만 이 일 때문에 정보 전달이 지연되는 걸 원치 않으셨어요.
이 저택에 톰슨의 사람이 몇이나 있지?
아주 많아요, 방금 이야기를 나누던 분들이 그렇죠…… 오늘 밤 전까지만 해도 모두 아버지의 별장에 얼굴을 비췄던 분들이에요.
……리차드가 네 아버지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던데.
후후후…… 리차드 아저씨의 이야기 중 절반은 아마 진심일 걸요…… 아버지랑 오랫동안 신경전을 벌여왔죠……
그래도 많은 사람이 톰슨 가에 몰려든 걸 보면, 너의 아버지는 분명 좋은 리더일 거다.
당신의 가르침 덕분이에요, 켈시.
누가 생각이나 했을까요? 빅토리아를 찾은 라테라노 수도사가 우리가 가장 믿고 따르는 멘토가 될 줄을……
우리의 목적은 같아.
켈시, 그들도, 우리도 모두 무사하겠죠?
……하이디.
너의 눈으로 봐. 더는 문명의 허상에 두 눈이 가려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면, 이 땅에 발을 디딜 결심이 섰다면…… 스스로 봐야 해.
위로의 말은 아무 의미가 없어. 너는 성장할 거니까.
그런데 촌뜨기 귀족과 무뢰배들 사이에서 불쾌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머! 기분이 상하신 건가요, 백작님?
예…… 아시다시피 여러 대공작님들의 이해와 협조로 지금의 평화와 번영을 일굴 수 있었죠.
그래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빅토리아의 왕좌가 오랫동안 비어져 있었다는 걸 컬럼비아의 무식한 역도들조차 안다는 겁니다.
그게 무슨 상관이랍니까? 오히려…… 우리가 우리만의 방식으로 강해지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옳은 지적입니다, 리차드 씨. 그런데 저마다의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순진하게도 한목소리로 황당한 질문을 던지고 있지요……
빅토리아에 새로운 왕이 정말 필요하냐고 묻더군요.
사람들은 빈센트 아저씨가 나약하다고 해요……
변경을 차지했는데도 현실에만 안주하고 있어요…… 우리에게 유리한 판을 짤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데, 아저씨는 그저 저택에서 파티만 여시죠.
이번 런디니움행도 실질적인 성과는 전혀 없었어요.
네 아버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 같아. 톰슨은 급진파에 휘둘릴 만큼 어리석지 않으니까.
하지만 어른들은 항상 아버지에게 그렇게 말하는걸요.
대공작을 접견할 수 있는 귀족은, 멍청한 귀족이 아니지.
노르망디 공작이 빈센트 백작을 위협하거나 회유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나?
광활한 변경 지역인 토룬 카운티에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은 어떠한 거대 세력의 영향권에도 속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지.
……빈센트 아저씨는……
맨날 음주가무에만 빠진 것 같아 보이지만, 백작은 사실 토룬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어. 그 평화는……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긴 하지만.
하지만 적당한 오만함과 평범함이 백작의 생각을 가려주고 있어. 그의 진짜 속마음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은 몇 없을 거다.
용기와 지혜, 안목이 없는 백작을 톰슨이 신뢰할 리 없어. 두 사람 사이가 소원해지는 듯해도 결국에는 같은 목표를 좇고 있지.
……후후,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기쁘네요.
켈시, 편지 안 읽어보실 건가요?
런디니움에서 토룬까지, 빅토리아의 반 이상을 지나왔어.
이 편지가 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의 손을 거쳤을까? 그들이 참여한 일의 전모를 아는 사람이 또 몇이나 될까?
무척 많을 거예요……
노동자, 신문 파는 아이들, 팝콘 장수와 공원의 정원사들은 편지에 적혀 있는 내용을 알지 못해. 심지어 이 편지가 최종적으로 누구의 손에 넘어갈지조차 잘 모르지……
하지만 이제 이 편지는 톰슨을 거쳐, 다시 내게 전해졌어.
그러니 걱정할 것 없어.
……그렇네요……
그런데 다른 한 통은요? '카즈델'의……
……살카즈의 전달자가 마지막으로 톰슨에게 직접 건네줬어.
전달자에게 톰슨의 연락처를 알려 주긴 했지만, 원래대로면 내게 직접 전해줘야 했어.
그렇군요…… 하지만 그 살카즈가 빅토리아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살카즈 영웅의 죽음을 어떻게 추모해야 하는지 아버지는 알지 못하세요. 그래서 저희 풍습대로 시신을 화장한 후에 이동도시의 항로에 뿌리셨죠.
