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D-3선인장 언덕
13년 전, 빅토리아의 토룬 카운티. 백작의 저택에 몰래 숨어들던 어린 하이디는 저녁 파티에 참가한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던 빈센트 백작에게 들키고 만다.
13년 전
8:09 P.M. 날씨/눈
빅토리아 변경 자치구, 토룬 카운티, 빈센트 저택
이 얼마나 아름다운 눈이 내리는 밤인가요. 신사 숙녀 여러분, 반갑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하인들이 눈을 털어 드리면 난로 쪽으로 오셔서 몸이라도 좀 녹이시길 바랍니다.
반갑습니다, 백작님. 정말 멋진 파티로군요.
어서 오십시오, 다이애나 여사님. 신년 전날 밤에 여사님을 뵐 수 있다니 영광입니다.
저야 말로요, 백작님. 카시미어에 갔다가 조그만 선물을 준비했답니다.
오오, 아름다운 펜던트군요! 감사합니다, 저 대신 부군께 안부 전해 주십시오. 눈꽃에 여사님의 미모가 가려져선 안 되니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호홋, 그리 말씀해 주시니 기분 좋은걸요.
오오, 이게 누구십니까! '바론 남작' 아니십니까!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낄 자리는 아닌 것 같지만 염치를 불구하고 왔습니다!
그런 말씀이 어디 있습니까? 저희 모두 남작님을 존경하고 있답니다. 저희가 누구 덕분에 풍족하게 지내는데요, 하하하!
백작님도 참…… 내년 수확 철에는 저희 집에 와 주십시오. 토룬에서 가장 큰 풍차와 밀가루 향에 시간 가는 줄 모르실 겁니다.
가다마다요. 이번 눈보라가 그치고 나면 분명 풍년이 들 겁니다.
말씀 감사합니다.
어서 들어와서 몸 좀 녹이세요. 저녁에 남작님이 좋아하시는 밀가루…… 아, 물론 가장 곱고 향이 좋은 최고급 밀가루로 구운 빵을 내오겠습니다. 모두 남작님의 농장에서 기른 거랍니다.
그런데 백작님은 안 들어가시는 겁니까? 이제 곧 파티가 시작될 텐데요…… 남은 손님들은 하인들에게 맡기시지요.
맞는 말씀입니다만 괜찮습니다. 하나같이 모두 귀한 분들이니 제가 직접 맞이해야죠. 신분과 지위에 상관없이 말입니다.
토룬은 정말 아름다운 곳이지요, 안 그렇습니까?
후후, 정말이지 백작님도……
아, 이게 누구십니까! 애리조나 부부, 위대한 등대 수호자, 그리고…… 으음?
호오……
제가 가장 존경해마지 않는 동문이자, 타고난 연설가 톰슨 씨께서 건강이 좋지 않다고 들었습니다. 눈보라를 뚫고 파티에 와달라고 차마 말씀드릴 수 없어서 전달자를 보내 안부를 전했는데……
그런데 어째…… 몰래 잠입한 귀여운 전달자를 발견한 것 같습니다만!
후후후!
앗!
호오, 하이디! 오랜만이로구나!
빈센트 아저씨, 머리에 손대지 마! 하는 데 엄청 오래 걸렸다고!
그래그래. 그나저나 우리 꼬마 아가씨가 이제 어엿한 숙녀가 되었구나.
그런데! 왜 네 아버지는 네가 올 거라고 말씀해 주지 않으신 거지? 솔직히 말해보렴, 몰래 온 거니?
게다가 이 옷차림은 뭐지? 네 아버지가 보면 또 한바탕 잔소리를 퍼부으실 텐데.
그 잔소리 듣기 싫어서 몰래 빠져나온 거야!
오늘 아저씨가 사교계 유명 인사를 초대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가만히 있을 수 있어야지! 게다가 아빠는 평소에 공부만 하지 말고 안목도 좀 키우라고 하셨으니까, 이번이 절호의 기회잖아!
