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ST-3일문지답
로도스 아일랜드에 도착한 후 과거의 어떤 일을 떠올린 시. 하지만 지금 그녀가 가장 신경이 쓰이는 것은 '켈시'와 '박사'의 신분이었는데……
……가을이 왔구나.
산사 열매가 달게 익었겠지. 애들은 산사 열매를 무척이나 좋아했었지.
......
……또 하루가 시작됐네.
앞으로 얼마나 더 살 수 있을까?
눈을 감으면, 과거의 일들이 떠올라……
……밤새 잠을 설친다.
……시?
당신이 여길 어떻게……
조금도 놀라지 않은 것 같네.
이 나이쯤 되면, 놀랄 일이 많지 않으니…… 콜록콜록, 그래도 당신이랑 비교할 순 없지만.
우리…… 얼마 만에 만나는 거더라?
기억 안 나, 몇십 년 됐겠지.
……역시 당신이야, 시 다워.
별일이네, 나를 다 기억하다니.
네가 내 그림 속에서 평생을 보내지 않았다는 걸 어떻게 알 수 있지?
왜냐면 말도 안 되는 거니까.
꽤나 자신 있나 보네?
시, 당신은 날 구해줬고, 난 당신의 그림 속에서 그렇게 오래 살았으니…… 분명히 구별할 수 있지.
콜록콜록……
이건 나와 당신이 했던 내기야. 언젠가 당신의 그림과 당신의 그 세상, 그리고 당신을 간파한다는 것에 내기를 걸었지.
그런데 그날 헤어진 후, 당신은 다시 나를 찾아오지 않았어…… 난 당신과 이야기할 기회가…… 다시는 없을 줄 알았어.
원래…… 나랑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 자체가 거의 드물거든.
……기나 긴 시간 동안 난 그 시절이 자주 떠올랐어. 재앙, 기근, 이재민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그 정자…… 그 평범했던 정자 말이야.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어…… 콜록콜록……
나는 너를 훌륭한 화가라고 생각했었는데, 넌 평생 붓을 들지 않았지. 내 가르침을 헛되게 하는 건 아닐까?
화가, 화가…… 그림의 대가…… 당신을 만난 이후로 자신을 화가라 부를 사람이 과연 있기나 할까?
간혹 좀 있기는 하지만 모두…… 기인들이지.
……그럼 난 당신을 실망하게 한 걸까?
글쎄.
어쩌면…… 너야말로 유일하게 날 놀라게 한 사람일지도 몰라.
……
……
오랜만에 만났는데…… 딱히 할 말이 없는 것 같네. 난 이미 늙어서 일생을 거의 마쳤는데, 당신은 아직도 그때 그대로야……
하고 싶은 말 있어?
없어…… 난…… 마음이 편해.
당신은 내 목숨을 구해줬고, 내게 살아남을 기회를 주었어…… 그리고 이 마지막 순간에도 이렇게 만나러 와주고.
난 충분히 만족해. 시, 얼굴 좀 보자…… 여전히 그대로네.
네 눈이……
시, 난 늙었어. 병마에 오랫동안 시달렸지……
이제 와서 묻는 것도 좀 그렇지만…… 아는 사람들 하나씩 다 떠나보내고 홀로 남아 있는 거, 외롭고 쓸쓸하지 않아?
바보 같은 소리를.
그럼 넌 어떤 생각을 해?
가끔 서운할 때도 있고…… 가끔은 감회가 새롭기도 해.
……드디어 솔직해졌네.
전에 얘기했던…… 재앙으로 파괴된 내 고향, 기억해?
지금 돌이켜보면 이미 너무 멀어졌어…… 그곳은 내 추억의 그림자야. 지금은 내 뒤가 아닌 아득히 먼 저편에 있지만……
……
난…… 혼자 붓을 든 적이 없었어.
만약 내가 그림을 그린다면, 내가 유일하게 그릴 수 있는 건, 콜록콜록…… 내 고향뿐일 테니까.
넌 분명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할 거야.
맞아, 생각해 내려고 해도, '파산 마을'이란 이름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아.