……그의 이름은 밝힐 수 없지만, 적어도 그는 전달자로서의 사명을 다했으니, 나는 그의 이야기를 그의 고향으로 가져갈 거다.
그는 잊혀지지 않을 거야.
……켈시는 항상 모든 사람을 그렇게 대하나요?
왜 갑자기 그런 걸 묻는 거지?
아뇨, 그게 그러니까…… 으음……
엣취!
앗! 죄, 죄송해요. 실례했어요……!
눈이 더 내릴 것 같은데 이만 들어갈까?
이번 파티가 끝난 뒤에 톰슨을 방문할 생각이야.
아버지께서 무척 기뻐하실 거예요.
……
팔짱을 껴도 될까요? 그러면 의심을 피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럴 필요가 있다고 느낀다면.
네…… 헤헤, 저보다 더 크시네요.
하이디는 아직 자라는 중이잖아.
켈시, 창밖을 좀 보세요! 눈이 펑펑 내려요, 이런 함박눈은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아요.
정말 그렇네. 눈보라가 치겠어.
하이디는 생각한다. 대체 얼마나 많은 구름을 부숴야 이렇게 많은 눈이 쏟아져 내릴까?
흰 눈송이가 사방에서 쏟아지더니, 바람을 타고 먼 곳으로 날아갔다.
주황빛 등불이 닿지 못하는 곳에는 이미 안개가 자욱이 끼어 도시를 뒤덮고 있었다.
오늘 밤은 달빛도, 별빛도 없다.
검은 파도가 밀려오려 하고 있다.
스으으으…… 후우우우……
켈시?
……
……
……검은 눈.
엣? 전 안 보이는데……
하이디, 가서 모두에게 전해. 파티 현장을 은밀히 통제하라고.
한 시간 정도 걸릴 것 같아. 누구도…… 정원에 접근해선 안 돼.
알겠어요…… 그런데 왜 갑자기 그러는 거죠?
적이다.
무슨……?
변경 지역이라고 해도 여긴 빅토리아 백작의 저택인데 누가 감히……
……하이디, 내가 저택으로 돌아오지 않거든 네 아버지와 같이 진실을 묻어버리렴.
그리고 절대 더 깊게 캐려 하지 말고.
하지만……
이건 경고이자, 명령이야.
……!!
조심해.
……
사미와 우르수스 북쪽, 그리고 사르곤 남쪽…… 인간의 발길이 아직 닫지 않은 땅……
데몬, 페이…… 녀석들은 평범한 생물인지조차 알 수 없지만, 그들의 역사는 어느 나라보다 더 오래됐지.
인간은 오랫동안 그 존재들에 맞서 왔어. 이건 분명히 주목할만한 수많은 명제 중 하나야.
……지금까지도 말이야.
인간은 충분히 자신의 나라를 다스릴 수 있어.
고대 사르곤 왕과 강대한 케식은 손을 잡았고, 나이츠모라의 카간은 인류 문명이 아직 탐색해 보지 못한 땅을 정복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위대한 결과를 가져왔지. 인간이 아닌 위협이 더는 사르곤 문명의 땅에 발을 들이지 못했으니까.
사미는 수많은 주술과 희생을 거쳐 제사장을 만들었어. 그들은 몇 대째 계승되었지만, 국경 밖의 적을 대항하는 과정에서 모조리 자아를 잃고 말았지.
그리고 우르수스…… 너희들은 소수지만 강력한 정예 부대를 앞세워 그들을 무너뜨렸어. 중무장한 웬디고나 전투에 특화된 정예 캐스터로 말이야.
그런데 제국의 야심은 확실히 대단하더군. 너희들은 그들을 완전히 무너뜨린 것도 모자라……
인간이 아닌 존재가 남긴 힘의 조각을 이용했어.
……모습을 드러내라.
우르수스의 의지가 널 이곳으로 이끌었다.
그렇다고 빅토리아의 막강한 힘을 너무 무시하는 건 아닌가? 데몬의 길을 끌고 있는 네가, 자신의 직책을 망각한 건 아닌가?
설마 데몬에게 삼켜 이성마저 잃은 건 아니겠지, 근위병?
어떤 것이 발을 내딛자, 등불조차 밝히지 못한 어둠이 흔들렸다.
네게서 두려움의 냄새가 느껴진다, 반역자.
날 찾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구나.
……반란의 여파만 아니었어도 주인을 해친 죄인을 이미 벌하러 왔을 거다.
무능한 자들이 너를 놓친 게 내겐 수치였다. 그들은 모두 형에 처해졌지.