멋진 만남을 기대하면서 온 건 아니고? 네가 요새 저속한 로맨스 소설에 빠져서 아버지가 골치 아프다고 하던데.
아, 아니야! 내가 세상 물정 모르는 철부지도 아니고…… 아하하, 하하……
네 아버지 말이 맞아. 로맨스도 좋지만 소비를 목적으로 현실을 외면한 채 독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으려고 소재의 가치를 착취하는 글은, 전혀 도움이 안 돼.
그 점에 관해선, 토룬 카운티 모두가 네 아버지한테 배워야 할 거다.
아, 아저씨…… 민망하니까 그런 이야기 좀 그만해……
하여간 아빠도 참…… 젊었을 땐 그렇게 뭐라 하더니, 결국엔 자기도 상인이, 그것도 돈을 많~이 버는 상인이 되었잖아…… 학교 선배들이 그 일로 자꾸 놀려서 짜증 나 죽겠어.
먹고 사느라 그런 거지. 젊었을 땐 재능을 펼칠 수 없다며 종종 불만을 터뜨리곤 했지만 결국에는 너희 두 모녀를 위해 단념했으니까. 그나저나 건강은 좀 어떠시니?
알잖아, 지병 있는 거…… 겨울이 지나면 또 괜찮아지실 거야.
그래서 부모님이 잠시 한눈을 판 사이에, 네 어머니의 옷을 훔쳐 입고 내 파티까지 찾아온 거야?
뭐 그렇게 된 거지…… 앗, 그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배움을 목적으로 아버지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뿐이라구.
하이디……
헤헤, 못 본 척해 줄 거지?
이번엔 정도가 좀 심한 것 같구나. 눈이 이렇게 잔뜩 오는데 무슨 사고라도 생기면 네 아버지를 무슨 면목으로 볼 수 있겠니?
아하하…… 그런데 있잖아 아저씨, 어쩌지? 지금 너무 늦어서 돌아갈 마차도 찾지 못할 것 같은데?
하여간 너도…… 빨리 들어와. 괜히 밖에 있다 감기 걸리지 말고.
앗싸! 역시 아저씨가 최고야!
음, 그런데 여기서 누구를 기다리는 거야? 아저씨가 눈사람이 될 정도로 중요한 손님이 또 있는 거야?
아, 실력 좋은 라테라노의 수도사란다.
작년에 네 작은 어머니가 무슨 병에 걸렸는지 열이 무척 심했는데 그분 덕분에 병이 나았지.
그 뒤로 종종 연락하는 친구가 되었지 뭐냐. 그 사람은 의술은 물론 여러 분야에서 남다른 실력을 지니고 있지, 정말 놀라울 따름이야.
헤에…… 아저씨가 그렇게 칭찬할 정도라면 엄청 대단한 사람이겠네?
물론이지! 그런 사람이 빈센트 가문을 위해 일해준다면 이곳도 더욱 발전할 수 있을 텐데.
원래는 런디니움 여행에 그분께 동행해 달라고 부탁하려던 거였단다. 네 작은 어머니 말동무도 해 드리고…… 다만 공교롭게도 볼일이 있어서 집을 비웠다지 뭐냐.
그래서 오늘 꼭 이 뛰어난 인재를 모두에게 소개하겠노라 마음먹은 거지.
아저씨…… 라테라노의 수도사님은 신사야? 아니면 예의 바른 산크타? 나이는?
요 녀석, 이러고도 딴마음이 없다고?
그냥 물어보는 거거든!
신사도 산크타도 아닌, 멋진 레이디인데 아쉬워서 어떡하지? 드물긴 하지만 필라인인 것 같더구나. 그래서 더 그 사람이 마음에 든단다.
크흠흠……
아, 아저씨~ 그 말은 못 들은 걸로 할게. 작은어머니한테는 절대 비밀이니까 걱정하지 마.
무슨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거냐! 네 아버지한테 단단히 가르치라고 해야겠구나!
죄송합니다, 빈센트 님.
제가 늦었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