좋은 추억이라고는 하나도 없지만, 늘 꿈에서 보여. 그것도 여러 개의…… 고향을. 사람은 평생에 걸쳐 도대체 어디로 돌아가고 싶은 걸까?
……
시……
응?
나 대신 파산 마을을 그려줄 수 있어?
집 옆에 전당포가 있었다는 것밖에 기억나지 않아. 전당포 주인장은 항상 깔끔한 옷차림에 매우 점잖아 보였어. 어렸을 땐 나도 그 주인장처럼 되고 싶었는데.
마을에는 그 움직이는 이상한 땅 따위는 없었고, 농지와 기와집이 제각기 흩어져 있었어. 마치 유채꽃밭처럼……
어쩌다 멀리까지 걸어가면, 멀리 있는 산이 보였지……
그 산에서…… 길을 잃는 꿈을 자주 꿨어. 그곳에는 무서운 괴물들도 있었고…… 재앙의 구름이 산꼭대기에서 떠올랐어…… 이게 내가 기억하는 가장 정확한 풍경이야.
내가 더 말하지 않아도…… 당신은 느낄 수 있겠지?
물론. 하나도 빠뜨리지 않았어.
난 세월이 젊었을 때로 멈췄으면 좋겠어…… 우리는 산 위에 살고, 난 당신에게 그림을 배우고, 가끔은 먹도 갈아주고……
……
시.
응.
당신은 수많은 기이한 일을 겪었고, 또 얼마나 많은 세상의 변천을 보았을까……
그 눈으로 나를 좀 봐줘. 당신이 보기엔…… 콜록콜록……
내 일생은 과연…… 행복했을까?
……
오~ 깼어?
여기는…… 로도스 아일랜드……
알 것 같네, 네가 왜 날 여기로 데리고 왔는지.
……얘네는 다 뭐하는 애들이야?
마작 한 판 땡길래? 한 자리 비는데.
너…… 빨리 꺼져, 난 안 가.
얘 좀 봐? 어젠 그렇게 재밌다고 영화를 밤새도록 보더니, 지금은 왜 또 시크한 척이야?
영화 좋아하면 잘됐네. 나한테 수집품이 좀 있거든.
……그게 뭐야? 조잡한 표지에, 쓸데없이 긴 타이틀…… 보기만 해도 역겨워. 빨리 치워!
거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야?!
작전 파일을 나도 많이 봤는데…… 이 박사라는 사람은 대체 누구지?
으엣?! 몰래 가져온 거야? 클로저한테 안 걸렸지?
그 젊은 살카즈 말이야? 날 별로 신경 쓰지 않길래 그냥 지나갔지.
어 뭐야…… 왜……? 그 녀석, 혹시 나한테만 그러는 건가?
……로도스 아일랜드.
감찰사는 로도스 아일랜드와 어떤 관계야?
그건 또 다른 일이니까 괜찮아, 걱정하지 마. 레이즈는 변방으로 좌천돼서 이쪽으론 거의 안 오니까.
왜? 신경 쓰여? 거기 관리들이 널 귀찮게 했어?
흥, 감찰사 따윈 상관없는데, 뇌법의 근원이 신경 쓰여…… 그 여자의 스승, 그리고 항상 우리를 노리는 늙은 무리들, 온통 귀찮은 녀석들뿐이야.
나만 안일한 거야? 걔가 내 그림에 불을 질러 내 눈앞에서 산천을 다 태워가면서까지 나를 혼내 주려고 했거든. 난 네가 아니잖아, 누굴 방해했는지도 모르고 호되게 당하기만 했으니.
난 걔가 짜증 나 죽겠었는데, 또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고.
하핫, 그런 일도 있었어?
……박사와 켈시가 어떤 사람인지 아직 알려주지 않았잖아. 그 둘이 네가 여기 있는 이유랑 관련 있는 거야?
그리고, 그 사람들은 지금 어디에 있지?
……알았어. 내가 다 알려줄게.
다 들으면…… 내가 왜 여기를 좋아하는지 알 수 있을 거야.