한 가지 사실을 다시 한번 일깨워 주지. 눈보라가 도시를 뒤덮을 순 있어도 한 근위병의 흔적은 지울 수 없어.
너는 지금 빅토리아에 있고, 내 뒤에 백여 미터 떨어진 곳은 빅토리아 백작의 저택이다.
너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알고 있기는 한 거야……?
……결과?
알량한 위협 따윈 집어치워. 내 두 발이 서 있는 곳이 곧 우르수스의 위대한 땅이다.
네가 '데몬'이라는 단어를 꺼내기 전까지 네겐 나와 대화할 자격도 없었다, 반역자. 하지만 이제부터, 네가 어떻게 가장 어두운 비밀을 알고 있는지 말하게 될 거다.
네가 '데몬'에 대해 뭔가 좀 안다고 나와 대화의 여지가 생겼다고 착각하는 건 아닌가? 너는 우르수스 대공을 시해한 죄를 지었고, 또 어둠의 비밀도 알고 있지.
스으으으…… 그 모든 죄행은 천만번을 죽어도 마땅하다.
……아무래도 말이 잘 안 통하는 것 같군.
하지만 이건…… 현 상황에 대한 네 평가에 불과해.
이단 녀석, 네 졸개를 불러내라!
날 속일 순 없을 거다!
……Mon3tr.
크르르르르!!!!!
Mon3tr, 침착해.
상대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야.
정원에 숨겨놓은…… 장치? 아니…… 저건, 생물 그 자체로군…… 스으으으……
너는 '데몬'을 알고 있을뿐더러, 우르수스의 가장 깊은 지식마저 모르는 괴물을 두고 있었군……
어쩌면 네가 지금까지 범한 죄행은 내 예상을 훌쩍 뛰어넘었을지도 모르겠군.
어쩌면 내가 황제의 근위병을 놀라게 한 건지도 모르겠네.
스으으으……
부인하지 않겠다, 반역자.
내게 가장 흥미로운 것은, 대체 무엇 때문에 네놈이 조국을 배신했는지다…… 아니, 아니지. 어쩌면 급하게 조사하느라 네 정체를 밝혀내지 못했을 수도 있겠군.
아무래도 그런 것 같군. 사미로 달아난 죄인들에 비하면 너는 확실히 한 수 위다.
그렇다고 오해하진 마라…… 널 죽이는 건 여전히 식은 죽 먹기니까.
……주변 공간을 침식하고 있는 건가?
네가 굳이 알려줄 필요는 없다.
Mon3tr!
(구슬프게 울부짖으며) 크르르……
스으으으…… 이토록 단단하다니.
네 몸뚱이도 이렇게 단단하다면 확실히 어찌할 도리가 없겠군.
Mon3tr, 돌아와. 너무 쫓지 마라.
저 검은 연기를 피해. 저건 연기가 아니야.
이미 아츠의 상식을 뛰어넘었어…… 아무래도 내가 오랫동안 제국의 칼날을 잊고 있었나 보네. 이렇게나 빨리 성장할 줄이야.
……
우리의 비밀을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냐……?
고대 의식이라, 그래…… 자칭 깨달은 자들의 광기 어린 행동이야말로 데몬이라고 할 수 있겠지.
너……
넌 세팅선 협곡의 생존자로군.
스으으으……!
제국의 의지가 여러 모습을 갖고 있는 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확실히 너는 뭔가 좀 달라. 적어도 젊지는 않지.
근위병, 우리끼리 목숨 걸고 싸울 필요 없어. 너도 잘 알겠지만, 내가 유일하게 한 일은 너희들이 해야 했지만 하지 못했던 것이야.
권력의 귀속이 누구한테 있는지 착각하지 마라, 반역자. 네가 언제부터 디에티 그라이퍼부르크의 법과 권위를 대표하게 됐지?
만약 네가 반란을 처음부터 겪었다면 잘 알고 있을 거다, 근위병. 제국의 흥망성쇠가 언제 존엄과 체면에 흔들린 적 있었지?
……
그렇다면 선황이 한순간이라도…… 빅토리아를 진심으로 경멸한 적 있다는 거냐?
……
아무래도 널 과소평가한 것 같군, 반역자.
마지막 기회다. 네가 아는 비밀을 말하면 명예로운 죽음을 주겠다.
아쉽지만 자신의 의지와 무관한 죽음에 명예 따윈 존재하지 않아.
Mon3tr.
(신난 듯 울부짖으며) 크르르르르!
스으으으…… 후우우우……
살기가 부풀어 올랐다. '황제의 칼날'은 우르수스의 의지를 이행하고자, 검을 뽑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